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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면적에 대한 이야기]
미국은 면적이 얼마나 큰지를 비교를 해 본다면, 불란서의 면적을 2곱한 것이 택사스 주이고, 다시 여기에 2배를 해야 알래스카의 면적이라고 한다. 알래스카 주는 미국이 구소련으로부터 구매 제의를 받고서 상원에서 찬반투표를 하는데 51대49로 알래스카 땅을 구매하는 데에 찬성하여 이 넓은 어름 땅인 동토를 사들여서 처음에는 국민들이 원성이 많다가 5년이 지나면서 이곳에 부존자원이 많다는 것을 파악을 하고서 개발해야 할 자원의 보고임을 알고서 미국 국민들이 안심을 했다고 전한다. 이곳 알래스카에는 무진장한 천연가스가 매장되고, 동토에서 자란 나무가 무제한적으로 자라는 산림의 보고이고, 그 외로 많은 광석이 보존되어있는 자원의 보고로서 미국을 더욱 놀라게 하는 사건이란다.
소련에서는 그 당시에는 알래스카를 쓸모없는 땅이라고 팔아 치우는데 공헌한 자는 훈장을 준다고 해서 미국에서 구매가 이루어진 당시에는 훈장을 받고서 국가의 칭송을 받다가 미국에서 자원을 개발하면서 그 당시에 알래스카 땅을 판매하는데 영웅이던 사람은 당에서 직책도 잃고서 감옥으로 가고 이슬로 사라졌다는 일화를 소개 해 준다. 이것이 정책 시행 과정에서 잘못된 결정과 잘한 결정으로 구분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숙소로 사용하는 뉴저지 주에서 뉴욕 주로 들어가는 데에는 [허드슨 강]을 가로 지르는 [워싱턴 브리지]를 건너야 한다. 아니면 링컨 터널을 건너던지 해야 뉴욕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우리 일행은 첫날 입성을 하면서는 [워싱턴 브리지]를 건너고 호텔로 돌아 올 때에는 [링컨 터널]을 통과해서 뉴저지 주로 돌아 왔다.
이곳 뉴욕 주는 미국이 영국 연방에 속할 당시만 하더라도, 원주민들인 인디안들이 이곳에서 풍부한 부존자원을 생계로 삼아서 생활을 하는데, 이 땅이 쓸모가 있게 보여서 돈을 24불을 인디언 추장에게 주고서 구입을 했다고 한다. 그것도 돈으로 주고 구입한 것이 아니라 인디언들이 필요한 장식물 등으로 물건을 주고 뉴욕주가 형성이 되는 맨하탄을 사들여서 영토를 sjafguskrkT다는 것이다. 그러고서 인디언들이 산악지대로 몰려가서 산악지대라서 살아가는 데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해서 다시 뉴욕 인근지역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서 인디언 말살 정책을 썼다고 전한다. 이곳에는 [아드로 택]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곳은 미국이 독립 전에 영국과 인디언 간에 전쟁을 치르던 격전지라고 한다. 인디언들을 미국이 독립을 하고서도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몰아내기 위하여 처음에는 [조지아 주]로 내몰리고, 그다음이 최종적으로 [오클라마호 주]로 인디언들을 내 몰고서 인디언 말살 정책을 쓴다고 한다.
그 어원을 살펴본다면 [오클라마호]라는 말은 인디언들이 말하는 [눈물의 여정]이라는 말이라고 한다. 인디언들이 자주 독립을 못하는 것은 언어는 있지만 문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는 세종대왕을 하늘같이 모시고 우러러 보아야 할 자손들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을 해서 한일합방을 할 당시에도 일본이 미국의 승인을 받고서 우리나라를 침범을 했다는 미 국방성 문서 창고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고 말을 한다.
그러면 미국의 지명들과 인디언들의 언어를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면, [와이코프]는 인디언어로 [언덕]이라하고, [미시간]은 [아름다운 물]이라고 하며, [미시시피]는 [물의 어머니]라고 하며, [택사스]는 [형제]라고 하며, [월스트리트]는 [장벽]이라는 말이라고 한다. 영국이나 미국이 인디언들을 말살하면서도 지명 등은 바로 인디언들이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사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디언들은 문맹과 마약 등으로 너무나 비참한 생활을 한다니 우리나라는 문자를 발명한 세종대왕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우리가 월가로 가는 도중에 교통 체중으로 [체시 호텔-Cheser Hotel]앞을 지나면서 일화를 소개해 준다. 그 하나는 타이타닉호가 조난당하고서 그 당시에 구조된 사람이 이 호텔에 투숙을 해서 유명해지고, 그 다음에는 체시 호텔 100호실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여 그 후에 이 사건을 영화 촬영을 하면서 체시 호텔이 유명세를 탔다고 한다.
우리가 자유의 여신상을 관람하러 가면서 들린 곳이 지난날에 교수형을 집행하던 자리에 개선문이 있고 워싱턴 장군이 새겨져 있는 공원[워싱턴 스퀘어]를 거쳐서 설명도 듣고 갔다. 이곳 워싱턴 스퀘어를 워싱턴 피스[평화]라고도 한다고 말을 전해 준다.
뉴욕 대학[N.Y.C]은 컴퍼스가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는데, 이곳 N.Y.C에서는 워싱턴 스퀘어[공원]에서도 졸업식을 한다고 한다. 그러더라도 학생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자기네들 의 켐퍼스는 학생들이 사용을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켐퍼스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학업에만 열중이란다. M.B.A가 왓트수클 1위라면, N.Y.C는 스톤 수클 2위라고 말한다.
우리가 자유의 여신상을 관람하러 가면서 지나는 길목에 베버리 파크가 있는데 911터러 당시에 쌍둥이 건물에서 폭파당한 조형물을 원형 그대로 이곳 공원에 옮겨 놓은 것을 보았다. 미국인들은 비록 피로 물들인 과거의 상처라 하더라도 지난날의 것을 잘 보관하고 보존하는 정신이 투철한 것 같다. 나도 지난날의 것들을 생각하면서라도 기록으로 남기려고 노력을 한다지만 미국인들을 따라가려면 어림도 없다고 생각을 한다.
[브로크린 브리지]에 대하여
이 다리는 뉴욕의 어느 섬으로 들어가는 다리인데 브로크린 이라는 부자가 사비를 들여서 2대에 걸쳐서 다리를 완성한 다리라고 말을 해 준다. 다리를 설치한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서 풍을 맞고서 오래 살지 못하게 되어서 이 다리를 착공을 하고서 완성도 못하고 임종을 해서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고서 이 다리를 완성을 했다고 한다. 미국은 돈을 벌면 혼자 방탕하게 사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이 기부문화가 정착되어서 재벌들이 무엇인가 자기 흔적을 기리 남기려는 풍토가 우리나라 재벌들이 세금을 탈세를 하면서라도 후손들에게만 물려주려는 문화와는 너무나도 정 반대로 다른 것 같다.
[자유의 여신상 관광]
자유의 여신상이 손에 든 횟불의 상징은 [자유, 평등, 평화]를 나타낸다. 손에든 책은 독립 선언서이다. 이곳은 우리가 오늘로서 마지막 관광이 다닌 곳으로서 의미가 깊은 곳이다. 이곳 자유의 여신상 주변에는 지난날에 미국으로 건너오는 길목이라고 한다. 이곳 미국으로 삶을 찾아 건너오는 길에 그곳에 머무는 시간이 얼마나 지루하고 잘못하면 낙오자가 되고 만다는 말에는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꿈을 먹고 살기 위하여 자기 포부를 마음껏 발휘하려고 보다 낳은 곳으로 이동을 하는데 몰려오는 이민자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많은 제동 장치를 해 놓은 모습들을 보면서 미국이 얼마나 살기 좋은 천연적인 자원을 안고 사는 나라임을 느낄 수가 있다.
[자유의 여신상]에 대하여
자유의 여신상[Staute of Liberty]은 1886년 미국 독립1백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에서 제작 기증한 것이다. 미국과 프랑스의 우호 증진을 위한 선물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전 세계인들에게 미국의 상징 더 나아가서는 자유의 여신상은 리버티 아일랜드까지 가는 사우스 배터리 파크에서 탑승하면 되고 30~45분 정도 소요 된다. 자유의 여신상의 무게는 225톤, , 대좌인 받침대 높이가 약 47.5미터 동상 자체의 발끝에서 횟불까지의 높이가45미터이다. 지면에서 횟불까지의 높이는 93.5미터에 이른다. 그리고 손의 길이만도 5미터, 집개 손가락이 2.44미터나 된다.
* 자유의 여신상에 대한 몇 가지 사실로서는, 자유의 여신상은 1875년 프랑스에서 aksefrl 시작하여 1884년에 완ㄴ성이 되었고 1885년 미국으로 건너가기까지 프랑스 파리에 서 있었다. 미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자유의 여신상을 분해하고 조립한 사람은귀스티부 에펠[Gustae Elffel]이었다. 그리고 자유의 여신상이 디디고 있는 토대는 1877년 건축가 리챠드 M 헌트가 디자인 하여, 1883년 만들기 시작 하였고 1884년에 완성되어, 1886년부터 여신상을 받치고 있었다.
[맨해탄에서 마지막 점심]
월가를 관람하고서 늦은 시간이지만 [뉴욕 설렁탕]전문집을 찾았다. 이곳은 교포가 운영하는 곳으로서 월가에서 얼마 안 되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가 식당으로 출발을 하면서 주문을 하고 도착을 하자마자 음식을 먹을 수가 있도록 가이드가 미리 조치를 취해 주어서 점심을 먹는 데에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이곳 사람들은 걸어 가면서나 서서 먹는 것이 일상화되고 공원이나 길거리에서 먹고 다니는 것이 일상생활이다. 특히 월가 주변에서 생활하는 메니져 펀드 같은 사람들은 생활비를 줄리기 위하여 식당보다는 길거리에서 음식을 구입하여 손에 들고서 공원을 찾아서 먹는 것은 식당에 가서 먹으면 가격도 비싸고 식사 후에 종업원에게 봉사료를 지불하지 않는 편리함을 즐긴다는 것이다.
[소호거리]
오헨리가 작품을 쓰던 집. 마이클 플랜은 노후 준비를 제일 잘 못한 작가이다. 2번째가 마이클 잭슨이고 3번째가 권투선수 무어이다.
소호[SOHO]는 사우스 어브 하우스턴[South of Houston]의 머리 글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호ㅢ 특징은 창고로 쓰인 철의 단단한 건물들과 코블스톤 스트리트[cobblestion street]. 자갈이 깔린 거리들은 거주인들이업타운으로 이주한 이후의 1850년대에 등장하였다. 이 지역에 자리하고 잇는 화려한 건물의 윗 층에는 로드 & 테일러 [Lord & Taylor], 티파니스[Tiffany's]같은 회사들과 직물, 도자기, 유리제품을 판매사들이 들어서 있으며 아래 층에는 아트 겔러리를 위한 전시 공간에 적합 하도록 설계되었다. 1900년대 패션 사업 관련 업체들이 업 타운으로 이주함에 따라 이 지역은 황폐화 해져 허름한 조동착취 공장으로 가득찬 빈민가로 전락 했다. 그러다가 새로운 노동법에 의해 소호의 노동착취 공장들을 철거 시키면서 소호의 대 변혁이 시작 되었으며, 1960년대를 지나면서 예술가들이 조용히 이곳의 버려진 건물에 이주하기 시작 했다. 싼 임대료, 넓고 천장이 높은 창고를 그들의 창작 공간으로 활용하려는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새로운 예술의 거리로 부상하기 시작 했으며, 1970년대까지 주거, 상업, 예술 지구로 변모 시키면서 독특한 지역 공동체로 발전 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 보스톤 성당과 뉴욕의 트리니트 성당이다. 이곳 트리니트 성당은 컬럼비아 대학을 만들어낸 곳이기도 하다.
맨하탄의 트리니티 성당에서 초창기에 콜럼비아 대학을 창설하여 지금 유명한 대학으로 맨하탄 시내에 3만평의 켐퍼스를 보유하는 유명한 학원재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땅값이 제아무리 비싸다고해도 컬럼비아 대학에서는 학교 켐퍼스 부지 확장에 앞장을 선다고 한다.
[존.F. 케네디]에 대하여
존 에프 케네디는 무서운 리더쉽의 전략가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대통령에 출마를 하고서 TV토론을 제안하여 토론에 나아가기 전에 미리 자기에 대한 리셉션을 통하여 방송국 PD를 통하여 자기가 입을 복장과 조명의 위치며 카메라의 각도까지 미리 리허설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출마자로서 TV토론이 끝나자 상대자보다도 인기도가 무려 30%의 상승을 보았다고 한다. 대통령에 당선이 되고나서 소련의 후르시쵸프가 나이어린 존 에프 케네디를 좀 깔보아서 그런지 큐바에 소련의 핵을 배치한다는 선언으로 미 국회에서 논란이 거듭되면서 미 의회에 출석하여 당당하게 말을 하는데, 전략적인 말을 남겼다고 한다. 상황이 다급할수록 우리가 전쟁은 불가피 하더라도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며칠간에 걸쳐서 생각을 해 보자고 제안을 하고서 상원의원들의 질타나 질문에 응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미국의 70년대에 케네디가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세계3차 대전이 일어났을 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다고 하는데, 위기를 모면한 사례로서 소련의 후르시쵸프가 큐바로 핵을 배치한다는 말을 듣고서 케네디는 당당하게 말하기를 큐바에 핵을 비치하는 것은 말리지 않는다. 그러나 큐바로 가는 길목은 내어 주지 않을 것이니, 태평양을 건너려면 미국에 총을 대고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다“라고 선언을 해서 후르시초프로 하여금 제3차 전쟁을 포기 하도록 먼저 선수를 쳐서 제3차 대전의 위기일발에서 모면하여 전쟁을 미연에 방지한 일화가 있다고 한다.
존 에프 케네디에 대한 스켄들 사건에 대하여는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나 미국 최고의 미인 여배우 마린 몬로와 열애 사건에 대하여는 유명하기만하다. 잭크린이 질투하여 유명한 파티에 참석을 하지 아니해도 마린 몬로는 대중 앞에 떳떳하게 참석하여 그 많은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호텔로 사라진 사건이나 몬로가 너무나 케네디를 사랑해서 케네디가 몬로에게 한 말에 대하여는 유명하기만 하다. 마린 몬로가 보스톤에서 의문의 변사 사건이 또한 의문이 풀리지 아니하는 잊혀져가는 일 들이다.
케네디 전기도 있지만 [존, 에프. 케네디의 리더쉽]을 독자들은 한번 기회가 있으시면 읽어 보시기를 권장하는 바입니다.
[뉴저지 주 이민가정 어린이 환경 열악]
우리가 뉴욕 주에 거주하는 교민들이나 주민들이 과거에는 이곳 미국에 도착하여 어떠한 난관을 이겨내고 정착했는지는 알 바가 아니지만, 세계에서 최고 부자들만 살고 있다는 뉴욕의 맨하탄 시와 인접해 있는 이곳의 거주하는 주민 48%가 저소득층이며 17%가 건강보험이 없어 미국에서는 병원비가 의료보험 혜택이 없는 상태에서는 만만하지가 않은 상태인데 뉴욕 현지 교포신문[2007.10.18.목]에 이런 제하의 기사가 실려 있다는 것은 그만큼 미국 생활이 힘들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의 국력과 위상 제고]
“한인들, 세계시민 성장 기원” (커뮤니티 제단만찬에 반 기문 UN사무총장 참석)
이 기사는 뉴욕 한인교포신문 머리기사(2007.10.18.목)로 나온 것을 발췌한 것인데 그만큼 우리나라가 국력이 신장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뉴욕 한인사회에서 이민1.5세대와 2세대들이 800여명이 참석한 자리에 반 기문 UN사무총장을 모시는가하면 뉴욕 지장까지 모신 행사에 대한기사 내용을 발췌 해 본다.
(기사전문) 한인 봉사단체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4년 전 발족된 한인 커뮤니티재단[KACF.회장 노 석주]은 17일 맨하탄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제2회 연례 만찬 행사를 개최 했다.ESPN 앵커 마이클 김과 MTV 박 수진 VJ의 합동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한인사회 1세대는 물론, 미 주류 사회에서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는 한인 1.5~ 2세대 800여명이 함께 축제의 자리로 마련 됐다.
이날 특별 게스트로 초대된 마이클 불룸 버그 뉴욕 시장은 “한인 커뮤니티는 뉴욕시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고 있는 소수민족 중 하나로서 뉴욕 시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중요 민족”이라고 칭송 하면서 “ 뉴욕 시는 한인을 비롯한 소수계 민족들이 더욱 윤택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뉴욕 한인사회 단체에 공식적으로 처음 참석한 것으로 알려진 반 기문 UN사무총장은 KACF의 그간 업적을 치하하며 “KACF와 같은 한인단체들을 보면서 미주한인사회가 크게 발전하는 것 같아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반 기문 총장은 “미주한인 사회가 큰 비전을 향해 단결하고 한 목표를 향해 매진함으로서 세계적인 소수계 커뮤니티, 세계 시민으로 성장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기조연설자로 나선 피풀 매거진의 박 수진 편집국장은 “한인들은 소수계로서 미주사회에서 성공하는 데는 큰 장애가 많겠지만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는 목표를 설정하고 인내로 도전 할 때 성공은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하 2면 계속된 기사 중략. 류 수현 기자]
이러한 한인 교포사회 현지신문에 전면 머리기사로 다루는 것을 보더라도 우리 한인 사회가 그만큼 많은 성장과 우리 국력이 신장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로 나는 받아 들였다. 가는 곳마다 우리 교포가 운영하는 한국식당을 운영하는 교포들만의 생활상을 보아도 우리의 국력이 위상이 높아진 것을 실감을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행을 마치고서]
이번 여행은 소방장비엑스포에 참가하기위한 공무여행으로 나로서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여행인지 모른다. 정년을 앞두고 미국 비자를 받고서 미국으로 다녀오기가 그렇게 힘들다는데 아무런 제약도 없이 다녀왔다는 것이 공직자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바이다.
이번여행경비는 시에서 출장비로 내주는 총4,350,000원인데 여행사에 4,060.000원을 내고 30여 만 원은 내 용돈으로 부대 경비로 사용하는 것이다. 자녀들과 외장조카가 모아준 50만원과 친지들이 거두어준 60만 원 정도인데 환불은 50만원만 하고 도합 735불정도 달러를 바꾸고 갔으나 선물은 비타민을 7개를 50불에 구입한 것과 손자들의 티 삿스 4개를 90불 구입한 것하고 엠파이어 빌딩 조형물 기념품 하나를 13불에 구입하고 가방을 아디다스 운동복 가방으로 27불을 주고 구입한 것이 전부이고 동료 직원들과 술 마신 것도 1백 불 정도는 된다. 귀국 후에 보니 달러가 남아서 다시 입금을 시켜 놓았다.
그래도 여행사에서 사전에 리허설을 해 주어서 기분이 좋았는데 현지에서 스케쥴에 없는 것을 진행한다면서 경비를 거출하는 것이 좀 못 마땅했지만 그런 것은 어느 여행사나 통상 있는 일이라서 내가 좀 참고 말았다. 나는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것만이 나의 바람이기 때문이다. 미국 올란도 소방장비 엑스포에 참가하여 소방에서 사용하는 많은 장비를 둘러보고서 느낀 소감이라면 미국산 엠불랜스가 도입되는 것은 최소형 케이스라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대형 앰불랜스도 3만7천불정도면 구입되는 단가를 제시하고 있어서 두 종류를 사진까지 가격표를 촬영하고 왔다. 우리나라 납품 업자들은 이문을 너무나 남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방문하도록 된 소방서가 여행사에서는 소방 파출소를 소방서로 알고서 섭외를 해서 놀라고 말았다. 소방파출소에서 많은 것을 보고 왔으나 특이할 만한 것은 직원들의 침구가 스프링 침대로 수납 형으로 설치해서 사용하여 아주 편리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사진을 촬영을 해 왔으니 앞으로 우리도 직원 복지 시설 면에서 근무 환경을 개선하여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이번 여행에서는 노트북을 휴대하고 여행을 다니면서 연수 동료들과 야간에 호텔 방에서 술 파티를 벌여 가면서도 주간에 촬영한 사진을 모두 노트북에 입력 시켜 놓고, 여행을 다니면서 본 대로 느낀 대로 매일같이 쓰다 보니 이번에는 일이 쉽게 풀리는 것 같다. -끝-
첫댓글 글 잘 읽었네. 미국문화와 소방선진국 시스템 비교가 발전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