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5. 11 (마지막 날)
대만을 27년간 집권한 장개석 총통을 기념한 중정기념당과 총통내외가 살던 사림관저에 갔다.
대만의 국부인 손문과 장개석이 함께 찍은 사진이 중앙에 보인다. 손문의 제자이자 후배이며 나중
에는 동서가 된다.
대리석으로 지은 웅장한 기념당에는 각종 장 총통의 역사적 현장의 사진과 실제 타던 자동차등
이 전시되어 있었고 그 당시 세계의 뉴스거리인 화려한 결혼 사진등 장총통 만큼 유명한 송미령
의 사진들도 있었다. 가이드가 전하는 장개석과 그의 4째 부인 이야기가 남의 국민인 나에게는
연예가 수첩처럼 흥미로왔다.
( 쑨원(孫文)의 혁명자금을 담당한 쑹루야오(宋如耀)의 세딸 중
돈을 사랑한 첫째 아이링(藹齡)은 공자의 후손이자 금융재벌인 쿵샹시(孔祥熙)와 결혼....
중국을 사랑한 둘째 칭링(慶齡)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27살이나 나이가 차이있는
중국 혁명의 아버지인 쑨원(孫文)과 결혼....
권력을 사랑한 막내 메이링(美齡)은 국민당 총통 장제스(蔣介石)와 결혼....
중국의 잔다르크로 불리던 둘째 쑹칭링이 1981년 5월 29일 베이징에서 사망하고
2003년 10월 24일 막내 쑹메이링이 미국 맨하탄에서 숨짐에 따라 격동의 중국 근현대사와
함께 했던 "송가황조의 세 자매"는 이제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특히 3세기에 걸쳐 신해혁명과 청나라의 멸망, 국공합작, 항일운동, 국민당과 공산당의 분열,
국공내전, 중국과 대만의 분단, 중국과 대만의 현대화 과정 등을 모두 지켜본 쑹메이링은
그야말로 중국 근현대사의 산 증인이었다.
쑹메이링은 선진문명에 일찍 눈 뜬 아버지의 지원으로 1910년 열세살의 어린 나이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17년 우수한 성적으로 웨슬리대(문학박사)를 졸업한다.
그녀는 스스로 내 몸과 정신에서 유일하게 동양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얼굴뿐이다고
말할 정도로 언어에서부터 사유방식까지 완전 서구화된 문화를 체득하고 1917년 중국으로
귀국한 후 1920년 당시 황포군관학교 교장이던 장제스(蔣介石)를 만나게 된다.
뛰어난 미모 와 탁월한 재능과 야심을 가진 쑹메이링과 비록 아이 셋의 유부남이었지만 새로운
중국의 지도자로 등장한 장제스의 만남은 11년의 나이 차이와 주변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국
1927 년 12월 1일 결혼으로 이어진다. (재벌부인인 큰 언니는 자기의 비리를 막아줄 권력이 필요하여
동생과 미래의 실세인 장개석의 결혼을 부추겼다한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식 구두에 서태후 왕관의 진주알을 장식하여 오래도록 세간의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3개 국어를 하는 쑹메이링은 결혼 이후 장제스의 비서이자 외교고문으로, 자유분방한 미녀
로비스트로서 자신의 탁월한 재능을 십분 발휘하게 된다.
특히 1936년 장제스가 장쉐량(張學良)에게 감금되는 시안(西安)사변 때는 직접 시안으로 날아가
저우언라이(周恩來)와의 담판을 통해 남편을 구해낸다. 그러나 항일보다는 공산당 토벌에만 몰두
하는 장제스의 정치적 실책은 그녀 또한 바로잡지 못했다. 국민당이 국공내전에서 점점 불리해지자
쑹메이링은 1943년 2월 미국 의회를 방문하여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국민당에 대한 미국의 지원과
원조를 호소했으며 1943년 카이로 회담에도 장제스의 통역으로 참가하였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이 대만에 정권을 세운 이후 쑹메이링은 퍼스트 레이디로 활약한다.
둘째 언니인 쑹칭링과 70년대 전후에는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자매대결을 벌여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1975년 남편 장제스가 사망하자 쑹메이링은 그 해 9월 대만을 떠나 미국 뉴욕에 정착하여 대만과 미국과의
유대강화에 힘쓰면서도 대만의 정치문제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그 후 말년의 몇년간 암 등으로 투병생활을 하다 맨하탄에서 숨졌다. 쑹메이링은 유언에 따
라 대만에 있는 남편 장제스와 합장되지 않고 뉴욕근교의 실내묘지에 묻혀있다. )
장총통의 동상이 자리한 그 앞에는 장기 집권자들이 그러하듯 집권시절의 민주화 운동으로 피해
를 본 사람들이 장총통을 비난하는 사진전을 열고 있어 역사의 명암을 함께 보는 듯 하였다.
장개석은 죽어 고향땅인 본토에 묻히고 싶어 유해를 매장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장 전 총통을 대만 독립의 걸림돌로 여기는 대만 정부는 그의 호를 딴 중정공항을 타오위안
공항으로 바꾸고, 중정기념당을 민주기념당으로 개칭하는 등 ‘장제스 지우기’에 몰두하고 있다.
천수이벤 총통은 최근엔 그의 무덤에 배치된 경비병력을 철수하라고 지시하고 유해를 고향인
저장성으로 옮기도록 추진중이라고 한다
장 전 총통은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인민해방군에 패해 1949년 대만으로 건너간 뒤 89세인
1975년까지 대만을 통치하였고 사후에 아들 장경국이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집권하였다.
여행은 가기 전 한번. 실제 가서 한번 , 다녀와서 한번. 이렇게 세 번 한다더니
이글을 써 면서 새삼 다시 대만을 배운다.
우리가 일본에게 점령당했듯이 청일전쟁에 승리한 댓가로 중국의 한 개 성이던 대만을 일본이
점령하여 50년간이나 지배하며 쌀과 설탕의 보급원 노릇을 하였다는 것을 이번여행을 통해서야 알았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붙어 포르투갈, 네덜란드, 스페인, 일본 등이 돌아가며 지배한 슬픈 역사가
묻힌 작은 섬. (남한의 3분의 1)
장개석의 영향력으로 45년 해방 후부터 세계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나라로 대접받다가 71년 미국과의
국교단절로 변방으로 밀려났었고 자유중국이라 불리며 친숙하던 옆집 중국집 아저씨를 우리가 일순간
외면한 92년 이후로 한국에 대한 감정이 나쁜 나라.
그러나 지난해 티벳여행에서 배용준과 이영애와 친하다고 웃으며 우리를 환대하던 대만여행객이 생각나는 나라.
거리의 수많은 오토바이, 작은 스쿠터에 일가족이 최대 5명까지 타고 출근하는 모습을 보이는 나라.
거리에서 경적을 울리지 않는 느긋한 나라. 충돌사고가 나면 우선적으로 스쿠터 편을 들어주는 나라.
자기들 말로 얼굴은 못생겼지만 머리는 좋다는 나라. 그래서 우리의 라이벌인 나라.
대만 거리의 간판에 영어대신 대만글이 가득하여 안 헷갈리는 나라.
소식 다찬 하는 나라. 그래서 장수하는 나라. 책상, 배, 비행기 빼고는 다 먹는다는 나라.
아파트의 부엌은 옵션으로 매 끼니를 외식하는 본 받을 나라.
그리고 공항의 화장실 두루마리 휴지가 우리 것 보다 두터워 아마도 잘 사는 나라.
를 겉으로만 나흘간 잠깐 보고는 비행기에 올랐다.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인 귀국. 귀에 익은 말들을 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비행기가
소란하다. 승객들의 모습을 둘러보니 출발 할 때의 기대감으로 인해 적당히 긴장된
표정으로 낯선 말을 하는 승무원들의 눈치를 살피던 때와는 달리 모두들 집으로 향한다는
안도감으로 소수인 승무원을 압도하는 느긋한 다수가 되어 또 다른 흥분감이 였 보인다.
비행기가 움직이며 또 겁을 준다. 재잘되던 이이들도 일순간 조용 해 진다.
발바닥에 찌릿한 진동이 전해지며 엉덩이를 받치던 시트가 점점 부드러워지면서 몸이 가벼워 진다.
동시에 가슴인지 그 안의 심장인지 2인치 정도가 ‘쑤욱 ’ 하고 처 짐을 느낀다.
머리를 치켜들고 위로위로 향하고 있다. 이대로 계속가면 이소연의 비행기처럼 불덩이가 되겠지.
귀가 먹먹하다. 끝.
(국민의 반이 가지고 있다는 스쿠터 출근)
(장개석과 송미령)
(손문과 제자인 장개석)
(위병들이 지키던 지난시간과는 달리 총통의 권위를 무시하는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총통이 살던 관저-일정시대의 식물원자리.)
첫댓글 눌러살지 않고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팩키지 여행을 다녀와 제 기억을 잡아두려 여행기를 써 보자니 첫날 적고 나서는 후회가 앞섰습니다.대만을 다녀온 분이라면 다 가보는 코스라 검색만 하면 나오는 장소설명과 비슷한 소개들을 새삼 제가 재탕하는 것 같아 힘들었습니다. 저는 아주 작은 제눈과 이미 자리한 제 선입견으로 보이는 것들만 얘기해 보았습니다, 이웃이지만 잘 모르는 나라의 이야기를 한번 살펴보앗습니다. 여러군데를 다닌 중국여행보다는 몇군데 아니지만 뚜렷한 개성이 있는 여행으로 괜찮았습니다. 읽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쎄쎄 돈 따거. 08:59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