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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9월 10일 월요일
[(녹)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 베드로 클라베르 사제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악의와 사악이라는 묵은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내자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발할 구실을 찾는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신다(복음).
제1독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5,1-8
형제 여러분, 1 여러분 가운데에서 불륜이 저질러진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이교인들에게서도 볼 수 없는 그런 불륜입니다.
곧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2 그런데도 여러분은 여전히 우쭐거립니다.
여러분은 오히려 슬퍼하며, 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를
여러분 가운데에서 제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나는 비록 몸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는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과 다름없이,
그러한 짓을 한 자에게 벌써 판결을 내렸습니다.
4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나의 영이 우리 주 예수님의 권능을 가지고 함께 모일 때,
5 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 그 육체는 파멸하게 하고
그 영은 주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6 여러분의 자만은 좋지 않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린다는 것을 모릅니까?
7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8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6-11
6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8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10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십계명에서 안식일 규정의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일곱째 날에 쉬시면서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날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는 측면과(탈출 20,8-11 참조),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음을 기억하여 인간이 해방을 누리게 하여야 한다는 측면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인간이 — 나와 식구들과 종들이 —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축과 이방인까지도 일을 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신명 5,12-15 참조).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하신 일들은 그 두 측면에서 모두 그분께서 “안식일의 주인”(루카 6,5)이심을 드러내었습니다. 첫째로 안식일이 주님께 속한 날이라면 예수님께서는 그날의 주인이시므로, 안식일 규정에 매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난 토요일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는데도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막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안식일이 인간이 해방되는 날이기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제약에서 풀려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안식일 계명은, 주일이 주님의 시간이고 또 인간의 시간이라는 두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본래 의미를 올바로 깨닫고 살아갈 때, 안식일 규정은 폐지되지 않습니다. 현대인에게 주일은 평일에 하지 못한 밀린 일들을 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즐기기 위한 날이 되기도 하여 그 거룩함이 잊히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고 인간이 해방되는 안식일의 본뜻을 되살려야 하겠습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여러분 각자 인생의 주역이 되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처럼 오른손이 오그라든 형제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저는 습관처럼 오른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 순간 형제님의 표정이 묘했습니다. 악수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안하는 것도 아니고 어색한 광경이 연출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송구스러워 가슴을 치게 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손은 참으로 고맙고도 유용하고, 성스럽고도 은혜로운 축복의 도구입니다. 우리는 손을 통해 각자의 일을 하고 생계를 꾸려갑니다.
손을 통해 시를 쓰고 하고 악기를 연주합니다. 손을 통해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합니다. 손을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이웃을 축복합니다.
이런 면에서 안식일 날 회당 안에 앉아 있던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고통과 수모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생각합니다. 그토록 성스럽고 유용한 은총의 도구인 손이 오그라들었으니, 당사자에게는 참으로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회당에 들어온 다른 모든 사람들은 보란 듯이 멋진 두 손을 높이 쳐들고 주님의 이름을 찬양했지만, 오그라든 손의 소유자는 큰 부끄러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입니다.
오그라든 손 때문에 평생 남의 눈을 의식하며, 위축된 삶을 살아온 사람을 눈여겨보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었기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고발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오그라든 손을 치유시켜 주십니다.
다음의 예수님 말씀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루카 6,8) 손이 오그라든 사람입장에서 얼마나 감격적이었겠습니까?
본의 아니게 평생토록 이 세상의 아웃 사이더로 살아온 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시며 그를 무대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 언제나 세상의 변방에서 빙빙 돌고 있는 우리를 무대의 한 가운데로 초대하셔서 적극적으로, 멋진 주인공으로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심으로 인해, 그분이 우리 매일의 삶 한가운데 굳건이 현존하심으로 인해, 각자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서 자동차는 신발과 같습니다. 이번에 자동차를 새로 마련했습니다. 전에 사용하던 자동차는 오래되기도 했지만, 일정 속도에 이르면 소리가 났습니다. 뉴욕에서 사용하던 자동차에 익숙해 있었기에 비슷한 차종으로 바꾸었습니다. 제가 처음 운전을 시작한 것이 1991년이니 어느덧 33년이 지났습니다. 처음에 중고차 르망을 사서 1년간 다녔습니다. 다음에는 현대 엑셀을 사서 7년간 다녔습니다. 경기도 적성 성당에 있을 때는 중고차 코란도를 사서 다녔습니다. 코란도는 비포장 길에도 잘 달렸고, 사륜구동이라서 눈길에서도 다닐 수 있었습니다. 캐나다로 연수 가면서 코란도는 동창 신부에게 주었습니다. 동창 신부는 제게 전자사전을 주었습니다. 캐나다에서 와서는 동창 신부의 권유로 소나타를 샀습니다. 그렇게 12년을 타던 소나타는 미국에 오면서 아는 분에게 드렸습니다. 뉴욕에서는 하이랜더를 탔었고, 댈러스에서는 제네시스를 마련했습니다.
33년 자동차를 이용하면서 자동차의 기능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걸 보았습니다. 수동기어는 대부분 자동기어로 바뀌었습니다. 운전자의 편의를 위한 기능이 많아졌습니다. 블루투스 기능이 있어서 스마트폰과 차량이 연결됩니다. 스마트폰에 있는 음악도 들을 수 있고, 전화를 걸 수 있고, 내비게이션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차량의 문을 열 수도 있고, 시동을 걸 수도 있습니다. 차량 점검을 스스로 해서 교체해야 할 부품을 미리 알려 줍니다. 최근에 발전하는 부분은 자율주행 기능입니다. 차선을 유지하는 기능도 있고, 차선 이탈 방지 기능도 있습니다. 속도 조절 기능이 있습니다. 일정 속도를 정해 놓으면 액셀러레이터를 밟지 않아도 속도를 유지합니다. 앞의 차가 속도를 줄이면 같이 속도를 줄이기에 안전한 운행이 됩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탑재되면 자동차는 움직이는 사무실이 될 것입니다. 운전자가 목적지를 이야기하면 자동차는 인공지능과 함께 목적에 도착할 것입니다. 운전자는 자동차에서 업무를 보고,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처음 운전면허를 취득했을 때입니다. 본당 신부님이 제게 이렇게 당부하였습니다. “자동차는 신발과 같다. 너무 크면 움직이기 힘들고, 너무 작으면 발이 불편하다. 발에 딱 맞는 신발이라 생각하고,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도 하였습니다. 5분 먼저 가려다가, 50년 먼저 가는 수가 있다.” 신발과 같은 자동차는 자기의 수준에 맞는 것이 좋습니다. 자동차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안전운전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기능이 좋은 차도,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으면 사고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교통법규의 기본은 교통신호와 규정 속도입니다. 교통신호는 서로의 약속이기에 교통신호를 무시하면 큰 사고가 될 수 있습니다. 규정 속도를 넘어서면 돌발 상황에서 차를 제어하기 어렵습니다. 운전자에게는 안전운전이 필요합니다. 장거리 운행을 위해서는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2시간 정도 운전하면 잠시 쉬면 좋습니다. 화물차나, 과적 차량의 뒤는 가능하면 피하면 좋습니다. 앞의 차량과 뒤의 차량도 살펴보면 좋습니다.
결국 자동차는 운전자를 위한 도구입니다. 장미꽃을 포장한 종이에는 장미 향이 나기 마련입니다. 생선을 포장한 종이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자동차로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면, 자동차로 가족을 돌보면 자동차는 복음의 도구가 됩니다. 자동차로 도박장을 다닌다면, 자동차로 남을 다치게 한다면 자동차는 사탄의 도구가 됩니다. 안식일도 그렇습니다. 율법과 계명도 그렇습니다. 율법과 계명으로 무고한 사람을 단죄하고, 죄인 취급한다면 그것은 율법과 계명의 정신을 망각하는 겁니다. 안식일이라서 선을 베푸는 행동을 단죄한다면 그것은 안식일의 의미를 망각하는 겁니다.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도 율법과 계명에 근거했습니다. 하느님의 율법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새 반죽은 제도와 법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새 반죽은 순결과 진실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베네딕토 성인이 했던 것처럼, 프란치스코 성인이 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에는 영성이 더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영성은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눈길 건네는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루카 6,8)
차가운 사람들
눈길 거두어
어엿이
있음에도
차라리
없어야하는
보잘것없는
작은 벗에게
살가운
마음 담은
눈길 건네는
사람이고 싶다
오늘의 성인
성 베드로 클라베르(Peter Claver)
신분 : 신부, 선교사
활동지역 : 콜롬비아(Colombia)
활동연도 : 1580-1654년
같은이름 : 끌라베르,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 근교 베르두(Verdu)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성 베드로 클라베르(Petrus Claver)는 바르셀로나 대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1602년 8월 7일 예수회에 입회하여 1604년까지 타라고나(Tarragona)에서 수련을 받았다.
그는 마요르카(Mallorca) 섬의 몬테시온 예수회 대학에서 1608년까지 철학을 공부하면서 같은 예수회원인 성 알폰수스 로드리게스(Alfonsus Rodriguez, 10월 30일) 수사를 만나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성 로드리게스 수사는 그에게 신대륙으로 가서 선교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래서 그는 선교사가 되려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1610년 그는 관구장의 지시로 다른 3명의 예수회원들과 함께 콜롬비아 카르타헤나(Cartagena) 항에 도착하였다. 그는 1612년부터 1615년까지 콜롬비아의 수도인 보고타(Bogota)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616년 카르타헤나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콜롬비아는 에스파냐의 식민지였고, 카르타헤나는 노예 매매의 중심지였으므로 성 클라베르는 알폰소 데 산도발(Alfonso de Sandoval) 신부와 함께 콜롬비아 인디오들의 처참한 상황을 개선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서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집단 수용되는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음식물과 의약품을 공급하였고, 정기적으로 수용 막사를 방문하여 나병에 걸린 노예들을 돌보아 주면서 그들의 벗이 되었다.
성 클라베르는 40여년 동안 흑인 노예들을 위하여 헌신하였는데, 그가 생전에 세례를 준 흑인 노예만도 3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는 또한 하루 종일 노예들을 방문하여 고해성사를 주었고, 카르타헤나의 수많은 흑인 노예들이 그의 영적 자녀가 될 정도로 전 생애를 흑인 노예들을 위해서 살았다.
그는 스스로 엄격한 생활을 실천하였고, 살아 있는 동안에 이미 초자연적 은혜를 받아 예언도 하였고 또 기적하는 능력도 있었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힘도 매우 강하였다. 그는 1650년에 전염병에 걸렸다가 곧 회복되었으나, 세상을 떠나기 전 4년 동안 누워서 생활해야 했다.
그는 1654년 9월 8일 카르타헤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851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뒤, 1888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황 레오 13세는 1896년에 성 베드로 클라베르를 흑인 노예들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하는 선교사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현재 그는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특히 콜롬비아 선교의 수호성인이며 흑인의 사도로 불린다.
성녀 마리아 데 라 카베사 (Mary de la Cabeza)
활동년도 : +1175년
신분 : 과부
지역 :
같은 이름 : 또리비아, 메리, 미리암, 토리비아
에스파냐의 토레존(Torrejon)에서 태어난 성녀 마리아 토리비아(Maria Toribia)는 성 이시도루스(Isidorus, 5월 15일)와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지만 검소하게 살면서 어려운 이를 돕는 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남편과 사별한 후에도 남편 못지않은 신심과 가난을 실천했기 때문에 마리아 데 라 카베사(Maria de la Cabeza)라는 이름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697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에 의해 승인되었다.
성 아우도마로 (Audomarus)
활동년도 : +595-670년
신분 : 선교사, 주교
지역 : 테루안(Therouanne)
같은이름 : 아우도마루스, 오도마로, 오도마루스, 오메르
오메르(Omer)라고도 불리는 성 아우도마루스(또는 아우도마로)는 프랑스의 쿠탕스(Coutance) 교외에서 출생하였고, 부모가 사망한 후에 성 에우스타시우스(Eustasius, 3월 29일)의 지도를 받으며 뤽세이유(Luxeuil) 수도원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승이 되었다.
이곳에서만 거의 20년을 머문 성 아우도마루스는 테루안의 주교로 임명되자 교구 내의 이완된 신앙과 윤리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한편, 구호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또 그는 성 뭄몰리누스 (Mummolinus, 10월 16일)와 성 베르트란드(Bertrand, 1월 24일) 그리고 성 베르티누스(Bertinus, 9월 5일)와 함께 시티으(Sithiu, 오늘날의 생베르탱)에 수도원을 세워 프랑스의 영적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그가 행하는 수난에 대한 강론은 너무나 유명하였다.
만년에 그는 맹인으로 지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