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청비](127) 내일은 맑음 승인 2023.12.28 07:49
송미경 수필가
▲ 송미경 수필가 ⓒ뉴스라인제주
칼바람 매섭게 얼굴을 스친다. 기온이 영하권으로 뚝 떨어졌다. 모처럼 시간을 내어 별도봉을 산책 겸 운동삼아 걷고 있다.
쌀쌀한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많은 사람들이 운동 중이다. 이곳에 올 때마다 늘 마주치는 사람이 있다. 딸과 엄마인 듯 서로 마주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엄마는 딸이 한걸음 내딜때마다 응원하는 모습이다. 예전에 비해 발걸음이 많이 좋아진 것 같다.
이곳은 나의 삶과 애환이 가득한 곳이다. 기쁨과 슬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이곳을 찾아 정신없이 운동에 몰입하고 나면 마음이 상쾌해지고 신체적으로 많은 충만감을 느낄 수 있다. 어떠한 사물과도 인연이 닿아야 상승효과를 볼 수 있는데 이곳은 나만의 정기랄까 오묘한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받는 곳이다. 이곳에서 자생하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인 꽃과 나무들, 걷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친구가 되고 자연과 내가 하나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입구에서 약 이십여 분을 걷다 보면 절벽을 돌아 넘는 곳에 자연이 만들어 놓은 작품인 애기 업은 돌이 있다. 자세히 보면 엄마가 애기를 품고 서 있는 모습이다. “애기 업은 돌” 누군가 어머니를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이런 이름을 붙여 놓은 것 같다. 또한 여러 가지 사연을 간직한 바위이기도 하다. 늘 이곳을 지나칠 때면 마음으로 가벼운 묵례를 하곤한다.
가슴에 돌을 얹혀 놓은 듯 마음이 무겁다. 건강하던 남편이 며칠째 특별히 아픈 곳이 없는데도 시름시름 침묵 중이다. 혹시 건강에 이상이 있는가 싶어 검진을 받았는데도 다행히도 건강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평소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러니 측은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불안하다.
스트레스로 인한 합병증일까, 남성 갱년기도 있다는데 나이가 들면 호르몬의 영향으로 몸에 이상신호가 나타난다는데 갱년기 증상으로 힘들어하는 걸까 여러 가지 추측을 하게 한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남편은 오로지 자신을 희생해서 가족을 위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내가 사회활동은 물론 외부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것도 남편의 내조와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강인한 성격에 말수가 적고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며 오로지 가족만 바라보는 심성이 곱고 성실한 남편이다. 돌아보면 지금껏 잘도 버텨왔다. 가장이라는 어깨 위에 얹혀 있는 모든 삶의 무게들, 그동안 참고 인내하느라 얼마나 외로웠을까, 나는 내가 최고인 줄 알고 살았다. 남편이 며칠 앓아누워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남편 그늘아래 알량한 자존심만 키우며 큰소리 뻥뻥 치며 살 수 있는건 남편의 그늘이 작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득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의 눈물’이 떠오른다. 아버지라는 책무 때문에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가장의 슬픔과 애환을 담고 있다. 가정과 사회에서의 가장 중요한 존재로서 앞만 보고 달려온 이 시대의 아버지들, 남자보다 강한 것이 아버지라 했던가.
집안에 대들보가 몸져누워 있으니 온 가족이 걱정이다. 부모님은 물론 서울에서 직장 다니는 아이들은 수시로 전화 중이다. 아들은 걱정이 되는지 며칠 휴가내서 집으로 내려와 아버지 옆에서 간병 중이다. ‘가화만사성’이라 집안이 평화로워야 모든 일이 순조롭듯, 하는 일마다 손에 잡히질 않는다. 당분간은 외부 활동마저 자제하고 있다. 별도봉 둘레길을 걸으며 애기업은 바위 앞에 멈춰섰다. 절벽에 우뚝 선 채 엄마와 아이가 서로 의지하며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모습이 오늘따라 따스하게 전해온다.
행복은 멀리 있는게 아니다. 하던일을 잠시 멈추고 자신의 건강을 돌아보라는 신호다. 항공사에 근무하는 딸내미는 건강이 회복 하는데로 가족끼리 여행을 떠나자며 항공권을 내민다. 모처럼 가족끼리 결속하는 시간이었다.
비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따스한 햇살이 비치듯 내일은 맑고 화사한 무지개가 뜰 것이다. 하늘도 우리 가족을 축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