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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산 혼이 됨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산 혼이 된지라(창2:7).
창세기 1장의 주제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이고 창세기 2장의 주제는 하나님의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고 다스리기 위해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창세기 2장 6절에는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다고 하였다.
처음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경작할 사람이 없어서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시는 것과 같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땅에 있고, 하나님은 영이시고 사람은 육이니까 서로 교통이 안되고 관계가 안된다는 것이다. 지금 세상의 모든 문제가 그것이다. 자기를 지으신 이와 지음을 받은 자가 교통이 안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교통이 안되고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교통이 안된다고 한다.
그런 문제는 이렇게 저렇게 해결하면 되는데 나를 지으신 이와 내가 어떻게 관계를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 이것이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다. 마치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어서 안개만 자욱하게 올라와 있는 형상인 것이다.
1장에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했는데 2장에서는 땅은 이미 드러났으므로 경작해야 한다. 경작할 사람이 없으면 땅은 황무지가 되고 안개만 자욱한 형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면 그런 모양이 된다. 땅이 없으면 하나님이 내려오실 수 없고 땅이 있어도 하나님을 모르면 안개 속과 같이 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코에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산 혼이 되었다고 하였다. 숨은 생기와 같다. 숨을 불어 넣으셨다는 것은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는 것이다.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살전5:23, 히4:12).
그동안 일부에서는 2분설에 근거해서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었다고 했다. 주로 기독교에서 그렇게 구별했고 성경에도 그렇게 되어 있었는데 개역 개정 성경에는 영과 혼과 육을 구별하였다(영문 성경에서는 진즉부터 spirit, soul, body로 구분했었음). 혼은 지, 정, 의의 기능이다. 혼비백산이라 해서 사람이 죽으면 혼이 날아간다고 했는데 이 기능들에는 역할이 있다.
지는 지능이나 지성이고 정은 감정이나 느낌이며 의는 의지나 결단과 같은 역할이다. 그런데 이 기능들에는 역할은 있으나 생명은 없다.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무엇이 조종하기 때문에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만 어떤 동기 자극 같은 것들이 올 때 반응하는 것이다. 살아 있고 역할은 있으나 생명은 없다는 말은 무엇의 지시를 받는다는 뜻이다.
마음이 있으면 그 마음에 따라 지, 정, 의도 같이 움직이는 것이지 지, 정, 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자극도 없고 동기도 없으면 그것은 단지 기능에 불과하다. 혼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 모든 생물들에게 다 있다. 다만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누가 더 많고 누가 적으냐,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하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이 훨씬 섬세하고 강하고 깊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개에게도 감정이 있고 의지가 있다.
혼은 자동차로 말하면 기계와 같다. 누가 시동을 걸고 운전을 하면 큰 힘을 발휘하지만 시동도 걸지 않고 운전도 하지 않으면 그대로 있는 것이 기계다.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사람에게 혼을 주신 것은, 더욱이 다른 생물들에 비해 탁월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의 뜻을 다양한 대상과 관계를 통해, 자연을 통해서든 사람을 통해서든, 여러 가지 관계를 통해서 감지하고 표현하며 대신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느낌으로 감지하는 것이다.
꽃을 통해서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고 창세기 1장에서 새들을 보면서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감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의 말로 표현해 내는 것이다. 새가 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저렇게 능력이 있는가.’라고 생각하고 아버지를 보면서 ‘하나님은 저렇게 사랑하시는가?’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 그 이상은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비교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없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미국에 처음 갔을 때 망고라는 과일을 처음 먹어 보고 돌아와서 형제들에게 망고 이야기를 하니까 아무도 못알아들었다.
어떻게 설명을 해도 알지 못했다. 비교해서 복숭아 같다고도 하고 참외 같다고도 해도 감을 잡지 못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안보면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어떤 일로 인해서 느꼈다는 말이지 결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없다. ‘이런 경우에는 생각지 못했던 일이 오는구나. 그런 일을 생각지 못하게 해결해 주시는구나.’라고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느끼고 어떤 사람은 못느낀다. 나도 옛날에는 나에게 왜 그런 일이 있는지 몰랐다. 그런데 그분을 경험하면서 ‘이것은 이래서 이렇게 되었구나.’라고 해석이 되었다. 축복을 받으면 그만큼 해석의 폭이 넓어지는데 저주를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이 저주로 보인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을 축복으로 받은 사람들의 느낌과 경험을 써 놓은 책이기 때문이다. 나도 어떤 은혜를 받았는데 모르고 있던 것을 성경을 봄으로써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가 자기를 어떻게 키우고 어떻게 사랑했는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다 알 수 없다.
자기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키워보면 그때야 자기 부모가 자기를 어떻게 키우고 사랑했는지 알게 된다.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아서 아는 것과 그 전에 말을 듣고 아는 것과는 차이가 많다. 더구나 책에 그것을 표현해 놓으면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게 아는 것이 지식이다. 경험이 없는 지식인 것이다. 그러니까 경험이 없으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맞다. 사람에게 혼이라는 기능을 주신 것은 이것을 감지해서 표현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사람의 혼은 하나님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탁월한 기능이 있다.
시인이 꽃을 보는 것과 농부가 보는 것, 장사꾼이 보는 것이 다 다르다. 같은 꽃을 보아도 시인과 농부와 장사꾼의 느낌이 다르다. 느낌이 다르니까 표현도 다르다. 우리가 남의 시를 읽으면서 공감을 하는 것은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시인이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시를 읽다 보면 사물을 볼 때 시인의 입장에서 보게 된다. 내가 느끼지 못한 것을 시인이 느끼고 표현해 놓은 것이다. 소년 시절에 좋아하는 시와 청년 시절에 좋아하는 시, 장년 시절에 좋아하는 시, 노년에 좋아하는 시가 다르다. 소년 시절에 우리는 소월의 애절한 시를 좋아했다.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연애를 제대로 못해보고 짝사랑만 하던 사람의 입장에서 들으면 공감이 되는 시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저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우리 마음을 표현해 준 달콤한 시다. 그런데 늙으면 그런 시가 아무런 감동이 안된다.
집사람이 TV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당신은 지금도 젊네.”라고 하게 된다. 젊었을 때의 느낌과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느낌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복되게 느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감정을 복되게 하는 것이다. 원망만 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 보면 그 말이 다 맞다. 내가 공감을 하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의 말이 맞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행복하게 느끼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하나님에 대한 불평을 하면 공감이 되지 않아서 듣기 싫다. 좋은 말을 들으면 좋은 감정이 일어나지만 나쁜 말을 듣고 부정적인 말을 들으면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난다. 부정적인 세계에만 살던 사람들은 감정이 아주 메마르다.
부정적이니까 행복할 시간이 없다. 그러니까 될 수 있는 대로 행복한 사람들을 접촉하고 사는 것이 좋다. 화장터에서 일하는 사람은 얼굴이 밝은 사람이 없다. 화장터에서 웃을 일도 없고 웃으면 미친 놈이 되니까 웃고 싶어도 웃지 못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표정이 굳어져 버린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 오면 아무리 웃지 않으려고 해도 웃게 된다. 긴장을 하려고 해도 긴장이 안된다.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보고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분위기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혼의 작용이다. 하지만 혼은 생명은 없기 때문에 동산에 생명나무를 두시고 그 과실을 먹게 하신 것이다. 혼은 어떤 자극을 받으면 그렇게 된다. 좋은 환경에서 자극을 받으면 그렇게 되고 나쁜 환경에서 자극을 받으면 그렇게 된다. 맹모삼천지교라는 것이 그것이다. 처음에는 공동묘지 옆에 살았는데 맹자가 장사지내는 흉내만 냈다. 맹자의 어머니는 자식을 그런 데서 키우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시장 부근으로 옮겼더니 맹자가 맨날 물건을 사고 파는 흉내만 냈다. 그래서 서당 근처로 옮겨서 키웠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의 사고방식과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의 사고방식이 다르다.
같은 사람이지만 사고방식이 다르니까 같은 사물을 보아도 느낌이 다르고 감정이 다르다. 사람은 육체뿐 아니라 혼도 외부로부터 양식을 먹어야 한다. 육체는 양식을 먹지 않으면 못산다. 마찬가지로 혼도 외부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들여서 살고 있다. 그러니까 좋은 것을 받아들여야 되지 안좋은 것을 받아들이면 안된다. 구약성경에는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시체를 가까이 하면 부정해지기 때문이다.
시체를 보거나 만졌을 경우에는 칠 일간 정결하게 하라고 하였다. 그 말은 장례식장에 가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죽음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가장 부정적인 것이 죽음이다. 죽음을 가까이 하면 거기 물들게 된다. 환경이 이렇게 중요하다. 사람에게는 유독 그러하다. 개는 어디서 키우나 별로 큰 차이가 없다. 요즘은 애완견, 반려견이라고 해서 사람과 같이 키우니까 개가 자기를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그것도 혼이 있으니까 자기가 사람인 줄 안다. 하물며 사람이 하나님의 농장에 산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람의 감정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환경은 사람에게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사람이 무엇을 만들면 자기처럼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도 자기의 형상을 따라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고 사람도 자기의 형상을 따라 자기의 모양대로 만든다. 자기같이 기능을 만드는 것이다. 기계를 만든 것을 보면 사람이 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가장 좋은 예가 포크레인이다. 어쩌면 그렇게 팔과 똑같이 만들어 놓았는지 포크레인이 일하는 것을 보면 한없이 보고 싶다. 움직이는 것을 보면 너무나 신기하다.
사람은 일을 많이 하기 위해서 기계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기계는 사람과 똑같이 만들어졌고 사람에 비해 몇 백배의 일을 한다. 그런데 기계 자체는 생명이 없다. 기름을 넣어야 하고 사람이 운전을 해야 한다. 먹기도 해야 하고 누가 조종도 해 줘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명을 가진 기계, 사람이 전혀 손대지 않고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일을 하는 기계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그런 기계를 만든다면 인류는 멸망한다.
그러니까 그런 기계를 못만들도록 사람을 만들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을 따라 자기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은 아주 타당한 말씀이다. 성경에는 조금도 사실이 아닌 것을 이야기한 말이 없다. 있는 사실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했느냐의 차이지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없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하신 것처럼 사람도 그러하다. 기계를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사람과 똑같다. 사람이 쓰기에 편리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자동차라는 기계는 선진국으로 가는 문턱이라고 한다. 자동차를 만들면 모든 것을 다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자동차 하나를 만드는 데 3만개의 부품이 들어간다고 한다.
자동차가 그렇게 정밀한 기계다. 운전을 해 보면 오랜 세월을 통해서 개선하고 또 개선해서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집어넣어 놓았다. 그보다 더한 것이 컴퓨터다. 아무리 그런 것을 만들었어도 생명은 만들지 못한다. 어떤 기계든지 모든 기계는 다 예외 없이 인간의 공급을 받아야 그 기능을 발휘한다. 사람은 그 생명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지어졌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을 감지하고 표현하도록 지어진 존재다. 스스로 깨달아서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원숭이에게 과제를 맡겨놓고 생각해 보라고 하면 원숭이 이상 생각하겠는가. 사람이 가진 과제는 사람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러니까 나보다 나은 이를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귀어도 나보다 나은 사람을 사귀면 배울 것이 있어서 향상이 되지만 자기보다 못한 사람만 사귀는 사람은 배울 것이 없다. 그러니까 향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보면 어떤 친구는 자기보다 조금만 나은 사람과는 같이 안놀았다. 자기보다 나은 사람과 놀아야 발전이 있지 그런 사람은 발전이 없다. 나는 다행히 나보다 나은 사람과 놀았다. 아버님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아버님은 나를 어려서부터 배울 것이 있는 분에게 데려가셨다.
그것이 나는 창피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였는지 나는 배울 것이 있는 데 가고 싶지 배울 것이 없는 데는 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도울 수는 있지만 배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을 만들어 놓으신 것은 하나님에게 배우라는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받아먹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에게서 배우는 것은 인생을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다. 인생을 높여 주는 것이다. 나보다 크신 이, 나보다 많이 아시는 이, 나보다 앞선 이를 만나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와 같이 자라던 친구들에 비해 나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그 이유는 이것이다. 내가 더 나은 세계로, 더 나은 세계로 간 것은 내가 스스로 갔기 때문이 아니다.
더 나은 친구들과 사귀었기 때문이고
그 친구들이 나를 끌어 주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 ‘영생’은 지고의 행복, 참 행복이다. 지고의 행복, 참 행복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 비할 데 없는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는 것은 적은 일이 아니다.
같은 시골 사람이라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늘 설교를 들어서 아는 것도 다르고 많이 다르다. 우리나라 개화기에 기독교가 그런 데서 큰 역할을 했다. 그 전에는 선비들이나 중국 문명을 받아들였지 일반 농민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똑같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 것이 특권이다. 그런데 여기 무한정 있는 것이 아니다. 제한이 있다. 혼은 제한을 받고 있다. 그런데 거기는 특권도 있다. 이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서도 전쟁이 있었고 동양에서도 전쟁이 있었다. 동양에서의 전쟁은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유럽에서 사령관을 했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그가 더 유명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이차 대전에서 태평양 사령관으로서 일본을 항복시킴으로써 대전을 종결 시킨 명장이다. 맥아더는 한국 전 국토의 95%이상이 적군에 점령되어 부산에서 갈 길을 찾아야 했을 때 인천상륙 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수도를 회복하고 북한군을 물리치고 한국을 구해낸 한국전쟁의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못느끼고 있지만 그때 우리가 잘못되었으면 대만처럼 되었거나 아니면 아예 없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미국 대통령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군인으로서의 제한 때문에 한국전쟁을 끝맺지 못하고 통일을 코앞에 두고도 군복을 벗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위치의 제한이다. 제한된 특권이다.
엄청난 생살권을 갖고 있지만 제한이 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그러하다. 하나님은 모든 권한을 다 주셨지만 제한을 두셨다. 사람은 이 제한을 받아야 한다.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사람의 제한을 받지 않는 기계는 사람을 죽인다. 기계는 반드시 제한 장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사람을 제한해 놓으셨는가. 왜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하지 말라고 하시는가. 다 이유가 있다. 그냥 두면 서로 망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흙과 같은 운명이다.
흙은 신기한 능력을 갖고 있다. 눈도 코도 없는데 씨를 뿌려 놓으면 어떻게 그것을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가 되게 만드는지 신기하다. 그런데 제한이 있다. 콩을 심으면 꼭 콩만 낼 수 있지 팥을 낼 수 없다. 만일 콩을 심었는데 팥도 만들고 수박도 만들고……, 자기 마음대로 만들게 만들어 놓았다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 흙은 받은 씨밖에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혼은 흙으로부터 나온다.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산 혼이 된 것이지 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신 세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심전도 신호가 끊기면 혼도 끝나버린다.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생각과 몸이 다른 것 같고 생각만 따로 떼어놓으면 될 것 같다. 그러나 절대로 불가능하다. 죽으면 생각도 없어져 버린다. 사상도, 느낌도 다 없어져 버린다. 흙에서 나온 것이니까 없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흙에 제한성이 있다면 혼은 자연히 제한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흙에서 나왔는데, 흙이 제한을 받고 있는데 혼이 제한을 받지 않겠는가. 인간의 기능은 무엇이나 다 흙과 함께 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다 해도 그것은 흙의 운명과 함께 하는 능력이다. 그러니 겸손해야 한다. 이것을 알면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 흙은 혼과 함께 절대적 제한 안에 있는 것이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시면 흙으로 지어진 인생이 경영하는 모든 일은 끝나는 것이다. 혼이 나가면 육신도 죽고 육신이 죽으면 혼도 죽는다. 혼과 육은 분리될 수 없다. 어떤 철학적인 사람들은 혼과 육이 분리된다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유체이탈이라는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사술이지 정도가 될 수 없다. 92년에 해프닝이 일어났을 때도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이 그것이었다. 자기들이 육체를 이탈했다는 것이다. 자기 몸을 벗어나서 공중에서 내려보았다는 황당한 소리를 했던 것이다. 근본적인 이치를 모르면 속는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 비과학적인 일은 있을 수 없다. 전부 정상적이고 상식적이다. 그런데 비상식적인 이야기로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했던 것이다. 특별히 종교 안에 그런 일이 많지만 이치를 알면 속을 필요가 없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신비를 빙자해서 그런 소리를 하는데 구약에 표현을 그렇게 해 놓았을 뿐이지 사실 자체가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물이 어떻게 갈라져서 벽이 되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써 놓았다. 허무맹랑하게 써 놓은 것이 아니라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써 놓은 것이다. 제한이 있다 해서 나쁜 것이 아니다. 제한이 있는 것이 우리가 축복과 영광을 누리는 길이다. 기계는 그 제한 때문에 값이 비싼 것이다. 제한이 없으면 기계는 가치가 없다. 흙은 자신에 비해 엄청난 축복과 영광을 누린다.
숨이 코에 붙은 인생에게 하나님을 표현하는 영광,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호를 주신 것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다.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간다 해서 위대한 것이 아니다. 숨이 코에 붙어 있으면서 이런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이 놀라운 것이다. 보잘 것 없는 흙은 농장이 되면 황금물결을 이루게 되며 인생(산 혼)은 말씀이 육신이 되면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그냥 두면 잡초밭밖에 안되는 것이 흙이다. 그런데 농부가 있어서 농장이 되면 황금물결이 일렁거린다. 세상 어떤 것보다
생산성이 높은 것이 흙이다.
밭이 생긴 것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해마다 엄청난 양의 양식이 나온다. 돈으로 계산해 보면 무엇이 흙보다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겠는가. 씨가 좋고 농부가 좋으면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 흙이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까지도 식량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잉여농산물을 주지 않았으면 우리는 굶어죽을 판이었다. 그런데 통일벼가 나온 후로 식량문제가 해결되었다. 같은 땅에서 네 배가 생산되니까 춘궁기라는 것이 없어졌고 지금은 쌀이 남아서 주체를 못한다. 좋은 씨를 가진 농부만 만나면 흙은 수천, 수만 배의 부가가치를 갖게 된다. 그렇게 영광스러워지는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숨이 코에 붙어 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면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 된다.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다고 했고 자고로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분이 나타내셨다고 했다. 사람이 이보다 더 영광스러워지겠는가! 무엇을 해서 사람이 이보다 부가가치가 더 높아지겠는가. 사람은 제한을 받고 있는데 그 제한 때문에 그보다 훨씬 많은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제한만 생각하면 무엇을 해도 행복할 수 없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제한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그 안에서 얻은 축복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크면서 부모에게 한두 대 맞으면 평생 그것만 생각한다. 부모에게 받은 은혜는 없고 ‘우리 아버지는 나를 때렸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흙과 같다.
흙이 황금물결을 이루었어도 잊어먹듯이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많은 혜택을 받았어도 감사가 안되는 것이다. 부자집 아이들이 감사를 많이 할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부모가 고생하면서 키운 집 아이들은 부모에게 감사하는데 잘 먹고 잘 살면서 돈을 주체를 못하는 집 아이들은 자기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의 위치로 돌아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하나님 아들은 만유의 후사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만유를 이어갈 자다.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본체의 형상이라 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이의 우편에 앉으신 분이시라 했다(히1장 참).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인데 그분을 보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용을 모르고 예수를 신이라고 생각한다. 왜 사람 예수를 보고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라.” 했는가? 사람을 보고 이런 말을 한 것은 그의 혼을 통하여 나타남이 하나님과 같았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5장 20절에는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하였다.
영을 포함하는 인간성은 혼을 통해 표현 된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떻게 사느냐는 것은 전부 혼의 일이다. 제한을 가지고 있고 없어져 버릴 것임에도 불구하고 혼이 없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제한 속에 있는 영광이다. 우리는 제한 속에 영광이 있다고 알아야 되지 회사에 다니면서 자기 급수가 올라간다고 교만하면 안된다. 급수가 올라갈수록 제한이 많다. 대신 그만큼 영광도 있고 월급도 많다. 제한을 받지 않고 월급만 많이 받을 수는 없다. 왜 회사에서 월급을 많이 주겠는가. 일을 많이 하니까, 제한을 많이 받으니까 많이 주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제한을 받고 있다면 그 뒤에는 더 큰 것이 있다.
제한을 받지 않으려고 하면 아담처럼 된다. 아담은 동산을 다 맡았지만 제한을 받지 않으려고 하다 망했다. 인간은 혼을 통해 표현된다. 선악과를 먹은 것은 혼으로 생각해서 먹은 것이다. 혼에 의해서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하며 혼에 의해서 천해지기도 하고 영광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혼을 대하는 것이지 그 사람의 살코기를 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혼은 귀하다. 혼이 우리의 인생이다. 이것은 성막이 조각목에 금을 입힌 재료들로 건축 된 것과 같은 것이다. 성막은 전부 금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조각목이 들어 있다. 조각목을 재료로 해서 금을 입혀 놓은 것이 성막이다. 알고 보면 속에 있는 심은 조각목이다. 순전히 금만 있는 것은 금등대와 법궤의 뚜껑밖에 없다. 금등대도 불을 켜기 위해서는 심지가 필요하다. 기능이 필요한 것이다. 금 스스로는 빛을 낼 수 없다. 성막의 구조를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이렇게 만드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각목은 금을 표현하고 금은 조각목을 의지한다. 조각목은 금이 둥근지, 네모난지, 판자인지를 표현해 주니까 조각목이 없으면 금은 형상으로 드러날 수 없다.
사람과 하나님은 이런 관계다. 사람이 조각목이 되면 하나님이 입혀지는 것이다. 아무리 금이 입혀져도 조각목의 생김새가 흉하면 흉하게 나타난다. 아무리 은혜를 입어도 내 자신의 인성이 잘못되어 있으면 좋은 것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조각목을 귀히 여기시고 구속하는 것이다. 어찌하든지 조각목을 구하려고 하신다. 잘못되었어도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달래고 찾아내시는 것이다. 조각목이 없으면 자기가 표현이 안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점이다. 하나님도 자기 스스로 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각목에 의지해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혼의 어떠함에 따라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신 모든 은혜와 풍성이 각각 다른 모양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똑같이 비를 내리시는데 땅에 따라서 흡수하는 것이 다르고 용도가 다르다. 하나님께서 같은 은혜를 주셔도 나의 인성과 품성에 따라 받게 되는 것이다. 같은 은혜를 받아도 혼의 어떠함에 따라 누림과 표현이 제한된다.
주자학에서 유명한 학파를 이루었던 것이 주리론과 주기론이다. 영남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는 주리론을 주장했다. 하늘의 온전한 진리가 땅에 와서 그대로 성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자식이 부모를 손댈 수 없는 것처럼 백성은 왕을 손댈 수 없다며 왕권을 유지하는데 필요했다. 그래서 조선 왕조는 주리론을 선택했다. 그런데 율곡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사람에게 와서 제한이 된다며 주기론을 주장했다. 왕권이 아무리 신성하다 해도 왕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한이 없는 혼, 제한이 없는 인생은 없다는 말다. 그러나 왕이 잘못될 수 있다고 알면 역성혁명이 일어날 수 있어서 주기론은 배척당했다. 또한 퇴계의 말은 현실성이 없었다. 그래서 나라가 망할 때까지 맨날 이상만 가지고 싸웠다. 나라보다 그 이상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정치에서 이루어지겠는가. 종교에서도 이루어질까 말까한대 정치에서 되겠는가.
안방까지 적이 들어와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주장을 세우려고만 하다가 나라를 통째로 넘겼던 것이다.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하지만 이미 다 넘어간 나라였다. 왕의 부인까지 자객을 시켜 죽여버리는 형편이 되었는데 무슨 놈의 주권이 있었겠는가. 같은 은혜를 받아도 사람의 인성이 중요하다. 인성에 따라서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몸에 금을 입혀 놓으니 보기 좋은 것이지 흉한 모양에 금을 입혀 놓으면 더 흉해 보인다. 혼의 어떠함에 따라서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신 그의 모든 은혜와 풍성이 각각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같은 은혜를 받았을지라도 우리 혼의 어떠함에 따라서 누림과 표현이 제한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혼을 다루는 가장 두드러진 예가 야곱이다. 야곱을 밧단아람에서 이십 년 동안 다루신 것은 이 혼을 위한 것이다. 인생의 수양과 연단은 다 혼에 대한 것이다. 모든 종교의 수양은 다 혼에 관계된 것이다. 불교에서도 그렇게 말한다. 우주에는 브라만이 있고 사람에게는 아트만이 있는데 브라만은 완전하지만 아트만은 붙어 있는 것이 너무 많아서 그것을 다 떼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수양이고 수도다. 소위 업이라고 하는 것, 인간에게 더덕더덕 붙어 있는 욕심이나 야망을 떼어 내느라고 명상을 하고 고행을 한다는 것이다. 야곱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데 거기 야곱의 욕심과 생각이 붙어 있었다.
그것을 떼어내느라고 이십 년 동안 아람에서 고생을 한 것이다. 그것을 다 떼어내고 난 다음에 야곱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불교로 말하면 아트만에 붙어 있던 모든 것이 떠나 브라만이 된 것이니까 신성이 있었던 것이다. 야곱은 현실적으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없어지고 빈 몸으로 바로 앞에 섰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그런 권세가 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야곱이 아무리 재물이 많았다고 해도 바로 앞에 설 수 있겠는가. 야곱은 빈 몸이었다. 쌀을 구하기 위해서 쌀 자루를 가지고, 환도뼈가 위골되어 지팡이를 짚고, 눈이 어두워서 앞이 잘 안보이는 상태로 바로 앞에 섰다. 인간은 누구도 그렇게 서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 수도 없다. 그런데 이 사람은 바로 앞에 서서 두 번이나 바로를 축복했다.
축복은 위엣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하는 것이고 가진 자가 못가진 자에게 하는 것인데 그런 거지 같은 인간이 어떻게 바로를 축복했겠는가! 그 사람은 불교에 갔으면 부처가 되었을 사람이다. 우리가 수양을 하고 연단을 하는 것은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아담의 빗나간 혼을 끝나게 하여 사단의 계략에 대하여 면역력을 가지게 하고 생명나무로 다시 살게 한다. 십자가는 빗나간 아담의 혼을 끝내는 것이다. 생각, 야망, 능력……,
모든 것을 끝내고 ‘너는 흙이다.’라고 알게 하는 것이다. ‘너는 원래 흙이다. 너는 숨이 코에 붙어있다.’ 이것이 알게 하는 것이 예수의 십자가다. 비록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여도,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도, 죽은 나사로를 살려도 사람은 흙이다. 이것을 확실하게 표명해 줌으로써 빗나간 모든 인생을 구원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연단을 받으셨다.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보고 ‘인생은 이래도 흙이고 저래도 흙이구나. 이래도 혼이고 저래도 혼이구나.’라고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예수님처럼 한다고 되겠는가? 예수의 십자가를 보고 ‘나도 저렇게 사랑해 봐야지.’ 하거나 ‘나도 저렇게 충성을 해야겠다.’라고 한다고 되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는 말이 된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할 때 예수님이 내려오셨다면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못내려오셨다.
우리의 혼을 끝내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 대신 고통을 받고 우리 대신 죽으셨다고 하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빗나간 아담의 혼을 끝내신 것이다. 사탄의 계략에 대해 면역력을 갖게 만드신 것이다. 지금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데 WTO에서는 이제야 심각하다는 발표를 했다. 얼마전 까지도 별것 아니라고 했는데 유럽쪽에 퍼지니까 심각하다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나같이 면역력이 약한 사람이 문제가 되지 면역력만 있다면 아무 문제가 안된다. 십자가를 통해서 연단되면 면역력이 생긴다. 무슨 면역력인가. ‘사람은 무엇을 해도 도로 사람이다.’ 이것이 면역력이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다 해도 나는 사람이다.’라고 알면 유혹을 받을 일이 없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라는 데 대해서 면역력이 생긴다. 아무리 사탄이 유혹해도 소용이 없다. 예수님은 그런 면역력을 가졌다. 돌을 갖다 놓고 떡을 만들어 보라고 하는 데, 성전 꼭대기에 세워 놓고 내려와 보라고 하는 데 면역력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놓고 내려와 보라고 하는 데 면역력이 있었다. 그래서 승리하신 것이다. 면역력이 있으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 요즘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한다고 난리고 한국계 미국인이 백신을 개발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을 임상실험을 해서 문제가 없다고 판정될 때만 시판을 할 수 있다.
지금 개발되었어도 언제 시판이 될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에 포함된다는 것은 이미 백신을 맞은 것이다. 면역력을 가진 것이다. 동산에 있던 아담과 다른 것이 이것이다. 동산에 있던 아담은 만들어져서 온상에서 자랐기 때문에 면역력이 없었다. 그러니까 말 한 마디에 넘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까지 통과한 사람은 면역력이 생겼다. 사탄이 와서 무슨 소리를 해도 안통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 사람이 승리자다. 에베소서에서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한 것은 면역력을 의미한다.
주님의 십자가는 아담의 빗나간 혼을 끝나게 하여 사단의 계략에 대하여 면역력을 가지게 하고 생명나무로 다시 살게 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