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 필 때면(2)
- 여강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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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너희들 재연이 못 봤니? 이 애가 아침부터 보이질 않으니 도대체 어딜
간거니?” 혼자서 막내아들을 찾던 어머니는 누이들과 형 그리고 사촌들에게 공개적으로
나의 행방을 물었지만 누구하나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달이 뒷동산 위로 떠오
르고 별들이 더욱 밝게 빛을 발산하는 시간이 되어도 막내아들의 행방은 묘연
했다.
“여보, 재연 아부지. 재연이가 하루 종일 안보여요. 좀 찾아봐요.” 술에 만취한 아버지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일어나기는 했지만 몸을 가누기
힘들어 보였다. “어디 있겠지, 어린애가 어딜 갔겠어.”
아버지는 퉁명스럽게 한 마디 하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점점 사색
(死色)이 되어갔다. 안방, 건넌방, 사랑방, 헛간, 집 뒤꼍을 이 잡듯 뒤졌지만 막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얘들아, 큰일 났구나. 집안 구석구석을 아무리 뒤져봐도 재연이가 보이질 않는구나.
너희들이 혹시 모르니 아래 주씨네 집과 김 씨네 그리고 황씨네 집안을 모두 뒤져봐라.
이 애가 혹시 어디 잠들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어머니는 형들과 사촌들을 모아놓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다. 여섯 살 밖에 안 된
막내아이가 밤이 이슥하도록 보이지 않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안방과 건넌방에서
잔치의 여흥을 즐기고 있던 친인척들의 얼굴에는 수심(愁心)이 쌓이면서 술렁이기기
시작했다.
“아니, 그 어린 것이 이 밤에 어디에 있는 거여, 그래?” 늘 막내를 귀여워 해주던 능말 둘째 큰어머니가 큰소리로 외쳤다. “아니, 이 어린 녀석이 가면 어딜 갔겠나? 모두들 나가서 찾아봐야지 방에 앉아있으면
되겠어?”
평소 자신의 외모를 쏙 빼닮았다고 늘 당신의 자식보다 더 조카를 업고 다니며 사탕이나
과자를 사주던 큰아버지가 거들고 나섰다. 시골서는 좀처럼 어린아이를 유괴당하거나
길을 잃어 아이가 집을 찾아오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딸을 시집보내느라 들떠있던
잔칫집 분위기는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막내를 찾으러 어머니의 특명을 받고 이웃집에 파견 되었던 형들과 사촌들이 돌아
왔다. 모두 불안한 얼굴들로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그럼 이 녀석이 정말 어딜 갔다는 거냐? 큰일 났구나..” 어머니는 불현 듯 4년 전의 악몽을 기억해 냈다. ‘아아, 설마 이 애가?’ 큰아버지의 서슬 퍼런 호통에 형들은 이장 집으로 달려갔고,
이장은 동네 반장회의를 소집했다.
“여러분 오늘 큰딸을 시집보낸 최씨집안 막내아들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반장님
들은 곧장 돌아가시면 이웃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모두 사람 찾기에 협조하도록 조치를
취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시는 동네 이장 집에 전화 한대가 고작이었다. 스피커도 없었고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사람이 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다. 잔치 집에선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아무리
동네를 이 잡듯 뒤져봐도 막내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횃불을 들고
이웃집 화장실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막내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이 녀석이 어디로 간 거여 그래? 다 죽은 녀석을 살려놨더니 하늘로
솟았나 땅속으로 꺼졌나? 도대체 어디를 갔단 말이냐. 딸년 시집보내놓고 아들 녀석
잃었으니 이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야. 으흐흐흐.....”
어머니는 속으로 통곡하였다. 어머니의 통곡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일어난 아버지가
어머니를 다독였다. “이 사람아, 무슨 재수 없는 소리를 그리하나? 그 녀석이 어디 놀러갔다 나중에라도
들어올 테지. 좀더 기다려 보자고.”
“당신은, 자식이 없어졌는데 잠이 오우?” 무정한 양반 같으니.”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없어진 감정을 아버지에게 돌렸다. “작은어머니, 혹시 재연이가 시집간 누이를 따라간 게 아닐까요?” 신산말사는 사촌형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 그 녀석이 워낙 지 누이를 따랐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지. 이장네 집에 가서
지 누이가 시집간 하거리에 전화를 걸어보라고 해야겠어” 아버지는 즉시 형님을 이장
댁으로 보냈다. 가족들은 일말의 희망을 걸고 이장 댁에 간 형이 오기를 기다렸다.
점봉리 이장의 전화를 받은 하거리 이장이 급히 매형네 집을 다녀 간 시각이 거의
밤 12시를 넘어서 였다. 집안에서 일말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지 누이를 따라가지 않았다고? 그럼, 이 녀석이 도대체 어딜 갔다는 건가, 어디를 ?
아이고 생떼 같은 자식을……. 으흐흐흐” 어머니는 다시 흐느꼈다.
“뭐라고요? 막내가 , 막내가 없어졌다고요? 아니 그 어린 것이 이 밤중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고 어딜 갔단 말인가?” 하객들과 밤늦도록 축하주를 마시던 매형이 첫 날밤을 치루기 위하여 비틀거리며
누이가 있는 건넌방으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누이에게 막내의 행방불명 소식을
알렸다.
“막내처남이 어딜 갔겠어, 나이도 어린데.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곧 돌아오겠지.” “그 어린 것이, 이 밤에 ……..” 누이는 조용히 눈물을 찍어냈다. “자 그만 잠자리에 듭시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니에요. 먼저 잠자리에 드세요. 전 잠이 안와요.” 신혼 방은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이봐요. 여보세요.” 매형은 혈혈단신인 작은 아버지를 사랑채에 모시고 있었다. 일찍 잠자리에 든
노인이 문밖에서 쿨럭 거리는 인기척에 잠을 깨어 멍석 틈에서 쪼그리고 안자 잠든
나를 발견한 시각은 새벽 별이 졸 무렵이었다.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버린
내 몸뚱이를 만져보고 노인은 깜짝 놀랐다.
“아니, 이런 큰일 났네. 웬 아이가 여기에 잠들어 있담?” 노인은 안채로 들어와
불이 켜진 건넌방을 두드렸다. “조카님, 조카님 주무시나?” “아닙니다. 작은 아버님. 무슨 일이 있으세요?” 매형이 술이 덜 깬 얼굴로 대답
했다.
“잠간 나와 보이, 사랑채 툇마루에 웬 아이가 잠들어 있는데, 몸이 얼음장이야.
저러게 내버려 두면 큰일 나겠어.” “아이?” 속으로 남동생임을 직감한 누이가 매형을 앞세우고 사랑채 툇마루로 달려
나왔다. 매형이 군용 후레쉬로 어린 아이의 얼굴을 비추었다.
“아니, 재 , 재연이가. 얘, 재연아, 재연아, 정신 차려. 재연아…….
아, 으흐흐흐. 이 녀석아, 이게 어떻게 된 거니, 응?” “처남, 처남 정신 차려. 처남 아 하나님, 고맙습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
매형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누이는 몸이 얼음장 같은 남동생을 끌어안고 오열하며 4년 전 악몽을 떠올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체온저하로 세상을 달리할 뻔 했다. 매형은 뜨거운 물을 세숫대야에
받아오고 누이는 물수건으로 밤새도록 동생의 몸을 녹여주었다.
“여보. 이제 눈 좀 붙이구려. 처남은 내가 돌볼 테니.” 전날부터 한잠도 못잔 누이는 피곤에 지친 모습이지만, 하마터면 시집 온 날
남동생을 잃을 뻔 했던 일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산골 마을에는 변변한 의료시설
조차 없었다. 환자가 발생하여 급한 경우 삼십 여리 떨어진 읍내까지 차를 대절
하던지 자전거를 이용해 환자를 수송해야 했다. 누이와 매형은 자신들이 결혼한 날
어린 막내처남이 가마를 따라온 것도 모른 채 만약 사랑채 툇마루에서 큰일을 당했
다면 평생 큰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살아야 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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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한 병을 모두 따라 누이 산소에 뿌리고 막 일어나려고 하니 오금이 저려
왔다. 산소 옆에 오리나무에 비둘기 한 쌍이 다정하게 앉아 서로 부리를 비비며
사랑을 속삭이는 듯 구구거린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누이에게 다음을 약속
하고 운전대를 잡았다. 산마다 진달래꽃들이 아우성이다. 세상일 다 잊고 저 붉은
진달래 속에 누워 하 세월 살고 싶다.
차가 영동고속도에 접어들었다. 서서히 속도를 올리자 바퀴의 고속회전 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강릉방향에서 서울방향으로 향하는 차가 서서히 늘면서 지체와
정체를 반복한다. 용인 에버랜드 부근 쯤 되자 고속도로는 아예 거대한 주차장
으로 변해 버렸다. 겨우 용인휴게소에 도착해 커피 한 잔을 마주하고 고향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물 많은 나는 아르테미스 여신(女神)이나 항아(姮娥)가 살고 있을 초승달을
바라보기만 하여도 눈가가 촉촉해진다. 저 달은 누이가 지금쯤 어느 세상에 태어나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으리라. 법이 없어도 착하게 살아 갈 누이였다.
나는 가끔 세상은 아니 신은 우리 인간들에게 너무 불공평 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상하리 만큼 신들은 악인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시련이나
고통을 주는 것 같다. 남녘하늘에 걸린 초승달에게 아니 여신 아르테미스와 항아
에게 속으로 빌어 본다.
‘여신이시여, 지금까지 누천년을 두고 불편부당했던 인간사를 더 늦기 전에
바로 잡아주소서. 눈과 입으로 남의 어깨에 걸터앉아 세상을 부유하려는 모든
자들에게 더 이상의 자비는 사치이며, 세상을 더욱 혼돈의 구렁텅이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당신께서 계속해서 우리 인간들로부터 존경받기를 원한다면, 공사
(公私)의 구분을 분명히 해주시고, 천수(天壽)를 누려야 할 사람들에게 그들의
심장이 멈출 때 까지 주어진 시간표를 거두지마소서.’ 차바퀴는 다시 경쾌한 소음을 내기 시작했다. 거대한 뱀이 꼬리를 힘차게 흔들며
서해바다를 향해 물위를 헤엄치 듯 시원하다.
나는 봄의 정령들에게 미운 오리였을까? 생사의 경계가 모호했던 그 날도 황학산이
진달래의 위용에 눌려 온통 붉게 물들고 있을 무렵이었다. 꽃샘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날 다음달 3월 24일 결혼식을 올리기로 되어있는 아가씨와 함께
누이가 두 달째 암투병을 하던 병원을 찾았다. 모두 삭발한 누이의 모습을 보자
더 이상 누이 앞에 서있기 힘들었다. 얼른 화장실로 달려가 한참동안 눈물샘을 퍼내
야 했다. 내가 태어난 날도 봄, 누이가 결혼한 날도 봄이었다.
“너왔구나, 바쁠 텐데......” 누이 팔에 꽂힌 주사바늘이 마치 생(生)과 사(死)를 결정짓는 명부세계의 신(神)
처럼 보였다. 팔뚝은 많은 푸른 반점들로 얼룩이져있다. 살며시 누이의 손을 잡으니
은은한 미온(微溫)이 전해진다. “누이, 다음 달 결혼 할 사람이에요.” “그래, 곱게 생겼구나.” 누이는 아내 될 아가씨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보였다.
“얼른 병상에서 일어나셔야죠.” 아가씨는 누이와 눈을 맞추며 누이 손을 꼭 잡아본다. “재연이가 착하기만하지 아직 속이 여물지 못해요. 나중에 부부가 되거든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잘 살아야 해요.”
아가씨는 대답대신 어쩌면 결혼 전에 누이가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는지. 눈물을 보였다. 병실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가득했다. 누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꼭 감고 한숨을 몇 번 내쉬었다. “재연아, 내가 너에게 꼭 들려 줄 이야기가 있단다. 들어볼래?”
“누이, 나중에 완쾌하신 뒤 들려주세요. 시간 많은데요, 뭐?” “아니야, 오늘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영영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구나.”
아가씨가 누이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누이, 힘드실 텐데......” “아니, 어제보다 기분도 좋고 고통도 없구나.” 누이는 배시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아가씨와 누이 곁에 다소곳이 앉아 누이를
바라보았다. “그 날도 어머니 아버지는 아침 일찍 배실 밭에 나가셨었지. 집에는 나와 어린 네가
있었고......”
갓 두 돌을 넘긴 재연이 잠에서 깬 시간은 아침 10시쯤이었다. 누이는 뒤꼍에서
빨래를 하느라 어린 동생에게 시선을 줄 수 없었다. 아이는 방에 아무도 없자 엉금
엉금 기어 문지방을 넘어 마루로 나왔다. 늘 어머니로 알던 큰 누이도 보이지 않았다.
갈증을 느낀 아이는 마루에 놓여있던 놋그릇에 담긴 물을 본능적으로 들이켰다.
아아악 - 비명을 듣고 달려온 누이는 기절할 뻔 했다. 빨래하려고 만들고 남은 양잿물 그릇이
비어있었다. 아기는 손가락을 입에 넣고 계속 비명과 울음을 섞어냈다.
“재연아, 재연아, 아가.....” “엄마아......” 아이는 눈을 하얗게 뒤집고 악을 쓰며 울어댔다.
“아가, 아가......” 어찌할 바를 모르던 누이는 아랫집 주씨네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리자. 주씨네 집 큰 형 또래 누이가 아버지 어머니가 있는 배실 밭으로 달렸다. 아버지
어머니가 집에 도착했을 무렵 아이는 이미 기절한 상태였고, 누이는 큰소리로
울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가, 얘야, 재연아, 아가......” 어머니는 아기를 아무리 흔들어보았지만 축 늘어
진 아기는 아무 움직임도 없다. “여보, 재연 아부지, 빨리 읍내 병원으로 가요. 빨리요.”
“아버지, 어머니 죄송해요. 제가 뒤꼍에서 빨래를 하는 사이에 그만 재연이가
마루에 놓인 양잿물을, 으흐흐 흐흐 아버지 죄송해요, 엄마.” “애비 에미를 잘못 만난 탓이지, 어찌 네 탓만 하겠니.”
아버지는 겁에 질린 누이를 달래고 재연이를 업고 읍내로 달렸다. 아버지 뒤로
어머니와 누이가 쫓아가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이웃 주민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읍내를 향해 달려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며 혀를 찼다.
“어쩌다 아기가 양잿물을 다 마셨노 그래? 애가 무사해야 할 텐데......” “얘, 너는 집에 있어야지 너까지 따라오면 어쩌니?” “아니에요. 아버지, 저도 따라가겠어요. 쟤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제 탓이에요.
저도 따라가게 해주세요. 아버지.”
축 늘어진 막내아들을 등에 업고 읍내를 향해 뛰는 아버지 눈에는 눈물이 어리었다.
‘오오, 천지신명이시여, 조상님이시여, 제 자식을 살려주소서. 이 어린 것을 굽어
살피소서. 제발, 제발살려 주소서.’ 아버지는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뛰었다. 여주읍내
까지 시오리 신작로를 달려가는 동안 버스는 한 대도 오지 않았다. 중간정도 달려
가고 있을 무렵 외삼촌이 헐레벌떡 자전거를 타고 쫓아왔다.
“매부, 매부 어서 조카를 안고 뒤에 타시게, 어서 시간이 없다네.” “아니, 나보다 당신이 재연이를 안고 타구려.” 아버지와 큰 누이는 뛰다시피 읍내를 향해 달렸다.
“아아, 너무 늦은 듯 합니다. 기도가 출혈로 인하여 거의 막혔있었는데 대충 응급
치료는 했습니다. 어서 빨리 수원에 있는 K병원으로 데리고 가세요. 오후 한시에 수원가는
동차가 출발합니다. 어서요.” S의원 의사는 아기의 상태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가망이 없다는 눈빛이었다.
곧이어 누이와 아버지가 의원에 도착하였다.
“선생님, 제 막내아들입니다. 어떻게든 살려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아버지는 간신히 숨쉬고 있는 아이와 의사를 번갈아 보며 의사에게 애원하다시피
하였다.
"방금, 아주머니에게 말씀 드렸듯이 속히 수원 K병원으로 데리고 가세요.
여기서는 고치기 어렵습니다. 아기의 위와 기도가 심하게 손상이 되었습니다. 큰 병원
에 데리고 가셔서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데리고 가세요.“
“매부, 의사선생님 말씀대로 조카를 업고 빨리 수원으로 가세. 빨리 수원행
열차를 타야하네.”
성질 급한 외삼촌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채근했다. 의원의 벽시계는 열두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버지는 거의 의식이 없는 아이를 업고 다시 역전으로 뛰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이 얘를 데리고 집으로 가세요. 이이와 제가 재연이를 데리고 다녀올
게요.” “엄마, 저도 따라가게 해주세요. 모든 게 저로 인해...... 으흐흐흑” 누이는 본인의 불찰로 빚어진 일이라 생각하고 모든 것을 책임지고 싶었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간다 한들 마음이 불안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누이의 간청에
아버지는 수원까지 동행하도록 허락을 했다.
일제 때 여주의 기름진 미곡(米穀)을 수탈하여 수원으로 실어 나르기 위하여
놓인 수려선(水驪線) 철로 위로 장난감 같은 동차가 기적을 울리며 수원을 향해
달린다. 보통기차보다 좁은 객차를 동차라고 불리었는데 주로 여주와 이천 용인을
거쳐 수원으로 통학하는 학생과 직장인들이 주 고객이었다. 한산한 동차 안에 아주머니들 서너 명이 타고 있었는데 축 늘어진 아이를 보자 아버지 어머니
눈치를 보며 수군거렸다.
“저기 저 아이가 무슨 약을 먹었나 보우, 쯔쯔쯔 다 죽은 것 같은데......”
수군거리던 일행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아주머니 한분이 다가와 어머니에게 묻는다. “여봐유, 얘기엄마. 어쩌다 얘가 이리되었우? 딱하기도 해라.”
“양잿물을 마셨어요. 아이가 잠에서 깨어 물인 줄 알고 그만......” 어머니는 말끝을 흐렸다. “이놈에 동차는 왜 이리 느리다 말인가. 아이가 죽어가고 있는데.” 아버지는 차창 밖으로 느리게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보면 한탄했다.
‘아, 이 무슨 천벌이란 말이냐. 내가 그 동안 조상님들을 잘못 모셔서 자식이 생사
의 기로에 들어섰단 말인가?’
아버지는 자책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침통한 얼굴을 바라보던 어머니와 누이는
아버지를 위로했다.
“재연 아부지,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애가 어떻게 되겠어요. 사람 목숨 그리
쉽게 끊어지지 않아요. 당신 잘 아시다시피 이 애가 돌 때 연필과 실을 동시에 잡았
잖아요.”
어머니는 낙심한 아버지 위로하였다.
“아버지, 재연이는 꼭 살아 날거에요. 꼭......” 누이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가며 죽어가는 동생의 손을 잡아보았다. 핏기가 없는
창백한 얼굴이 누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간간히 몰아쉬는 숨소리가 아직 아이가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2시간 넘어서 기차는 수원에 도착하였다. K병원에 도착하였을 때 아이는 거의 숨을
쉬지 않았다. 급히 응급실로 옮겨져 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아아, 이런, 이런! 이일을 어찌한다.” 의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어떤가요? 애가 살아 날 가망은 있는 거지요?” 어머니는 의사의 입에서 희망적인 답변이 나오리라 기대했다. 이렇게 큰
시설의 종합병원에서 어린아이 하나 살려내지 못한다면 병원의 체면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죄송합니다만, 아이의 상태가 비관적이고 너무 늦어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니, 의사 선생님, 이렇게 큰 병원에서 양잿물 마신 아이 하나를 못 살린다 말이
에요? 말도 안 됩니다. 이 아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내야 합니다. 제발 아이를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어머니는 의사의 소매를 붙잡았다.
“선생님, 제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제 동생을 살려야합니다.
제발 , 제발 살려주세요. 이 병원은 하나님이 세우신 병원이니 하나님이 무심하지 않으
시다면 제 동생을 이대로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겁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
만약 이 아이를 살려내지 못한다면 저는 앞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 병원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누이는 울면서 사정했지만, 의사는 고개만 좌우로 갸우뚱거릴 뿐 이었다. 어머니는
의사의 가망 없는 말에 거의 실성을 하다 시피 했고, 아버지는 눈물을 삼켰다. ‘아, 내 눈앞에서 자식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한단 말이냐. 부처님,
조상님 자식을 살려주소서. 살려만 주신다면 제 목숨이라도 받치겠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소서.’
아버지는 속으로 빌면서 아들이 돌 때 실을 잡은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러나
어린 자식의 생명이 서서히 꺼져가는 마당에 돌 때 실을 잡았다는 사실은 큰 위안이
되지 못했다. 의사는 바쁘다며 다른 환자를 진료하기 위하여 가버렸다.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어머니의 가슴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고 누이의 가슴 또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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