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와 러시아 제국. 영토적인 면에서, 지구상 가장 거대한 두 제국은 이제 한 배를 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조약이 체결되자마자, 몽골족은 자신들이 북쪽과 남쪽, 만주에서 모스크바에 이르는 유라시아의 광대한 영역에 꼼짝없이 갇혀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유목민이 중국의 국경을 넘어 마음껏 공격했을때, 격퇴하려는 군대가 쫒아오면 마음껏 달아날 수 있는 시대는 지나버렸습니다.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네르친스크 조약의 위력을 가장 체감한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준가르의 가르단입니다. 1690년 초. 그는 이르쿠츠크에 있는 골로빈과 접촉하고, 군사 원조를 요청했습니다. 당시 러시아가 투시예투 칸과 다툼이 있었고, 투시예투 칸은 가르단의 적이기도 하여 그는 이 동맹 제안이 분명 효과가 있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골로빈은 예전과 달리 가르단과 동맹을 하는데 그다지 흥미가 없었고, 강희는 즉시 상황을 파악하여 러시아에게 네르친스크 조약을 이행할것을 요구했습니다. 가르단이 공격하는 대상인 할하 몽골은 중국에 신속한 무리들이고, 이를 돕는것은 조약 위반이라는 것입니다.
러시아인들이 준가르를 도우려고 했던 것은, 준가르의 땅에서 금이 날지 모르겠다는 기대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국과 교역을 할 수 있다는 유혹은 불확실한 금의 탐사보다 훨씬 매력적이었습니다. 가르단은 1690년대 내내 러시아에 애닮프게 사절을 보냈지만, 러시아인들은 가르단이 차르에게 원조 요청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네르친스크 조약의 효과로 가르단은 중국에 대항할 북방의 가장 거대한 사자를 동맹으로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차르는 위풍당당한 대영웅 표트르 대제였습니다.
전투에 나서는 표트르 대제
이 당시 가르단은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굶주렸고, 서쪽으로는 반기를 든 체왕 랍탄을 토벌해야 했지만 동쪽으로 할하 몽골을 칠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안좋은 상황에서 굳이 할하 몽골을 칠 준비를 해야 할 이유는, 할하 몽골을 격파하고 그 전리품을 나눠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면, 가르단 휘하의 대부분 병사들은 미련도 없이 그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희는 오르도스 지역에 1천 5백여 명을 보내는등 국경 지대의 방어에 신경을 쓰면서, 체왕 랍탄과 긴밀히 접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할하 몽골의 칸들에게 대포와 보급품을 팔면서 이들을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달라이 라마는 이 강희의 계획에서 배제되었습니다.
1689년 12월, 청나라 조정의 티베트 공사 선파릉감복이 출발할때, 티베트의 최고 관리, '제파'의 지위에 있는 상게 갸초(Sangye Gyatsho)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달라이 라마에게, 황제께 잘 말씀드려, 투시예투 칸과 젭종단바 쿠툭투(독음대로 읽으면 철복존단파호토극도)을 사로잡아 가르단에게 넘겨주면 백성에게 이롭다고 말씀 드려주십시오. 이 두 사람의 목숨은 우리가 보장하겠습니다."
게다가 일전에 달라이 라마가 오삼계를 용서해야 한다는 식의 발언을 했습니다. 오삼계는 힘이 꺾이면 알아서 항복할 것이고, 심지어 나라를 나누어 주고 전쟁을 끝내는 편이 낫다고 말입니다. 강희는 달라이 라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자연히 협력의 대상에서 거리를 멀리 떨어뜨려놓았습니다. 강희는 일단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밀지의 내용이 전혀 도우미 되지 않는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항상 중생을 구제하는일에 힘써왔는데, 선파릉감복이 전한 서신은 어쩐지 달라이 라마의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달라이 라마의 뜻이 아닌것 같다. 실상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강희는 달라이 라마 5세가 묘한 짓을 벌인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강희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있는 사람은 그 위대한 달라이 라마 5세가 아닙니다. 제파의 지위에 있는 상게 갸초입니다. 그럼 달라이 라마는 어떻게 되었는가?
죽었습니다.
달라이 라마 5세는 훨씬 이전, 1682년이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샹게 가초는 이를 철저하게 비밀로 부쳤고, 5세와 모습이 비슷한 승려, 강양찰파라는 인물을 데려다가 달라이 라마의 복장을 입혀 포탈랍 궁의 옥좌에 앉히고는, 대외적으로는 5세가 명상에 들어갔다고 선포하며 모든 일을 자신이 처리했습니다.
이 샹게 가초라는 인물은, 일전에 순치제가 달라이 라마 5세와 만나기전, 달라이 라마가 라싸 북부의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그날 밤 저택 주인의 아내의 시중을 받았고, 그 아내는 이듬해에 자식을 낳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샹게 가초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샹게 가초가 달라이 라마 5세의 친아들일것이라고 수근거렸고, 사실이 어떻던 간에, 달라이 라마 5세 역시 이를 신경을 썻는지 8살이 되자 직접 포탈랍 궁으로 데려와서는, 미래의 지도자를 만들기 위해 직접 교육을 시켰고, 샹게 가초는 이후 박학다식한 청년이 되어 26세가 되자 달라이 라마의 추대로 수많은 승려들의 환호성 앞에 제파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 5세는 제파 샹게 가초를 혼신의 힘을 다해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 달라이 라마의 또다른 제자가 가르단입니다. 즉 제파 샹게 가초와 가르단은 동문수학한 사이인데, 그렇게 되자 제파 샹게 가초는 가르단을 남몰래 비호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강희는 이때까지 달라이 라마 5세가 죽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깨름칙 하다는 느낌은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 1690년 7월 27일, 가르단 정벌에 나섰습니다.
우란차부. 오란포통(烏蘭布通)
청군은 3로군으로 움직였습니다. 우선 강희의 형, 유친왕 복전(裕親王 福全)이 만리장성의 구베이커우(Gubeikou)를 출발합니다. 그리고 순치제의 다섯번째 아들인 공친왕 상녕(恭親王 常寧)이 난공불락의 요새 시펑커우(Xi feng kou)를 출발했고, 나머지 한 부대는 다름아닌 황제, 강희 본인이 이끌었습니다. 그는 두 예수회 선교사, 제르비용과 페레이라를 원정에 초청했고, 3로군의 총 숫자는 아마도 6만 정도의 규모에 이르렀습니다.
갑자기 강희가 이렇게 급진적인 공격으로 나선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 이전까지 강희의 태도는 방어 지향적이었고, 또 가르단의 세력 역시 황제가 막북으로 친정해야 할 정도로 강대하다고 말 하기 어려웠습니다. 분명 가르단의 숫자는 2,3만명으로 대군이었으나, 워낙 상황이 안 좋아 빠르게 숫자가 감소하고 있었습니다. 할하 몽골은 강희에게 가르단의 부대가 4만에 이른다고 했지만 이는 분명히 과장입니다.
가르단이 정확히 어느 위치에 있는가는 알기 힘들었습니다. 강희는 조심스럽게 군사를 보내고 자신이 뒤를 따르는 한편, 부대에게 절대로 전투를 벌이지 말고, 대오를 정비하여 가르단이 달아나지 못하게 한 뒤, 자신이 이끄는 중군의 대군을 동원해 단번에 그를 때려잡을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강희의 부대가 제대로 출발을 하기도 전인 6월, 가르단은 체첸 칸과 투시예투 칸을 추격했고, 강희는 상서 아르니에게 신속히 가르단을 따라가되, 절대로 싸우지 말고 기다리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아르니는 후속 부대가 오기전에 싸움을 걸었고, 가르단은 신속히 병사를 양익으로 나누어 이를 격파했습니다.
강희는 곧바로 아르니를 네 단계 강등시켰습니다. 강희를 화나게 한것은, 패전이 아니라 섣불리 싸워 가르단에게 주의심을 주는 것때문이었습니다. 가르단이 달아나면 잡을 방법이 전혀 없기에, 강희는 이 모든 책임을 아르니에게 덮어 쓰게 하고 자신은 절대로 가르단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고 그를 설득했으며, 가르단을 기만하는 조서를 보내 준가르와 청의 공동 이익을 소리높여 역설하고 청군의 이동은 오직 방어적인 목적이라고 우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나선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7월경에 군대가 움직였고, 국경을 넘은 청군은 벌써부터 보급과 지친 말들때문에 곤란함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중군은 도착하지도 못했습니다. 강희는 가르단이 겁먹고 달아나는것을 막기 위해 유친왕 등에게 명령, 가르단에게 소와 말을 주어 그를 달래도록 함과 동시에, 여러 외교 사절을 보내 거짓말로 우호를 이야기했습니다.
가르단은 실제로 이러한 청나라의 기만적인 움직임에 대해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이 오직 동생의 원수들을 떄려잡는 일이라고 말하였고, 청나라를 침범할 의도는 전혀 없다고 말했습니다. 강희는 그렇다면 평화협정을 맺자고 하면서, 얼마전에 자신이 러시아와 협상을 벌일때도 청군을 동원했지만, 협상이 끝나자 아무일도 없이 돌아갔다는 점을 이야기하며 가르단에게 안심하라고 사기술을 벌였습니다. 물론 청군이 러시아와 협정을 끝내고 귀환한일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전에 알바진 요새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회담을 핑계로 삼아 뒷걸음질 치려는 가르단을 억제시킨채, 강희는 온갖 보급의 무리와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정의 움직임을 보였지만, 9월이 되자 그는 계속해서 병에 걸려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들었고, 이는 국경 밖의 기후 때문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대신들은 황제가 국경을 떠나 있는 상황을 강남의 한족들이 알아차릴까봐 염려하였습니다.
이때 평화를 위한 화평 사신으로, 달라이 라마(실제로 샹게 가초)가 보낸 제륭이라는 인물이 왔는데, 이 제륭이라는 인물은 가르단을 저지하기는 커녕, 되려 그를 중용하고 전쟁의 일자를 택해서 제사 의식을 거행하고 독경까지 해주었습니다. 가르단은 제륭의 지원을 받아 협의를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당시, 가르단은 청군과 23킬로미터 떨어져있었습니다.
바로 이 시각, 유친왕 복전은 오란포통에 진군해 준가르 군대와 진영을 마주했습니다. 9월 3일, 복전은 적을 발견했고, 적의 기병 수만이 "습지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가르단은 1만 마리 낙타의 발을 묶어 땅에 눕히고는, 등에 요철 모양의 상자를 올려놓고 물에 젖은 모포를 그 위에 덮고, 둥글게 배치하여 마치 성재같은 모양을 만들고 상자 아래에는 사졸을 숨겨 요철 틈으로 총을 발포하고, 갈고리 모양의 창을 사용하여 접근전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을 타성(駝姓)이었습니다. 가르단이 기가 막힌 재주로 즉석에서 만들어버린 낙타의 성에 대하여, 청군의 장수 마스카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낙타 1만 마리의 다리를 서로 묶어 펠트로 덮고는, 그 뒤에 숨어서 성벽처럼 전개했다. 우리는 이것을 낙타의 성벽이라고 불렀다."
이 말도 안되는 가르단의 기지에 대항해서, 청군은 맹렬한 화포의 위력으로 응사했습니다. 청군의 공격에 낙타들은 죽어서 반듯한 모양으로 누워 있었고, 마침내 타성은 중간이 끊어져서 둘이 되었습니다. 청나라의 보병과 기병이 낙타의 성을 함락시키고 좌익군과 우익군으로 나뉘어져 공격했으며, 좌익병은 산을 돌아 공격, 준가르군을 일방적으로 학살해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러나 우익은 커다란 늪지에 막혀 돌아와야 했습니다.
가르단군은 대단히 많은 사상자를 내었지만, 가르단의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인해 청군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강희의 외숙부인 동국강도 총을 맞고 전사했습니다. 제르비용은 전투를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전투가 끝난 후 청군의 모습을 보고 전투를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여겼으며, 준가르 부대와 함께 있던 러시아 사절 키비레프(Kivirev)는 이 싸움이 적어도 '청군의 승리'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강희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했고, 실제로 2차전을 벌인다면 가르단 보다는 복전이 승리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확정된 결과는 아닙니다.
무엇보다 청군은 보급의 괴로움에 신음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가르단은 병력과 말을 잔뜩 잃었지만 숲속에 숨어 나무의 보호를 받고, 즉석에서 낙타로 방어망을 쳐버려 청군은 포격으로 승리를 확정지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9월 7일, 가르단은 제륭을 청군에 보내 대화를 요청했고, 이는 청군의 지휘관들에게도 솔깃한 소리였습니다.
이렇게 복전등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가르단은 시간을 벌고 밤을 틈타 전속력으로 북쪽을 바라보고는 달아나버렸습니다. 청군은 추격하려는 움직임은 보였지만, 말들이 너무나 지쳐 도저히 추격할 수가 없었고, 결국 가르단의 답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9월 중순이 되자 청군은 철수하기 시작했고, 기다리던 가르단의 서한은 9월 20일에 도착했습니다. 서한에서 가르단은 자기 진영에 불상을 세우고, 그 아래에 엎드려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었다고 했지만, 진실이야 가르단 만이 알 일입니다. 또 가르단은 자신이 청의 변경에서 멀리 물러나, 산과 초지가 좋고 사람이 없는곳을 찾아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강희는 대단히 이를 의심했고 미심쩍어했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강희에게 사람을 파견해 경고했고, 복전등은 작위를 박탈하는등 처벌을 내렸습니다. 가장 크게 처벌을 받은 사람들은 대포를 무겁다고 버린 포병대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태형을 맞거나 옥에 갇혀야만 했습니다.
분명히 1차 원정은 가르단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긴 했으나, 이는 청군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강희의 목적이 가르단을 포위해 죽이려는 의도라면,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실패의 이유는 보급의 문제였는데, 이 보급의 문제는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청군에 커다란 부담을 주었습니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청군은 몽골과 서북에서 보급상의 어려움을 상당부분 해결하지만, 그전까지는 보급의 문제로 옴짝달삭 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움직이기는 커녕 가만히 있는데만 해도 낙타 4백마리 분의 보급이 필요했고, 막북의 혹독한 기후가 더해져 청군을 더욱 괴롭혔습니다.
청군의 장군 마스카는 이 경험을 기록했는데, 청군은 장자커우의 장성을 지나자 마자 차가운 비를 맞으며 비탈 아래 좁은 길을 따라 산맥을 횡단했고, 산맥을 지나 초원에 들어서자 너무 건조해져 "복숭아만 한 우박"을 맞으며 기약없은 우물을 파야 했스빈다. 고비 사막에 들어서자 물이라고는 동물의 시체가 썩어가는 작은 웅덩이 뿐이었고, 사람과 말을 질식시킬만한 폭우 세례를 받았으며, 식량이 떨어져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사막을 300km 나아가려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걸어도 12일이 걸렸습니다.
전투에 필요한 말을 북경에서 구입하는것도 엄청난 비용이 들었고, 막대한 비용을 들어 말을 구입하고 피둥피둥 살이 찌게 먹여 기운이 오르면 이를 파견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경에서는 굶주리고 여윈 말들에 대한 보고가 끝도없이 올라왔습니다. 이런 말들은 전투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단 두달. 두달의 원정입니다. 하지만 병사고 장수고 말이고 모두가 기진맥진했고, 병사들은 두 달분 식량을 가지고 다닐 힘이 없었으며,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의 채무를(폭동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모두 황제가 떠맏아야 했는데 1600만냥에 달하는 거액이었습니다. 심지어, 청나라는 몽골 동맹군의 보급까지 모두 책임져야 했음으로, 할하 몽골이 자신들을 도와주겠다고 제안해도 청은 이를 함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단 두달간의 원정에 소모된 비용의 추산액은 무려 300만냥. 이는 한 해 국고 보유액의 6%에 달합니다. 청은 장성을 넘어 몽골을 격파할수 있다는것을 증명해보였지만, 동시에 그런 대규모 군사작전을 벌이려면 그저 '군사작전'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이런 원정군을 감당하려면 군사작전은 물론, 변방 국경 지대의 개발과 관리, 내륙과 국경의 원할한 네트워크와 긴밀한 협력이 이루어지는, 고도로 발달된 통치 시스템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훗날 청은 이를 서북에서 실현해 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아직 먼 이야기였고, 강희는 찝찝한 결과에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르단은 도망쳤고, 그는 자신의 세력을 다시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해결된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첫댓글 강희제가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네요.
낙타가 무슨 죄가 있다고... 불쌍하네요.
말을 자빠뜨리는것보다는 낙타를 쓰는편이 훨씬 싸게 먹히니까요. 게다가 낙타의 등 사이의 들어간 부분같은 경우엔, 포를 놓아두고 쓰기에 아주 좋은 자리이기도 합니다.
가르단의 기지가 참...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