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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5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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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대한문에서 신문로로 이어지는 1km의 정동길. 이곳에 파란만장한 구한말 역사를 견뎌낸 근대유산들이 꼿꼿하게 자리하고 있다. 한눈에 보아도 세련되고 이국적인 서양식 건축물들이 덕수궁과 나란히, 그것도 100년 넘게 이곳을 지켜왔다. 근대유산에 아로새겨진 역사를 되짚어가다보면 어떤 대목에선 환희가 차올랐다가, 어떤 대목에선 과거의 슬픔이 그대로 전해진다.
고종의 아관파천
1895년 10월 8일 새벽,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일본 낭인들을 이끌고 건청궁을 급습했다. 그들은 조선 정복에 방해된단 이유로 명성황후(明聖皇后)를 처참히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고종은 더 이상 피로 물든 경복궁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뒤에 순종이 되는 세자를 데리고 러시아공사관(아관)으로 피신, 아관파천(俄館播遷)하기에 이른다.
덕수궁과 정동
고종이 경복궁을 대신해 택한 곳은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이다. 아관에 머무는 동안 행궁으로만 쓰였던 경운궁을 새로 단장해 1896년 환궁했다. 이후 고종은 1919년 승하할 때까지 경운궁을 단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근대화 1번지
19세기 말 정동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양인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1883년 미국공사관을 필두로 영국(1884), 러시아(1885), 프랑스(1889), 독일(1891), 벨기에(1901)의 공관들이 차례로 들어섰다. 세계 각국의 눈과 귀가 쏠린 곳이었기에 일본인들도 이곳에서만큼은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 자연스레 ‘서양인촌’으로 변모한 정동은 서양인 선교사들에 의해 신식 교육과 의술, 문화 등이 도입되어 근대화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
[해설사 이야기] 정동貞洞이란 이름으로
1397년 태조는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가 세상을 떠나자 경복궁 망루에서 잘 보이는 도성 안(지금의 정동)에 무덤 정릉(貞陵)을 조성했다. 그때부터 이 일대를 ‘정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의붓어머니인 신덕왕후를 미워했던 태종이 나중에 왕위에 오른 뒤 정릉을 파묘하고 도성 밖(지금의 정릉동)으로 옮겨버렸다. 현재 구 러시아공사관이 있는 자리에 무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적 제253호
대한제국 당시 공사관 중 가장 규모가 컸고, 높은 언덕에 자리해 정동 어디에서나 러시아공사관이 잘 보였다. 옛 모습은 사진으로만 남아 있고, 현재 지하 1층과 지상에 3층 규모의 탑으로 복원되었다. 이곳은 아관파천의 현장으로 역사적인 가치가 높다. 고종은 세자와 함께 이곳에서 1년여 동안 머무르며 경운궁을 새로 단장하고, 대한제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주소 서울시 중구 정동 15–1
[해설사 이야기] 러시아공사관의 비밀 터널
구 러시아공사관은 6ㆍ25전쟁 때 건물이 불에 타 없어지고, 몇 차례 보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탑 아래에서 아관파천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짧은 지하 터널이 발견되었는데, 어느 사료에 의하면 이곳이 덕수궁까지 연결된 비밀 터널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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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프랑스공사관 터
2010년 창덕여중 교사 신축 부지에서 옛 프랑스공사관 터가 발견되었다. 운동장 한쪽, 리퍼블릭 오브 프랑스(RF)라고 새겨진 프랑스공사관(법관) 비석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프랑스공사관은 1896~1935년까지 이곳에 있었는데, 조선총독부가 학교 운동장에 건물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게 보기 싫다며 철거해버렸다.
정동 전망대
사시사철 변화하는 정동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가 지난해 개관했다. 서울시 서소문청사 13층의 대회의실 일부와 비품창고로 사용되던 공간을 활용, 전망 창으로 교체해 파노라마 뷰로 설계했다. 서울광장, 신청사와 덕수궁, 정동 일대는 물론 날씨가 좋으면 인왕산까지 뚜렷하게 보인다. 한쪽 벽면에는 1900년대 외국 공사관과 정동교회, 이화학당 등 정동 일대의 옛 모습을 사진으로 전시하고 있고, 시청에서 직접 운영하는 카페 ‘다락’도 있다.
주소 서울시 서소문청사 1동 13층
운영시간 09:00~18:00
가격 음료 2000~3500원선, 개인 컵은 500원 할인
등록문화재 제3호, 이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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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학당은 1886년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 부인(Mrs. Mary F. Scranton)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여성교육기관으로 고종황제가 이름을 하사했다. 1915년 200평 규모의 한식 기와집인 초기 교사를 허물고 최신 설비를 갖춘 서구식 2층 건물을 완공했다. 이 건축물은 미국 컬럼비아 리버 지회의 홀부록(Holbrook)이 전달한 기금으로 지어졌는데, 당시 세상을 떠난 홀부록의 동생 사라 심슨을 기리는 뜻에서 심슨홀이라 이름 붙였다. 현재 이화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 1, 2층에는 과거 교실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유관순 열사 교실’과 상설전시실이 있고, 3층에는 기증받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주소 서울시 중구 정동길 26
전화 02-752-3353
운영시간 10:00~18:00, 일요일•공휴일 휴관
입장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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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프랑스공사관 터 최초의 여성 문학사 - 하란사 河蘭史, 1875~1919
인천 감별의 부인인 하란사는 배움의 열망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그녀는 신문화에 대한 관심이 남달라 서울에 이화학당이 설립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기혼여성이란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한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학당장을 찾아가 하인이 들고 있는 등불을 훅 불어 끈 뒤 말했다. “나의 생은 이 캄캄한 밤과 같이 어둡습니다. 내게 빛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마침내 학당에 입학한 그녀는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1906년 한국 여성 최초로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다. 1918년 그녀는 미국에서 모금한 돈으로 700달러짜리 파이프오르간을 구입해 정동교회에 봉헌했다. 1910년 이화학당에 대학과가 신설되고 나선 유일한 한국인 교수로 후진 양성에 몰두했다.
[해설사 이야기] 화려한 사교의 장, 손탁 호텔
이화학당 맞은편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 호텔이 있었다. 이곳은 1902~1917년 손탁 여사가 운영한 국제 호텔로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머물렀고, 신식 사교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을사늑약을 체결할 당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이곳에서 묵었다고 한다. 이후 이화학당에 매각되어 기숙사로 사용되다가 1923년 프라이홀(지금의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신축을 위해 헐렸다.
사적 제256호, 정동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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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목사가 한옥 한 채를 구입해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그는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1897년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정동교회 벧엘예배당을 건립했다. 예배당은 빅토리아식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 서양식 건축물로 당시 한국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한국 개신교 예배당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이곳의 파이프오르간은 이화학당 출신의 하란사 여사가 봉헌했다. 예배당은 6ㆍ25전쟁 때 파손되어 다시 복구되었는데, 주춧돌만은 옛것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해설사 이야기] 공식 행사에 사용된 벧엘예배당
예전에는 이화학당, 배재학당 졸업식을 벧엘예배당에서 진행했다. 특히 배재학당의 3회 졸업식 땐 졸업생이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관중 앞에서 영어로 연설해 청중의 박수갈채를 받은 일화가 있다. 이곳은 1930년대 신식 결혼식장으로도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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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프오르간 아래 밀실
1898년 무렵 정동교회는 항일 활동의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파이프오르간 아래 자리한 비밀스러운 공간은 3ㆍ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과 유인물이 제작되었던 장소. 이 때문에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된 이필주 담임목사와 박동완 전도사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서울시기념물 제16호, 배재학당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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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목사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 처음에는 한옥 그대로 사용하다 1887년 서양식 벽돌 양옥으로 학당 본관을 새롭게 준공했다. 고종이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란 뜻의 ‘배재학당(培材學堂)’ 이름과 현판을 하사했다. 한국 최초로 전인교육을 실시,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소설가 나도향, 시인 김소월, 한글학자 주시경, 독립운동가 지청천 등 걸출한 인재를 다수 배출했다. 독립협회와 만국공동회 주동자들의 모임 장소로 사용되며 독립의 발판을 마련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 남아 있는 배재학당 동관은 1916년 건립된 것이다.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로11길 19 배재정동빌딩
전화 02-319-5578
운영시간 10:00~17:00, 월요일 •공휴일 휴관
입장료 무료
홈페이지 appenzeller.pcu.ac.kr
[해설사 이야기] 배재학당의 학당훈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子 當爲人役"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
아펜젤러가 만든 학당훈으로 성경의 마태복음에서 따왔다. 학교가 처음 문을 열었을 당시 양반들은 저마다 하인을 한 명씩 데리고 등교했는데, 이를 본 아펜젤러는 “하인을 안데리고 다니는 것이 배움의 시작”이라며 따끔하게 충고했다. 신분과 나이, 부에 관계없이 동등하게 교육의 기회를 주었던 배재학당은 실용 기술을 바탕으로 한 자립 교육을 시행, 제힘으로 벌어서 쓰게 하는 ‘민주 시민 자유 교육’을 실현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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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교육의 아버지 - 아펜젤러 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
아펜젤러는 27세 되던 해 아내 D.엘라와 함께 한국에 와 한국선교회를 창설하고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어느 날 그는 성경번역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다 군산 앞바다에서 일본 상선과 충돌, 물에 빠진 여학생을 구하려다 함께 익사하고 말았다. 그의 아들인 아펜젤러 2세는 한국에서 태어난 첫 외국인으로 일제의 탄압 속에서 배재학당의 교장과 이사장을 역임하며 꿋꿋이 학교를 지켜냈다
구 대법원청사
등록문화재 제237호, 서울시립미술관
1886년 양반 자제들의 미국식 신교육을 위해 관립 학교 육영공원(育英公院)이 들어섰다. 하지만 8년 만에 학교가 문을 닫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재판소인 평리원(平理院)이 이곳에 자리 잡았다. 1910년 대한제국 말기에는 토지조사국이 있었고, 1928년에는 옛 건물을 모조리 헐고 경성 3법원으로 불리던 경성지방법원, 조선고등법원, 경성복심법원 등이 들어서 법원 단지가 조성되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법원청사로 사용되다가, 1995년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2002년부터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주소 서울시 중구 덕수궁길 61
전화 02-2124-8800
운영시간 평일 10:00~20:00, 주말 10:00~18:00, 월요일, 1월 1일 휴관
홈페이지 sema.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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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사 이야기 / 일본인의 악명 높은 탄압
구 대법원청사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을 탄압하는 데 중심이 된 곳이다. 1919년에는 조선총독부 조사국 분실이 이곳에 설치되어 독립운동가를 고문했고, 1925년에는 ‘치안유지법’이라는 막무가내 법을 만들어 독립운동가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광복될 때까지 안창호, 윤동주, 주기철 목사 등 일제에 저항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More Information / 한국인보다 한국을 사랑한 남자, 호머 헐버트 Homer B. Hulbert, 1863~1949
미국의 사학자였던 헐버트 박사는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에 머물렀다. 당시 그는 ‘조선의 살길은 교육뿐’이라고 외치며 한글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일할 당시 영어로 된 한국 역사책을 집필해 세계에 한국을 알렸고,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는 물론 서재필과 함께 한글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구전으로 전해지던 ‘아리랑’을 처음으로 악보로 옮겨 보급하기도 했다. 헤이그 특사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추방당했지만, 미국에 돌아가서도 한인 독립단체를 돕는 데 힘썼다. 육영공원에서 자신이 가르쳤던 이완용이 을사오적이 되어 나라를 팔아먹는 꼴을 보고 헐버트는 크게 탄식했다고 한다.
서울시기념물 제20호, 구세군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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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에 의해 창시된 구세군은 영국에 본부를 두고 전 세계에 조직망을 갖춘 기독교 단체다. 1908년 허가두(Robert Hoggard) 선교사관에 의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다. 구세군은 전도와 사회봉사 활동을 중심으로 선교하고, 단복을 갖춰 입는 것이 특징이다. 1928년 캐나다와 미국 등지에서 모인 헌금으로 정동에 고전적인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을 세워 ‘구세군사관학교’로 사용했다. 이곳은 1943년 일본에 의해 폐교되었다가 1947년 다시 문을 열었다. 선교 50주년을 맞아 증축하면서 ‘구세군중앙회관’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빨간 구세군 자선냄비는 1928년 12월 박준섭(Joseph Barr) 사령관이 서울을 비롯한 20개소에서 처음 선보였다.
주소 서울시 중구 덕수궁길 130
전화 02-6364-4086
운영시간 평일 10:00~12:00, 13:00~16:00, 주말 휴관
관람료 무료
해설사 이야기 / 구세군의 브라스밴드
구세군이 한국의 빈민가와 집창촌에서 전도를 시작했는데, 처음엔 반응이 좋았다. 빈민들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삶을 선택했다. 그러자 화가 난 점주들과 서양인을 경계하던 사람들이 구세군을 향해 돌을 던지고 소리를 지르며 전도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구세군은 모두의 마음을 아우를 수 있는 효과적인 전도 방법이 필요했고, 그래서 영국처럼 브라스밴드를 결성해 한국인에게 악기를 가르쳤다. 구세군역사박물관에서는 그때 사용했던 다양한 관악기를 만날 수 있다.
사적 제124호, 중명전전시관 문화유산국민신탁
대한제국 때 경운궁의 황실 도서관으로 본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다. 예전에는 중명전도 궁역 안쪽에 속했는데, 1904년 경운궁에 화재가 발생하자 고종이 이곳으로 몸을 피했다. 그때부터 중명전은 외국인 접견과 연회장 용도로 쓰이기 시작했다.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의 현장으로 대한제국의 좌절과 국권수호 의지가 담긴 역사 깊은 장소다. 고종 퇴위 후 1915년 경성구락부에 임대됐고, 이후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거쳤다. 1963년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기증되기도 했다.2010년에는 문화재청이 중명전을 대대적으로 복원, 관리 부재의 문화재라는 오명을 벗고 ‘중명전전시관’으로 새롭게 거듭났다.
주소 서울시 중구 정동길 41-11
전화 02-732-7524
운영시간 10:00~17:00, 월요일 휴관
입장료 무료
홈페이지 문화유산국민신탁 www.ntch.kr
헤이그 특사
![]() 이토히로부미 |
![]() 학부대신 이완용 |
사적 제124호, 경운궁 1611~1907, 덕수궁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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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었다가 임진왜란(1592) 이듬해부터 임금의 임시 거처로 사용하던 ‘정릉동 행궁’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다음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광해군을 폐위한 인조반정(1623) 후 창덕궁으로 궁궐을 옮기면서 비워졌다가 1897년 고종이 개보수해 궁궐로 사용했다.
1904년 큰불이 나 전각 대부분이 없어지고, 1905년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후 고종이 황위를 물려주고 나서 계속 경운궁에 머무르자, 순종은 이곳의 이름을 덕수궁(德壽宮)으로 바꾸었다. 다른 궁궐들과 달리 서양식 건축물이 혼재한 것이 특징이다.
덕수궁
주소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99
전화 02-771-9955
운영시간 09:00~21:00, 월요일 휴관
입장료 성인 1000원, 청소년(만 24세 이하) 무료
홈페이지 www.deoksugung.go.kr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위치 서울시 정동 덕수궁 내
전화 02-2022-0600
운영시간 화ㆍ목•금•일요일 10:00~19:00, 수•토요일 10:00~21:00(야간개장), 월요일•1월 1일 휴관
홈페이지 www.mmca.go.kr
More Information / 덕수궁의 이국적인 건축물
고종황제는 아관파천 때 러시아풍의 건축물들을 덕수궁 내에 세울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궁궐 주변에 중명전과 환벽정(環碧亭), 구성헌(九成軒), 정관헌(靜觀軒), 돈덕전(敦德殿) 등 5개의 서양식 건축물이 들어섰다. 이곳들은 대부분 서울 성벽을 부순 돌과 중국산 붉은 벽돌로 지은 것들이다.
해설사 이야기 / 서양식 정자, 정관헌
덕수궁 뒤뜰에 있는 정관헌(靜觀軒)은 고종이 아끼던 장소였다. 고종은 이곳에서 세자(순종)과 함께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시거나, 외국 공사들을 초청해 연회를 열었다.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 때 손탁의 권유로 처음 커피를 마셔본 뒤 커피에 푹 빠졌다. 당시엔 커피를 서양 발음에서 따온 ‘가배차’나 ‘가비차’라고 불렀는데, 빛깔이 꼭 한약과 비슷해서 서양에서 마시는 탕이란 뜻의 ‘양탕국’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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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나무 그리고 샌드위치, 르풀 LePul
신사동 가로수길의 유명 플라워 카페 ‘블룸 앤 구떼(Bloom & Goute)’의 세컨드 브랜드. 플로리스트 이진숙 대표와 파티셰에 조정희 대표가 정동에 또 하나의 카페를 차렸다. 가로수길 피플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수제 당근 케이크와 스트로베리 치즈 케이크는 물론 유기농 밀가루로 만든 신선한 샌드위치 빵을 매일 블룸 앤 구떼에서 날라온다. 프로방스풍 정문 옆에는 꽃과 나무가 있는 야외 가든형 테라스석도 마련되어 있다.
주소 서울 중구 정동 1-28
전화 02-3789-0400
운영시간 평일 10:00~21:00, 토요일 12:00 ~21:00, 일요일 11:00~20:00
가격 당근 케이크 6500원, 스트로베리 치즈 케이크 5000원, 햄&치즈 파니니 샌드위치 8300원, 아메리카노 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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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슬로 가든, 길들여지기 레스토랑
원태연 시인의 [길들여지기]에서 이름을 따온 오가닉 카페 & 레스토랑. 정동 극장의 높은 벽 너머의 분주한 도시와는 단절된 공간이다. 카페가 자리한 1층과 레스토랑인 2층은 전면 유리를 활짝 열어 바람이 드나드는 시원한 테라스석도 갖췄다. 이곳에선 레몬과 꿀에 절인 토마토로 만든 카프레제 샐러드를 꼭 맛볼 것. 매콤한 토마토 소스 베이스에 홍합과 모시조개, 새우, 로브스터 꼬리 부분을 넣고 국물을 자작하게 조리한 상하이식 파스타도 인기다.
주소 서울 중구 정동 8-11 정동극장 내
전화 02-319-7083
운영시간 11:00~23:00
가격 해산물 뚝배기 파스타 2만 4000원, 카프레제 샐러드 1만 9000원
홈페이지 www.gilj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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