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선수로」 답사 여행 중입니다.
만경강을 직선화하고 강물을 어우리 보로 막아 군산 옥구저수지까지 끌고 가면서 만경평야 너른 들을 모두 적셔 옥답으로 만들었다는 한 세기 전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따라 몸소 걸어 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지난 금요일(4월 27일)부터 시작하여 오늘(4월 29일)로 사흘 째.
하루에 10킬로미터씩 걸어 나흘이면 끝나겠다고 한 처음 생각과는 달리,
일일이 사진 찍고, 납득이 될 때까지 생각하고 확인하고, 수로 주변 마을도 살피는 등,
워낙 쉽게 넘어가지 않는 성격대로 하고 있으니 진도가 잘 나가지 않네요.
아무튼 가장 핵심이 될 몇 군데는 보았으니, 앞으로는 좀더 편한 자세로 걷는 데에만 집중하기로 합니다.
혹시 관심 있는 분은 함께 걸으셔도 좋겠습니다. 댓글로 연락 주세요.
첫째 날 – 4월 27일. (어우리~율소리, 3킬로미터)
출발이 늦어 오후 잠깐밖에 걷지 못했습니다.
시작은 고산면 어우리, 어우보가 있고 대수로가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보(洑)와 함께 대수문은 이미 보셨으니 수로의 시작점부터 보시죠.
이렇게 생겼습니다. 물이 콸콸 흘러들어오는 장면이 지금 보아도 시원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매우 지저분합니다. 냄새도 많이 납니다. 수로 둑 바로 옆 초등학교 아이들을 의식해서라도 좀 깨끗하게 해주면 좋으련만.
밭주인들을 만나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수로의 오른편 둑. 마을을 벗어나 논밭이 시작되는 어귀에 이르자 길이 없어지고 매우 걷기 힘들어집니다. 남의 밭을 통과해야 하기도 합니다.왼편은 차도여서 위험하고, 수로가 잘 안 보이기도 해서요.
1 킬로미터 정도 걷자 한 다리가 나오는데 모양이 좀 다르게 생겼습니다. 그냥 다리가 아니라 수문인데 수문 앞에 「거르는 체」 같은 것이 있네요. 가만 들여다보니, 맹렬한 기세로 물이 하류를 향해 폭포처럼 ‘낙하’하고 있는 장면은 다소 무섭습니다. 이렇게 떨어져 간 물이 어딘가에서 나오겠지요.
다리 넘어에는 천호천이 북쪽에서 흘러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수로의 물이 이 하천과 만나서 합해지는 줄 알았더니 물이 의외로 확 줄어 있네요. 기존 천호천 물만 넓은 하천바닥에 조금씩 흐르고 있을 뿐. 그 많던 대수로의 물은 어디로 갔을까요?
어쨌든 지도에서 미리 본대로 천호천을 따라 갑니다. 이 하천은 북쪽 천호(天呼, 天壺)성지에서 협곡을 따라 내려오는 꽤 긴 개울입니다. 하천 오른쪽은 갑자기 높은 산의 끝자락 절벽이 눈앞에 있어 경치가 아름답습니다.
시멘트 포장길이 지겹던 차에 흙둑길을 만나니 반가워서 얼른 그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더 전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절벽 아래여서 길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되돌아 나오면서, 역시 이런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비로소 걷는 코스가 완성되는 것이구나, 합니다.
왼쪽 둑은 마을을 통과하여 찻길로 나서게 되어 있고, 수로의 물을 볼 수 없는 각도입니다.
용암교를 지나면서 다리 아래로 일부러 내려가 들여다보았는데도 수로의 자취는 보이지 않습니다.
천호천 물은 용암교 다리 아래를 흘러 만경강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조금 더 내려가 쓰레기 재활용 작업장을 지날 때쯤 갑자기 깊은 물의 표면이 먼발치에서 보이기 시작했고, 더 내려가 신덕마을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수로가 잘 보였습니다.
대체 이 물이 어디 있다가 나타난 것일까?
곰곰 생각했더니, 아까 ‘낙하’한 물이 천호천을 만나기는 하지만 천호천 물과 섞이지 않고 하천 바닥의 땅밑에 숨은 도수관 속으로 절벽 언저리를 통과했던 것입니다.
“대수로가 기존 하천을 만나면 그 아래나 위를 통과하게 되어 있다”는 말만 들었기에 꼭 그 장면을 보고 싶었는데, 의외로 일찍 그 첫 번째 예를 무심결에 지나가게 된 것입니다. 다소 허무한 심정이지만 앞으로 몇 번이나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될테니까 달래면서 또 걷습니다.
여기서부터 대수로는 우산천(寓山川)이라는 이름으로 흐릅니다.
신덕마을 앞까지는 경치가 계속 좋습니다. 절벽 때문이지요.
그리고 얼마 걷지 않아 율소리입니다.
오늘은 여기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기로 합니다. 이미 다섯 시가 넘어 있었고, 발도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대신 마을 안을 잠시 둘러봅니다.
율소리는 매우 큰 곳입니다. 그 절벽을 이루는 산이 태봉산인가 그렇고, 만경강 건너편에는 ‘앞대산터널’이 뚫려있는 앞대산이 있어 경치도 좋군요.
마을입구에 수로 위를 조금 복개해서 만들어낸 공간에 체육시설이 있어 아이디어가 참신해 보입니다. 바로 옆에는 ‘주부떡방앗간’이 있는데 방앗간의 한 쪽에는 열린 화장실이 있어 반갑고 고맙더군요.
율소리는 여러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수로를 경계로 남쪽은 봉담마을입니다. 북쪽은 태봉산 자락에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산기슭에 잿말, 목고개, 서낭댕이, 원율소(담안, 서촌), 새터 등 작은 마을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마을회관도 새터는 따로 있군요. 새터회관 바로 앞에 1950년에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어마어마한 그늘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율소리 경로당은 붉은 벽돌로 쌓은, 연식이 꽤 된 건물입니다.
경로당 앞에 커다란 비석이 서 있는데, “이웃과 함께 넉넉하게 교유하며 만수를 누리자(與隣優游享壽萬年)”라 쓰였습니다.
그런데 마을 안은…
넓고 오래 되었고 가구 수도 많은데, 빈집과 쓰러져가는 집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을 만나기도 힘듭니다.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해도 해발 75미터에 불과하지만)에 꽤 애써서 만든 정자와 공원은 찾는 사람이 없어 폐허가 되어 갑니다.
가장 잘 나가던 집도 돌담에 구멍이 뚫리고 안이 다 들여다보입니다. 널문이 있는 행랑채, 뒤퇴까지 갖춘 이 큰 집을 이렇게 삭아가도록 버려두는 이유도 알 만합니다. 짠한 느낌이랄까요.
이집은 돌너와(?)로 지붕을 인 집 같습니다. 물론 비었습니다.
산뜻한 이 새 한옥은 틀림없이 이주민의 집일 듯. 기존 주민들이 떠난 농촌마을은 이제 이런 귀농인들로 주인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남쪽 봉담마을도 잠깐 들여다보았는데 이곳은 만경강을 곧게 펴기 이전에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흐르던 작은 물길들 사이의 모래톱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부방앗간도 굳이 말하자면 봉담(행촌)마을 소속인 셈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