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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수원교구 심포지움에서 2007년경에 심상태 몬시뇰께서 발표하신 글로서, 이벽의 죽음을 순교자적 죽음으로 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는데 중요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 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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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의 죽음과 순교 문제에 대한 재조명
심상태 몬시뇰
한국 천주교회 순교자 시복 시성을 위한 제1차 세미나가 2002년 2월 “한국천주교의 창설 주역과 천주 신앙”을 주제로 하여 권철신․이벽․이승훈의 가문과 천주교 수용, 그리고 순교 여부를 규명하는 내용으로 개최된데 이어 3년 만에 제2차 세미나가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이벽의 죽음과 순교”를 주제로 개최됨을 뜻 깊게 생각한다.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은 한국교회 창설을 주도했던 선구자이자 주역으로서 한국 교회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교회 사학자들과 연구자 등 사계의 관계자들 사이에 이벽의 탄생 시점(1754)에서는 일치하면서도 사망 시점과 사인을 둘러싸고 1786년 배교자 사망설과 1785년 순교자 사망설로 나뉘어 오늘날까지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성인으로 공경을 받는 103위 순교자들을 위시한 후대 순교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을 제대로 받지도, 역할에 상응하는 존경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논자는 이벽의 죽음과 순교 문제를 신학적으로 새롭게 조명하기 위하여 그동안 한국 교회 안에서 이 주제와 관련하여 상반된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여러 연구자들이 어떠한 역사적 자료들에 의거하고 있는지를 가급적 분명히 확인하고자 한다. 그래서 먼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교회 사학계 안에서 정설처럼 간주되고 있는 이벽의 1786년 배교자로서의 사망설의 입장을 살펴보며, 사망년도를 같이하면서도 이벽이 배교자로서가 아니라 신앙 증거자로서 사망했다고 보는 연구자들의 주장도 아울러 일별하고자 한다. 그리고 1979년에 이벽의 묘와 족보가 발견되면서 부상한 1785년의 순교적 사망설의 입장을 파악하며, 새롭게 드러난 자료와 사실에 입각하여 개진되는 최근의 연구 결과들의 요지도 파악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 연구자들의 노고의 결실들을 검토한 기반 위에서 이벽의 죽음과 관련된 핵심 사료 내용 중 신학적 조명이 더 필요하다고 보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의 죽음이 지니는 신학적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I. 1786년 사망설
1980년대 초까지 한국 교회 안에서 이벽이 1786년에 전염병 페스트에 걸려 33세에 사망했다는 설이 거의 정설로 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벽의 1786년 사망설을 개진하는 사학자 내지 이벽 연구자들은 그의 죽음을 배교자로서의 죽음이라고 보는 측과 반대 입장에서 증거자로서의 죽음으로 보는 측으로 갈려 있다.
1. 1786년의 배교자 사망설
1980년대 초까지 한국 천주교 사학계에서는 이벽의 사망년도와 사인에 관하여 파리외방 선교회 소속 달레(Ch. Dallet, 1829-1878)의 저서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église de Corée, 1874)』의 기록에 의거하여 그가 배교자로서 1786년 봄에 전염병 페스트로 사망했다는 주장은 한국 교회 안에서 표준적 권위를 인정받는 1985년판 『한국가톨릭대사전』에도 그대로 반영될 정도로 정설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 학설을 따르는 사학자들은 거의 달레의 기록을 사료적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벽의 사망시기와 사인을 구명하는 데 있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가 한국 교회 사학계에서 결정적 사료로서 간주되어 온 때문에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선교사들로부터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듬해 명례방 소재 김범우 집에서 이벽의 주도하에 열렸던 ‘천주교 신앙 집회’가 관헌들에게 적발된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한 이후에 그가 배교자적 처신을 하고 이듬해인 1786년에 역병에 걸려 사망하는 것으로 기술된 부분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李)承薰 베드로와 (李)檗 요한 세자는 천주교의 주요한 두목이요 선동자로 공공연하게 지목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 친척 중에서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金)範禹 토마스의 형벌을 보고 크게 놀라, 자신들과 그 집안의 불행을 가져오게 될 종교를 버리게 하기 위하여 갖은 수단 방법을 다 썼다. 그들의 흉악한 계획은 충분히 성공하였다.… (李)檗의 아버지는 성질이 급한 사람으로서 새 종교 이야기를 듣는 것도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아들의 마음에서 신앙을 빼버리기 위하여 일찍이 들어본 일이 없는 노력을 하였다. 그 일을 성공할 수 없으므로 그는 실망에 빠져, 하루는 자살을 하려고 목에 줄을 감았다. 벽은 이런 광경을 보고 마음이 흔들려 용기가 없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아직도 굴복은 하지 않고 있었다. 천주교인이라는 명칭이 부당한 어떤 신자가 그의 멸망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벽을 찾아왔다. 그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계략과 모든 거짓말을 썼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시달림에 지치고 배교자에게 속고, 실망에 빠진 아버지를 보고, 그의 말을 들음으로써 정신이 착란된 벽이 넘어가게 되도록까지 하였다. 명백한 배교는 주저하여, 두 가지 뜻을 가진 말을 써서 자기의 신앙을 감추었다. 그의 마음은 용기가 없어졌고, 하느님은 그 마음에서 이미 첫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지 않으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를 버리셨다. 왜냐하면 성경에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은 자’라고 씌어 있는 까닭이다. 그때부터 그는 외교인인 그의 친척과 친구들에게 에워싸여 천주교인들과는 아무런 연락도 가질 수가 없었다.… 丙午(1786)년 봄에, 그때 기세를 떨치던 페스트(중국 사람들이 疫病이라고 부르는, 티프스의 일종)에 걸려 8일간 앓은 뒤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최후가 어떠하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가 없었다. 신자들이 그에게까지 가서 그의 죄를 뉘우치라고 권고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으나, 이 말은 어떤 확실한 기록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1)
이벽의 사망년도와 사인에 관하여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의 고본(稿本)인 성 다블뤼(St. A. Daveluy, 1818-1866) 주교의 「조선순교자 역사 비망기」(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1860) 필사본에도 거의 같은 내용의 기록이 서술되어 있다. “한편, 이 사건(을사추조적발사건)은 막 태동하기 시작한 조선 교회의 기둥들에게 시련을 가져다주었다. 이승훈, 이벽, 정약용, 정약전 형제가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공공연히 지목을 받았고, 이들이 속한 세 가문의 사람들은 이들을 설득해 배교시키고자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성미가 급하고 거칠었던 이벽의 아버지도 아들의 신앙심을 없애 버리고자 갖은 거짓말과 계략을 동원했다. 그와 같은 박해들로 인해 지치고, 얼이 빠져 있던 이벽은 드러내놓고 배교를 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눈앞에 있는 불행을 떨쳐버리고자 말을 얼버무렸다. 그의 마음은 나약해졌다. 아! 슬프도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그가 발을 밖에 내놓지 못하게 막았다. 그가 잃지 않고 있었던 믿음은 그이 마음속에서 자연적인 애정을 끊임없이 공략하고 있었다. 그는 한 편으로는 자신의 하느님을 보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의 아버지였다. 어떻게 자신의 하느님을 부인하겠는가? 어떻게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만들겠는가? 이러한 끊임없는 부대낌은 그를 펜으로는 묘사할 수 없는 상태 속으로 던졌다. 그는 기운이 없고, 말이 없고, 침울한 사람이 되었다. 낮이고 밤이고 눈물이 그칠 줄 몰랐고 시시각각으로 그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더 이상 옷을 벗지 않았고 잠은 멀리 달아났다. 여전히 가끔 먹기는 하였지만 모든 식욕을 잃은지라 아무 맛도 없었고 몸에 도움도 안 되었다. 이 심한 상태는 지속될 수가 없었고, 불행하게도 본성이 이겼다는 것이 미리 엿보였다. 점차 회한과 의식의 동요는 가라앉았고 은총에 대한 마지막 노력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정상적인 건강을 회복했고, 심지어는 그에게 고위직에 대한 열망마저도 생기게 되었다는 말까지 있다. 그거야 어쨌든 그에게는 어떤 것도 시도해볼 시간이 없었다. 1786(병오)년 봄에 그는 그때 유행하던 페스트(중국인들의 조빙)에 걸려 8일인지 9일이 지나자 땀이 나기 시작하여 그를 간호하던 사람들이 그에게 이불 몇 채를 덮어주었건만 그에게 쏟은 정성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무거운 이불 밑에서 숨만 막혔을 뿐 땀이 빠져나올 수가 없어서 그로 인해 3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기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곁으로 찾아가서 그에게 뉘우치고 하느님 앞에 설 준비를 하라고 권면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열의와 열성과 능력으로써 이 왕국에 천주교의 문을 열어놓았던 이 사람은 거의 위로가 되지 못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죽었다. 훌륭한 자질들과 이론의 여지가 없는 덕성을 갖춘 그도 구세주께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합당하지 않다. 라고 하신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며 문제의 이 돌에 부딪치고 나서 그는 끝이 났는데, 이 말은, 어떠한 평가를 내리겠다는 의도는 아니고,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보았던 이들이 보기에 비통한 모양으로 끝이 났다는 것이다.”2)
한국 교회사학계 안에서 다블뤼 주교와 달레 등 프랑스 선교사들의 기록이 이벽의 죽음과 관련된 역사적 사료라는 이유를 들어 이벽이 배교한 뒤 1786년 봄에 사망하였다는 학설을 표방하는 대표적 인사로 원로 교회사학자 최석우 몬시뇰을 꼽을 수 있다. 최 몬시뇰은 이벽의 사망년도를 달레의 기록에 의거하여 1786년이라고 적고 있다. “李檗도, 敎會 初創期의 備忘記에 의하면 부친의 강력한 반대에 못 이겨 마침내 背敎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늘 良心의 가책을 느끼며 살아오던 중 丙午년(1786) 봄에 病死했다는 것이다.”3) 그리고 그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수편의 논문에서 ‘을사추조적발’ 사건이 발생한 1785년 3월에 성균관 유생들이 천주교인을 가진 가족과 친지들에게 천주교인과 인연을 끊을 것을 요구하는 통문(通文)을 돌렸고 이로 말미암아 천주교도를 가진 가정에서 패가망신(敗家亡身)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다른 가족들이 박해를 가하면서 이에 굴복하여 이승훈과 이벽이 배교하게 되었다고 단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가정 내에서의 박해로 李承薰 ․ 李檗 ․ 丁若銓 등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잇따라 배교하기 시작했다.… 이벽도 그의 부친의 반대에 못 이겨 굴복하고 말았다.”4) 그는 이벽을 이승훈과 더불어 신앙을 배신하는 허약한 인물로 규정하기도 한다. “‘을사추조적발’ 사건이 있은 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가족을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의 통문은 예상 외로 큰 효력을 나타냈으니 이로 말미암아 이승훈, 이벽 등 지도급 인사들이 그들의 신앙을 배신하는 허약성을 드러냈다.”5)
1985년에 최석우 당시 소장 신부가 이끌었던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된 『한국가톨릭대사전』의 “이벽” 항목에서도 이벽은 자신의 배교적 행위에 심한 가책을 느끼다가 1786년 봄에 요절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벽이 말을 듣지 않자 그(아버지)는 목을 매어 자살하려고까지 하였다. 이에 이벽은 두 가지 뜻을 가진 말을 써서 자신의 신앙을 감추었고 그 후로는 외부와 모든 연락을 끊은 채 살았다. 그는 자신의 배교적(背敎的) 행위에 대하여 무서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다가 1786년 봄 33세를 일기로 요절하였다.”6)
하성래 박사는 이벽의 저서로 알려진 『성교요지(聖敎要旨)』를 번역하면서 ‘이벽(1754-1786)의 생애와 사상’의 제명으로 작성한 머리말에서 제명에서는 사망년도를 1786년으로 밝히고 나서 본문에서는 이벽이 배교를 강요한 아버지의 위협에 직면하여 효심에 의하여 배교하고 1785년에 사망하였다고 시점과 관련해서 엇갈리는 기술을 하고 있다. “이에, 이벽의 아버지 이부만은 이벽에게 배교를 강요하고 ‘만일 네가 배교치 않는다면, 내가 목을 매달아 죽겠다’고 위협하므로, 그는 효심에 의하여 하는 수 없이 거짓 배교를 선언하고 말았다. 그토록 열렬한 신앙심의 소유자였지만, 아버지의 강요에 의하여 배교를 한 이벽은 오래 고민하다가, 마침내 1785(乙巳)년 열병에 걸려 32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7) 금장태 교수는 이벽의 사망 년도를 1789년으로 제시하는 한편,8) 초기의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주도했던 그가 배교하였다고 단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때 사대부 가문 출신의 청년 유학자들의 신앙공동체는 심한 곤경과 혼란에 빠져 이벽을 비롯한 상당수가 배교하였지만,…”.9)
2. 1786년의 증거자 사망설
한국 천주교계 안에서 일부 교회사학자와 연구자들이 이벽의 사망시기를 1786년이라고 보면서도 그가 배교자로서가 아니라 신앙 증거자로서 생애를 마감하였다는 입장을 개진해 왔다.10)
고 주재용(朱在用, 1894-1975) 신부는 한국 천주교계 안에서 이벽이 배교자로 사망할 수 없는 일이라고 명시적으로 단정함으로써 증거자로서의 사망설을 표명한 첫 인사로 꼽힐 수 있다. 한학(漢學)과 유학(儒學)에 정통했던 주 신부는 한국교회사 연구에 진력하는 가운데 이벽의 사망 시점과 관련하여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0- 1836)의「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1814년)의 기록인 ‘30년이 지난 병오(1786) 여름 曠菴(이벽)은 타계하였다’에 의거 이벽의 사망년도를 1786년이라고 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다산학(茶山學)을 태동케 한 실학의 집대성자로서 500 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긴 후기 조선시대의 걸출한 대학자이자 경세사상가였던 다산이 이벽의 박학과 비범한 덕성을 겸비한 진인(眞人)으로 못내 그리워하며 애타게 추모한 사실에 담겨있는 함의(含意)를 읽고자 했다. “다산은 벽을 선학, 신선이라 하고 선학이 인간 세상에 내려 풍신을 우러러 뵈임(仙鶴下人間軒見風神)에 비길만큼 그를 높이 보았다. 그리고 다산이 1814년에 강진 귀양소 다산서옥(茶山書屋)에서 중용강의를 기워 손질할 때(輔成中庸講義), 왕이 그때 말씀하시던 ‘그 사람은 곧 광암이었다’ 하면서 ‘광암이 죽은 지 이미 30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질문할 곳이 없구나! 광암이 아직 살았더라면 그의 진덕박학(眞德博學)이 어찌 내게 비할까 보냐! 하나는 살고 하나는 죽었으니 아무리 슬퍼한들 어디가 닿으리오. 지금 나는 이 책을 부등켜안고 울음을 금치 못하노라’ 하였다. 이와 같이 중용강의보에서 벽의 고상한 이상과 학덕을 격찬하고 이제 53세(1814)의 노장(老壯) 다산이 못내 이벽을 못 잊어 할뿐 아니라 중용 책을 어루만지며 울기까지 했을 만큼 중용학에 있어서 광암을 극진히 사모해마지 않았던 것이다.”11) 그 자신 걸출하기 그지없던 인품을 지닌 다산과 같은 인물로부터 이벽이 신선처럼 고결한 인물로 애타게 추모되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주 신부는 비록 사료상의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어도 그를 결코 배교자로 볼 수 없다는 심경을 절절히 토로하고 있다. “천주께서 그때 그분의 입장과 환경, 특히 진주眞主를 모르던. 동양 최고 종교로 여기던 ‘효도’의 윤리관에서 나 자신 때문에 친부親父가 목을 매어 죽으려는 것을 차마 견디지 못했을 것이란 점을 이해지 못하셨을 리가 없었으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때, 우리 이벽 선생을 결코 배교자로 취급할 수 없다고 단정하면서도, 승훈 선생에 대한 그것과 같은 확증을 못 대주고 이 붓을 거두기란 만고에 한이로다!”12)
원로 사학자 이원순(李元淳) 교수 역시 이벽이 33세로 요절하였다고 보는 한에서 1786년 사망설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주재용 신부처럼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에서 경서(經書) 연구에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을 때 타계한 지 이미 30년이나 되는 이벽과 학문을 토론할 때를 그리며 학덕에서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출중했던 그의 인품을 눈물 흘리며 안타까운 심경으로 추모의 정을 토로한 사실을 반복해서 거듭 언급하고 있다.13) 이 교수는 이벽이 드높은 경학(經學)의 경지에 이르렀던 학덕을 겸비한 귀인으로서 동양의 유교 윤리와 서양 그리스도교 윤리의 조화로운 통합을 도모했던 실로 보기 드문 진정한 구도자적 인물이었음을 적시하고 있다. “정약용이 두고두고 그의 經學의 온축을 추앙하던 李檗의 천주신앙은 유교를 배신하고서의 것이 아니라 동양의 儒家倫理와 서양의 西敎倫理의 접합에 의한 것이라고 하겠다. 해박한 經學의 학식을 갖춘 李檗이 漢譯西敎書 몇 권을 읽고 신기의 믿음으로 경사되었다고 속단함은 옳지 않다. 그의 교양과 학식을 바탕으로 고민하였고 검토하고 사고한 후의 신앙도달이었던 것이다. 暫世요 逆旅의 현실에서 永生의 정신적 구원을 위해 克己 復禮할 것을 적극 권면하는 그의 논조는, 도의적 인간의 완성과 더불어 난맥의 朝鮮後期社會를 의식하고서의 現實 舊弊의 실학자와 달리 새로운 신앙 수용에 의한 人間精神의 變革을 통해 永生에의 舊弊를 지향했던 것이다.”14) 이 교수는 이벽 속에서 해박한 유가적 경학사상에 입각하여 서교(西敎) 수용을 통하여 혼탁한 조선 후기 사회에서 새로운 정신적 인간의 추구를 부르짖고 나선 현실 속에서 실로 보기 드문 진인(眞人)이자 의인을 보고 있다.
김옥희(金玉姬,) 수녀는 1977년에 초기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의 이벽의 역할에 관한 학위논문으로 프랑스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뒤에 1979년에 『曠菴 李檗의 西學思想』의 제명으로 출간하고 이어서 새로 발견되는 사료들을 참고하면서 1990년에 『韓國天主敎思想史 I - 曠菴 李檗의 西學思想硏究』 제명으로 개정판을 간행하는 등 계속해서 이벽 사상 연구를 진척시키고 있는데, 이벽이 1786년에 배교자로서 사망했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음을 처음부터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15) 김 수녀는 이벽을 배교한 인물로 단정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판단은 효(孝)가 동양 사회에서 모든 덕행의 절대적 조건이며 근본이라는 사실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판단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벽은 충효사상을 근본이념으로 하는 유교적 윤리관과 새로운 천주교 신앙 진리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야만 하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 가운데서 요절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달레는 광암을 철학적 동기에서만 입교한 배교자로 단정하여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서술은 그가 외국인으로서 동양의 전통적인 풍습이나 정신 및 분위기에 대한 몰이해에서 기인한 것이다. 또 초기 한국교회의 수준에 대한 편견 역시 크게 작용한 판단이었다.… 서구 중세의 문화적, 사회적 여건과 동양의 조선에 있어서의 사회적 성격이나 전통적인 정신을 비교하여 생각해 볼 때, 광암이 경험한 갈등과 주저하는 행동은 오히려 당연한 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하간 그는 그러한 고통과 고민 가운데서 병오년(정조 10년, 1786)에 질병으로 33세에 요절하였다 (일설에는 1785 을사년에 32세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그의 죽음에 대한 달레의 서술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면 그는 그의 신앙 집착 때문에, 또는 동서양의 윤리관의 차이 때문에 무한한 고뇌 속에서 운명(殞命)하였다고 하겠다.”16) 그리고 김 수녀 역시 주재용 신부와 이원순 교수처럼 이벽을 선학(仙鶴)으로, 그의 적대자들을 질시에 가득 찬 닭과 오리로 비유하면서 신선처럼 고고하기 그지없는 인품을 지닌 이벽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였던 다산의 “우인이덕조만사”(友人李德操輓詞)를 인용하면서 담긴 내용에 비추어보아도 그를 경망한 배교자로는 결코 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선학이 인간 하계에 내려오니
그 풍채 신처럼 높이 당당하게 보이고
날개깃 백설처럼 휘날리니
닭과 오리가 미움과 시새움에 사네
우는 소리 온 세상을 진동시키고
맑고 명료하여 세속의 혼미함을 뛰어 넘었네
가을바람 타고서 홀연히 날아가 버리니
인간의 노력이 슬프고 공허하도다.”17)
아울러 김 수녀는 이벽의 사후 10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반서교파(反西敎派) 유학자들이 천주교도를 거슬러 작성한 상소문에서 이벽을 ‘사당(邪黨) 중 거괴(渠魁)’나 ‘사괴(邪魁)’로 지칭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사후에 당대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의 배교자로서가 아니라 주도자로 간주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사료로 인정할 수 있다고 본다.18)
이성배 신부도 프랑스 파리 가톨릭 대학에서 이벽의 사상을 연구하여 취득한 신학박사 학위 논문 『유교와 그리스도교』(Confucianisme et Christianisme. Les Principes confucéens de la première théologie chrétinne en Corée d’après l'oeuvre de Yi Piek 1754-1786)에서 이벽의 사망년도를 1786년으로 제시하면서도 배교적 사망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이견을 개진하고 있다. 이 신부도 김옥희 수녀처럼 을사추조적발 사건 이후 아버지의 극단적 반대 처사에 직면하여 보여준 이벽의 처신을 배교적으로 단정하는 선교사들이 한국의 유교 문화에 대한 몰이해로 인하여 사태를 지나치게 서구식으로 단순화하여 해석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이벽이 유가적 선비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다한 것으로 풀이하였다. “부친의 행동이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아들의 신앙으로 야기된 절박한 가정 문제였고, 아들 교육을 잘못하여 파탄될 가정의 위기를 구하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선비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벽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모르는 척하고만 있으면 부친이 정말로 목숨을 끊으리라고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유학의 가르침과 그리스도 교리가 서로 모순되지 않고 완성시킨다고 믿고 있었던 이벽으로서 자신 때문에 부친이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있었겠는가?… 눈앞에 당장 목숨을 끊으려는 부친을 만류하는 것은 마땅한 아들의 도리이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하느님 계명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이중적인 말을 쓸 수 있는 한국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한국 문화의 내용을 달레가 제대로 이해했다고 보기 힘들다.”19) 이 신부는 달레가 언급하고 있는, 이벽이 자살로 위협하는 아버지에게 사용했다는 ‘이중적인 말’이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고 이벽이 ‘마지못해서 양보하고’라고 보면서 배교자로 취급하는 데, 이는 한국인들이 이러한 자세를 미덕과 예의로 간주하는 데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이 동서양의 엄청난 사고방식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벽이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을 당했다는 달레의 견해도 전혀 실상에 대한 정확한 기술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이벽이 배교했다면 집 밖으로 외출할 수 있어야 함에도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상태에서 가족들의 완고한 고집과 편견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고 보아야 옳다는 것이다.20)
II. 1785년 사망설
한국 천주교 사학계 내지 교계 일각에서 1979년에 이벽의 족보와 묘가 발견되면서부터 그의 사망년도가 1786년이 아니라 1785년이며, 그의 죽음을 배교자의 죽음으로 볼 것이 아니라 순교자의 죽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과 적어도 증거자의 죽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점증하고 있다.
1. 1785년의 순교자 사망설
변기영 신부는 이벽의 사망년도와 사인과 관련해서 1979년 이래 순교자로서의 1785년 사망설을 주장하고 나선 첫 인사로 꼽힐 수 있다. 변 신부는 1979년 초에 광주군 나무골(木里) 거주 경주이씨 집성촌에서 이벽 가문의 족보를 찾아내고 같은 해 2월 15일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화현 3리 공동묘지에서 이벽의 묘를 발견하였으며, 같은 해 6월 21일에는 교계와 의료계 관계자들이 임석한 가운데 유해를 발굴하여 새 관에 입관하여 천진암에 이장하였다.21) 변 신부는 이벽의 족보와 묘지 발견 이래 발표한 일련의 연구 논문들을 통하여 달레의 기록에 의거하여 형성된 배교자로서의 1786년 사망설을 일축하고 사망시기를 1785년 늦은 봄으로 사망경위를 순교로 단정하는 주장을 강력하게 개진해 오고 있다.22)
우선, 변 신부는 이벽보다 32년이나 더 오래 살았던 부친 이부만(李溥萬, 1727-1817)과 맏형 이격(李格, 1748-1812), 그리고 동생 이석(李晳, 1759-1829)의 생존 중인 1813년에 목판으로 간행된 「경주이씨 족보 계유보(癸酉潽)」에 이벽의 사망 연도가 1785년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상기 족보와 가승과 구전, 기록 등의 문헌과 증거들은 이벽 선생의 사망년도를 1785년 을사년 봄으로 말하고 있는 동시에 32세(옛날 한국식 나이로 따져서)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고 있으나, 특히 달레의 역사서에는 1786년 병오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말하고 있는 동시에, 33세의 나이로(이 나이는 유럽의 서양 사람들이 따지는 나이 계산법, 즉 만滿으로 따져서이다)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역시 친 아버지와 친형제들이 생존하여 있던 시절(1810년경)에 만들어진 족보기록이(그 부모 형제들이 무식한 이들이 아니고, 정부에 높은 벼슬들을 하고 있던 저명한 양반 집안이니) 무엇보다 정확하다고 믿어야 한다. 또 달레의 주장대로 1786년에 유럽식 나이로 33세에 세상을 떠났다면, 국내의 모든 기록이 일치하고 있는 그의 탄생년도가 또 달라지고 틀려져야 한다.”23) 변 신부는 이벽의 족보자료(1810년경)를 국역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벽은 字가 덕조(德朝, 지금까지 여러 책에 德操로 나왔으나, 족보에 나오는 德朝가 정확함)이고, 호는 광암(曠菴)이며, 1754년(갑술년, 영조 30년)에 광주군 남종면(현재는 동부면) 배알미리, 즉 두미(斗尾)에서 태어나서(포천에서의 탄생설도 있다) 자라며 배웠고(이벽과 정약용에게 한문을 가르쳐주신 스승 중에는 이방익(李防翼)이라는 분이 있었다…), 숭례의설(崇禮義說)이라는 책을 썼으며, 처음에는 안동 권씨 집안에서 병판감 벼슬을 하던 이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아무 자녀도 두지 못한 채 상처하였고, 다시 해주 정씨의 가문에서 재취하였으며, 1785년(을사년, 정조 9년)에 신앙과 효성을 갈등으로 이끌어가던 당신의 풍습과 부모의 강압, 질병 등이 겹쳐, 32세에 금식 순교하였다. 묘는 그의 아버지와 두 형제의 묘가 있는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신기동에 있고 두 아내와 함께 3합장하였으며, 재취한 부인 정씨에게서 한 아들을 두었다. 즉 이벽이 세상을 떠나기 전해인 1784년에 아들을 낳았다.”24)
변 신부는 이벽의 1786년 사망설을 기술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기록을 조목 조목 반박하고 더 나아가 설령 그의 기록을 따르더라도 일부 교회사가들이 주장하는 이벽의 배교자적 사망설을 부당하다고 비판한다.25) 변 신부는 이벽의 최후와 관련하여 기술된 달레의 기록 중 결정적 부분이 우리말로 정확히 번역되지도 않았으며, 달레가 가한 일부 평가도 월권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시달림에 지치고 배교자에게 속고, 실망에 빠진 아버지를 보고, 그의 말을 들음으로써 정신이 착란된 벽이 넘어가게 되도록까지 하였다. 명백한 배교는 주저하여, 두 가지 뜻을 가진 말을 써서 자기의 신앙을 감추었다. 그의 마음은 용기가 없어졌고, 하느님은 그 마음에서 이미 첫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지 않았으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를 버리셨다. 왜냐하면 성경에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른 내게 합당치 않은 자’라고 씌어 있는 까닭이다.” 변 신부는 한국교회사의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⑦이벽은 온갖 시달림에 지칠대로 지쳤으며, 그 배교자에게 속고, 또 자기 아버지가 실망낙담하여 있는 모습을 보고 그의 말을 들음으로써 정신이 혼란하여 들볶이다 못해, 마침내 무엇이든지 저들 멋대로 생각하도록 마지못해 하는 수 없이 묵인하기에 이르게 되기까지, 그 배교자는 자신이 상상해 낼 수 있는 모든 계략과 온갖 거짓말을 다 늘어놓았다. ⑧그러나 분명한 배교를 하라는 마당에는 완강히 거부하며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⑨다만 묘하게도 두 가지 뜻으로 풀이할 수 있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감추었다. ⑩그의 마음은 허약해졌다. ⑪천주께서는 더 이상 그의 마음 속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지 아니하였다. ⑫그러니 천주께서는 그를 버리신 것이다. ⑬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 부모를 나 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26) 변 신부는 달레의 기록을 따르더라도 이벽이 자살하려고 목을 매다는 아버지를 보고 어느 정도의 양보를 하여 자살을 막을 수밖에 없었지만, 배교를 명백히 하라는 요청에 뒤로 물러가 거부하고 두 가지 뜻을 가진 말로 신앙을 감추었지 배교하지 않은 의미로 풀이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⑪의 문장, 즉 ‘천주께서는 더 이상 그의 마음 속에서는 첫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지 않으니, 천주께서는 그를 버리셨다’는 말이 ‘순 억설이며, 비약 중의 비약’이라고 반박한다. “용기를 잃거나 마음이 약해졌다고 해서 천주께서 버리셨다는 주장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배교자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대목에 와서 달레는 확실히 뚜렷한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⑬에서 달레는 그 이유를 제시한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 부모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는 그리스도의 말씀 때문이란다. 그러면 부모나 처자식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신자들은 다 배교자란 말인가? ‘합당치 않은 자’는 모두가 ‘배교자’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완전히 비논리적이다. 바꿔 말해서 이벽 선생은 부모를 덜 사랑한다는 의미로, 아버지가 목을 매달아 죽도록 만들어야만 했단 말인가?”27) 여기서 변 신부는 을사추조적발 사건 이후 이승훈이나 정약용 등은 외부로 출입하면서 자신들의 처사가 잘못되었음을 사죄한 것과 대조적으로 이벽이 감금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사망한 것은 그가 배교하지 않은 확증 중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변 신부는 정확한 자료와 함께 정확하지 못한 자료들이 뒤 섞인 가운데 작성된 이벽의 죽음과 관련된 달레의 기술 부분을 정확한 사료로 인정하기 힘들다고 보고 있다.
변 신부는 이벽의 조부가 호남병마절도사 부총관 벼슬, 부친은 종2품에 해당하는 가의동중추(嘉義同中樞) 벼슬, 형 이격은 무과에 급제한지 16년이 되어 별군직관 벼슬, 동생 이석 역시 무과에 급제한지 6년차 벼슬에 있었던 양반 가문의 가족원이었음을 밝히면서 을사추조적발 사건 이후 이벽이 천주교 활동을 계속할 경우에 일가의 족보가 문중에서 삭제되는 동시에 탈관삭직당하고 패가망신하게 될 절박한 위기에 직면한 사실에 주목한다. 이벽의 부친이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다가, 마침내 목을 매어 자살을 기도하기에 이르렀기에 두 가지 뜻을 가진 말을 써서 부친의 자살을 미수에 그치게 하고, 외부 출입을 하지 않는 가운데 집 안에서 심한 전염병을 8일간을 앓다가 사망한 그에게 배교자의 누명을 결코 씌울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목을 매달고서 천주학을 버리든가 아버지의 자살을 보든가 하라는 양자택일의 급박하고 비참한 최악의 극적인 갈림길에서도, ‘그래도 분명한 배교를 하지 않고, 신앙을 감추며’(달레의 표현) 천상적인 지혜로써 근신할 뜻을 비추어 아버지를 구하고 신앙을 지켰다는 사실은 이벽 선생이 아니고는 아무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친척과 미신자 친지, 친구들에게 에워싸여, 집안에 연금 상태로 두문불출을 강요당하였을 뿐 아니라, 일체 면회조차 금지된 가정감옥 속에서, 죽음을 향하여 자살 아닌 희생의 제물이 되어가는 그 모습은, 죽을 줄 알고 또 미리 뻔히 보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제자의 태도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벽 선생의 죽음은 순교보다도 더 어려운 희생이었다.”28) 요컨대, 변 신부는 이벽이 가내 연금 상태에서 아사벌(餓死罰)을 받아 단식으로 순교하였다고 단정적으로 기술한다. “1785년 한국 최초의 박해, 즉 을사박해로 한국 천주교회 창립에 있어서 주역을 담당했던 세자 요한 광암 이벽 성조께서는 그 당시 나라의 권력과 사회 풍습에서 오는 강력한 탄압과, 한층 더 가중된 문중 박해로 인하여 집안에 감금되고, 아버지가 목을 매달기까지 하면서 자살로 위협하는 가장 무섭고 처절한 박해 중에 식음을 전폐하고 의복을 갈아입지 아니하며 철야 기도와 묵상으로 신앙을 증거하다가 14일 만에 온 몸이 탈진하여 만 31세를 일기로 1785년 음력 14일 밤에 장렬하고 거룩하게 순교하였다.”29)
변기영 신부가 이처럼 이벽의 죽음을 순교로 단정하는 이면에는 그동안 유림과 문중 일각에서 내려오고 있는 독살설의 혐의가 1979년 6월 21일에 이루어진 이벽의 유해 발굴 작업에 참가하였던 가톨릭의대 해부학 주임교수 권흥식 박사팀의 면밀한 관찰을 통해서 음독 사망의 흔적이 발견된다는 증언을 통하여 사실로 확인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변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창립자 세자 요한 이벽성조의 최후”라는 제명으로 작성된 미공개 유인물에서 당시 이장위원회 유해 관리 책임자였던 권 교수가 발굴된 이벽의 ‘유해 중 치아 끝이 모두 까맣게 타다 남은 것 같았고, 유해의 목과 복부만이 유독이 검푸르게 짙은 색깔을 띠고 있었는데, 이는 음독으로 인한 사망자들의 시신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증언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를 위시한 이장위원회 관계자들이 장차 시성식 준비 과정에서 혹시 다시 부검이나 유해 재확인이 필요할지도 모르므로, 치아는 수거하여 부식하거나 훼손되지 않도록 권 교수 팀에게 위탁하여 보존 처리케 하여 자연 건조시켜 진공관으로 처리하여 천진암 박물관 고문서실에 보관되어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30)
2. 1785년의 증거자 사망설과 유보적 입장
변기영 신부가 이벽 가문의 족보와 그의 묘를 발굴한 이후에 발표한 연구 결과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일들이 한국 천주교 일각에서 진행되고 있다. 최근에 와서 일부 교회사학자 내지 이벽 연구자들도 변 신부를 따라 그의 사망년도를 1786년이 아닌 1785년이라는 견해를 표명하면서 배교자로서의 사망설에 대해서 대체로 부정적 입장을 표명하면서 증거자 내지 순교자 사망설에 가까운 입장이거나 유보적 입장을 개진하기도 한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서종태 박사는 2002년 2월 「한국천주교회 창설 주역과 천주 신앙」을 주제로 개최된 순교자 시복 시성을 위한 세미나에서 발표한 연구논문 “이벽․이승훈․권철신의 순교 여부에 대한 검토”에서 이벽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생존해 있을 때 만든 족보가 신빙성이 크기 때문에 1785년 사망설에 타당성을 부여한다.31) 아울러 서 박사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수록된 이벽의 죽음을 애도한 만사(輓詞)가 ‘을사년 1785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수록되어 있기에 이 견해의 신빙성이 더욱 크다고 보고 있다.32) 그리고 서 박사는 이벽이 을사박해가 한창이던 때에 사망했다는 사실이 박해와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한다고 보고 있으며, 그가 을사박해에 연루되어 가정의 심한 박해를 받은 사실을 주목한다. 그리고 그가 가정의 박해를 받고 배교한 뒤에 페스트에 걸려 사망했다는 설은 좀더 논의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가 배교하였다면 이승훈의 경우처럼 가족들의 참관하에 사학서(邪學書)를 불태우고 척사문(斥邪文)을 지어 관헌에게 제출하여 배교사실을 확인토록 하였을 것이나, 이벽의 경우에는 어디에서도 이러한 흔적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배교설이 의문시된다는 것이다. 서 박사는 더 나아가 페스트 사망설도 가족들이 사실과 달리 유포한 유언비어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개진하기도 한다. 아울러 서 박사는 이승훈이 1790년에 북당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서한과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교황청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6일자 서한 등등에서 1784년 이래 박해가 네다섯 군데에서 일어나 신도들이 감옥에 갇히고 구타당하고 협박당하는 등 온갖 감언이설로 배교시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두 사람이 고문을 받다가 목숨을 잃었으며, 또 다른 60명의 신자들이 형벌을 받기를 원하고 그중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이 담겨 있는데, 보다 면밀한 자료 연구를 통해서 이벽의 순교 여부가 보다 분명하게 가려질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성배 신부 역시 위 세미나에서 발표한 연구 논문 “광암 이벽에 대한 신학적 고찰”에서 이벽의 사망년도를 1786에 죽었다는 설을 언급하면서도 1979년 이래 발견된 이벽의 족보에 기록된 대로 1785년을 사망시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변 기영 신부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사망시점의 차이와 관련되어 제기되는 문제를 거론하였다. “한국 사회에서 족보가 대단히 중요한 역사자료라면 족보에 기록된 대로 이벽의 죽음을 1785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을사추조적발사건’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다는 말이 되고 또 왜 일반적으로 그의 죽음을 일년 정도 늦춘 것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일으킨다. 여기서 이벽이 집안의 박해로 감금당한 채 독살되었다는 주장도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는 사정도 신붕하게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그가 신앙 때문에 집안에 갇혀서 (육체적으로 결박당해 갇혀있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가문과 부모의 명령 또는 집안의 분위기 때문에 꼼짝하지 않고 집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사실을 포함하여) 죽었다면, 특히 독살되었다면 그의 죽음은 순교자의 죽음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역사책에서 그를 배교자라고 언급하고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우리는 이벽의 죽음에 대한 상세한 고찰을 할 필요가 있다.”33)
이 신부는 여기서도 앞서 발표한 학위논문에서처럼 이벽의 처신을 배교적으로 규정한 달레의 주장이 무리가 있음을 몇몇 논거를 제시하면서 지적한다. 특히, 이벽이 배교적 자세를 보였다는 이야기가 그의 가족이 퍼뜨린 소문에 의하여 날조되고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본다. 이벽이 실제로 배교하였다면,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상태에 머물러야 할 필요가 없는 데, 그는 집 밖으로 자유롭게 외출할 수 없는 상태에서 지내야 하였다. 이벽이 감금 상태에서 가족들의 처사로 인하여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다 사망했다고 보아야 하리라는 것이다. 둘째로, 이벽이 가문의 몰락을 두려워 한 가족 누군가에 의해 독살을 당한 경우는 신앙 때문에 목숨을 바친 분명한 사실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가문의 엄청난 수치이기 때문에 상당 기간 은폐 후 병사로 처리하고 족보에만 사실대로 올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출세 지향적 길을 걷기보다 진리탐구의 구도적 자세로 학문 연구에 몰입하여 임금 정조로부터 칭찬받을 정도의 훌륭한 선비로 살았기에 다산으로부터 신선과 같은 분으로 추앙받는 인품의 소유자가 수치스러운 배신행위를 자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이중적인 말을 써서 양보했다’는 말 자체가 이 벽의 배교할 수 없는 인품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넷째로 이벽의 사후에 이승훈과 다른 동료들이 천주교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지만, 많은 교회사 자료에서 이벽이 천주교회의 주도자로 나타난 사실은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위기가 여전히 남았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곽승룡 신부 역시 위 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 “한국 천주교 창설 주역들의 삶과 신앙 고백에 대한 사목적 고찰”에서 이벽이 ‘을사추조적발 사건’(1785년)으로 집안에 유폐되어 사망하되, 배교자로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묵언의 거룩한 행동으로 신앙과 효성을 함께 증거한 복음적 죽음을 맞았다고 보고 있다. “아버지 이부만의 자살 시도, 사이비 신자들의 계략 등 모진 어려움 속에서도 이벽은 명백하게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는 배교의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이벽은 ‘그럼 나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씀하였다. 이는 배교한다는 말도 아니고 당장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억지 행동에 효도하는 마음으로 드린 말씀이다.… 문중과 아버지 이부만이 사용한 위의 모든 방법은 이벽에 대한 박해이며 지독한 형벌이다. 당시 순교자 이상으로 아버지와 문중들로부터 이벽은 박해를 받았으며 결국 돌아가셨다. 차라리 관헌에 끌려가 박해를 받으면 겉으로 그 신앙이 드러나기라도 할 텐데 집안 문중들과 아버지로부터 받는 박해와 고문은 이벽 스스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순교 이상의 고통을 당한 것이다. 이렇게 이벽은 자신을 박해하는 아버지를 공경하면서도 하느님을 증거하여 복음적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명시적으로 하느님을 믿지 않겠다는 고백을 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배교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34)
2002년에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된 『한국 가톨릭 대사전』이 1985년 판과는 달리 “이벽” 항목에서 그의 사망 년도를 1785년 여름이거나 1786년 봄일 수도 있다고 개방된 자세를 개진하고 있음도 주목할 일이다. 여기서 기고자 차기진 박사는 이벽이 을사추조적박 사건 이후 집안에서 연금 생활을 하다가 사망하였다고 보면서 사망년도와 순교여부를 둘러싸고 제시된 상반된 학설을 그대로 기술하고 있다. “이 추조 적발 사건으로 집주인 김범우는 단양으로 유배되고, 이승훈과 이벽은 집안 식구들에 의해 배교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특히 이벽의 부친은 그가 동교들과 접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집 안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도록 한 다음, 이벽이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이벽은 그해 여름(혹은 이듬해 봄) 페스트에 걸려 사망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지금까지의 연구와 기록으로는 이벽의 순교를 부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가 가정 박해를 극복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것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35)
김동원 신부는 2003년에 대만 보인대학에서 “초기 한국 천주교회 평신도 신앙과 영성”을 주제로 작성한 신학박사 학위 논문에서 이벽의 죽음과 관련하여 개진된 변기영 신부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조하면서 그가 문중에서 추방당하고 패가망신당할 것을 염려한 아버지 이부만의 가공할 위협에 굴하지 않다가 목을 매달아 자살하려는 아버지의 죽음을 만류하면서도 결코 배교를 하지 않았기에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가운데 가혹한 문중의 박해를 받고 을사추조적발 사건이 발생한 같은 해인 1785년 음력 6월 14일에 순교적 죽음을 맞았다고 단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36)
최선혜 교수는 2005년 5월에 개최되는 「한국 순교자 시복 시성을 위한 2차 세미나」에서 발표되는 연구논문 “조선시대 가족원에 대한 가장의 통제와 처벌”에서 유교 이념에 입각한 조선 후기 사회 안에서 가장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가족구성원의 책임자이며 관리자로서 가정 안에서도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권위를 더욱 강화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가장의 일차적 책임이 국가의 기본질서가 가정 안에서 준수되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가족원이 국법을 위반한 경우에는, 가장 또한 이유 불문하고 처벌당하고 경우에 따라 당사자보다도 더욱 중한 처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원이 위법행위를 자행하였을 경우에, 관에 알려져 문제가 커지기 전에 가장이 먼저 적절한 제재와 처벌이 가해졌음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으며, 자제가 국법을 위반하였을 경우에 즉각적으로 관에 보고하여 죄를 받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이러한 사회 구조 안에서 가장이 중대한 위법행위를 자행하지 않는 한, 가족원이 가장의 권위와 체벌에 대항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최 교수는 가장의 권위에 대항하는 가족 구성원들을 중벌에 처할 수 있는 법적 규정이 공식적으로 운영되었다고 보고 있다. 국가는 집안 담장 안에서 벌어지는 가족원에 대한 가장의 태도를 제대로 감시하거나 통제할 수 없었으며, 가장의 사형에 대한 문제에서 한걸음 비껴서서 가장의 도덕성에 기대어 국민을 통제하는 방법을 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 교수는 당시 가장의 뜻을 어긴 가족원에게 사랑과 관심을 기본으로 하여 타이르고 설득하는 과정이 당연히 따르지만, 체벌도 가해졌다고 본다. 최 교수는 특정 가족원이 지속적 학대와 구박 끝에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였다고 적고 있다. 최 교수는 가장의 판단으로 특정 가족원을 죽음에 이르게 할 때 그 방법은 간접적 방식이었다고 추정된다고 본다. 최 교수는 을사추조적발사건 이후에 이벽의 성급한 부친이 천주교에 배타적인 완고한 자세로 아들을 천주교 신앙으로부터 되돌리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살을 도모하기까지 하였다. 이벽은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상태에서 의관도 갈아입지 않고 식음을 거의 전폐하는 등 극도로 피폐한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벽의 처신이 가문의 제재를 받는 고통스러운 처지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당대 조선 사회에서 이벽이 배교자로서가 아니라 천주교인의 수괴로 간주되고 있던 사실에 유의할 것을 촉구하면서 정언 이의채가 작성한 상소문이나(『순조실록』 2 순조 원년 3월 정해 11일), 집의 유경이 작성한 상소문에서도 이벽이 천주교의 수괴로 지목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면서(『순조실록』 2 순조 원년 3월 신묘 15일), 그가 죽기 전에 신앙을 부정하거나 세속적 욕망을 드러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본다.
최 교수는 당시 천주교에 대한 통제는 일반적 위법과 사회질서 교란보다 더 강력한 제재가 가해졌기에 이벽의 아버지는 사학(邪學)의 괴수의 부친으로 낙인찍힐 위기에 직면하여 아들 벽이 가문에 재앙을 초래할 인물로 여기고 박해를 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나 신앙이 없는 가장으로서 자신은 물로 집안을 풍비박산 낼 천주교를 용납할 리 만무하였다. 그것을 용납하는 것보다 천주교를 믿는 가족원을 집안에 가만두거나 죽음으로까지 내 모는 것이 차라리 자신과 가정을 지키는 일이라는 판단을 내리기 마련이다. 이벽의 부친도 가장으로서 집안을 지키기 위해 그러한 길을 택한 것이라 짐작된다.”
III. 이벽 죽음의 신학적 재조명
이벽의 사망 시기와 사인에 관해 그동안 한국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관계 사학자와 연구자들의 입장이 어떠한 사료에 의거하여 형성되었는지를 검토하면서 일별하였다. 논자는 역사적 진실을 밝히려는 이들 연구자들의 노고를 통하여 드러난 국내외의 사료들에 의거하여 이벽의 사망시기와 사망경위는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37)
이벽의 사망 시기는 변기영 신부를 위시한 여러 이벽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다산이 이벽의 죽음을 애도하여 작성한 만사(輓詞)가 1785년에 작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벽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생존 중에 작성한 「경주이씨족보」에 1785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에 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자비망기」나 달레의 『한국교회사』의 기록처럼 1786년이 아니라 을사추조적발사건이 발생했던 1785년 늦은 봄이거나 초 여름이 분명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38)
논자는 이벽의 사망경위가 주재용 신부를 위시한 여러 이벽 연구가들이 언급하고 있듯이 다블뤼 주교와 달레 신부 등 외국인 선교사들이나 다산과 같은 당대의 불세출의 경세사상가로부터 학덕이 출중한 신선같은 귀인으로 추모되는 이벽의 고매한 인품으로 미루어 볼 때, 그리고 그의 사후에 반서교(反西敎) 유학자들이 작성하여 돌린 상소문에서 그를 천주교의 수괴로 지목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리고 그가 을사추조적발 사건 이후에 가택 연금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불과 3개월 이내에 사망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에, 그가 가족의 위협에 굴복하여 그리스도교를 배교한 허약한 인물로 생을 마감하지 않고 오히려 신앙을 증거한 신앙인으로 죽음을 맞았다는 견해가 역사적 진실에 해당된다고 본다.
1. 이벽의 신앙 증거자로서의 죽음
논자는 이벽의 최후와 관련된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나,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의 기록을 따르더라도 이벽은 배교자로서가 아니라 신앙 증거자로서 최후를 맞았다는 점을 신학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논자는 이와 관련하여 비슷한 견해를 표명한 김옥희 수녀와 이성배 신부, 그리고 변기영 신부 등이 제시한 논거들에 원칙적으로 공감하면서 두 선교사들이 이벽을 배교자로 규정하게 된 신학적 논거가 정당치 않음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들은 1785년 봄에 명례방 김범우 집에서 이벽의 주재하에 열렸던 신앙 공동체 집회가 추조들에 의해 적발된 뒤에 가택 연금된 상태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는 처지에서 격한 성격의 아버지가 목에 줄을 감고 자살하려는 모습을 보고 이벽이 ‘명백한 배교는 주저하며 두 가지 뜻을 가진 말을 써서 자기의 신앙을 감추었다’고 기술하면서,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은 자’라고 씌어 있는 성서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느님도 그를 저버리셨다고 규정함으로써 배교자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논자는 두 선교사들이 배교의 근거로 제시한 성서적 논증을 이벽에게 적용하는데 무리가 있다고 본다. 그들이 인용한 성서 구절은 마태오 복음 10장 37절로서 예수가 당신 친히 선발한 열두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이방인들이 사는 곳이나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가 아니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위탁하는 말씀 중에 포함되어 있다.39) 이 말씀의 청취자들은 후에 육화된 하느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될 그리스도를 예수 안에서 직접 만나서 그분으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도록 뽑힌 신분으로 그분과 함께 생활하면서 복음 말씀을 직접 듣고, 놀라운 행적을 육안으로 보았던 제자들이었으며, 위의 말씀은 현세의 모든 것이 화염 속에서 불타는 가운데 닥칠 세계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보았던 묵시문학(黙示文學)의 지평 안에서 생활했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임박한 하느님 나라에 직면하여 구원을 가져다주는 복음을 사람들이 믿도록 선포하는 것이 형식적인 율법준수에 머무는 재래의 생활양식보다 결정적 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맥락 안에서 발해진 것이다.
평소에, 예수와 제자들은 다른 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고 안식일 규정에 따라 회당이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경신례에 참가하였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기하지 않고 완성하러 오였음을 분명히 천명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마태 5, 17- 19). 예수께서도 친히 율법에 따라 부모께 효도하며 소년 시절을 보냈다.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 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루가 2, 51). 그리고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겨 드린 데에서도 죽기까지 효도하였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요한 19, 27). 이러한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되, ‘부모를 죽게 내버려두는 불효자로서 따라야 나의 제자로서 합당하다’고 일반적 조건을 내세우셨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벽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신 예수를 직접 만나지도, 함께 생활하지도, 말씀을 직접 듣지도, 행적도 육안으로 보지도 못했으며, 서구 신자들처럼 교회 안에서 주요 교리를 충분히 배우고 세례를 받아 입교하여 성사 생활양식에 익숙한 가운데에서가 아니라, 이성배 신부가 적절히 지적하였듯이, 유교 이념이 지배하는 조선후기 사회 안에서 거의 독학으로 보유론(補儒論)의 관점에서 작성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통하여 접하게 된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유가(儒家)의 기본 윤리와 덕목을 결코 폐기하지 않고 보완하여 완성하는 구원의 진리로 파악하고 기쁘게 수용하였던 유학 경전에 정통했던 선비였다. 자살로 위협하는 부친께 이벽이 인륜의 기본 덕목으로 확신하던 효도를 하여 부친을 죽음으로부터 구해내고자 ‘분명히 배교하지는 않고 두 가지 의미의 말로 신앙을 감추었다’는 처신을 보였다는 이유로 ‘하느님께서 그를 버리셨다’는 결론을 내리는 처사는 도저히 신학적으로 정당한 판단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40)
하느님 공경과 이웃 사랑, 여기 부모 공경은 이벽의 경우에 결코 양자택일의 관계로 처리될 사안이 아니다.41) 당시 이벽에게 부친께 효도하여 그분의 자살을 막아야 한다는 요청은 천명(天命), 곧 하느님의 말씀 자체로서 절대적 요청으로 다가갔다고 보아야 하며, 그가 분명 명시적으로 배교를 하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자살을 막아 효도를 행한 자세는 하느님의 절대적 계명을 받들어 행한 참된 하느님 신앙 행위였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교회 당국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규정하는 신앙은 ‘신앙대상’(fides quae creditur)과 ‘신앙행위’(fides qua creditur)의 두 차원에서 논의될 사안이다. ‘신앙대상’은 ‘범주적(範疇的) 신앙’이라고 불릴 수 있으며, 교리체계(敎理體系)와 세례와 미사성제를 위시한 경신예식(敬神禮式), 그리고 각종 신심활동이나 성지순례 등으로 구체화되는 생활양식(生活樣式) 등으로 범주적 차원에서 다른 사회 이념단체나 종교들과 명시적으로 구별되어서 대상화가 가능한 양식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명시적 차원’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서 ‘신앙행위’는 ‘초월적(超越的) 신앙’으로 불릴 수 있으며, 신앙인이 현실 안에서 일상적으로 주위(이웃 사람, 다른 생명, 또는 사물 등등)와 관계를 맺을 때에 자신의 내면 심층에서 들리거나 발해지는 하느님의 말씀, 곧 천명(天命)에 따라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시시로 성취하는 윤리 도덕적 생활로 구현되는 신앙을 뜻한다. 이 ‘초월적 신앙’은 명시적으로 객관화된 그리스도교적 행위가 아닌,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사심 없이 돕는 것과 같은 일반적 윤리 도덕적 행위로 구현된다. 독일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는 이 ‘초월적 신앙’으로서의 ‘신앙행위’의 성격을 훌륭하게 규정하고 있다. “모든 철저한 도덕적 행위는 하느님의 일반적 구원의지에 입각하여 제공된 은총을 통하여 초자연적 이해의 지평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항상 초자연적 유형의 신앙이고 이로 말미암아 구원행위가 된다.”42)
그런데, 구원 여부, 곧 배교 여부에서 일차적으로 관건이 되는 신앙은 ‘범주적 신앙’보다 ‘초월적 신앙’이다. 예수의 다음 말씀은 이 사실을 확인하여 준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범주적 신앙’!].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초월적 신앙’!]”(마태 7, 21). 오늘날 그리스도교계 안에서 주일에 미사참례하고 성체를 영하는 등 외면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듯하지만, 윤리 도덕적으로 비신자나 비종교인들이 보기에 부끄러운 삶을 사는 ‘무늬만의’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반면에, 어느 종교, 어느 교회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인류의 공동선 증진을 위해 사심 없이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은 라너가 갈파하듯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사는 드러나지 않은 ‘익명의 그리스도 신앙인’들로 간주될 수 있다.43)
이벽은 을사추조적발 사건 이후에 외부로부터 철저히 차단당한 상태에서 문중으로부터의 축출과 패가망신을 두려워한 아버지를 위시한 다른 가족들로부터 갖은 수단으로 ‘범주적 그리스도 신앙’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극심한 위협을 당하면서도 명시적으로 배교하지 않음으로써 ‘범주적 신앙’도 저버리지 않았으며,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천명]을 받들어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 말’로써 아버지의 자살을 저지시킴으로써 효도를 실천하는 ‘초월적 신앙’도 아울러 성취하였다. 이벽은 극도의 위협적 상황에서도 범주적이고 초월적 차원에서 하느님을 믿고 증거한 신앙인으로 처신하였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벽은, 그의 가문 족보가 말해주듯이, 을사추조적발사건이 발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785년 늦은 봄 내지 초 여름에 사망하였다. 그가 가족들의 위협에 굴복하여 배교한 후 양심에 심한 가책을 받아 고뇌하며 자나다가 전염병에 걸려 1786년에 사망했다는 다블뤼 주교와 달레의 기록은 신빙성을 잃는다. 그의 부친 이부만(李溥萬, 1727-1817)은 91세, 맏형 이격(李格, 1748-1812)은 65세, 그리고 동생 이석(李晳, 1759-1829)은 71세까지 살았는데,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 따르면, ‘키가 8척에 한 손으로 백 근을 들어올릴 수 있었던’ 건장한 31세 장정이 다른 가족들은 아무 탈 없이 넘긴 전염병에 걸려 병사했다는 주장은 사실로 받아드리기 힘들다.44) 여러 연구자들이 추정하듯이, 이벽의 전염병에 의한 사망설은 가족들이 사실과 달리 유포시킨 유언비어일 수 있다. 그리고 이벽이 배교한 것으로 알려진 이승훈이나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집밖 외출이 허용되지 않은 채 숨진 사실은, 여러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추정하듯이, 그가 가족들의 혹독한 박해를 받고 사망했다고 밖에 달리 풀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벽의 최후는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가운데 의관도 갈아입지 않고 식음을 거의 전폐하는 상태에 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최선혜 교수가 추정하듯이, 이벽의 아버지가 사학(邪學) 괴수의 부친으로 낙인찍힐 위기에 직면하여 아들 벽이 가문에 엄청난 재앙을 초래할 위험한 인물로 여기고 죽음으로까지 내 모는 것이 차라리 자신과 가정을 지키는 일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아들에게 박해를 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신학적 근거에 입각하여 논자는 고 주재용 신부를 위시한 여러 연구자들과 함께 이벽이 배교자로서가 아니라 신앙증거자로서 죽음을 맞았다는 입장을 천명한다. 지금까지 여러 연구자들의 작업을 통해서 확보된 국내외 역사 자료들이 이벽의 신앙증거자로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데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2. 이벽의 순교 여부 심사 작업 착수 건의
논자는 이벽의 죽음을 신앙 증거자의 죽음으로 규정하면서도 순교자의 죽음으로 본다는 단정을 유보한다. 논자는 이벽이 가족들로부터 아사벌(餓死罰)을 받아 금식 중에 순교했다고 보는 변기영 신부의 주장은 보다 확실한 입증 자료를 필요로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에서도 시사하였듯이, 이벽 가문의 족보를 찾아내고 그의 묘를 발굴하여 천진암에 이장한 변기영 신부는 이벽의 시신을 이장할 당시에 그의 치아와 복부 부분만 유독 까맣게 변색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는데, 이는 독살된 흔적으로 볼 수 있다는 의료진 대표 권흥수 교수의 증언에 따라 23개의 치아를 상투와 별도로 추출하여 자연건조 처리하여 부패하지 않도록 밀봉 보관하고 있어 필요시에 언제라도 관계자들에게 공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동안 이벽 문중과 유림 일각에서 내려온 독살설이 시신 일부에 대한 엄격한 법의학적 감식 과정을 거쳐 사실로 확인될 경우에 이벽이 순교로 사망하였다고 공인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하면서 논자는 순교자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가급적 조속한 시일 내에 이벽의 순교여부를 규명하는 시복시성심사 작업에 착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건의를 (동 위원회 신학위원의 일원으로서) 하고자 한다. 논자는 고 주재용 신부를 위시한 여러 연구자들이 후기조선 사회가 낳은 불세출의 경세사상가 다산이 이벽을 사후 수십년이 경과한 뒤에도 진덕박학이 이루 말할 수 없어 신선처럼 우러러 보며 두고두고 추모한 사실을 거듭 지적할 때마다 감동을 느끼고는 했다. 그리고, 이벽의 최후에 대해서는 부정적 기록을 남긴 다블뤼 주교가 같은 비망록에서 이벽의 인품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보면서 찬탄을 금하지 못하고는 했다. 여기 한 외국인 선교사의 비망기에서 묘사되고 있는 이벽은 그의 사후 75년이 경과한 위에서 조선 천주교계 신도들 안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던, 진덕박학으로 비범하기 그지없고 신앙의 진리 전파를 위해 몰아적으로 헌신했던 한 사도적 인물의 진면목의 반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45)
다블뤼 주교는 이벽을 그리스도의 길을 앞서 준비하였던 세례자 요한에 비견되는 인물로서 ‘키가 8척이고 또 한 손으로 백 근을 들어올릴 수 있었기에 장대하고 잘생긴 외모’와 함께 ‘웅대하게 흘러가는 강물에 비유할 수 있는 언변을 지니고’ ‘모든 점에서 탁월한 지능을 지닌’ ‘수많은 몸과 정신의 아름다운 성품을 타고 태어난’ ‘크고 고상한’ 무엇인가를 지닌 인품의 소유자로 묘사하고 있다.46) 이 주교는 이벽이 당대 고명한 학자 권철신이 정약전과 다른 학자들과 함께 어떤 절에서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뒤에 눈 덮인 100리길을 밤중에 떠났다가 자정 무렵에 도착한 절이 아니고 호랑이들이 지키는 거대한 산 반대편에 있는 절에서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자, 위험을 무릅쓰고 그 절까지 찾아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면서 천지와 인성에 관한 모든 문제들을 깊이 연구하고 한역 철학서와 수학서들을 정성껏 연구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아침저녁으로 묵상에 전념하고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에 세속 일을 중단하고 육식을 삼가면서 영혼 훈련에 매진한 거의 초인적 구도자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벽이 계묘 1783년 음력 4월 15일에 누이의 기제(忌祭)를 지내기 위해 마재의 정씨 집에서 체류한 후 서울로 가는 배를 타고 정약전과 약용 형제와 함께 천주교 주요 교리를 열정적으로 토의하여 그들과 다른 승객들을 기쁘게 만들었던 그의 비상한 열의에 관한 기록도 적고 있다.47)
아울러 이 주교는 이승훈이 1783년 겨울에 북경으로 가는 사절로 임명된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중국으로 가게 된 소식을 들은 이벽이 기쁨에 넘쳐 그를 찾아가 서양문물과 천주교의 모든 것을 문의하고 깊이 구명하며, 필요한 것들을 갖고 오도록 당부하고 1784년 봄에 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환한 뒤에 자져온 모든 것을 건네받은 뒤에 집 한 채를 빌려 칩거하며 연구에 전념한 진정한 구도적 인물로 기술하였다.48) 이 주교는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이벽을 ‘고상한 사상과 아름다운 행실을’ 지닌 인물로 대하였다.49) 그리고 이벽이 당대의 명성 높은 유학자들인 이가환(李家煥, 1742- 1801)이나 이기양(李基讓, 1744-1802)을 각각 상대로 하여 많은 구경꾼들과 친구들이 참관하는 가운데 참 진리를 둘러싸고 벌린 토론에서 논리정연하고 치밀한 논증으로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데에서 보여준 지성을 ‘태양처럼 빛나는 명철함’으로 극찬하기도 하였다.50) 그리고 이벽이 양근(陽根) 고을에 거주하면서 고려조 이래 걸출한 인물들을 다수 배출한 권씨 집안을 방문하여 당대 ‘학문과 아름다운 행실로 고명한’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1736- 1801) 형제를 위시하여 일가친지들을 성공적으로 입교시키는 데에서 드러난 ‘그의 명성과 학문과 행실의 권위’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면서 구원의 진리의 전파를 위하여 많은 열과 성을 바침으로써 그 고을을 조선 천주교회의 요람이 되게 한 탁월한 공적을 이벽에게 돌리고 있다.51)
한국 교회는 이미 103위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모시고 있고 또 많은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모시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성인이라면 문자 그대로 범인들과는 여러 면에서 구별되는 비범함을 드러내는 분들이다. 다산이 두고두고 흠모하는 이벽이나, 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자비망기」나 달레의 『한국교회사』에 비쳐진 이벽이야말로 성인에 되기에 필요한 여러 요건, 출중한 재능과 덕성을 두루 구비한 인물로 나타난다. 그의 최후와 관련된 부정적 기술 내용은 정확하지 않은 정보, 곧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하였듯이, 가정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가족들이 유포시킨 허위 정보에 입각하여 작성한 내용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다수 발견되고 있어, 이를테면 가문의 족보와 묘소 등이 발견되고 있어 별로 큰 장애가 되지 않으리라고 여긴다.
이토록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이면서 비약적 성장을 이룩한 한국 교회의 초석이 되었던 이벽으로부터 배교자의 누명을 벗겨드리고 증거자, 더 나아가 순교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진실을 밝혀내는 일은 후손으로서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라고 보아 이분의 시복시성을 위한 심사 작업이 조속히 개시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IV. 맺는 글
한국 교회의 창설 주역 이벽의 죽음의 주제를 그동안 다루었던 여러 연구자들의 견해 내지 주장을 검토하면서 신학적으로 재조명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래서 오랫동안 교계 안에서 정설로 인정되어 온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와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의 기록에 의거하여 이벽이 명례방 소재 김범우 집에서 주도했던 신앙공동체 집회가 1785년 봄에 추조 관헌들에게 적발된 후에 문중으로부터 축출되고 패가망신당할 것을 두려워 한 아버지를 위시한 가족들로부터 배교하라는 위협에 굴복하고 나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 갈등을 겪으며 지내다 1786년에 33세의 나이에 전염병에 걸려 요절하였다는 주장이 역사적 진실이 아니며, 그가 가족의 위협에 끝내 굴하지 않고 신앙을 수호하다가 가택 연금 상태에서 1785년 늦은 봄 내지 초 여름에 31세의 나이로 신앙 증거자로서 숨진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이래 30여년이 지나는 세월동안 이벽의 삶과 죽음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연구 작업에 참여했던 여러 연구자들의 노고를 대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이 줄곧 떠나지를 않았다. 이벽이 오랜 세월동안 교회 안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교회사 관련 저술들과 인사들에게서 배교자로 규정되는 분위기 속에서 그가 배교자로서가 아니라 신앙 증거자로서 최후를 맞이했다는 입장을 개진하면서 입증 자료를 찾아내기 위해 암중모색했던 주재용 신부를 위시하여 김옥희 수녀, 이성배 신부와 변기영 신부 등 여러 연구자들의 노력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특히, 1979년에 이벽 가문의 족보와 묘소를 발견하고 시신을 이장함으로써 이벽의 인물 평가에 결정적 전기를 마련한 변기영 신부의 집념어린 노고에 경탄과 경의를 함께 표하고 싶다.
교회 안에서 ‘올바른 신학자의 전형’으로 칭송되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5-1274)는 순교를 진리와 정의 안에서 박해자의 공격에 대항해서 불굴의 자세로 맞서는 덕행으로 규정하면서 위대한 사랑의 표지이기에 애덕이 순교의 동기가 된다고 파악한바 있다.52) 토마스에게서 순교에 필요한 요건은 그리스도 신앙 전체에 한정되지 않고 모든 덕행들이 하느님과 연관되기 때문에, 그에게서 진실하고도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개별적인 덕의 이행 내지 수행도 순교로 파악되어 있다. 요컨대, 순교는 신학적으로 그리스도 신앙 때문에 박해자들에 의해 가해지는 죽음의 위협의 수동적 감내를 뜻할 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윤리적 규범으로 구체화되는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를 위한 적극적 투신 내지 투쟁의 결과로서의 죽음을 아울러 뜻한다. 이벽이 가족의 온갖 위협을 받으면서 전통적 덕목인 효도를 실천하면서 새로 수용한 그리스도 신앙도 처절한 자세로 수호한 최후의 모습에서 보여준 처신은 순교자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 안에서 이례적으로 이룩한 괄목할만한 외적 성장과 역동적 활동에 힘입어 시작된 새 천년기에 민족 복음화와 세계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여건을 지닌 지역 교회로 국내외적인 기대를 모으고 있다.53) 1984년에 한국교회는 첫 방문 교황이셨던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03위 순교선열들이 성인으로 추대되는 영광을 맛본 바 있지만, 외래 선교사들의 포교활동에 앞서 교회를 창설했던 주역들과 동료 및 대부분의 직계 후손들은 이러한 시성의 영광으로부터 제외되어 있다. 치열하기 그지없는 구도적 삶을 영위하면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자발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이고 증거 했던 교회 선조들의 위대한 삶을 올바로 구명하고 검토하면서 보편 교회 안에서 그분들의 삶에 부합하는 자리를 마련해 드리기 위한 작업을 수행하는 일은 후손들로서 결코 등한히 하거나 회피해서는 안 될 과업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철저한 구도적 학습 과정을 거쳐 수용한 신앙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31세의 젊은 삶을 불태우며 증거자로 생애를 마친 한국 교회 창설 주역 이벽의 배교자 누명을 벗겨드리고 비범하기 그지없었던 그분의 삶과 죽음에 부합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일에 후손들 모두 적극 동참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