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神文王 : 〜 692)은 신라 31대 임금이다. 문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665년 태자가 된 후 681년 왕위에 올라 12년간 신라를 통치하며 강력한 전제왕권을 확립했다. 겉으로는 평온했으나, 안으로는 치열한 긴장감이 돌았던 시기에 그는 어떻게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일까?
통일 전후 시기 왕과 귀족의 갈등
676년 문무왕은 당나라를 몰아내며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삼국통일의 완성은 곧 제2의 신라인 통일신라의 건국과 같은 의미가 있었다. 건국기(建國期)가 지나면, 개국 공신들과 왕실의 충돌은 역사상 매우 흔한 일이었다. 왕은 비대해진 공신들의 세력을 억압하려 하고, 공신들은 왕의 권력 독점에 반발하며 자신들의 몫을 챙기려 하기 때문이다. 문무왕은 662년에 병부령(兵部令) 겸 대당총관(大幢摠管)인 진주(眞珠)와 남천주총관 진흠(眞欽)을 처형한 것을 비롯해 박도유(朴都儒), 수세(藪世), 대토(大吐) 등의 반란들을 제압한 바 있다.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는 동지지만, 정치적 경쟁자가 될 경우에는 칼로 제거해야만 하는 것이 건국 시기 임금들의 숙명이었다.
문무왕은 자신을 위협할 소지를 가진 진골 귀족들의 군사적 기반인 육정(六停)을 대신할 새로운 서당(誓幢) 부대를 만들었다. 또 행정 관서를 정비하면서 실무 관리를 늘려 6두품 이하 출신의 관료들을 양성하며 자신의 친위 세력을 양성하고자 했다. 하지만 문무왕의 전제왕권(專制王權) 구축은 미완성이었다. 이를 보다 완벽히 실천한 임금이 신문왕이었다.
즉위 후 곧 반란을 제압한 신문왕
681년 7월 1일 삼국통일의 영웅 문무왕이 세상을 떠났고, 16년간 태자자리에 있던 정명이 왕위에 올라 신문왕이 되었다. 신문왕은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있던, 냉정하면서도 판단력과 실천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 그는 즉위한지 한 달 만인 8월 8일 반란 모의죄로 소판(蘇判 : 3위 관등) 김흠돌(金欽突), 파진찬(波珍湌 : 4위) 흥원(興元), 대아찬(大阿湌 : 5위) 진공(眞功) 등을 처형했다.
놀랍게도 김흠돌은 신문왕의 장인이었다. 김흠돌은 661년 6월 김유신을 도와 대당장군(大幢將軍)의 직위로 고구려 공격에 참여했고, 668년 6월에는 대당총관 자격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해 그 공으로 4위 파진찬이 되었고, 곧 3위 소판으로 승진되었다. 흥원, 진공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신문왕은 김흠돌을 처형한 지 8일 후인 8월 16일 교서를 내려 그들을 참수한 이유를 발표했다. 김흠돌 등이 흉악하고 사악한 자를 끌어 들이고 궁중의 내시들과도 결탁해, 악의 무리들과 모여 거사 일을 정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잔당들을 체포하여 처형했고, 남은 무리도 3, 4일 내에 곧 소탕할 것임을 약속했다. 8월 28일에는 이찬(伊湌 : 2위) 군관(軍官)의 목을 베었다. 군관은 상대등(上大等)을 역임했으나, 신문왕의 즉위와 함께 병부령으로 강등된 인물이다. 신문왕은 그가 김흠돌이 반역할 것을 알고도 미리 고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하고, 그의 장남까지 자살해 죽게 만들었다..
외척의 발호를 염려한 신문왕의 재혼
신문왕은 즉위와 함께 피의 숙청을 단행한 것이다. 그가 태자였을 때 결혼한 김흠돌의 딸 김씨 왕비는 오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있었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태자가 새 결혼을 할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지위가 불안해진 김흠돌이 먼저 반란을 모의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흥원, 진공, 군관 등이 연루된 것으로 보아, 신문왕 즉위에 대한 진골 귀족들의 불만이 반란 모의로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신문왕은 왕비를 출궁시키고, 반란의 잔당들을 철저히 제거했던 것이다.
신문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들의 저항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 첫째가 외척의 발호를 막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막강한 권력을 가진 김흠돌을 제거하고 배후 세력이 없는 여성을 왕비로 새로 맞이했다. 신문왕은 김씨 왕후를 쫓아낸 지 2년 후인 683년 2월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왕후로 삼기로 하고, 이찬 문영(文穎)과 파진찬 삼광(三光, 김유신의 아들)을 보내 폐백 15수레, 쌀, 기름 등 135수레, 벼 15수레를 보냈다. 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했다. 5월 7일 그녀를 부인으로 책봉하고, 여러 대신들의 아내와 딸, 그밖에 많은 여성들을 보내서 그녀를 맞이하게 했다. 수레에 탄 그녀 곁에 시종하는 관원들과 여인네들로 그 모습이 엄청나게 성대했다. 이런 성대한 결혼식은 처가가 대단한 세력가였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결혼을 최대한 이용해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 보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왕비의 아버지 김흠운은 655년 조천성(助川城) 전투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죽은 자였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내물왕의 7대 손으로 3위 잡찬에 올랐지만, 김흠운은 죽을 때 겨우 7위 일길찬에 추증되었을 뿐이다. 명문가 출신이기는 하지만, 외척으로 세도를 부릴 수 있는 가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신문왕은 강력한 외척인 김흠돌을 제거한 후, 외척의 발호를 없애기 위해 의도적으로 김흠운의 딸을 선택한 것이다.
군사권을 장악한 신문왕
왕권 강화를 위한 두 번째 조치는 군사권의 장악이었다. 병부령을 맡았던 군관을 제거한 것은 그 시작이었다. 신문왕은 681년 시위감(侍衛監)을 없애고, 장군 6명을 두는 조치를 취했다. 왕을 호위하며 궁성을 보호하는 시위부를 강화해 진골 귀족세력을 견제하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의도였다. 신문왕은 683년 황금서당(고구려인)과 흑금서당(말갈인), 686년 벽금서당(보덕국인)과 적금서당(보덕국인), 687년 청금서당(백제인)을 계속해서 만들어 9서당(九誓幢)을 완비했다. 9서당의 구성원들은 진골 귀족들과는 관련이 없는 신라에 새로 편입된 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직속 군대가 되었다. 9서당에 그치지 않고, 신문왕은 687년에는 삼무당(三武幢) 가운데 적금무당을, 689년에는 황금무당을 설치했다. 또한 690년에는 개지극당(皆知戟幢)과 삼변수당(三邊守幢)을 각각 설치했다.
이렇게 군대를 지속적으로 늘릴 수 있었던 것은, 아직 당나라의 침략 위협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고 일본 또한 신라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은 당시 상황을 신문왕이 잘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옛 고구려인(보덕국인, 말갈족 포함)과 백제인을 포용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했으니, 신문왕이 군대를 증강하는 것에 귀족들이 반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귀족들의 녹읍을 빼앗다.
군사권을 장악한 신문왕은 682년 4월, 위화부령 2인을 두어 관리의 선발과 추천을 맡게 하였다. 진골 귀족들의 인사권 개입을 저지하려는 의도였다. 그해 6월에는 국학을 세웠다. 문무왕 시기에 늘어난 각 관서의 사(史) 등의 실무 인원을 충당시키기 위해 문서 행정에 능한 이들을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국학을 설립한 또 하나 이유는 6두품 이하 출신의 국학 출신자들이 장차 관료로 성장해 왕의 친위세력이 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신문왕은 683년에는 고구려 유민이 세운 보덕국(報德國) 왕 안승(安勝)을 불러 소판으로 삼고, 김씨 성을 내리며 서울에 머물게 해 보덕국을 해체시키는 수순을 밟았다. 그러자 다음해 보덕국 장군 대문(大文)이 반란을 도모했다. 신문왕은 곧장 대문을 처형하고 보덕국을 무력으로 토벌하였으며 그곳을 금마군(김제군 지역)으로 만들었다. 다음해 신문왕은 완산주(전주)를 설치해 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또한 거열주를 나누어 청주를 두었다. 또한 남원소경, 서원서경을 설치했다. 685년에 신문왕은 통일신라 시기 지방통치의 근간이 되는 9주 5소경 제도를 완성했다. 그는 사벌(沙伐), 삽량(歃良), 양주(良州), 북원소경 등지에 성을 쌓는 등, 지방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들을 계속했다.
이렇게 통치 질서를 정비한 신문왕은 689년 마침내 중앙 및 지방 관리에게 주었던 녹읍(祿邑)을 폐지하고, 관료전(官僚田)을 주거나 매년 직급에 따라 곡식을 차등 지급했다. 이것은 신문왕이 귀족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매우 중요한 정책이었다. 귀족들은 녹읍 폐지를 막지 못했다.
신문왕은 여세를 몰아 수도를 금성(경주)에서 달구벌(대구)로 천도하고자 했다. 신문왕이 천도를 하려는 이유는 금성에 기반을 둔 진골 귀족세력 힘을 뿌리까지 뽑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천도는 엄청난 경제적 비용도 들며, 오랜 준비가 필요했다. 신문왕은 진골 귀족세력의 반대에 막혀 이것만큼은 실현하지 못했다.
만파식적의 이면
[삼국유사]에는 682년 5월에 신문왕이 동해 바닷가에 갔다가, 용을 만나서 만파식적을 얻었다고 했다. 만파식적을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에는 비가 오고 비가 올 때는 맑아지는 신비한 피리라고 한다. 이런 피리를 신문왕이 얻었다는 것은 그만큼 신문왕 재위 시기가 평화와 안녕의 시기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문왕이 687년 종묘에 제사를 지내면서 조상들께 바친 제문 상에는 이와 반대되는 내용이 있다.
“근자에 와서 도의가 사라진 상태에서 왕위에 있다보니, 정의가 하늘의 뜻과 달라, 천문에 괴변이 나타나고 해와 별은 빛을 잃어가니, 무섭고 두려움이 마치 깊은 못이나 계곡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신문왕은 조상신들에게 나라의 평안을 빌었다. 신문왕 시기는 반란이 일어나는 등, 신하들이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시기였다. 신문왕은 이를 제압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전쟁의 위협 또한 아직 상존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만파식적 설화는 신라에 닥친 위기를 조상신이든, 신기한 만파식적이든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신문왕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만파식적이 신문왕의 아들 효소왕 때인 693년 잠시 사라진 이야기가 등장하고, 786년 원성왕 때에는 만파식적의 존재조차 잊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만파식적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왕의 권능이 약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신문왕 시기가 상대적으로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나라가 안정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성기(守成期)의 임금 신문왕
신문왕은 고려 4대 광종, 조선시대 3대 태종과 같이 전쟁이나 건국과 같은 큰 사건 뒤에 생기는 공신들의 막강한 힘을 무력화시키고, 왕권을 안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조선 태종이 자신의 처가인 민씨 일가를 크게 억압했듯이, 신문왕 역시 처가의 세력이 너무 막강해지는 것을 막았다.
신문왕이 강력한 전제 왕권을 만든 것이 33대 성덕왕(702〜737)과 35대 경문왕(742〜765)을 거치는 동안 이룩한 통일신라 전성기를 만들게 하였다. 하지만 그가 폐지했던 녹읍은 757년 부활하였다. 녹읍을 다시 갖게 된 진골 귀족들은 혜공왕(765〜780) 시기를 거치면서 크게 성장했다. 그 결과 이후 150년간 진골 귀족들의 왕위 다툼으로 인해 20명의 왕이 교체되는 신라 하대의 혼란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점에서 볼 때 신문왕은 통일신라 수성기에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한 임금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