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별서유기비 (仁祖別墅遺基碑 )
▒ 지정번호 : 보물 제1462호
▒ 지정연월일 : 2006년 2월 17일
▒ 시 대 : 조선숙종 21년(1695)
▒ 규모·양식 : 1기(基), 전체 높이 291㎝, 비신 높이 168㎝, 너비 72㎝, 두께 25.5㎝
▒ 재 료 : 화강암
▒ 소 유 자 : 국유(문화재청)
▒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역촌동 8-12
조선왕조 제16대 임금 인조(재위 1623∼1649)가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에 머물렀던 별서(別墅)를 기념하고자 숙종 21년(1695)에 세운 비이다. 별서 자리는 한성부 북부(北部)의 연서역(延曙驛) 지역으로 오늘날의 은평구 역촌동에 해당된다. 이곳은 원래 인조의 부친으로 뒤에 원종(元宗)으로 추존된 정원군(定遠君) 이부(1580∼1619)가 집을 짓고 살던 곳이다. 인조는 즉위하기 전 능양군(綾陽君) 시절에 때로 이곳에 머물곤 했다.
인조반정의 거사날인 광해군 15년(1623) 3월 11일 밤 능양군은 이곳 연서역에서 장단부사(長湍府使) 이서(李曙, 1580∼1637)의 병력과 합류하고, 홍제원(弘濟院)에서 김류(金瑬, 1571∼1648)를 대장으로 하는 병력과 합세한 뒤 창의문(彰義門:도성 북서쪽 소문)을 돌파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가 창덕궁으로 향해 반정을 성공시켰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장단부사 이서의 병력이 늦게 도착하여 연서(延曙)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비는 거북 받침돌 위에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덮개돌을 얹은 형태로 비각(碑閣)으로 보호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御筆 仁祖大王龍潛之時別墅遺基碑"라는 숙종의 어필이 새겨져 있는데, "용잠지시(龍潛之時)"란 '임금에 오르기 전'을 뜻한다. 비의 뒷면에는 인조반정과 비의 건립내력을 약술한 숙종의 어제음기(御製陰記)가 새겨져 있는데, 글씨는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썼다. 비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우리 인조대왕이 즉위하기 이전의 별서는 북부의 연서역 마을 뒤쪽인데, 한양 도성에서 10리 안으로 멀지 않은 가까운 곳이다. 이곳은 신령스런 기운이 모이고 상서로움이 많은 곳이니, 어찌 하늘과 조종(祖宗)이 우리 성조(聖祖)를 왕위에 오르도록 몰래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이곳은 본래 원종대왕(元宗大王)이 용잠(龍潛)으로 계실 때 경영한 적이 있는데 규모가 작고 소박할 뿐이었다. 우리 인조대왕께서도 그 검소의 덕을 이어받아 넓힌 적이 없었고 때로 거둥하여 세상시름을 달래곤 하셨다.
이 때는 바로 광해군의 혼란이 극에 달하여 종사(宗社)의 위태로움이 턱 앞에 닥쳐있었다. 우리 인조대왕께서 하늘의 뜻에 응하고 백성의 믿음을 얻어 어지러움을 바로 잡아 흐트러진 기강을 밝히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건지셨다. 왕위에 올라 조종의 뜻을 회복했으니 이야말로 하늘의 계시가 아니었겠는가? 계해년(1623) 3월 11일은 바로 인조대왕께서 즉위하기 전날이었다. 이 날 두세 명의 측근 신하와 함께 이 정자에 머물러 쉬었는데, 우리 성조가 중흥시킨 왕업이 실제 여기에서 시작되었으니 해주(海州)의 부용당(芙蓉堂)과 그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다. 아, 그 성대함이여!
그러나 불행히도 세월이 많이 흘러 정자도 모두 무너지고 주춧돌만 홀로 남은 채 잡초만 무성하여 우리 성조께서 새롭게 일어났던 땅이 한갓 황폐한 곳이 되어버렸으며, 아직까지 비석을 세워 사적(事蹟)을 기록하지 못하였다. 내가 문헌으로 남기지 않으면 세대가 내려갈수록 사적이 더욱 없어질 것이라 염려하여 속히 내신(內臣)에게 명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이에 유지(遺址)를 보수하고 주위에 담을 쌓으며 굳은 돌에 사실을 기록하여 그 성대한 뜻을 후세에 전하도록 했으니, 아마 억만년 끝이 없으리라. 을해년(1695) 가을 7월 임오일 삼가 적다.
당초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2006년 2월 17일 다시 보물로 변경 지정되었다





은평구- 인조별서유기비.hwp
첫댓글 짝짝짝


참 잘 했어요 착한 어른이

이쁜솔미 예쁜솔미 어여쁜솔미~ㅋ ㅋ 대단해요 위례에 숨은 기둥 ㅎ ㅎ ㅎ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