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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In the Satipaṭṭhāna-sutta (Middle Length Sayings I, 10), it appears that meditation subjects of samatha are also included in the four Applications of Mindfulness. For example, meditation subjects such as mindfulness of breath, meditations on corpses and on the repulsiveness of the body are included in ``Mindfulness of the Body''. Why are the objects of samatha and of vipassanā not separated? I thought that we should not confuse these two ways of mental development.
질문: 마찌마 니까야의 대념처경에 보면 사마타수행의 명상주제가 네 가지 알아차림의 대상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 시체 혹은 몸에 대해서 혐오감을 일으키는 수행 등이 몸에 대한 알아차림에 포함됩니다. 왜 사마타의 대상과 위빠사나의 대상이 분리되어 있지 않을까요? 나는 수행의 이 두 가지 방법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Nina: Samatha and vipassanā are different ways of mental development and they each have a different aim, as we have seen. When one reads the scriptures one will come across texts on the development of right concentration which has reached the stage of absorption, jhāna. This does not imply that all people should develop calm to the degree of jhāna. We read in the scriptures about monks who led a secluded life, developed jhāna and later on attained enlightenment.
대답: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수행의 두 가지 방법이며 이제껏 보아 왔듯이 이 둘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집니다. 경전을 보면 선정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는 바른 집중의 계발에 관한 구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선정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경전에는 은둔생활을 하면서 선정수행을 하고 나중에 깨달음을 얻었던 승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They developed jhāna because they had accumulated the skill and the inclinations to do so. Before the Buddha's enlightenment and his teaching of Dhamma, samatha was the highest way of kusala. However, those who developed jhāna and then attained enlightenment could not have attained it without having developed vipassanā as well. Some people in the Buddha's time developed both jhāna and vipassanā and then attained enlightenment, but there were also many people who developed vipassanā and attained enlightenment without having developed a high degree of calm first.
선정 수행을 했던 습성이 있고 또 선정 수행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들은 선정을 계발했습니다. 붓다의 깨달음이나 담마에 대한 가르침 이전에는 사마타 수행이 가장 높은 선행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정을 먼저 닦고 나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있지만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고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붓다시대에도 선정과 위빠사나를 모두 닦은 후에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있고 또 선정수행을 먼저 하지 않고 위빠사나 수행만으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The Buddha did not set any rules with regard to samatha as a necessary preparation for the development of vipassanā. The Buddha encouraged those who could develop calm to the degree of jhāna to be mindful of realities in order to see also jhāna as non-self. However, we should remember that the attainment of jhāna is extremely difficult and that only very few people can attain it. Someone who has accumulated the skill and inclination to develop samatha to the degree of jhāna, has to know the right conditions for jhāna and he has to know which factors can obstruct it.
붓다께서는 위빠사나 수행의 필수과정으로 사마타수행을 설정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의 선정에 이른 사람들에게 선정도 무아임을 보기 위해서 실재를 알아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정을 얻는 것이 매우 어렵고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의 선정 단계에 이르는 사마타 수행을 해왔던 사람들은 선정의 바른 조건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He has to be aware of his cittas in order to know whether the jhāna-factors have been developed to the degree that jhāna can be attained. If he is not attached to jhāna he can, after the jhāna cittas have fallen away, develop right understanding of whatever reality appears. Also jhāna citta can be object of mindfulness, it can be realized as non-self. Anything which is real and which appears can be object of mindfulness.
선정을 얻을 수 있는 선정요소가 얼마나 계발되어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일 선정에 도달하지 못하고 선정심이 사라져 버렸다면 어떤 실재든지 나타나는 대로 알아차려서 바른 견해를 계발하도록 하십시오. 선정심 또한 알아차릴 대상이며 무아라고 알 수 있을 것입니다.
Out of his great compassion the Buddha spoke about everything which is real. He knew the different accumulations of people and thus he used many different ways of explaining the truth and he taught all kinds of wholesomeness. It depends on someone's accumulations which type of kusala citta arises at a particular moment: there may be kusala cittas which ponder over the true nature of realities, or kusala cittas with a higher degree of calm, even to the degree of jhāna, or there may be kusala cittas with mindfulness of nāma and rūpa, or even lokuttara cittas which experience nibbāna.
붓다께서는 커다란 자비심으로 실재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다는 것을 아시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설명하셨으며 모든 선법을 다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특정한 순간에 어떤 종류의 선심이 일어나는지는 그 사람의 축적된 성향에 달려있습니다. 실재의 참다운 특성에 대해서 숙고하는 선심이 있으며 수준 높은 고요함과 함께 하는 선심이 있고 정신과 물질 또 심지어는 닙바나를 경험하는 출세간의 마음과 함께 하는 선심도 있습니다.
Mindfulness of breathing and other objects which are among the meditation subjects of samatha are included in the ``Application of Mindfulness of the Body'', because they can also be objects of mindfulness in vipassanā. In the Satipaṭṭhāna-sutta, after the section on mindfulness of breathing, the section on the repulsiveness of the body, the section on meditations on corpses and after each of the other sections, we read that one should contemplate the origination-factors and the dissolution-factors in the body.
호흡을 알아차리거나 사마타 명상주제 가운데 하나를 알아차리는 것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범주에 속합니다. 그것들은 위빠사나의 주제이기도 하기 합니다. 대념처경에 보면 호흡을 알아차림, 몸에 대해 혐오감을 일으킴, 시체에 대한 명상 등 각각의 끝부분에 일어나게 하는 요소와 사라지게 하는 요소를 알아차린다는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In order to understand the meaning of this sutta we should not overlook these sentences. The contemplation of the origination and dissolution of phenomena is not merely thinking about them, it is contemplation through insight. The aim of the four Applications of Mindfulness is not calm which is only temporary but the wisdom which can eradicate defilements. This wisdom, insight, can only be developed through mindfulness of whatever reality appears now.
대념처경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구절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것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고 통찰력을 통한 숙고입니다. 네 가지 알아차림의 목적은 일시적인 고요함이 아니고 번뇌를 뿌리 뽑는 지혜입니다. 이 통찰지는 지금 나타나는 실재가 무엇이든지 간에 알아차림으로서 계발할 수 있습니다.
All the objects included in the four Applications of Mindfulness can remind us of the true nature of reality, of impermanence, dukkha and anattā. They can exhort us to be mindful of what appears now. The meditations on corpses can for some people condition calm, and for those who have accumulated skill for jhāna, even calm to the degree of jhāna, it all depends on the individual. However, in order to eradicate defilements, also the person who has attained jhāna should develop insight; he should with insight contemplate the origination and dissolution of realities.
네 가지 알아차릴 범주에 속하는 모든 대상은 무상, 고, 무아라는 실재의 참된 특성을 일깨워 줍니다. 현재 나타나는 것은 무엇이건 알아차려야 합니다. 시체에 대한 명상으로 고요함을 얻는 사람도 있고 선정수행이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수준 높은 선정을 가져 오기도 합니다. 그것은 모두 개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번뇌를 뿌리 뽑기 위해서는 선정을 얻은 사람들도 통찰지혜 수행을 해야 합니다. 통찰력을 가지고 실재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The person who develops both jhāna and insight and the person who develops insight alone should be aware of whatever reality appears in order to eradicate wrong view and all defilements. We read in the Satipaṭṭhāna-sutta, at the end of each of the meditations on corpses, that the monk should reflect as follows: ``Verily, this body of mine too is of the same nature as that body, is going to be like that body, and has not got past the condition of becoming like that body.''
선정과 통찰지를 모두 계발한 사람이나 통찰지만을 계발한 사람은 사견이나 번뇌를 뿌리 뽑기 위하여 나타나는 실재는 무엇이든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대념처경에 보면 시체에 대한 명상의 각 끝 구절마다 비구들은 다음과 같이 숙고해야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 몸 또한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Also for those who have no inclination to develop jhāna subjects such as meditations on corpses can be objects of mindfulness in vipassanā, when they see a dead person or a dead animal, they can be reminded of the impermanence of their own body. At such a moment mindfulness of whatever reality appears can arise. We may not have accumulations to reflect on corpses, but we can still think of the shortness of life and this can help us to have less attachment and aversion and not to waste opportunities for the development of right understanding of nāma and rūpa.
시체에 대한 명상 같은 선정수행의 주제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나 죽은 동물 같은 시체를 볼 때 몸의 무상을 떠올리는 등 위빠사나 명상주제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한 순간에도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실재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시체를 알아차리는 것과 같은 선정 경향은 없지만 인생의 짧음을 생각하면,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탐욕이나 성냄에 덜 집착하게 만들고 정신과 물질에 대한 바른 견해를 계발하는 기회를 덜 낭비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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