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진 스포츠 칼럼]
No need for speed
스마트폰의 진동 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얼마 뒤 곧 꺼지고 말았다. 탁상 위 전자시계는 PM 9:00의 LED램프를 깜박이고 있다. 전화가 다시 울렸다. 피셔(J. Fischer) 씨다.
- 피셔 씨?
- 그렇다네. 아니 계속 기다리고 있는 데 왜 아직 안나오나? 허허.
- 언제 오셨습니까?
- 어제 왔다네.
그는 한때 독일연방공화국의 외무장관 겸 부총리를 지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00년 10월 어느날 한겨레신문 출판 기사 속이었다. 기사 속의 그는 야누스처럼 두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키 181센티 112킬로미터 뚱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의 면티는 맘모스 처럼 헐렁했고, 땀에 절어서 냄새가 지독하게 배어나왔다. 그로부터 얼마 뒤 그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절제와 수련에 길들여진 숲속의 고고한 수도승의 모습이랄까.
- 예, 지금 막 밀린 서류를 끝냈습니다.
- 그럼 나오게나. 여기는 한강공원 수변공원 12블록이라네.
나는 성급하리 만치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새로 구입한 나이키 마라톤화 끈을 질끈 매었다.
책 속에서만 만나던 그를 직접 만나게 될 줄이야.
원래 그의 아지트 공간 입구에는 ‘나 자신을 찾기 위한 장거리 달리기’(Mein langer lauf zu mir selbst)라는 작은 간판이 달려있었다. 물론 이 간판은 현재 우리 나라 선주성 씨가 ‘나는 달린다’라는 소박한 이름으로 살짝 패러디한 상태이다. 나 역시 이 이름으로 문예지를 통해 등단의 문을 두드렸다.
내가 그렇게 그들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우연에 가깝다. 그 후 나는 정말 달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동네 중학교 운동장 사각 트랙의 선을 따라 걷다시피 달리기 시작했다. 달린다는 것은 사실 내 사전에서 찾을 수 없었다. 운동화 대신 남루할 정도의 등산화가 전부일 정도이니까.
나는 그들에게 당신들을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먼저 <나는 달린다, 요슈카 피셔 지음/선주성 옮김.(궁리)>구입할 것을 권했다. 그것이 곧 마라톤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이었다.
처음 독일어 통역은 선주성 씨가 맡았지만 얼마 뒤 나와 요슈카 피셔 씨와는 자연스럽게 소통의 채널로 연결되었다.
피셔 씨는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나는 그와 더욱 친숙해졌다. 누구든지 서로의 진실을 이야기할 때 더욱 가까워지는 법이다.
- 나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삶의 밑바닥에서 방황했지. 1968년 그래 68혁명을 겪으며 빈민운동, 노동운동을 하다가 그러니까 85년에 녹색당원으로 입당했고, 그 때 당시 나는 녹색당원으로는 최초로 헤센주 환경장관이 됐지. 명예감은 짧았어. 물론 정치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했지만 그 못지 않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었지. 그때 마다 난 먹고 마셨어. 그런데……
그는 과거를 더듬는 표정을 지으며 한동안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갔다.
- 1996년 어느날, 집무실에서 서류를 검토 중 아내로부터 전화 연락이 왔다네. 아내가 결별을 선언한 거야. 마른 하늘의 날벼락같은 충격이었어. 나는 한동안 의기소침했지. 파멸의 위기감은 점점 나를 조여오기 시작하더군.
- 그러던 어느날 나는 어둠 속에서 어떤 침묵의 소리를 듣게 되었어.
"피셔, 피셔! 당신은 이 위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만 해. 먼저 당신의 식탁부터 바꿔야 해. 저기 아프리카의 굶어 시들어가는 아이들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생각해봤는가. 그 아이들이 먹는 물을 살펴보라네. 자네라면 그 흙탕물을 먹을 수 있는가.
자네의 식탁은 지나친 고기 단백질과 달콤한 탄수화물, 매혹적이지만 가시가 돋힌 알코올, 그리고 저열한 탄산음료수들로 꽉 채워진지 벌써 오래되었다네."
- 나는 먼저 칼로리가 적은 식단부터 바꿔버렸지.
- 그래서 그 후 잘 되었나요?
- 글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더군. 그래서 운동을 하기로 한 걸세. 그것도 언제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것이 달리기였지. 나는 결심했지. 다시 운동화 끈을 질끈 매었어.
'지금 당장 시작하는 거야.'
Just Do It!'
- 나는 새벽의 여명 속으로 뛰어갔어. 여명의 눈동자는 눈웃음을 짓고 있었지. 새로워진 나의 결심을 반기면서. 여명은 이렇게 반기는 거야.
"오, 나의 사랑하는 피셔! 너는 원래 해맑고 아름다운 미소년이었지. 이제 곧 너는 익숙하게 될 거야. 인간의 본성은 원래 알맞게 먹고 마시되 달리는 거란다."
피셔 씨가 환한 웃음꽃을 짓고 있다.
Slow & Steady
느린 마라톤맨 김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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