♥대청호에서 만나 사람들 따뜻한 만남의 뒤로 한 채
2005년 12월
언제나 든든한 동반자가 돼 주었던 등산화가 다 닳았다.
4년 정도는 신어야 하는데
겨우 2년이 지났건만 아쉽게도 이제 제 몫을 다했다면
헤어지자면 조른다,
하루만 더 애써달라고 다독이며 찬바람 부는 계곡으로 향한다.
옥천 금강휴게소 아래에서 금강을 따라가는
이 길은 언제나 설레게 한다,
그토록 험한 비포장도로 덜컹거림의 울림도 세월속으로 녹아
없어졌다.
높은자리 (고당리) 마을 입구를 지나고 원당교 합수머리에
이내 다다른다.
오른편의 물은 보은 마로면과 청산면 들판을 거쳐 온 물이다.
옛 적에는 이 합수머리 근처에는 천연기념물인 황쏘가리가 많이 있었다.
강변이 모래 보다는 큰 돌이 많아 서식환경에 알맞은 곳이었겠지만
현재의 상황은 알 수 없으니 아쉽다.
근처 원당마을 사람들이 밤에 정등을 들고 나와서 다슬기를 잡아
생계에 많은 보탬을 주던 곳이기도 하다.
이 원당교를 지나는 위치가 대청호 저수량이 만수위가 가까워 질 때
대청호의 최상류가 된다.
강물을 따라 잠시만 가면 왼편 잠수교와 함께 건너편 청마리가 나타난다.
충북 민속자료 제 1호인 탑신제당과 장승,솟대 등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조금 하류로 가면 하금리 이다.
여름철 하금리 모래사장은 어느 해수욕장 부럽지 않은 곳이다.
몇 해 전 부터는 외지인들의 방문이 부쩍 늘어났으나 뒷마무리는
언제나 마을 어르신들이 차지가 되니 필자는 언제나 죄인마냥
도망치듯 지나는 곳이다.
물 건너 더덕마을을 지나면 강물은 다시 휘돌아 잠수교(가덕교)를
거쳐 마묵골 앞을 천천히 흐른다.
오른편 가파른 경사를 깎아내어 만든 구간이 가장 험한 구간을 지나면
다시 포장도로를 만나면서 금강과는 잠시 헤어지게 된다.
옥박골 작은 고개를 넘어 지수리 넓은 들판이 끝나는 곳이 안남면 중심지이다.
면소재지 못 미처 에서 왼편 좁은 길로 들러서면 이름도 예쁜 종미리 이다.
마을 끝에 다다르면 이백 육십여 년 전 마을 아이들이 교육장소로
쓰였던 경율당이 쓸쓸하게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늘름한 소나무의 기상은 옛 모습 그대로다
멀리 독락정이 화답하여 보이지만
길이 없으니 면소재지를 경유해서 가야만 한다
독락정 앞에 올라서면 금강이 들어오고 나가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지만
또한 아쉽게도 길이 없으니 물따라 가는 것은 마음뿐이다.
길이 있다면 피실마을을 한걸음에 확인하고 싶다.
안남면 소재에서 북쪽 방향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중봉 조헌선생의 묘와 유허들이 잘 보존되고 있으며
선사시대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 고인돌과 선돌이 많아
금강변 안남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인포리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고개를 넘으면 안내면 삼거리 나타난다.
왼편 지방도를 따라가면 밤치를 넘고 가산천을 따라 내려가면
은운리 분저리를 거쳐 회남면에 다다르는 길이다
하지만 이 길은 비포장 험한 길이어서 날씨가 좋을 때에 가야한다.
더구나 용호리 막지리 등을 가는 길은 더욱 세심한 주의를 하여야 한다.
오늘은 인포리에서 좌회전하여 장계교를 건너자마자
국민관광단지 안에 이전한 청석교를 만나본다.
본래의 위치는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 현재 새로 놓은 다리 옆에
있었던 것이다.
통일신라시기에 만들어진 다리로 예로부터 대전~옥천간의 중요한
교통로의 구실을 담당하였던 다리이다.
증약역에는 찰방이 따로 근무하는 중요한 도로이었으니
오늘날 4번국도 경부고속철도,경부고속도로 등이 놓여진
역사의 연유이기도 한다.
◆연유~일의 까닭이나 이유
◆찰방~조선 시대, 각 도의 역참(驛站)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보던 종육품의 외직 문관 벼슬
◆역참~조선 시대, 관원이 공무로 다닐 때에 숙식을 제공하고
빈객(賓客)을 접대하기 위하여 각 주(州)와 현(縣)에 둔 객사
옥천군향토사료관 입구에 인위적인 물을 조성하여 높게
놓인 탓을 낯설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가만히 만져보면 약 천 사백 년의 순결이 들릴지도 모를 일이다.
향토사료관에 들어서 오른편 전시실을 살펴보면 금강주변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으나 찾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아 아쉬울 뿐이다.
잠시 쉬어서 되돌아 나와 37번 국도를 다라 소정리를 지나면서
호수 건너 막지리의 가을을 회상하다가 석호리 입구를 지나쳤다.
숙을 안고 나왔던 마지막 대청호의 만남이다.
앞르론 숙제 없이 대청호를 바라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약간은 흥분이 된다.
필자는 지난 해 대청호 수면을 따라 접근이 가능한 구간을 걸어 보았다.
찬바람이 몹시 힘들게도 하였고
때로는 배 삯을 지불하고 마을의 배를 이용하여 보기도 하였다.
실제 걸어보면 지도상의 거리 곱절 이상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 차로 이동하며 홅어 본 이 구간은 아직 걸어보지 못한 구간이다.
올 해는 이 구간과 청원군 후곡리 주변 내탑동 구간을 걸으면서
옛 사람들과의 대화를 시작하려 한다.
물론 접근이 제한된 구간이 있을 것이지만 최대한 노력을 해 볼 것이다.
그래야만 대청호를 제대로 보았노라고 내 자신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변화도 있었다.
석탄리 고인돌 주변에는 선사유적공원이 만들어질 움직임을 보이고
마산동 미륵원터는 대전광역시기념물 제 41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대청호에는 우리 사람만이 사는 곳이 아니다.
이름도 다 기억하지 못하는 새들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물가에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많이 먹었을 조개가 아직도 살고 있고
우리네 선조들도 살았던 터전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과학적 지식을 가졌다 한들 대청호 없이는 살 수 없게
된 우리들의 살고 있고 우리의 후손들 또한 살아가야 할
생명의 젖줄이기도 하다.
수수만년 우리가 함께할 동반자
대청호에게 고마움과 애정을 표한다.
~~~~오감만족 대청호체험 책에 실린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