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파공파(西坡公派)의 역사
1) 서파공파의 유래
공은 판서공 종약(從約)의 4남으로 조선 태조 계유년 서기1393년에 태어나셨고 호가 서파(西坡)이고, 또 호는 낙원(樂園)인데 계파(系派)는 경상도 순흥부(順興府)에서 나왔다.
공은 외모가 준수하고 또 도량이 넓었으며 문장과 학업을 가정에서 배웠으므로 당대의 명유들이 공을 추존하여 높였다. 백형(伯兄)과 중형(仲兄) 두분이 이상(貳相)과 판윤(判尹)으로 모두 현달하고 중용 되었으나, 공은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옛 사람들은 지위가 높은 분들이 많은 것을 경계하였다. 우리 집안에는 회헌선조 이후로 고려와 조선에서 드러났으며 지금 형제들과 자질(子姪) 들이 부원(府院)과 대각(臺閣)의 관직에 가득하고, 집안에 있는 모든 일가들이 한사람도 벼슬하지 않는자가 없으니 ,이는 바로 지위가 성만(盛滿)한 때이다.
공은 문을 닫고 책을 읽으며 깊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일삼았다. 경태 계유년에 나라에서 여러번 불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후 외직(外職)으로 의령(宜寧)현감에 부임 하였는데, 흉년을 만나 고을 백성들이 흩어져 도망하자, 공은 봉급을 내어 구휼해 주고 은혜와 신의로 어루만지니 흩어져 도망한자들이 사방에서 돌아왔다. 도백(道伯)은 치적(治績)이 훌륭하다고 하여 그 내용을 장계로 조정에 올렸으므로 다음해인 갑술년(1454)에 예천군수(醴泉郡守)로 승진하였다.
공은 억지로 부임 하였는데 얼마 안 있다가 단종(端宗)이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자리를 물려주자, 공은 은둔할 것을 결심하고 관향(貫鄕)으로 돌아와 거주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벼슬을 버리고 순흥부(順興府)의 남쪽 삼십리쯤 되는 누암산(樓巖山) 아래에 집터를 정하고는 누(樓)자를 용(龍)자로 고쳐 용암산(龍巖山)이라 이름 하였다. 그리고는 황무지를 개척하여 촌락을 이루고는 마을 이름을 대룡산(大龍山)이라 하였으며 인하여 낙원옹(樂園翁)이라 호 하였으니 대룡산은 제갈공명의 와룡(臥龍)의 뜻을 따른 것이요, 사마온공(司馬溫公)의 독락원(獨樂園)의 뜻을 따른 것이다.
경태(景泰) 정축년(1457)에 사육신(死六臣)의 화가 일어나자 금성대군(錦城大君)은 순흥부사(順興府使)인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상왕(上王)인 단종(端宗)을 복위(復位)하려고 도모하다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관복을 입은 집안들이 모두 멸족(滅族)을 당하니 당시 죽계(竹溪)의 물이 붉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공은 돈독한 뜻으로 굳게 은둔하여 산수의 사이에서 한가롭게 노닐며 일생을 마쳤다. 일찌기 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계하였다.
지금은 벼슬할 만한 때가 아니다. 물은 가득차면 넘치고 달은 가득차면 기우는 법이다. 우리 종족은 번성하고 또 현달함이 지금보다 더 한 적이 없었으니 너희들은 혼정신성(昏定晨省)하는 여가에 주자(朱子)의 글을 읽어 선조께서 회암(晦菴)을 사모한 뜻을 살피고, 녹(祿)을 구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말라. 비록 서울에 가더라도 공경히 선조의 사당에 배알할 뿐이요, 부디 가까운 친척과 부귀 영달하는 일에 언급하지 말라. 만일 나의 그 교훈을 어긴다면 이는 진실로 너의 애비가 바라는 뜻이 아니다.
말년에는 말 한 필과 종 한 명을 데리고는 폐지된 순흥부의 숙수사와 평리의 유지에 가서 놀곤 하였는데 숙수사는 바로 선조께서 독서하던 절이었고 유지에는 선조께서 벼루를 씻은 연못이 있었다. 공은 매양 감탄하고 배회하면서 항시 시를 읊었다 . 그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竹水淵源泗水湄 죽수의 연원은 사수가에서 근원 하였으니
讀書吾祖長於斯 우리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독서하며 이곳에서 자라셨네
徘徊感慕油然意 배회함에 감모하는 마음 유연히 일어나니
月照庭梧洗硯池 달은 뜰아래 오동나무 세연지에 비추누나
일시에 유명한 공경들이 편지를 보내왔으나 공은 답하지 않았으며, 방백 수령들이 매양 와서 방문하였으나 공은 모두 만나보지 않았다. 서울에 거주하는 조카와 손자들로서 대신의 반열에 있는 자들이 공이 시골에서 담박하게 사시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매양 사시(四時)에 아름다운 음식을 갖다 드리면 공은 이를 물리치고 웃으며 말씀하기를 “소백산의 머위 나물이 내 분수에 족하니 관청의 고량진미가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
공이 별세한 후 몇 년이 못되어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서울에 있던 여러 집안과 대종가가 모두 화를 면치 못하였으나 공의 집안만은 다행히 화를 면하니 당시 사람들은 공의 선경지명에 탄복하였으며 현재까지도 관향지의 영주에 많은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관향지의 유적지 보존관리와 시향을 준비한다.
배위는 숙인(淑人) 경주이씨(慶州李氏)이며 슬하에 백문(伯文) 숙문(叔文) 계문(季文) 흥문(興文) 익문(益文)의 5형제를 두었는데 장남과 차남은 후손이 없고 3형제분만 후손이 있으며 묘소는 순흥 대룡산 계곡(大龍山 桂谷)에 자좌(子坐)이고 세사(歲祀)는 음력 10월 초 6일에 봉행(奉行)하고, 또 죽림사(竹林祠) 향사(享祠)를 삼월(三月) 구월(九月) 중정일(中丁日)에 봉행(奉行)하고 있다. 대룡산에 종택과 서파정(西坡亭)이 있다.

2) 서파공파의 분파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