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온라인 교회 ☆
2023년 3월 19일 주일 예배
( 인도,설교: 정성욱 선교사 )
❤ 기도
주님, 오늘 저희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주께 드리는
예배를 받아주시고 저희와 가족들에게
한량없으신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오늘 말씀의 은혜받게 하옵시고
저희 가족들도 구원받게 하옵소서!
주님 오심이 가까움을 믿습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날 사랑하는
가족들과 휴거되게 하옵소서!
역사하여 주실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리오며
곧 오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본문말씀
로마서 10장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샬롬!
한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이땅에서 다시 주일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영광과
찬송과 존귀를 올려드립니다.
지난주에는 제가 자주 전도갔었던
대전 한국타이어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심판의 임박을 상징하는
11명이 다치고 타이어 "21"만 개를
태운 뒤 배교등 적그리스도 세력들이
추앙하는 숫자 13이 나오는
58시간 만에 불이 꺼졌습니다.
5+8=13
그런데 이 공장에 불이 난 날, 한국타이어 금산공장에서도 화재가 있었다는 게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금산공장에 불이 난 사실은 소방 당국과 경찰에서도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119" 신고 없이 자체 진화로 불을 껐다고
합니다.
회사 측은, 자체 소방력을 동원해 5분 만에 불을 껐다고 밝혔고
이 과정에서 직원 4명이 연기를 마셔 병원 치료를 받은 거로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5분 만에 불을 껐다는 숫자 5는
죽음을 상징한다고 말씀드렸지요.
요한계시록 6장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또한 직원 4명은 넷째인을 연상시킵니다.
요한계시록 6장
7. 그분께서 넷째 봉인을 여신 뒤에 내가 들으니 넷째 짐승의 음성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더라.
8. 이에 내가 바라보니, 보라, 창백한 말이라. 그 위에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인데 지옥이 그와 함께 따라다니더라. 그들이 땅의 사분의 일을 다스릴 권능을 받아 칼과 기근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 죽이더라.
뉴스를 보니깐
한국타이어 대전공장은 처음 화재가
발생하고 "119"에 신고를 하지 않고
자체 소방력으로 화재를 진압하려다가
화재가 더욱 커졌다고 합니다.
아래는 위키백과에 나오는
"119" 내용입니다.
"119는 일부 국가에서 구급 · 소방 또는
경찰에 할당된 긴급 전화 번호이다."
미국에서는 "911"을 구급 소방
긴급 전화 번호로 사용하고 있지요.
그리고 심슨 만화에서도 예언했듯이
9월11일에 11모양의 세계무역센터인
쌍둥이 빌딩이 세계정부주의자들의
자작극으로 붕괴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쌍둥이 빌딩에 구조하러
들어간 343명의 소방관들도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911" 테러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전삼년반의
짐승의 표 코비드19 백신을 위한
인신제사였다고 추론하고 있습니다.
일부 세상 노래들을 역재생으로
"백워드 매스킹"을 하면 사탄을
숭배하는 노래가 나오듯이 911를
거꾸러 하면 코로나 19를 연상시키는
"119"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911=119
더욱이 붕괴된 쌍둥이 빌딩은
세계를 상징하는 세계무역센터였습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코로나19 백신을 전세계에
맞추고 있지요?
그리고 우리나라와 많은 나라들에서는
구급대 소방 긴급 번호를 하필 코로나
19를 연상시키는 "119"로 사용하고
있고 코로나 백신 접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서는 911 구급대로
우리나라등 다른 나라에서는
119 구급대에 실려가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등 다른 나라에서는
"911"은 경찰 신고 번호이기도 한데
나중에 코비드19 백신을 접종하지 않으면
이웃에게 신고를 당하고 경찰들이
잡으러 다닌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일까요?!
우리나라에서는 경찰 신고번호가
"112"입니다.
수비학으로 더하면 대환란 시대인
넷째인을 연상시키는 숫자 4가
나옵니다.
1+1+2=4
또한 한국타이어 초대 회장은
최근에 풀려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돈이고 지금의 한국타이어
회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위입니다.
그런데 한국타이어 조 회장은 200억대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 영장 발부가 되어
3년 4개월만에 다시 구속되었다고
하는데 이명박 전 대통령 처럼
풀려나는 댓가로 서로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조회장은 올해 나이가
52세로 수비학으로 더하면
휴거를 상징하는 7이 나옵니다.
5+2=7
그런데 이번에 하필 3년 4개월만에
다시 구속되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도
휴거의 숫자인 7이 나옵니다.
3+4=7
이것은 휴거가 임박했다는 싸인일까요?
그리고 제가 한국 타이어 화재가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것은
"타이어 21만개"가 불탔다는 언론의
기사때문입니다.
저는 오래전 동남아시아 선교사로
나갔었는데 그 당시 섬기던
태국 한인교회가 캄보디아 선교를 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캄보디아를 10여차례
방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유명한
앙코르왓트등 수도 프놈펜을
자주 왕래하다가 "킬링필드"로
유명한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있는
투올 슬렝 21 강제 수용소를
방문하게 되었고 "킬링필드"
학살의 현장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킬링필드"를 자행한
폴 포트는 모든 국민들을 타이어로
만든 샌들을 신게 만들었고 반동자로
보이는 사람들을 "21" 강제 수용소로
끌고가서 고문하고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한국타이어 21만개가
불에 탄것이 마치 싸인같이 다가왔던
것입니다.
저는 폴란드 선교를 갔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도
복음을 전하고 왔었지만
학교를 개조하여 만든 캄보디아
"투올 슬렝 21 강제 수용소"도 갔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당시 고문을 당하며 죽임을
당하였던 끔찍한 수용소 현장을 보면서
마치 지옥의 한 장소를 보는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킬링필드를 자행한
폴 포트 한 사람으로 인해서
캄보디아 인구 "사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여서 폴 포트는 마치
넷째인때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적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같이 보이며 한국타이어
화재는 곧 다가오는 넷째인을 예고하는
동시에 상상하기로는 하필 21세기를
맞아 투올 슬렝 21 수용소가 재현되지는
않는지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후삼년반에서는 감옥을 따로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 학교를
페마캠프로 개조하면 되는 것입니다.
송명희 시인은 대형 교회 건물들이
마지막때 성도들을 수감하는 감옥시설이
된다고 "표" 소설에서 말했었지요.
마치 로마가 AD 70년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포로로 끌고간 유대인들
중에서 약 10만명의 유대인 포로들을
동원하여 만든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나중에 그리스도인들을
사자밥으로 주며 죽였듯이요.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현대 교회가 종교통합하며
배교하고 전삼년반의 짐승의 표
백신을 맞고 있으니 하나님의 심판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얘기입니다.
예로 저는 유럽 수십개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는데 대부분의
유럽 교회들이 쇠퇴하여 한때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장소가
지금은 술집, 카페, 나이트클럽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교회 건물들도
매각이 되어 식당 카페등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의 폴 포트는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옛 소련의
스탈린과 함께 세상에서 사람들을
가장 많이 죽인 인물입니다.
즉 적그리스도 같은 악마같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시간에는 적그리스도의
예표같은 폴 포트(Pol Pot)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본명이 살로트 사(Saloth Sar)인
폴 포트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1925년에 코로나19와 백신을
연상시키는 9형제 중에서 8번째로
태어났습니다.
888은 예수님의 게마트리아 숫자값인데
적그리스도도 예수님을 모방하지요.
폴 포트는 불교국가인 캄보디아의 많은
국민처럼 여섯 살(666)부터 불교 사원에서 6년(666)을(12살) 보낸 후 승려로
2년을 보냈습니다.
그 이후 1년간 목수일을 배웠는데
예수님께서도 12살 된던 때에
성경에서 등장하고 목수일을 하셨습니다.
적그리스도 예표같은 인물이 예수님을
모방했을까요?!
그 후 1949년 해외에서 보다 많은 기술을 배워 와야 한다는 시아누크 국왕의 교육정책에 따라 정부 장학금을 받고 프랑스 파리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습니다.
폴 포트는 전기공학을 하였는데
"전기" 즉 5g 전파는 적그리스도가
짐승의 표 백신을 맞은 사람들을 죽이고
조종하는데 사용된다고 하지요.
그리고 프랑스에서 여덟 살이 많은
아내 키우 포나리를 만났습니다.
이처럼 후삼년반의 적그리스도는
24살(666)연상과 결혼한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라는
싸인일까요?
1949년 8월 무선전자공학을 배우기 위해 파리에 유학 간 폴 포트는 1951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해 스탈린 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학습하면서 학문보다는 혁명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그는 여러 번의 시험에 낙제함으로써
장학금이 끊겨 1953년(1+9+5+3=18=666) 수도 프놈펜으로
돌아왔고 프놈펜에서 1954~63년 동안
사립학교에서 프랑스어 교사로
생활하면서 지하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이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던
학교를 수감소로 만들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사이코패스
같은 인물이였습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는
캄보디아 국내에 오랫동안 살아온 소수
민족들도 학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만 명 정도로 추산되던 베트남인들이 몰살됐고, 25만 명의 참족 중 9만 명이 살해당했으며, 상업에 주로 종사하던 43만 명의 화인들은 그 절반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소수에 지나지 않던 타이인, 라오인,
고산족들도 학살의 대상이 됐습니다. 1975~79년 강제노역·기아·질병·고문·처형 등으로 약 200만 명의 사람들을 희생시킨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본명은 '살롯 사(សាឡុត ស, Saloth Sâr)'
'폴 포트'라는 이름의 정확한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랑스어 'Politique Potentielle' 또는 영어 'Political potential(정치적 가능성)'에서 따
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마지막때 적그리스도도 정치적인
사람일까요?!
아래는 지난 설교를 편집한
내용입니다.
"흔히 히틀러를 적그스도의 예표라고
하는데 그런 악마같은 사람도
트럼프가 여자와 골프를 좋아하듯이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여자와 애견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그도 믿었었고 고백했던
사람입니다.
히틀러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남긴 말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국가를
만드셨고 이 국가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도구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치땅을
하나님의 도구가 되도록 도우실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또한 스스로
돕는자를 도우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이 자신의 권리,
자유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쟁취할 수 있도록 하실것이다."
히틀러의 언변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도하고 지지하고 있는 트럼프 처럼
은혜가 되지 않습니까?
저렇게 말했던 자가 나중에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세계 2차 대전을
일으켜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히틀러도 트럼프 처럼
사탄을 숭배하는 일루미나티였습니다.
히틀러가 프리메이슨 치마를 입은
관련 사진도 있습니다.
트럼프 또한 지금은 기독교적으로
보이지만 그가 적그리스도가 맞다면
대환난 때에 히틀러 처럼 자신의 정체를 들어낼 것입니다.
참고로 히틀러가 독일 출신인데 트럼프
아버지가 독일계 유대인 입니다.
또한 트럼프가 사람 팔의 찔러 집어넣는
백신을 만들었듯이 히틀러도 유대인들
팔에 고유의 문신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리고 트럼프가 선거로 선출된
정치인 이듯이 아돌프 히틀러도
선거로 선출된 정치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계시는 개인적으로 신뢰하지 않지만
참고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적었다는
송명희 시인의 표에서는 적그리스도는
미국에서 나오며 막강한 정치적인 사람이면서 지나친 기독교적 마인드를
갖고 있다고 언급했는데 그런 인물은
현재 트럼프 밖에 없습니다."
폴 포트는 "후삼년반"의 적그리스도를
연상시키듯이 캄보디아를 "3년 6개월"을
통치하며 인구 사분의 일을 죽였습니다.
또한 폴 포트는 인민들의 생활을 너무 안락하게 하거나 반동분자들을 더 강력하게 통제하지 못하면 혁명은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자본주의의 산물인 도시로 보아 인구 250만명이
사는 수도 프놈펜을 포함한 도시에
거주한 사람들을 강제로 페마캠프 같은
집단 농장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이렇게 강제로 이주당한 '새 사람'은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30%에 육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남의 파리로 불렸던
수도 프놈펜은 사람이 없는
유령도시로 변했습니다.
폴 포트는 그 당시 사람들의 이주 반발을
무마시키려고 제가 선교하였던 베트남
전쟁으로 인하여 미군들에게 폭격을 받은
트라우마를 이용하여 미군의 폭격이
있을 거라며 24(2+4=6=666)시간
내로 강제 이주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며칠만 피신하면 된다고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이처럼 적그리스도와 그의 하수인들도
집단 면역을 내세우며 코로나바이러스
예방과 치료제라고 사람들을 속이며
짐승의 표 코로나 백신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현장 사진을 보면 얼마나 급하게
강제 이주를 당했는지 밥을 먹다가 쫒겨난
모습도 있고 말을 듣지 않으면 구타하고
사살까지 하였습니다.
강제 이주하는 사람들은 장애인 임산부
노인 어린이 환자등 예외가 없었습니다.
예전에 예외없이 코로나 백신을 맞아야지
해외를 나가고 식당에 갈 수 있었듯이요.
현재는 대형 병원에서 예외없이 PCR을
받아야지만 수술과 입원을 할 수
있도록 하듯이 말이죠.
그리고 강제 이주로 가는 길에만
1만명이 사망하였고
다른 도시들에서도
강제이주가 시행되었습니다.
강제 이주된 사람들은
집단농장 강제수용소에서
12시간 24시간 이상을 고된 노역으로
고통당하였고 한해의 도시이민자중
3분의 1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요한계시록 9장
15.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
그리고 폴 포트는 모든 국민들에게
검은 옷을 입혔는데 이것은
짐승의 표 백신 속에 들어간 산화그래핀과
검은 디스크등을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여성들은 단발 머리에
붉은 스카프를 착용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학살과 전쟁으로 인한 죽음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또한 대환란이 임박하여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CBDC 디지털 화폐처럼
이전에 있던 화폐 제도는 폐지되었으며,
프놈펜 중앙은행은 폭탄으로 폭파되고,
총 62개의 은행이 습격된 후 모든 화폐와
장부는 불태워졌으며, 상점 운영도 금지되어
모든 물건은 물물교환과 배급으로 얻는
원시적인 경제구조로 돌아간 데다가
외국과의 무역은 전부 소멸되었고,
국가의 모든 영토는 국가와 집단 농장이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캄보디아 국민들이 가질 수 있던 '사유 재산'은 겨우 숟가락과 그릇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페마캠프 같은 집단 농장에서는
같은 옷을 입었고 쌀은 배급을
하였는데 지금의 우리나라와
세계나라들에서 저소득계층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는 쌀같은 배급도 나중에
폴 포트의 공산국가 같은 짐승의 시대와
짐승의 표를 받게 하려는 사전 작업은
아닌지 의심이 갑니다.
집단 농장 강제수용소에서는
학교도 패쇄되고 가족들도 분리되어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은
공산당 사상교육을 받고 세뇌가 되어
부모가 죄를 지으면 고발하게 하는등
거리낌 없이 사람들을 죽이는
폴 포트의 충성스러운
소년병들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폴 포트와 그의 크메르 루주 정부는
도시에 사는 '신인민'과 학식있는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며 그들을 색출하여
죽였는데 안경쓴 사람 손피부가 곱고
손에 굳은 살이 없는 사람 그리고 글자를 읽을 수 있으면 씨를 말린다며 온가족을
죽였습니다.
또다른 적그리스도의 예표인
독일의 히틀러도 독일의 어려움을
유대인 탓으로 돌려서
학살을 자행하였지요.
적그리스도의 예표인
로마의 네로 황제도
로마의 화재를 그리스도인 짓으로
누명을 씌워서 학살을 하였습니다.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대환란 때에는 짐승의 표 백신을 맞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처럼 여러가지
누명을 씌워서 전염병 창궐등의 핑계로
학살을 자행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24장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요한계시록 20장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런데 폴 포트와 그의 크메르 루주
간부들은 프랑스 유학파들로
자신들도 학식있는 자들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혁명자들은 가장 악명높은
투올 슬렝 21 강제 수용소로 데려가
고문하고 살해하였는데 여러곳에
강제수용소를 운영하였고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곳이 제가 갔었던
"21 강제 수용소"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21 강제 수용소 바닥은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를 상징하는
체크무늬로 되어 있습니다.
킬링필드도 적그리스도의
하수인들이 대환란 시대를
시험 운영해본 것일까요?
킬링필드를 일으킨
크메르 루주 폴 포트 정부는
우연히도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후삼년반과 동일하게
3년 6개월 동안 권세를 받아
학살을 자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적그리스도의 기관인
일루미나티 어젠다를
전하는 심슨 만화에서도 투올 슬렝
21 강제 수용소를 연상시키는 숫자가
나오는데 그것은 심슨
"시즌6 에피소드 21" 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지금과 같은
은행파산 뱅크런 사태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24분 영상입니다.
2+4=6=666
저는 투올 슬렝 21 수용소에서
오토바이를 렌트하여
킬링필드 이름이 붙여진
쯩아익 집단 학살 매장지를
갔었는데 그곳은 우연히도
학교에서 15키로 거리에 위치합니다.
1+5=6=666
그리고 그런 집단 매장지는 캄보디아에
약 2만여개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매장지를 가보니 그곳도 한마디로 힌놈의
골짜기 지옥같은 장소였습니다.
예레미야 7장
3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날이 이르면 이 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말하지 아니하고 죽임의 골짜기라 말하리니 이는 도벳에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했기 때문이니라
즉 킬링필드(killing fields)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 루주가
자행한 학살로 죽은 시체들을
한꺼번에 묻은 집단 매장지를
일컫는 말입니다.
단 한명의 최악의 독재자로 인해
3년 6개월 만에 인구 사분의 일이 죽고
나라는 회복이 불가능하게
수십년 백년을 후퇴시켰습니다.
그리고 폴 포트는 정권에서 물어나서도
내전을 일으켜 수십만명을 죽게하였고
폴 포트가 노년에 심장병으로 죽자
내전도 끝이납니다.
현재 코로나백신 접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심장병으로 죽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폴 포트는 1998년에 죽기전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신은 선량한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사탄과 마귀들과 적그리스도는
회개할 수 없는 존재들이며
후삼년반의 짐승의 표를 받은 자도
회개를 하지 않는다고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9장
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짐승의 표를 받으면 트랜스휴먼
좀비가 되어 회개도 할 수 없는
지옥의 자식 짐승같은 존재가 되기
때문에 순교를 하더라도 짐승의 표는
절대 받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마지막때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와 그들의 하수인들은
심판주로 오시는 만왕의 왕 예수님께
사로잡혀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며
나머지는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9.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
주님의 오심이 가깝습니다.
이번에 우리 부받사 전도지를
캄보디아어로 만들고 캄보디아
현지 선교사님과 여러 목사님과
전도자들에게 배포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하심이라고 믿습니다.
즉 대환란 기간에도 복음은
전파되고 짐승의 표를 거부하고
순교로 천국에 들어 올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파산한 실리콘 밸리 은행
SVB는 미국 내 자산 16위 은행으로,
이번 사태는 2008년 리먼 브러더스
파산 이후 미국 금융기관 파산으로는
최대 규모라고 합니다.
그런데 16위를 더하면
휴거를 상징하는 7이 되는 것입니다.
1+6=7
또한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와 신약성경의
헬라어에는 고유의 숫자가 있듯이
영어를 게마트리아 하면
실리콘 밸리 뱅크(Silicon Valley Bank, SVB)의 약자인 SVB는 아래의 값이
나옵니다.
S= 19
V= 22
B= 2
그리고 이것을 수비학으로
더하면 43이 나오고 43은
휴거를 상징하는 7이 됩니다.
4+3=7
또한
19
22
2 를 하나씩 전부 더하면 16이 나오고
이것도 휴거를 상징하는 숫자 7이
된다는 것입니다.
실리콘 밸리 은행의 파산은
휴거가 임박함을 뜻하는 것일까요?
또한 현재 미국 14위 은행인
퍼스트리퍼블릭 은행도 흔들리고
있는데 14위는 7이 두번 더해진
수로 구원의 수입니다.
우리를 임박한 심판에서
휴거로 구원하실 것이라는
싸인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SVB에서 S가 나오는 19는
코로나19와 코비드19 백신이 연상되고
S는 마치 사탄(Satan)을 떠오르게
합니다.
사탄이 코로나바이러스와
코로나백신을 만들었다는
싸인일까요?
또한 22가 나오는 V는 백신(Vaccine)을
연상시키고 22를 수비학으로 더하면
넷째인을 연상시키는 숫자 4가 나옵니다.
2+2=4
그리고 B는 짐승(Beast)과 짐승의 표를
연상시키면서 두번째를 의미하는
숫자 2가 나오는데 이것은 7년 환란
중에서 전삼년반의 소환란을 지나 두번째
대환란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S의 숫자 19의 뜻인
코로나19 바이러스는
V를 상징하는 코비드19 백신 접종을
유발시켜서 B가 나오는 전삼년반의
짐승의 표를 받게 하였는데
이것은 S가 나오는 실리콘에 있는
은행이 파산되면 V와 B가 나오는
숫자값 222를 더한 숫자값인
요한계시록 22장 20절에 말씀 처럼
주님이 속히 오신다는 메시지가
되는 것일까요?!
요한계시록 22장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래는 무명한자님께서 교회 카페에
올려주신 글입니다.
"다음은 死地선다형 객관식 퀴즈입니다.
CBDC는 무엇의 약자일까요?
① 통제된 배신 마귀된 기독교인들
Controlled
Betrayed
Demonic
Christians
② 통제된 짐승 디지털 칩핑
(몸에 접종,부착하기)
Controlled
Beast
Digital
Chipping
③ 중앙은행 죽음의 음모
Central
Bank
Death
Conspiracy
④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그리고 SVB가 파산한 2023년 3월 10일
을 수비학으로 더하면 심판의 임박을
뜻하는 숫자 11이 나옵니다.
2+2+3+3+1=11
거기다가 이 은행은 13개국 및 지역에
사무소를 두고 운영하고 있는데
13은 적그리스도 세력들이 추앙하는
숫자로 배교와 배신을 가리키지요.
또한 SVB 은행은 666 숫자 값이 나오는
18억달러 규모의 손실을 봤다는 전날
발표가 파산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고
발표 직후 주가가 이번에도 666을
상징하는 60% 이상 폭락하고 파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2019년도에 미국
선교를 갔다가 캘리포니아주
실리콘 밸리에도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실리콘 밸리에 있는
스타벅스를 가게 되었는데
커피를 시키고 100달러 지폐를
주었더니 거대한 그곳 스타벅스에는
100달러를 바꿔줄 수 있는 현금이
없어서 멘붕이 왔었습니다.
그러니깐 오래전 부터 현금없는
사회 CBDC 디지털 화폐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알고보니 실리콘 밸리 은행이
파산되기 전인 지난 8일에 크립토
(암호화폐) 전문 은행인 실버게이트가
먼저 파산한 후 불과 4일(넷째인)
만에 SVB는 420억(4+2=6)달러의 예금이
한꺼번에 인출되면서 결국 지급 불능상태에
이르렀고 이것은 전체 예금의 24%(2+4=6)에 달하는 규모이고 실리콘밸리은행(SVB),
시그니처 은행이 연이어 폐쇄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버게이트 은행이 파산한
2023년 3월 8일은
수비학으로 666을 상징하는 숫자
18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2+0+2+3+3+8=18
사실 우한 폐렴환자 발생 첫 보도도
짐승의 표 666 숫자가 나오는 18이
나오는 2019년 12월 30일입니다.
2+1+9+1+2+3=18
그래서 이모든 것이 적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이 계획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위스 2대 은행 중 하나인
유럽 최대의 투자 은행인 크레디트스위스
은행도 현재 위기 상황인데 18일에는
SVB 옛 모기업인 파이낸셜그룹도 파산
신청을 하였습니다.
지금 도미노 현상으로 세계적으로 은행들이
파산하며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즉 세계 금융권이
붕괴되고 있는것 같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 정부의
예금자보호법도
보장한도 5천만원까지
보상해주며 5천만원 이상이면
보상을 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북한이 연이어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을 보니깐 핵전쟁도 임박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세상의 미련을 버리고
하늘을 바라봐야 되는 때인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마지막때를 잘 준비하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그리고 SVB 실리콘 밸리 은행은
36시간 만에 붕괴가 되었는데
여기에서도 짐승의 표를 상징하는
숫자 666이 나옵니다.
3×6=18=666
이처럼 실리콘 밸리 은행 파산은
666 짐승의 표를 주기 위해서
계획적으로 일으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지난주에는 우리나라
공군이 한미연합으로 주·야간
지속 출격 훈련을 실시하였는데
무장을 장착한 전투기가 36시간 연속
출격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36=3×6=18=6+6+6
여기에서도 짐승의 표 666이
나오지요.
거기다가 666을 연상시키는 15일(1+5=6)부터 시작된 한미연합훈련 자유의 방패 일환으로, 한미가 임진강 위에 180m 길이의 수상 다리를 건설해서
도하하는 훈련을 진행했다는 것입니다.
180m는 666을 상징하지요.
18=6+6+6
이것은 우리나라와 미국이
666 짐승의 표를 주는 적그리스도와
그의 권세에게 넘어갔다는 증거입니다.
최근에 관련 영상도 올렸지만
김해 구산동 빌딩에서 의원을
하는 젊은 원장이 있었습니다.
빌딩 벽과 의원 창문등에는 거대한
글씨로 "예수님은 절대 치료자"
"주 예수님에 절대 믿음"
"주 예수님에 절대 기적"등
말씀 구절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붙이고 복음을 전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전국을 순회하며 다녔지만
저렇게 큰 글씨로 빌딩 벽등에
붙이며 복음을 확신있게 전하는
사람도 보지 못한것 같습니다.
저도 오래전 마치 저병원에 가면
질병이 치료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겨서 한번 치료받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근처에 사는 어느 성도에게
들으니 그 의사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듣기로는 그곳에 간호사가 의료보험등
으로 기관에 병원장을 신고하며 많이
힘들게 했다는데 스트레스를 받아서
죽었다고는 하지만 병원장 의사로
있으려면 코백신을 맞지 않았겠냐며
백신을 맞아 죽은 것으로 보인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더욱이 죽은 시점도 코로나19 접종이
한창일때고 나이도 40~50대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알고보니 아래층은
어머니가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WCC 종교통합하는 통합측
교회였습니다.
정확한 사인은 모르겠지만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교 통합하고 코비드19 백신을
맞으면 죽는다."
그리고 교회는 이번에 경매에 넘어
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종교통합하고 코백신을 맞으면
망하고 실제로 죽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지난주에 뉴스를 보았는데
2017년 여자의 징조가 있었던 해에
백년가약을 맺은 어느 부부가
2020년 4월 자연임신으로 이란성 쌍둥이를
낳았고 3년만에 또 이란성 쌍둥이를
두명을 낳았습니다.
쌍둥이를 연속 출산하는 겹쌍둥이는
확률이 10만분의 1에 가까울 정도로
매우 드문일이라고 합니다.
출산 당시 몸무게도
하준군 2.6㎏, 예준은 2.4㎏로 건강하게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숫자를 더하면
구원의 수 천국의 수를 상징하는
숫자 14가 나옵니다.
2+6+2+4=14
고린도후서 12장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12장 2절은 14로 볼 수도 있겠네요
12+2=14
그리고 아이들의 이름인
하준 예준은 부받사 교회에
은혜 성도님의 자녀들에 이름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은혜 성도님의 자녀의 이름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뜻하는
하준 예준 성준입니다.
그리고 계시록 12장과 하늘에서는
여자가 출산을 하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상징하는 태양 수성 금성이
목성을 채여 올라가는 모습이 연출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이것은 채여 올라가는
휴거가 임박했다는 싸인일까요?
그런데 출산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최근 산모의 몸이 급속도로 나빠져
하반신을 움직일수도 감각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됐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휴거가 일어나면
대환란이 온다는 싸인일까요?!
바로 다음 구절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지난 3월 16일은 부받사의 동은 형제
생일이였고 17일은 은혜(지혜)
성도님의 생일이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16일과 17일을 더하면
23(16+17=23)이 나오고 이것을
3월과 전부 합하면 우연히도
3월 23일이 됩니다.
3월 23일은 월삭으로
휴거를 상징하는 행성 7개가
성도를 상징하는 하늘의 물고기
자리에 주님 오시는 길을 예비하듯이
일렬로 줄을 섭니다.
마가복음 1장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이것은 이중적인 말씀으로 주의 길을
곧게하는 사자들을 별들로도 해석할 수
있겠지요.
욥기 38장
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사실 이세상의 왕들이 다른 나라를
방문할때도 군인들이 줄지어 왕의 길을
예비하듯이 줄을 섭니다.
그리고 저의 생일은
2월 1일 인데 신기하게도 여기에도
휴거와 천국을 상징하는 혼인잔치가
나왔습니다.
요한복음 2장
1. 셋째 날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어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 있었고
아멘 할렐루야!
마라나타!
이번에 한국일보 기사를 보니깐
3월 20일에
2년 5개월 만에 마스크를 벗은 채 대중교통 이용이 가능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필 휴거의 숫자가 나오는
2년 5개월 만에 노예들의 족쇄같은
마스크를 벗게 된다는 것입니다.
2+5=7
그리고 알고보니 확진자도
7일간 격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한국갤럽, 한국리서치의 여론 조사에서는 '계속 마스크를 쓰겠다'는 응답이 각각 70%를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숫자 70은 바벨론 노예에서
해방된 숫자로 70년의 바빌론 포로생활이 끝나고 페르시아 고레스왕 때
(BC 538년경) 유대인이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되었던
년수입니다.
(BC 5+3+8=16=1+6=7)
지금은 계시록에 나오는 첫번째
바벨론 미국이 세계를 다스리고 있는데
우리들도 곧 있을 휴거로 바벨론에서
해방이 되어 우리의 본향인 새예루살렘
천국으로 귀환된다는 싸인일까요?!
시편 126장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저희집 앞에는 수십마리의
까치들이 둥지를 틀고 살고있는데
한번은 아침에 요란하게 우는
까치들의 소리를 들으며 반가운
예수님이 오시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 저의 동역자인
김사역자 집 앞에도 까치가
새둥지를 틀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까치의
울음소리는 우리가 그토록 사모하며
기다리는 신랑되시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싸인일까요?!
나무위키를 보면 까치는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길조로 소개되며 비공식 국조이기도 합니다. 민간 신앙에는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고 행운과 희소식을
가져다 주는 전령사이기도 합니다.
1964년 국제조류회의(ICBP) 한국본부 및 한국일보와 관계학계의 후원으로 나라 새 뽑기 운동을 벌인 적 있는데 그때 전국적인 공개응모에서 총 2만 2780표 중 까치가 9373표로 1위를 차지한 적은 있습니다.
그런데 "9373" 득표율에서
예수님의 오심을 상징하는
숫자인 37가 73이 나와서
의미심장합니다.
또한 최근에 데칼코마니아를
발견한 승민 아빠님의 백신을 2차까지
맞은 아들이 최근에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 부받사교회에서도 그 즈음에
백신을 3차까지 접종하고 깨어나서
지난날에 죄악들을 벗어버리고
저의 유튜브를 통해 온라인 교회로
들어오신 20대 형제가 있어서
이 모든게 반가운 소식이며
하나님의 섭리같습니다.
이처럼 백신을 2차 3차까지 맞았어도
이렇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깨어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가족들이 백신을 이미
맞았다고 낙심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간구해야 됨을
믿습니다.
사도행전 16장
31. 그들이 말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아멘 할렐루야!
또한 최근에 어느 성도분이
부받사 교회 단톡방을 나가시려고 하셔서
아래의 말씀을 보내주며 권면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요한복음 10장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그런데 특이하게도 교회 공동체가 나오는
두개의 성구가 마치 데칼코마니아 같이 똑같이
구원의 완성을 뜻하는 숫자
10장에 위치하고 구절도 수비학으로
더하면 휴거를 상징하는 숫자
7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25절=2+5=7
16절=1+6=7
이것은 휴거 신부는
교회 공동체에 속해있는
사람이라는 싸인일까요?!
즉 빌라델비아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면 휴거에서
탈락되거나 사탄의 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미혹자들이
아주 많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끝으로 이시간에는 18세기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 한편을 올리겠습니다.
제가 몇 번 언급한 조지 휫필드
목사님은 야외 복음 설교자이면서
순회 전도자이십니다.
또한 영국과 미국을 부흥시킨 기독교
역사의 큰 업적을 남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사실 저의 야외 설교와 순회 전도도
조지 휫필드 목사님의 영향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요즘 올리고 있는 아침 묵상의
설교의 황태자 스펄젼 목사님도 예수님
다음으로 조지 휫필드 목사님을 따를
정도였습니다.
휫필드 목사님의 아래 설교를 올리신
어느 분께서는 휫필드 목사님은
소경 바디매오에게 배울 수 있는 7가지 교훈을 대해서 하나하나 설교해 나가시며 이 설교에서 성령의 조명에 대한 개념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1.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를 지른 점
2. “다윗의 아들 예수여!”라고 한 점-즉,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고 있었다.
3. 많은 사람이 꾸짖었으나 더 크게
소리 지른 점
4. 다윗의 아들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
5. 예수님이 부르시니,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온 점
6.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냐고 했을 때, 보기를 원한다고 정확하게 대답한 점
7. ‘가라’고 했는데, 가지 않고 예수님을
길에서 따른 점.
*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여리고에서
바디매오뿐만 아니라 세리장 삭개오(눅 19:1-10)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지 휫필드 설교 요약에서도
휴거를 상징하는 숫자 7이 나오지만 그는
30년 동안 매 주일 설교를 평균 50시간을 했다고 합니다. 하루 7시간씩 설교를 한 셈입니다.
그리고 우연히도 휫필드는 제가 선교갔었던
미국 대륙을 7번 방문하였고 7이
두번나오는 1770년에 하늘 나라로
갔다는 것입니다.
휴거가 임박한 이때에 휫필드
목사님의 설교를 올리게 된것도
하나님의 섭리하심 같습니다.
'휫필드는 그를 추종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휫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라. 다만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한 교파나 교단의 창시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1770년 보스톤으로 여행하던 중, 엑세터의 어느 여관에서 한밤중에 몰려든 청중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한 후,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10월 2일 그의 육신은 미국 메사추세츠의 뉴베리포트 교회에 묻혔고, 영국에서는 존 웨슬리의 인도로 장례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1879년 찰스 스펄젼은 휫필드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지 휫필드와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쏟는 것은 결코 끝이 없다. 종종 그의 생애를 읽을 때 어느 부분을 펼치든, 즉각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는 '살았다'. 다른 사람들은 단지 반만 살다 간 것처럼 보인다. 휫필드의 모든 삶은 불이었고 날개였으며, 힘이었다. 나의 주님께 순종하는데 있어 나에게 모델이 있다면 그것은 조지 휫필드이다."
소경 바디매오 - 휫필드 -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막 10:52).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에서(고넬료에게 한 설교) 나사렛 예수를 언급하면서 그분에 대하여 짤막하지만 영광스럽고도 존귀한 묘사를 하였습니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그는 두루 다니셨으며, 착한 일을 행할 기회를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자신을 보내신 분의 일을 하시는 것으로 자신의 양식과 음료를 삼으셨습니다. 한 선지자가 '의의 태양'이라고 예언했던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텅빈 우주 공간을 통하여 소생시키는 광선을 비쳐오듯이 의의 태양이신 복되신 예수님은 그분이 나타나시는 곳마다 치료의 역사를 가져오셨습니다. 그분은 실로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이셨으며 여러 기적들을 행하심으로써 장차 세상에 오리라 예고되었던 메시야가 자신이었음을 증명하셨습니다.
저는 먼저, 복음서 기자가 기록한 대로의 사실을 좀 관찰하고 나서 그 다음에 그 관찰로부터 도출되는 몇 가지 점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설교를 축복해 주셔서 모든 영적인 소경들이 시력을 되찾고 바디매오의 본을 따라 예수님을 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사건의 전체 이야기를 알기 원한다면 10장 46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저희가(예수님과 제자들입니다. 앞선 문맥에 의하면 그들은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여리고는 여호수아가 저주한 곳입니다(수 6:26). 그러나 그러한 곳에서도 예수님께로 회심한 자가 나왔습니다.
즉 그곳에서 이미 삭개오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디매오가 그곳에서 우리처럼 부름을 받았습니다. 나사렛에서조차도 선한 것이 나왔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곳에서 자라나지 않았습니까. 그의 주권적인 은혜는 가장 열악한 곳에 있는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까지 미쳤고
그들을 정복해 버렸습니다. 그 예수님이 여리고로 지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인도하실 때에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가장 열악하게 보이는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가기를 꺼려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택함 받은 삶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여리고로 갔습니다.
그들은 순회 전도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자주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은 한 곳에 좀처럼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특정지역에 머물며 사역하는 목회자들을 공격하는 주장이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행하심으로써, 순회 전도자로 부름받고 자질을 갖추어, 그 사역에 몸담고 있는 자들의 일을 거룩한 것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느 지역에 부흥이 일어나는 데는 순회 설교가 큰 역할을 한다고 확신해도 좋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부흥의 방편을 지시하거나 명령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요즘 순회 설교의 겉모습이 초라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것을 비난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들은 순회 설교를 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비난했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허다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시대의 대제사장들이 부른 대로 일단의 '무리'(rabble:하층민, 오합지졸, 어중이 떠중이란 의미로 예수님의 추종자들을 낮추어 부른 말)였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를 계속해서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의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은 빈민들이었으며, 그 평범했던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기쁨으로 듣고 한곳에서 또 다른 곳을 그를 좇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른다고 해서 모두가 그의 참된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이들은 단지 떡을 얻기 위하여 그를 좇았으며, 어떤 이들은 호기심에 이끌려 그를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그것에 의해 양육받기 위해 그를 따랐습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또한 자신을 따르고 있는 이 무리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얼마나 언짢은 존재들인지를 의식하셨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언제나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하나라도 있느냐?" 라고 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우리 주님께서 그들을 자기로부터 떠나게 했다는 것을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오직 단 한번의 예외만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사흘을 지내고 먹을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목자 없는 양떼처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가르치셨습니다. 무리가 어떤 이유에서 나아왔던 간에 복음전파자가 불쌍한 영혼들을 향해 말씀을 전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 전도자들은 청중들에게 단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을 따른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주의 시켜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자주 그렇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그의 사역자들을 따르며 그들의 말씀을 기쁘게 듣고 여러 가지 일들도 했지만, 두렵게도 마치 헤롯 임금처럼 그들을 따라 천국에는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여리고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분에게 분을 내며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쳐댔습니까? 누가 대중적인 인기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아침 구름이나 새벽이슬 같아서 쉽게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대중적 인기란 타오르는 용광로와 같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인기있는 유명 사역자들이 그것에 의해 해를 입지 않도록 지켜 줄 수가 없습니다. 느부갓네살의 풀무에 던져졌던 세 사람을 지켜 주셨던 그분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능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종종 생각합니다. 유명한 설교자들이 많은 무리의 추종을 받으며 느낄 수 있는 지나친 기쁨과 자기만족을 잠재우거나 최소한 완화시킬 수 있는 생각은 무엇일까 하고 말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이 청중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설교에 의해 구원의 유익을 받지 못하고 돌아갔을까? 아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설교에 의해 그들의 저주의 분량을 더욱 커지게 하였을까?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 거리에서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진실로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본문을 계속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막 10:46).
그는 유명한 거지였던 것 같습니다. 앞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방도 없이 먹기 위해 구걸해야만 했습니다. 그의 경우 더 불쌍한 것이, 그의 이름이 암시해 주는 것처럼 소경 아버지의 소경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 30절에 보면 "소경 둘이 ...소리질러 가로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에서 한 사람만 언급된 것은 바디매오 혼자만이 그 길에서 예수님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경건하고 분별력있는 주석가 매튜 헨리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바디매오는 구걸한다고 해서 비난받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그렇게 하고 있는 경우, 우리는 그 사람들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라고 말했던 것은 불의한 청지기였습니다. 남의 신세지기를 싫어하게 만드는 것은 때로 우리의 교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마음을 지니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구제를 받고 사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던 여자들이 자신들의 소유를 가지고 예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노동을 할 수 없는 바디매오는 살아가기 위해 구걸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 잘 하기 위해 큰길가에 앉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한 성문가에 자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시력은 잃었지만 온전히 들을 수는 있었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감각을 잃어버리더라도 다른 감각을 사용해서 결국 모든 좋은 것들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비록 볼 수는 없지만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바디매오에게는 큰 행복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우리 주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호기심에 무슨 일인지 알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에게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어 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그곳에서 자라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로 이 말은 경멸하는 의미로도 쓰였습니다. 나사렛은 매우 비천하고 열악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사함이 없는 사람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바디매오는 어떻게 했습니까? 47절을 보면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이것을 보면 그는 비록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마음의 눈이 어느 정도 열려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 중 누구보다도 더 잘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에 대해 듣자마자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전에 예수님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께서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며, 또 기꺼이 그런 일을 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소리지르기 시작했습니다."(KJV:He began to cry out). 이 표현은 그가 자신의 비참함과 치료받아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음을 암시해줍니다. 그의 간구는 입술에서 나오자마자 얼어붙어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군중들의 요란한 소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들으실 수 있도록 그는 크게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마자 다시는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는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은 그분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분을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세상에 오신 메시아로 믿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주 하나님은 그 메시아에게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고 그 나라는 영원할 것임을 바디매오는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이것은 마태복음 20장 30절에 있는 병행 구절에 "주여,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래 전 이사야 35장에 이미 예언되기를, 그분이 오실 때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발 앞에 드려진 영혼의 자연스러운 언어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어떤 선행을 통해 치료함을 받겠다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는 식의 어떤 자랑거리도, 자기 의도 없습니다. 그는 자기의 선행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능력과 그분이 기꺼이 고쳐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오직 심령 가득히, 심령으로부터 그는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상한 마음으로, 가난한 말로 기도드렸던 그 세리의 동일한 언어를 가지고 그는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 죄인의 친구시며, 구원자시여, 참 하나님이시나 다윗의 자손이 되기를 기뻐하셔서 사람이 되시고 잃어버려진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는 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가난하고 비천하고 눈먼 거지를 향해 동정심을 발하소서"라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처럼 감동적인 간구가 그 무리의 마음을 녹여서 그들로 하여금 그를 위해 예수님께 구하게 하고 또 그를 예수님께로 데려가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48절을 보면 정반대입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원어를 보면, 이 말은 위협하며 꾸짖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이 말은 매우 성난 태도로 말해진 것입니다. 그들은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만일 그가 잠잠하지 않으면 그를 때리겠다고 위협하는 말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거지가 나사렛 예수께 있어서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할 일이 없어서 너 같은 것을 시중들어 주시겠느냐'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소경 바디매오를 매우 낙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양을 따르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로부터 반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때때로 배우자로부터 비난받기도 하고 친형제 자매들의 노여움을 사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대를 당하는 것은 때로 간절한 열의를 더욱 자극하는 역할만 합니다. 바디매오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무리의 꾸지람과 위협을 받고 조용해지기는커녕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그는 동일한 겸손한 말로 계속해서 부르짖었습니다.
만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만 한다면 그는 화난 무리들이 그에게 무어라 말하고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개의치 않을 태도입니다. 이것은 공허한 간구가 아닙니다. 그가 원하는 것을 간절하게 거듭 간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헛된 중언부언이 아니면서도 같은 말을 거듭해서 간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고통 중에 두 번이나 같은 말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하고 말입니다.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거듭 구하였습니다. 그 다윗의 자손은 그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그분은 무리들과 같은 태도를 취하시고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하셨습니까? 아니면 그를 무시해 버리고 갈 길을 계속해 가셨습니까? 아닙니다.
마가는 49절에서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분은 여행 중이었습니다. 그것도 서두르는 길이었을 것입니다(지금은 멈추어 서서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선한 일을 하시기 위해 길을 가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가난한 자에게도, 심지어 진짜 거지에게도 우리가 겸손하고 친절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또 잠잠하라고 꾸짖었던 이들의 눈멀고, 잘못된 열심을 무언중에 책망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소경의 믿음과 그를 치료할 때 드러나는 주님의 자비와 능력에 사람들이 주목할 수 잇도록 무리를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우리가 자선을 행하되 공개적으로 행하도록 부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에 모순되지 않습니다. 자선을 행하고 구제할 때 그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과 사람들이 알게 하기 위해 그 일을 하는 것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후자는 언제나 죄이며 전자는 종종 우리의 의무가 됩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부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누가 그를 불렀습니까? 잠시 전에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던 바로 그들일 것입니다.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납니다. 우리를 대적하고 낙심시킨 자들이 후에는 우리의 친구가 됩니다. "삶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언 16;7).
예수님께 부르짖는 불쌍한 영혼들을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하고, 자제하라고 하고 너무 의로운 척 하지 말라고 하던 모든 자들이 여기 이 사람들을 본받아 한때 자신들이 핍박하고 비방하던 자들을 격려해 주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그들의 말과 태도는 소경의 구원에 대한 염려와 서두름을 느끼게 합니다. 오!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는 이들을 향해 오래 참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갓 깨어난 영혼을 대적하곤 하는데 그것이 적대감에서가 아니라 편견과 오해, 무지와 불신앙 때문에 형성된 잘못된 관계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진정 그들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경우가 아니라 할지라도 모든 이들을 온유함으로 대하며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축복해 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고 이로써 축복을 기업으로 얻게 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얻게 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바디매오도 이 반대자들을 향해 거친 말을 토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바디매오의 태도를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오거늘"
만일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지를 때 그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왜 당신들은 나를 조롱합니까? 왜 나에게 일어나라고 말합니까? 내가 일어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일어서고 나면 소경인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찾아갈 수 있습니까? 만일 그분이 내게 오신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신들의 요구는 쓸데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오늘날 이런 식의 반론이 복음 선포자들에게 수없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왜 당신들은 우리에게 예수께 나아가 그를 믿으라고 요구하나요? 당신들은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나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는다면 아무도 예수께 나올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나갈 수 없는 바디매오에게 일어나서 예수께 가라고 사람들이 말한 것은, 오늘날 복음 선포자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진실로 그러합니다. 이런 반론을 말하는 사람들이 바디매오를 본받아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나와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으라고 요청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그것은 당신들 안에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어 냄새나는 나사로의 시신을 향해 "나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이 나사로 스스로 그 무덤에서부터 나아 올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까? 우리 복음 전파자들은 만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고 여러분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말씀과 함께 역사하여, 여러분의 죽은 영혼을 살려내고 일으키게 되기를 소망하고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이유에서 여러분들에게 믿으라고 요구합니다. 즉, 여러분들은 그분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무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여러분의 불신앙에 대해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믿음을 간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그분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분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에 더해서 연못가에서 기다리는 것은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요구받은 의무를 성실하고 꾸준히 이행하면서 여러분이 가진 힘을 사용하는 것은 여러분의 할 일인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영적인 행위의 기초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영적으로 선한 일을 전혀 행할 수 없다고 해도, 여러분이 이성적인 존재인 이상 도덕적으로, 물리적으로 선한 일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당신의 의무를 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은혜를 불러오는 것은 아니며, 또 당신에게 그런 자격이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그 길은 당신이 걸어가도록 요구받고 있는 길이며,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마른손을 뻗으려고 노력할 때, 그때 그것이 치유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당신 안에 믿음을 일으켜 주실 줄 누가 압니까? 바디매오는 그러한 장애물들을 극복하는 예를 보여주었습니다.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이 자기를 낮추어 단 한 번만이라도 이 가난한 소경 거지에게 배울 수만 있다면! 그는 그의 겉옷을 내어버리고 일어나 소경인 채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이 옷은 긴 외투거나 망토라고 여겨집니다. 그는 비가 올 때나 추울 때 그것으로 자기 몸을 감쌌을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은 그가 지닌 가장 요긴하고 값비싼 의복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그것을 입은 채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렇게 한다면 그 옷이 그의 발꿈치에 걸려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되거나, 최소한 예수님께 나아가 는 것이 지체될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값진 것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내어던져 버렸습니다. 이 말은 그가 매우 서둘러 그리고 단호하게 그것을 그의 어깨로부터 던져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만일 그가 원하는 대로 고침을 받는다면 다시는 그 옷이 그에게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이후부터 영원토록 그분의 나라에서 그분을 보며 즐거워할 자들은 모두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오른손을 자르고, 자기 오른쪽 눈을 뽑아버릴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고, 남편과 아내를 버릴 것입니다. 예, 그들 자신의 생명마저도 내버릴 것입니다.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권면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십시오"(히 12:1).
여기서 얽매인다는 말은 원어로 볼 때 발꿈치에 걸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관습상 긴 옷을 입은 사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디매오의 몸을 감싸고 있던 옷이 바로 그런 옷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내어 던지고 일어나 예수께로 감으로써 그가 진실로 다시 보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가까이 오지 마라, 이 소란스럽고 염치없는 거지야" 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기이한 질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바디매오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모르신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께서 우리를 다루시듯, 그를 다루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결핍을 인정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그분을 의존하는 존재임을 고백하게 하고 또 우리의 필요를 더 실감하게 하여 그 분의 신적인 도우심을 더 인식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 소경은 즉시 대답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저는 마치 이 불쌍한 사람이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자기 가슴속의 간절함을 나타내는 표정과 몸짓으로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외치는 것을 보는 듯 합니다. 그의 말은 마치 "저는 당신이 세상에 오시기로 된 메시아임을 믿습니다. 저는 당신의 이름을 이미 들어왔습니다. 오 예수님! 당신이 이 길로 오신다는, 오랫동안 기다려 오던 복된 소식을 듣고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금이나 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만이, 오직 당신만이 제게 주실 수 있는 그것을 구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가 구하자 그는 즉시 그것을 받았습니다.
52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라고 했습니다. 말씀과 함께 능력이 나간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더라"는 말씀대로 어둠 가운데 빛을 명령하신 그분께서 불쌍한 소경 거지의 눈에 빛을 명하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제 그에게 빛이 있습니다. 이 기적은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그는 곧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직후 무언가에 의해 빛이 가로 막혔습니다 다시 그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시력을 주신 분이 그 앞에 서 계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셨습니다.
오! 행복한 바디매오여! 그대의 눈이 열리고 그대가 처음 바라보는 대상은 늘, 언제나, 완전히 사랑스러우신 예수님이 아니신가! 그대는 놀라움과 경이감에 휩싸여 있고 모든 제자들과 큰 무리는 그대를 둘러싸고 주목하고 있다네. 자, 이제 보게 되었는데 왜 그대의 주님의 명령대로 그대의 길을 가지 않는가? 왜 서둘러서 겉옷을 다시 짚어들지 않는가?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믿기로는 그의 육신의 눈이 열리자, 그의 영혼도 눈을 뜨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흠모할 만한 풍채나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지만, 바디매오는 마음의 눈으로 예수님 안에 있는 고귀하고 탁월한 인격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동시에 이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예수님에게 신성한 느낌에 이끌려 그의 겉옷을 가지러 가는 대신 길에서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는 이 행동을 통해 신실하고 진실했던 룻과 같이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길에서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 길은 좁은 길이요,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저는 그 후 그가 면류관을 받기까지 예수님을 좇고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에 주님과 함께 앉아 있을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자, 이제 청중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놀라운 기적과 관련해서 여러분의 심령이 감명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모세의 노래를 부를 용의가 있습니까?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출 15:11). 오 예수님! 당신의 행사는 너무나 놀랍습니다. 우리 영혼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바디매오에게 행하신 일을 찬양하면서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본문은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날에 살고 있는 우리의 교훈을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둘째 대지에서 이 이야기로부터 어떤 영적인 메시지를 얻을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이미 약간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자연인은 성경의 바깥뜰까지 밖에는 못 들어갑니다. 이 본문이나 혹은 우리 주님의 다른 이적에 대한 내용을 읽을 때에도 자연인은 호머의 <전쟁기>나 알렉산더의 전기를 읽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듣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나는 바로 당신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증거되는 복음을 듣고 앉아 있는 당신이 누구이건 간에 만일 당신이 자연인의 상태에 있다면 당신의 영혼은 바디매오의 육신이 그러했듯이 영적으로 소경인 것입니다. 소경 아버지의 소경 아들입니다. 당신 조상 아담의 소경 자손인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신의 순전함을 잃어 버렸을 때 그의 영적 시력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정당하게 부과된 영적으로 눈먼 상태를 당신과 나 그리고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정말 자신들이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정말 잠꼬대 같은 말이요, 정신이 나간 사람의 말입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나 타락한 인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단지 눈멀었을 뿐만 아니라 죽어 있는 상태까지 보여줍니다. 본성상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길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바디매오가 소경일 때 무지개의 색깔들을 알 수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나는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이 무언가 느끼기 시작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염려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봅니다. 만일 제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이 무어라고 대답할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시력을 되찾고 싶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목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아도 하나님은 제가 여러분에게 잠잠하라고 꾸짖는 것을 금하십니다.
아니, 여러분이 자신의 자연적인 소경 상태에 대하여 깨닫게 되고, 그래서 진심으로 예수님께 부르짖고 있는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그의 성령에 의해 깨어났다는 최소한의 표지인 것입니다(비록 여러분이 에서처럼 비통하게 울고서도 마침내 버림받는 일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러므로 일어나십시오. 안심하십시오. 확신하건대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바디매오의 본을 따르십시오. 여러분의 겉옷을 내어 던지십시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십시오. 일어나서 예수님께 오십시오. 그분은 기록된 말씀으로 저에게 여러분을 부르라고 명령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나사렛 예수를 찾으십시오. 보십시오. 그분은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 오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큰길가에 있습니다. 확신컨대 예수님은 지금 지나가고 계십니다. 저는 그분의 임재를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이 이것을 함께 느끼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분께 힘껏 부르짖으십시오! 그분은 강하시며 또 기꺼이 여러분을 구원코자 하십니다.
여러분 자신을 주권적인 은혜의 발아래 두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이렇게 말하십시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디매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에 따라 여러분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소경이라고 해도 여러분은 보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사단과 불신앙은 여러분에게 수많은 반론을 제시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육적인 모든 것들도 그들과 함께 여러분을 고소하며 잠잠하라고 여러분을 꾸짖을 것입니다.
어떤 것은 여러분의 눈먼 것이 너무나 심각한 상태여서 고침을 받을 수 없다고 여러분에게 말할 것입니다. 어떤 것은 여러분에게 이미 너무 늦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또 어떤 것은 여러분에게 비록 예수는 할 수 있지만 그는 너희 같은 가난하고, 눈멀고 비열한 거지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여러분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으면 꾸짖을수록 여러분은 더욱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구주시며, 죄인의 친구이십니다. 당신은 다윗의 자손이시요 따라서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그렇게 부르짖고 매달려야 합니다. 이 이름들을 생각하시고 힘을 내십시오. 그분에게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은 다윗의 주이셨지만, 육체를 따라 다윗의 자손이 되셨습니다. 이는 그를 통하여 여러분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바로 당신이 어떤 사람이건 간에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문자 그대로 가난한 거지라고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비천한 당신을 주목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그런 가난한 거지를 부르시기 위해 큰길로나 산울타리로나 가리지 않고 오십니다. 만일 당신이 부자라 해도 스스로를 너무 높게 생각하여 예수님 앞에 엎드리기를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왕 중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예수님 안에서 부요해 지기까지는 결코 진실로 부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시당하거나 세상적인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을 겁내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고쳐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어린양 안에서 너무나 매력적이고, 너무나 끌리고, 너무나 만족스러운 그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땅 위에 있는 모든 즐거움은 여러분 앞에서 시들어 버리고, 죽고, 소멸되어 버릴 것입니다.
마치 바디매오가 시력을 되찾고 나서는 다시 돌아가 그의 겉옷을 가져오지 않은 것처럼, 여러분도 이전의 헛되고 보잘것없는 오락 거리를 더 이상 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 오늘 여러분 가운데 그러한 소경 거지들이 많이 있기를!
이곳에는 가련한 벌레 같은 저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추수하게 희어진 들판을 보며 매우 기뻐합니다. 그래서 이 가운데 복음의 그물을 수없이 던졌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 중에 어떤 이들이 일어나 나의 예수님께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저는 무거운 마음을 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이 아니라 그분을 전하기 원합니다.
저에게서 듣고 저를 따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믿고 그를 따르십시오. 저는 큰길이나 산울타리 안에서 전한 저의 설교 때문에 낙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 중 누구에 대해서도 단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디매오를 부르셨습니다. 저주받아 하나님께 드려진, 여리고를 지나가시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분이 이 비천한 들판에서 여러분 중 어떤 이들을 부르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이 팔이 짧아져서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 없단 말입니까? 그분이 1700년 전에 지니고 계셨던, 그분을 통해 아버지께 나아가는 자를 얼마든지
구원하실 힘과 의욕을 지금은 가지고 계시지 않는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분명코 그분은 지금도 그러하십니다. 그분은 말씀하신 대로 행하실 것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십니다. 결단코 그렇습니다. 얼마나 힘이 되는 말씀입니까! 죄인 여러분 이 말씀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일어나십시오. 예수님께서 정말 여러분을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믿건대, 여러분 중에 어떤 이들은 이 초대를 받아들이고 오래 전에 이미 그분을 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송축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만일 그분이 바디매오에게 말씀하셨던 것같이 너의 길을 가라고 여러분에게 말씀하셨다면 여러분의 대답은 "우리는 우리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의 권면의 말씀을 참고 힘써 들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옛 일을 상기시킴으로써 여러분의 순수한 마음을 휘젓는 것을 용납 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진실로 주님을 뵙고 여러분이 진실로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길에서 그를 좇음으로써 입증하였습니까? 그 십자가의 길,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길, 그분의 거룩한 명령을 순종하는 그 길에서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사랑이 식어졌습니까! 그 좁은 길을 따라 바르게 예수님을 좇고 있는 사람들이 이제는 거의 없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데, 자신들의 겉옷을 기꺼이 내어 던진 사람들이 너무나 적다는 말씀입니다. 너무도 많은 우상들이 우리 주변에 있어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지혜로운 처녀들처럼 깨어나십시오! 깨십시오!(마25:1-3). 그리고 새 힘을 옷 입으십시오! 먼지를 떨고 일어나서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가까이 예수님을 좇으십시오!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십시오. 여러분의 발을 위한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십시오!(히12:12-13).
비록 그 길은 좁은 길이지만 그렇게 길지는 않습니다. 비록 그 문은 좁은 문이지만 영생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그분의 모습을 새롭게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은혜의 수레바퀴에 윤활유가 되어 여러분의 영혼을 아비나답의 마차같이 달리게 만들 것입니다.
여러분이 날이면 날마다 무거운 걸음을 걷는 것은, 순전히 그분을 시야에서 놓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과 같아서 영혼을 덮고 있는 어두움과 그림자들을 모두 쫓아 버리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성도 여러분들이여! 그분을 새롭게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그분과 함께 살면서 그분의 모습을 직접 뵙고 황홀해질 때까지 그 싸움을 쉬지 마십시오. 그리하면 진실로 그러할 것입니다. 주 예수여! 아멘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저희들이 시야에서 주님을
놓치지 않고 잘 따라가게 하옵소서!
특별히 저희 가족들이 소경 바디매오 같이
영적인 눈이 떠져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마지막때를 맞아 짐승의 표를
거부하고 구원함을 받게 하옵소서!
저희와 가족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주님 오시는날에 다함께
휴거되게 하옵소서!
믿고 감사를 드리오며
곧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주여~~ 를 외치고
자유롭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