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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판도라의 동굴
김 영 호(문학평론가)
1. 개와 늑대의 시간
성배순 시인은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이는 그가 동심의 세계에서는 무한하게 확장 가능한, 열린 이야기구조에 익숙함을 뜻한다. 우주의 생성과정에서 신과 인간이 한데 어울려 벌이는 복잡하고 아주 치졸한 감정다툼을 다루는 신화에서부터 쇠오줌과 말똥 등 우수마발(牛溲馬勃)의 하찮은 것들까지 아우르는 풍성한 이야기들이 그에겐 아주 친근한 삶의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 신화의 아폴론과 아테나, 사포와 파온, 메두사 이야기나 노자와 장자의 걸림 없는 무애자재(无涯自在)의 삶 그리고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나 여우 놀이 등 동서고금의 설화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그에게 설화적 세계는 산업화 이전의 가난하고 단순하며 불편한 원시사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고대의 원시 사회에서 벗어나 지금의 눈부신 산업사회를 가능하게 한 진보와 문명에 의문을 가진다. 우리 인간에게 진보와 성장 그리고 다른 생명체에 대한 압도적 우위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인 프로메테우스의 선물인 ‘불’은 무조건적인 찬양의 대상이 아니라 ‘오랜 의문’에 해당한다. 프로메테우스란 이름이 의미하듯 ‘앞을 보며’ 끝없이 돌진한 결과 인류가 처한 오늘의 생태적 위기를 보면, 진보가 과연 우리에게 이로운지 해로운지 그 구분이 쉽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어둠이 찾아오기 전 어스름한 황혼 무렵에, 저만큼 실루엣으로 보이는 것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아니면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개와 늑대의 시간’에 우리가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털 없는 원숭이에게
부싯돌 속의 불 왜 몰래 주었을까
그것이 오랜 의문이라는 듯.
사슴을 쫓던 그때 동굴 속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오던
달큰한 익힌 고기 냄새만 아니었더라도
쓰레기더미 옆을 지나다가
뼈다귀에 붙은 고기조각 핥지만 않았더라도
사람들의 우리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듯.
어둑어둑 저녁이 물드는 지금
인간의 친구로 있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근질거리는 송곳니로
이 쇠창살 끊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골똘히 생각하는 유기견의 우리 속
저 개 같은 것 보고 있자니
갑자기 겨드랑이가 근질거리는 듯. - 「개와 늑대의 시간」 전문
빙하기인 기원전 4만 년경, 인간과 늑대는 서로 먹을 것을 사냥하며 다투어야 하는 경쟁자였다. 그런데 프랑스의 쇼베 동굴(Chauvet Cave)에서 벽화와 함께 어린아이와 늑대로 추정되는 동물 발자국이 나란히 발견되면서, 인류가 기원전 3만 년경에 이미 동물을 사육했으며, 동물과 정서적 관계를 맺으며 효과적으로 사냥을 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했다. 늑대를 길들인 개와 인간의 공생과 교감은, 서양문명의 기원을 다룬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오디세우스의 충견 아르고스(Argos)의 감동적인 이야기에서도 확인된다. 아르고스는 그리스 연합군과 함께 트로이 원정을 떠난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20년을 늙고 병든 몸으로 기다리다 마침내 돌아온 주인을 만나고서 곧바로 숨을 거둔다. “인간에게 가장 훌륭한 친구는 개다”라는 프러시아 프리데릭 대제의 말을 입증해 주는 이야기라 하겠다. 이는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 형제는 제우스 형제와 티탄족 간의 전쟁에서 제우스의 편에서 싸운 대가로 땅의 생명체들을 되살리고 인간을 번성케 할 임무를 띠고 지상에 내려온다. 프로메테우스는 진흙으로 신의 모습을 본뜬 최초의 인간 남자를 만들고, 에피메테우스는 여러 동물들을 만들어 제우스가 보낸 선물들을 골고루 나누어 주다보니, 정작 프로메테우스가 만든 인간에게 줄 선물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소유물인 불을 훔쳐다 인간에게 선물로 준다. 모든 동물들을 만들어 각기 필요한 것들을 선물로 준 에피메테우스의 모습에서 인간과 동물이 원초적으로 공생과 교감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에피메테우스가 동물들에게 선물을 골고루 나누어주는 기준은 이른바 각자무치(角者無齒)이다. 강한 뿔을 가지면 날카로운 이가 없는 식으로 각기 존재방식에 맞게 고유한 특징을 가지게 한 것이다. 이렇듯 모든 존재는 서로 보완적인 존재로 기꺼이 공존할 때에야 비로소 평화롭게 살 수 있음을 생존조건으로 준 셈이다.
2. 선물 가득한 판도라의 항아리
제우스는 불을 훔친 인간들에게 벌을 주기로 결심하고, 대장장이의 신인 '헤파이스토스'를 불러들여 여자인 ‘판도라’를 만들게 하고 에피메테우스에게 선물로 전해준다.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를 아내로 맞이하고, 판도라는 매일같이 제우스가 건네준 항아리를 보며 궁금해 하다 호기심을 못 이기고 뚜껑을 열자, 욕심, 시기, 원한, 복수, 질병 등 수많은 죄악과 재앙들이 빠져나와 사방으로 흩어졌고, 놀라서 재빨리 닫았지만 이미 모든 재앙은 빠져나가버리고 맨 밑바닥에 있던 '희망' 만이 남게 된다. 모두가 익히 아는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저항적인 선각자인 프로메테우스에만 주목하고 그 동생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는 원망의 대상으로 폄하한다.
에피메테우스는 그 이름대로 ‘나중에 생각하는 자’이다. 판도라와 결혼 당시 형인 프로메테우스에게서 "제우스의 선물을 절대 받지 마라."는 충고를 받았지만, 아름다운 판도라에게 푹 빠져 형의 충고를 무시하고 신들이 준 선물인 판도라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시작된 재앙으로 대홍수가 일어나 판도라와 함께 죽게 된다. 대개는 이렇듯 어리석은 에피메테우스 때문에 인간 세상에 불행이 시작되고 결국 홍수로 멸망하게 되었다며 원망한다. 그러나 그 후일담을 보면,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 부부의 딸인 퓌라가 프로메테우스의 아들 데우칼리온을 남편으로 맞아 대홍수 이후 우리 인간의 조상이 되었고, 우리에겐 온갖 불행과 재앙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희망이 남게 된다. 에피메테우스의 후예인 우리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앞을 내다보는 예지를 가지지는 못했지만, 지난 자취를 뒤돌아보며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미래를 훤히 내다보며 여러 재앙과 어려움을 요리조리 피하며 산다면 그게 무슨 낙원이겠는가. 어린애들이 감기나 수두 등 크고 작은 질병들을 힘들게 겪고 나면 부쩍 야물어지고, 자라면서 겪는 수많은 실패나 좌절 등을 안으로 삭이며 이겨내면 그만큼 성숙해지지 않던가. 부부 사이도 작은 문제로 부딪치며 아옹다옹하다가도 가족에게 큰 어려움이 닥치면 한 마음으로 서로를 북돋우며 함께 이겨나가지 않던가. 견디기 힘든 시련이나 고통도 주변의 우정 어린 위로와 격려로 잘 감내하면 서로 진정한 이웃이 되지 않던가. 동구 앞 늠름한 느티나무도 비바람에 살갗이 찢어지고 가지가 부러져도 마침내 그 찢기고 터진 몸으로 팔을 벌려 넉넉한 그늘을 드리우지 않던가. 이와 같이 고통과 시련은 먼 훗날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성숙하게 해 결국엔 축복이 되지 않던가. 사실 신이 인간에게 벌로 준 ‘판도라’는 재앙을 불러온 여자를 가리키지 않고, ‘많은 선물을 받은 여자’를 뜻한다. 제우스가 판도라를 보고 만족하여 기꺼이 생명을 불어넣자, 여러 신들이 다투어 판도라에게 선물을 준다.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움, 교태,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을 선물하고, '헤르메스'는 뛰어난 말솜씨와 재치, 마음을 숨기는 법을, '아테나'는 방직기술 등을 선물한다. 이렇게 많은 선물을 받은 여자인 판도라에게서 대홍수 이후 우리 인간의 새로운 삶과 역사가 가능하게 된다. 새로운 존재를 낳는 판도라의 그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생명력은 성배순의 시 「암컷론 2」에 잘 드러난다.
거무튀튀한 등에
찰싹 달라붙은
하얀 새끼 알.
어부바하다가
등의 살 속으로
품어버렸네.
물갈퀴 손 펼쳐
펑펑, 생살 찢고
너덜너덜 등짝.
폴짝폴짝 넘어가는
열 마리, 백 마리
피파개구리 새끼들. - 「암컷론 2」 전문
그런데 여기서 시인이 굳이 ‘여성’이란 표현 대신 ‘암컷’으로 표현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여성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생물학적 구분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학습된 사회문화적 구분을 뜻한다. 이른바 섹스(Sex)가 아닌 젠더(Gender)로서의 여성을 가리킨다. 여성의 권리 및 평등을 중요시하는 여성주의자들에겐 좀 거북하겠지만, ‘암컷’이야말로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생명력을 가장 싱싱하게 전달하는 살아있는 표현이라 생각된다. ‘여성’이란 표현이 주는 어딘지 싱싱한 생명력이 제거된 건조하고 엘리트주의적인 느낌은, 인간 이외의 암컷 생명체가 가진 근원적인 생명력을 포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암컷론 2」에서 암컷의 생살을 찢고 열 마리 백 마리 태어난 새끼들은 개구리들이지만, 이런 헌신적인 생명력은 암컷 딱따구리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한낮 공원 벤치 위 서른 안팎의 여자
꽃무늬 블라우스 세 번째와 네 번째
단추를 연다. 동그랗게 드러나는
맨살 속으로 어린 아기, 연신 고개를
들이받는다. 지나가는 행인들
얼른 자리 피하고 어머나, 어머나
폐경이 된지 오래된 아주머니 둘
야하다, 아름답다, 중얼중얼 실랑이한다.
나무 구멍 밖으로 얼핏 보이는
암컷 딱따구리의 동그란 맨살…….
혈관이 모여 있는 곳의 따듯한 체온
아기에게 좀 더 깊이 느끼게 하려고,
나무를 쪼던 부리, 악물고는
뭉텅뭉텅 붉은 깃털 뽑아 만든
쪼끌쪼끌 포란반. 들여다보고 있자니,
공연히 팽그르 눈물 돈다. - 「포란반」 전문
대체로 암컷 조류들은 번식기가 되면 배 부분의 깃털이 다 빠지면서 붉은 살이 휑하니 드러난 포란반이 저절로 생겨난다. 혈관이 모여 있는 맨살로 알을 품으면 따뜻한 체온이 직접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인데, 딱따구리의 경우는 좀 특이해서 알과 맞닿는 배 부분의 털을 날카로운 부리로 스스로 미련 없이 뽑아버리고 맨살로 알을 품는다. 이렇게 털을 뭉텅뭉텅 뽑아내는 고통을 감내하는 딱따구리의 쪼글쪼글한 포란반은 그 헌신적 희생이 두드러져 아기엄마나 나이든 아주머니들의 눈물을 자아낸다. 아기 엄마와 암컷 개구리와 딱따구리의 새끼에 대한 헌신이 서로 온몸으로 전해져 눈물을 팽그르 돌게 한다. 마치 개와 인간이 서로 깊게 교감하고 공존하며 기쁨을 누리듯이 말이다. 우리 자신이 우주와 자연의 일부로 다른 동물과 연결돼 있다는 시인의 인식은 암컷에 대한 뜨거운 공감을 통해 뭇 생명에 대한 포용력과 일체감으로 확산된다. 아기엄마와 암컷 개구리와 딱따구리가 거울 신경세포를 통해 서로 교감함으로써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모든 것들이 결국 한 뿌리에서 나온 ‘만유동근(萬有同根)’임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3. 판도라의 동굴
성배순은 이번 시집의 ‘시인의 말’에서 상서로운 동방의 동물인 청여우에 대한 기다림을 말하고 있다. 청여우는 「비 오는 날 여우야 뭐하니」에서도 등장한다. 청구국은 중국의 동쪽에 있는 군자의 나라인 우리나라를 가리키는데, 중국의 문헌인 『산해경(山海經)』에는 ‘청구산(靑丘山)의 양지바른 남쪽 언덕에는 옥돌이 많이 널려 있고, 음지인 북쪽 언덕에는 청확(靑雘)이라는 질 좋은 푸른 염료가 나며, 이 산에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처럼 생긴 짐승이 산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삼키면 만물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구슬을 지니고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해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여성으로 변신하기도 하는 여우는, 천하가 태평해지는 상서로운 조짐을 알려주는 상상 속 동물이다. 시인은 매혹적인 여성으로 변신해 고귀한 미남 백작과 가면무도회에서 춤추는 어린 시절의 꿈을 가능하게 해줄 청여우를, 어린 시절 여우놀이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며 애타게 부른다.
폭풍우 쏟아지는 한낮, 어렸을 때처럼 다시 묻는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소설 안나카레리나 미남 장교, 브론스키 백작의 사랑을 꿈꾸니? 아니면 인생의 신 포도처럼 십 만 리 밖의 풍경을 바라보니?
늑골 깊은 어디쯤 옥이 많은 남쪽을 지나 북쪽의 푸른 흙길을 밟고 동쪽으로 300리쯤 청구국의 검은 청빛 청여우가 툭툭 꼬리를 친다. 청구슬을 보이며 손을 내민다.
빨간 구두를 신고 둥둥 떠 있는 도시, 청빛 세종호숫가에서 백작과 춤을 출 가면을 비춰본다.
죽었니? 살았니? 청여우, 귀 쫑긋거리며 다시 묻는다. 죽었니? 살았니?
- 「비 오는 날 여우야 뭐하니」 전문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매혹적인 여성으로 멋진 삶을 가능하게 해 줄 청여우를 따라 집을 나선다. 시간을 거슬러 ‘동굴 속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는 ‘돌아오지 않는 남자를 찾아 동굴을 나서고, 바위산을 넘어, 뿌연 강을 건너’ 도시 한가운데 서 있다. 여자 앞에 ‘검은청빛 낯빛 고운 여우 응애응애 꼬리를 나풀대고’ 있다. 시인이 바라보는 여자는 사실은 시인 자신의 갈망이 투사된 페르소나다. 그런데 이 여자는 동굴 속에서 아기를 키우고 또 남자를 찾아 동굴을 나선다. 그런데 왜 번듯한 규모와 가구를 갖춘 ‘주택’이 아닌 ‘동굴’에 사는가. 각종 가구와 집기 그리고 장식들이 모두 생략된 채 남자와 아기가 함께 살아가는 최소한의 소박한 자립 공간을 ‘동굴’로 의미하는 게 아닐까. 마치 간디의 오두막처럼, 복잡한 시스템과 편의시설 속에서 그 환경조건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작지만 소박한 동굴에서 가족들이 서로 가까이 몸을 맞대고 가난하지만 생기 있는 인간관계를 이루며 자급자족 속에 각자 품위를 지키며 당당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그의 두 번째 시집의 표제작인 「아무르 호랑이를 찾아서」에서도 드러난다.
지금쯤 아무르 강물에 몸을 적신 그가 푸르르
황갈색 몸 털기를 하겠다.
장백산맥을 타고 백두산으로 들어 왔겠다.
서둘러 아름드리 숲으로 간다.
으앙 스무 살 아가가 칭얼대며 쫓아온다.
으아앙, 서른의 아가가 고막에 대고 소리치며 운다.
안 돼! 절대 뒤 돌아보지 마!
귀를 막으며 커다란 너럭바위 밑 굴속으로 들어간다.
이제 함경산맥을 거친 그가 태백산맥을 내려오다가
방향을 틀어 차령산맥으로 들어 왔겠다.
사람에게 노출을 꺼리는 그가 은밀한 그가
꼬리를 살짝 치켜들고 두둥실 나타나면
어흥, 닮은 두 눈이 마주치면
아기가 자라지 못하게 척척 모든 걸 대신 해주던 팔다리
옜다~ 던져 주리라.
커다란 아가를 업어주던 휜 등도
옜다~ 내밀리라.
그렇게 완전히 먹히고 나면
호랑이는 내가 되고 나는 호랑이가 되고
사뿐사뿐 산 넘고 물 건너 집으로 갈 테다.
가장 먼저 벽과 천장에서 사탕을 떼어내고
어흐흥!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어른, 아기들에게 소리칠 테다.
당장 이 집에서 나가!
- 「아무르 호랑이를 찾아서」 전문
우리 민족의 정기를 상징하는 백두산 호랑이가, 광활하게 펼쳐진 만주 벌판의 침엽수림 속으로 굽이쳐 흘러가는 아무르강(우리가 흔히 흑룡강이라 부르는) 강가에서 물놀이를 즐기다 백두산을 지나 차령산맥으로 들어와 마침내 ‘나’와 ‘너럭바위 밑 굴속’에서 만나게 된다. 나와 은밀하게 눈을 마주친 아무르 호랑이에게, 나는 그간 오로지 가족들에게 헌신하던 팔다리와 휜 등을 기꺼이 내밀고 완전히 먹혀 마침내 아무르 호랑이가 된다. 호랑이가 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과보호로 아직도 사탕이나 먹으며 칭얼대는 어른 아기들을 집에서 내쫓고 호랑이처럼 당당하게 내 삶을 살겠다고 선포한다. 나는 아무르 호랑이의 이동경로를 굴속에서 나름 측정하며 기다리다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고 스스로 호랑이가 되어, 집에 돌아가 당당하고 위엄을 갖춘 호랑이로서 푸른 기상을 떨치며 살아가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흑룡강 주변을 맴도는 아무르 호랑이의 활달한 기상이 그간 가족들에 대한 헌신으로 희미해져 버렸는데, 마침내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아무르 호랑이를 당당하게 살려낸 것이다.
청구국의 청여우와 아무르강가에서 사는 아무르 호랑이는 결국 우리 몸속에 잠들어 있는 민족의 웅혼한 기상과 강인한 생명력 그리고 원숙한 지혜를 상징하는 우리 민족의 원형(原型, prototype)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강인한 생명력과 지혜는 그의 시 「사랑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박물관에서 천 오백년 전 왕비의
어금니를 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올랐다 내렸다 하는 열,
옷 벗었다가 껴입었다가를 반복한다.
치아 없는 잇몸이 아파 병원에 간다.
아직도 나오지 못한 사랑니
어금니 뒤에 하얗게 숨어 있다.
뿌리 턱 쪽에 매복하고 있다.
세상에, 쉰 나이에 사랑니라니.
구다라 늙은 왕비 치아를 두고
누구는 어금니다 누구는 사랑니다
말한다. 천수를 누렸다는 왕비
몸이 풍화되고 나서야 드러낸
저 사랑니로 갑자기 어린 후궁이 된다.
살아서는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사랑,
죽어서도 끝내 보이지 않던 사랑,
혼백이 다 흩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낸 사랑, 이라니…….
내 몸 속 숨어 있던 사랑니
왜 지금서야 모습 보이는지
곰곰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는데
온몸의 열기, 갑자기 냉기로 바뀐다.
둥글게 웅크려 이불로 둘둘 말다가
후다닥 거울 앞에 선다.
몸 여기저기 하얗게 허물 벗겨진다. - 「사랑니」 전문
‘나’는 쉰 나이에 뒤늦게 나오는 사랑니로 인한 잇몸 통증과 온몸의 열기로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 마침 박물관에서 천오백 년 전 왕비의 어금니 유물을 보며, 그 안내문과 묘지석의 내용이 다른 점을 착안해 아마 젊은 후궁과의 감추어진 사랑이 사랑니 유물로 인해 ‘혼백이 다 흩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난 게 아닌가 생각하며 그 천오백 년 사랑 이야기에 감탄한다. 자연스레 사랑니를 남긴 젊은 후궁과 쉰 나이에 사랑니로 고통을 겪는 자신을 비교하며 곰곰 생각해 본다. 이 시에 나온 내용으로 유추하면, 공주박물관에 전시된 무령왕 왕비의 어금니 유물을 본 소회를 자신의 처지와 연결한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무령왕 당시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어린 후궁과의 사랑 이야기가 마침내 천오백 년 뒤에야 드러나듯이, 자신의 몸속에 숨어 있던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새삼스레 긍정하고서 거울 앞에 서니 몸의 하얀 허물이 벗겨짐을 느낀다. 이는 갱년기에 뒤늦게 자라는 사랑니를 자연스레 겪는 몸의 퇴화라는 세간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시 사랑을 느끼고 사랑할 만한 새로운 몸으로 거듭남을 의미한다. 사실 사랑니는 인간의 대표적인 퇴화기관의 하나라 한다. 식물을 주식으로 하던 옛 인류는 턱관절이 지금의 인류보다 훨씬 길었기에 사랑니도 당연히 정상적으로 나왔으나, 인류가 불을 사용해 음식을 조리해 먹으면서 턱관절 길이가 줄어들어 사랑니가 제대로 자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살 안에 파묻혀 있다가 사랑을 느낄 나이의 10대나 20대에 뒤늦게 나타나기에 ‘살안니’로 부르다 ‘사랑니’로 변했다는 민간어원설도 전해지며 영어로는 ‘지혜의 이((wisdom tooth)'라 부른다니, 시인이 인생의 지혜를 깨우칠 나이인 50대에 사랑니가 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닌 셈이다. 오히려 이는 시인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왕성한 생명력과 밝은 예지가 몸의 기억을 통해 표면화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즉 ‘동굴’로 상징되는 자연 질서에 순응하는 삶, 욕구를 절제하며 자급자족하는 소박한 삶에서 오는 당당한 품위를 되찾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남성중심의 사회구조 속에서 권위주의적 가장이 누리던 무절제한 욕망의 표출이 가져온 가정 파괴적 상황에서도 인내하며 가정을 지켜온 어머니의 모습에서도 확인된다. 그의 시 「여름 지나 가을」을 보자.
근처 산이란 산에 밤나무 꽃이 지천인 지금은
길쭉하니 노란 수꽃이 작고 동그란 암꽃을 품에 감춘 지금은
비릿함을 바람에 실려 동네방네 퍼뜨리는 지금은
밤나무들이 기억한 내 인생의 일화가 향기처럼 퍼지고 있네.
뾰족구두에 양산을 든 밤꽃 냄새 나는 여자를 데리고
아버지는 개선장군마냥 5년 만에 나타나는데
밥해라 이브자리 펴라 주문도 당당한데
아버지의 여자에게 풀 먹인 호청이불을 새로 꺼내주고
어머니는 한여름에 어깨를 옹송그리며
올망졸망 우리들을 꼬옥 안아주는데.
수꽃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암꽃이 점점 둥글게 자라는 지금은
하얀 솜털 수꽃이 나무 밑에 수북이 쌓여가는 지금은
할머니는 서방 잡아먹었다며 어머니께 악다구니를 쓰는데
어머니 뱃속 알밤은 토실토실 잘도 자라고
젊디젊은 아버지 사진을 제사상에 놓고
눈앞이 흐려져 잘 안 보이는구나 얘야
이제는 네가 밤을 치거라
어머니는 내게 칼을 넘겨주는데. - 「여름 지나 가을」 전문
밤꽃이 비릿한 냄새를 지천으로 날리며 흐드러지게 피는 한여름에 ‘나’는 ‘밤나무들이 기억한 내 인생의 일화’를 떠올린다. 집을 나갔다 5년 만에 ‘밤꽃 냄새 나는’ 젊은 멋쟁이 도회지 여자를 데리고 개선장군마냥 돌아온 아버지의 터무니없는 위세를 ‘어깨를 옹송그리며’ 참고 감수하던 어머니는 이제 할머니의 악다구니를 느긋하게 무시하며 아버지 제사를 준비하며 밤을 치던 칼을 내게 넘겨준다. 여기서 아버지를 둘러싼 세 여성의 태도가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이른바 ‘시앗을 보면 길가의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속담처럼 남편의 바람기에는 돌부처처럼 점잖은 여인도 화를 낸다는데, 어머니는 한여름에 시앗을 위한 이부자리를 펴며 어깨를 옹송그리며 죄인처럼 위축된 채 오롯이 그 고통을 감수한다. 이렇게 속 썩이던 남편이 먼저 세상을 뜬 뒤에도 올망졸망한 자식들을 기르며 집안을 잘 건사했건만, 할머니는 ‘서방 잡아먹었다며 어머니께 악다구니를’ 쓴다. ‘며느리 시앗은 열도 귀엽고, 자기 시앗은 하나도 밉다’는 옛말이 꼭 맞다. 할머니도 가부장적 사회구조 속에서 말 못하고 인고의 세월을 지냈으련만, 아들의 행태엔 인자하고 며느리의 고통엔 무감각하다. 아마 할머니 자신이 할아버지의 외도를 겪었다면 당연히 엄청난 마음고생을 했을 텐데 말이다. 가정을 돌보지 않고 외도까지 하는 아버지를 감내하며 시앗까지 보살피던 어머니는 그런 인고의 과정을 이겨내며 이젠 할머니의 악다구니를 가볍게 무시할 정도로 내성을 키웠고 또 그만큼 당당해졌다. 이렇게 당당해진 어머니에게 ‘밤 치는 칼’을 넘겨받은 나는 이제 할머니처럼 여성의 권리에 무감각하고 그저 자신의 처지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인고의 세월을 이겨내고 비로소 두 발로 우뚝 선 어머니를 보며, 할머니나 어머니와 달리 처음부터 당당하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갖춘 지혜로운 여성으로 삶의 품위를 지켜나갈 것으로 보인다.
아름다움과 재치 있는 말솜씨로 남자의 마음을 훔치며 생살을 찢는 고통을 참아내고 새 생명을 낳아 기르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가족의 건강과 평화를 지혜롭게 지켜내는,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생명력의 상징이 바로 ‘암컷’이다. 이는 노자가 도덕경 제6장에서 말한 ‘곡신불사 시위현빈(谷神不死 是謂玄牝)’의 세계다. 스스로를 겸허히 낮은 곳에 두고 모든 것을 포용하여 품고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고 길러내는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으며, 이를 현묘한 암컷이라 부른다는 뜻이다. 천지 만물이 생성되어 존재하게 하는 근원인 골짜기가 바로 포용과 창조의 여성성이라는 것이다. 자연의 도(道는)는 여성성이 제공하는 끊임없는 창조에 있으며, 그 도는 결코 중단됨이 없이 면면히 이어지고, 아무리 써도 다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계곡은 모든 물을 받아들이고 또 그만큼 내어놓는다. 즉 현묘한 암컷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또 내놓는다는 점에서 우주의 자궁이 되어 천지만물의 뿌리가 된다. 이 골짜기의 여성성은 바로 동굴의 이미지와도 상통한다. 그 여성성의 동굴에서 만물이 태어나고 다시 돌아가 안식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최초의 여성인 판도라의 ’동굴‘에서 인간과 자연의 근본적 생명력에 대한 믿음으로 만물이 낳고 자라고 또 안식을 얻는 것이다.
4. 경이로움의 회복
성배순의 이번 시집엔 유독 남편과의 이야기가 많다. 특히나 남편이 학교 선생님을 그만두고 농사를 짓기로 한 뒤 겪는 가슴앓이, 그 뒤로 이어진 여러 가지 사업의 실패와 좌절 등을 자신의 어머니 세대처럼 삶에 대한 낙관적 믿음으로 이겨내려는 시인의 고뇌가 잘 드러나 있다.
어느 날 문득 아무런 대책 없이 생업인 교사직을 그만 둔 남편 때문에 부부는 한동안 냉담한 채 말없는 갈등을 겪으며 서서히 새로운 현실에 순응해 간다( 「우리는 순한 짐승이 되어」). 그 뒤 남편은 게으른 낭만파 농부가 되어 생계를 심각하게 걱정하게 한다. 그런 아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은 새벽 는개가 자욱하게 낀 저수지의 아름다움을 나에게 확인시키고(「시인과 농부 2」), 꽃과 작은 생명 때문에 밭농사도 논농사도 짓지 못하고 풀밭으로 방치하는 남편을 보며 아내는 ‘굶을 수도 있겠구나’하고 걱정한다.
지금 한창 꽃이 이쁘니 보러 가자고 그가 떼를 쓴다.
감자를 심기로 한 밭은 개망초가 하얗게 하늘거린다.
군데군데 시뻘건 양귀비꽃과 노란 애기똥풀도 냄새를 풍긴다.
감자를 심기로 하고서 왜 안 심었냐고 물어보자
감자를 심으려고 풀을 뽑으려 했는데 풀이 너무 이쁘더라며
그 풀이 이렇게 꽃을 올렸다고 짜잔, 오히려 자랑을 한다.
모내기를 하려면 논에 물을 대 소독을 해야 하는데
미꾸라지며 우렁이며 꼬물거리는 생명을 못 죽이겠다며
그만 벼농사를 포기하자던 그, 그 논에 객토를 해
밭을 만들자던 그, 감자를 심어 감자를 구워주겠다던 그……,
그와 함께 살면 굶을 수도 있겠구나, 중얼거리며
꽃송이를 머리에 인 채 거들먹거리는 잡초를 뽑는다.
벌들은 잉잉거리고, 앞산의 뻐꾸기는 뻐꾹 뻐꾹 대는데. - 「시인과 농부 1」 전문
남편의 대책 없음에 대한 현실적 걱정이 보다 실감 있게 표현된 시는 「꽃을 보면 배가 고프다」이다. 소를 끌고 가던 노인이 아름다운 수로부인을 보고 반해서 꽃을 꺾어 바치며 불렀다는 고대 가요 ‘헌화가’의 구조를 빌린 이 작품에서 남편이 위험한 절벽 벼랑을 기어올라 환하게 웃으며 안겨준 진분홍 철쭉 한 송이는, 아내의 머릿속에 가득한 밀린 고지서의 숫자들에 대한 걱정 속에 ‘먹지도 못하는 꽃을!’이란 탄식을 자아낸다. 이런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도 남편은 내 손을 ‘꿈속에서도’ 놓지 않는 나무꾼처럼(「선녀의 나무꾼처럼」) 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며 매달린다. 나는 이렇게 순박하고 마음결이 고운 나무꾼에 붙잡혀 30년 동안 아이 셋을 낳고 살아온 현실에서 이제라도 벗어나 본래의 자리인 ‘옥황상제의 선녀’ 자리로 돌아가길 꿈꾼다. 즉 작은 ‘동굴’ 속 애옥살이에서 벗어나 ‘옥황상제가 있는 나의 집을 향해’ 힘껏 날아오르려 애쓴다(「나무꾼의 선녀를 내려놓으리」). 급기야 집을 팔고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한 뒤 나는 답답함과 막막함에 소갈증에 시달리며 어려움을 잊기 위해 짐짓 장자의 달관을 흉내 내면서 고려 말 서민들의 막막한 삶의 비애를 체념적으로 노래한 ‘청산별곡’의 후렴구를 불러보기도 한다(「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그런 아내의 비애를 알았는지 남편은 부지런히 인력시장을 찾아다니더니, 오래 묵혀두었던 사냥총을 꺼내 기름칠을 하며 모처럼 남성의 사회문화적 역할을 되찾으려 한다(「근황」).
그러나 시인이 남편의 갑작스런 생업 포기 이후 겪어야 했던 여러 좌절과 실패 그리고 현실의 힘겨움에도 불구하고, 남편에 대한 불만이 치명적인 적대감으로 옮겨가진 않는다. 이는 ‘시인과 농부’ 연작의 현실적인 시인과 감성적인 남편의 모습에서 확인되듯, 아내에 대한 남편의 깊은 사랑과 고운 심성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주변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에 대한 남편의 경이로움의 표현에 시인도 깊게 공감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남편은 새벽 네 시에 아내를 경운기에 태우고 ‘한 치 앞도 볼 수 없이 뿌연’ 는개가 가득 낀 저수지를 바라보며 환상적인 아름다움이라고 감탄한다(「시인과 농부 2」). 밭에 가득 자란 개망초와 애기똥풀 그리고 양귀비꽃의 아름다움과 향기에 취해 감자 심기를 포기하는 남편, 논물에 소독약을 풀면 미꾸라지나 우렁이 죽을까 봐 벼농사를 포기하는 남편 때문에 ‘그와 함께 살면 굶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걱정하면서도 남편을 원망하진 않는다(「시인과 농부 1」). 이는 시인이 대대로 물려받은 원초적인 생명력에서 오는 회복탄력성으로 지금의 이 어려움을 결국은 이겨낼 것이지만, 남편과 함께 삶의 경이로움에 대한 자각을 잃지 않는 한 삶의 품격 또한 회복하리라 기대된다. 이런 삶의 경이로움에 대한 인식이 사람과 자연의 감응 속에서 아주 짜릿하게 표현된 작품이 바로 「박태기」이다.
박수무당 김석출 그이가 말이여
한복 곱게 차려 입고
느티나무 그늘에 앉았단 말이지.
볼에 빵빵하게 바람 넣고
씰룩쌜룩 날라리 풀 때는
온 몸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말이여.
바람 갈 길 못가고
주변 풀 흔든단 말이여.
나뭇가지 못 견디고
팡팡 꽃 터트린다는 얘기,
두 말하면 잔소리지 뭐여.
8살 징채 잡던 그이가
시들지 않는 하얀 꽃
밤새워 만들던 그이가 말이여.
죽어서야 비로소 피우는
환장할 진보랏빛 꽃 앞에서
지나가는 아낙들
가슴 시퍼레지도록 안아보고
한참 섰다 간단 말이지.
입에 밥풀떼기 묻힐 수 있다면
어디든지 달려가 작두를 타던
그이의 신명나는 춤판이
한창인 지금은 봄 절정이란 말이지. - 「박태기」 전문
대개 남부 지방의 박수무당은 신 내림을 받은 강신무(降神巫)가 아니라 배워서 무당 노릇을 하는 학습무가 대부분인데, 박수무당 김석출은 귀신을 맞아들여 무당과 신령이 하나 되면 작두 위에 올라타 덩실덩실 춤을 추는 강신무이면서도 밤새 악기를 불며 악사 노릇도 하는 아주 영력(靈力)이 강한 무당인 듯하다. 그는 징을 치고 날라리를 불며 굿판의 흥을 돋우며 아낙들 가슴을 온통 흔들어 놓고 풀잎도 흔들어댄다. 그가 접신(接神)하여 신령과 하나가 돼 작두 위에서 뛰어오를 때면 진분홍빛 박태기 꽃은 나뭇가지든 몸체든 뿌리든 가리지 않고 물들인 밥알처럼 마구 흩뿌려져 피어난다. 이렇게 사람과 자연이 서로 신비로운 힘으로 연결되어 하나가 될 때 우리 인생의 봄도 절정에 달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삶의 경이로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