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4대 명산의 하나인 구화산(九華山)은 안휘성 청양현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산봉우리가 99개, 면적이 100여㎢에 이르며, 정상인 십왕봉은 1,342m이다. 원명은 구자산인데 후에 시성 이백이 멀리 뭇봉우리들을 바라보며 "소유이분기, 경산개구화"이라는 명구를 써서 이름을 구화산으로 고쳤다. 산에는 계곡폭포, 기암 괴석, 오랜 동굴,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가 많아 산수 경치가 독특하고 아름다우며 명승 고적들이 도처에 분포되어 있어 예로부터 동남제일산으로 불리고 있다. 구화산의 불사 활동은 동진 융안5년(서기401년)에 승려 배도선사가 이곳에 사원(복호암)을 건조하고 전도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불교의 전래에는 분경대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불교와 도교가 서로 도가 높다고 다투었기에 남조 양문제는 불교 경전과 도교 경전을 함께 불사르게 했는데, 도교 경전은 재더미가 되었지만 불교의 경전은 그대로 남아있어 그후 불교가 널리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구화산이 불교 명산으로 이름난 것은 신라 왕자 김교각 스님이 이곳에서 수행하면서 부터이다.
당나라 개원년간(719년) 왕권쟁탈에 환멸을 느낀 신라국 승려 김교각이 이곳에 와서 도를 닦았는데 그가 입적한 후 승도들이 그를 지장보살 화신으로 받들어 구화산을 지장왕 도량으로 개척하였다. 김교각 스님은 구자암, 연화봉 일대의 동굴 속에 거주하셨는데, 무주동, 타좌석 등은 바로 그 흔적들이라고 한다. 천대봉 일대에도 동굴이 있고 고배경대는 스님이 송경하던 곳이며, 성전봉의 일숙암은 스님께서 하룻밤을 묵으셨던 곳이고, 신광령과 동아봉 일대가 스님께서 가장 많이 머무신 곳이다. 그후부터 이곳에 사찰이 수풀처럼 일어서게 되었다. 구화산 유람객들은 늘 화성사, 육신보전, 천대사, 상선당을 참배한다. 옛적 구화산 민원협곡에는 민양화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대부호로서 구화산 지역의 삼림을 가지고 있었으며 천성이 선량하고 남을 돕기를 즐겼으며 벗을 널리 사귀었다. 어느날 스님이 민공 앞에 나타나 수행할 장소를 구하며 가사를 펼칠 만한 크기의 땅을 바라자 민공은 얼마나 큰 땅이 될까하여 이를 허락하는데 스님이 가사를 공중에 뿌리자 구화산의 99개 봉우리를 모두 덮어버렸다. 민공은 보살현령을 깨닫고 구화산을 스님께 바쳤을 뿐만아니라 자기의 아들인 도명을 스님의 제자로 바치고, 뒤이어 자기도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또 스님이 동아봉 큰 돌위에 앉아 염불하고 계시는 동안 독벌레에 물렸으나 자세도 흐트러지지 않고 아무런 잡념이 없었다. 이에 산신이 감동하여 미인으로 둔갑하여 약을 갖다 드리고, 맑은 샘으로 사죄하였다. 이때부터 스님이 앉은 돌에서 샘이 솟았다고 한다. 당숙종년간에는 제갈절 일행이 석굴에서 면벽하고 계신 스님을 보았는데 스님의 발우에는 백토와 소량의 쌀이 담겨져 있었다. 그들은 이에 깊이 감동하여 돈을 모아 화성사를 지어 교각 스님께 바쳤다고 한다.
화성사는 구화산의 개산사원으로서 장엄하고 고박하며 기세 웅장하다. 화성사 건립 이후 스님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서 찾아오는 승려 신도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스님은 승려들을 거느리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양식을 자급자족하였다. 794년 99세의 김교각 스님은 제자들을 불러놓고 열반에 드셨다. 문도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갑자기 산이 진동하고 돌이 굴렀으며 종을 치니 종이 소리없이 땅에 떨어지고, 지붕의 서까래도 크게 훼손되었다. 교각 스님이 열반하자 제자들은 스님을 큰 항아리에 모시고 뚜껑을 봉했는데 3년이 지난 후 안장하려고 개봉하여 보니 옷은 부패하였지만 살은 그대로이고 얼굴색은 생전과 꼭 같았다. 관절에서는 쇳소리가 났는데 석탑 속에 육신을 안장할 때 신비한 빛이 감돌았다. 현재 사원에는 명나라의 유지, 역대 황제가 하사한 금인과 명나라 판본의 장경 6천여 권 및 청나라 범문 패엽경 등 진귀한 문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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