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역사적 변혁과 문명전환에 대한 일치된 견해가 집약되고 있다. 변혁에 대한 예감은 인종과 종교 및 제반 분야를 망라하여 포괄적이고 동시적으로 표현된다. 앨빈 토플러에 의하면 "지금 우리의 생활 속에 지금까지는 없었던 문명이 출현하려 하고 있다." 일리야 프리고진에 따르면 금세기는 "역사상 매우 극적인 순간이며, 어쩌면 전환기가 될 시점"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전환은 미래학적으로 신세계주의(New Glovalism), 신세계, 신세계 질서(New World Order), 제3의 물결, 물병좌시대, 그리고 종교적, 정신적으로는 새 정신(New Mind), 새로운 의식(New Consciousness), 신초월주의, 인간잠재력 개발, 새로운 여성, 신동방주의(New Orientalism)로 묘사된다. 마릴린 퍼거슨은 토마스 쿤이 제안한 개념을 빌어 이와 같은 발견들은 모두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이라 하였다. 토마스 쿤에 따르면 패러다임은 사고의 틀이며, 실재의 일면들을 이해하고 해명하는 체계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오래된 문제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인 것이다.
한편, 패러다임의 전환을 물리학적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뉴턴의 물리학을 대체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대두된 이후 양자역학은 물질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신개념 창출에 일조하고 있다. 개체적이고 독립적인 단위의 원자조각들에 의한 기계적 연합에 의한 세계의 구성이라는 종래의 관념은 파동과 입자, 물질과 동시에 에너지 양상을 갖는 미립자현상이 관찰된 이후 종말을 고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실재 자체가 분명히 확정할 수 없는 비결정적 성격을 지닌다는 양자 현상으로부터 "불확정성의 원리(principle of uncertainty)"라는 개념을 창안하였다. 이와 같은 양자현상적 이해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표방하는 인간의 이성, 과학성, 진리의 객관성과 보편성 그리고 합리성에 대한 비판과 해체 명분에 대한 이론적 지지를 강화한다.
포스트모던의 세계는 기존의 질서와 체계들이 해체됨과 동시에 새로운 질서와 개념들이 급속하게 자리를 잡아간다.
김영한은 포스트모던의 변화를 주도하는 6대 특성을 개괄하면서 다원주의의 확장과 성경언어의 일식 그리고 뉴-에이지 운동의 확산을 지적하고 있다. 서구사상에 동양적 비교주의 사상을 혼합시키고 점성학까지 동원하는 신비적 혼합주의인 뉴에이지운동은 아놀드 토인비적 관점을 빌린다면 20세기 최대의 사건을 형성하는 범주에 놓인다.
일반적으로 양차대전은 급진적인 문명의 발전과 계몽주의 이래로 서구의식의 틀을 확정하였던 미래에 대한 낙관적 합리주의의에 대하여 근본적 회의를 몰고 왔으며, 물질문명의 세례 속에서 기독교교회의 세속화는 서구의 영적 진공화를 가속시킨 것으로 분석된다. 린드백은 20세기 초까지 서구 기독교 국가의 대다수 국민들은 성경의 언어 세계와 성경의 상상력 속에 살았던 서구사회는 이제 성경의 급속한 퇴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성경 언어의 퇴조는 급격하고 광범위하여 서양에서는 언어, 문화, 그리고 상상력이 놀라울 정도로 비성경화 되었다."는 것이다. 홍치모는 미국의 옛날 역사교과서에서 20페이지에 달하는 청교도들의 신앙과 활동에 대한 언급이 이제는 불과 3페이지 분량으로 기록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미국의 전통적인 패러다임이 사라져 버렸다."고 기술한다. 이와 같은 전통적 기독교의 쇠퇴, 성서적 언어의 일식, 종교적 다원주의의 물결은 뉴에이지운동의 확산을 위한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였다.
Texe Mars에 따르면 뉴에이지 운동은 눈깜짝할 사이에 미국과 전세계를 휩쓸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종교운동이라고 한다. 총신대학원의 권성수교수는 뉴에이지 운동의 영성을 공기와 같이 밀접하게 파고드는 '사탄의 영기'로 묘사하고 있다.
이미 기독교 복음주의 진영에서 진행되어온 다각적인 관찰과 연구는 뉴에이지운동을 반기독교적이요, 사탄적이며, 종말론적 현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뉴에지운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인류를 분리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배후에 깔은 사탄의 교묘하고 사악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관찰된대로 뉴에이지운동의 범신론적 세계관과 신관, 인간관은 계시된 성경적 진리와 피할 수 없는 충돌을 야기시키고 있다. 뉴에이지운동은 인간성을 신성의 일부분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뉴에이지운동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인간이 영적각성을 통해 신이 될 수 있다는 원리이다. 인간신화를 위한 대표적인 수행체계는 요가와 명상이며, 심령술과 자동기록(automatic wiriting), 초능력, 마인드 콘트롤(mind control), 바이오 피드백(bio-feedback) 등의 비술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림] 요가를 통해서 인간과 연합되는 신성의 이미지
人間神化의 가능성은 인간의 육체안에 잠들어 있는 신성의 씨앗(God seed)으로부터 비롯된다. 신성의 씨앗은 산크리스트어로 '쿤달리니(Kundalini)'로 불리워진다. 힌두경전과 신비문헌과 동양신비가들의 저서에 따르면 쿤달리니는 인간안에 내재된 실존하는 우주적 에너지이다. 그러므로 고피 크리슈나는 "쿤달리니의 각성이야 말로 인류 앞에 놓인 최대의 과업이다."라고 주장한다. 쿤달리니의 각성을 통한 우주 최고의 신 브라마와의 연합은 뉴에이지운동이 추구하는 심원한 목표이며, 도래할 새시대의 이상적 인간이다. 그러므로 고피 크리슈나는, 쿤달리니를 각성시킬 가장 안전한 방법이 개발되어 심신 양면으로 그에 적합한 고상한 사람들이, 자기 육체로 이를 실험하고 응용하게 된다면, 인류는 많은 심령적, 정신적 거인들을 배출하는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있다.
보다 강력하게 김지하는 21세기를 '영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영적인 인간의 출현이 없이 21세기는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서구 자연주의의 잔존물인 진화론에 많은 희망을 걸고 있는 다수의 선구적인 사상가들은 새 인간과 새 시대, 즉 뉴맨(New Man)과 뉴에이지(New Age)의 도래를 예견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간관과 도래할 영성의 대두는 성경적 견지에서 피할 수 없는 충돌을 예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만물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창1:1, 요1:1-3),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할 죄인이다(롬3:23). 또한 인간은 스스로 자기안에 죄의 원인을 가지고 있으며(마15:19, 막7:21), 죄의 영향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되지 못한다(롬7:13-24)고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의의 폭을 인간의 본성으로 한정한다면 New Age는 인간의 신성함을 선언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죄성을 폭로한다. 뉴에이지운동과 성경은 인간에 대한 관점과 해석에 있어서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인간의 죄성을 폭로하고 중보자 예수그리스도를 향하게 하는 성경의 가르침과 인간 내부의 잠재된 신성의 씨 쿤달리니를 각성시켜 인간 스스로 영원불사의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뉴에이지사상은 서로 피할 수 없는 충돌의 지점을 응시하고 있다.
뉴에이지운동에서 인간신화의 가능성과 전망은 모든 인간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쿤달리니"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과연 신성의 씨(Divine seed), 내면의 빛(the inner light), 내재된 신성 등으로 알려진 "쿤달리니"란 무엇인가? "쿤달리니"는 성경적 관점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 이러한 의문은 New Age를 직면하면서 인간에 관한 성경의 증거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 21세기의 영성(뉴에이지운동 정의, 역사, 사상)
뉴에이지운동의 정의
뉴에이지운동은 간단하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복합적이고 다양한 개념군(郡)을 형성한다. 뉴에이지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동방 신비주의, 고대의 밀교적인 전통, 힌두교와 불교 등의 동양 종교, 진화론적 낙관주의, 사라져버린 과거의 문명들, 외계문명, 점성학 등의 용어들이 언급된다. 김영한에 따르면 뉴에이지운동은 서구 사상에 동양적 비교주의 사상을 혼합시키고, 이에 점성학까지 동원하는 신비적 혼합주의이다. 또한 뉴에이지운동은 동양과 서양의 다양한 신비사상을 혼합하여 '과학'이라는 옷을 입힌 "현대판 신화운동"이라고도 한다. 뉴에이지운동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 속에 내포된 공통적인 개념은 뉴에이지운동이 서구문명과 동양신비종교와의 만남으로부터 접촉점을 갖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뉴에이지운동은 월터(Walter Martin)의 견해와 같이 "동양의 비술적 신비주의가 서양문명으로의 급증하는 침투를 묘사하는 데 가장 흔히 사용되는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힌두교의 브라마(Brahman)와 아트만(Atman) 사상을 차용하는 뉴에이지운동은 요가와 명상 등의 수행을 통해 윤회와 환생으로 거듭되는 카르마(Karma)의 공작을 차단하고, 범아일여(梵兒一如)의 해탈 경지를 모든 인간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
[그림] 불교의 창시자 고오타마 붓다는 "열반"을 통하여 구원의 과업을 이룬자의 완전한 모범으로 간주된다.
주목해야할 것은 비록 뉴에이지운동이 서구인들의 주도하에 다양한 양태로 나타나지만 기본 사상은 인도종교철학과 고대의 이교적 신비주의 전승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문화사적 측면에서 볼 때 뉴에이지운동은 그 뿌리를 동양에 두고 있으면서 꽃과 열매는 서구사회의 장을 통해 나타난 일종의 종교와 문화의 통합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월터마틴(Walter Martine)은 "우리는 여기 뉴에이지에서 영성과 미신, 열광과 흉내의 결합을 본다. 여기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그것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뉴에이지운동의 역사
뉴에이지운동에 관한 역사적 발전과정에 대한 학자들간의 관점은 다양하게 표현된다. 홍치모에 따르면 새시대운동이 지니고 있는 정신과 사상 그 자체가 혼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문화사적 견지에서 뉴에이지운동은 1960년대의 미국의 히피족들의 반문화운동(反文化運動-Counter Culture Movement)과 1970년대의 자기성취문화(The Culture of Narcissism)운동을 거쳐 1980년대의 들어서자 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새시대운동(New Age Movememt)은 그 기원에 있어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뉴에이지 운동은 먼저 세계종교의 사상을 흡수하고 있으며 힌두교와 불교의 환생과 윤회 사상, 선불교(仙佛敎)의 절대무(絶對無), 동양의 이원론인 태극사상(太極思想)을 받아 들이고 있으며, 초대교회 안에서 유행하였던 영지주의사상도 흡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초월사상과 초월운동(Trancendentalism or Trancendental movement)사상적 발전 역시 뉴에이지운동 역사와 병행하고 있다. 특히, 프랜즈 안톤 메스머(Franz Anton Mesmer)의 영성주의와 메스머의 최면술은 이후에 시작된 신지학회운동과 연계되고 흡수되었다. 손종태에 따르면 초자연주의(Trasncendentalism)와 심령술(Spiritism), 신사고(New Thought), 신지학(Theosephy) 등은 뉴에이지 운동이 전격적으로 출현할 수 있는 철학적인 기반을 마련한 몇가지 중요한 사상들이라고 한다.
한편, 이양림은 사상적 관점에서 "뉴에이운동의 뿌리는 인본주의"라고 한다. 인본주의는 과학주의, 진화론, 유물론적인 생활철학과 무신론을 골간으로 하는 인본주의자 선언문 Ⅰ(Humanist Manifesto Ⅰ)에 의해서 세상에 공개적으로 표출되었으며, 제2의 인본주의 선언에 이르러 "무신론적 태도가 보다 강경해"졌다고 하였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혐오를 가중시켰고 물질문명에서 오는 모순과 부조리에 지친 서양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적합했다. 이와 같은 서구인의 영적 공백은 1960대 대거 미국으로 이주한 힌두교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동양종교의 요가와 명상과 심령술의 유입을 촉발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뉴에이지운동의 기원과 관련된 다각적인 관점에도 불구하고 1875년에 러시아 여인 마담 헬레나 브라밭스키(Madame Helena Petrovna Blabatsky, 1831-1891)에 의해 창립된 "신지학회"가 뉴에이지운동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보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통념이다. 브라밭스키 이후 신지학회는 제2대회장인 애니 빈산트(Annie Besant, 1847-1933)에 의해 번성해 나갔고, 제3대 회장 앨리스 베일리(Alice Bailey, 1880-1949)에 의해 뉴에이지운동의 기초가 다져지게 되었다.
또한 학자들은 마릴린 퍼거슨(Marilyn Ferguson)이 뉴에이지운동을 대중적 개념으로 자리잡게 하는데 기여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녀는 1980년에 출판한 '물병자리의 공모(The Aquarian Conspiracy)'란 책을 통해 비로서 전세계가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으며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새 시대를 만들어야 된다는 뉴에이지운동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을 하였다.
한편, 뉴에이지운동의 기원과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이 운동이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과 긴밀하고 근본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는 공공연한 사실에 관한 것이다. 신지학회 창설자 바브라스키는 자신의 수호영 '마하-도마 M'의 수호를 받아서 넓고 깊은 지식을 쌓았다고 고백하였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전기를 저술한 메리 루틴스에 따르면 신지학회 제2대 회장 애니 벤산트(Anne Bensant) 역시 중요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비술을 통해 히말라야의 영적 존재들과 접촉한 사실들을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다. 또한 영국에서 티벳의 라마승들의 수행과 삶에 관련된 자서전적 저술로 초미의 관심을 모았던 롭상 람파 역시 세계밖에 존재들로부터 사명에 대한 지시를 받은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도, 리드비터와 크리슈나무르티(Krish Namurti), 스폴딩(Baird T. Spalding), 요가난다(Yogananda), 맥도널드 베인(Mcdonald Vein) 등 뉴에이지운동과 관련된 주도적 인물들이 거의 예외없이 영적 존재들과의 접촉에 관한 사실들을 저서를 통하여 진술하고 있다. 이들이 접촉한 존재들은 초인간적인 존재들이며 그 사상과 의도에 있어서 반기독교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메리 루틴스가 저술한 크리슈나무르티의 전기에서 애니 벤산트와 리드비터가 접촉했던 히말라야의 영적인 존재들을 '루시퍼를 중심으로 영적 위계를 구성하는 존재'들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복음주의자들에 따르면 창세기 3장의 '타락사건'에서 뉴에이지운동의 기원에 관한 모티브를 발견한다. 곧, 뉴에이지운동의 기원은 '여자를 유혹한 뱀'으로서 '우주에서 발생한 최초의 범죄자 사탄에 뿌리를 둔다.'는 것이다.
뉴에이지운동의 사상
1. 신관(神觀)과 우주관
새시대운동의 우주관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는 표어는 "All is one, One is all."이다. 이 말은 곧 범신론적인 신관과 자아관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우주는 원래 하나의 존재이며 각 인간은 모두 다 개체로서의 우주임과 동시에 개체적 인간들의 모임이 바로 우주라는 것"이다.
뉴에이저에게 있어서 만물의 근원으로서 신은 인격성으로서가 아니라 우주의 근본원리나 힘 등으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제인 로버츠(Jane Roberts)에 따르면 신은 "하나의 개인이 아니라 에너지의 형태이며... 팽창하는 의식의 심령피라미드이다. 이 의식이 삼라만상과 개인들을 일제히 그리고 동시에 창조한다."고 표현된다.
한편, 힌두교의 경전과 요가철학을 수용하는 뉴에이지 운동은 우주만물의 창조적 동인으로서 하나의 통일된 힘을 직관한다. 이 우주적인 힘은 우주의 순수원리, 우주정신, 보편적정신, 우주의 영 혹은 우주대영(the universal spirit)으로도 불리는 브라마(Bramahn)를 의미한다.
뉴에이지적 사고에 있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주대영에 기원을 둔다. 따라서 우주와 우주대영 속에 있는 만물들은 그 기원이나 영원성에서 신의 본질이나 절대적 통일체와 일체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범신론적 뉴에이지 사상의 신관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인격적인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만물의 근본으로서 만물 속에 내재된 근본적인 원리이며 힘을 의미하고 있다.
2. 인간관
그러므로 뉴에이지사상은 인간의 본성을 말할 때 신성의 일부분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하게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관은 뉴에이지사상의 신관으로부터 비롯된다. 즉,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오직 '우주대영(Universal Spirit)'이며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우주대영의 개체적 존재이자 동시에 우주대영 그 자체이기도하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우주적 신성이 내재된다. 인간의 내면에는 우주대영과 본질적으로 같은 '신성의 불꽃(Divine Spark)'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의 영적 자아(Spiritual Self)는 실제적으로 전지(全知 : omniscience)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여우 셜리 맥클래인(Shirley MacLaine)이 공공연하게 무대위에서 "나는 신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신이다."라는 외침 속에 요약되고 있다.
이와 같이 범신론적 사상을 기반으로 한 뉴에이지 운동은 인간으로 하여금 우주대영과의 연합을 통한 신화(神化)를 표방한다. 곧 신과의 합일을 경험함으로써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이는 힌두교의 범아동일론(凡兒同一論)의 "브라마(Brahman) 곧 신과 아트만(Atman) 곧 자아는 동일하다."는 가르침의 현대적 구현이다.
3. 구원관
뉴에이지 사고는 인간의 본성적인 죄(罪)를 부인한다. 죄란 우주의식의 일부이며 하나의 구조적 현상일 뿐이다. 뉴에이지사상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힌두교와 불교적 사고에 있어서 죄와 이로부터 비롯되는 악은 '마야(Maya)'로서 영원불멸의 진리를 가리는 물질계의 환각이요 미망일 뿐이다. 마야의 세계는 우주를 규율하는 카르마의 공작에 의해서 인과응보에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전생에 행한 행위에 따라서 이생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뉴에이지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악은 진리에 반하는 적이 아니라, 인간 자신안에 내재된 신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무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신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 모르고 있는 것을 깨우치기만 하면 보다 높은 자아로 승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와 인간성이 신적 존재로 귀일되는 것이며 인격적 변혁을 의미한다."는 주장이 가능해 진다.
뉴에이지사상에 있어서, "구원이란 인간의 잠재력 즉 인간 속에 있는 신의 힘을 개발함으로써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자신이 구원의 원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구원자로서 예수그리스도는 거부된다.
● 신성의 씨 '쿤달리니'(Devine Seed) : 육체안에 내재된 신성
신성의 씨 쿤달리니 - 뉴에이지운동의 동인(動因)
뉴에이지운동에 관하여 논할 때 과연 무엇을 뉴에이지운동으로 볼 것인가에 대하여 분분한 논의가 일어나는 것을 접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영화 '사랑과 영혼'이 뉴에이지 영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가 죽은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과 접촉하면서 이루어지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주안점을 둔다. 그러나 반론자들은 이 영화를 구성하는 가장 큰 테마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숭고한 사랑에 관한 것이지 망자의 영혼과 산자의 접촉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때로는 극단적으로 기독교적인 진리체계와 신앙의 원리에 반하여 대중문화를 통해 표현되는 모든 국면들이 반기독교적인 뉴에이지운동이며 사탄적인 것이라고 배수진을 치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어떤 영화나 서적, 노래의 가사 등의 특정한 부분에 대해서 그것이 반기독교적인 뉴에이지운동이냐 아니냐를 가리기 위해 논쟁이 야기되고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양한 대중 매체를 통해서 표현되는 무수한 문화적 양상들과 그안에 내포된 복합적인 의미들을 기독교적인가 아닌가의 준거를 가지고 비판한다는 것은 뉴에이지 운동의 본질에 대한 피상적인 관점에 대한 쟁론을 답습하고야 말 것이다. 오히려 이와 같은 열심은 진정으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다루어야 할 뉴에이지운동의 의도와 그 본질을 근본적으로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 즉, 대중매체를 통해서 표현되는 뉴에이지사상의 편린들을 주목하며 진리와 비진리를 가리기 위해 분분하는 것보다 진정으로 뉴에이지운동을 움직이는 요체가 무엇이며 그와 같은 동인이 대중문화를 통해서 어떻게 전달될 수 있는가를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적 관점에서 뉴에이지운동의 혐의가 현저한 영화나 가수, 노래, 서적, 신비결사단체의 이름 몇가지 정도를 열거한다고 해서 뉴에이지운동을 이해하고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진정으로 뉴에이지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파편적 지식에 관한 전달차원이 아니라 문화매체를 이용하여 파고드는 영성의 근원을 진지하게 조명해야할 필요가 있다.
'자유를 위한 변명'의 저자이며 전위무용가인 홍신자는 자신의 저서에서 자신이 무대위에서 전위적 표현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신(神)'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는 춤의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이 몸을 통하여 오는 신의 소리이다. 나는 사라지고 신의 소리가 흐르는 것이다. 나의 팔이 올라가고 있지만, 내가 그것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움직임을 지배하지 않는다. 신이 그 움직임을 지배하도록 나는 다만 그 신을 불러들일 뿐이다. 신이 내속으로 들어온다. 마침내 나는 신이 되는 것이다. 신의 소리는 다시 멀리 퍼진다. 바람처럼 파도처럼 에너지로서 흔적도 없이 그렇게 사라진다. 춤추는 자는 사라지고 춤만이 남는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이순간, 바로 신의 순간이 아닌가.
그녀가 대중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신'은 티벳과 히말라야 인도 등지를 다니는 영적순례 속에서 만난 신이며, 그녀의 스승 구루 라즈니쉬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가르침의 근원이다. 이와 같은 그녀의 진술은 표상적으로 접하는 뉴에이지운동의 양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적인 영향력으로 나타나는 내부적 원인이 있음을 알게 한다.
즉, 뉴에이지운동에는 거시적으로 외부적 국면과 내부적 국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상언은 '가시적인 세계(visible-world)와 비가시적 세계(invisible world)'로 구분할 수 있는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또한 김성수는 보다 구체적인 의미에서 뉴에이운동을 네가지 수준으로 구분하여 기술하기도 하였다.
첫 번째 수준은, 피상적인 호칭의 수준으로서 일반적으로 상업적인 세계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두 번째 수준은, 사람들이 뉴에이지 사상과 실제를 새로운 유행에 맞는 어떤 것으로 추구하는데 가장 대중적인 관심을 끄는 수준이다. 세 번째 수준은, 변화, 변형의 이미지(transform image), 패러다임의 전환(a paradime shift), 새로운 세계관(a new world view)이라고 부른다. 이 수준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을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변화시킨다. 마지막 네 번째 수준은 뉴에이지 전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수준의 특징은 성자(the sacred)의 수육(incanation)이다. 이 수준에서 인간은 세계관의 변형을 넘어 인간의 영적 변형에로 나아가게 된다고 한다.
이상에서와 같이 뉴에이지운동은 외부적 국면에서 내부적 국면으로 혹은 피상적 수준에서 고차원의 내면적이고 영적인 수준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그러므로 뉴에이지운동은 가시적 세계에서 비가시적세계로, 혹은 인간의 의식의 단계적 변형을 위한 매개로서 다양한 실행방법을 사용한다. 동양종교의 비의적 신비술, 영지주의, 심령과학, 무속신앙, 명상(초월명상), 투시, 점치는 것, 최면술, 요가, 관상, 수상, UFO에 관한 것, 마녀숭배, 윤회설, 신과학운동, 인간 잠재력 개발운동, 초혼, 텔레파시와 정신동력, SF영화와 소설, 카드점, 강신술...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인간의식의 변형을 위한 매개적 방편들은 인간의 내적 자아와 우주의식과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서, 카르마의 윤회와 환생의 순환 고리를 끊고 해탈에 도달하는 것이다.
한편, 뉴에이저들은 인간의식의 변형을 통한 신성과의 합일에 도달할 수 있는 실재론적 내적 근거가 바로 인간안에 놓여져 있다고 주장한다.
티벳의 라마승 롭상 람파에 따르면, "이 지구상의 우리라는 것은 단지 우리의 초월적 자아(overself)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것은 동양인이든 서구인이든 모든 인간의 척수 신경의 맨 가운데있는 척수로서, 다른 차원으로 이어지는 대롱관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롭상에 따르면 이것은 동양인들이 '뱀의 불꽃(Serpent Fire)'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쿤달리니(Kundalini)이다.
인간의 육체안에 실재하는 쿤달리니는 인도철학과 동양의 신비주의자, 뉴에이저들에 의한 저술 속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뉴에이지운동이 지향하는 영성의 모티브이며, 고피 크리슈나(Gopi Krishuna)와 아지트 무케르지(Ajit Mookerjee)에 의하면 역사와 종교,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안에 내재하는 보편적인 것이다.
쿤달리니의 정의
쿤달리니는 인간의 육체안에 내재된 신성 아트만(Atman)으로서 순수의식, 우주적 여성에너지 등으로 명명된다. 성(聲) 브라만(Sabdabrahman), 옴(OM), 산크리스트어로 쿤달리니라는 단어는 '감겨진'을 뜻한다. 바바 하리 다스는 "쿤달리니는 척추의 기저부에 비축된 에너지(프라나)의 덩어리로서 나선형으로 움직이는 힘으로서 스바얌부 링가의 둘레를 세 바퀴 반 감고 있는 뱀으로 묘사된다."고 한다.
[그림] 쿤달리니 이미지
아지트무케르지 따르면, "쿤달리니는 인간 개체 안에 내재해 있는 초월적인 힘과 같은 것으로 나선형의 잠재적인 우주에너지이다." 그러므로 "각 개인은 이러한 에너지의 현현이고,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우주는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 놓는 에너지와 동일한 의식의 결과물들"이라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탄트라 성전에서는 "모든 개개인은 이 에너지의 표현이고, 우리들 주변의 물체는 항상 같은 의식이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는 이러한 의식에서 나왔던 것이다."라고 진술한다.
그러므로 쿤달리니는 인간안에 놓여진 근원적 신성이며, 진정한 자아이며, 신성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요기들의 목표이다.
게란다본집(Gherada Samhita, 제16권)은 이점을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물다라다(Muladhara)에는 쿤달리니가 또아리를 틀고 앉은 뱀처럼 쉬고 있다. 이 본래의 자아는 그곳에서 화염처럼 타오르고 있다. 이렇게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빛이 명징한 브라만(Brahman)과 동일한 것이라는 바를 체험하는 과정을 초월적인 명상이라 한다.
탄트라를 비롯한 요기들의 문헌에 따르면 인간신화의 실재적인 진전은 잠재된 쿤달리니의 각성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마치 뱀처럼 감겨져 있는 쿤달리니 에너지를 깨우는 사람만이 진정한 해방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하타요가-프라디피카, 제3장, 제108권.)
[그림] 보존의 신 "비쉬누", 그는 우주불멸의 힘 "쿤달리니"와 완전합일된 신성이다. 그림은 신성 비쉬누의 근원과 일치하는 "쿤달리니" 곧 "뱀"과의 근원적인 일치성을 상징하고 있다. 비쉬누는 쿤달리니 각성을 통해 도달해야 할 요기들의 완전한 목표이며, 역사 속에서 화신(크리슈나)하여 요가의 비의를 전수한 자로 신앙된다.
쿤달리니의 실재
쿤달리니는 인도철학과 힌두경전, 요가수행과 그 사상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요체이다. 그러므로 쿤달리니는 동양신비주의 영성의 태반이며 뉴에이지영성의 모티브인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과연 쿤달리니는 인간의 육체안에 실재하는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실재한다면 어떻게 쿤달리니의 실재성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된다.
쿤달리니는 신체적인 기관이 아니므로 일반적 감각에 의하여 식별되거나 감지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생리학적, 정신의학적, 또는 어떤 과학적 형태로도 설명되어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쿤달리니는 동양의 신비가들과 뉴에이저들에게 있어서 확고한 영성의 토대로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쿤달리니의 내재적 실존에 대한 뉴에이저들의 확신의 근거는 주로 요가의 비의를 다룬 힌두교의 베다와 우파니샤드, 탄트라 등 고대 경전과 유사문헌 그리고 쿤달리니 각성에 근거한 신비적 경험에 근거한다.
본고에서는 쿤달리니의 실재성에 대한 기초로서 고대경전 및 문헌과 신비주의자들의 경험적 전승에 관하여 고찰하기로 한다.
1. 고대경전 및 문헌
먼저, 쿤달리니 실재에 관한 지식과 비의적 수행방법은 힌두교의 고대 경전과 요가문헌 등에 나타난 기록에 의존한다. 이는 힌두교의 역사적 발전 과정과 불가분리의 관련성을 갖게 된다. 채근식에 따르면 힌두교 역사의 발전과정은 7기로 구분된다. 제 1기는 B.C. 2,000년경부터 1,000년까지 천연현상을 신격화한 시대로 대표적인 문헌으로서 [리그베다]가 있다. 제 2기는 B.C. 1,000~500년에 이르는 브라만교의 전성기로 우주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내린 [우파니샤드]가 저술된 시기이다. 제 3기는 인도철학의 발흥시대로 B.C.500~200년까지로 보수적 경향을 띤 여러 가지 [경서(經書-stura)]가 편찬되고 요가파를 비롯한 네가지 학파가 일어난 시기였다. 제 4기는 불교의 흥왕 시대로 B.C.250년 경부터 기원후 500년까지를 말하며, 제 5기는 A.D.500~1,000년까지 브라만교의 부흥시대였고, 제 6기는 A.D.1,000~1,500까지 힌두교의 재건시기로 여러 종파가 일어나 병립하였으며, 제 7기는 A.D.1,500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이다.
아지트 무케르지는 8세경에 이르러 힌두교의 정통성을 계승한 밀교경전(密敎經典)인 탄트라(Tantra)가 대중화되었다고 한다. 탄트라는 진리의 천명이나 철학적 교리서라기보다는 깨달음을 향한 수행방식이고 세계에 대한 일종의 태도이다. 탄트라는 인도의 아리안계에 근원을 둔 고대 인도 전통의 중심일 뿐아니라, 인도철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채근식에 의한 인도종교발전사적 구분에 따르면, 탄트라가 출현한 시기는 종교사적으로 힌두종교의 부흥기인 제 5기로 볼 수 있다. 탄트라의 가르침들은 브라만교의 성전인 베다문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의례에 있어서 베다의 행법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많이 발견된다. 한편 탄트라 형식의 발전과정 속에서 우파니샤드와 요가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았으며, 8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러 완전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아지트 무케르지는 탄트라 행법(行法)은 힌두교와 불교의 문헌인 성전(聖典)이 완성되기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방대한 수에 이르지만 저자가 없기 때문에 신이 썼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고 한다.
탄트라 성전에 의하면 모든 개개인은 잠자고 있는 우주에너지인 "쿤달리니"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탄트라 행자가 자아의 각성과정에서의 최종목적은 육체 속에 쿤달리니의 에너지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몸을 사리고 잠자고 있는 쿤달리니 삭티라는 우주력은 인간의 육체안에 깃들어 있는 최고의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2. 신비주의자들의 경험적 전승
인도의 고대종교의 경전과 탄트라 문헌에서 뿐만 아니라, 힌두교의 구루들과 뉴에이지운동의 전형적인 신비가들은 그들의 생애가운데 일어난 쿤달리니각성에 관한 경험적 진술들을 저서를 통하여 기록으로 남겨왔다. 고피 크리슈나에 따르면 쿤달리니 각성은 모든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잠재된 사건이며, 다가오는 세기의 불확실성을 극복할 수 있는 인류의 보편적 희망이다. 본고에서는 뉴에이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신비가들의 저서를 인물별로 다루기로 한다.
가. 크리슈나무르티(1895- ?)
지두 크리슈 나무르티는 1895년 인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혼의 스승,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 깨달은 자, 혹은 그를 추종했던 무리들에게는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1875년 헬레나 페트로바 블라바츠키에 의해 창립된 신지학회의 2대회장인 애니벤산트와 동역자 리드비터에 의해 세계의 스승인 마이트레야가 들어와서 살게될 대리육체로 선택되어 각별한 보호와 영적 수련을 거치게 된다. 28살 되던 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신비한 체험 이후 쿤달리니의 각성에 의한 이상한 과정에 돌입하게 된다. 그 이후 그는 수년에 걸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증세와 고통에 시달리게 되는데, 그의 전기를 집필한 메리 루틴스에 따르면 그의 고통은 쿤달리니 각성에 의한 것으로서 주로 척추에 집중된 것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 고피 크리슈나(Gopi Krishuna)
그는 인도의 공무원으로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면서 오랜동안 지속적인 명상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생애를 뒤바꾸어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명상수행중 척추 끝부분에 기분 좋은 기묘한 감각이 시작됨으로서 비롯되었다. 그 감각은 척추를 타고 차츰 상승하다가 "갑자기 폭포가 쏟아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한다발의 빛줄기가 척수를 통하여 뇌천으로 흘러드는 것이었다."고 쿤달리니 각성의 순간을 회고하고 있다. 그런 후 불안과 고통이 뒤따랐는데 수년동안 고피 크리슈나는 빛의 환영과 심신의 고통을 늘 함께 체험하게 되었다. 그의 경우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것은 아무런 정신적인 준비나 스승의 지도도 없이 쿤달리니가 저절로 상승하였던 경험을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 라마 크리슈나(Rama Krishna)
라마 크리슈나는 평생을 신의식의 희열 속에서 살다간, 인도가 낳은 세계적인 대성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여성 구루, 브라흐마니(Brahmani)의 지도를 받아 쿤달리니 요가의 수행법을 따랐는데, 각각의 의례를 올리면서 약속 받았던 성과를 3일내에 성취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의 경험을 깡충깡충 뛰었다 밀어 올려졌다 지그재그로 움직였다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쿤달리니의 상승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는데, 훗날 제자들에게 쿤달리니의 다양한 움직임을 물고기 같은, 새 같은, 원숭이 같은 등등으로 설명하였다.
● 쿤달리니각성 : 신성 브라마를 향한 운동
쿤달리니 각성
전항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쿤달리니의 실재성은 고대문헌과 신비주의자들의 경험적 전승에 의해 확인되고 지지되고 있다. 본 단락에서는 쿤달리니 각성에 관한 일련의 원리들을 고찰하기로 한다.
영적신체(Spiritual body)
바바하리다스는 "모든 인간은 자신의 육체 속에 불가시적인 질료와 에너지(쿤달리니, 나디, 챠크라)로 이루어진 또하나의 몸-정묘한 신체-을 갖고 있다고 한다. 브라이트 클레인(Bright Klein)에 따르면, '물리적인 육체 이면에 영적인 신체가 있는데, 영적실체는 "빛의 진동(vibrations of light)에 의해 구성되고 7단계의 서로 다른 구심점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림] 미세신체도
이것은 인간의 육체라는 구조에 간직된 우주의 미세한 일면으로서 "미세신(微細身)"이라고도 한다. 미세신 안에는 수많은 에테르 회로가 있는데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아주 고도의 수법으로 구성된 해류도(海流圖)와 같은 모습이라고 한다. 이 회로는 중심의 스쉼나 회로를 중심으로 하여 좌측에 "이다"와 우측에 "핑갈라" 회로가 놓여져 있다. 스쉼나 회로는 에너지 쿤달리니가 눈뜨지 않는 한 하부가 닫혀진 상태이다. 그러므로 요가 수행자는 쿤달리니의 잠자고 있는 힘을 일깨워 그것을 차차 보다 높은 영혼의 중추로 이끌어 냄으로써 방사되는 에너지는 변화하고 승화된다. 그리고 이어서 <사하스라라 챠크라>의 자리인 최고의 정점 브라흐마란다라에서 순수한 의식인 <시바>와 맺어진다. 이것이 <쿤달리니 요가>가 지향하는 바이고 목적이다.
챠크라(Chakra)
"챠크라"는 인간이 영적 진화를 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존재이다. 챠크라는 산스크리트어로 '바퀴(輪)' 또는 '원형'을 뜻하는데, 그것에 관한 묘사는 <우파니샤드>외 많은 고대문헌에 등장한다.
탄트라의 기술(記述)에 의하면 성전에 따라 수에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영혼 중추에는 여섯 개의 주요한 영혼 센터가 있다고 한다.
챠크라는 잠자는 우주에너지 쿤달리니의 상승경로이다.
그러므로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인간의 영적신체(spiritual body)에 각인된 7단계의 채널 곧 챠크라를 경유하여 최고의 단계로 상승하게 된다. 각성된 쿤달리니 각성의 유일한 목적은 "인간 속에 내재하는 정신원리인 시바와의 완전한 합일"이다. 이와 같은 합일은 필연적으로 반복되어야 할 윤회와 환생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카르마(Karma)의 종속으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한다. 마침내, 수행자가 목표에 도달하였을 때 형언할 수 없는 지고의 기쁨 속에서 자아는 숭고한 우주의식과 합체된다고 한다. 이러한 상태는 해탈, 열반, 니르바나, 사마디 등으로 알려져 왔다.
인체 내의 챠크라는 7단계의 채널을 형성하고 있다. 즉, 물다라다 챠크라(Muladhara Chakra), 스바디스나타 챠크라(Svadhishtahana Chakra), 마니푸라 챠크라(Manipura), 아나하타 챠크라(Anahata Chakra), 비슈다 챠크라(Vishuddha Chakra), 아즈나 챠크라(Ajna Chakra), 사하스라라 챠크라(Sahasrara Chakra) 등이 그것이다.
[그림] 수직적 관점에서 조망한 챠크라 이미지. 최하부의 챠크라로부터 마지막 7단계인 정수리까지의 챠크라를 상징한다.
챠크라는 정신의 원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챠크라를 통해서 정신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4차원의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챠크라에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정신에 대한 직관이 담겨져 있으며, 우주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쿤달리니가 각 단계의 챠크라를 경유하는 동안 하위 센터의 의식은 보다 상위 센터 의식을 위하여 준비되고 변증법적으로 변형되어 최고의 챠크라에 도달한다. 민희식에 따르면 고오타마 붓타의 가르침 속에는 챠크라를 경유하는 쿤달리니 각성으로 인한 깨달음이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즉, 각 챠크라의 정신원리에 상응하는 가르침을 펼쳤다는 것이다.
또한 각각의 챠크라는 단계적으로 우주의 근본 질료인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에 상응될 뿐 아니라, 음․색․형․의의(意義)․기능 등의 상징적인 내부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요가(Yoga)
쿤달리니의 각성을 통한 해탈에 도달하기 위해서 고안된 가장 보편적이고 안정적인 기술은 요가(yoga)이다. 하리쉬 요하리(Harihs Johari)는 "인류역사상 변화와 화합을 통한 체계 중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본 것이 바로 '요가(yoga)'이다."라고 기술한다. 즉, 요가는 정신과 의식의 결합상태를 만들어 주는 실제적 방법이요 체계이다. '요가'라는 말은 '유즈(yuj)'라고 하는 산스크리트에서 나온 말로서 '합치기', '보태기', '결합'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총체적 육체의 차원에서 볼 때 이는 개인의식과 우주의식간에 결합을 의미한다.
엘리야데(Mircea Eliade)의 연구에 따르면 "구제(救濟)의 경의로운 방법으로 간주되는 요가의 점차적인 확산은 법률-신학적인 문헌과 <마하바라타 Mahabharata>의 설교품과 종교품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인도정신성의 핵심으로서 요가의 득세와 일반대중의 신비로운 신애 사상의 창궐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주목한다. 즉, "제의적이고 형식화된 브라만 계급의 정통사상에 대한 반동으로 국민의 대다수가 보다 구체적인 종교체험을, 보다 쉽게 가까이 할 수 있고, 보다 친숙하고, 보다 개인적이고 신비적인 신앙을 원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요가 체계의 발전과 대중적 보급은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요가의 의례들은 제식과 신학을 경멸하면서 인간의 생리적인 토대와 거의 분리되지 않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자료에 전적으로 입각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기술한다.
엘리야데에 따르면 "인도가 발견한 가장 위대한 것중에 하나는, 목격자로서의 의식의 발견, 의식의 정신생리학적 구조들과 그러한 구조가 갖는 시제적(時制的)인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 의식, 즉, [해탈]한 자의 의식, 자신을 시간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성공하고, 그렇게 해서 불가사의한 자유를 아는 그러한 자의식의 발견이다. 이와 같은 절대적인 자유, 완벽한 자발성의 정복은 모든 인도철학과 신기한 기법들의 목표"라고 기술하면서, "그러나 이 목표는 무엇보다도 요가를 통해서 달성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요가는 쿤달리니가 경유하는 7개의 챠크라의 문을 여는 최고의 비의적 기술이기 때문이다.
뉴에이지운동에서 명상 및 요가를 강조하는 것은 결국 인간 속에 내재한 무한한 영적인 힘을 강조하고, 그것을 발전시켜 모든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힌두식 요가법과 현대의 뉴에이지운동에서 다루는 명상 및 요가는 다르다. 힌두교의 요가가 개인적이고 정적이며 고행을 요구하는 반면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좀더 대중적이고 현대화된 형식의 명상이나 요가를 전하고 있으며, 그것의 과학적인 타당성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다.
[그림] 파라마한사 요가난다가 취한 크리야 요가의 자세
요가는 인간의 여러 기질에 따라서 수행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즉, 명상요가라고도 하는 '라자요가(Raja Yoga)', 실재와 비실제간의 지속적인 분별을 통하여 진정한 지식의 화합을 추구하는 '주나나 요가(Junana Yoga)', 이타적 행위를 통해 해탈을 추구하는 '카르마 요가(Karma Yoga)', 헌신․사랑․복종을 통한 '박티요가(Bhakti Yoga)', 육체적 수련에 의한 '하타요가(Hatha Yoga)'가 있다. 이외에도 하리쉬요하리에 따르면, '탄트라 요가(Tantra Yoga)'는 몸과 마음을 하나로 간주하며 몸을 마음의 원동력으로 여기는 가장 대표적 요가이다. 탄트라요가는 인도철학의 정통을 계승하고 종합하여 대중적으로 발전되어 전개된 것으로서, "인생의 체험임과 동시에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정신적인 힘을 표출해내는 방법이며 체계"인 것이다.
한편, 요가난다는 그의 스승으로부터 전수된 고대요가의 전통적 방법과 체계를 통하여 가장 빠른시간 안에 요가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크리야요가"를 서구에 소개함으로써 서구인들을 향한 요가의 대중화를 촉진하였다.
요가를 통해서 수행자들은 각성된 쿤달리니의 에너지가 신체안에 일곱 개의 에너지센타인 챠크라를 관통하여 최고의 우주의식 브라만과의 합일에 도달하게 된다. 즉, 아트만과 브라마, 개인의식과 우주의식간의 결합이야말로 '요가'라고 규정지어진 체계를 몸소 실천하는 수행자들이 추구하는 목표인 것이다.
그러므로 고피 크리슈나는 요가의 목적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실, 힌두교와 요가의 근본이 되는 신앙은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열심히 노력하여 초인으로 변신하거나, 진화의 주기를 속히 달성하고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나서 현상세계 저편에 있는 무한 실재의 세계에 안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고 하였다.
성경적 접근의 기초
내재된 신성으로서 반기독교적 인간관을 구성하는 '쿤달리니'의 실재성에 대한 성경적 접근을 위해서는 '죄'와 '적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적 개념의 정리가 요구된다. 이는 뉴에이지사상이 중추적으로 기독교의 기독론과 인죄론을 파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죄(罪)
가. 인죄론(人罪論)
뉴에이지사상은 인간안에 근원적 신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본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부인할 뿐 아니라 전혀 다른 개념을 갖고 있다. 즉, '죄'란 인간을 멸망과 죽음 앞에 직면하게 하는 원인이 아니다. 뉴에이지사고에 있어서 '죄'란 우주의 원시적 본성으로서 우주구조의 일부분이며 벤자민 크레임에 따르면 '하느님의 한 부분'이다. 또한 세계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고통과 악의 문제는 비실재적인 물질세계에 적용되는 업(業)의 원리(Karma)로부터 야기된다. 그러므로 이생에서의 삶은 전생의 삶에 대한 보상적 삶이며 보다 나은 환생을 위한 준비의 기간이다.
한편, 뉴에이지사상에 있어서 인간의 구원은 누구든지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한 본성 '아트만(Atman)'을 자각함으로써 카르마의 수레바퀴를 멈추고 비실재의 허상인 '마야(Maya)'의 세계를 초극함로서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뉴에이지사상에는 근원적으로 인간의 죄로 인해 요청되는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며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을 가져온 인간의 원죄를 계시할 뿐 아니라 심판과 사망으로 정죄한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죄'는 보편적인 것이며 아무도 예외를 갖지 못한다(롬3:23).
루이스 벌콕은 '최초의 죄(Original Sin)'는 하나님의 금령에 대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최초의 죄에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전인격적(知精意) 거역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선과 악 사이에는 중립상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죄는 절대적 특질을 갖는다는 것이 성서의 명백한 교훈이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든지 원죄가 있는데, 이것은 "인간 생명을 더럽히는 모든 본죄의 내적근원"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된 선이 조금도 없는 전적부패(Total depravity)와 전적무능력(Total inability)을 조장한다.
소요리문답은 이와 같은 진리를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사람이 타락한 지위에서 죄되는 것은 아담의 최초의 범죄에 대한 죄책과 원시의가 없는 것과 온 성품이 부패한 것인데, 이것은 보통 원죄라 하는 것이요, 아울러 이 죄로 말미암아 나오는 모든 죄이다."
죄로부터의 개인적 구속 또는 구원교리는 가장 오래된 일신론 종교들인 유대교와 기독교의 핵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죄는 보편적인 것이며, "모든 인간은 정죄하에 있으며,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속죄를 필요로 한다."고 선언한다.
나. 죄의 실재성
성경은 인간의 마음 속에 실재하는 죄의 본질을 계시하고 있다. 즉, "죄는 외부적 행위로만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벌콕은 "죄는 영혼의 한 기능 속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머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죄란 외부적 행위일 뿐 아니라 역시 죄적 습관과 마음의 죄적 상태 속에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한편, 죄의 전가에 대한 주제는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논쟁을 야기시켜 왔다. 그것은 그레샴 메이첸에 표현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아담의 죄에 연루된 정확한 방식"에 관한 것이다. 즉, 아담의 죄와 그 후손의 죄와의 관계에 관한 설명이라고 볼 수 있다.
존 머레이에 따르면 이 역사적 논쟁은 인간본성이 아담안에서 산술적으로도, 종족적으로도 하나였다고 주장하는 실재론과, 아담은 하나님이 지정하여 언약하신 전인류의 원조이며 대표자라는 견해로 양립된다. 실재론자들은 대표론의 옹호자들이 하나님과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 사이에 언약적 관계라는 견지에서, "아담의 혈통적 원조성과 종족적 대표성을 거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재론과 대표론 모두 "인간 본성이 아담 안에서 더럽혀지고 유전적으로 후손들에게 상속된다."는 관념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론적 견지에서 죄의 전가가 "영적 영대성에 의해 아담의 범죄가 자연적으로 생식된 모든 후손들에게 넘겨지는 것과 같은 속성의 것"이라는 것이라는 사실은 본 논문의 논지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죄는 인간 안에 실재하는 본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안에 내재된 죄의 본성은 신구약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요한 테마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고, 사도 바울에 의하면 (롬3:23)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으며, 또한 죄는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는 본성이다(롬7:23).
또한 예수는 죄로 인하여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악의 표징들을 폭로하였다.
즉, (마15:18-19)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와 같이 인간의 죄에 대한 성경의 증언과 기독교의 전통적 입장은 명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부인한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전통에 대하여 숙명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사도 요한은 명백하게 기록하였다.
(요일1:9-10)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2. 불법의 사람
가. 불법의 비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시대적 표지로서 '배도'를 지목하고 있다.
즉, 주의 날은 '배도하는 일이' 있기까지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시간적으로 배도가 시작된 이후에 "멸망의 아들"이라고도 불리는 '불법의 사람'이 출현하는데, 여기서 '불법의 사람'은 어떤 사본에서는 '불법'이 '죄'로 바뀌어서 '죄의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이 인물은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죄의 세력을 지도하는 자로서 마지막 때에 등장하리라고 예언된 '적그리스도'와 동일한 인물을 가리킨다(요일2:18)". 그의 인격적 특성은 '자존'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칭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불법의 사람'은 살후2:7절에서 언급되는 '불법의 비밀'과 인과적 상관관계에 놓여져 있다. '불법의 사람'의 출현은 드러나지 않지만 은밀하게 진행되어온 '불법의 비밀'이 공개적으로 표출되는 사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주장하는 바는, "'불법'의 비밀은 배도가 일어나고 불법의 사람이 나타날 때 비로서 그 정체를 드러내고 활동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막는 자'의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법의 비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주석가들 사이에 다양한 논의가 개진되어 왔다. 즉, 여기서 비밀은 '가둔다', '닫는다'는 뜻의 동사 '뮈오'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말은 원래 동방의 신비적 종교의 입문식에 사용되어 신비한 능력의 전수행위나 종교적 교리를 지칭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미혹하는 거짓교사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적그리스도의 정신"이며, "그리스도께서 위하는 모든 자들을 대적하는 악의 특별한 형태"이다.
한편, 보스(G. Vos)따르면 바울은 '불법의 사람(죄악의 사람=적그리스도)'을 묘사할 때에 배도와 관련된 바울의 술어들이 다니엘서의 술어들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보수주의 학파에 견해에 따르면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예언하고 있다. 다니엘은 종말에 출현할 '적그리스도'가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적그리스도'가 '때와 법을' 변개할 것이라는 사실은 논지와 관련하여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그가 바꾸려고 하는 '때와 법'은 어떤 것인가?
해톤(Heaton)은 에피파네스가 변개 혹은 폐지시키고자 했던 유대의 종교적 절기와 모세의 율법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칼빈(Calvin), 케일(Keil), 류폴드(Leupold), 영(Young)에 따르면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진행되는 역사의 흐름 및 자연적으로 순환하는 계절, 그리고 우주의 운행 질서 및 마음에 심어 놓은 양심의 법을 가리킨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주석가들은 후자의 견해를 취하고 있다.
즉, 델리취는 "때는 원어상 정한 기한이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창조당시에 정하신 순리적인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며, '법'은 '명령'이나 '규례', '포고령' 등의 문자적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모든 피조물의 생명과 활동의 근간이 되는 원리와 법칙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또한 '때와 법'의 변경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에 속한 것인 바, 이것을 변경시키고자 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한 위치에 놓으려는 적그리스도의 극악한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편, 뉴에이지사상의 모티브인 쿤달리니영성의 고찰해 볼 때 '때와 법'의 변개는 보다 확고한 의미가 부연될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기독교 종말론적 관점에서 '법'이란 모든 인류를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시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도록 제정하신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쿤달리니 모티브에 점착된 뉴에이지 사상은 인간의 본래적 신성을 주장하고 인간신화를 표방함으로서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 구원의 섭리를 반역하고 있다.
또한 '때'란 죄로 말미암아 개개의 인간 뿐아니라 지으신 모든 만물에 대한 심판의 시기로서, 기독교 종말론은 성경의 시종을 관통하는 중추적인 주제이다. 종말의 모티브는 다니엘, 이사야, 에스겔, 요엘, 말라기 등 구약의 정경들에서 뿐만 아니라 베드로, 바울, 요한 등을 비롯한 신약의 사도들의 서신들 속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고 있으며, 예수그리스도 역시 종말의 도래를 명백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뉴에이지사상은 데이야르 샤르댕과 마릴린 퍼거슨이 주장하는 낙관적인 진화론의 견지에서 세계의 종말과 심판을 부정하고 진화된 인간들에 의한 새시대의 도래를 주장하고 있다.
나. 뱀의 영성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뱀처럼 몸안에 감겨져 있는 쿤달리니의 영성은 어원적, 형상적 견지에서 '뱀의 모티브'를 간직하고 있다.
인도종교에 있어서 뱀은 근원적인 영성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인도미술 만다라와 신비종교 미술에서 쿤달리니는 신성한 우주적 힘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진다. 또한 뱀과 용은 티벳과 중국, 일본, 한국 등 아시아 종교미술의 중요한 테마이며, 각 민족의 근원설화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존재이다.
[그림] 쿤달리니는 "뱀"의 형상이며 "불타는 뱀-serpent fire"로 불리워지며 "코브라"로 상징된다. 비쉬누의 이미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성의 구현은 완전하게 만개된 뱀의 영상과 일치한다. 피조물이 신이 된다고 하는 신비영성의 중심에 놓여진 "뱀"의 정체에 관한 계시는 성경에 있어서 "죄"의 기원을 의미한다.
쿤달리니에 근거한 요가체계에 따르면,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인체내의 일곱 개의 에너지 센터인 챠크라를 관통하여 정수리 부분에 위치한 최고의 챠크라 곧 시바가 머무는 곳까지 상승하여 합일을 이룬다고 한다. 쿤달리니 샥티와 시바의 합일은 아트만이 브라만에 귀의하는 것으로서 해탈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요기들이 지향하는 유일한 목적이며 구원의 정점이다.
그러나 성경은 뱀에 관하여 전혀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뱀은 히브리어로 '나하쉬'란 뜻에서 파생된 단어로 속삭이듯 낼름거리는 혀, 그리고 지나갈 때 쉿쉿 소리를 내는 뱀의 특성이 반영된 말이다(Gesenius, Furst, Bush). 성경에 따르면 뱀은 신성의 근원으로서 해탈과 불사에 이르게 하는 모티브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으로 하여금 사망에 이르도록 하는 죄의 조장자이다.
성경에 따르면 죄는 첫사람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부터 그 기원을 갖고 있었으며, 뱀은 죄의 기원을 담지하고 있는 상징성과 동시에 실존적 의미를 갖는다.
즉, 성경은 인간을 최초의 범죄로 유도한 존재가 있음을 계시한다(창3:1-3). 벌콕은 직접적인 표현으로 "인간의 타락은 사람의 마음 속에 불신임과 불신앙의 씨를 심은 뱀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되어졌다."고 하였다. 뱀(serpent)은 원죄의 모티브를 담고 있다.
여자의 후손과 원수(창3:15)가 되고 영원한 멸망의 불못에 던져질 심판(계20:10)으로 정죄된 뱀은 창세로부터 우주와 인류 전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인류를 충동하여 배도와 멸망으로 이끄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에 따르면 뱀은, 용(龍)이며 옛뱀이며 마귀이며 사단이다(계20:2).
뉴에이지사상은 예수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인하면서 인격적인 그리스도를 배격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만유안에 내재할 뿐 아니라 인간의 내재된 신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재된 그리스도 곧 신성한 힘이 바로 쿤달리니이다. 그러므로 뉴에이지영성은 내면의 잠자는 뱀의 영성 쿤달리니의 현현이다.
그러나 사도요한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요일4:2-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성경적 관점에서 뱀은 죄의 동인을 담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도의 길을 대적하는 역사적 실존으로서 용마귀사탄으로 불리우는 악의 실체와 동격적인 존재로 규정되고 있다.
다. 적그리스도
적그리스도(Antichrist)의 의미는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 '거짓 그리스도', 등인데 재림하실 그리스도에게 마침내 영원히 정복당할 그리스도의 적대자이다.
박형룡에 따르면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그리스도의 재림전에 나타날 5대 표지중에 하나이다. 교회에 반항하여 발전하는 악의 세력은 마침내 말세에 배도와 대환란을 일으키는 적그리스도로 인격화하여 나타날 것이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요한 서신서에서 나타나는데, 요한은 적그리스도에 대한 일정한 교리적 표준을 제시하고 있다.
요한에 따르면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임박한 종말의 표지이다(요일2:18). 또한 '적그리스도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한 자는 '아버지와 아들'도 부인하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 할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요한의 정의에 따르면, '적그리스도는 우선 하나의 신학적 개념이자 또한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과 관련되어있으며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이단적인 견해와도 관계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또한 요한이 비록 적그리스도란 명칭을 최초로 사용하였을지라도 그 명칭이 지시하는 세력 혹 정신은 분명히 구신약 성경의 여러 책에서 언급되었다. 성경에서 적그리스도의 묘사들은 여러 가지로 되었으나 하나님의 계시가 진보함에 따라 그 명확성은 증가한다.
박형룡은 구약의 "시편 2편의 여호와의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는 열방의 헛된 음모는 적그리스도 관념"의 예시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다수의 주석가들은 다니엘서 7장에 등장하는 '네번째 짐승'으로부터 나온 '열한 번째 뿔'에서 적그리스도에 대한 초상화를 발견하고 있다. 그리고 11장에 등장하는 하나의 왕은 7장의 '작은 뿔'과 동일시되는 인물로서 하나의 절대적인 통치자로 묘사된다.
신약에 있어서 바울은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재림전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 바울은 적그리스도를 '멸망의 아들', '불법의 사람'으로 언급하였다. 계시록 13장에서 적그리스도는 종말론적 사건의 중앙에 서게 될 '두 짐승'으로 등장한다.
또한 적그리스도에 인격성에 관하여 주석가들의 일반적인 의견은, '모든 악의 화신으로서 세계에 항상 임재한 적그리스도적 세력을 대표할 뿐 아니라, 역사상에 몇몇 선구자 혹 예표를 가진 하나의 말세적 인물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류폴드는 적그리스도의 성격을 종말론적 견지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그는 사람이다... 그는 불신앙과 불법의 일반적 발전을 이용할 것이다. 그는 큰 주권을 얻을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죄악으로 그의 전 존재에 가득차 있다. 말하자면 죄가 그의 속에서 구현될 것이다. 죄가 그의 전 인격을 지배할 것이다. 그는 '멸망의 아들'이다. 그는 가롯 유다와 같이 영원한 죽음을 죽게 될 것이다. 그를 따르는 사람은 모두 영원한 죽음을 죽게 될 것이다. 그는 원수이다. 그는 인간 사탄(human-satan)이다. 그는 무서운 힘과 악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적그리스도이다.
결론적으로 적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시 문자 그대로 실존적인 한 사람의 적그리스도가 될 것이며 또 그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멸망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역사적 변혁과 문명전환에 대한 일치된 견해가 집약되고 있다. 변혁에 대한 예감은 인종과 종교 및 제반 분야를 망라하여 포괄적이고 동시적으로 표현된다. 앨빈 토플러에 의하면 "지금 우리의 생활 속에 지금까지는 없었던 문명이 출현하려 하고 있다." 일리야 프리고진에 따르면 금세기는 "역사상 매우 극적인 순간이며, 어쩌면 전환기가 될 시점"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전환은 미래학적으로 신세계주의(New Glovalism), 신세계, 신세계 질서(New World Order), 제3의 물결, 물병좌시대, 그리고 종교적, 정신적으로는 새 정신(New Mind), 새로운 의식(New Consciousness), 신초월주의, 인간잠재력 개발, 새로운 여성, 신동방주의(New Orientalism)로 묘사된다. 마릴린 퍼거슨은 토마스 쿤이 제안한 개념을 빌어 이와 같은 발견들은 모두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이라 하였다. 토마스 쿤에 따르면 패러다임은 사고의 틀이며, 실재의 일면들을 이해하고 해명하는 체계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오래된 문제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인 것이다.
한편, 패러다임의 전환을 물리학적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뉴턴의 물리학을 대체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대두된 이후 양자역학은 물질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신개념 창출에 일조하고 있다. 개체적이고 독립적인 단위의 원자조각들에 의한 기계적 연합에 의한 세계의 구성이라는 종래의 관념은 파동과 입자, 물질과 동시에 에너지 양상을 갖는 미립자현상이 관찰된 이후 종말을 고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실재 자체가 분명히 확정할 수 없는 비결정적 성격을 지닌다는 양자 현상으로부터 "불확정성의 원리(principle of uncertainty)"라는 개념을 창안하였다. 이와 같은 양자현상적 이해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표방하는 인간의 이성, 과학성, 진리의 객관성과 보편성 그리고 합리성에 대한 비판과 해체 명분에 대한 이론적 지지를 강화한다.
포스트모던의 세계는 기존의 질서와 체계들이 해체됨과 동시에 새로운 질서와 개념들이 급속하게 자리를 잡아간다.
김영한은 포스트모던의 변화를 주도하는 6대 특성을 개괄하면서 다원주의의 확장과 성경언어의 일식 그리고 뉴-에이지 운동의 확산을 지적하고 있다. 서구사상에 동양적 비교주의 사상을 혼합시키고 점성학까지 동원하는 신비적 혼합주의인 뉴에이지운동은 아놀드 토인비적 관점을 빌린다면 20세기 최대의 사건을 형성하는 범주에 놓인다.
일반적으로 양차대전은 급진적인 문명의 발전과 계몽주의 이래로 서구의식의 틀을 확정하였던 미래에 대한 낙관적 합리주의의에 대하여 근본적 회의를 몰고 왔으며, 물질문명의 세례 속에서 기독교교회의 세속화는 서구의 영적 진공화를 가속시킨 것으로 분석된다. 린드백은 20세기 초까지 서구 기독교 국가의 대다수 국민들은 성경의 언어 세계와 성경의 상상력 속에 살았던 서구사회는 이제 성경의 급속한 퇴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성경 언어의 퇴조는 급격하고 광범위하여 서양에서는 언어, 문화, 그리고 상상력이 놀라울 정도로 비성경화 되었다."는 것이다. 홍치모는 미국의 옛날 역사교과서에서 20페이지에 달하는 청교도들의 신앙과 활동에 대한 언급이 이제는 불과 3페이지 분량으로 기록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미국의 전통적인 패러다임이 사라져 버렸다."고 기술한다. 이와 같은 전통적 기독교의 쇠퇴, 성서적 언어의 일식, 종교적 다원주의의 물결은 뉴에이지운동의 확산을 위한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였다.
Texe Mars에 따르면 뉴에이지 운동은 눈깜짝할 사이에 미국과 전세계를 휩쓸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종교운동이라고 한다. 총신대학원의 권성수교수는 뉴에이지 운동의 영성을 공기와 같이 밀접하게 파고드는 '사탄의 영기'로 묘사하고 있다.
이미 기독교 복음주의 진영에서 진행되어온 다각적인 관찰과 연구는 뉴에이지운동을 반기독교적이요, 사탄적이며, 종말론적 현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뉴에지운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인류를 분리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배후에 깔은 사탄의 교묘하고 사악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관찰된대로 뉴에이지운동의 범신론적 세계관과 신관, 인간관은 계시된 성경적 진리와 피할 수 없는 충돌을 야기시키고 있다. 뉴에이지운동은 인간성을 신성의 일부분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뉴에이지운동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인간이 영적각성을 통해 신이 될 수 있다는 원리이다. 인간신화를 위한 대표적인 수행체계는 요가와 명상이며, 심령술과 자동기록(automatic wiriting), 초능력, 마인드 콘트롤(mind control), 바이오 피드백(bio-feedback) 등의 비술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림] 요가를 통해서 인간과 연합되는 신성의 이미지
人間神化의 가능성은 인간의 육체안에 잠들어 있는 신성의 씨앗(God seed)으로부터 비롯된다. 신성의 씨앗은 산크리스트어로 '쿤달리니(Kundalini)'로 불리워진다. 힌두경전과 신비문헌과 동양신비가들의 저서에 따르면 쿤달리니는 인간안에 내재된 실존하는 우주적 에너지이다. 그러므로 고피 크리슈나는 "쿤달리니의 각성이야 말로 인류 앞에 놓인 최대의 과업이다."라고 주장한다. 쿤달리니의 각성을 통한 우주 최고의 신 브라마와의 연합은 뉴에이지운동이 추구하는 심원한 목표이며, 도래할 새시대의 이상적 인간이다. 그러므로 고피 크리슈나는, 쿤달리니를 각성시킬 가장 안전한 방법이 개발되어 심신 양면으로 그에 적합한 고상한 사람들이, 자기 육체로 이를 실험하고 응용하게 된다면, 인류는 많은 심령적, 정신적 거인들을 배출하는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있다.
보다 강력하게 김지하는 21세기를 '영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영적인 인간의 출현이 없이 21세기는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서구 자연주의의 잔존물인 진화론에 많은 희망을 걸고 있는 다수의 선구적인 사상가들은 새 인간과 새 시대, 즉 뉴맨(New Man)과 뉴에이지(New Age)의 도래를 예견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간관과 도래할 영성의 대두는 성경적 견지에서 피할 수 없는 충돌을 예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만물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창1:1, 요1:1-3),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할 죄인이다(롬3:23). 또한 인간은 스스로 자기안에 죄의 원인을 가지고 있으며(마15:19, 막7:21), 죄의 영향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되지 못한다(롬7:13-24)고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의의 폭을 인간의 본성으로 한정한다면 New Age는 인간의 신성함을 선언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죄성을 폭로한다. 뉴에이지운동과 성경은 인간에 대한 관점과 해석에 있어서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인간의 죄성을 폭로하고 중보자 예수그리스도를 향하게 하는 성경의 가르침과 인간 내부의 잠재된 신성의 씨 쿤달리니를 각성시켜 인간 스스로 영원불사의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뉴에이지사상은 서로 피할 수 없는 충돌의 지점을 응시하고 있다.
뉴에이지운동에서 인간신화의 가능성과 전망은 모든 인간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쿤달리니"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과연 신성의 씨(Divine seed), 내면의 빛(the inner light), 내재된 신성 등으로 알려진 "쿤달리니"란 무엇인가? "쿤달리니"는 성경적 관점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 이러한 의문은 New Age를 직면하면서 인간에 관한 성경의 증거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 21세기의 영성(뉴에이지운동 정의, 역사, 사상)
뉴에이지운동의 정의
뉴에이지운동은 간단하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복합적이고 다양한 개념군(郡)을 형성한다. 뉴에이지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동방 신비주의, 고대의 밀교적인 전통, 힌두교와 불교 등의 동양 종교, 진화론적 낙관주의, 사라져버린 과거의 문명들, 외계문명, 점성학 등의 용어들이 언급된다. 김영한에 따르면 뉴에이지운동은 서구 사상에 동양적 비교주의 사상을 혼합시키고, 이에 점성학까지 동원하는 신비적 혼합주의이다. 또한 뉴에이지운동은 동양과 서양의 다양한 신비사상을 혼합하여 '과학'이라는 옷을 입힌 "현대판 신화운동"이라고도 한다. 뉴에이지운동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 속에 내포된 공통적인 개념은 뉴에이지운동이 서구문명과 동양신비종교와의 만남으로부터 접촉점을 갖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뉴에이지운동은 월터(Walter Martin)의 견해와 같이 "동양의 비술적 신비주의가 서양문명으로의 급증하는 침투를 묘사하는 데 가장 흔히 사용되는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힌두교의 브라마(Brahman)와 아트만(Atman) 사상을 차용하는 뉴에이지운동은 요가와 명상 등의 수행을 통해 윤회와 환생으로 거듭되는 카르마(Karma)의 공작을 차단하고, 범아일여(梵兒一如)의 해탈 경지를 모든 인간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
[그림] 불교의 창시자 고오타마 붓다는 "열반"을 통하여 구원의 과업을 이룬자의 완전한 모범으로 간주된다.
주목해야할 것은 비록 뉴에이지운동이 서구인들의 주도하에 다양한 양태로 나타나지만 기본 사상은 인도종교철학과 고대의 이교적 신비주의 전승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문화사적 측면에서 볼 때 뉴에이지운동은 그 뿌리를 동양에 두고 있으면서 꽃과 열매는 서구사회의 장을 통해 나타난 일종의 종교와 문화의 통합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월터마틴(Walter Martine)은 "우리는 여기 뉴에이지에서 영성과 미신, 열광과 흉내의 결합을 본다. 여기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그것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뉴에이지운동의 역사
뉴에이지운동에 관한 역사적 발전과정에 대한 학자들간의 관점은 다양하게 표현된다. 홍치모에 따르면 새시대운동이 지니고 있는 정신과 사상 그 자체가 혼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문화사적 견지에서 뉴에이지운동은 1960년대의 미국의 히피족들의 반문화운동(反文化運動-Counter Culture Movement)과 1970년대의 자기성취문화(The Culture of Narcissism)운동을 거쳐 1980년대의 들어서자 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새시대운동(New Age Movememt)은 그 기원에 있어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뉴에이지 운동은 먼저 세계종교의 사상을 흡수하고 있으며 힌두교와 불교의 환생과 윤회 사상, 선불교(仙佛敎)의 절대무(絶對無), 동양의 이원론인 태극사상(太極思想)을 받아 들이고 있으며, 초대교회 안에서 유행하였던 영지주의사상도 흡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초월사상과 초월운동(Trancendentalism or Trancendental movement)사상적 발전 역시 뉴에이지운동 역사와 병행하고 있다. 특히, 프랜즈 안톤 메스머(Franz Anton Mesmer)의 영성주의와 메스머의 최면술은 이후에 시작된 신지학회운동과 연계되고 흡수되었다. 손종태에 따르면 초자연주의(Trasncendentalism)와 심령술(Spiritism), 신사고(New Thought), 신지학(Theosephy) 등은 뉴에이지 운동이 전격적으로 출현할 수 있는 철학적인 기반을 마련한 몇가지 중요한 사상들이라고 한다.
한편, 이양림은 사상적 관점에서 "뉴에이운동의 뿌리는 인본주의"라고 한다. 인본주의는 과학주의, 진화론, 유물론적인 생활철학과 무신론을 골간으로 하는 인본주의자 선언문 Ⅰ(Humanist Manifesto Ⅰ)에 의해서 세상에 공개적으로 표출되었으며, 제2의 인본주의 선언에 이르러 "무신론적 태도가 보다 강경해"졌다고 하였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혐오를 가중시켰고 물질문명에서 오는 모순과 부조리에 지친 서양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적합했다. 이와 같은 서구인의 영적 공백은 1960대 대거 미국으로 이주한 힌두교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동양종교의 요가와 명상과 심령술의 유입을 촉발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뉴에이지운동의 기원과 관련된 다각적인 관점에도 불구하고 1875년에 러시아 여인 마담 헬레나 브라밭스키(Madame Helena Petrovna Blabatsky, 1831-1891)에 의해 창립된 "신지학회"가 뉴에이지운동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보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통념이다. 브라밭스키 이후 신지학회는 제2대회장인 애니 빈산트(Annie Besant, 1847-1933)에 의해 번성해 나갔고, 제3대 회장 앨리스 베일리(Alice Bailey, 1880-1949)에 의해 뉴에이지운동의 기초가 다져지게 되었다.
또한 학자들은 마릴린 퍼거슨(Marilyn Ferguson)이 뉴에이지운동을 대중적 개념으로 자리잡게 하는데 기여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녀는 1980년에 출판한 '물병자리의 공모(The Aquarian Conspiracy)'란 책을 통해 비로서 전세계가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으며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새 시대를 만들어야 된다는 뉴에이지운동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을 하였다.
한편, 뉴에이지운동의 기원과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이 운동이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과 긴밀하고 근본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는 공공연한 사실에 관한 것이다. 신지학회 창설자 바브라스키는 자신의 수호영 '마하-도마 M'의 수호를 받아서 넓고 깊은 지식을 쌓았다고 고백하였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전기를 저술한 메리 루틴스에 따르면 신지학회 제2대 회장 애니 벤산트(Anne Bensant) 역시 중요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비술을 통해 히말라야의 영적 존재들과 접촉한 사실들을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다. 또한 영국에서 티벳의 라마승들의 수행과 삶에 관련된 자서전적 저술로 초미의 관심을 모았던 롭상 람파 역시 세계밖에 존재들로부터 사명에 대한 지시를 받은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도, 리드비터와 크리슈나무르티(Krish Namurti), 스폴딩(Baird T. Spalding), 요가난다(Yogananda), 맥도널드 베인(Mcdonald Vein) 등 뉴에이지운동과 관련된 주도적 인물들이 거의 예외없이 영적 존재들과의 접촉에 관한 사실들을 저서를 통하여 진술하고 있다. 이들이 접촉한 존재들은 초인간적인 존재들이며 그 사상과 의도에 있어서 반기독교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메리 루틴스가 저술한 크리슈나무르티의 전기에서 애니 벤산트와 리드비터가 접촉했던 히말라야의 영적인 존재들을 '루시퍼를 중심으로 영적 위계를 구성하는 존재'들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복음주의자들에 따르면 창세기 3장의 '타락사건'에서 뉴에이지운동의 기원에 관한 모티브를 발견한다. 곧, 뉴에이지운동의 기원은 '여자를 유혹한 뱀'으로서 '우주에서 발생한 최초의 범죄자 사탄에 뿌리를 둔다.'는 것이다.
뉴에이지운동의 사상
1. 신관(神觀)과 우주관
새시대운동의 우주관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는 표어는 "All is one, One is all."이다. 이 말은 곧 범신론적인 신관과 자아관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우주는 원래 하나의 존재이며 각 인간은 모두 다 개체로서의 우주임과 동시에 개체적 인간들의 모임이 바로 우주라는 것"이다.
뉴에이저에게 있어서 만물의 근원으로서 신은 인격성으로서가 아니라 우주의 근본원리나 힘 등으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제인 로버츠(Jane Roberts)에 따르면 신은 "하나의 개인이 아니라 에너지의 형태이며... 팽창하는 의식의 심령피라미드이다. 이 의식이 삼라만상과 개인들을 일제히 그리고 동시에 창조한다."고 표현된다.
한편, 힌두교의 경전과 요가철학을 수용하는 뉴에이지 운동은 우주만물의 창조적 동인으로서 하나의 통일된 힘을 직관한다. 이 우주적인 힘은 우주의 순수원리, 우주정신, 보편적정신, 우주의 영 혹은 우주대영(the universal spirit)으로도 불리는 브라마(Bramahn)를 의미한다.
뉴에이지적 사고에 있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주대영에 기원을 둔다. 따라서 우주와 우주대영 속에 있는 만물들은 그 기원이나 영원성에서 신의 본질이나 절대적 통일체와 일체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범신론적 뉴에이지 사상의 신관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인격적인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만물의 근본으로서 만물 속에 내재된 근본적인 원리이며 힘을 의미하고 있다.
2. 인간관
그러므로 뉴에이지사상은 인간의 본성을 말할 때 신성의 일부분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하게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관은 뉴에이지사상의 신관으로부터 비롯된다. 즉,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오직 '우주대영(Universal Spirit)'이며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우주대영의 개체적 존재이자 동시에 우주대영 그 자체이기도하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우주적 신성이 내재된다. 인간의 내면에는 우주대영과 본질적으로 같은 '신성의 불꽃(Divine Spark)'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의 영적 자아(Spiritual Self)는 실제적으로 전지(全知 : omniscience)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여우 셜리 맥클래인(Shirley MacLaine)이 공공연하게 무대위에서 "나는 신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신이다."라는 외침 속에 요약되고 있다.
이와 같이 범신론적 사상을 기반으로 한 뉴에이지 운동은 인간으로 하여금 우주대영과의 연합을 통한 신화(神化)를 표방한다. 곧 신과의 합일을 경험함으로써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이는 힌두교의 범아동일론(凡兒同一論)의 "브라마(Brahman) 곧 신과 아트만(Atman) 곧 자아는 동일하다."는 가르침의 현대적 구현이다.
3. 구원관
뉴에이지 사고는 인간의 본성적인 죄(罪)를 부인한다. 죄란 우주의식의 일부이며 하나의 구조적 현상일 뿐이다. 뉴에이지사상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힌두교와 불교적 사고에 있어서 죄와 이로부터 비롯되는 악은 '마야(Maya)'로서 영원불멸의 진리를 가리는 물질계의 환각이요 미망일 뿐이다. 마야의 세계는 우주를 규율하는 카르마의 공작에 의해서 인과응보에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전생에 행한 행위에 따라서 이생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뉴에이지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악은 진리에 반하는 적이 아니라, 인간 자신안에 내재된 신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무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신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 모르고 있는 것을 깨우치기만 하면 보다 높은 자아로 승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와 인간성이 신적 존재로 귀일되는 것이며 인격적 변혁을 의미한다."는 주장이 가능해 진다.
뉴에이지사상에 있어서, "구원이란 인간의 잠재력 즉 인간 속에 있는 신의 힘을 개발함으로써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자신이 구원의 원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구원자로서 예수그리스도는 거부된다.
● 신성의 씨 '쿤달리니'(Devine Seed) : 육체안에 내재된 신성
신성의 씨 쿤달리니 - 뉴에이지운동의 동인(動因)
뉴에이지운동에 관하여 논할 때 과연 무엇을 뉴에이지운동으로 볼 것인가에 대하여 분분한 논의가 일어나는 것을 접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영화 '사랑과 영혼'이 뉴에이지 영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가 죽은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과 접촉하면서 이루어지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주안점을 둔다. 그러나 반론자들은 이 영화를 구성하는 가장 큰 테마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숭고한 사랑에 관한 것이지 망자의 영혼과 산자의 접촉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때로는 극단적으로 기독교적인 진리체계와 신앙의 원리에 반하여 대중문화를 통해 표현되는 모든 국면들이 반기독교적인 뉴에이지운동이며 사탄적인 것이라고 배수진을 치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어떤 영화나 서적, 노래의 가사 등의 특정한 부분에 대해서 그것이 반기독교적인 뉴에이지운동이냐 아니냐를 가리기 위해 논쟁이 야기되고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양한 대중 매체를 통해서 표현되는 무수한 문화적 양상들과 그안에 내포된 복합적인 의미들을 기독교적인가 아닌가의 준거를 가지고 비판한다는 것은 뉴에이지 운동의 본질에 대한 피상적인 관점에 대한 쟁론을 답습하고야 말 것이다. 오히려 이와 같은 열심은 진정으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다루어야 할 뉴에이지운동의 의도와 그 본질을 근본적으로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 즉, 대중매체를 통해서 표현되는 뉴에이지사상의 편린들을 주목하며 진리와 비진리를 가리기 위해 분분하는 것보다 진정으로 뉴에이지운동을 움직이는 요체가 무엇이며 그와 같은 동인이 대중문화를 통해서 어떻게 전달될 수 있는가를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적 관점에서 뉴에이지운동의 혐의가 현저한 영화나 가수, 노래, 서적, 신비결사단체의 이름 몇가지 정도를 열거한다고 해서 뉴에이지운동을 이해하고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진정으로 뉴에이지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파편적 지식에 관한 전달차원이 아니라 문화매체를 이용하여 파고드는 영성의 근원을 진지하게 조명해야할 필요가 있다.
'자유를 위한 변명'의 저자이며 전위무용가인 홍신자는 자신의 저서에서 자신이 무대위에서 전위적 표현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신(神)'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는 춤의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이 몸을 통하여 오는 신의 소리이다. 나는 사라지고 신의 소리가 흐르는 것이다. 나의 팔이 올라가고 있지만, 내가 그것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움직임을 지배하지 않는다. 신이 그 움직임을 지배하도록 나는 다만 그 신을 불러들일 뿐이다. 신이 내속으로 들어온다. 마침내 나는 신이 되는 것이다. 신의 소리는 다시 멀리 퍼진다. 바람처럼 파도처럼 에너지로서 흔적도 없이 그렇게 사라진다. 춤추는 자는 사라지고 춤만이 남는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이순간, 바로 신의 순간이 아닌가.
그녀가 대중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신'은 티벳과 히말라야 인도 등지를 다니는 영적순례 속에서 만난 신이며, 그녀의 스승 구루 라즈니쉬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가르침의 근원이다. 이와 같은 그녀의 진술은 표상적으로 접하는 뉴에이지운동의 양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적인 영향력으로 나타나는 내부적 원인이 있음을 알게 한다.
즉, 뉴에이지운동에는 거시적으로 외부적 국면과 내부적 국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상언은 '가시적인 세계(visible-world)와 비가시적 세계(invisible world)'로 구분할 수 있는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또한 김성수는 보다 구체적인 의미에서 뉴에이운동을 네가지 수준으로 구분하여 기술하기도 하였다.
첫 번째 수준은, 피상적인 호칭의 수준으로서 일반적으로 상업적인 세계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두 번째 수준은, 사람들이 뉴에이지 사상과 실제를 새로운 유행에 맞는 어떤 것으로 추구하는데 가장 대중적인 관심을 끄는 수준이다. 세 번째 수준은, 변화, 변형의 이미지(transform image), 패러다임의 전환(a paradime shift), 새로운 세계관(a new world view)이라고 부른다. 이 수준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을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변화시킨다. 마지막 네 번째 수준은 뉴에이지 전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수준의 특징은 성자(the sacred)의 수육(incanation)이다. 이 수준에서 인간은 세계관의 변형을 넘어 인간의 영적 변형에로 나아가게 된다고 한다.
이상에서와 같이 뉴에이지운동은 외부적 국면에서 내부적 국면으로 혹은 피상적 수준에서 고차원의 내면적이고 영적인 수준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그러므로 뉴에이지운동은 가시적 세계에서 비가시적세계로, 혹은 인간의 의식의 단계적 변형을 위한 매개로서 다양한 실행방법을 사용한다. 동양종교의 비의적 신비술, 영지주의, 심령과학, 무속신앙, 명상(초월명상), 투시, 점치는 것, 최면술, 요가, 관상, 수상, UFO에 관한 것, 마녀숭배, 윤회설, 신과학운동, 인간 잠재력 개발운동, 초혼, 텔레파시와 정신동력, SF영화와 소설, 카드점, 강신술...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인간의식의 변형을 위한 매개적 방편들은 인간의 내적 자아와 우주의식과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서, 카르마의 윤회와 환생의 순환 고리를 끊고 해탈에 도달하는 것이다.
한편, 뉴에이저들은 인간의식의 변형을 통한 신성과의 합일에 도달할 수 있는 실재론적 내적 근거가 바로 인간안에 놓여져 있다고 주장한다.
티벳의 라마승 롭상 람파에 따르면, "이 지구상의 우리라는 것은 단지 우리의 초월적 자아(overself)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것은 동양인이든 서구인이든 모든 인간의 척수 신경의 맨 가운데있는 척수로서, 다른 차원으로 이어지는 대롱관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롭상에 따르면 이것은 동양인들이 '뱀의 불꽃(Serpent Fire)'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쿤달리니(Kundalini)이다.
인간의 육체안에 실재하는 쿤달리니는 인도철학과 동양의 신비주의자, 뉴에이저들에 의한 저술 속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뉴에이지운동이 지향하는 영성의 모티브이며, 고피 크리슈나(Gopi Krishuna)와 아지트 무케르지(Ajit Mookerjee)에 의하면 역사와 종교,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안에 내재하는 보편적인 것이다.
쿤달리니의 정의
쿤달리니는 인간의 육체안에 내재된 신성 아트만(Atman)으로서 순수의식, 우주적 여성에너지 등으로 명명된다. 성(聲) 브라만(Sabdabrahman), 옴(OM), 산크리스트어로 쿤달리니라는 단어는 '감겨진'을 뜻한다. 바바 하리 다스는 "쿤달리니는 척추의 기저부에 비축된 에너지(프라나)의 덩어리로서 나선형으로 움직이는 힘으로서 스바얌부 링가의 둘레를 세 바퀴 반 감고 있는 뱀으로 묘사된다."고 한다.
[그림] 쿤달리니 이미지
아지트무케르지 따르면, "쿤달리니는 인간 개체 안에 내재해 있는 초월적인 힘과 같은 것으로 나선형의 잠재적인 우주에너지이다." 그러므로 "각 개인은 이러한 에너지의 현현이고,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우주는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 놓는 에너지와 동일한 의식의 결과물들"이라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탄트라 성전에서는 "모든 개개인은 이 에너지의 표현이고, 우리들 주변의 물체는 항상 같은 의식이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는 이러한 의식에서 나왔던 것이다."라고 진술한다.
그러므로 쿤달리니는 인간안에 놓여진 근원적 신성이며, 진정한 자아이며, 신성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요기들의 목표이다.
게란다본집(Gherada Samhita, 제16권)은 이점을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물다라다(Muladhara)에는 쿤달리니가 또아리를 틀고 앉은 뱀처럼 쉬고 있다. 이 본래의 자아는 그곳에서 화염처럼 타오르고 있다. 이렇게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빛이 명징한 브라만(Brahman)과 동일한 것이라는 바를 체험하는 과정을 초월적인 명상이라 한다.
탄트라를 비롯한 요기들의 문헌에 따르면 인간신화의 실재적인 진전은 잠재된 쿤달리니의 각성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마치 뱀처럼 감겨져 있는 쿤달리니 에너지를 깨우는 사람만이 진정한 해방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하타요가-프라디피카, 제3장, 제108권.)
[그림] 보존의 신 "비쉬누", 그는 우주불멸의 힘 "쿤달리니"와 완전합일된 신성이다. 그림은 신성 비쉬누의 근원과 일치하는 "쿤달리니" 곧 "뱀"과의 근원적인 일치성을 상징하고 있다. 비쉬누는 쿤달리니 각성을 통해 도달해야 할 요기들의 완전한 목표이며, 역사 속에서 화신(크리슈나)하여 요가의 비의를 전수한 자로 신앙된다.
쿤달리니의 실재
쿤달리니는 인도철학과 힌두경전, 요가수행과 그 사상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요체이다. 그러므로 쿤달리니는 동양신비주의 영성의 태반이며 뉴에이지영성의 모티브인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과연 쿤달리니는 인간의 육체안에 실재하는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실재한다면 어떻게 쿤달리니의 실재성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된다.
쿤달리니는 신체적인 기관이 아니므로 일반적 감각에 의하여 식별되거나 감지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생리학적, 정신의학적, 또는 어떤 과학적 형태로도 설명되어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쿤달리니는 동양의 신비가들과 뉴에이저들에게 있어서 확고한 영성의 토대로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쿤달리니의 내재적 실존에 대한 뉴에이저들의 확신의 근거는 주로 요가의 비의를 다룬 힌두교의 베다와 우파니샤드, 탄트라 등 고대 경전과 유사문헌 그리고 쿤달리니 각성에 근거한 신비적 경험에 근거한다.
본고에서는 쿤달리니의 실재성에 대한 기초로서 고대경전 및 문헌과 신비주의자들의 경험적 전승에 관하여 고찰하기로 한다.
1. 고대경전 및 문헌
먼저, 쿤달리니 실재에 관한 지식과 비의적 수행방법은 힌두교의 고대 경전과 요가문헌 등에 나타난 기록에 의존한다. 이는 힌두교의 역사적 발전 과정과 불가분리의 관련성을 갖게 된다. 채근식에 따르면 힌두교 역사의 발전과정은 7기로 구분된다. 제 1기는 B.C. 2,000년경부터 1,000년까지 천연현상을 신격화한 시대로 대표적인 문헌으로서 [리그베다]가 있다. 제 2기는 B.C. 1,000~500년에 이르는 브라만교의 전성기로 우주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내린 [우파니샤드]가 저술된 시기이다. 제 3기는 인도철학의 발흥시대로 B.C.500~200년까지로 보수적 경향을 띤 여러 가지 [경서(經書-stura)]가 편찬되고 요가파를 비롯한 네가지 학파가 일어난 시기였다. 제 4기는 불교의 흥왕 시대로 B.C.250년 경부터 기원후 500년까지를 말하며, 제 5기는 A.D.500~1,000년까지 브라만교의 부흥시대였고, 제 6기는 A.D.1,000~1,500까지 힌두교의 재건시기로 여러 종파가 일어나 병립하였으며, 제 7기는 A.D.1,500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이다.
아지트 무케르지는 8세경에 이르러 힌두교의 정통성을 계승한 밀교경전(密敎經典)인 탄트라(Tantra)가 대중화되었다고 한다. 탄트라는 진리의 천명이나 철학적 교리서라기보다는 깨달음을 향한 수행방식이고 세계에 대한 일종의 태도이다. 탄트라는 인도의 아리안계에 근원을 둔 고대 인도 전통의 중심일 뿐아니라, 인도철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채근식에 의한 인도종교발전사적 구분에 따르면, 탄트라가 출현한 시기는 종교사적으로 힌두종교의 부흥기인 제 5기로 볼 수 있다. 탄트라의 가르침들은 브라만교의 성전인 베다문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의례에 있어서 베다의 행법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많이 발견된다. 한편 탄트라 형식의 발전과정 속에서 우파니샤드와 요가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았으며, 8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러 완전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아지트 무케르지는 탄트라 행법(行法)은 힌두교와 불교의 문헌인 성전(聖典)이 완성되기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방대한 수에 이르지만 저자가 없기 때문에 신이 썼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고 한다.
탄트라 성전에 의하면 모든 개개인은 잠자고 있는 우주에너지인 "쿤달리니"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탄트라 행자가 자아의 각성과정에서의 최종목적은 육체 속에 쿤달리니의 에너지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몸을 사리고 잠자고 있는 쿤달리니 삭티라는 우주력은 인간의 육체안에 깃들어 있는 최고의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2. 신비주의자들의 경험적 전승
인도의 고대종교의 경전과 탄트라 문헌에서 뿐만 아니라, 힌두교의 구루들과 뉴에이지운동의 전형적인 신비가들은 그들의 생애가운데 일어난 쿤달리니각성에 관한 경험적 진술들을 저서를 통하여 기록으로 남겨왔다. 고피 크리슈나에 따르면 쿤달리니 각성은 모든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잠재된 사건이며, 다가오는 세기의 불확실성을 극복할 수 있는 인류의 보편적 희망이다. 본고에서는 뉴에이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신비가들의 저서를 인물별로 다루기로 한다.
가. 크리슈나무르티(1895- ?)
지두 크리슈 나무르티는 1895년 인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혼의 스승,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 깨달은 자, 혹은 그를 추종했던 무리들에게는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1875년 헬레나 페트로바 블라바츠키에 의해 창립된 신지학회의 2대회장인 애니벤산트와 동역자 리드비터에 의해 세계의 스승인 마이트레야가 들어와서 살게될 대리육체로 선택되어 각별한 보호와 영적 수련을 거치게 된다. 28살 되던 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신비한 체험 이후 쿤달리니의 각성에 의한 이상한 과정에 돌입하게 된다. 그 이후 그는 수년에 걸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증세와 고통에 시달리게 되는데, 그의 전기를 집필한 메리 루틴스에 따르면 그의 고통은 쿤달리니 각성에 의한 것으로서 주로 척추에 집중된 것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 고피 크리슈나(Gopi Krishuna)
그는 인도의 공무원으로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면서 오랜동안 지속적인 명상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생애를 뒤바꾸어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명상수행중 척추 끝부분에 기분 좋은 기묘한 감각이 시작됨으로서 비롯되었다. 그 감각은 척추를 타고 차츰 상승하다가 "갑자기 폭포가 쏟아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한다발의 빛줄기가 척수를 통하여 뇌천으로 흘러드는 것이었다."고 쿤달리니 각성의 순간을 회고하고 있다. 그런 후 불안과 고통이 뒤따랐는데 수년동안 고피 크리슈나는 빛의 환영과 심신의 고통을 늘 함께 체험하게 되었다. 그의 경우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것은 아무런 정신적인 준비나 스승의 지도도 없이 쿤달리니가 저절로 상승하였던 경험을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 라마 크리슈나(Rama Krishna)
라마 크리슈나는 평생을 신의식의 희열 속에서 살다간, 인도가 낳은 세계적인 대성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여성 구루, 브라흐마니(Brahmani)의 지도를 받아 쿤달리니 요가의 수행법을 따랐는데, 각각의 의례를 올리면서 약속 받았던 성과를 3일내에 성취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의 경험을 깡충깡충 뛰었다 밀어 올려졌다 지그재그로 움직였다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쿤달리니의 상승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는데, 훗날 제자들에게 쿤달리니의 다양한 움직임을 물고기 같은, 새 같은, 원숭이 같은 등등으로 설명하였다.
● 쿤달리니각성 : 신성 브라마를 향한 운동
쿤달리니 각성
전항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쿤달리니의 실재성은 고대문헌과 신비주의자들의 경험적 전승에 의해 확인되고 지지되고 있다. 본 단락에서는 쿤달리니 각성에 관한 일련의 원리들을 고찰하기로 한다.
영적신체(Spiritual body)
바바하리다스는 "모든 인간은 자신의 육체 속에 불가시적인 질료와 에너지(쿤달리니, 나디, 챠크라)로 이루어진 또하나의 몸-정묘한 신체-을 갖고 있다고 한다. 브라이트 클레인(Bright Klein)에 따르면, '물리적인 육체 이면에 영적인 신체가 있는데, 영적실체는 "빛의 진동(vibrations of light)에 의해 구성되고 7단계의 서로 다른 구심점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림] 미세신체도
이것은 인간의 육체라는 구조에 간직된 우주의 미세한 일면으로서 "미세신(微細身)"이라고도 한다. 미세신 안에는 수많은 에테르 회로가 있는데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아주 고도의 수법으로 구성된 해류도(海流圖)와 같은 모습이라고 한다. 이 회로는 중심의 스쉼나 회로를 중심으로 하여 좌측에 "이다"와 우측에 "핑갈라" 회로가 놓여져 있다. 스쉼나 회로는 에너지 쿤달리니가 눈뜨지 않는 한 하부가 닫혀진 상태이다. 그러므로 요가 수행자는 쿤달리니의 잠자고 있는 힘을 일깨워 그것을 차차 보다 높은 영혼의 중추로 이끌어 냄으로써 방사되는 에너지는 변화하고 승화된다. 그리고 이어서 <사하스라라 챠크라>의 자리인 최고의 정점 브라흐마란다라에서 순수한 의식인 <시바>와 맺어진다. 이것이 <쿤달리니 요가>가 지향하는 바이고 목적이다.
챠크라(Chakra)
"챠크라"는 인간이 영적 진화를 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존재이다. 챠크라는 산스크리트어로 '바퀴(輪)' 또는 '원형'을 뜻하는데, 그것에 관한 묘사는 <우파니샤드>외 많은 고대문헌에 등장한다.
탄트라의 기술(記述)에 의하면 성전에 따라 수에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영혼 중추에는 여섯 개의 주요한 영혼 센터가 있다고 한다.
챠크라는 잠자는 우주에너지 쿤달리니의 상승경로이다.
그러므로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인간의 영적신체(spiritual body)에 각인된 7단계의 채널 곧 챠크라를 경유하여 최고의 단계로 상승하게 된다. 각성된 쿤달리니 각성의 유일한 목적은 "인간 속에 내재하는 정신원리인 시바와의 완전한 합일"이다. 이와 같은 합일은 필연적으로 반복되어야 할 윤회와 환생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카르마(Karma)의 종속으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한다. 마침내, 수행자가 목표에 도달하였을 때 형언할 수 없는 지고의 기쁨 속에서 자아는 숭고한 우주의식과 합체된다고 한다. 이러한 상태는 해탈, 열반, 니르바나, 사마디 등으로 알려져 왔다.
인체 내의 챠크라는 7단계의 채널을 형성하고 있다. 즉, 물다라다 챠크라(Muladhara Chakra), 스바디스나타 챠크라(Svadhishtahana Chakra), 마니푸라 챠크라(Manipura), 아나하타 챠크라(Anahata Chakra), 비슈다 챠크라(Vishuddha Chakra), 아즈나 챠크라(Ajna Chakra), 사하스라라 챠크라(Sahasrara Chakra) 등이 그것이다.
[그림] 수직적 관점에서 조망한 챠크라 이미지. 최하부의 챠크라로부터 마지막 7단계인 정수리까지의 챠크라를 상징한다.
챠크라는 정신의 원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챠크라를 통해서 정신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4차원의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챠크라에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정신에 대한 직관이 담겨져 있으며, 우주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쿤달리니가 각 단계의 챠크라를 경유하는 동안 하위 센터의 의식은 보다 상위 센터 의식을 위하여 준비되고 변증법적으로 변형되어 최고의 챠크라에 도달한다. 민희식에 따르면 고오타마 붓타의 가르침 속에는 챠크라를 경유하는 쿤달리니 각성으로 인한 깨달음이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즉, 각 챠크라의 정신원리에 상응하는 가르침을 펼쳤다는 것이다.
또한 각각의 챠크라는 단계적으로 우주의 근본 질료인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에 상응될 뿐 아니라, 음․색․형․의의(意義)․기능 등의 상징적인 내부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요가(Yoga)
쿤달리니의 각성을 통한 해탈에 도달하기 위해서 고안된 가장 보편적이고 안정적인 기술은 요가(yoga)이다. 하리쉬 요하리(Harihs Johari)는 "인류역사상 변화와 화합을 통한 체계 중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본 것이 바로 '요가(yoga)'이다."라고 기술한다. 즉, 요가는 정신과 의식의 결합상태를 만들어 주는 실제적 방법이요 체계이다. '요가'라는 말은 '유즈(yuj)'라고 하는 산스크리트에서 나온 말로서 '합치기', '보태기', '결합'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총체적 육체의 차원에서 볼 때 이는 개인의식과 우주의식간에 결합을 의미한다.
엘리야데(Mircea Eliade)의 연구에 따르면 "구제(救濟)의 경의로운 방법으로 간주되는 요가의 점차적인 확산은 법률-신학적인 문헌과 <마하바라타 Mahabharata>의 설교품과 종교품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인도정신성의 핵심으로서 요가의 득세와 일반대중의 신비로운 신애 사상의 창궐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주목한다. 즉, "제의적이고 형식화된 브라만 계급의 정통사상에 대한 반동으로 국민의 대다수가 보다 구체적인 종교체험을, 보다 쉽게 가까이 할 수 있고, 보다 친숙하고, 보다 개인적이고 신비적인 신앙을 원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요가 체계의 발전과 대중적 보급은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요가의 의례들은 제식과 신학을 경멸하면서 인간의 생리적인 토대와 거의 분리되지 않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자료에 전적으로 입각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기술한다.
엘리야데에 따르면 "인도가 발견한 가장 위대한 것중에 하나는, 목격자로서의 의식의 발견, 의식의 정신생리학적 구조들과 그러한 구조가 갖는 시제적(時制的)인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 의식, 즉, [해탈]한 자의 의식, 자신을 시간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성공하고, 그렇게 해서 불가사의한 자유를 아는 그러한 자의식의 발견이다. 이와 같은 절대적인 자유, 완벽한 자발성의 정복은 모든 인도철학과 신기한 기법들의 목표"라고 기술하면서, "그러나 이 목표는 무엇보다도 요가를 통해서 달성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요가는 쿤달리니가 경유하는 7개의 챠크라의 문을 여는 최고의 비의적 기술이기 때문이다.
뉴에이지운동에서 명상 및 요가를 강조하는 것은 결국 인간 속에 내재한 무한한 영적인 힘을 강조하고, 그것을 발전시켜 모든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힌두식 요가법과 현대의 뉴에이지운동에서 다루는 명상 및 요가는 다르다. 힌두교의 요가가 개인적이고 정적이며 고행을 요구하는 반면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좀더 대중적이고 현대화된 형식의 명상이나 요가를 전하고 있으며, 그것의 과학적인 타당성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다.
[그림] 파라마한사 요가난다가 취한 크리야 요가의 자세
요가는 인간의 여러 기질에 따라서 수행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즉, 명상요가라고도 하는 '라자요가(Raja Yoga)', 실재와 비실제간의 지속적인 분별을 통하여 진정한 지식의 화합을 추구하는 '주나나 요가(Junana Yoga)', 이타적 행위를 통해 해탈을 추구하는 '카르마 요가(Karma Yoga)', 헌신․사랑․복종을 통한 '박티요가(Bhakti Yoga)', 육체적 수련에 의한 '하타요가(Hatha Yoga)'가 있다. 이외에도 하리쉬요하리에 따르면, '탄트라 요가(Tantra Yoga)'는 몸과 마음을 하나로 간주하며 몸을 마음의 원동력으로 여기는 가장 대표적 요가이다. 탄트라요가는 인도철학의 정통을 계승하고 종합하여 대중적으로 발전되어 전개된 것으로서, "인생의 체험임과 동시에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정신적인 힘을 표출해내는 방법이며 체계"인 것이다.
한편, 요가난다는 그의 스승으로부터 전수된 고대요가의 전통적 방법과 체계를 통하여 가장 빠른시간 안에 요가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크리야요가"를 서구에 소개함으로써 서구인들을 향한 요가의 대중화를 촉진하였다.
요가를 통해서 수행자들은 각성된 쿤달리니의 에너지가 신체안에 일곱 개의 에너지센타인 챠크라를 관통하여 최고의 우주의식 브라만과의 합일에 도달하게 된다. 즉, 아트만과 브라마, 개인의식과 우주의식간의 결합이야말로 '요가'라고 규정지어진 체계를 몸소 실천하는 수행자들이 추구하는 목표인 것이다.
그러므로 고피 크리슈나는 요가의 목적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실, 힌두교와 요가의 근본이 되는 신앙은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열심히 노력하여 초인으로 변신하거나, 진화의 주기를 속히 달성하고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나서 현상세계 저편에 있는 무한 실재의 세계에 안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고 하였다.
성경적 접근의 기초
내재된 신성으로서 반기독교적 인간관을 구성하는 '쿤달리니'의 실재성에 대한 성경적 접근을 위해서는 '죄'와 '적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적 개념의 정리가 요구된다. 이는 뉴에이지사상이 중추적으로 기독교의 기독론과 인죄론을 파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죄(罪)
가. 인죄론(人罪論)
뉴에이지사상은 인간안에 근원적 신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본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부인할 뿐 아니라 전혀 다른 개념을 갖고 있다. 즉, '죄'란 인간을 멸망과 죽음 앞에 직면하게 하는 원인이 아니다. 뉴에이지사고에 있어서 '죄'란 우주의 원시적 본성으로서 우주구조의 일부분이며 벤자민 크레임에 따르면 '하느님의 한 부분'이다. 또한 세계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고통과 악의 문제는 비실재적인 물질세계에 적용되는 업(業)의 원리(Karma)로부터 야기된다. 그러므로 이생에서의 삶은 전생의 삶에 대한 보상적 삶이며 보다 나은 환생을 위한 준비의 기간이다.
한편, 뉴에이지사상에 있어서 인간의 구원은 누구든지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한 본성 '아트만(Atman)'을 자각함으로써 카르마의 수레바퀴를 멈추고 비실재의 허상인 '마야(Maya)'의 세계를 초극함로서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뉴에이지사상에는 근원적으로 인간의 죄로 인해 요청되는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며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을 가져온 인간의 원죄를 계시할 뿐 아니라 심판과 사망으로 정죄한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죄'는 보편적인 것이며 아무도 예외를 갖지 못한다(롬3:23).
루이스 벌콕은 '최초의 죄(Original Sin)'는 하나님의 금령에 대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최초의 죄에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전인격적(知精意) 거역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선과 악 사이에는 중립상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죄는 절대적 특질을 갖는다는 것이 성서의 명백한 교훈이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든지 원죄가 있는데, 이것은 "인간 생명을 더럽히는 모든 본죄의 내적근원"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된 선이 조금도 없는 전적부패(Total depravity)와 전적무능력(Total inability)을 조장한다.
소요리문답은 이와 같은 진리를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사람이 타락한 지위에서 죄되는 것은 아담의 최초의 범죄에 대한 죄책과 원시의가 없는 것과 온 성품이 부패한 것인데, 이것은 보통 원죄라 하는 것이요, 아울러 이 죄로 말미암아 나오는 모든 죄이다."
죄로부터의 개인적 구속 또는 구원교리는 가장 오래된 일신론 종교들인 유대교와 기독교의 핵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죄는 보편적인 것이며, "모든 인간은 정죄하에 있으며,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속죄를 필요로 한다."고 선언한다.
나. 죄의 실재성
성경은 인간의 마음 속에 실재하는 죄의 본질을 계시하고 있다. 즉, "죄는 외부적 행위로만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벌콕은 "죄는 영혼의 한 기능 속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머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죄란 외부적 행위일 뿐 아니라 역시 죄적 습관과 마음의 죄적 상태 속에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한편, 죄의 전가에 대한 주제는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논쟁을 야기시켜 왔다. 그것은 그레샴 메이첸에 표현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아담의 죄에 연루된 정확한 방식"에 관한 것이다. 즉, 아담의 죄와 그 후손의 죄와의 관계에 관한 설명이라고 볼 수 있다.
존 머레이에 따르면 이 역사적 논쟁은 인간본성이 아담안에서 산술적으로도, 종족적으로도 하나였다고 주장하는 실재론과, 아담은 하나님이 지정하여 언약하신 전인류의 원조이며 대표자라는 견해로 양립된다. 실재론자들은 대표론의 옹호자들이 하나님과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 사이에 언약적 관계라는 견지에서, "아담의 혈통적 원조성과 종족적 대표성을 거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재론과 대표론 모두 "인간 본성이 아담 안에서 더럽혀지고 유전적으로 후손들에게 상속된다."는 관념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론적 견지에서 죄의 전가가 "영적 영대성에 의해 아담의 범죄가 자연적으로 생식된 모든 후손들에게 넘겨지는 것과 같은 속성의 것"이라는 것이라는 사실은 본 논문의 논지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죄는 인간 안에 실재하는 본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안에 내재된 죄의 본성은 신구약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요한 테마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고, 사도 바울에 의하면 (롬3:23)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으며, 또한 죄는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는 본성이다(롬7:23).
또한 예수는 죄로 인하여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악의 표징들을 폭로하였다.
즉, (마15:18-19)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와 같이 인간의 죄에 대한 성경의 증언과 기독교의 전통적 입장은 명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부인한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전통에 대하여 숙명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사도 요한은 명백하게 기록하였다.
(요일1:9-10)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2. 불법의 사람
가. 불법의 비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시대적 표지로서 '배도'를 지목하고 있다.
즉, 주의 날은 '배도하는 일이' 있기까지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시간적으로 배도가 시작된 이후에 "멸망의 아들"이라고도 불리는 '불법의 사람'이 출현하는데, 여기서 '불법의 사람'은 어떤 사본에서는 '불법'이 '죄'로 바뀌어서 '죄의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이 인물은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죄의 세력을 지도하는 자로서 마지막 때에 등장하리라고 예언된 '적그리스도'와 동일한 인물을 가리킨다(요일2:18)". 그의 인격적 특성은 '자존'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칭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불법의 사람'은 살후2:7절에서 언급되는 '불법의 비밀'과 인과적 상관관계에 놓여져 있다. '불법의 사람'의 출현은 드러나지 않지만 은밀하게 진행되어온 '불법의 비밀'이 공개적으로 표출되는 사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주장하는 바는, "'불법'의 비밀은 배도가 일어나고 불법의 사람이 나타날 때 비로서 그 정체를 드러내고 활동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막는 자'의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법의 비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주석가들 사이에 다양한 논의가 개진되어 왔다. 즉, 여기서 비밀은 '가둔다', '닫는다'는 뜻의 동사 '뮈오'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말은 원래 동방의 신비적 종교의 입문식에 사용되어 신비한 능력의 전수행위나 종교적 교리를 지칭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미혹하는 거짓교사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적그리스도의 정신"이며, "그리스도께서 위하는 모든 자들을 대적하는 악의 특별한 형태"이다.
한편, 보스(G. Vos)따르면 바울은 '불법의 사람(죄악의 사람=적그리스도)'을 묘사할 때에 배도와 관련된 바울의 술어들이 다니엘서의 술어들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보수주의 학파에 견해에 따르면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예언하고 있다. 다니엘은 종말에 출현할 '적그리스도'가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적그리스도'가 '때와 법을' 변개할 것이라는 사실은 논지와 관련하여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그가 바꾸려고 하는 '때와 법'은 어떤 것인가?
해톤(Heaton)은 에피파네스가 변개 혹은 폐지시키고자 했던 유대의 종교적 절기와 모세의 율법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칼빈(Calvin), 케일(Keil), 류폴드(Leupold), 영(Young)에 따르면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진행되는 역사의 흐름 및 자연적으로 순환하는 계절, 그리고 우주의 운행 질서 및 마음에 심어 놓은 양심의 법을 가리킨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주석가들은 후자의 견해를 취하고 있다.
즉, 델리취는 "때는 원어상 정한 기한이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창조당시에 정하신 순리적인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며, '법'은 '명령'이나 '규례', '포고령' 등의 문자적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모든 피조물의 생명과 활동의 근간이 되는 원리와 법칙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또한 '때와 법'의 변경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에 속한 것인 바, 이것을 변경시키고자 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한 위치에 놓으려는 적그리스도의 극악한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편, 뉴에이지사상의 모티브인 쿤달리니영성의 고찰해 볼 때 '때와 법'의 변개는 보다 확고한 의미가 부연될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기독교 종말론적 관점에서 '법'이란 모든 인류를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시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도록 제정하신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쿤달리니 모티브에 점착된 뉴에이지 사상은 인간의 본래적 신성을 주장하고 인간신화를 표방함으로서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 구원의 섭리를 반역하고 있다.
또한 '때'란 죄로 말미암아 개개의 인간 뿐아니라 지으신 모든 만물에 대한 심판의 시기로서, 기독교 종말론은 성경의 시종을 관통하는 중추적인 주제이다. 종말의 모티브는 다니엘, 이사야, 에스겔, 요엘, 말라기 등 구약의 정경들에서 뿐만 아니라 베드로, 바울, 요한 등을 비롯한 신약의 사도들의 서신들 속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고 있으며, 예수그리스도 역시 종말의 도래를 명백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뉴에이지사상은 데이야르 샤르댕과 마릴린 퍼거슨이 주장하는 낙관적인 진화론의 견지에서 세계의 종말과 심판을 부정하고 진화된 인간들에 의한 새시대의 도래를 주장하고 있다.
나. 뱀의 영성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뱀처럼 몸안에 감겨져 있는 쿤달리니의 영성은 어원적, 형상적 견지에서 '뱀의 모티브'를 간직하고 있다.
인도종교에 있어서 뱀은 근원적인 영성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인도미술 만다라와 신비종교 미술에서 쿤달리니는 신성한 우주적 힘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진다. 또한 뱀과 용은 티벳과 중국, 일본, 한국 등 아시아 종교미술의 중요한 테마이며, 각 민족의 근원설화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존재이다.
[그림] 쿤달리니는 "뱀"의 형상이며 "불타는 뱀-serpent fire"로 불리워지며 "코브라"로 상징된다. 비쉬누의 이미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성의 구현은 완전하게 만개된 뱀의 영상과 일치한다. 피조물이 신이 된다고 하는 신비영성의 중심에 놓여진 "뱀"의 정체에 관한 계시는 성경에 있어서 "죄"의 기원을 의미한다.
쿤달리니에 근거한 요가체계에 따르면,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인체내의 일곱 개의 에너지 센터인 챠크라를 관통하여 정수리 부분에 위치한 최고의 챠크라 곧 시바가 머무는 곳까지 상승하여 합일을 이룬다고 한다. 쿤달리니 샥티와 시바의 합일은 아트만이 브라만에 귀의하는 것으로서 해탈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요기들이 지향하는 유일한 목적이며 구원의 정점이다.
그러나 성경은 뱀에 관하여 전혀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뱀은 히브리어로 '나하쉬'란 뜻에서 파생된 단어로 속삭이듯 낼름거리는 혀, 그리고 지나갈 때 쉿쉿 소리를 내는 뱀의 특성이 반영된 말이다(Gesenius, Furst, Bush). 성경에 따르면 뱀은 신성의 근원으로서 해탈과 불사에 이르게 하는 모티브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으로 하여금 사망에 이르도록 하는 죄의 조장자이다.
성경에 따르면 죄는 첫사람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부터 그 기원을 갖고 있었으며, 뱀은 죄의 기원을 담지하고 있는 상징성과 동시에 실존적 의미를 갖는다.
즉, 성경은 인간을 최초의 범죄로 유도한 존재가 있음을 계시한다(창3:1-3). 벌콕은 직접적인 표현으로 "인간의 타락은 사람의 마음 속에 불신임과 불신앙의 씨를 심은 뱀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되어졌다."고 하였다. 뱀(serpent)은 원죄의 모티브를 담고 있다.
여자의 후손과 원수(창3:15)가 되고 영원한 멸망의 불못에 던져질 심판(계20:10)으로 정죄된 뱀은 창세로부터 우주와 인류 전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인류를 충동하여 배도와 멸망으로 이끄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에 따르면 뱀은, 용(龍)이며 옛뱀이며 마귀이며 사단이다(계20:2).
뉴에이지사상은 예수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인하면서 인격적인 그리스도를 배격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만유안에 내재할 뿐 아니라 인간의 내재된 신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재된 그리스도 곧 신성한 힘이 바로 쿤달리니이다. 그러므로 뉴에이지영성은 내면의 잠자는 뱀의 영성 쿤달리니의 현현이다.
그러나 사도요한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요일4:2-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성경적 관점에서 뱀은 죄의 동인을 담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도의 길을 대적하는 역사적 실존으로서 용마귀사탄으로 불리우는 악의 실체와 동격적인 존재로 규정되고 있다.
다. 적그리스도
적그리스도(Antichrist)의 의미는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 '거짓 그리스도', 등인데 재림하실 그리스도에게 마침내 영원히 정복당할 그리스도의 적대자이다.
박형룡에 따르면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그리스도의 재림전에 나타날 5대 표지중에 하나이다. 교회에 반항하여 발전하는 악의 세력은 마침내 말세에 배도와 대환란을 일으키는 적그리스도로 인격화하여 나타날 것이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요한 서신서에서 나타나는데, 요한은 적그리스도에 대한 일정한 교리적 표준을 제시하고 있다.
요한에 따르면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임박한 종말의 표지이다(요일2:18). 또한 '적그리스도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한 자는 '아버지와 아들'도 부인하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 할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요한의 정의에 따르면, '적그리스도는 우선 하나의 신학적 개념이자 또한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과 관련되어있으며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이단적인 견해와도 관계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또한 요한이 비록 적그리스도란 명칭을 최초로 사용하였을지라도 그 명칭이 지시하는 세력 혹 정신은 분명히 구신약 성경의 여러 책에서 언급되었다. 성경에서 적그리스도의 묘사들은 여러 가지로 되었으나 하나님의 계시가 진보함에 따라 그 명확성은 증가한다.
박형룡은 구약의 "시편 2편의 여호와의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는 열방의 헛된 음모는 적그리스도 관념"의 예시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다수의 주석가들은 다니엘서 7장에 등장하는 '네번째 짐승'으로부터 나온 '열한 번째 뿔'에서 적그리스도에 대한 초상화를 발견하고 있다. 그리고 11장에 등장하는 하나의 왕은 7장의 '작은 뿔'과 동일시되는 인물로서 하나의 절대적인 통치자로 묘사된다.
신약에 있어서 바울은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재림전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 바울은 적그리스도를 '멸망의 아들', '불법의 사람'으로 언급하였다. 계시록 13장에서 적그리스도는 종말론적 사건의 중앙에 서게 될 '두 짐승'으로 등장한다.
또한 적그리스도에 인격성에 관하여 주석가들의 일반적인 의견은, '모든 악의 화신으로서 세계에 항상 임재한 적그리스도적 세력을 대표할 뿐 아니라, 역사상에 몇몇 선구자 혹 예표를 가진 하나의 말세적 인물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류폴드는 적그리스도의 성격을 종말론적 견지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그는 사람이다... 그는 불신앙과 불법의 일반적 발전을 이용할 것이다. 그는 큰 주권을 얻을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죄악으로 그의 전 존재에 가득차 있다. 말하자면 죄가 그의 속에서 구현될 것이다. 죄가 그의 전 인격을 지배할 것이다. 그는 '멸망의 아들'이다. 그는 가롯 유다와 같이 영원한 죽음을 죽게 될 것이다. 그를 따르는 사람은 모두 영원한 죽음을 죽게 될 것이다. 그는 원수이다. 그는 인간 사탄(human-satan)이다. 그는 무서운 힘과 악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적그리스도이다.
결론적으로 적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시 문자 그대로 실존적인 한 사람의 적그리스도가 될 것이며 또 그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멸망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첫댓글젊어서부터 당신 삶 앞에 건강이라는 문제 해결 않하고 매일 딩가딩가 하고만 살다간 불행은 예고없이 찿아온다.늙으면 누구도 孤老病死에서 벗어날수 없고 벗어나려면 건강할때 건강 챙기며 사십시요.20세이상 나이 들어가면 건강에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하여 여기저기 아픈곳이 나타나고 세월가면 갈수록 당신몸은 병들어 고통뿐이 없다.세수대야에 따뜻한 물을받아 앉아만 계십시요(좌욕).실행하면,당신의 건강을 지킬수 있습니다.오전,오후30분이상 실행하며,매일 습관을 들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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