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명 보트피플 (수용소 사진)
다음은 누엔씨의 메모장에 적힌 내용의 일부다.
“전제용 선장은 부녀자와 아이들을 극진히 대접했고 선원들도 우리에게 자신들의 음식과 의복을 나눠주는 등 부산까지 항해하는 12일 동안은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는 부산 적십자 난민보호소에 있을 때 까만색 비닐 커버의 메모장을 구해 수기를 적었다.
20여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빛이 바랜 메모장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다.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진도 그 안에 들어 있다. 바로 전 선장이 키를 잡고 있는 사진이다.
20여년 전 헤어질 때 전 선장이 기념으로 준 것이다. 그는 수기에서 “공산주의의 독재정치는 나에게 자유를 위한 탈출을 강요했다”고 적고 있다.
누엔씨는 “부산항에서 상륙 수속을 하는 동안 외부인들이 광명호에 자주 들락거렸다.
그러나 우리들은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한국에 도착했다는 신기함과 자유를 찾아 곧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겠다는 희망으로 부풀었다”며 “그 외부인들이 전 선장과 선원들을 조사한다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로부터 1년6개월 후 필리핀을 거쳐 미국으로 향했다.
황해도가 고향인 전 선장은 1·4 후퇴 때 자유를 찾아 부모와 함께 월남해 경남 통영에 정착했다. 그는 1969년 2등 항해사로 선원생활을 시작해 1975년부터 선장으로 일했다. 고려원양에 입사해 ‘광명 87호’ 선장이 된 것은 1985년 2월. 고려원양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쿠데타를 일으킬 때 민간인으로 협력했던 이학수씨가 혁명정부의 후원으로 설립한 회사다. 당시 이 회사는 원양어업을 개척해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신이 구조하라고 했는지도…”
전 선장은 보트피플 구조사건 때문에 고려원양에 입사한 지 불과 10개월 만인 1985년 11월30일자로 하선조치 당했다. 사실상 해고였다. 그때 그의 나이 45세, 한창 일할 나이였다. 원래 계약기간은 10년이었다.
전 선장은 또 안기부(현 국정원) 등 정부관계 부처로 불려가 세 차례나 조사를 받아야 했다. 보트피플이 베트남 난민인지, 공산월맹군이 난민으로 위장한 것인지, 왜 그들을 구조했는지, 그렇게 위급한 상황이었는지, 아니면 영웅심에서였는지, 혹시 대가를 받았는지 등에 대한 조사였다. 동료선원들도 조사를 받았으나 별다른 혐의가 없어 나중에 모두 풀려났다.
전 선장은 “그후 집에서 쉬면서 인생공부를 했다”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난민을 구조한 일에 대해서는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3년 후인 1988년 8월 전 선장은 다시 배를 타게 됐다.
맥산 소속의 ‘유니코리아 300호’의 선장으로 키를 잡은 것. 그는 1993년 5월 선장직을 끝내고 맥산 부산지사에서 1년간 근무한 후 25년간의 선원생활을 마감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5년부터 지금까지 통영에서 멍게양식장을 하고 있다.
보트피플을 구조한 지 19년이 지난 지금 전 선장은 평범한 양식장 운영자다. 하지만 베트남인들에게 그는 여전히
“캡틴 전(전 선장)”이다.
전 선장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항해일지에는 모든 사항을 기록해놨으나 이번 미국에 올 때는 이곳에서 인터뷰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면서도 당시의 기억을 생생하게 회고했다.
먼저 전 선장에게 난민을 구해준 후 한번도 면회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물었다.
안 간 것인지, 아니면 못 간 것인지. 그러자 전 선장은 “못 갔지. 어떤 사람들이(정부관계자를 지칭하는 듯) 나서지 말라고 하데…”라면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더 물어보려 하자 전 선장은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새삼 우리 정부에 대해 무슨 말을…” 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때는 왼쪽에서 무슨 일이 나면 오른쪽을 보고, 오른쪽에서 무슨 일이 나면 왼쪽을 바라보는 게 상책이었다”며 당시 분위기를 전하며 답을 대신했다.
지난 1985년 ‘광명 87호’ 선장실의 전 선장. 피터 누엔씨는 이 사진을 가보처럼 지니고 있다.
전 선장은 당시 회사의 방침을 어기면서 구조명령을 내린 것에 대해 “내가 조금 용기가 있었던 모양”이라며 “설마 날 죽이기라도 하겠는가 하는 심정이 발동했던 것 같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또 “그 많은 친구들을 보고 어떻게 지나칠 수 있었겠냐”고 반문하면서 “만약 모른 척하고 지나쳤더라면 저승 갈 때까지 두고두고 후회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서로 얼굴도 모르지만 세상에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요즈음 간혹 TV 방송을 보면 한국 유학생이 일본인을 구출해냈다든가, 철로에서 어린이를 구하고 하반신이 절단된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도 있는데 당시 그 많은 베트남 난민들을 모른 척하고 지나쳤다면 너무 가혹한 일이었을 것”이라며 “신이 있다면 그 순간 내게 그들을 구조하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리틀 사이공’ 사상 최초 환영행사
전 선장 가족은 16일간 미국에 체류하면서 베트남 커뮤니티는 물론 한인동포사회와 미 주류사회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디즈니랜드와 LA 다저스로부터 VIP로 초청받았고, 미 연방 하원의 에드 로이스 의원은 전 선장을 ‘UN 난센상’ 후보로 추천했으며, 미 정치인들과 각계에서 받은 공로패와 감사패, 기념패만도 20여개나 된다.
전 선장 가족은 매일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여러 곳으로부터의 초청 일정 때문에 기진맥진할 정도였다.
8월8일 베트남과 한인 커뮤니티가 공동으로 마련한 리젠트 웨스트 레스토랑에서의 ‘전 선장 환영대회’에는 1000여명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행사장 중앙 연단 벽에 걸린 노란색 바탕의 현수막에는 한글로
‘우리에게 복된 삶을 안겨준 전 선장님! 당신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1-14-85’라고 써 있었다.
11-14-85는 1985년 11월14일에 구조됐다는 의미다. 행사장에는 한국, 베트남 그리고 미국 현지 언론의 취재진 50여명이 몰려들었다. 감색 정장 차림의 전제용 선장과 베이지색 개량한복을 차려입은 부인, 그리고 막내딸 휘진양이 입장하자 장내엔 박수와 환호성이 울렸다. 전 선장 부인의 왼쪽 가슴에는 전날 누엔씨가 사서 달아준, 자유월남 국기가 새겨진 브로치가 반짝이고 있었다.
전 선장은 이 자리에서 “당시 그 상황에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나와 같은 일을 했을 것이고,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다”라고 겸손해하면서 “신의 은총으로 보트피플을 발견해 건져올린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좋은 날을 계기로 한인 사회와 베트남 사회가 서로 의지하고 협력해 다른 이웃과 국가에 좋은 일을 해주기 바란다”며 연설을 맺었다. 열렬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날 여흥순서에서 한인과 베트남 여성들은 서로의 민속의상을 바꿔 입고 ‘아리랑’과 ‘너와 함께’(베트남 민요)를 불렀으며, 베트남 극단은 전 선장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꾸며 그에게 바쳤다.
행사장에는 전 선장이 구조한 96명 중 한 사람인 트랜 동씨가 멀리 루이지애나주에서 달려와 참석했다. 루이지애나에서 일식당을 운영한다는 그는 “오늘 이 땅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전 선장 덕분”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이날 행사에 자원봉사자로 나선 트랭다이 트랭구엔(베트남 프로젝트 연구관)씨는 “오늘의 환영축제는 리틀 사이공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행사”라며 흐뭇해했다.
또한 ‘전제용 선장 환영회’를 주관한 켄 누엔 리틀 사이공 재단 회장은 “베트남 커뮤니티와 이웃한 코리아타운과 지금까지 특별한 교류 없이 지내왔다”면서 “전 선장의 이번 방문이 두 커뮤니티를 잇는 가교역할을 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19년 만의 고백
전 선장은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날 밤인 8월20일, 숙소에서 누엔씨와 마주앉았다. 탁자에는 소주와 오징어가 놓여 있었다. 그 자리에서 소주 한 모금을 넘긴 누엔씨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젠 내가 고백할 차례”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지난번 편지에 96명의 난민 중 많은 사람이 당신을 오기를 고대하니 꼭 미국에 오라고 했는데,
사실 전 선장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중 10여명과 연락이 닿았으나 ‘바쁘다’는 이유로 관심을 보이지 않아 너무 가슴이 아팠다.
너무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전 선장은 “많은 사람이 나를 환영한다고 해서 미국에 온 것이 아니다.
피터, 당신 한 사람만으로도 베트남인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했다.
사실 고백은 전 선장이 먼저 했다. 전 선장은 2002년 누엔씨로부터 편지를 받고 그 해 10월에 보낸 회신에서 16년간 가슴에 묻었던 ‘부끄러운 이야기’ 두 가지를 적었다.
1985년 11월14일. 회사는 베트남 난민을 데리고 부산항에 입항하는 것을 강력히 만류했다.
난민을 무인도나 인근 섬에 하선시키고 귀국하라는 것이 회사의 지침이었다. 난민 구조로 선원들에게 후환이 미칠까
두려웠다. 그래서 전 선장은 선원들과 갑판에서 판자와 드럼통으로 100여명 정도가 탈 수 있는 뗏목을 만들기 시작했다.
뗏목 만드는 망치소리가 전 선장의 가슴에 와서 박혔다. ‘난민들이 우리가 하는 일을 눈치챘을까?’
결국 전 선장은 회사 방침이 국제법에 위배되기에 본사의 부당한 처사에 따르지 않겠다고 통보하고 부산항으로 향했다.
그의 두 번째 고백은 난민들이 부산 적십자 난민보호소에서 생활하는 동안 비록 자신에게 ‘면회금지’와 ‘2년 반 동안 승선금지’ 등이 내려졌지만, 그렇다고 한번도 찾아가보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전 선장의 고백편지를 받은 누엔씨는 아내와 함께 큰 소리로 울었다. 자신들 때문에 전 선장이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지내왔던 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광명호 선원들은 가끔 난민보호소에 들렀는데 유독 전 선장만 눈에 띄지 않았던 이유도 비로소 알게 됐다.
누엔씨는 “만약 전 선장이 편지에서 뗏목을 만든 이유를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전혀 모르고 살았을 것”이라며 “고백하지 않아도 될 일을 솔직하게 말해준 전 선장의 용기에 다시한번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갑판에서 선원들이 뗏목을 만들고 있는 광경을 보긴 했지만 구조된 우리를 태워 무인도에 보내려고 하기 위해서였다는 건 전혀 알지 못했다”고 했다.
김치 만드는 베트남인
필자는 전 선장 가족이 귀국한 후 누엔씨의 자택을 방문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거실 한편에는 십자가와 성모상 등 성물들이 자리잡고 있고, 다른쪽 벽면에는 전 선장이 미국 방문 때 언론에 소개된 기사들을 담은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 날 그의 집에 흐르던 음악도 한국 성가였다.
지난 연말에 그는 “한인 마켓에서 김치 만드는 법을 물어 직접 만들어봤다”며 “김치냄새가 나지 않냐”며 즐거워했다. 매일 아침 성당 미사에 참석하는 누엔씨 부부는 전 선장 가족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고 산다.
누엔씨는 전 선장이 미국에 머무는 동안 매일 밤 일기를 썼다. 그는 벌써 그와 전 선장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기 시작했다. 할리우드의 워너브라더스사로부터 영화 제작 제의도 받았다. 그는 “우리를 구조해주고 따뜻하게 대해준 ‘광명 87호’의 다른 선원들도 보고 싶다”며 “당시 부산 적십자 난민보호소에서 만난 한옥주 간호사와 대학생 자원봉사로 나섰던 변영해씨도 꼭 찾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새로운 목표는 앞으로 미국 내 96명의 보트피플과 연락해 매년 11월14일을 ‘부산 데이(Busan Day)’로정하는 것이다.
올해는 전 선장을 만나러 2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할 계획도 세웠다. 요즈음 그는 한국어 테이프를 구입해 한국어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한편 리틀 사이공 베트남인들은 오는 3월 스위스 소재 유엔 난민고등판무관(UNHCR)으로부터 기쁜 소식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12월20일 UNHRC ‘난센상 심사위원회’로부터 “한국인 전제용씨가 2005년도 난센상 후보로 공식 선정됐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누엔씨는 “올해 전 선장이 난센상을 받을 수 있는 행운이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전 선장 본인은 자신이 난센상 후보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나중에야 알았다. 한국인이 최초로 이 상 수상후보로 올랐다는 뉴스가 보도된 직후 여러 언론사로부터 인터뷰 요청과 이웃들의 축하인사가 쏟아지자 그때서야 자초지종을 알았다는 것. 전 선장은 “나는 그런 상을 받을 인물이 아니다. 나보다는 누엔 같은 사람이 받아야 할 상이다”라고 했다. 그 말을 전해 듣는 순간 전 선장이 지난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한 말이 떠올랐다.
“나는 영웅이 아닙니다. 단지 작은 용기와 결단이 그들을 구조하게 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