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학정치의 기틀
불교에 대한 압 박을 강화하는 한 편 성리학의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래서 1489년에는 향시에서 '불교를 믿어 재앙을 다스려야 한다'는 내용의 답안을 작성한 유생을 귀양보냈는가 하면, 1492년에는 도승법을 혁파 하고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였 고, 일정 숫자의 사찰만을 남긴 채 전 국 대부분의 사찰을 폐쇄하였다. 한편 성종은 성리학에 심취하여 도 학적인 조예가 깊었으며, 경연을 통하여 학자들과 자주 토론하고 학문 과 교육을 장려했다. 그는 심지어 경학이나 강의에 만 능해도 관리로 등용하거나 자신의 벗으로 삼기도 했다.
성종은 이와같은 도학 정치 사상에 입각하여 1475년에는 성균관에 존경각을 지어 경전을 소장하 게 했으며, 향현 고에 관심을 가져 학문 연구를 후원하고, 1484년과 1489년에는 성균관과 향교에 학전(교육기간의 경비를 충당케 하기 위 해 지급된 토지)과 서적을 나누어주어 관학을 진흥시키기도 했다. 또 한 홍문관을 확충하고 용산 두모포에 독서당을 설치하여 젊은 관료들 에게 휴가를 주고 독서 저술에 전념하게 하였다. 이 같은 정책은 편 찬 사업을 융성시켰는데, 그 결과로 노사신 등의 '동국여지승람'과 서 거정 등의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동문선', 그리고 강희맹 등 의 '오례의', 성현 등의 '악학궤범'이 간행되는 등 다양한 서적이 쏟 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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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성대의 다른 면
성종 자신이 후기에 들어서는 유흥 에 빠져들 었고, 이것이 확산되어 사회 전반에 유흥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해가고 있었다. 성종은 궁을 빠져나가 규방을 출입 하기도 했는 데, 이 때문에 왕비 윤씨가 그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는 사건이 발 생해 결국 폐비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이 폐비 윤씨 사건은 연산 군 대에 이르러서 정쟁의 불씨로 작용해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야사에 등장하는 어우동에 관한 이야기도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어우동 야사에는 성종이 어우동과 함께 유흥 을 즐겼다는 내용이 담 겨 있어 당시 성종이 얼마나 자주 야행을 즐겼는지를 알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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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업적
1479년 좌의정 윤필상을 도원수로 삼 아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들의 본거지를 정벌하였고, 1491년에는 함 경도관찰사 허종을 도원수로 삼아 두만강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 을 정벌하였다. 이 결과 조선 초부터 끊임없 이 변방을 위협하던 야 인 세력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또한 고려로부 터 조선 초까지 100여 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 교지, 조례, 관 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이 1485년에 완성 되었고, 각종 문화 서적들을 편찬해 민간 생활의 질을 높였다. 또 성리학자들을 정계에 진출시켜 학문과 정치를 하나로 묶었으며, 조 선의 정치 이념인 유교를 완전히 정착시켜 민간 교화에 성공했다. 게 다가 변방의 야인을 토벌 하여 전쟁의 위협을 없애고, 남방의 왜구들 은 외교적으로 관리하며 지배하였다. 이는 민생의 안정과 태평성대로 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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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의 완성
성종은 즉위하자 '경국대전'을 수정 하여 1471년 1월 1일부터 공포하여 시행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신묘 대전'이다. 하지만 이 책은 누락된 조문이 많아 다시 개수하여 3년 뒤 인 1474년 2월 1일부터 시행하였는데, 이 책이 '갑오대전' 이다. 이 대전에 수록되지 않은 법령 중에 시행의 필요성이 있는 72개 조문은 따로 속록을 만들어 함께 시행하였다. 그러나 1481년 재검토할 필요 가 있다는 논의가 있자 감교청을 설치하고 대전과 속록을 대대적으로 개수하여 1485년 을사년 1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이것이 '을사대 전'이다. '을사대전'을 시행할 때는 앞으로 다시는 개수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이 '을사대전'은 최종적으로 확정된 조선왕 조 영세불변 의 만세성전이 되었다. 25년 동안의 참으로 끈질긴 노력의 결실이었 다.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전해오는 '경국대전'은 바로 이 '을사대 전'을 가리키며 '신묘대전', '갑오대전'을 비롯한 그 이전의 법전들 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을사대전'은 현재까지 우리 나라에 전해 지고 있는 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유일한 법전이 되는 셈이다. '경 국대전'은 경제육전과 같이 6분 방식에 따라 '이전', '호전', '예 전', '병전', '형전', '공전'의 순서로 되어 있으며, 각 법전마다 필 요한 항목으로 분류하여 규정되어 있다. 또 조문은 경제육전과는 달 리 추상화, 일반화되어 있어 유권해석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이는 20여 년에 걸친 탁마의 결정체로서 손상이 없는 것이며, 명실상부한 조선의 최고 법전으로서 면모를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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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의 구성
'이전'에는 통치의 기본이 되는 중앙 과 지방의 관제, 관리의 종별, 관리의 임명, 사령등에 관한 사항이 마 련되어 있다. '호전'에는 재정 경제와 그에 관련되는 사항으로서 호 적, 조세 제도를 비롯하여 녹봉, 통화, 부채, 상업과 잠업, 창고와 환 곡, 종운, 어장, 염장에 관한 규정과 토지, 가옥, 노비, 우마의 매매 와 오늘날의 등기 제도에 해당하는 입 안에 관한 것, 그리고 채무의 변제와 이자율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다. '예전'에는 문과, 무 과, 잡과 등의 과거 규정과 관리의 의장 및 외교, 제례, 상장, 묘지, 관인, 그 밖에 여러 가지 공문서의 서식에 관한 규정을 비롯하여 상복 제도, 봉사, 입후, 혼인 등 친족법 규범이 마련되어 있다. '병전'에 는 군제와 군사에 관한 규정이, '형전'에는 형벌, 재판, 공노비, 사노 비에 관한 규정과 재산 상속법에 관 한 규정이, '공전'에는 도로, 교 량, 도량형, 식산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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