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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일전에 한 대기업의 신입매니저 교육영상을 본 일이 있습니다. 매니저로 발령을 받은 신입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강사로는 영업본부장이 나섰습니다. 이분은 영업사원, 매니저, 지점장, 그리고 영업본부장까지 오른 사람이어서 신입매니저들에게는 전설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이분이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칠판에 이렇게 써내려갔습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문구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회사의 근본 철학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즉, 여기 계신 신입 매니저 분들의 역할은 성공할 능력을 갖춘 사람을 채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영상을 보고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저는 매니저는 조금은 부족하고 어설프더라도 잘 교육하고 훈련시켜서 유능한 인재로 키워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입 매니저교육은 어떻게 하면 사람을 잘 변화시켜갈 것인가를 다루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영상은 아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을 잘 교육 훈련시키려 하지 말고 잘 할 수 있는 인재를 영입하는데 역점을 두라는 것입니다. 제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어서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경영학에서는 이미 이런 사실이 보편적인 원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비즈니스세계에 일대 혁신을 불러일으킨 마커스 버킹엄(Marcus Buckingham)이란 사람이 저명한 경영지침서인 [First, Break All the Rules]이란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 성공한 CEO들의 ‘직원관리 4원칙’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 사람들은 잘 변하지 않는다.
2. 그 사람에게 없는 것을 있게 하려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3. 있는 것을 밖으로 끌어내면 된다.
4. 그것조차도 쉽지 않다.
그렇습니다. 기업을 경영하는 많은 경영인들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경영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업이나 기관의 인사를 관리하는 책임자들도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사관리원칙으로 삼기도 합니다.
사실 이 세상을 살만큼 살아본 사람들은 대체로 ‘사람들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동의합니다. 정말 오랜 만에 옛 직장동료나 학교동창들을 만나보면 겉모습은 참 많이 변했는데 사람의 본성, 인격, 습관 같은 그 사람의 속 모습은 그대로인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구나!’하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성경도 대체로 이런 생각에 동의합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해 본다면 ‘사람은 스스로 변하지 못한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을 등진 사람들은 계속 하나님을 등진 채로, 죄인은 또 계속 죄인으로, 그리고 악인은 또 계속 악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가지 예외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변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이 임하실 때 그 사람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 61:1이하의 말씀이 당신께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설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예수님께 임하셨습니다. 그후 예수님의 생애가 달라졌습니다. 그 이전 30년 동안은 자신을 위한 삶 즉 사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신 뒤 하나님을 위한 삶 즉 공생애를 사시게 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이 임하신 사건입니다. 성령이 예수님께 임하셔서 예수님 안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예수님에서 시작해서 제자들로 이어졌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강림을 체험한 제자들도 이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오늘까지 성령의 임하심을 체험한 모든 사람들이 다 이런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시고 나면 어떤 변화들이 일어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자신을 보는 눈의 변화
우선 오늘 본문을 보면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령이 임하신 뒤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름부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시 89:20을 보면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할 하나님의 종으로 택하신 뒤, 그에게 기름을 부어 성별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원래 땅에 속한 사람이었던 다윗을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성별하시기 위해 기름을 부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름부음이란 거룩하게 구별하는 사건을 말합니다. 세상에 사는 땅에 속한 사람을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할 사람으로 구별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이 임하신 사건을 기름부음 사건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아직 성령이 강림하시기 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을 권위 있는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을 통해 머리에 기름을 부으셔서 성별 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달라졌습니다. 직접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그 사람에게 임하므로 기름부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성령의 기름부음은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킬까요? 다시 다윗의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삼상 1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의 이새라는 목자의 여덟째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평범한 목자의 가정에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막내아들 다윗을 유다의 왕으로 세우시기 위해 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징표로 사무엘을 보내셔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신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삼하 7:18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보잘 것 없는 자기를 택하시고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체험을 한 뒤 다윗처럼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누구기에 내게 이런 은혜를 베푸십니까?”
사실 우리는 내 자신을 볼 때 없는 보잘 것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때론 내가 나란 것이 부끄러울 때도 있었고, 내 스스로 내가 싫을 때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내가 아닌 다른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고 난 뒤 달라집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 눈에는 결코 보잘것없는 존재가 아니고, 오히려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고 나면 다른 관점에서 나를 보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소중한 작품이고, 하나님께서 택한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이 임하신 여러분들은 참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남을 보는 눈의 변화
다음으로 본문에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그리고 눌린 자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지탱해 가기 힘이 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령이 임하신 사람들을 이런 사람들에게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들 곁으로 가서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돕고, 그들을 세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우리 사회에 ‘루저의 난’이라는 일종의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모 TV방송의 [미수다]라는 프로그램에 패널로 나온 한 여대생이 한 말에서 시작된 해프닝이었습니다. 이 여학생은 자기는 키 작은 남자가 싫다면서 외모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시대가 된 오늘날 키는 경쟁력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자기 나름의 주장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한 말이 문제가 됐습니다. 자기는 키가 180cm가 되지 않는 남자는 루저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루저(loser)란 ‘패배자’란 뜻이고, 영어의 뉘앙스는 ‘찌질이’나 ‘인간쓰레기’로 매우 경멸하는 의미입니다. 이 방송이후 발칵 뒤집혔습니다. 논쟁이 뜨거웠고, 이 논쟁 이후 루저라는 말이 자신을 비하하거나 남을 조롱하는 유행어가 됐습니다.
저는 이 해프닝을 보면서 우리 안에 남을 바라보는 시선이 참 잘못됐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됐습니다. 자기 관점으로 남의 약점을 찾아내서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는 풍조가 너무도 팽배하게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각자에게 이런 타락한 본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성령을 받고 나면 이런 점이 달라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은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 다시 말하면 루저라고 손가락질 받을 수 있는 사람들 향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조롱하고 비아냥거리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을 위로하고 돕고 세우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대전제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저들을 따뜻한 눈으로 보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들을 사랑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우리의 눈이 이렇게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복음이 세상으로 퍼져가는 초기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 유다지역, 사마리아지역 그리고 땅 끝까지 복음을 들고 나아갑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어보면 몇 차례 복음의 확장되는 과정에서 앞길을 가로막는 장벽이 나타납니다. 대표적으로 유대인들인 사도들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저들 스스로 넘어서기 힘든 장벽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차가운 시선으로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은 하나님께서 버리신 사람들이요 심지어 천국의 땔감일 뿐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저들의 시선을 바꿔주셨습니다. 성령이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유대인인 제자들이 이방인을 형제로 바라볼 수 있도록 그 시선을 교정해 주셨습니다. 제일 먼저 베드로가 고넬료라는 로마인을 형제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교인들 모두가 함께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땅 끝까지 진군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면 우리의 시선이 바뀌어야 합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향해 보냈던 차가운 시선이 따뜻한 시선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조롱하고 무시하고 싫어했던 시선이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시선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특히 세상 사람들이 루저라고 조롱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장애인들이나 다문화 가족 분들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고 주님의 눈으로 따뜻하게 이분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역을 보는 눈의 변화
본문을 보면 성령이 임하신 이유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자유와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한 마디로 주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시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당사자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은 하고 싶지 않은 일들입니다. 우선 시간을 내야하고 수고를 해야 합니다. 더 큰 문제는 이 사역을 감당하려고 할 때 박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역은 한 마디로 말하면 희생이 따르는 일이기 때문에 피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일입니다.
딤전 1:12을 보면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자기에게 이런 사역을 맡겨주신 것을 감사한다는 고백입니다.
사실 바울도 인간적으로 볼 때 이 사역이 좋을 리 없었을 것입니다. 고후 11:23 이하를 보면 사역을 감당하면서 자기가 겪은 일을 이렇게 나열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
주께서 맡기신 사역을 감당한다는 것이 이렇게 피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일들이지만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령께서 그의 생각을 바꿔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역이 너무도 귀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명을 다 바쳐서 감당할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9세기에 중국에 선교사로 가서 헌신한 사람 가운데 앤 월터 펀이란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의과대학을 나온 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미혼여성으로 자원하여 중국선교 길에 올랐습니다. 당시는 중국이 위험한 곳이고 외국과 연락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 선교사로 갔다는 것은 다시 가족들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큰돈을 들여 사람을 통해 ‘안전하다’(safe)는 한 마디 전보를 쳐달라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얼마 후 앤에게서 전보가 왔습니다. 그런데 전보내용은 엄마가 기다리던 것과 달랐습니다. ‘즐겁다’(delighted)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전보를 보낼 수 있었을까요? 성령께서 주님이 맡겨주신 사역이 자신에게 너무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힘들고 위험한 일이지만 성령께서 능력을 주셔서 잘 감당할 수 있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하고 싶은 일 도망치고 싶은 일이지만 그 일을 감당하며 즐겁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은 우리에게 사명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명이 너무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나아가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도 주십니다. 인간적으로 피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일이지만 그 일을 기쁘고 즐겁게 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한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오늘도 성령은 우리를 변하게 해주십니다. 우리 자신을 귀하게 여길 수 있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귀하게 대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소중히 여길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더욱 성령충만하여 우리 모두가 더 많이 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상도중앙교회 박봉수위임목사님 설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