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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타원 이현조 원로교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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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타원 이현조 원로교무는 군남교당 초대교무로 근무할 당시 정산종사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받들었다.
이 원로교무가 “총부에 오려고 하면 빈손으로 오는 것 같아 죄송스럽기만 합니다.”하자 정산종사는 “그곳은 인재가 많이 나올 것이다. 아무쪼록 전무출신을 많이내도록 해라. 농촌교당은 전무출신을 많이 내고 도시교당은 육영장학금을 많이 내야 한다”고 당부하였다.<한울안한이치에 기연따라 주신 말씀편>
이후 이 원로교무는 그 뜻을 받들어 10여명의 전무출신을 배출했고 총부사업은 많이 못해도 인재양성에 힘을 쏟으라는 정산종사의 말씀을 간직하며 살았다.
“원기42년 첫 발령지가 군남교당이었어요. 당시 청년·학생교화가 잘 되어 참 재미있게 교화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총부에 올때에는 차비만 가지고 다니는 것이 정산종사께 늘 죄송스러웠어요. 그래서 말씀드렸는데, 인재양성 해야한다는 당부를 하셔서 평생 어느곳에 가든지 인재 키워내는데 정성을 다했지요.”
또 한번은 교당에서 기도를 해도 마음이 잘 챙겨지지 않아 재를 지내고 나면 영혼 천도가 잘 되었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이 걸린 이 원로교무는 정산종사께 여쭈었다.
“제가 힘이 없는데 제사나 기도때 위력이 나타날는지 의문이 됩니다.”고 하자 “그래 정성스럽게만 해라”하셨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정성입니까?”라고 하니 “재를 지내려면 심신을 재계하고 도량을 청결히 해야 한다. 법당 청소도 잘하고 구석구석 먼지도 없게 해야 한다. 그 하나하나가 정성이다”고 하였다.
이 원로교무는 그 말씀을 받든 후부터 재가 있을때마다 종이로 꽃을 만들고 그 꽃을 사철나무에 매달아 놓고 재를 지내면서 오롯한 정성을 올렸다.
“정산종사께서는 치재의 효과에 대해서 인연이 없던 영가에게는 불연을 맺어주고, 신심이 있던 영가에게는 서원을 굳히며 공부가 깊은 영가는 대중과의 법연에 또한 도움이 된다”고 하셨다며 “정성을 기울인 만큼 기운이 통하는 느낌을 수시로 받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 원로교무는 원기38년 유일학림 3기생으로 공부를 시작했고 당시 정산종사는 병환중에 있어 학생들은 번갈아 가며 진지상을 올렸고 그 기회를 통해 많은 말씀을 받들었다.
“당시 총부는 식사시에 식종을 쳤습니다. 어떤 때는 정산종사님이 진지를 드시게 하기 위해 거짓종을 치기도 했었습니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지요.”
이 원로교무가 정산종사께 진지상을 올리려 갈때면 총부 어른들은 “종사님께서 대중들이 밥을 먹는냐고 물으시면 먹고 있다고 대답하라”며 신신당부 하셨다고 한다.
그당시 대중들은 저녁밥 굶는 날이 많았고 죽을 밥먹듯 하던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원로교무가 정산종사께 진지상을 올리면 정산종사는 항상 환한 웃음으로 대하시며 때때로 “공부 잘 하느냐?”고 물으시며 격려해주셨다.
“그때는 철이 없던 시절이라 어른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 원로교무는 “오직 정산종사님을 오롯이 받드는 마음 뿐이었다”고 술회했다.
“정산종사의 일상 그대로가 법이고 평소 말씀 그대로가 법문이었음을 늦게 깨우친 것이 죄송스럽다”는 이 원로교무. “대중과 고락을 함께 하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으셨던 정산종사의 원융자재한 성품을 후진들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 원로교무는 군남교당을 첫 부임지로 서광주·남원·영도·대구·서울사직교당을 거쳐 진주교구장, 방배교당등에서 근무하는등 일생을 교화발전과 인재발굴에 헌신했으며, 원기86년 퇴임했다.
현재 영산원로수도원에서 편안한 심락을 누리며 수양정진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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