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국예문작가회 원문보기 글쓴이: 우병택
2010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중편소설
아직 한 글자도 쓰지 않았다
- 정유경
1。
누군가가 사라지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책을 하나 알고 있다. 더럽고 달콤한 쥐약 같은 책이다. 그 책 속에서는 누구나 사라진다. 나는 그 책에서 당신이 사라지는 것도 보았다. 나 역시 오래전에 그 책 속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분명히 사라지고 있다, 누군가는.
그 책은 지금껏 출판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출판되지 않을 것이다. 그 책이 출판될 가능성은 밀봉된 플라스틱 지퍼백 안의 산소처럼 희박하다. 수천억년 된 호박 속의 모기가 1초 만에 되살아나는 기적을, 그것도 내가 맨손으로 행할 확률과 비슷한 가능성. 그것은 무한 속에 누워있는 0바이트짜리 희망이다. 그 책을 보고 싶은가, 당신? 미안하다. 당신은 결코 그 책을 들여다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 책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기억이란 것은 연약하여 때로는 하룻밤 꿈속의 바람에도 송두리째 마모되어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 그 이야기는 단 두 사람의 기억에서만 모서리가 닳은 채로 존재한다. 나머지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 책은 한 번도 쓰인 적 없는 글이다. 그 책에 대해 한 글자라도 기억하고 있는 첫 번째 사람은 작가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사람은, 물론 나다.
그 책을 쓴 케이라는 여자는 그리 길지도 않은 인생동안 내가 아는 것만 해도 100여 편이 넘는 소설을 써냈다. 그 중의 50% 이상이 누군가가 사라지는 데서부터 시작하거나 끝나는 소설이었다. 나머지는 소설의 중간에 사라졌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100편의 소설들 가운데 똑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케이는 100개의 미묘하게 다른 노선을 통해 주인공을 지구에서 삭제시켜버렸다.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그리고 이제 그 100개의 노선 중 99개는 암묵적으로 케이의 기억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삭제된 상태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건 기껏해야 첫 번째 노선의 아주 희미한 도로표지판 몇 개 정도다. 여기서부터는 일방통행, 목적지까지 1억 킬로미터, 이곳에서 우회할 것, 바로 이 지점에서 사라지시오……. 그것은 케이의 첫 소설이었고, 내가 통독한 케이의 유일한 소설이었다. 나머지 99개의 소설들, 그러니까 내가 읽다 던져버렸거나 아니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던 소설들에 대해서는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내가 가진 기억들은 마른 풀로 쌓은 탑처럼 바람이 불 때마다 휘청대며 흩날렸었다. 지금 그것들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이유로 누구를 증오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좀 더 많은 케이의 소설을 읽어두지 못한 게 후회 되는 시간이다. 그러나 후회라는 것은 언제나 한발씩 늦고, 버스는 늘 후회하는 자보다 한발 먼저 출발하기 마련이다.
아무튼 내가 아는 한, 케이를 제외하고는 내가 케이의 첫 소설의 첫 독자이자 마지막 독자다. 나 말고는 누구에게도 그녀의 소설을 읽어볼 영광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케이의 첫 소설을 읽는 동안 아주 여러 번 “이렇게 엉망으로 배배 꼬인 한심한 얘기는 처음”이라고, 그것도 케이가 잘 들을 수 있도록 케이의 귀 바로 앞까지 걸어가서 알맞은 각도로 고개를 꺾고 큰 소리로 말해줘야만 했다. 사실이 그랬다. 유일한 독자라고 해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나는 케이의 주인공들처럼 불가해하고 한심한 인물을 어느 책에서도 읽어본 적이 없다. 그 인물들은 병들고 욕심 많고 슬프고 배고픈 눈 먼 쥐들처럼 책의 이 구멍 저 구멍에 머리를 들이밀고 독약을 할짝댔다. 그런 뒤에는 하나씩 하나씩, 결국은 몽땅 사라졌다. 도대체 왜 일이 그렇게 돼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케이에게도 똑같이 말해주었다. “도대체 이게 다 뭐야? 이런 걸 왜 쓰는 건데?” 케이는 그냥 웃기만 했다. 하지만 내가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저 한심한 등장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한심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이 사라지던 마지막 장면을 읽는 동안 내가 세 번이나 울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나는 울었다. 그리고 케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건 전부 나와 케이 둘 다 아주 어렸을 때 일어난 일이다. 지금 나는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해져있다. 그러므로 나에게 그 글을 읽을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나는 울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이 남아있다. ‘내가 울고 울지 않고가 중요한가?’ 하는 문제다. 대답은? 당연히 NO. 즉, 내가 울고 울지 않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다. 내가 아는 한, 그것은 수천억년 된 호박 속의 모기가 눈을 뜨고 있느냐 아니냐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설령 내가 세 번이 아니라 삼백 번쯤 울었다고 고백했다 한들 케이의 소설에서 사라져간 사람들을 되돌려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짐작했겠지만 케이는 고집 있는 작가였다. 그녀는 있었던 일을 글로 옮기는 류의 작가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글로 쓴 일들을 현실로 옮기는 쪽에 가까웠다. 예컨대 위장병에 걸렸다가 몸이 쪼그라들어 사라지는 여자의 얘기를 쓴 뒤부터 케이는 계속해서 위장병에 시달렸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서른한 살이 된 지금까지 계속. 한번은 귀 뒤에서 자라나는 괴물사마귀에 대한 소설을 쓴 뒤 정말로 귀 뒤에서 괴물이 자라났다고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그 괴물은 케이의 소설에서처럼 곧 사라졌지만. 그건 케이가 열아홉 살쯤 됐을 때의 일로 기억한다. 죽은 강아지가 찾아온 적도 있었다. 열세 살 때던가 열네 살 때던가, 하여간 그때. 그 후로 십오 년 이상의 세월이 줄줄 흘러갔다. 때로는 한여름 폭우에 불어난 강물처럼 조급하게, 때로는 한겨울 얼음 밑을 흐르는 고요처럼 더디게. 그리고 이번에는 이 일이 일어났다. 케이가 가장 즐기는 주제가 실현된 것이다. 누군가 사라지는 일. 사라진 것은 케이 자신, 그러니까 내 하나밖에 없는 언니였다.
2。
그날 겨울이 시작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전봇대도 베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바람이 날카로운 날이었다. 케이는 계절이 시작되는 날을 언제나 정확히 감지했다. 그것도 케이의 재주 중 하나였다. 바람의 습도가 바뀌는 가을의 첫 밤, 볕을 타고 내려오는 첫 봄의 오후. 겨울은 입김과 함께 새벽에 찾아온다고 케이는 말했었다.
“그런데 여름은 어렵단 말이야. 그냥 어느 날 와 있어, 여름은. 목이 왜 이렇게 마르지? 하고 생각하다보면 벌써 여름 안에 내가 들어와 있는 거지.”
나에게는 모든 계절이 다 어렵다. 그래도 첫 입김이 나는 날을 구분해내는 건 할 수 있다. 케이의 기준으로 내가 감지해낼 수 있는 계절은 겨울뿐인 셈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그날이었다고 기억한다. 바람이 몹시도 찼던 그날 새벽. 모르는 전화번호가 핸드폰의 액정에 떴을 때, 나는 어째서인지 창문을 열고 아직 밝아지지도 않은 하늘을 한번 올려다봤었다. 그러면서 오늘쯤이면, 어쩌면 오늘쯤이면, 하고 생각했다. 내 예감은 맞았다. 나의 ‘여보세요’에서는 제법 뽀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겨울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는 내가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남자가 서있었다. 형사였다. 그가 내게 케이를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안다고 대답했다. 나는 케이를 알고 있었으니까. 혹은 그때까지만 해도 케이를 안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누군가 나에게 케이를 아느냐고 묻는다면…… 어렵다. 내가 정말 그녀를 알았었는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다. 그것이 내가 이제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을 말할 때마다 ‘내가 아는 한’ ‘내가 기억하는 한’이라는 말들을 덧붙여야만 하는 이유다.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기 속의 형사는 이미 나를 어느 정도 동정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케이의 사건은 반쯤 종결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결론을 짓고 말을 건네는 사람과의 대화는 갈증이 난다. ‘자살’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형사의 목소리가 너무 건조해서 나는 통화하는 내내 마른 침을 꿀꺽꿀꺽 삼켜야만 했다. 전화를 끊었을 때는, 그래서 목이 메었다. 창밖의 거리는 내 입에서 새어나온 입김 탓인지 온통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형사는 한강대교 근처의 둔덕에서 케이의 가방을 찾아냈다. 그 안에는 현금 오백 삼십 원과 몇 장의 영수증, 명함, 신분증이 들어있는 지갑과 비스듬히 굽이 닳은 빨간색 스웨이드 구두가 들어있었다. 형사는 아직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었다. 자살, 살해, 납치와 같은 단어들을 건조한 목소리로 내뱉을 수는 있었지만 그는 아직 보이는 것 이외의 것을 보지 못했다. 예를 들어 납작하게만 보이는 그 싸구려 벨크로 지갑 속에는 사실 지폐가 두둑하게 들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지폐들은 도난당한 것이리라. 구두는 사실 케이의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케이의 가방에 음모와 거짓말을 쑤셔 넣은 것이리라. 하지만,
“이 구두를 아십니까?”
하지만, 그렇다. 나는 그 구두를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한, 그 구두는 케이의 것이 분명했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해서 가능성 하나가 너무 손쉽게 사라져버렸다. 케이가 고르고 아빠가 선물한, 한참이나 유행에 뒤쳐진 그 구두를 케이가 아직도 버리지 않았다는 게 놀랍긴 했지만.
구두바닥에 묻은 흙 때문에 약간 더러워진 지갑 속에는 내 중학교 때 학생증도 들어있었다.
“왜 이 안에 당신의 학생증이 들어 있는 거죠?”
형사가 물었다. 그러나 그건 내가 물을 소리였다.
“지금 학생이십니까?”
“중학생이냐고 묻는 거예요?”
형사는 왜 나에게 저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한 걸까. 나는 왜 형사에게 저런 말도 안 되는 대꾸를 한 걸까. 누구도 스물아홉 살의 여자에게 중학생이냐고 묻지 않는다. 아주 특별한 축복이나 아주 특별한 저주 탓으로 한 시점에 묶여버린 얼굴이 아닌 이상. 그리고 내 얼굴이 기억도 안 날만큼 오래 전부터 늙기 시작했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안다. 중학교 학생증 속의 나는 늙음을 모른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웃으면서 찍은 몇 장 안 되는 사진 중 하나였다.
내 학생증 뒤에는 케이의 구두보다도 낡은 아빠의 옛날 명함이 들어있었다. 그 뒤에는 도서관 회원증이, 교통카드가, 할인쿠폰이, 핸드폰 수리기사의 명함이, 지하철 노선도가, 그리고 케이의 주민등록증이 들어있었다. 마지막 칸에서 나온 건 2020의 명함이었다. 봄까지 케이가 일했던 카페다. 2020, 미래를 향했으나 지난 봄 이미 사라진 카페. 영수증은 모두 케이의 집근처 편의점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케이는 겨울이 시작되기 일주일 전 편의점에서 다크초콜릿과 검정색 스타킹을 샀다. 그보다 이틀 전에는 다크초콜릿과 저지방우유를 샀다. 그보다 이틀 전에는 다크초콜릿과 다크초콜릿과 다크초콜릿……. 케이 자신의 명함이나 운전면허증, 신용카드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케이는 그런 걸 가져본 적이 없다. 그것뿐이다. 그것이 케이가 남긴 잔해의 전부였다. 형사는 그 잔해를 뒤적여 케이의 삶이 지나치도록 단조로웠으리라는 사실을 유추해냈다. 그러나 그것이 케이의 자살을 증명해줄 수는 없었다. 그가 케이의 자살을 증명해줄 증거로 제시한 것은 결국 그 빨간 구두였다.
“그렇지 않습니까? 구두를 벗어놓는 건 강물에 뛰어들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는 통과의례랄까, 뭐 일종의 전통 같은 거니까요.”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 구두밖에는.
혈흔, 반항한 흔적, 하다못해 머리카락 한 올도 남아있지 않았다. 발자국은 이틀 전 내린 빗물에 다 쓸려 내려갔고, 지문은 케이 자신의 것뿐이었다. 형사는 케이의 자살을 증명해줄 결정적인 단서를 찾지 못했지만 그것을 부인할만한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단서가 없었으므로 그는 케이가 강물로 걸어 들어갔으리라 추정했다. 하지만 그는 모른다. 그는 내가 아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케이는, 내 언니는, 물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해 여름, 케이는 바위에 앉아서 큰 눈을 굴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구두와 지갑이 케이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형사가 그걸 알 리 없었다. 그날의 일은 나와 케이, 그리고 아빠의 기억 한 구석에 고이 접힌 채 웬만해서는 밖으로 나오지 않는 독백이다.
‘한 사람에 대한 진실들은 거의 대부분 가려져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이 멍청한 형사님아. 구두나 지갑을 봤다고 해서 그 사람의 전부를 안다고 착각하는 건 무슨 경우지?’
케이에 비하면 100배는 멍청한 나도 그런 건 안다. 하지만 나보다도 100배나 멍청한 형사는 그걸 몰랐다. 그러니까 그해 여름, 케이는 큰 눈을 굴리며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케이가 첫 소설을 완성하기 훨씬 더 전의 일이다. 심지어 나는 그때 제대로 글자를 읽을 수도 없었다. 우리는 둘 다 너무 어렸다. 그리고 그날 좋아하던 체리무늬 샌들 한 짝을 잡으려고 강물로 걸어 들어간 건 케이가 아니었다. 물속에서 이끼를 밟고 넘어진 것도 케이는 아니었다. 내가 허우적대며 급류 쪽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있을 때 나를 구하려 물에 뛰어든 건 케이가 아니었다. 나를 뭍으로 밀어올린 뒤 강가에 새파랗게 누워있던 건 케이가 아니다. 그것은 엄마였다. 엄마의 장례식에서 제일 크게 운 것도 물론 케이는 아니다. 제일 크게 울었음에도 용서받지 못한 것 역시 케이는 아니었다. 그날 이후 큰 소리로 우는 법을 잊어버린 건 케이가 아니다. 그것은 나였다. 그런데 어째서 형사는 케이가 강으로 걸어 들어갔으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쯤에서 미리 말해두겠다. 이 이야기는 추리소설이 아니다. 나에게 케이만큼만 글을 쓰는 재주가 있었다면 나는 이 글을 스릴 넘치는 추리물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글조차도 쓸 수 없는 인간이다. 노력? 왜 안했겠는가? 나라고 노력해보지 않은 게 아니다. 나는 형사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고, 나는 케이의 하나뿐인 동생이고, 그러므로 나는 누구보다 끈질기게 이 사건의 진실을 추적해나갈 의무가 있는 사람이다. 노력, 나도 해봤다. 하지만 내 고백은 이렇다. 그동안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현실에서 한 단어도,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케이가 돌아오지 않는 한 그 어떤 진실도 나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내가 형사도 당신도 그 누구도 아닌, 케이의 하나뿐인 동생이라는 게 바로 그 이유다. 그러므로 나의 얘기는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끝난 것과 같다. 이 글을 끝까지 읽지 말기 바란다. 아니, 당신은 처음부터 이 글을 읽지 말았어야 했다. 이것이 내 경고다. 글의 끝에서 당신은 결국 당신이 읽은 것이 아주 긴 제목에 불과하다는 것만을 깨달을 것이다. 정신 건강을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달려 나가서 잉글리쉬 리스닝 테이프나 하와이언 보사노바를 듣는 게 훨씬 더 유익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읽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다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당신은 이 미친 여자의 반복되는 헛소리를 끈질기게 들어줘야만 한다. 어쨌든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아는 것뿐이니까.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케이는 물을 싫어했다. 끔찍하게. 형사는 그걸 몰랐다. 아마 당신들도 몰랐을 것이다.
유능한 형사였다면 케이의 욕실에 욕조가 없다는 것을 수상하게 여겼어야 했다. 케이의 욕실은 욕조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작지 않다. 집의 크기에 비하면 차라리 크다고도 볼 수 있는 욕실이다. 그런데도 그 넓은 욕실에는 샤워기마저 보기 싫다는 듯 멀찍이 떨어져있다. 형사는 왜냐고 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묻지 않았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까지 이사를 나가 집에 혼자 남게 됐을 때, 케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욕조를 들어내는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케이는 언제나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은 후 몸에 물을 댔다. 더러운 년. 아무도 몰랐다. 내색은 안 했지만 케이는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그런 나쁜 습관으로도 무너뜨리지 못할 만큼 견고한 미모를 갖고 있다는 걸 말이다. 할 수만 있다면 세포라도 지워버릴 듯 몸을 씻는 쪽은 케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였고, 또한 우리 아빠였다. 아빠를 닮은 건 케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였고, 엄마를 닮은 것이 케이였다. 아니다. 케이는 부모의 유전자로 구성할 수 있는 모든 잘난 것들의 합이었고, 나는 정확히 그 반대였다. 그리고 물을 싫어하는 건 내가 아니라 케이였다. 형사는 그걸 몰랐다. 그건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도 케이에게서 늘 물 냄새가 났던 이유는, 나도 모른다.
“언니가 물로 죽으려고 했다면 강이 아니라 차라리 여기에 코를 박았을 걸요?”
나는 케이가 쓰던 머그잔을 들어 보이며 형사에게 말했다. 나에게 연락이 닿은 뒤 형사는 일단 케이의 집을 수색해야겠다고 했다.
‘무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케이의 생존에 대한 아무런 가능성도 믿지 않는 주제에, 누구를 위한 가능성을 찾으려고 케이의 삶을 수색하겠다는 거지? 어째서 당신은 케이의 집에 순순히 발을 들여놓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거야?’
나는 형사에게 그렇게 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묻지 않았고, 그는 발을 들였다. 형사의 무모한 계획을 순순히 실현시켜준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내가 아는 한, 나는 케이의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몇 년 전만 해도 그 번호를 아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케이와 나의 가련한 아버지를 말하는 거다. 케이의 집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빠의 집이었다. 물론 나와 엄마의 집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가족들이 하나씩 집주인으로써의 권리를 포기해버린 후로는 케이만이 혼자 남아 집을 지켰다.
그러고 보니 아빠도 어느덧 꽤 멀고 흐린 기억이 됐다. 오래 묵힌 절임음식 같은 기억, 가끔씩 꺼내어 맛을 본 뒤 다시 찬장 구석으로 밀어두는 기억, 내 유년의 아픈 조각, 죽을 때까지 딸들에게서 잃어버린 아내의 모습을 찾아 헤맸던 남자, 셀 수 없이 많은 암의 희생자 중 하나. 형사는 그걸 모른다. 당신도 모른다. 한동안 케이는 밤마다 아무도 모르게 숨죽여 울었었다. 나는 케이의 옆에 앉아 모든 걸 지켜봤다. 그 여름날 이후로 우는 능력을 거의 상실했기 때문에 나는 그저 케이를 따라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울거나 우는 척하며 우리가 어둠 속에 함께 앉아있었던 건 기도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우리가 바랐던 기적은 아무리 기다려도 올 줄 몰랐다. 칠 년이다. 아빠는 무려 칠 년 동안 그 끔찍한 병과 싸웠다. 때로는 이겼고 때로는 졌지만, 그 병과 싸운 모든 사람들처럼 결국은 죽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결국, 죽는다.
이제 아빠는 케이의 이야기들처럼 그를 아는 몇몇의 나약한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를 기억하는 나약함의 개체수도 줄어들어가고 있다. 아버지, 물가에 내놓은 아이들의 아버지, 두 딸들이 제 어미처럼 물에라도 휩쓸릴세라 밤에도 단꿈 하나 꾸지 못하던 내 가련한 아버지, 그런데 당신의 착한 딸은 지금 어디로 갔나요, 내 아버지?
강을 건너가지 못하는 질문들.
강을 건너오지 못하는 대답들.
그리고 여기 한 쌍의 머저리들이 강물의 기억을 넘어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다. 텅 빈 케이의 집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은 머저리 형사와 머저리 나였다.
“어이구, 이런 집은 또 처음이네? 언니분이 아주 그냥 깔끔한 성격이셨나 봅니다. 아니면…… 얼음공주였나?”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형사는 굽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 말도 틀리다고 볼 순 없었다. 그렇게 냉기 가득한 집은 나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곳이 나의 고향이었다. 그 집의 냉기는 나의 일부이기도 했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케이의 집은 내 낡은 기억 속의 모습과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내가 발을 들이지 않은 몇 년 동안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 듯했다. 지나칠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된 세간들, 온기가 결여된 새하얀 가구들, 새하얀 벽들, 높은 천장들, 분획되지 않은 공간들, 그리고 사철의 냉기와 유령들. 그 사이로 이 문을 열면 아직도 아빠가 나올 것 같고, 저 모서리를 돌면 아직도 엄마가 웃고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그래서 나는 더욱 더, 케이를 물가로 가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정말 이게 답니까? 카드도 없고, 통장도 없고, 달랑 이 박스 하나예요?”
형사는 내가 내민 박스를 1등에 당첨된 로또라도 되는 듯 황송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원래는 오래 전 아빠가 출장길에 사온 버터쿠키가 들어있던 커다란 알루미늄 박스다. 지금은 케이의 전 재산이 들어있는 금고였다.
“내가 알기로는 그래요.”
이불 홑청 속이나 서까래 위에 전 재산을 숨겨두는 사람도 있다. 그에 비하면 쿠키 박스는 별로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빨간 구두를 다시 본 순간 나는 케이가 이 박스를 버리지 않았을 거라고 예상했다. 쿠키를 다 먹은 날부터 케이는 박스에 용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내 생각이 맞는다면 케이는 그날 이후 평생 자신의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그곳에 모아온 게 틀림없었다. 형사에게는 믿기 힘든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케이라면, 그 낡은 구두를 여태 버리지 않은 여자라면 가능했다. 박스는 늘 있던 자리에 놓여있었다. 케이의 침대 밑 한 켠에. 숨긴다고 숨겼지만 누구나 알 만한 그 자리에. 달라진 건 없었다.
“생각해 봤는데요……. 그냥 여행을 간 걸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내가 물었을 때 형사는 여전히 박스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박스 속의 돈을 눈으로 헤아리며 마분지처럼 무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랬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재작년에 만료된 여권으로 멀리는 못 갔을 겁니다. 아, 놀랄 거 없어요. 뭐 그 정도는 우리도 조사할 줄 아니까. 밀항의 가능성은 제외하자구요, 우리.” 찌든 커피 비린내. 찌든 담배 비린내. 터진 점퍼 주머니. 여전히 박스를 향한 눈. 그때 나는 형사의 뺨을 한 대 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치지 않았다. “만약 여행을 갔다면 국내에 머무르고 있을 거라는 얘기죠, 내 말은. 살아있는 모습으로든, 죽어있는 모습으로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때 나는 그를 쳤어야 했다. 그러나 치지 못했다. 내 분노는 언제나 종잇장처럼 납작하고도 비겁했다. 그리고 저기 저 용감한 형사. 마분지 같은 목소리로 죽음을 말하는 마분지 같은 눈의 형사. 아무 말이나 멋대로 내뱉고도 한 대 얻어맞기는커녕 사과조차 하지 않는 형사. 그 대신 특권이라도 되는 양, 아무 허락도 없이 케이의 의자에 걸터앉는 형사. 고로 개자식. 그 의자만은 안 된다. 아빠가 직접 만들어준 나무의자였다. 그 의자는 누구도, 심지어는 나조차도 함부로 앉지 않는 케이만의 의자였다.
“유서가 안 나오는 경우에는요, 구두를 유서로 봐야 돼요. 그렇지 않습니까?”
뭐가 자꾸 그렇지 않냐는 건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구두는 구두고 유서는 유서다. 유서는 말이 있지만 구두는 말이 없질 않은가. 나는 잠시 형사가 13세기에서 온 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것도 13세기 뒷골목의 꼬마 불한당. 나는 저 꼬맹이의 엉덩이를 걷어찬 뒤 케이의 의자를 되찾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내가 그러기 전에 그가 먼저 움직였다. 그는 의자의 한쪽 다리를 축으로 거실바닥에 원을 그리며 뺑 돌았다.
“그나저나 언니분이 상당히 미인이셨네요.”
형사는 벽면에 걸린 케이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의 감탄은 당연하다는 듯이 과거형이었다. 그는 이미 오래 전 생명을 소실한 과거의 보물을 보는 자의 눈으로 케이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를테면 수천억년 된 호박 속의 모기 같은 것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말에는 대꾸하지 않아도 된다. 누구라도 케이의 사진을 보면 ‘진짜 미인이잖아!’라고 말할 줄 알았으며, ‘이게 정말 너네 언니라고? 하나도 안 닮았는데?’ 하며 고개를 갸우뚱할 줄도 알았다. 그런 말에는 그렇다거나 그렇지 않다거나 하는 대꾸가 별 소용없다는 것을 나는 거의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다. 형사도 내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다. 어쩌면 그는 나에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지 몰랐다. 형사는 이제 상당히 미인이셨던 케이의 의자에서 일어나 상당히 미인이셨던 케이의 추억을 멋대로 밟고 다니는 중이었다. 아빠가 직접 짠 하얀 옷장과, 그 안에 걸린 엄마의 오래된 원피스와, 그 옆에 걸린 내가 5년쯤 전에 선물한 머플러를 그는 멋대로 헤집어놓았다. 그러고도 케이의 자살을 증명해주거나 그 반대의 것을 증명해줄 아무런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렇게 수첩쪼가리 하나 안 나오기도 힘든데 말이죠. 어떻게 된 게 주변에 당신 언니를 안다는 사람이 없어요. 현장에 무슨 목격자가 있길 하나, CCTV에 잡힌 건 편의점이 끝이고 나 참. 이런 깜깜한 사건은 우리도 진짜 힘들다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 유능한 형사였으면 찾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찾아내지 못했다.
대신 뭔가를 찾아낸 것은 나였다. 형사보다 유능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적어도 그보다는 내가 케이를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형사의 눈에는 평범한 물건으로 보였을 것을 나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고, 뭔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형사에게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 침묵이 길어지자 형사는 황급히 몇 가지의 추억을 핀셋으로 집어 들기 시작했다. 그 추억들은 플라스틱 지퍼백으로 떠밀려 들어간 후 밀봉됐다. 증거물 1, 2, 3……. 우리의 추억에 번호가 매겨졌다. 그리고 곧장 형사의 터진 점퍼 주머니 속으로 쑤셔 박혔다. 어쩌면, 어쩌면 형사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 번호들이 내가 원하는 바를 증명해주지는 못하리란 걸 말이다. 내가 원하는 건 그 일련의 숫자들이 그저 하룻밤의 악몽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어제의 삶이 이어지기를 나는 바란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사라진 사람들이 되돌아오길 바라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훼손된 추억들이 복원되기를 나는 바란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저 말랑말랑한 플라스틱 지퍼백 안의 산소보다도 희박한 것이었다. 그 안에서는 어떠한 생명체도 오래 견뎌낼 수가 없다.
수집할 추억이 다 떨어지자 형사는 할 일을 잃고 말았다. 몇 개의 지퍼백으로 주머니를 부풀린 후, 그는 찌든 악취를 풍기며 잠시 내 앞에 서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나기라도 한 듯 말했다. 일단은 돌아가 봐야겠다고. 일단은 케이의 집을 수색해야겠다고 당당히 말하던 그 형사께서, 고작 몇 시간도 못 견디시고는 이렇게 나약하게 등을 보인다. 그러세요. 그러도록 하세요.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시길.
3。
내가 찾아낸 것은 한 장의 CD였다. 함께 살아본 사람만이 아는 규칙이란 게 있는 법이다. 케이는 그런 규칙을 아주 많이 가진 사람이었고, 그 CD는 케이의 규칙에 어긋나는 장소에 꽂혀있었다. 솜씨 좋은 추리작가의 글 속에 등장하는 명탐정이었다면 그 CD를 통해 지금쯤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냈을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사건을 역추적 했을 것이고, 일이 잘못된 첫 지점을 정확히 짚어냈을 것이며, 바로 그 지점에 박힌 탄환을 꺼낸 뒤 봉합해두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상처는 흉터도 없이 아물고, 모든 잘못된 기억들은 쌓이기도 전에 지워졌겠지.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나는 솜씨 있는 사람의 글 속에 등장한 적이 없다. 나는 형편없는 독백 속의 형편없는 탐정이었다. 또한 형편없는 탐정이기 이전에 형편없는 동생이기도 했다.
형사의 차가 골목을 다 벗어난 뒤로도 나는 꼬박 10분을 더 기다렸다. 그런 다음 케이의 노트북을 열고 CD를 밀어 넣었다. 700MB짜리 CD-R. CD의 앞면에는 케이의 필체로 <my everything>이라는 제목이 적혀있었다. 내가 아는 한, 케이는 ‘모든 것’이라는 단어를 쉽게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가 썼다. 다시 말해 그 CD는 케이의 규칙에 어긋나는 장소에 꽂혀있었던 데다 케이의 규칙에 어긋나는 이름까지 달고 있었다. 아무리 멍청한 탐정이라도 그쯤이면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챈다. 결정적인 증거가 손에 들어왔음을 확신하게 된다. 나 또한 그랬다. 이제 곧 내 손이 종을 울리고 내 입이 빙고를 외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게 승리의 도취감보다 먼저 찾아온 건 의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700MB짜리가 누군가의, 그것도 케이 같은 사람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CD가 실행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물론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얘기는 달라진다. 일반적인 CD 한 장에 거는 기대치를 기준으로 한다면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이전보다 조금 더 쓸모없는 사람이 됐다고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는 얘기다. CD의 실제 내용물은 겨우 50KB밖에 안 됐다. 파일명은 ‘01’. 저장된 날짜는 한 달 전. 50KB에 비하면 광활한 평야 같은 공간이 단 하나의 파일 주위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평야 위에 덩그러니 누워있는 것은 한 남자의 사진이었다.
케이의 신발 굽은 늘 비스듬히 닳았다. 그건 케이가 발레리나처럼 바깥세상을 향해 발을 뻗고 걷는 여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그녀의 마음은 밖으로 향한 적이 없다. 케이는 일생의 대부분을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데 보냈다.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그 잘난 얼굴을 가지고도 서른하나가 될 때까지 흔하디흔한 친구 하나 내게 보여준 적 없는 여자가 케이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고? 있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의 동생이다. 나는 지금 케이의 심장이 차갑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아는 한, 케이의 심장은 항상 뜨거웠다. 적어도 당신이나 나만큼은. 하지만 그 심장에서 품어져 나오는 피는 오로지 그녀 자신만을 위해 돌았다. 그런 얘기다. 우정? 그런 건 어린이를 위한 교양서 시리즈 속에서나 찾을 일이고. 사랑? 그런 건 재고로 남은 발렌타인 초콜릿더미 속에서나 찾을 일이다. 케이는 그런 것들로부터 멀찍이 분리되어 있었다. 나는 케이가 다른 사람과 네 문장 이상 대화하는 것도 들어보지 못했다. 나 같은 열성 유전자의 조합조차도 가짜 눈물이나마 몇 명의 남자를 위해 흘려봤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남자를 울렸다. 그러나 케이는 내 앞에서 자기 이외의 사람 때문에 운 적이 없다. 병든 아빠를 제외하고는.
실제로 발레를 했더라도 케이는 잘 했을 것이다. 좋은 유전자에서 기인한 선이 예쁜 몸을 갖고 있었고, 하려고만 한다면 뭘 해도 사실은 다 잘했다. 우물쭈물 거리다 다된 일마저 그르치는 나와는 전혀 다른 부류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케이가 아무것도 하려고 들지를 않았다는 거다. 내가 기억하는 한, 사춘기 이후로 케이의 열정은 자신이 살아있는지를 확인하는 사람처럼 자주 거울을 보거나,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데에만 사용됐다. 그러므로 만약 CD 안에 들어있던 게 케이의 사진이었거나, 하다못해 케이의 이름 석자였다 하더라도 나는 이해했을 것이다. 케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케이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마땅히 케이 자신이어야 했다. 내가 아는 한, 케이는 세상에서 가장 자기 자신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그녀의 이름 석 자가 그녀 자신의 자리를 채우기도 했다. 나와는 한 글자밖에 다르지 않은 이름 그 세 글자에도 세상 모든 것의 가치보다 더 소중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 언니라는 호칭 대신 이름으로 자기를 불러달라고 한 것도 케이였다. 나는 언니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버르장머리 없는 동생이 아니라, 그녀의 유일한 친구인 것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러 왔다. 케이, 케이, 케이……. 하지만 CD 안에 누운 사진을 들여다보던 그때, 나는 내가 과연 그 이름을 알았던 적이 있긴 했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이게 다인가? 이것이 남아있는 모든 것인가? 텅 빈 모니터 안을 헤매는 텅 빈 커서, 0바이트, 0바이트. 정말로 그게 다였다. 그것이 남아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녀의 하드디스크는 완전히 포맷되어 있었다. 휴지쪼가리 하나 남기지 않고 케이는 전부 다 지워버렸다. 내가 아는 케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케이는 자신의 흔적을 세상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렇다면 진짜 케이는, 내가 아는 케이는 어디로 갔단 말이지?
이쯤에서 다시 또 말해두겠다. 오늘 나는 감히 재능 있는 추리소설가가 되기를 소망한다. 오늘 이 시간이 소설의 마지막 장이 아닌, 첫 장이기를 나는 원한다. 내가 써놓은 글 안에 치밀한 복선들이 행간을 비집고 숨어있기를 나는 바란다. 모든 게 내가 아는 그대로이고, 내가 아는 것들이 하나의 완전한 세계이기를. 그리고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 거짓말처럼 케이가 돌아오거나, 실은 이 실종사건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며, 실은 아주 먼 타인의 사정일 뿐이며, 실은 어떤 꾸며낸 이야기의 극적 구성을 위한 미끼일 뿐이며, 실은 지구를 구원할 거대한 계획의 일부이며, 그래서 사실 케이는 지금 따뜻하고 안전한 섬에 잠복한 채 진짜 삶다운 삶을 누리고 있고 언젠가는 천국처럼 달콤한 치유의 선물을 가지고 돌아와 나에게……
그러나,
그러나 벌써 한 계절이 다 지나간다. 나는 겨우내 사진 한 장과 이 책을 붙들고 있었다. 어떤 새로운 문장도 더 나타나지 않았다. 0바이트, 0바이트, 텅 빈 평야.
맞다. 나는 조금 전 케이의 피가 그녀 자신만을 위해 돌고 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형편없는 동생의 형편없이 편협한 오해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모른다. 나는 그녀의 피가 흘렀던 비밀스러운 방향에 대해서는 결코 알지 못했으며 알 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한 계절 동안 깨달은 것의 전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너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성적인 선택이 아닌 줄 알면서도 엉뚱한 곳에서 기적을 찾았다. 예컨대 삼주 전에는 시험 삼아 케이의 티셔츠 한 개를 갈기갈기 찢어버려 봤다. 그보다 하루 전에는 케이의 화장품들을 집어던져보기도 했다. 그보다 30초 전에는 케이의 이름 앞에 내가 아는 모든 욕을 덧붙여 불러봤다. 그보다 한 시간 뒤에는 좀 더 많은 욕을 배워두지 못한 걸 후회하면서 내 머리를 열 번쯤 세게 때렸다. 그런 다음 머리카락을 한 움큼씩 말아 쥔 뒤 가위로 잘라버렸다. 쩔꺽쩔꺽 은색 날이 울어댈 때마다 머리카락은 헛된 미련들처럼 흰 마룻바닥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었다. 그런 행동은 아무것도 이루어주지 못했고 아무것도 증명해주지 못했다. 다만 목뒤가 서늘해졌을 뿐이다.
형사는 지금도 주기적으로 전화를 걸어 나에게 진척상황을 묻는다. 하지만 그건 내가 물어야 하는 질문 아닌가? 모두들 아웃이다. 작가는 지독하게 무능한 걸로 판명되었고, 탐정은 해고되었으며, 형편없는 동생은 이 사건에서 영원히 제외되었다. 그런 느낌이다.
생각해보면 이 땅의 모든 겨울은 언제나 다른 계절보다 길었지. 그런데도 올겨울이 이토록 예외 없이 춥고 길다는 것에 나는 몸서리를 친다. 그해 여름 보라색 입술로 강물에서 구조됐을 때, 내 몸 어느 구석인가에 깊고 어두운 추위가 숨어들어왔다. 그날 이후 나에게는 몸을 떠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케이의 스웨터를 입고 케이의 이불을 뒤집어쓴 채 케이의 책상에 앉아 케이의 머그잔에 든 커피를 마시며 케이의 노트북을 열고 케이의 everything을 한 계절이 다 지날 때까지 쏘아보았다. 주인 몰래 영혼을 보는 병든 개처럼 덜덜 떨면서. 그렇지만 그 50KB의 조악한 스캔본 얼굴에서는 무엇도 더 나타나지 않았다.
계절의 끝은 너무나도 멀다. 시작된 날은 분명한데 끝나는 날은 지워져있다. 어느새 삼월이지만 사람들의 옷은 여전히 두껍고, 내 옷은 그들보다 최소한 두 배는 더 두껍다. 아무도 모른다. 이번 달만 해도 내 몸에서 0.7㎏의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그러니까 어제와 오늘 이틀 새에. 지난달에는 자그마치 6㎏이었다. 숙면도 식욕도 이제 나에게는 먼 얘기들이다. 방법이 없었다. 나는 옷을 덧입었다. 빈 공간을 채워주기에 두꺼운 옷만큼 좋은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두 개의 티셔츠, 두 개의 스웨터, 두 개의 코트, 그리고 0바이트, 0바이트.
“자동응답기에는 당신의 메시지가 일곱 개, 서점에서 온 메시지가 한 개(주문한 책이 들어왔다네요), 그리고 기막힌 알짜배기 땅이 있다나 뭐라나 하는, 스팸으로 생각되는 메시지가 또 한 개. 그런데…… 당신은 언니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더군요. 왜죠?”
뉴스에서는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 들판을 뛰어오르는 절기가 다가온다며, 오늘 저녁쯤 첫봄비가 온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누구에게 반가운 소식인지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케이가 아니었다. 나는 케이와 달랐다. 나는 양 발을 11자로 두고 똑바로 걸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내 마음은 밖으로도 안으로도 향하지 못했다. 언제나 평행선 위를 위태롭게 걷는 여자. 그게 나였다. 그게 나다. 케이였다면, 내가 케이였다면 오늘쯤은 봄이 시작되는 볕의 변화를 감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케이가 아니다. 나는 한 번도 케이인 적이 없었다.
“항상 이런 식으로 연락했습니까? 언니분 명의로 된 핸드폰이 없더군요. 먼저 연락을 하는 쪽은 당신이었습니까? 당신의 메시지를 들으면 언니 쪽에서 곧바로 전화를 걸어오나요? 사이는 좋은 편이었습니까?”
형사는 끊임없이 묻고 빠르게 수첩으로 옮겨 적는다. 내가 전화하면 케이의 녹음된 음성이 응답하는 것처럼 그의 반응은 기계적이었다. 나는 기계에 일일이 대꾸해줄 만큼 관대한 사람이 아니다. 형사는 전화기 속의 작은 테이프를 꺼내 플라스틱 봉투에 집어넣었다. 증거물 9. 이제 일곱 개의 내 목소리는 친절한 서점주인 하나, 불친절한 알짜배기 스팸 하나와 함께 봉투 속에 밀봉된 채 언제까지고 갇혀있게 될 것이다. 사이가 좋은 편이었냐고 내게 물었는가? 그런 건 모른다. 어디에 기준을 둬야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족을 다른 누군가의 가족과 비교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피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케이와 나의 관계에 대해 굳이 알아야겠다면, 나는 이렇게는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몇 번이나 같은 기적을 바라왔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유대감이 우리에게는 있었다고. 케이와 내가 공유한 것은 몇 번이나 바라왔지만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종류의 기적들이었다. 그리고 그 상실감 속에서 우리는 나란히 자라났다. 그 상실감 속에서 우리는 함께 설익은 밥알을 씹어 삼켰고, 그 상실감 속에서 우리는 함께 눈물을 숨겼으며, 그 상실감 속에서 남들은 모르는, 오로지 자매들만이 아는 놀이를 하며 밤을 기다렸다. 지금도 잠들기 전이면 나는 어린 시절의 케이를 어둠속으로 불러내 단둘이서 그 놀이를 하곤 한다. 그 게임에는 아무도 끼어들지 못한다. 아무도.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은 건 언제였죠?”
“가을이요. 두 달 전쯤.”
“그게 일반적인 간격입니까?”
“일반적이라고 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우린 반년 동안 만나지 않은 적도 있어요. 하지만 반년 동안 매일 만난 적도 있죠. 형사님은 형제가 없으신가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찌든 커피 비린내. 찌든 담배 비린내. 터진 점퍼 주머니.
“두 달 전이라, 두 달.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어떤 낌새 같은 거 없었어요? 평소와는 다른 그 무엇?”
케이는 그날 두 잔의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국을 담아도 될 만큼 커다란 머그잔으로. 평소와 다른 건 하나도 없었다. 에스프레소는 케이의 구멍 난 위장에 좋지 않았지만 그 머그잔으로 두 잔까지가 그녀가 타협할 수 있는 한계점이었다. 케이는 살면서 아주 소수의 몇 가지 것들에만 중독되었는데 첫 번째는 물론 자기 자신이었고, 두 번째는 쓰는 행위, 세 번째는 석유원액처럼 진한 커피였다. 어쩌면 CD 속의 남자도 케이가 중독된 몇 가지 중 하나였는지 모른다. 아니면…… 아니면 그는 100%의 우연으로 만들어진 함정일 수도 있다. 케이에게는 우연히 빈 CD에 무의미한 제목을 적어 넣은 잘못밖에는 없다. 남자의 사진이 우연히 그 CD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것이다. 남자의 사진이 잘못이었다. 케이가 아니었다. 사실 케이는 그 CD 안에 100편의 소설들을 넣으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 쪽이 말이 된다. 어때, 케이? 내 말이 맞지? 그건 순전히 우연이었지? 실수였지? 그렇지? 그러나 그렇다 해도, 이제 그 실수는 내가 가진 유일한 단서다. 고작 50KB의 희망.
유능한 형사였다면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는 케이의 지갑 속에 어째서 핸드폰 수리기사의 명함이 들어있는지 의아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의아해하지 않았다. 나는 의아했다. 왜냐하면 명함에 수리기사의 얼굴이 박혀있었던 걸 내가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그 얼굴과 CD 속의 얼굴이 동일한 이목구비를 소유하고 있다는 걸 내가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몇 주의 시간이 걸렸다. 깨닫고 나서야 ‘아, 그때 그 얼굴! 이 얼굴이랑 똑같은 얼굴이었잖아?’ 무릎을 치며 자신의 낮은 지능과 협소한 기억력을 탓하게 되는 그런 것. 케이보다 100배는 멍청한 나도 아는 그런 것. 그런데 형사는 그걸 몰랐다. 지금쯤 그 명함 속의 얼굴은 플라스틱 지퍼백에 담겨 케이양 실종사건과 관련된 저 불충분한 증거물들과 함께 경찰서 어느 구석에선가 썩어 들어가고 있겠지. 우리가 마지막 날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물었는가? 나는 기억해낼 수가 없다. 케이가 입고 있던 오래 된 스웨터의 색을 기억하지만, 그 스웨터의 나달거리는 소매 단을 기억하지만, 그 스웨터의 올 풀린 구멍을 기억하지만, 그녀가 내게 했던 말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케이의 말들은 그녀의 소설 주인공처럼 입에서 나오자마자 내가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버리곤 했었다. 케이의 말들은 늘 그랬다. 쉽게 잡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내가 잡으려고 손을 뻗었을 때는 이미 그녀의 말들이 스웨터의 구멍 사이로 술술 빠져나가버린 뒤였다. 내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 물었는가?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다. 그날 케이의 얼굴이 하룻밤 새에 늙어버린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보였다는 것을 나는 기억하지 않는다. 그날 케이의 눈이 내가 모르는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기억하지 않는다. 그날 케이가 새로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한 것을 나는 기억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내가 기억하는 한, 케이의 얼굴은 언제나 늙은 아이의 얼굴이었고, 케이의 꿈은 언제나 내가 모르는 영역에 속해 있었으니까. 그리고 케이는 언제나, 언제나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소설을 쓰고 있었다. 내 인생에는 구멍이 많다. 내게 무엇을 기억하고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구멍 주위로 너풀대는 연약한 털실들만을 기억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 구멍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므로 나는 말할 수 없다. 그날 케이는 그냥 케이였다. 평생 동안 내가 알았던,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그냥 케이였다. 나는 다시 한 번 이 계절이 언제 끝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뉴스는 온 세상을 적셔줄 반가운 봄비를 얘기한다. 그렇지만 내 몸은 여전히 떨고 있다.
4。
처음 형사의 전화를 받은 날 이후로 많은 일들이 어그러졌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많은 일들이 바로잡힌 것일 수도 있었다. 내가 내 직장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 더구나 케이의 거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는 것을 상기하면 사태는 좀 더 명확해진다. 특히 나는 거실 끝에 놓인 이 오래된 등나무의자를 좋아했었다. 어릴 적, 엄마가 하얗게 햇볕을 받으며 책을 읽을 때면 나와 내 강아지가 기어 올라가 낮잠을 자곤 했던 이 의자.
그렇다. 나는 나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 나에게는 할 일이 있다.
내 사표가 수리되는데 걸린 시간은 열두 시간 남짓이었다. 뭐든 빨리 빨리 처리돼야하는 이 나라에서 간단한 서류 처리 하나에 열두 시간씩이나 걸렸다고 심통을 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7년 6개월을 뇌 없는 소처럼 일한 것에 비하면 그다지 긴 시간은 아니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누구도 진심을 가지고 나를 붙잡지 않았다. 더러는 등 뒤에서 입을 가리고 웃기도 했으리라. 그게 다였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직원 한 둘 사라진다고 눈 껌뻑할 만큼 정다운 곳이 아니었다. 빈자리는 즉각 채워진다. 그 자리를 원하는 사람이 온 도시에 널려있다는 걸 회사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 회사를 좋아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새벽의 수영강습, 저녁시간을 쪼갠 일어강좌, 새로 생긴 파스타집 순례 같은 건 일단 끊고 나니 내 인생의 아주 작은 부분도 차지하지 않고 말끔히 지워졌다. 집도 마찬가지였다. 3년 넘게 산 아파트였지만 돌아선지 30분도 못 돼 연필 끝에 달린 지우개로도 지울 수 있을 만큼 희미해져버렸다. 집주인도 이웃들도 석판화처럼 납작하고 차가운 인사만을 내게 보냈다. 나 또한 그 정도의 인사만을 남기고 돌아섰다. 지금쯤이면 내가 살던 아파트에는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나와 달리, 벌써부터 집주인과도 이웃들과도 좋은 친구가 됐을지 모른다.
괜찮다.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이다. 나는 오늘 케이의 거실에서 편안하고, 그걸로 됐다. 케이의 것이자 나의 것, 내가 늘 도망쳐야 했던 고향에서.
등나무의자에 기대 앉아 나는 생각한다. 왜 도망쳐야 했는지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운이 좋다고. 도망쳐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이유를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은 더 운이 좋다. 나쁜 과거를 지울 수 있는 축복은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게 아니니까. 그런 면에서는 이러나저러나 나도 행운아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망쳐 나온 순간 나는 모든 이유들 위에 종이 한 장을 덮었다. 그리고 내가 보고 싶을 때만 그 종이를 들춰본다. 나는 확실히 운이 좋은 사람이다.
이제 나는 그 종이의 끝을 슬쩍 젖혀 당신에게 한 조각을 보여준다. 그 조각 위에는 십대의 내가 서있다. 그때 나는 누구보다도 머저리 같았었고, 내가 쓸 수 있는 온 힘을 다해 이 집에서 도망치려고 했었다. 그리고 매번 실패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모든 성공하지 못한 시도 끝에 다시 돌아왔을 때마다 어김없이 케이와 아빠가 이 거실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끝내 내가 탈출에 성공한 건 아빠가 돌아가신 후였다. 그 무렵엔 이미 도망치고자하는 욕망도, 내 가여운 십대도 나약한 촛불처럼 사그라져버린 뒤였다.
한때는 케이와 나와 아빠가 함께 아침마당이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같은 TV 프로그램에 나가 그 미친 개 같던 시절을 어떻게 견뎌냈는지에 대한 얘기들을 화기애애한 미소와 함께 늘어놓는 몽상에 빠져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내가 집을 떠나있던 열 번의 무자비한 겨울은 그런 몽상들을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기적으로 바꿔놓았다.
자, 그렇지만 기적은 기적이고 과거는 과거다. 그리고 오늘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더는 꾸물거릴 시간이 없는 것이다.
형사는 전화를 걸 때마다 말했었다. 뭔가를 더 발견해 내면 자기한테 꼭 말해야 한다고.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넌짓 덧붙이는 말버릇. 하지만 그 말이 전화의 목적이라는 걸 나는 늘 알고 있었다. ‘혹시 뭐 찾아낸 거 없어요? 혹시 더 알아낸 거 없어요?’ 바보 같은 새끼. ‘없어요, 아무것도.’ 하고 매번 대답하지만, 나는 사실 이 집에서 거의 매일 매시간 뭔가를 발견해낸다. 지나치게 단조로워 보이는 이 집은 알고 보면 놀라운 창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보물 같거나 악마 같은 추억들이 뚝뚝 떨어져 나온다. 어떻게 이것들을 잊고 살았나 싶을 정도로 선명하게. 그것은 함께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절대로 알지 못할 흔적들이다. 그리고 나는 절대로 형사가 그것들을 훼손하도록 놔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오늘 나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혼자 일을 해치울 것이다. 나에게는 오늘, 할 일이 있다.
군인들은 전장에 나가기 전 무장을 한다. 나는 케이의 옷장을 열고 두꺼운 옷들을 꺼내 겹쳐 입었다. 그리고 가장 겉에 입은 코트 주머니에, 내 손이 가장 잘 닿을 수 있는 그 위치에, 접을 수 있게 된 작은 칼을 집어넣었다. 옷장 밑의 먼지 속에서 찾아낸 칼이었다. 그것은 케이의 것일 수도 있고 아빠의 것일 수도 있었다. 혹은 다른 모든 사람의 칼일 수도 있었다. 그 칼에는 초라한 사이즈에 걸맞지 않게 <sword of vengeance>라는 거창하고도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이름이 고쓰풍의 필기체로 음각돼있었다.
어째서 칼이냐고 묻는 건가, 당신? 그렇다면 나도 할 말이 있다. 나도 안 해본 게 아니라 이거다. 칼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나도 다 해봤다. 케이가 갈만한 곳은 진작에 다 가봤고, 케이를 알 만한 사람들도 진작에 모두 찾아봤다. 심지어는 일찌감치 우리의 삶에서 떨어져나간 친척들에게까지 전화를 걸었었다. 낡아빠진 안부를 묻는 척 하며 나는 케이의 이름을 슬쩍 흘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내 기억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케이는 이미 삭제되어버린 것 같았다. 어디에서도 케이의 체취를 느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열 번의 겨울을 지나보내는 동안 케이와 나 사이의 틈이 너무 벌어져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케이는 너무 자기 자신인 사람이었다. 케이는 너무 오래 혼자였다.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깨끗하게 정돈된 공간 속에서, 그녀와 함께 했던 것은 오로지 등나무껍질처럼 빳빳한 그녀 자신의 이름과 냉기뿐이었다. 바로 그 점이 이 실종사건을 칼끝으로 몰아넣었다. ‘케이? 케이가 누구였더라?’로 시작되는 수많은 무심한 말들 안에서 나는 케이의 현재를 알려줄 글자 하나, 숫자 하나 찾아내지 못했다. 그 CD 밖에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 50KB의 사진 한 장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칼을 들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에게는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겨우내 별렀던 일을 마침내 실행에 옮긴 건 오늘 아침이었다. 그동안은 내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었고, 사실은 상황도 내 마음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모두가 나를 돕고 있다. 대지는 단단하고, 바람의 세기는 적당하며, 햇볕은 완벽하다. 나는 먼저 물을 끓였다. 거기까지는 수십 번도 더 시도해 본 과정이다. 그런 뒤 케이의 머그잔에 끓는 물을 가득 부었다. 거기까지도 수십 번. 그 다음 단계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처음이다. 나는 아직도 끓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잔 안의 물속으로 핸드폰을 빠뜨렸다.
1……
2……
3……
이런 기회나 되어야 우리는 가까스로 생각이란 걸 해본다. 그제야 우리가 이 작은 기계 안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우겨넣고 있는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 친구, 가족, 사랑, 미래, 고향, 반가움, 미련, 허황된 꿈, 집합된 기술, 내 나라의 자부심, 탑 모델의 미소, 거짓말, 갈증, 실패한 혁명, 경쟁, 차별, 허영, 혈투, 사기, 질투, 거품, 전쟁, 할부금, 연체료, 이자, 이자, 불어나는 이자, 어쨌거나, 어쨌거나 유명한 이름을 소유했다는 으쓱함. 그러나 그 값비싼 이름도 뜨거운 물속에서는 별 수 없었다. 단지 몇 초를 기다렸을 뿐인데 튼튼하기로 소문난 내 핸드폰은 맥을 못 추고 익사해버렸다. 케이는 말했었지. “난 말이야. 물속에 몸을 담그는 게 무서워. 그래서 욕조가 필요하지 않은 거야.”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 어딘가에는 욕조에 누워 자신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여자가 있을 것이다. 겨우내 별렀던 일을 이제야 해치운다는 듯이, 속 시원하다는 눈빛으로 따뜻한 물이 빨갛게 물들어가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겠지. 그녀는 몇 시간 후 시체로 발견되거나, 혹은 그 이전에 발견되어 응급실로 실려 가고, 수혈을 받고, 산소를 공급받고, 그리고 스스로 지옥이라 명명한 삶을 다시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커다란 머그잔에 코를 처박고 죽어가는 사람도 한 둘쯤은 있을지 모른다. 매일 자신이 두 번씩 에스프레소를 들이키던 바로 그 잔에. 액정이 깜빡거리는 걸 보면서 미처 백업해놓지 못한 전화번호들과 사진 몇 장이 아직 그 안에 들어있다는 게 기억났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CD 한 장 안에 남겨두고 사라져버린 여자에 비하면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대기업의 서비스센터는 서울시내에 최소한 구마다 하나씩은 있다. 내가 서있는 케이의 거실에서는 20분 거리 내에 3개의 서비스센터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가야 하는 곳은 벌써 정해져있다. 그곳의 위치를 여러 번 검색해봤었다. 여기서 가려면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한번 갈아탄 뒤 또 버스를 타고 나서도 300미터나 더 걸어가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 서울시내에 있는 몇 안 되는 교통의 사각지대였다.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 한 시간이 아니라 일 년이 걸린다 해도 가야 한다. 가서 그 50KB의 얼굴을 찾아내야만 한다. 찾아내서 그 얼굴 앞에 잘 벼려진 sword of vengeance를 들이밀어야만 한다. 어떤가? 내 실패들에 대해 듣고 싶은가, 당신? 오로지 그 얼굴에 칼을 들이밀겠다는 일념으로 그동안 내가 어떤 참혹한 실패들을 겪었는지 듣고 싶은가? 그랬다. 겨울 동안 나는 케이의 집을 중심으로 자그마치 열다섯 개가 넘는 서비스센터를 찾아갔었다. 그리고 모두 실패했다. 내가 원하는 얼굴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네 번째, 아홉 번째, 열여섯 번째의 허탕. 헛걸음치며 되돌아 나올 때마다 나는 내 기억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누구의 머릿속에나 잘못된 장소에 놓인 기억들은 있다. 내 경우에는 너무 많은 기억들이 잘못된 장소에 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잘못 본 걸 수도 있었다. 겨울의 첫날, 형사가 케이의 지갑을 보여주며 아는 지갑이냐고 물었을 때, 그 지갑속의 내용물들을 하나하나 꺼내보였을 때, 그래서 내가 핸드폰 수리기사의 명함을 스치듯 보았을 때, 그때 나는 충분히 신중했던 걸까? 그 얼굴이 케이의 CD 안에 들어있는 얼굴과 동일하다는 것은 단지 내 기억의 오류 아니었을까? 애초에 이 계획은 첫 조각부터 잘못 끼워 맞춘 퍼즐 같은 것 아니었을까? 나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의심했고, 의심들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지나치게 의심을 많이 한 날에는 영락없이 슬픈 꿈을 꿨다. 꿈속에서 케이와 나는 아주 어렸다. 우리는 강가에서 시체처럼 파란 낯빛을 하고 우리만이 아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물이 불어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젖는다. 온 세상도 젖는다. 숨을 쉴 수가 없다……. 꿈에서 깨어나 보면 내 몸은 젖은 걸레가 되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때마다 오래도록 가슴 밑바닥에 눌러두었던 기도가 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신의 음성은, 그러나 나에게서 너무 멀었고 내 영혼의 귀는 너무 딱딱했다. 이렇게 이어진 한 계절의 허탕, 한 계절의 실패……. 그러다 어떤 깨달음이 온 것은 일주일 전이다. 깨닫고 나자 내 자신의 어리석음이 새삼스럽게 크게 느껴졌다. 왜 이제야 기억난 걸까? 왜 이제야 깨달은 걸까? 케이가 아는 동네라면 그곳뿐이지 않은가? 그 동네에 2020이 있었다. 케이가 일했던 그 미래의 카페 말이다.
한번은 형사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안 우네요?”
“울어야 돼요?”
“꼭 그래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뭐 보통은 울고들 그러죠.”
“난 안 울어요. 다 큰 뒤에는 우는 법을 잊어버렸거든요.”
“다 컸다? 흐음. 스스로 다 컸다고 생각하십니까?”
굳이 대답할 필요 없는 질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잘 웃고 잘 울고 말없이 참는 건 내가 아니었다. 그것은 케이였다. 나는 울지 않고 웃지 않고 큰 소리로 말하고 화를 내는 쪽이었다. 그러나 형사에게는 화를 내고 싶지도,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내 생각엔 말입니다. 당신도 꽤 이상하다 이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꼭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단 말이죠. 혹시 당신, 당신 언니를 숨겨두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형사는 입술 속으로 키득댔다. 그는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농담이라면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혹시 형사님이 케이를 숨기신 거 아닌가요? 형사님의 플라스틱 지퍼백에 케이를 감금시켜 놓은 건 아닌가요? 형사님은 그저 나와 케이를 괴롭히고 놀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 아닌가요?’ 이 말도 안 되는 농담이 진담일 가능성을, 한동안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도 있다. 차라리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차라리 케이가 플라스틱 봉투 속에 숨어 있다가 돌아오는 거라면……. 지금도 케이양 실종사건의 첫 번째 용의자는 나다. 더럽게 재미없는 농담 같은 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형사는 웃는 얼굴로 나의 침착함을 줄곧 의심해왔다. ‘울며 보채지 않는 동생’이라고 수첩에 적은 뒤 물음표를 잔뜩 그려 넣었다. 그딴 글자들로 나를 협박할 심산이었겠지. 그렇더라도 나는 형사에게 협조할 마음이 없었다. 내가 우는 걸 포기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카페 2020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지 않다. 나와 케이만 아는 동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희망을 갖지는 말라구요, 아가씨. 이미 결론이 난 사건이에요. 그렇잖아요. 가능성이란 게 너무 희박하다 이 말입니다. 이런 일들은 대개 끝이 안 좋거든.”
그렇겠지. 당신이 믿는 것은 안 좋은 끝이겠지.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필연적으로 안 좋은 끝을 맞이하는 거야. 하지만 내가 믿는 건 그런 끝이 아니었다.
“잘 들어요, 아가씨. 뚜껑을 열고 말고는 당신 마음이라 이겁니다. 하지만 열지 않는다고 그 안에 든 게 바뀌는 건 아니죠. 똥이 든 상자에는 계속 똥이 들어있고 황금이 든 상자에는 계속 황금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도 안다. 내가 믿는 구석이 별 볼일 없는 CD 한 장일 뿐이라는 것을 나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내 50KB짜리 희망이 우스꽝스럽다고 함부로 비웃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바보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안 좋을 끝만을 바라보는 염세주의자는 아니다. 여기 내가 당신을 위해 준비한 고전적인 문장이 하나 있다. 뚜껑은, 열어 봐야 안다는 것.
그리고 내 뚜껑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케이가 돌아오기 전에는.
자, 보라. 색이 좀 바래긴 했지만, 케이의 머그잔에는 아직 카페 2020의 로고가 새겨져있다. 나에게도 똑같은 잔이 하나 있다. 케이가 그 카페에서 일을 시작하던 첫날 나에게 선물한 것이다. 케이가 안다면 나 역시 안다. 당신은 모르지만 나는 안다. 그 동네는 케이를 만나기 위해 나도 몇 번이나 가봤던 동네였다.
인터넷 검색창에 서비스센터의 주소를 치자 카페 2020도 동시에 지도에 나타났다. 지금은 없는 카페인데도 지도 속에서는 간판을 선명하게 빛내며 서있었다. 서비스센터의 간판은 카페보다도 훨씬 컸고, 빨간색 기호로 깜빡이고 있었다. 두 건물은 겨우 건널목 한 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위치였다. 케이는 2020에서 꽤 오랫동안 일했다. 그러니 단골도 제법 생길만 했다. 그 단골이 마주보는 건물의 서비스센터 직원이라 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었다. 케이가 그 먼 동네의 카페를 직장으로 선택했을 때, 나는 왜 그렇게 멀리까지 가야만 하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케이에게 매일 편도 한 시간분의 여행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했었다. 정말로 그랬는지도 모른다. 케이에게는 단지 여행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행…….
여행이…….
됐다. 더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누구도 모르는 믿는 구석이 내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이고, 누구도 모르는 가능성이 내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이며, 내가 오늘 그 가능성을 실현시키리라는 사실이다. 나는 등나무의자를 삐걱이며 겨울 아침의 빛을 두 손에 저장한다. 나에겐 너무 작은 빨간 스웨이드 구두가 발끝에서 덜렁이다 바닥으로 떨어진다. 투둑. 툭. 툭. 투둑. ‘어릴 땐 가끔 이 집에서 유령을 보기도 했었지. 그건 엄마의 모습이거나, 아기 때 죽은 강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어. 케이, 혹시 언니도 그 유령들을 봤어? 혹시 그 유령들하고 내내 함께 살았던 거야? 그래, 케이?’ 됐다. 더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이제 내 핸드폰이 유령이 될 차례다. 핸드폰은 그새 머그잔 안에서 익사체처럼 퍼렇게 뻗어있었다. 나에게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나는 오늘 그곳으로 간다. 가야 한다. 갈 것이다.
그 전에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나는 먼저 한강에 들를 것이다. 그리고 케이의 가방이 발견됐던 곳에 앉아 시간을 좀 흘려보낼 것이다. 사실은 시간을 흘려보내는 척하며 속으로는 내가 아는 모든 것들을 저 무심한 형사에게 낱낱이 일러바치면 어떻게 될지에 대해 생각해볼 테지만.
글쎄, 어떻게 될까? 내가 기대하지 않았으나 형사가 나에게 보여준 놀라운 점 하나는, 그가 아직까지 이 사건을 ‘종결사건’으로 분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내가 모든 것을 말하면 형사는 내게 조금 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일단 형사는 사명감 투철한 베테랑 탐정이 된 것처럼 으스댈 것이다. 그런 뒤에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일을 해낼 수도 있겠지. 케이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낱낱이 밝혀낼 수도 있을 거야. 심지어는 내가 모르는 케이를 시간 순으로 정렬해서 어린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줄 지도 모른다, 이렇게. ‘알고 보니 케이라는 여자에게는 이런 저런 원한관계가 있었단다, 얘들아. 그중 한 명이 범인이었어요. 그 놈에게 바로 이 자리에서 납치당한 뒤 살해된 거지.’ 그러면서 형사는 아이들에게 CD안의 사진을 보여줄 것이다. ‘바로 이 남자란다. 어때, 착하게 생겼지? 하지만 바로 이 남자가 그 예쁜 언니를 죽인 거야. 끝이 아주 안 좋았던 거지. 이해가 되니, 얘들아?’ 아이들은 모두 다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높은 데시벨로 대답할 것이다. ‘네! 네! 전부 이해할 수 있어요!’ 병아리처럼 입술을 삐약삐약거리며, 개새끼들. 나는 절대로 애를 낳지 않을 것이다. 그런 꼴은 보고 싶지 않다. 바로 이 남자가 그 예쁜 언니를 죽인 거예요. 바로 이 남자가 언니를 칼로 찌르고, 목을 조르고, 강물에 머리를 처넣고, 증거를 인멸하고, 메모리를 삭제하고, 개새끼들. 나는 그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 듣고 싶지 않다. 그것이 내가 형사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이유다.
5。
회사를 그만둔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케이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남긴 서점으로 가서 케이가 주문했다던 책을 건네받는 일이었다. 그 책을 세 번이나 읽었다. 하지만 내가 기대한 메시지는 그 안에 없었다. 책의 행간에 케이의 암호문이 숨어있기를 바랐던 게 애당초 잘못이었던 걸까? 아직도 내 가방 속에는 그 책이 들어있다. 더는 읽지 않을 것이지만 부적이나 행운의 동전처럼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닌다. 백과사전이 아니라 백오십 페이지를 갓 넘긴 문고본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런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자살을 하려는 사람이 새 책을 주문한다는 게?”
내가 물었을 때 형사는 무심함과 천진한 욕망이 반반쯤 섞인 꼬마의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었다.
“그건 모르죠. 하지만 죽기 전에도 먹고 싶은 건 많지 않겠어요? 같은 거라고 보는데, 난. 그렇지 않습니까?”
그다운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한강으로 향하는 버스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한강에서 내리지는 않을 것 같다. 겨울, 평일 오전 11시.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런 시각에 한강을 보고 싶어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지난 이십구 년간의 나였다면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이렇게 버스를 타고 오직 한강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앉아있다. 차창 밖의 풍경은 온통 창백하다. 눈이 왔나 했더니, 세상이 아직껏 하얗게 질려있는 것일 뿐이었다.
고개를 다시 버스 안으로 돌렸다. 준비한 것들을 되새겨볼 시간이 필요했다.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호흡을 다스리며, 나는 리스트에 오른 질문들을 하나하나 연습했다. 긴장할 거 없어. 겨우내 샅샅이 관찰한 이목구비잖아. 난 그 얼굴이 조금도 두렵지 않아. 그 얼굴에게 모두 물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얼굴의 잘못이 확인되는 순간 칼이 사용될 것이다. 도대체 두려울 게 무언가?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는 항상 계획했던 것을 실패하는 인간이었지. 몇 번씩 밑줄을 그어놓은 리스트에서도 뭔가를 누락시키곤 했어. 계주를 하다 바통을 놓치거나 결승점에서 엎어지는 마지막 주자가 바로 나였다. ‘네까짓 게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마음속에서 누군가 나를 비웃었다. 그것은 선생님의 목소리였고, 아빠의 목소리였고, 친구들의 목소리였으며, 나 자신의 목소리였다. 큰 시험을 앞둔 아이처럼 손이 떨렸다. 하지만 나는 그 여름날 이후 언제나 떨고 있었지…….
머리가 조금 아파졌다. 감기가 오는 것 같았다.
어느 정류장에선가 사람들이 꽤 많이 탔다. 겨울 들판처럼 성글었던 좌석들이 금세 빽빽이 메워졌다. 버스 안의 밀도가 불쾌할 정도로 조밀해졌다고 느낀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나의 질문 리스트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한 여자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뚱뚱한 여자였다. 내 눈은 정면을 향하고 있었지만 인간의 시야는 보고 싶은 모든 것을 볼 만큼 넓지도, 또한 외면하고 싶은 것을 전부 외면할 만큼 좁지도 않다. 그녀의 부피는 내 시야를 넘어섰다. 50대 후반 정도일까, 혹은 막 예순을 넘겼을 것이다. 아직 그렇게까지 늙지는 않았다. 나보다는 훨씬 많은 나이지만 내가 자리를 양보해 줄만큼 늙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아빠 또래다. 내가 아빠에게 해온 그 모진 행동들을 생각하자면 지금 버스 안에서 그 또래의 낯선 여자에게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는다고 무슨 죄가 될까 싶었다. 살아있다면 엄마도 비슷한 나이가 됐을 것이다. 나는 잠시 내 기억 속의 젊고 예쁜 엄마가 나이를 먹어 그 여자처럼 뚱뚱해지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케이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일어났겠지. 그랬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케이는 자기 자신이 아닌 것에는 아무런 욕심도 부리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케이는 분명 저 뚱뚱한 여자가 자기 앞까지 오기도 전에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 미소를 가득 머금은 그 잘난 얼굴과 함께. 그러나 나는 케이가 아니다.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계속해서 정면을 바라봤고, 시야의 또 다른 한 끝으로 한강이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체크했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동방예의지국 같은 건 아주 아주 오래 전에 썩어서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나는 이제 예의 같은 것들이 모두 썩어버린 땅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심지어는 나조차도 이렇게 나이 들어가고, 허약해져가고, 무너져가는데, 그런데 그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하나의 기억에 매여 있는 삶은 진절머리가 난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내가 아는 한, 내가 아는 한, 나는 말하고 있지만 내가 아는 건 사실 아무것도 없다. 그 여름날 강물에 빠져 사라진 건 내가 좋아하던 체리무늬 샌들 한 짝만이 아니었다. 그 여름날 이후 강물에 영혼 한 자락을 담가놓고 사는 사람은 케이가 아니었다. 물기 없는 도시 한 가운데서 날마다 익사하는 사람은 케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왜 그렇게 꼬인 거냐고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늘 준비해두고 있다. ‘매듭은 엮은 자가 풀어야하는 법이야.’ 그러나 내 사건들의 매듭이 누구의 손끝에서 꼬여진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꼬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건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한, 모든 십대들은 꼬여있다. 어떤 인간들은 이십대가 된 후 갑작스레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꼬이기 시작한다. 태어날 때부터 꼬인 인간도 물론 있다. 그들보다 더 나쁜 건 시작이 언제였든 죽을 때까지 꼬인 것을 풀지 못하는 이들이다. 나는 내가 그런 인간이 될까봐 두렵다. 그렇지만……
“아! 두려움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케이.”
“두려움이라고? 그렇지만…… 치마를 걷어 올리고 건너면 물은 무릎까지 밖에 안와. 찰랑찰랑.”
“그게 무슨 말이야, 케이? 언니는 왜 항상 그렇게 이상한 소리만 하는 거지?”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득 목뒤가 시리다. 한참을 갔다고 생각했는데 한강은 아직 나타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내 앞에 선 여자가 나를 성가시게 만들기 시작했다. 가만 보니 여자는 버스가 덜컹일 때마다 박자를 맞춰가며 내 쪽으로 몸을 밀착시켜오는 중이었다. 나는 그것이 일종의 항의임을 간파했다. 자신이 나보다 나이 들고 약하다는 것에 대한 무언의 항의. 가관이로군, 재수 없는 늙은이. ‘하지만 이걸 알아야지, 이 아줌마야. 난 당신보다 어릴지는 몰라도 강하지는 않다고. 그러니까 그런 항의는 노약자석에나 가서 하란 말이야.’
누가 이 예의 없는 자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나는 아프다. 나는 약하다. 오늘 아침 재어본 몸무게는 거의 중학교 입학 때의 무게와 비슷했다. 내가 다 기록해 놨다. 이번 달엔 0.7㎏, 지난달엔 6㎏, 그 전달엔 각각 4.4㎏, 3.1㎏, 5.7㎏이었다. 다시 말해 도합 19.9㎏이 겨울동안 사라져버린 후 돌아올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레깅스조차 흘러내린다. 부츠는 헐떡인다. 코트는 가장 작은 사이즈임에도 가장행렬에서 포대자루를 연기해야 하는 아이의 의상처럼 크다. 무릎까지 늘어진 회색 가디건은 영락없이 아빠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아빠의 것이었다. 아직도 암 바이러스를 잔뜩 묻히고 있는 아빠의 가디건. 궁상 바이러스, 미련 바이러스, 두 딸에 대한 지나친 걱정, 걱정, 걱정 바이러스를 아직도 잔뜩 묻히고 있는 아빠의 커다란 가디건. 반면 내 앞의 여자는 어떤가? 그녀의 재킷은 타이트하다 못해 가슴과 배 부분이 터질 것 같다. 싸구려 아크릴 단추들은 반드시 말해야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앙다문 입처럼 힘겹게 다물어져있었다. 그녀가 입은, 족히 20년은 됐음직한 두터운 자카드 재킷에서는 뭐라고 형용하기 힘든 묵은내가 났다. 또 소주 냄새도 약간. 재킷의 무늬는 설령 20년 전이었다 해도 그다지 세련돼 보이지 않았을 듯한 빨간 꽃무늬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 꽃무늬를 보고 있는데 돌연 내가 줄에 달린 마리오네트로 변신했다. 내 사지가 저절로 벌떡 들려 일어서더니 여자의 옆쪽으로 비켜선 것이다. 동작 어디에도 내 의지가 섞여있다는 걸 나는 느끼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정신과는 무관하게, 내 육체가 스스로, 또는 보이지 않는 줄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행동을 구경하는 것처럼 생경했다. 어쩌면 그 꽃무늬가 주는 묘한 향수나 비현실적인 감상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저 여자가 실은 마녀여서 나에게 나쁜 마법을 걸었든가. 그것도 아니면 이제 곧 내가 걸리게 될 지독한 감기 때문에 생긴 환영이겠지. 그러나 아무튼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과거는 사라지고, 비현실은 현실이 되었다. 여자는 나를 흘끗흘끗 쳐다보더니 만족을 숨긴 밋밋한 얼굴로 내가 일어선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여자의 부피는 좌석을 채우고도 남아 흘러내렸다. 옆으로 질질 삐져나온 저 엉덩이를 좀 보라지.
내 머릿속에 키보드가 하나 생겨났다. 여자의 살찐 둔부와 부피를 잃은 내 자신과 대답 없는 케이와 현재의 세계에 대한 욕설이 계속해서 키보드 위를 누르기 시작했다. 딸깍딸깍. 미친 년. 바보. 미친 년. 딸깍딸깍. 하지만 현실의 나는 동상처럼 굳게 입을 닫은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버스의 뒷문이 열렸다.
내리지 말아야 할 정류장에서 내린 나는 잠시 길을 잃고 멍하니 서있었다. 또 한 번 나의 계획이 어긋났다는 게 이렇게 자명해졌다. 또 실패다. 또 놓쳤다. 정신을 벗어난 육체가 나를 와 본 적 없는 낯선 곳에 또 데려다놓고 말았다. 도대체 몇 번째의 실패인가, 이따위 패배, 연속된 거절, 부질없는 기대, 그런데, 그런데 그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버스노선 표지판에는 한강이 일고여덟 정류장 후에나 있다고 쓰여 있었다. 정류장 앞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가야할 목적지를 확실히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잘못된 곳에 서있는 것은 나뿐인 듯 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갑자기 그 장소를 견디는 게 힘들어졌다. 그래서 한강 쪽을 향해 빠르게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추위 때문에 발가락은 몇 걸음 못 가 얼어버렸다. 겨울 오전 열한시 반이 발끝에서 질 나쁜 냉각제처럼 걸리적거렸다. 가시거리 내의 대한민국 전체가 겨울로 가득 차있었다. 짧아진 머리카락이 새삼 쓸쓸하게 느껴졌다. 빳빳해진 발을 기계처럼 뻗으며, 나는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버릴 거라면 어째서 한꺼번에 사라지지 않는 건지에 대해 생각했다. 키보드를 다시 작동시켰다. 모두 다 개새끼들이라고. 딸깍딸깍. 모두 다 정신 나간 미치광이들이라고. 딸깍딸깍. 어째서 한꺼번에 싹 다 없어지지 않는 거야? 그러면 사라지는 사람도 남는 사람도 편하잖아? 한 번에 몽땅 죽어버리라고, 한 번에, 엄마고 아빠고 언니고 개고, 딸깍딸깍. 하지만 이 생각이 용서받으려면 인간은 모두 동시에 태어나고 동시에 죽어야 하며, 아니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했고, 아니 존재하지도 말았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들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머리가 또 지끈거린다. 잊지 말아야지. 그 여름날 이후로 용서는 나와 무관한 단어가 되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흥, 용서 따위…….
“아! 더는 못 참겠어, 케이. 다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날이 너무 찼다. 뾰족한 바람의 끝이 겹겹이 입은 옷들을 찢고 들어와 내 살갗을 꼬집고 있었다. 언니가 사라졌다고 해서 내가 이런 추위까지 참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조금만 더 참으면 심장이 파래질 것 같았다. 나는 눈에 보이는 제일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도망치듯 뛰어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내 계획은 수정됐다. 한강은 서비스센터에 들른 다음에나 찾아갈 것이다. 한강은 나를 기다려줄 수 있을 것이다. 한강은 나를 기다려줘야 한다.
6。
서울시내 서비스센터들의 첫 번째 특징은 자랑해도 좋을 정도의 큰 규모다. 직접 서비스센터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는 몰랐던 사실이다. 어디까지나 스물아홉 살씩이나 먹고도 대기업과 구멍가게를 구별하지 못한 내 불찰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처음 케이의 집에서 제일 가까운 서비스센터를 찾아가던 날만 해도 나는 줄곧 작은 사무실을 상상하고 있었다. 슬라이드가 뻑뻑하다거나 이어폰 잭의 접촉 불량 같은 핑계거리를 미리 구상해뒀지만 그런 얘기는 꺼낼 필요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나란히 앉아있는 서너 명의 사원 가운데서 1초 만에 내가 원하는 얼굴을 구별해낼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완벽한 착각이었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직접 마주한 센터의 외관은 작은 학교만 했다. 각도에 따라서는 작은 우주라고 볼 수도 있을 듯했다. 그 우주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나는 1초 만에 사건을 해결하려던 나의 안일함을 자책했다. 그 안에는 나 같은 바보가 최소한 수십 명은 서있었다. 나는 일단 대기 번호표를 뽑아야 했고, 나보다 먼저 온 바보들의 차례가 다 지나가길 기다려야 했고, 접수처의 예쁜 여직원에게 내 핸드폰의 가짜 상처와 가짜 증상에 대해 설명해야 했고, 수리기사가 핸드폰을 넘겨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그가 상처들을 점검할 때까지 또 기다려야 했으며, 그런 뒤에야 가까스로 그 불확실한 얼굴과 마주할 수 있었다. 물론 분에 넘치도록 일사분란하고 분에 넘치도록 친절한 절차들이었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건 그런 친절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건 센터에 들어서자마자 낯익은 50KB의 얼굴이 손을 흔들며 나타나 “안녕? 케이를 찾아오셨죠? 케이는 지난겨울부터 우리 센터 지하에서 커피콩을 볶고 있답니다. 맛 좋은 커피가 다 끓여지면 집으로 돌아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라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내가 너무 많은 걸 기대했던 걸까?
앞선 열여섯 번의 허탕과 똑같은 과정이 오늘도 반복됐다. 작은 우주, 대기표, 접수창구, 기다림, 기다림. 나에게 손을 흔드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커피콩 볶는 냄새 같은 것도 날 리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오늘 내 핸드폰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실한 상처를 입고 있으니까, 그 상처만큼이나 확실하게 50KB의 남자를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괜찮다고, 이 정도는 충분히 기다려줄 수 있다고. 나는 대기 번호표를 들고 접수처로 걸어갔다. 창구의 여직원에게 사진을 내미는 나의 손은 전에 없이 당당했다. 손이 당당한 만큼 내 속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내가 내민 것은 케이의 프린터에서 A4에 흑백으로 프린트해낸 남자의 얼굴이었다. 해상도 조절을 실패하는 바람에 얼굴은 용지의 전면에 가득 차는 크기로 인쇄되어 나왔다. 언뜻 보면 그것은 경찰서 벽에 걸린 지명수배자 사진처럼 보였다. 비록 사진 안의 흉악범은 법 없이도 살 사람처럼 평화롭게 웃고 있었지만.
“지난번에 이 분한테 수리를 맡겼었는데 친절하시더라구요. 아직도 계시다면 이번에도 이 분에게 수리 받고 싶은데요.”
나를 보는 여직원의 눈빛에서 아주 잠깐, 잘 교육받은 대기업직원 특유의 친절이 사라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케이였다면 좀 더 그럴싸한 구실을 만들어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케이가 아니다. 나는 상상력 없이 배배 꼬인 속 빈 꽈배기에 불과하다. 겨우내 생각해낸 게 겨우 이거였다. 열여섯 번을 실패하고도 내가 쓸 수 있는 방법 역시 이것뿐이었다. 남들에게 이것은 고작 50KB짜리의 집착, 턱없이 부실한 지푸라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세상을 전복시킬 수도 있는 희망이었다. 내 손에 들려있던 희망이 가늘게 떨리며 여직원의 손으로 옮겨갔다. 그녀는 나의 희망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물론, 물론 나는 형사에게 케이의 지갑에 들어있던 명함을 좀 보자고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명함에는 내 희망의 이름도, 주소도, 전화번호도 다 적혀있을 테니까. 그러나 쉬운 방법을 택했다면 나는 형사에게 내가 케이에 대해 알고 있는 마지막 비밀 하나를 빼앗겼을 것이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나의 유일한 언니를 지켜줄 마지막 방법일 수도 있었다. 더불어 법이 대신 해주지 못할 가장 적절한 복수를 해줄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오늘 이렇게 머저리 같은 꼴로 잘 교육 받은 아가씨 앞에 서있는 것이다. 흑백의 종이 한 장과 작은 복수의 검 하나를 양 손에 품고서.
다행히 그 예쁜 아가씨는 내 미욱함을 덮어줄 수 있을 만큼 유능한 직원이었다. 그녀는 금방 미소로 점철된 친절을 되찾았다. 나는 그녀가 파블로프의 개 같다고 생각했다. 또는 버튼만 누르면 미소가 굴러 나오는 즉석자판기라던가.
“아, 이 기사님은 예약 고객님만 받으시는 분이라서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고객님? 문의 후 즉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예뻤으나 너무 오랜 부자연스러운 웃음의 결과로 입가의 화장이 들떠 있었다.
모든 것이 내가 원했던, 혹은 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