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세 죽헌공 휘 민택(양간공파‧의정공파)
1678년(숙종5)-1722년(경종3)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치중. 호는 죽헌.
아버지 경헌공 진구, 어머니 정경부인 한산 이씨
1702년(숙종29) 생원시 동방진사과 3등 31인에 합격.
숙종46년 별시문과 7인으로 급제.
교리로 출사하였으나 간당들의 무고로 혹형을 당하여 옥중에서 서거.
1725년(영조2) 신원되고 부제학에 추증. 유고가 있다.
홍문관 교리 증 부제학 죽헌 행장
공의 휘는 민택이요, 호는 죽헌이다.
일찍 학문을 배워 이름이 났고,
성균관에 유학하여 여러 동배들 중 출중하였다
. 문과에 급제하여 시국 대세의 어려움을 보고 깊은 근심을 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공과 참판공에게 복관이 명이 내려 두 공에게 중직을 내렸다.
공의 8형제가 왕의 체통을 도모하고 국론을 단정할 만한데
공은 또한 소시부터 공보의 물망에 있었다.
목호룡이 무고의 글을 올릴 때 항간에 다 말하기를
“김공이 반드시 묘당에 앉게 되면
이번 옥사는 마땅히 스스로 해결될 것이다.” 하였다.
어찌하여 운이 서로 핍박하고 많은 감정이 아울러 일어나
마침내 단서(죄를 주서한 형서)에 포원하고 뜻을 품은 채
지하에 묻히게 되었으니 하늘 때문인가…….
황문북시(黃門北시 : 황문의 별칭,
북시옥은 동환 때 환관이 세력을 떨치기 위한 감옥)의
백마청류지화(白馬淸流之禍:
당나라 소선재 때 주전충이 조정신하 30여명을 백마역에서
다 죽인 다음 황하수에 던진 고사. 이진이 진사시험에 합격치 못하고
많은 선비를 참소한데 기인된 것)에 많은 현인이 다 죽고
나라의 운명이 기울게 된 것이다.
신임사화 때 제현은 비록 몸이 범의 입에 일그러지고
가족을 보전치 못한 채
국통을 세우고 종사를 굳건히 해서
조조와 주온(5대 양 개국조의 본명)과 같은
흉역의 무리로 먹이를 먹으려는 것처럼 배회하였다.
이 무리를 감히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으니 국가가 오늘날까지 보전되기에는
제현의 힘을 입었다 하겠으니 이로써 저를 꾸짖었다면 후회는 없을 것이다.
시대의 변천은 무궁하고 천심을 돌아오지 않는 채
여섯째 아우 봉사공이 20년 동안 묵을 안건으로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이로 대대로 빛난 충의 가문이 이처럼 쇠잔해졌으니 이는
유식자들이 갚아주는 천리에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공이 문충공의 가문에서 성장하여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형제에게 학문을 닦는 것이다.
이는 다 충의에 근본 하였기에 그 글이 성장에 발하고, 의론에서 나타나
기뻐서 웃고 성내어 꾸짖는 것까지
어디에서 든지 도리어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무릇 윤기와 명의 국가 세도가 흥하고 망할 즈음에 감격하고 분개하고
격앙함이 태현하고 위무가 당당하여 바라봄에 가릴 수가 없다.
칼날이 있어 방책을 세운 재현으로 더불어
마침 생을 버리고 의를 붙들었으니
공이 여기에 과연 그 마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담촌 민우수 찬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