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그 귀하던 종이가 많이 보급되면서, 종이 종류도 많아졌어.
누런 ‘똥종이’는 막 쓰는 용도, 화장실에서도 쓰였고, 노르스름한 연습장 종이는 지금도 잘 쓰이고,
미롱지는 먹지를 사이사이에 끼워 서너 너덧 장씩 포개 볼펜을 꾹꾹 눌러 쓰고, 도화지, 백노지, 모조지,
갱지, 양면괘지 등으로 불렸어.
무릉동 동산에 올라
동쪽은 트여있어 산이 없지마는, 북-서-남으로 동네를 싸고 있는 산은 다 ‘동산’이라 불렀으니 동네 산이라는 뜻이었나 봐.
그게 동네 소유인 줄 알았는데, 동네 세력이 약해져 상당 부분 산 임자는 다른 동네 사람이야.
서쪽 동산에는 굴피를 채취하는 꿀밤나무(참나무)와, 땔감을 제공하는 소나무가 우거졌었지.
시야(형)하고 둘이 장대 두 개를 이어 묶고, 끝에 낫을 단단히 묶어, 키 큰 소나무 삭다리(죽은 가지)를 따고,
떡꺼지(썩은 그루터기)를 발로 툭툭 쳐서 뽑아 땔감을 장만했던 뒷동산, 특히 깍쟁이(갈퀴)로 긁어 모으는
갈비(솔 잎 낙엽)와 솔방구리(솔방울)는 최상의 불쏘시개 겸 땔감이었다.
동산 코데이(급경사 능선)를 타고 올라가 꼭대기에 서서 동쪽을 보면 저 멀리 바다, 서쪽을 보면 산봉우리들이
꽉 찬 태백산맥 풍경이 보였다.
“친애하는 소나무 제군 여러분!”하면서, 가짓껏(힘껏) 소리기(소리) 질러 메아리를 들으며 목청 다듬고 웅변 연습하던 곳,
참꽃(진달래)도 도라지 꽃도 아름답게 피던 동산의 추억.
그 산에 곳집이 있어, 상여 틀과 장례 도구를 보관했는데, 어쩌다 그 옆을 지날 땐 오금이 저렸지.
동네에서는 아저씨들이 함께 나와 꿀밤나무 껍질(굴피)를 채집해 나눠 썼다.
외가와 어머니
어머니는 객지생활을 마감하고 고향집에 돌아오신 후 부지런히 농사를 지으셨어. 굶주리면서도 악착같이
자식들을 공부시킨 어머니는, 근덕면 큰들(대평리)의 명필이요 훈장인 외할아버지의 아들 없는 집 여섯 번째 공주님.
딸들에게는 글을 안 가르쳤어. 그런데, 어머니는 서당 학동들 어깨너머로 한문과 한글을 깨우친, 분술하면
(자세히 말하자면) 천재 처녀였네.
외할아버지는 손수 천자문을 써 책을 매어 외손자인 내 형에게 주셨지만, 딸들에게는 글자를 안 가르치셨으니,
글을 하시는 분도 그랬으니 뭐, 당시 풍습이라는 게 너무 나빴지.
그 힘들었던 왜정 때도 많이 배운 사람은 일본유학까지 했는데, 글자 모르는 사람 좀 많았어?
특히 여자들은. 그 틈에서 글자를 아셨으니, 젊은 시절의 어머니 삶이 얼마나 갑갑하셨겠어?
그래 그러셨는지, 후일 객지 생활에 그야말로 온갖 고생을 다 하시면서도 자식들에게는 악착같이 교육을 시키셨어.
한 번은 엄마하고 됫 병 소주를 들고 외가에 갔는데, 무릉서 대평까지 그 먼 길을 걸어 걸어 거의 다 가서는,
징검다리를 건너다 그만, 고무신에 땀이나 미끄러워 넘어지면서 병은 깨지고 말았지 뭐야.
오랜만에 절을 올리는 딸에게 “뉘기요?”라시던 외할아버지….
어머니는 살면서 많은 걸 가렸다. 집에 못 한 개 박는 것도 일진을 짚어서 동서남북 방위를 따졌고, 가급적 손 없는 날에
메주 쑤고, 장 담그고, 김장하고, 손 없는 방향에 가구 옮기고….
참고로, 음력1,2일은 동쪽에, 3,4일은 남쪽, 5,6일은 서, 7,8일은 북에 손이 있고, 9,10은 손 이 없다.
큰 가구를 옮겨 놓거나, 먼 길 가거나, 참고할만하다.
고향의 색깔
무릉동에서는 건장한 화딩이(황소)를 키우는 집에 암소를 몰고 가 힘들게 덩궇는(교배시키는) 장면도 보았고,
참밤(밤) 나무가 있던 ‘밤고개’에 밤에 호랑이 눈에서 나는 번쩍거리는 빛을 보고, 멀리서 그 광경을 같이 본
많은 청소년들이 다같이 소름이 돋았지.
그런데 정작 호랑이 불보다 더 무서웠던 건, 가옥의 불빛은 고사하고 하늘도 안 보이는 정말로 캄캄한 밤의
검정색이었어.
도시의 스카이 라인처럼 시골에도 ‘마운틴 라인(Mountain Line. 아재 재치)’이 나타나기 마련인데, 어느 날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천지가 하나로 완전한 검은 색’은 너무도 무서웠다.
그게 내겐 잊혀지지 않는 고향의 색(色)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