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김좌진장군묘 (白冶金佐鎭將軍墓)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소재 )
대한독립군총사령관(大韓獨立軍總司令官)백야(白冶) 김좌진장군(金佐鎭將軍)의
유해(遺骸)를 안장(安葬)한 묘성(墓城)이다.
장군은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부농가(富農家)의 둘째아들로 출생.
개화사상(開化思想)이 투철하여, 15세때,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전답(田畓)을 나누어주고 부리던 노비(奴婢)(가노(家奴))를 해방(解放)시켰다.
1905년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設立) 문맹퇴치(文盲退治)에 앞장섰고,
1913년 군자금(軍資金)을 모집하다 3년간 옥고(獄苦)를 치루기도 한다.
그 후, 만주로 건너가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 북로군정서(北路軍精書)
사령관(司令官)으로 독립군장교양성(獨立軍將校養成)에 힘쓰다가,
독립군(獨立軍) 총사령관(總司令官)으로 청산리전투(淸山里戰鬪)에서
3,300의 왜적(倭敵)을 물리치는 독립운동사상(獨立運動思想) 혁혁(赫赫)한 공(功)을 세워
조국광복(祖國光復)을 위해 큰 업적(業的)을 세웠다.
1930년 1월 24일,만주(滿洲) 산시(山市)에서 고려(高麗) 공산당원(共産黨員)의 흉탄(兇彈)에
41세(歲)로 조국(祖國) 광복(光復)을 보지 못하고 운명(運命)하신다.
장군(將軍)의 유해(遺骸)는 만주땅에 임시 암매장(暗埋葬)되었다가
부인(婦人) 오숙근(吳淑根) 여사(女史)에 의해 조국(祖國)에 묻힌다.
이때가 1940년 9월 밀감상자에 장군의 유해를 위장하여,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安葬). 1957년 부인(婦人)이 타개(他介)하자,
장군(將軍)의 아들 김두한(金斗漢)은 현(現) 묘소(墓所)로 이장(移葬)하였다.
현재 묘역에는 뒤편으로 담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봉분은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옆에는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는 마(馬)석상 한 쌍이 세워져 있다.
백야재
백야재에서 계단을 오르면
장군의 묘역이 펼쳐진다
"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나 많은 이 때에...
내가 죽어야만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 "
청산리,그 처절했던 현장에도 꿋꿋했던
백의민족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
다른이도 아닌,
같은 동포의 총탄에 쓰러지며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이것이 과연 하늘의 뜻이었을까?
비보를 접한 국내외의 동포들,
대성통곡을 하며 하늘을 원망 했다고...
백야 못지 않은 담력의 소유자 부인 오씨,
1940년 9월, 삼엄한 경계와 감시의 눈길을 피해
남편의 유해를 몰래 파내 봇짐 장수로 위장하여
천신만고 끝에 고향 땅으로 옮긴 다음
평토분(平土墳)으로 밀장해버렸다고 한다.
이 때부터 조선총독부에선 묘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지만
이는 오직 부인 오씨만이 간직한 비밀이었다고...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청산리전투(1920년 10월 21일~26일)
백포 서일(1981 ~1921)장군의 총 지휘아래
김좌진, 이범석, 나중소 등의 통솔로 일본군들을 상대로 벌인 전투에서
자그만치 3,300 여명의 적을 몰살시키는 쾌거를 거두게 된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백포 서일과 백야,이범석 등을 비롯한 다수의 독립운동 단체 소속원들과
임시정부 요인 다수가 대종교(大倧敎)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대종교는 국조 단군을 교조로 신봉하며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和世界)를 교리의 핵심으로 삼는다고 하는데,
1909년 홍암 나철 대종사가 중광(重光 다시세움)을 선포하여
일제하 만주벌판을 누비던 우국지사들을 하나로 묶었던
민족 신앙의 결집체 역할을 했다고 한다.
동학을 비롯 독립운동과 여타 크고 작은 전투와 이해 다툼에는
어떤 형태로던간에 반드시 그네들이 신봉했던 종교와 교리와 사상이
당사자들의 근저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음을 간과해선 곤란하기에
잘 알지도 못 하는 종교 얘기를 들먹거려 보았다.
도대체 뭐가 보여야, 뭐를 해 먹던지 말던지...
오서산을 찾아가는 길의 안개는 그야말로 죽음이었다.
말 그대로 한 치 앞을 분간키 어려울 만큼 지독했다.
지독한 안개를 뚫고 정암사에 당도하니
느닷없는 시커먼 털북숭이 삽살개가 달려나와
반갑다고 덥석 품으로 달려든다.
물을 끓여 라면 한 개로 아침을 해결한 후
모처럼 적막한 오서산을 오르게 된다.
정상 일원의 능선에 올라보니
무신넘의 바람이 그리도 세게도 불어댔는지 몰라도
기대했던 억새의 포근함은 온데 간데 없고
간신히 쭉정이만 남은 형편이었다.
맑은 조망을 기대했건만
가까운 천수만은 커녕
발 아래 아차산 라인 정도만
간신히 볼 수 있을 정도.
정상을 찍고 한참을 오다가 뒤돌아보니
까마귀 두어 마리가 상공을 맴돌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금북정맥에서 약간 비켜나 있지만
대개들 그냥 금북정맥의 최고봉으로 쳐 주는 오서산.
그저 까마귀가 설쳐대는 산이라는 정도의 단순함이 아니라
신령스런 기운과 정기가 빵빵함은 말 할것도 없고
'태양 안에는 세발 달린 까마귀인 삼족오가 살고
신의 사자로서 천상과 인간 세계를 이어주는 고리 역할' 을 한다는
이른바 우리민족의 태양숭배 사상까지를 담기에
부족함이 없다하여 영산(靈山)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산을 일찍 올랐기에 다행이었고
오름길을 피해 정암사 뒤로 곧장 떨어지는 코스는
더더욱, 오늘 산행의 백미라 얘기할 수 있겠다.
소음도, 계단도 없고 가을산행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기에 말이다.
정암사에 거진 다달을 즈음
그제서야 경향 각지의 이런저런 짝퉁 산꾼들이
시끌시끌 떠들어대면서 산을 점령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절에 내려서니 무슨 보약 달이는 냄새가 경내에 가득이다.
정체가 뭘까 궁금했는데,
세상에 나.....?!
큰 솥을 걸어 놓고 '십전대보탕'인가 뭔가를 끊여대면서
한 잔에 이천냥이라고 써놓고
신도들과 등산객들의 주머니를 털고 있는 광경이다.
거기다 컵라면까지 수북하게 쌓아놓고 라면 장사까지.
배고픈 중생들의 주머니와 뱃속에다
부처의 자비를 채워주진 못 할 망정
이 무슨 해괴한 처사요,
기막힌 행태란 말인가?!
불전함에 그 흔한 배추이파리 한 장 못 넣은 주제에
이런 애길 할 자격이나 있는지...
쬐끔은 뒤가 구리긴 허지만서두
그냥 넘어가기엔
어쩐지 껄적지근하고 쬐께 거시기 하다는 생각에서
객적은 소리를 몇 마디 늘어 놓았다.
산을 내려와 이동한 곳은
백의민족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의 묘.
어릴 적, "임시정부"라는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총 네 다섯권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밤을 세워가며 모조리 읽어 제끼고서도
감동을 주체치 못 해
후로도, 몇 번 인가를 더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의 감동은 지금도 내 가슴에 절절하게 남아있다.
일제시대 만주에 거주하면서 학교에 다니시고
만주군에 징집되어 이른바 대동아전쟁에 끌려가던 중 탈출을 감행,
곧장 독립군에 가담키 위해 이런 저런 접선을 시도하던 중
해방을 맞으셨다는 내 선친으로부터도
혹독했던 그 시절 애기를 너무도 많이 들어왔던 터라
우국지사는 언제나 내 마음 속
맨 앞에 자리한
존경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장군의 묘 앞.
발복과는 전혀 상관 없는
마음속 존경의 뜻을 담아 '동기감응'을 신청해 본다.
"할 일이. 할 일이 너무 많은 이 때에... 내가 죽어야만 하다니..."
얼마나 조국과 민족을 사랑했으면,
죽어가는 순간에도 아쉬움의 회한을 토로했을까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1930년 1월 24일,
만주 중동철도선 산시역 앞 정미소에서
한 많은 생애를 마감한 백야.
그 때,
장군의 나이 불과 마흔 한 살 이었다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