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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학의 정체성 연구
-18세기~19세기 문학을 중심으로-
윤경수 전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목 차
Ⅰ. 머리말
Ⅱ. 한국근대문학의 기점과 한시
Ⅲ..갑오경장 비판의 문학
Ⅳ. 18世紀 후반기문학
Ⅴ. 맺음말
Ⅰ. 머리말
한국민족문학의 기점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는 18세기~19세기 영정시대이고, 둘째는 1894년 갑오경장이다. 전자는 실학파 문인들이 주장한 학설을 근간으로, 후자는 일제가 주장하는 내용으로 김홍집 내각이 갑오개혁을 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민족문학은 국가의식과 민족적 자각이 상보적인 관계로 이뤄지는 민족주의 문학(literature in nationality)1)과는 달리, 세계문학이라는 전체적인 테두리 안에서 볼 때 한 민족의 민족성(nationality)이 진지하게 제시된 문학2)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민족문학은 그 민족의 개성이 독특하게 표현된 문학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정치성이나 외세의 영향에서 벗어난 관점에서 고찰 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문학사는 선학들이 일제 식민사관에 입각해서 문학사를 폈던 관계로, 아직도 정치성 또는 외세적인 학설이 많이 작용되어 있기에 시정해야 될 부분이 있음을 밝혀 두어야 하겠다.
우리 문학사에서 민족사적 전통의식인 민족문학의 정립은 18세기 영정시대가 문예부흥기가 된다. 그런데 선학들은 문학사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채 민족문학의 근대적인 출발을 갑오경장으로 보고 있다. 후학들 또한 선학들로 인해서 그러한 경향으로 보고 있는 실정이다.
간혹 학자들 간에 개화기를 근대화의 발원이라고 보는 견해도 없지 않다. 물론 개화파는 내재적 요구에 의해 개화라는 진보적 의욕이 보였으나, 일본의 침략 야욕에 맹목적이 되어 버리는 오류를 범했다.
한 나라의 문학사는 민족의 전통성이 면면히 계승된 것을 대상으로 타당성 있게 기술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사를 정치사 중심으로 하거나 왕조사를 중심으로 하거나, 서구성이나 서구화에 따라 본다는 것은 전근대적인 방법이며 잘못된 견해이다.
갑오경장은 일제의 치밀한 계획 아래 빚어진 정치적 사건이고 일본의 침략을 용이하게 해준 제도적 요인이 된다. 그런데 문학사를 정치적 사건과 관련시켜 정립시킨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다. 일본의 내정간섭에 의해 강행된 갑오경장이 관제개혁이란 허물을 뒤집어쓰고 침략의 입김을 불어 넣었던 것도 배제할 수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갑신정변과 갑오경장과 을사조약은 일제가 우리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속에 깊숙이 파고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동일선상으로 파악되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 중에서도 갑오경장은 우리 민족에게 전환기를 가져다 준 것이 되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아니했다.
우리 민족문학이 정치적 사건으로 근대적인 시발점을 설정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후학들은 선학의 학설로 인해 민족문학의 근대적인 시발점을 갑오경장으로 보는 경향으로 치우치고 있다. 물론 갑오경장의 생리가 외면적으로는 그럴싸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침략이라는 야욕이 도사려 있었다는 것을 주시해야 한다.
한국 문학사의 근대적인 출발을 학자의 견해에 따라 18세기 후반기와 갑오경장 그 이후 개화기로부터 보는 학설이 있어 왔다. 그런데 갑오경장으로 보는 것은 민족문학사적 발전 도상에서 과연 민족문학의 근대적인 출발점이 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이고 문제점이 많다. 간혹 학자들 간에는 영정시대를 근대문학의 시발점으로 보아 민족문학을 수립함에 있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들의 학설은 18세기 영정시대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로써 평가되리라 믿는다.
본고는 선학들이 문학사의 근대적인 기점을 갑오경장으로 보는데 있어서 시각을 달리하고, 18세기의 실학파문학을 중심으로 학설을 펴기로 한다.
Ⅱ. 한국근대문학의 기점과 실학파의 한시
1. 18세기∼19세기 영정시대
한국근대문학의 기점은 갑오경장이 어떻게 이뤄진 것을 모르고 착각한 나머지 민족문학의 시발점이라 하였다. 그 선구적 주자는 임화(林和, 1908~1953)인데 그의 저『朝鮮新文學史』(1953 한길사)에서 갑오경장 이후 신소설 작품 등을 진지하게 다루어 본격적인 현대문학사의 길을 여는 역할이라 했다. 또한 백철(白鐵, 1908년 3월 18일~1985년 10월 13일)도『朝鮮新文學思潮史』(首善社, 1948)에서 갑오경장 이후의 현대문학 분야를 집대성하여 민족론의 시발점을 갑오개혁으로 상정해 놓았다. 조연현(趙演鉉, 1920년 7월 26일~1981년 11월 24일)도 마찬가지로『韓國現代文學史』(성문각 1969)에서 갑오경장으로부터 시작한 연대를 현대문학이라는 명칭을 곧 신문학이라는 개념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초창기 한국에서 소위 일급 문학평론가들에 의해서 갑오경장을 근대문학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특히, 2012년에는 임화(林和)가 발표한 문학과 그에 대한 연구서가 십여 권이 출판되어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과 같이 그에 대한 붐이 다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근대문학의 기점을 갑오개혁으로 잡았다는 것은 미처 18세기 이후 실학사상과 영정 때 문예부흥에 대해서 미처 연구하지 못한 때문이라 하겠다. 여기에 백철 교수도 조연현 교수도 마찬가지이고 갑오경장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 3인의 평론가 중 백철의 저서를 인용하면 이들의 주장이 나타나게 되리 라 믿는다.
특히 1894년의 갑오연간은 조선이 근대적으로 전환하려는 의견을 역사가 제시한 중요한 한 과정이었다. 갑오는 개화에 의해 이뤄졌다. 이른바 갑오경장이 혁신할고 한 주요항목을 읽어 보라. 문무관존비의 폐, 반상의 법상 평등, 인재등용, 공사노비의 전적(典籍)의 폐, 인신매매의 금(禁), 조혼을 금하고 남자20세, 여자16세 이상, 대신통행의 평민의 기립, 하마의 폐, 역인 (驛人), 배우, 피공(皮工) 천인의 폐…등 이것은 얼마나 근대적인 혁신이었던가. 근대적인 청상(淸爽) 한 바람이 하로 아침 이 반도에 불어온 순간이었다. 또 한 가지 갑오연간은 근대적인 민중운동을 대표한 동학란이 역사가의 말을 빌면 요원의 불길과 같은 대세로 북상하는 시기였다. 불행이 이 혁신운동이 그 뒤에 온 경장사건과 서로 유기적으로 결부는 되지 않았으나 동학란이란 혁신운동이 얼마나 근대적인 의미 를 갖고 있는가는 당시 동학당이 일반 민중에게 발한 격문을 보면 명백하다.3)
갑오개혁은 일인들에 의해서 그 앞잡이 김홍집(金弘集, 1842~1896) 내각이 주장한 것이라 민족문학을 근대문학의 기점으로 볼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미 갑오경장의 208조항은 실학자 유형원(柳馨遠) 과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저서에서 나타낸 것에 대해 부연 설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실학자와 실학파 문학자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지닌다.
평론가 최일수(崔一秀)는『民族文學新論』(동천사 1983)에서 ‘민족문학은 봉건체제하의 신분적 제약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적인 평등한 산업사회를 지향하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근대화 운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형성 발전하여 왔다.’4)라고 했다.
민족문학은 근대화운동 없이 발전할 수가 없었고, 근대화 운동 역시 민족운동과 맥을 끊고서는 지속될 수 없었던 만큼 민족운동과 근대화 운동은 일체적인 성격을 지닌다. 또 최일수는 민족문학의 근대성에 대해 그 출발점을 영정시대부터 보는 논지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 문학의 근대를 갑오경장 때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 일부 문학사가나 비평가들은 그것을 굳이 서구적 근대관이나 또는 일본의 신문학 여명기를 근거로 해서 기산하고 해석을 하기 때 문에 박지원의 실학소설이 근대문학의 발원이라고 보는 근본 이유는 서구문학에서도 그랬듯이 김만중의 <구운몽> 등의 낭만주의를 비판하고 사실을 근대 지향적으로 정밀하게 묘사한 리얼 리즘의 문학이라는 데 있다.5)
최일수는 박지원의 실학문학이 우리 문학의 근대적 발원이라고 본 것이다. 박지원의 소설 뿐만 아니라 18세기 영정시대의 인간회복의 작품과 그 정신은 동학운동과 갑오경장의 사상적 뒷받침이 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문학사가나 비평가들인 소위 선학들이 민족문학의 근대성의 시발점을 갑오경장으로 정립한 것은 민족의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성립될 수가 없고 이를 논할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갑오경장은 일본공사 오오도리(大鳥圭介)가 김홍집(金弘集)친일 내각을 내세워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라는 기관을 만들어 208건의 신법제정으로써 사회·관제·경제 등을 개혁하게 된 것이다. 이 법은 한국의 근대화에 있어서 긴요한 것이었으나 관제개혁, 경제개혁, 과거제개혁, 세제개혁, 사회계급의 타파, 노예해방 등은 이미 실학자인 저술에 나타나 있었다.
본디 이 신법은 일제의 강제성 때문에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공문에 그쳐 한 번도 실시하지 못했다. 일제는 이 법의 실효성이 없자 후임으로 이노우에(井上馨)가 부임해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홍범(洪範) 14조를 제정하여 내정개혁을 시도했다. 이 법은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청(淸)과의 조약을 파기하려하고, 한국세력과 대원군의 정치 간섭을 배제하려는 속셈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고, 식민지 정책을 쓰기 위한 편법에 불과한 것이었다.
선학들이 갑오경장을 민족문학의 근대성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는 것은 일제가 정치적으로 식민지 통치를 합리하기 위한 갑오경장을 광복 후 그들이 주장한 것을 아무런 사려분별 없이 덮어놓고 따른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한국의 일급평론가들이 일제의 마술에 걸려들어 헤어나지 못한 것이 되고 만 것이다. 물론 이들이 주장한 무렵은 우리 문학사가 겨우 싹틀 무렵이었기에 그 성격을 객관적인 원칙으로 파악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 그런데 한심한 것은 사학자들이 이 발표를 계기로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광복 후에 사학자들이 친일파들이기 때문에 알고도 모른 척한 것이다.
광복 후에 정국은 친일파들이 정치 경제 문화 등 요직에 거의 친일파들이 득세하였기에 일제의 주장이 통해졌던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갑오개혁은 일제가 왜 주장하고 친일파인 김홍집 내각이 그 개혁을 펴려고 한 것은 조선인에게 전근대적인 조선의 봉건주의를 탈피케 하고 일제의 신문명을 받아들이게 하여 식민지정책을 잘 수행하기 위한 것이 된다. 임화 백철 조연현은 18~19세기 역사적 안식과 갑오경쟁의 생리를 제대로 심층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곁으로만 드러낸 것을 토대로 근대문학의 기점을 갑오개혁으로 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삼인은 일제의 교육을 받고 친일파도 있었으니 민족문학의 전통적인 역사를 제대로 알 수가 없었던 이들이다. 따라서 김홍집 친일내각이 어떠한 것인지 모른 것으로 한국문학사에서 씻을 수 없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원칙으로 민족문학은 민족만의 문학을 대상으로 하여야 하는데 갑오경장을 시발점으로 본 것은 역사인식이 부족한 탓이다. 려증동(呂增東)교수는『韓國文學歷史』(형설출판사 1983)에서 ‘갑오경장’은 ‘르네상스’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역사 용어로 일본으로서는 ‘경장’이 됨이 틀림이 없지만, 한국으로서는 망조가 되는 원인이 되므로6) 우리가 쓸 수 없는 용어라고7) 했다.
일찍이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은『韓國痛史』(단국대학교출판부 1975)에서 한국이 망하는 기점을 갑오년이라8) 지적했다. 그는 독립운동가로서 상해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는 역사 인식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갑오년(1894)은 일제가 자기들의 법을 만들어 실행하게 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종임금은 ‘경장’이란 말에 대해 회고하기를 ‘안으로 들어와서는 협박하고 밖으로 나가서는 경장이라고 퍼뜨리고 있었는데 짐은 그것을 보고 들음이 있다. 만고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까’9) 라고 한탄했다.
한 나라의 문학사가 타국에게 유혹되고 감언이설에 넘어간 슬픈 역사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을 때 이를 민족문학의 근대성의 시발점으로 정립한다는 것은 한말로서 역사인식의 부재이며 창피한 일이다. 우리 민족의 입장으로는 갑오경장이 갑오망조가 되기에 민족문학의 근대성이 출발점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일근(金一根)교수의 학설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肅宗代의 <九雲夢><謝氏南征記>가 當時의 平時調가 依然히 貴族文學과 古代文藝에 充實하였 으나 英祖朝에 들어와서 燕岩의 小說 <春香傳> 辭說時調 等의 革新性을 發展을 雄辯하고 있는 것이다. 그 後로부터 甲午更張까지 一見 表面上으로는 前近代的 政治에 억눌려 日時的인 萌芽 에 不過한 것 같이 보이지만 政治性과 文學性의 本質과 這問의 小說作品을 볼 때 꾸준한 內面 的(文學) 繼承은 이루어져서 東學亂의 勃發로 果敢히 나타난 것이다. 이 동안을 ‘近代前期’라 보 고 甲午更張 以後 三一運動까지 西歐思潮의 吸收에 依하여 韓國近代性의 量的 質的 大發展期를 ‘近代後期’라 보고 싶다.10)
그는 근대화의 전기를 18세기로, 갑오경장 이후 3·1운동까지를 그 후기로 보고 있다. 그의 학설에 따르면 학자들이 근대화의 시발점을 갑오경장이나 개화기로 보는 것은 18세기 문학에서 이미 이루어진 학설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김일근 교수가 영정시대를 근대화의 시발이라고 학설을 편 것은 그의 논문이 1950년대 이전의 학설에 이의를 제기한 효시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김일근 교수가 근대화의 전기를 18세기로 본 것은 연암소설에 대해서 연구하여 학술지에 발표하였기 때문에 한국최초의 근대문학을 영정시대로 보게 된 것이다.11) 그가 연암소설을 학술적으로 연구했으니 누구도 생각지도 못한 학술논문을 발표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이후 학술적으로 김윤식·김현 교수의『한국문학사』(민음사 1973)에서는 임화·백철 등의 문학사 기술방식과는 다르게 기술했다. 이 저술은 전적으로 서구에 편향됨으로써 서구화라는 오류를 낳은 데 대한 반동에서 시정하여야 하겠다는 취지에서 18~19세기 영정시대를 근대문학의 기점으로 서술했다. 이들 양인은 비평가이자 대학교수였으니, 선배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발표한 것을 저술에서 연구하여 학술적으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하였다. 당시 혈기왕성한 젊은 학자가 학술적으로 발표했으니, 이들의 학문을 뒤집을만한 학자나 비평가가 없었기에 오늘에는 문학사에서 인정하게 되었다.
한 때 이들의 발표 이후 이에 대한 찬·반 양론이 계속적으로 제기됨으로 해서 근대문학의 기점문제에 대한 논란이 크게 야기된 바 있다. 이에 대해 김윤식 교수는 반론을 제기하였는데 그는 이원조·임화·백철 교수 등이 주장한 바와 같이 개항에 의해서 근대화가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나 외적 자극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했다기보다는 비주체적인 입장에서 우리 문학을 변모시켰다고 하였다.
평론가 최일수도『民族文學新論』에서 민족문학의 근대성을 18세기 문학으로 보았는데 이 또한 후학도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갑오경장은 18세기 실학사조로 이루어진 한시·시조·잡가·창극·민요·소설 등의 예증을 통해서 볼 때도 민족문학의 근대성의 시발점이 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다음에선 일부나마 몇 가지를 예를 들어 단편적으로 소개해야 하겠지만, 한시로써 민족문학의 근대성을 논하고자 한다.
2. 사가(四家)의 한시(漢詩)
한시에서는 연암 박지원 (1737 영조 13년. ~1805 순조5년)의 문인들이 성리학만을 고수하는 소위 도학파와 다른 실학사상을 근간으로 지어 개혁하게 된 것이다. 종래의 한시는 중국의 한시를 모방하여 짓던 것을 우리의 생활 정서로 짓게 되어 일대혁신을 가져오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조선조 후기 한문학은 연암으로 개혁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개혁의 뒷받침은 실학자의 학설로 영향을 미친 것이다. 연암은 성호 이익의 실학과 밀접한 관계를 이룬다.
일찍이 연암은 정조가 문체문정(文體文正)을 거론할 만큼 연암의 문제를 쓰지 못하도록 연암에게 제재를 가했다. 그러나 청의 문물이 밀려들어와 결국 한시에서도 개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연암의 문인인 사가시(四家詩)는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를 말한다. 이들이 사가(四家)라 불리게 된 것은 유득공의 숙부인 유연(柳璉)이 1776년(정조 원년) 연행 길에 사가의 시를 모아서 1777년 청(淸)에서『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을 간행하였다. 이 책 서문에는 청(淸)의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이 사가시(四家詩)라고 하여 사가(四家)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사가(四家)는 홍대용(洪大容)과 박지원의 북학(北學)과 실학정신의 수용으로 시작에 임하였다. 여기에 이서구를 제외하는 삼인은 한두 번 내지는 네 번이나 연행을 하고, 사가의 문집을 출판하여 그곳 문사와 학자들과 교유로 자신의 학문세계를 실사구시(實事求是)로써 넓힐 수가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시의 특징은 성리학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고문파의 문인들과는 완연히 다른 것이다.
청에서 발행한『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는 이덕무(李德懋1741~1793)의『청장관집』(靑莊館集),유득공(柳得恭1748~1807)의『가상루집』(歌商樓集),박제가(朴齊家1750~?)의『명농초고』(明農初稿), 이서구(李書九 1754~1825)의『강산집』(薑山集)이 게재되어 있다.
여기서는 위의 사가(四家))를 말하는 데 이들 중 이덕무와 유득공의 시에 대해서 소개하기로 한다. 예전에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을 이르는 말과 같이 필적은 그 쓴 사람됨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어 그의 친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의 한시는 마치 그림을 연상시키는 회화성이 마치 김홍도(金弘道)의 진경산수(眞景山水)를 보는 듯한 인상으로 나타나 있다.
또록또록 석류꽃 푸른 가지 불붙는 소리 나는 듯, 的的留花燒緣林,
노랑미색 발그림자 스며들어 햇빛이 옮겨가네. 緗簾透影午暉移.
전과 같은 불 연기 꺼질듯 말듯 차 달리는 소리 나니, 篆烟欲歇茶鳴沸,
바로 이게 숨어 사는 사람이 그림을 보는 때이네. 政是幽人讀畵時.12)
기구에 석류꽃의 붉은 색감, 승구에 노랑미색 대발에 스며들어 어른대는 그림자의 율동미, 전구에 향불연기의 시각적인 이미지와 후각적(嗅覺的) 이미지, 차 향기와 보글대는 후각적인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는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맛을 풍겨 놓는다. 후에 정양완(鄭良婉)은 이덕무의 시에 대해서, ‘그의 시(詩)의 소재면(素材面)에서는 문인화적(文人畵的)인 추상성(抽象性)을 띤 것보다는 직접(直接) 자기생활(自己生活)의 주변(周邊)에서 볼 수 있는 조선의 자연(自然)을 읊었다는 의미에서 단원(檀園)의 ‘진경산수’((眞景山水)와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면이 있지 않을까 한다.’13)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시가 회화성이 짙은 진경산수라고 하는 것은 실학의 학풍으로 작품을 형상한데 있다. 대개 18세기만 하더라도 성리학자들은 앵무새 되기를 꺼려하게 되므로 당연의 조선의 시를 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현실은 고문파가 집권세력이었기에 중국유명시인들의 작풍을 모방하는데 급급하였다. 심지어 정조대왕은 시대변화를 감지하지 못하여 박지원의 문장을 순정고문(醇正古文)에 반하다고 하여 연암 박지원『열하일기』(熱河日記)와 같이 참신한 문장을 패관소품이라 규정하고 기존고문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일으킨 사건이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정조는 연암에게 제재를 가하고 규장각을 설치하고 청의 문집의 수입을 금하여 박지원의 문장에 물들지 않게 하였다.
당시 집권층 신하들은 정조가 주장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으니 고문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 엄연히 18세기~19세기는 당(唐)이니 송(宋)의 시대가 아니고 조선이기에 사가들은 조선의 시를 쓰게 되었다. 사가시인 중 연장자인 이덕무는 자신의 목소리로써 시를 지었다.그의 내정(內從)인 치천(穉川) 박종산(朴宗山)은 예술론이 장밀·주도하여 혜안(慧眼)을 갖추고 있는 분으로서 이덕무의 시세계를 다음과 같이 나타냈다.
형의 전집을 읽어보면 어디 한 자나 고미(苦味) 안 나는 글자가 있는가. 대개 현재가 과거요 과거도 바로 현재나 다름없다는 묘리를 깨닫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14)
이런 자주의식의 발로는 바로 중국 시 모방에서 벗어나는 데 의미가 주어진다. 연암 박지원의 경우도「영처고서」(嬰處稿序)에서 이덕무의 시에 대해서, 치천(穉川) 박종산(朴宗山)과 같은 내용으로 나타냈다.
현재 무관(懋官)은 조선인이다. 산천과 풍기가 중국과 다르며 언어와 민요 풍속이 한당시대가 아니다. … 그 체가 비슷하면 할수록 그 말은 더욱 거짓말일 뿐이다.15)
이덕무는 중국시의 흉내를 내는 일을 부끄러워했기16)에 시의 소재를 자기의 생활주변에서 찾아������法古而刱新������의 정신으로 시작에 임했던 것이다. 특히 이덕무의 시는 회화성이 뛰어나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년~ 1806년 이전)의 진경산수의 진경을 나타내 주는 시화(詩畵) 쌍절(雙絶)의 실학파의 시인으로서 독창적 참신한 시를 남겼다.
다음 냉재(冷齋) 유득공(柳得恭)의 시는 연암 박지원을 사우(師友)로 모셨던 관계로 그의 시문학과 실학사상의 연계로 필적도 자유자재로 나타나 그의 친필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특히 위의 필적은 글자마다 이어지는 자획이 노래 가락으로 이어주는 인상을 풍겨준다. 시의 특성이 음향성(音響性)이 뛰어난 것 또한 필적에서 나타내 준다. 그의 음향성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실학사상의 기조에서 우러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시 중 그의 문학사상을 보여주는「이십일도회고시」 (二十一都懷古詩)는 입연시기(入燕時期) 이전에 이미 지어진 것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실학사상이 작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학자들은 으레 청조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그와 교분이 있었던 홍대용(洪大容, 1731년 음력 4월 7일~1783년 음력 10월 23일)을 통해서 그 문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17) 그러나 그보다는 연암의 문하에서 실학을 배웠던 것이니, 직접으론 연암이고 홍대용과는 간접적인 영향관계가 이뤄진다.
그의 시의 특징은 역사성과 함께 우선 알기 쉬우면서도 외우기 좋게 음향성을 살려서 지었다. 특히 그의 시가 회화성이 짙은 시를 지었다는 것은 그의 시「송경잡절「松京雜絶」에 나타난다.
말방울은 절렁잘랑 온 거리 들리는데, 郞當征鐸滿通衢,
주막집 새벽닭은 꼬꼬꼬꼬 울어대네. 店舍晨鷄喔喔呼.
오정문 동녘엔 등 그림자 어른대고, 午正門東燈影亂,
시장 장사치 담배사려 외쳐대네. 市兒叫賣淡婆姑.18)
이 시는 기귀(起句)와 승귀가 의성어로, 전귀(轉句)가 회화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시에서 음악성과 회화성이 시인의 정감과 융합된 시를 옛사람은 신운이 감도는 좋은 시라고 일컬었다. 정양완(鄭良婉)은 윗 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음향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피력해 놓았다.
제3구를 제외한 1,2,4구는 모두 청각에 호소한다. 첫구의 낭당(郞當)은 첩운이자 또한 같은 설음(舌音) 동위쌍성(同位雙聲)으로, … 다음에 정탁(征鐸)의 절렁절렁과 잘랑잘랑의 양성 모음과 음성모음 차이에서 생기는 의성어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제2구의 악악(喔喔)은 첩자로 쌍성과 첩운의 미를 어울러 지니고 있다. 반복적인 음향호과를 지닌 이 악악(喔喔)은 꼬 꾜! 꼬꾜! 하는 닭 울음의 의성음으로, 물론 여러 닭들의 연달아 울어대는 소리를 악(喔)의 반 복으로 상징하기도 한다. 제4구의 부지런한 장사치, 홀은 먼 길을 가야 할 나그네들의 지레 깨 인 잠에, 덩달아 눈을 끔벅이며 달려가는 말들 굴레에서 절렁절렁 잘랑잘랑 울려나오는 방울 소리에 여기저기서 울어대는 닭 울음이 서로 호응이 된다. 1,2구는 청각에 호소하고, 3구는 슬며시 시각에 호소한다. … 제4구는 청각에 호소하기 위한 한 휴식으로 볼 수가 있 다19)
이들의 시는 고문파들의 시와는 완연히 다른 것이다. 이런 관계로 영정시대 실학은 한시에서 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박제가와 이서구의 시에서도 연암의 문하에서 한문을 배웠던 관계로 성리학파인 고문파들의 시와는 완연히 달랐다. 실학파의 문인이었으니, 이서구와 유득공의 시와 같은 맥락으로 당시 사조에 의해서 시를 지었으니, 별도의 지면을 마련해서 발표하기로 한다.
3. 茶山詩에서
앞장에서 사가의 시에서 민족문학의 근대성을 찾아보았고, 본장에서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시에서 근대성을 고찰하기로 한다.
한시는 중국의 영향을 다분히 받았기 때문에 양반의식이 가장 잘 드러난 문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산은 자신의 정서를 담음으로써 실학사상을 통해 중국시 모방에서 탈피해 조선시를 썼다. 한시는 양반계급과 가장 밀착된 문학임에도 불구하고 다산시는 고문파의 그것과는 달리 단순한 경물의 묘사에서 사회현상 전반의 묘사에 이르기까지 사실성을 그 중요한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데 의의를 지닌다. 다산은 실사구시의 학풍으로 인해서 중국시 모방에서 벗어나는 조선시를 썼던 것이다.
양반계급과 가장 밀착된 한시가 사실적인 경향으로 서민들의 애환을 담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큰 변화를 의미한다. 실학은 다산에게 그 변화의 뒷받침이 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본디 다산은 성호 이익의 학풍을 이어 실학을 다방면으로 집대성한 학자이다. 그는 남인 실학자이기 때문에 양반들의 비리를 사실적인 태도로 나타냈다. 그는 실학파 문인이기 때문에 그의 시 내용은 고문파시 와는 달리 조정을 옹호하고 찬양하는 대신에 백성들의 실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한 일례로서 그는 중국시 체제에서 벗어나서 자주적인 바탕으로 지어야 한다는 주장을 그의「老人一快事」에서 볼 수 있다.
늙은이에게 한 가지 기분 좋은 일은 老人一快事,
붓 가는 대로 마음껏 쓰는 일이네. 縱筆寫狂詞.
어려운 운자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競病不必拘,
시문의 글귀를 고치고 다듬느라 늦지도 않네. 推敲不必遲.
흥이 나면 곧 뜻을 실리고, 興到卽運意,
뜻이 나면 곧 글로 적는다네. 意到卽寫之.
나는 본디 조선 사람이고, 我是朝鮮人,
조선시를 즐겨 지우겠네. 甘作朝鮮詩.
그대들은 응당 그대들 법에 따르면 되고, 卿當用卿法,
이리저리 하라는 둥 말 많은 자 누구인가. 迂哉議者誰.
제각기 다른 격과 율을, 區區格與律,
먼 곳의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나. 遠人何得知.
염치없고 뻔뻔스런 명의 이반룡이는, 凌凌李攀龍,
우리를 동쪽 오랑캐라 조롱했네. 嘲我爲東夷.
원매와 우통이 설루를 쳤어도, 袁尤搥雪樓,
중국 땅에는 두 말하는 이 없었네. 海內無異辭.
뒤편에서 총알이 겨누고 있는데, 背有挾彈子,
어찌 마른 매미 엿볼 틈이 있겠는가. 奚暇枯蟬窺.
우리가 산석 같은 시편을 사모하려도, 我慕山石句,
여자들 비웃음 살까 두렵네. 恐受女郞嗤.
어찌 구슬픈 말로써 꾸미고 치장해, 焉能飾悽黯,
괴롭고 애간장 끓는 시를 쓰겠는가. 辛苦斷腸爲.
배와 귤은 그 맛이 각각 다른 것, 梨橘各殊味,
저마다 입맛 따라 좋은 것 고르는 것인데. 嗜好唯其宣.20)
마치 배와 귤의 맛이 다르듯이 조선 시와 중국 시는 엄연히 다르며, 그러므로 다산 자신은 조선 사람이기에 조선시를 쓰겠다는 것이다. 다산이 그들의 격과 율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이라든지, 중국시 모방에서 벗어나야 되는 것을 나타낸 것은 민족의 주체의식에 의한 소산이 된다. 그는 고문파들이 중국시를 모방하기에 급급해 개성 있는 시를 짓지 못했다고 본 것이다. 한시가 중국시 모방에서 벗어나기까지 그 과정을 문학사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삼국시대에 있어 한시는『시경』과『문선』의 영향으로 지어졌고, 고려시대는 송나라와 교통하여 송 문화기를 받아들였기에 그 중에서 처음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시문학이었다. 송의 시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한시 문학 풍은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고려의 시인들은 종래의 당시문학(唐詩文學)을 존중하던 풍을 구축(驅逐)하고 송 시풍을 따랐다.
이규보가 소동파의 글을 존중하는 시인이 많아져 진사과 급제를 30명 발표할 때마다 고려에서도 30명의 소동파가 나왔다고 할 정도로 송시의 영향은 큰 것이었다. 소동파의 시풍의 흐름은 이규보가 생존했던 때에만 그치지 않고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변함없이 계속되었으며, 목은 이색도 그 한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한시문학의 시풍을 전후의 양기로 나누게 되는데, 전기는 국초(918)에서 고종말(1259)까지로 주로 성당(盛唐)과 만당(晩唐) 풍을 따랐다가 뒤에 송시 풍을 수용해 시풍의 전환을 이룩했고, 후기는 원종초년(1260)에서 멸망(1392)할 때까지로 송시 풍을 따랐다.
조선시대의 시풍은 초기로부터 중종에서 명종시기까지는 고려후기의 시풍을 계승했고, 선조 때에 이르러서는 재래의 송시학을 버리고 당시문학을 취해 따르게 되었다.
18세기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당의 문학을 닦는데 급급했던 것과는 달리 소동파의 시픙을 존중했다.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영조 45)∼1845(헌종 11)) 가 ‘於詩學盛唐, 後改學蘇東坡, 悉棄前作’21) (시는 처음으로 성당 풍을 배웠고 후에 소동파 시로 다시 고쳐 배워, 전의 작품은 모두 버려두었다)라고 한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당시 풍으로부터 실박고일(實樸高逸)한 소동파(蘇東坡)의 유형으로 옮겨가는 작시 태도로써 대개 조선후기의 시인들은 화려하게 전환했다. 여기서 다시 조선후기의 실학파가 당송풍의 시세계에서 벗어나 조선시를 짓기까지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실학파 문인이 남긴 시 중에서 다산은 중국 시 모방에서 벗어나서 조선시를 써야 함을 역설하였는데, 이를「農歌」에서 보기로 한다.
보릿고개 험하기 태행산이고, 麥嶺崎嶇似太行.
단오절 지나서 처음으로 보리가 익네. 天中過後始登場.
누가 풋보리를 한 사발 떠서, 誰將一椀熬靑麨,
누가 대감 맛본다고 바치겠나. 分與籌可大監嘗.22)
다산은 실학파 문인답게 묘사하려는 대상을 충실하게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수법이 뛰어났다. 위의 시에서와 같이 그는 조선시를 쓰기 위해서 우리말 보릿고개를 ‘麥嶺’이라는 한자로 만들어 썼고, 재상을 ‘大監’이라는 방언으로 시에 넣어서 지었다. 다산은 이밖에 우리 말을 한자로 만들어서 ‘아가’를 ‘兒歌’로 ‘높새바람’을 ‘高鳥風’으로 ‘마파람’을 ‘馬兒風’으로 만들어 시를 지었다. 그는 남인 실학파라는 이유로 오랜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백성들이 관리의 시달림을 당하는 쓰라린 정황을 더욱 사실적으로 나타내었다.
18세기는 실학파들이 청의 선진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여 과학을 부르짖고 사회제도에 대해서 개혁할 것을 주장하는 추세였다. 다산이 근대적인 대안으로 조선시를 썼던 것은 18세기 사조에서 연유된 것이다.
다산시는 서민들의 실생활을 대상으로 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더불어 관리들의 비리를 충실하게 묘사해 18세기 후반의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반영해 놓았다. 우리의 한시는 중국 시체제와 시상으로만 지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격조와 사상과 정서를 담아야 한다.
다산은 실학을 집대성한 까닭에 사실적인 작품으로 조선시를 지을 수가 있었다. 18세기 후반기 조선시는 실로 우리의 주체의식이 담긴 민족문화의 근대성이라 아니할 수가 없게 된다. 한시에서도 18-19세기 영정시대는 실학의 영향으로 중국시 모방에서 벗어나 민족문학의 정통성의 바람을 불러 일으켜 놓았던 까닭으로 인해 일제에 의한 갑오개혁을 근대문학의 기점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당위성을 다음에서 개화기 항일가사에서 보기로 한다.
Ⅲ. 갑신정변․갑오경장 비판의 가사
1. 신태식의 친일파를 규탄한『창의가倡義歌』
『창의가』 는 개화기 때 신태식(申泰植1864~1932)이 지은 의병가사. 일명 ‘신의관창의가(申議官倡義歌)’라고도 한다. 일제 침략에 항거하여 일어난 의병장의 한 사람인 작자가 의병활동을 한 내력을 읊은 가사이다. 작자의 친필본은 전하지 않고 사본으로만 전하다가 1973년 2월호(통권 5호)『문학사상』(文學思想)에 게재되어 일반에게 널리 알려졌다. 지은 연대는 작자가 출옥한 것이 1919년이라 할 때 그 이후로 보게 된다.
흔히 개화기라 하면 강화도 조약(1876년) 이후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은 시기를 말한다. 이 때는 봉건질서를 타파하고 근대사회로 바뀌는 시기이니, 사람들의 의식과 인지가 깰 때이다. 신태식은 이런 개화기 상황에서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 소식을 듣고 참을 수 없는 분통으로 비통해 하다가 1907년에 충북 단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대항하였다. 그의 의병부대는 한말의 의병장 이강년(李康秊, 1858년~1908년)의 의병부대와 일제와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는 9월에 일제와 영평(永平)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가, 10년을 복역 출옥 후에 다시 경북의용단(慶北義勇團)을 조직하여 단장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의 의병활동은 처음 문경에서 기병한 이래 멀리는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등 곳곳을 누비며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투쟁한 경력을 실감나게『창의가』에서 노래하고 있다. 이『창의가』는 1200행이나 되는 장편 시가이니,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으며 특히 그 중에 간신과 충신에 대한 당시 상황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해 놓아. 본고에서는 개화기 당시 오적과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을 생생하게 나타낸 그 당시 상황을 참고하여 전개하려 한다.
주지하는 바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고종 21년 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홍영식 서재필 등 개화당이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정변이다.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민씨 척족들을 축출하거나 일부 처형하였다. 그러나 3일 만에 진압되어 다른 이름으로는 3일 천하로도 부른다. 흔히 개화당은 일본과 손잡고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니 친일파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갑오개혁은 일제가 주동한 운동이고 일제의 앞잡이들인 소위 친일파인 김홍집 내각이 주동한 반민족적 개혁이기 때문에 이를 기점으로 민족문학을 내세운다는 것은 문제기 따른다. 갑오경장의 내용은 일제가 조선인을 위하는 척 내흉(內凶)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 정책을 펴기 위해 안으로 자신들의 속셈을 채우고 겉으로는 그럴싸하다 위해주는 척하는 책동에 불과한 개혁이다.
『창의가』 와 풍요(風謠)를 통하여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데, 필자도이에 대해 공감하고 민족문학의 시발점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먼저 소개하고, 이 두 노래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창의가』는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에 대해서 비판하고 개화기 항일풍요에서도 갑오개혁을 비판하고 있다.
갑신년과 갑오년은 친일파들의 정변을 일으켰다는 것은 의병대장 신태식(申泰植;1864-1932)이 지은『창의가』에서 나타난다. 이 노래는 1천 2백 행이나 되는데 여기서는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에 관련된 대목만을 들어 보겠다.
(가) 사흉은 누가 되며 오적은 누가 될까
금릉위 박영효와 이조참판 김옥균이
재조의 서광범이 참위에 서재필이
(나) 大韓光武 甲午年에 倭賊이 侵犯하야
옛法을 모다 고쳐 開化하기 시작했네
官制도 모다 고쳐 衣服도 모다 고쳐
이래저래 몇 년 만에 人心은 散亂하고23)
(가)는 개화당의 비판이고 (나)는 갑오경장의 비판이다. 개화당은 개화라는 명목을 내세워 1884년(고종21) 갑신년에 우정국 낙성식 때 그들의 앞잡이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로 하여금 조정대신들을 초청해, 이들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고 중상만을 입히었다. 그들은 다시 대궐로 쳐들어가 살인을 하는 끔찍한 난동을 부렸다. 고종이 갑신년 난동을 4적의 변이라고 한 것과 같이『창의가』에서도 ‘사흉은 누가 되며 오적은 누가 될까’ 라고 한 것이다. 을사오적은 한말에 을사조약(乙巳條約)에 찬동, 이의 체결에 참가한 다섯 매국노《외부(外部) 대신 박제순(朴齊純), 내부 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 대신 이근택(李根澤), 학부 대신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을 이른다.
2. 항일「풍요風謠」
갑오개혁은 일제가 우리를 기만한 편법인 만큼 항일 개화기『풍요』에서「개혁이라 하는 것은」에서도 비방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개혁이라 하는 것은 무슨 뜻을 이름이냐
내 수중에 있는 권리 남의 장중(掌中) 넣어주고
내 국민의 소유권을 남의 인문(咽門) 넣어주면
이걸 위지(謂之) 개혁이냐 소소백일(昭昭白日)
감림하에 괴귀지설(怪鬼之說) 너무하다.23)
이 풍요는 주체인 우리의 권리가 일제의 장중에 있기 때문에 개혁이라 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그들의 식민지가 되면서부터 그들이 펴낸 법을 지키지 아니했기에 이를 항일 풍요에서는 괴귀지설이라 했던 것이다. 일제는 갑오년 6월 22일 일본공사 오오도리로 하여금 이 괴귀지설로써24) 고종임금을 협박했다.25) 즉 우리나라가 개화할 것과 옛 법과 새 법으로 두루 정치를 행하면 영원토록 뻗어나갈 새 기틀이 된다는 것26)이었다.
이와 같이 일제가 고종임금을 협박해 조선 법을 모조리 없애고 일본법으로 모두 바꾸는 작업을 했던 데서,『창의가』에서는������이래저래 몇 년 만의 인심(人心)을 산란(散亂)하고������라고 했고, 항일 『풍요』에서도������개혁이라 하는 것은 무슨 뜻을 이름이냐…괴귀지설 너무 하다.������라고 절규했던 것이다.
이들 노래와 풍요의 내용에서와 같이 갑오개혁은 우리 근대문학의 시발점이 되기에는 너무나 부적절하다. 일본의 침략을 용이하게 해준 제도적 승인인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을 민족문학 근대화의 기점으로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영정시대를 근대화의 기점으로 보아야만 민족문학의 전통성은 비로소 찾아질 수 있게 된다.
위에 소개한『창의가』와 「풍요」에서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을 비판한 내용으로 보아서도 민족문학의 근대성의 시발점으로 볼 수 없음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Ⅳ. 18세기 후반기문학
1.18세기 후반기 실학파문학
18세기 후반기는 영정시대를 일컫는다. 영정시대는 조선왕조의 중흥을 기하기 위해 새로운 기운이 거세게 일어났던 시기로 각 방면에서 제도와 개혁이 이뤄지는 때이다. 이 시기는 구제도와 실학사상이 교차되는 전환기라고 볼 수 있다. 구제도는 성리학으로 일색이 된 체제를 말하고 실학사상은 실사구시의 학풍을 근간으로 한 것이다. 실학은 재래의 공리공담에 입각한 성리학과는 상반되는 사상이기에 실학파 문인들은 허(虛)가 아닌 실(實), 가(假)가 아닌 진(眞), 피(彼)가 아닌 아(我)의 시를 진부와 도습이 아닌 참신한 글로 썼다.
실학파문인들은 종래의 낡은 제도에서 개혁해 좀 더 나은 새로운 개혁의 의지를 폈던 관계로, 구제도에 의한 성리학만을 주장하는 고문파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에 다음 도표로 나타내어 본다.
18세기 후기
성리학 실학파
도 성리학 주장 고 실 개혁 의지 실
학 문 학 학
체제의 순응 종래제도개혁
파 파 자 파
국문학에서 성리학만을 주장하는 학파를 고문파 또는 도학파라고 한다. 고문파는 개혁의 의지와는 달리 성리학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행위는 허용하지를 않았다. 이들의 행위는 마치 피라미드와 같은 구조의 생활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피라미드의 구조에서 밑에 놓인 돌 하나가 이탈하게 되면 그것은 무너지고 만다. 그 돌 하나하나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체제에 순응해야 한다. 실학파는 피라미드의 구조물을 일체 무너뜨리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실학사상은 성리학에 대해 반동하자는 것이 아니고, 개신 유학이기에 새롭게 도를 개혁해 나가자는데 의의가 있다. 실학파의 견해와 같이, 피라미드의 하부구조의 돌은 정점을 위해서 존재해 있는 것이 아니고, 호혜작용을 하는 요소로 보아야 한다.
양반 학자들은 실학사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재래의 구제도만을 고집했다. 그런 데서 고문파와 실학자들 간에 갈등이 일게 되어 드디어는 고문체인 경서체가 위협을 받게 되자 정조가 정고문(正古文)으로 환원시키고 문체반정을 단행한 것은 이미 그 시대에 근대적인 평민문학의 싹이 돋아나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실학파는 처음부터 고문파에게 도전을 받아 왔었다. 그런데 실학파는 도전을 응전으로 받아들여 실학사상으로 모든 제도를 개혁하게 되었는데, 이는 세계문학의 발전 양상을 보더라도 자명하게 드러난다. 즉, 상위권 문화가 하위권 문화를 지배하려 할 때 갈등이 빚어지며 거기서 둘 중 어느 한 수준 높은 문화가 지배하는 과정과 같은 양상인 것이다. 실학파는 고문파를 반성케 했으나, 도리어 실학파들은 수난을 당하고 일제가 실학의 학설을 펴지 못하게 했다.
18세기는 이전의 구제도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형태의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이것을 뒷받침한 것은 실학자의 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문예면에서도 영정조년간은 실학사조로 인해서 많은 개혁이 이루어졌다. 미술의 경우 고문파들은 신선도만을 그리다가 진산진경(眞山眞景)을 그린 것과, 단가에서 새시조창이 발생한 것은 근대의식의 성장이 아니면 어려운 것이다. 또 시조의 미의식의 경우, 질서의 요구에 의해서 숭고미와 비장미가 구현되고, 안정의 요구에 의해서 우아미를 추구했던 체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8세기 후기에는 초현실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위대하고 탁월한 것을 소재로 한 것과는 달리 생활현장과 일상적인 현실에서 소재를 가져와서 새로운 미학인 희극미가 창조되었다.
또한 이 시대는 성리학에서 실학사상으로의 사상의 변화에 의해서 양반을 풍자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이처럼 18세기의 실학은 구제도에서 벗어나게 하였는데, 이는 실학파가 개혁이 이뤄지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2. 실학파문학의 근대성
조선 후기의 사회가 안정되어 가면서 성리학적인 지도이념의 한계성이 노출되고 자기전통에 대한 반성과 극복의 길이 모색되었다. 또 서양 문물의 전래와 함께 새로운 문화 창조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실학이 일어나게 되었다. 18세기 실학의 도래로 인해 문학방면에서도 많은 개혁이 일어났다. 이는 한시·시도·가사·잡가·민요·소설 방면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한시는 석북 신광수(石北 申光洙 ; 1712-1775)시에서 볼 수 있다.27) 한시는 석북 이후 실학파 문인에 의해 민족문학의 근대성이 대대적으로 이뤄지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필자는 석북에게서 그 면모를 찾아보기로 하겠다. 유형원(磻溪 柳馨遠1622년~1673년) 의 사위였던 관계로 실학에 가까이 접할 수가 있었다.28) 유형원은 조선 중기의 실학자로서 농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로서 일생 동안 농촌에 묻혀 살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반계수록』(磻溪隨錄)을 저술하여 균전론을 주장하고 사회제도의 불합리한 모순을 비판하였다.
셩호(星湖) 이익(李瀷,1681년 10월 18일~1763년 12월 17일)은 유형원의 실학사상을 계승 발전시켜『성호사설』(星湖僿說)을 저술하고 이익학파를 형성하여 박지원과 다산에게 영향을 미치었다.
18세기 당시는 서인 집권기이므로 남인 실권층(失權層)인 석북가(石北家)는 출사할 수 없었다. 석북은 부패한 유생들의 시세계와는 완연히 다른 민요풍을 의식적으로 살려서 모든 사람들이 읊기 좋게 시를 지어 가창케 했다. 석북의 민요풍은 오언사구인 32수로 지은「金馬別曲」에서 볼 수 있으며, 그는 그 풍취를 살리기 위해 여항(閭巷)의 말투로 끌어넣었다29)고 술회하고 있다. 석북의 시「關山戎馬」와「關西樂府」의 경우와 같이 2백년간 전무후무하게 곳곳에서 인구에 회자되었던 이유는 양반들이 일상적으로 불렀던 흐름에서 벗어나서 민족이 나아갈 길을 의미연관으로 넣어 지었던 바라고 할 수 있다. 고문파 들의 시는 관념적이어서 부르기가 쉽지 않았으나, 석북시는 실사구시의 학풍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기에 널리 애창되었다. 즉 석북시가 사실적인 경향이어서 부르기 쉬웠기에 많은 사람들에 애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조의 경우를 들어본다. 앞장에서 언급하였지만 다시 실학사조와 관련으로 좀 더 부연하고 고전문학 전반에 대해서 설명하기로 한다. 초창기에 지어진 시조는 주제의 측면에서 볼 때 회고가와 충군사상으로 일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세기 실학사상이 대두된 이후 시조는 양반들의 관념의 세계에서 벗어나 평민들의 진솔한 생활을 읊었다. 형식에 있어서도 양반들이 불렀던 것에서 완전히 탈피했다.
18세기는 생활 관념이 넓혀졌기에 종래의 3장형식의 평시조에서는 사상·감정을 담기가 어려워 형식이 긴 엇시조, 사설시조가 전보다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언어의 사용도 추상적이며 관념적인 것 보다는 실학의 영향과 민중의 의식변화로 인해서 사실적이면서도 풍자성이 농후한 언어를 선택하고 있다.
조선조 초기부터 후기 이전까지 시조 작가는 사대부 계층의 문인이었다. 그 이후에는 시조 작가의 경우 평민이 많이 참여했다. 시조집인『청구영언』과『해동가요』가 바로 평민들의 손으로 편찬되었던 것이다.
가사의 경우 음풍농월과 충군애국 및 도덕률을 노래했던 데서 벗어나 실생활과 관계되는 기행가사와 내방가사가 등장했다. 속가·잡가·창극에도 평민성이 드러나 양반들의 위선을 풍자했다. 창극은 영조무렵부터 소리광대 중에서 이야기를 창화해 연출했다.
창극에 등장하는 광대는 상민 출신이 다수를 차지했으며 아전도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 상민과 아전들이 사대부 양반들에게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로서 근대성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요에서도 양반을 저주하는 내용으로 부가된 것을 보면 봉건주의에 항거하고 인간성의 해방을 부르짖었던 것이 된다.
또한 잡가도 평민들 사이에서 애창되었는데, 그 내용은 해학적이고 풍자적이다. 타령·육자배기·사랑가·수심가등이 많이 불리어졌으며, 오늘날에도 계승되어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음미할 수 있다. 이는 실학사조로 인한 근대화의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영조시대 작품은 해학과 풍자적인 수법이 많이 깃들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유머는 어느 시대라도 시대성에 부응하기 위해서 있을 수 있으나, 아이러니는 시대성의 제약을 많이 받는다. 18세기 후반에 풍자문학이 산출되었다는 것은 리얼리즘에 충실하기 위한 것과 반봉건적인 근대성이 민중의 흉중에 간직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연암 박지원은 주자학을 신봉하는 양반계급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풍자적인 수법의 소설을 썼다. 연암의 풍자문학은 동서양의 근대적인 사조적인 흐름에서 탄생되었다. 그의 12편의 소설 중『양반전』은 양반을 비방하는 풍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양반전』이 지어진 것은 1757년경이다. 중국 청대(清代)에 오경재(吳敬梓, 1701~1754)가 지은 장회체(章回體) 사회 풍자소설인『유림외사儒林外史』가 1735년에 나왔으니 연암보다 23이나 앞섰다. 그 주된 내용은 과거제도의 모순과 유학자들의 부패와 타락을 풍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서양의 풍자소설은 중국소설보다 10년이 앞섰고 우리보다 32년이나 앞섰다. 영국의 조나단 스위프트(1667~1745)작『걸리버여행기』가 1726년에 지어진 것은 이를 뒷받침해 주는 자료가 된다. 일본에 平賀源內(1728-1880)작『풍속지헌전風俗志道軒傳』은 1746년에 지어졌으니 우리보다 8년이나 늦게 나온 것이지만 18세기 중엽이라는 공시성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30)
박지원의 실학문학은 처음부터 공상으로 일관된『구운몽』같은 낭만주의가 아니고 양반사회에 대한 풍자성을 근대사회에서 구해 실학정신의 객관적인 인식을 도입한 것이었다. 최일수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프랑스의 리얼리즘이 콩트의 실증철학과 베이컨의 경험론을 배경으로 한 것과 같이 박지원의 소설은 철저하게 실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실학은 우리 문학에 있어서 근대문학의 발원 소가 되고 있다. 프랑스의 리얼리즘이 1789년의 대혁명을 계기로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되어 나 폴레옹 3세가 스스로 자신을 시민들의 친구라고 선언한 것을 배경으로 했던 것처럼 박지원의 실학문학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계기로 평민들이 새로운 시대를 자각하게 되고 영조가 양반 사회의 부패를 인식하며 탕평책을 채택하고 신문고를 다시 설치함으로써 평민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던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31)
이와 같이 연암의 소설은 실학사상을 배경으로 해 반봉건의 기치를 높이 펴들었던 것이다. 연암의『양반전』은『춘향전』이 탄생되는 계기를 마련했는데 이는 큰 수확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보통『춘향전』에서 자주 이야기되는 주제는 ‘성춘향의 절개’에 대한 일반적으로 내려오는 전통적 관습의 하나에 불과하다. 여인의 정절은 목숨과도 상통한다든지 여인들이 지켜야 할 지침서 제시 정도이다. 이는 후세 여인들의 본보기가 되게 하려고 하는 작가의 의도성이 보인다. 그러나 시각의 초점을 조금 달리해서 우리는 보통 주인공의 생애를 중심으로 보게 되는데 주위환경에도 눈을 돌려서 비판의 눈길로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나 신분상승에의 욕구, 서민들의 한이 구슬프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그 사회의 단면을 요약해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겠다.
『춘향전』에서 탐관오리를 저주한 것이라든가, 인간평등을 구가한 것 등은 실학사조로 연유되어 이뤄진 것이다. 본디 실학은 청나라에 있어서 서양문명의 영향으로 탄생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에까지 유입되었다는 것은 세계성을 띠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은 실학이 문학에 끼친 영향에 대해 소개했는데 이는 간략히 고찰해 본 것에 불과하다. 민족문학의 근대성이 실학과 밀접한 관련 하에 이루어지고 세계사조로도 근대성의 보조가 맞춰졌으니, 18세기 후반기는 근대문학의 발원이 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Ⅴ. 맺음말
위에 쓴 바와 같이 필자는 18세기 민족문학의 근대성의 기점을 18세기후반 실학파문인들의 작품으로 보았다.
18세기 문학은 연암 박지원의 문학에서 나타난바와 같으나 정조가 연암의 문체에 제재를 가하는 문제반정은 당시 위정자의 안식이 열리지 않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왕명도 시대변화는 막을 수 없었다. 사대가의 시에서 실학이 도래되어 경우 양반들의 비리를 파헤쳐 풍자하고 있다.
실학의 학설과 실학파의 작품으로 인한 여파는 만인을 공명 공감케 해 평민들이 많이 참여해 근대성에 부응하게 되었다. 민족문학의 근대성이 시조·가사·창극·소설 방면에서 발생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한시의 경우 연암 박지원의 문하에서 사가 시에서 근대문학에 호응하는 한시가 나타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시는 고문파인 양반층이 가장 가까이 한 문학 장르인 만큼 평민과는 소외된 문학이었다. 실학파문인이었던 다산 정약용은 양반들이 중국시의 모방만을 일삼았던 작시 태도에서 벗어나서 조선시를 탄생케 했다.
따라서 18세기 문학은 우리의 생활주변에서 소재를 찾아 우리의 사상과 감정을 불어 넣음으로써 반봉건의 기치를 높이 펴들고 민족문학의 근대성을 정립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갑오경장은 일본인이 일으킨 정치적 사건이어서 우리 민족만의 근대성과는 소원한 것이었다. 갑오경장은 일제가 208건의 법을 만들어32) 우리 민족에게 강제적으로 펴려 했던 정치적 사건으로서 민족문학의 전통성과는 접맥될 수가 없었다. 20세기 선학의 비평가들이 민족문학의 근대성을 외면하고 갑오경장으로 정립한 것은 일제 식민사관에 의한 구분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본디 민족문학은 민족과 호흡을 같이 하는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갑오경장이나 개화
기는 비주체적인 것으로 민족의 근대적인 내부적 성장에는 역행했다. 그러므로 민족문학의 근대성은 시기적으로도 이보다 훨씬 앞서고 민족문학의 전통성을 잇는 맥락에서도 18세기 실학파의 문학에서 찾아야 한다. 민족문학을 갑오개혁으로 정립하는 것은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한 일제의 앞잡이 친일내각의 책동이니 당연히 배격해야 할 개혁이다. 뿐더러 이런 개혁은 역사의 역사와 민족문학의 전통의 단절을 의미하는 관계로 민족의 전통을 계승하는 점에서도 당연히 18세기에서 민족문학의 정통성을 찾아야 한다.
광복 후 평론가 들이 한국근대문학의 기점을 갑오경장으로 정립하였다는 것은 민족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소치라 할 수 있다. 일찍이 이런 비합리적인 역사인식은 의장 단장을 역임한 신태식이 지은『창의가』에서 나타난 바와 같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민족문학의 기점은 18세기~19세기 영정시대를 기점으로 정해야 한다. 우리는 이 시대를 근거로 하여 학설을 처음으로 편 건국대하교 김일근(金一根) 교수의 공로를 치하하지 않을 수 없고, 평론가 김윤식 김현 최일수 등도 마찬가지로 한국문학사에서 높이 평가하어야 한다. 따라서 필자도 한국민족문학론은 18세기~19세기가 정확한 정통성의 기점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며 이들의 학설을 찬동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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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高宗實錄卷』, 35 建陽2年 1月27日條 深求堂 影印, 1970. 615쪽.
������噫嘻, 昨年 八月之變, 渠之許多凶凶, 入而脅持于內, 出而譸張于外, 背朕有見聞於渠輩者, 以渠輩證 渠輩, 萬古天下, 寧有是耶������.
10) 金一根,「民族文學史的 時代區分 試論」,『自由文學』, 1957, 7, 155쪽.
11) 金一根,「연암소설의 근대적 성격」,『경북대논문집』, 제1집,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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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呂增東,「19세기 때 나타난 “開化”라는 말에 대한 연구」, 『語文學』, 40輯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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