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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불국사 템플 스테이 2018.06.16-17일 悟의 무게
대불도 때로는 졸린다 명명한 밤바다에 바늘같은 실눈을 뜨고 시간도 없는 시간 속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기다림이 업인양 그렇게 기다린다
비설겆이 하듯 한바탕 바람이 불고 간 뒤 문득 감꽃 하나가 떨어진다 떨어지는것은 떨어지며 산것이요 나무에 붙은것은 붙은 채 산것이다 세상 어떤것이 살지 않은것인가 변하지 않는것은 없다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것이야말로 섭리요 法이다 活 活 活 살아 있음을 믿는것 불생불멸이란 이름의 이 깊고 깊은 신앙 이런 믿음이야말로 수행의 원력이요 살아있는 나를 느끼게하는 힘이다 절에 왜 다니느냐고 묻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기에 대답해야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생사를 해탈하기 위해 부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싶지만 금방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상대에게 설명해야할 명분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어 천당에 갈 만반의 준비가 된자에게 생사 해탈의 길을 백번 가르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나 스스로가 답이 되어야합니다 달이 뜨고 해가 지듯 꽃이 피고 낙엽이 떨어지듯 나 또한 그러함을 여실히 보여 주어야합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자,나아가 부처인 자의 의무입니다
깨닫음이란 무엇일까요 일상을 통해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맑은 빛.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닌 그 부사의의 세계에 우리가 한 발짝 다가가는것으로 우리는 어떻게 선한 인간이 되어갈까요
선한 사람이란 삶에 끈적거림이 없는 사람입니다 접착력이 약한 사람이죠 접착력이 약하기 때문에 삶을 자신의 것에 가두려 하지 않습니다 재산에, 명예에,사랑에 가두려 하지 않습니다 가두려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기꺼이 남을 위해 베품니다 불교는 단지 이것을 가르칩니다 끈적임이 없는 삶 空에 다가가가는 悟의 무게만큼 가벼운 삶 나의 하루는 얼마나 가벼워 졌을까요 무엇인가 되기위한 삶이 아니라 삶을 경량화하는 삶이 구도의 삶입니다. 견문각지 비유경에 일곱개의 인절미에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배가 고파 인절미 여섯개를 허겁지겁 먹었는데 그래도 배가 안불러 나머지 인절미의 반을 먹었더니 배가 꽉 차 더 이상은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때 이 사람이 문득 생각하기를 "처음부터 요 반개만 먹었으면 나머지 여섯개는 안 먹어도 배가 불렀을텐데" 비록 인절미가 아니라도 우리는 사랑에 속고 청춘에 속고 사람에 속습니다 하지만 가장 자신을 많이 속이는것은 정작 자기 자신입니다 중생은 각지로 살아갑니다 견문각지를 통해 아는것을 분별이라합니다 각지하는 이가 중생이요 각지란 순전히 자기 생각이고 자기 분별입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本來處를 찾아라고 합니다 지수화풍의 현주인이 아니라 본래의 주인. 불국사의 가람 배치는 답답합니다 절집의 시원함보다는 견고한 성곽을 보는듯합니다 균형을 잃은 정면의 모습이 그렇고 담장을 연상시키는 회랑이 그렇습니다 코가 없는 소같습니다.
나의 본주인을 만나는것입니다
어떻게 본주인을 만나야 할까요 본주인의 성은 반야요 이름은 바라밀입니다 반야는 지혜요 바라밀은 수행 혹은 가는것을 의미합니다 즉 반야라는 지혜로 본주인을 찾아간다는 뜻입니다 찾아가는 방법은 잘 아시다시피 오온 즉 우리 몸이 공임을 깨닫는 것이겠죠 반야심경에 그것만 깨닫으면 일체 고액으로부터 벗어난다고 되어있지 않습니까
自心反照 수행의 첫걸음은 마음을 되가져 오는것입니다 슬픔,화,애착,시기,질투등 모든 갈애를 마음 안으로 거두어 들이는것입니다 어머니가 저녁이 되면 빨래를 거두어들이듯 어부가 거물을 거두듯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듯 마음을 攝心內照하는것입니다 이렇게 거두어 온 생각들을 제 자리에 돌려놓는것을 自心反照라고도 합니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것이 대체 무엇인지 돌이켜 보는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이라는 이 골치 아픈 단어를 실체화하면 다름 아닌 내가 내 마음을 바라보는것입니다 이 마음을 바라보는 주체가 본주인입니다 누군가가 미울 때 이 미운 마음이 무엇인가하고 들여다 보는것이 수행입니다 이 뭣꼬? 이 뭣꼬의 이가 바로 본주인 즉 진여입니다 이 뭣꼬를 일용중에 행하여 나와 나의 주인이 만나게 되는것을 照達이라고 합니다 구품연지 -펌- 서방 극락정토를 모방하여 만들었으며,
無我法에 통달한다는것은 나 없는 나 大我,眞我 즉 나의 본주인의 존재를 깨닫았다는것이요 이 세계가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요 열반입니다 본주인과 내가 만나면 세상이 달라지는것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이 변화합니다 흐르는 물처럼 주되 받을 생각이 없어집니다 지혜가 넒어지며 마음은 각지가 아니라 寂照가 됩니다 고요한 마음이 보지 못하는것은 없습니다 계수나무 꽃 떨어지는 소리, 춘삼월의 바람 소리가 먹뻐꾸기 우는 소리가 다 천경이요, 만론입니다. 이것이 보리심입니다
無緣善巧捉如意 歸家隨分得資糧 법성게의 구절입니다 무연은 반연하는 마음이 없다는 뜻으로 여기서 반연이라함은 역마살이 낀 사람처럼 지꾸 밖으로 마음이 나도는것을 말합니다 緣은 분별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밖으로 나도는 마음을 선교 즉 좋은 방편으로 살살 달래어 부처님 가르침에 착 다가가면 귀가 즉 入道하여 隨分 역량에 맞게 득자량 이익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歸家가 나옵니다 귀가는 입도를 설명하는 방편입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자심반조의 일용 수행 중에서 입도를 이루는것입니다 是什么 ? 이 뭣꼬? 見聞言思 是箇什么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이것이 대체 무엇인고? 是什么 자심반조가 무연선교입니다 진여가 있는 본자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자리가 아니라 마음을 불러들인 그 자리 자심반조의 자리가 해탈이요,열반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자리입니다 법상을 떠나 법성을 보는것이 아니라 법상에서 바라 법성을 보는것입니다 圓覺道場何處 現今生死卽是 원각의 도량은 생사가 넘실거리는 바로 이 자리에 있는것입니다 진여의 자리가 바로 생멸의 자리 생멸의 자리가 바로 진여의 자리입니다
불교는 깨닫음의 종교라 합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닦아야합니다 구해봐야 소용없습니다 구하기도 어렵지만 지키기는 더 어렵습니다 모아놓은것 다 없어져도 모으면서 지은 죄는 그대로 입니다 求함이 없는것이 깨닫음입니다 마음으로 깨닫기 위해서는 信心이 필요합니다 신심으로 원력을 세우고 참회하여야합니다 화염경 여래출현품에 여래의 지혜는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한 중생도 여래의 지혜를 갖추지 않은 이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망상과 전도된 집착 때문에 증득하지 못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분별심이야말로 망상입니다 집착은 愛求愛取 즉 밖으로 求하고 밖으로 取하는 마음입니다 부처님의 법이 어려운것이 아니라 망상집착을 버리는 일이 어렵습니다 눈으로 현상을 보되 분별과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게되고 그대로 선정이 됩니다 피하려하지 말고 망상 집착을 하지마라 조사선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悟의 무게는 바로 망상과 집착의 무게입니다 없애려고 하는것이 아니라 안하는것 즉 無念禪입니다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나는 누구인가 원융무이가 나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부동본적이 나입니다
천지 만물이 다 법입니다 하늘도 법이고 땅도 법이고 사람도 다 법입니다 '이 법의 진실상에 性이 있는데 이 근원적인 법의 성질을 법성이라고합니다 제법도 우리 자신이요 법성도 우리 자신일진데 법성은 둘이 없고 제법은 적멸입니다 왜냐하면 법에는 自性이 없기 때문입니다 無法自性 以他爲性 법에는 자성이 없는 까닭에 다른것에 의지해 자성으로 삼습니다 사는것도 삶의 요소가 모여진 것이요 죽는것도 단지 죽는 요소가 모여진것입니다 하지만 흩어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다른것에 의해 생긴것이니 생겨도 자성이 없습니다 생긴것과 안생긴것이 둘이 아닙니다 흩어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없이 생긴것이 생기지 않는것과 결국 다를 바 없습니다 제법은 본래 적멸할 뿐입니다 다 假名相 즉 껍데기입니다 죽는다는것만 알지 죽는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보지 못합니다 죽음도 내가 죽는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느껴지는것이요 삶도 내가 산다고 보기때문에 느껴지는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죽는다고 생각하고 산다고 생각하는 그 놈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전도몽상이라고 합니다 내가 파 놓은 함정에 내가 빠지는격입니다
참나 오고 가고 앉으나 서나 항상 밝은 그 자리 세상보다 먼저 와 있어 시작이 없고 천지 보다 뒤에 있어 종말이 없는 한 티끌이며 온 우주 一心 오고 가는데 분명하고 보고 듣는것이 은은하다
이 송곳 바늘 하나 빠져 나갈 길 없는 우주 법계에서 꽃 하나 가 대수 인가 하지만 어쩌랴 피는 꽃에서 피지 않는 봄을 보고 지는 꽃에서 지지 않는 봄을 봄이 반야의 지혜 이것을 조견이라고한다. 우리 몸 또한 마찬가지다 꽃과 하나도 다름이 없다 불생불멸의 공성을 보아야 지혜다 눈으로 분별하는 마음을 식심이라고 합니다 식심은 밖의것을 인식하는것입니다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조견 반조하여야합니다 밖을 보면 분별이요 반조하면 불생불멸입니다
강물도 없는 저 강 虛川을 떠내려가는 뗏목 저 강을 건넌들 또 어쩌랴 애초 강은 없었느니라.
本來面目 산방 창문 위에 달빛이 묵화를 그려낼 때 문득 본래면목이란 화두가 떠 올랐다 애꾸가 남의 눈알을 뻬내 보는것 이런 그로테스크한 답이 떠오른다 그다지 싫지 않는 답이었다 아니 어쩌면 좋은 답이 될지도 몰랐다 물속의 달은 바라 볼 수 있어도 끝내 건져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얼마전에 신문에서 되다와 하다의 차이에 대한 글을 읽었다 "요즘 되는 일이 없어" 이런 푸념을 자주 듣는다 "되려고 하지 말고 하려고 해봐" 한마리 새가 되기 위해서 새는 공중에 떠서 쉬지 않고 날개짓을 한다 하는 일에 그침이 없어야 비로소 된다는 설명이다 나는 그동안 경을 읽으며 부처가 되려는 방편만을 찾았지 부처의 가르침을 행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좋은 불자가 되려는 노력보다는 자비를 행하는 노력에서 즐거움을 찾아야한다 자비란 전자석에 전류를 끊었을 때 자성을 잃는것처럼 자신이 붙들고 있던것을 아낌없이 내 놓는 일이다 애착을 버리는것이다 善巧는 되다에 어울리기 보다는 하다에 더 어울리는 단어이다
참으로 쉬어라 중생은 불생불멸의 본원 자성을 지녔음에도 자업자득의 업보로 생사윤회를 한다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이라는것이 결국은 윤회의 사슬을 끊고 본원의 자리를 찾아가는것이다 경전에서는 본원의 자리를 옷속의 보배로 비유한다 자기 옷 속에 보배를 지니고 있음에도 문전걸식을 계속한다는것이다 본원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내는것이 발심이다 발심에는 선후가 있지만 悟心 즉 깨닫음에는 순서가 없다 왜냐하면 망심이 있는 그자리가 바로 자성심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한치의 바뀜없이 즉시에 바로 자리를 찾아가기 때문이다 발심을 통해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참회이다 원효 스님은 육정참회라하여 안이비설신의 육근의 작용 즉 밖으로 향해있는 육정을 안으로 돌이키는것을 참회라 하였다 눈에 보이는 見의 대상을 마음으로 보는 觀의 세계로 돌이키는것이다 何者是佛 부처가 무엇입니까 見性是佛 자기의 본성을 보는것이 부처다 性在何處 본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性在作用 본성은 작용에 있다 참 깔끔하고 친절한 문장입니다 몽둥이도 없고 조사의 거만함도 없습니다 그저 담백할 뿐입니다 그런데 작용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립니다 작용이란 뭘 뜻할까요 안이비설로 색성향미를 느끼고 아는것이 다 작용입니다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잡고 다리로 걷는것이 다 작용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것이 마음이라는 곳에서 비롯되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의 의도를 짐작하는것도 마음의 작용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性이라하고 이 性을 보는것을 見性이라고 합니다 견성을 하면 부처님이 됩니다
트임 불교는 삶의 곡절로부터 초탈하여 더 없이 높은 경지로 나아가 중생의 삶을 내려보는듯한 거만함이 아니라 중생의 삶을 껴안으며 트임의 경지에 다다르는 법을 가르친다 죽음과 삶을 분별하는 관념적 죽음이 아니라 삶의 바탕으로서의 죽음, 초월적 의미의 생멸의 근거를 보여 준다 가구식 석축(보물 제1745호) 架構式 석축 불국사의 석축 양식은 8세기 중엽에 조성된 건축 양식으로 조형미는 물론 그 기번이 매우 독특하여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펌-
동쪽 자하문 앞의 것은 백운교의 계단 위에서 단을 달리하여 상단의 석축을 변화 있게 꾸며 조화를 이루었다. 안양문 앞에서는 밑에서부터 수직으로 석축을 쌓되 중간중간 칸을 이루어 다듬은 석주(石柱)와 인방석을 가구식으로 걸고, 그 가운데를 자연석으로 채운 행태이다. 자하문이나 범영루 앞의 하층 석축은 밑에서부터 거대한 자연석을 쌓고 그 위에 가공 석재를 가구식으로 짜 올린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범영루의 돌출부 기둥 밑에는 점차형의 석재를 차곡차곡 쌓아 돌기둥을 만들었고 또 석교 밑에서는 정교한 홍예를 이루고 있다. 구조형식을 살펴보면 수직의 석주와 수평의 주두석 및 동자주, 초석, 갑석으로 장방형의 격자 틀을 형성하고, 그 안에 자연석을 밀실하게 채워 넣는 수법으로 쌓았으며, 대웅전 석축은 1단, 극락전 석축은 2단으로 구성되어 약간의 차이가 있다. [출처] 불국사, 가구식 석축|작성자 기쁨
一物이라는 우주 法體의 작용을 보는것이 견성입니다 증도가에 法身覺了無一物 이란 구절이 나옵니다 법신은 크게 보면 허공보다 크고 작게 보면 티끌보다 작습니다 법신을 깨닫고 보면 법신 아닌것이 일물도 없습니다 모두가 법신입니다 그래서 나를 찾자는 것입니다 나를 찾으면 어떻게 되느냐 자기 밖에 없으니 그냥 자기대로 사는것입니다 如生,그냥 본성 그대로 사는것입니다 본성 그대로 사는것을 도인이라고 하고 자기를 찾는것이 견성입니다 본성 그대로 사는것이 如如生입니다
죽을 일이 있을 때 모른 척 하던 이가 막상 살만하니 죽은 척을 한다 見은 利이며 聞은 益이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듣는다면 相光이 서린다 지금부터라는 생각이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내가 좋아지고 있고 부처님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행동으로 옮기는것이 중요합니다 이 때 이익이 있게됩니다 나빠지고 미워지고 좋아지고 예쁘지는것은 다 자기 안목에서 비롯됩니다 앎을 갖는다는것은 생명체를 이해하는것입니다 자기 안에 한없는 무량수 무량광의 지혜 공덕이 가득 차 있다는것을 알아야합니다
나의 불성생명은 원만하고 완전합니다 나라는 모양새는 광명이 지키고 보호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어떤것을 보거나 들을 때 광명으로 보고 들어야합니다 이것이 반야,분별없는 지혜입니다 이 또한 바라밀입니다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는 완성된 삶입니다 해탈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모양 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긍정적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불성생명은 원만하고 완전합니다 非風非幡
바람이 움직이는것도 아니요 깃발이 움직이는것도 아니요 마음 또한 움직이는것이 아니니 육조의 견해는 과연 옳은가? 이 속뜻을 절실히 깨닫게되면 두 선승이 쇠를 팔아 금을 얻어려한것과 육조의 성급한 오지랖이 무엇이 다르랴 鳥鳴澗(조명간) 왕유 人閒桂花落(인한계화락) 夜靜春山空(야정춘산공) 月出驚山鳥(월출경산조) 時鳴春澗中(시명춘간중) 증도가에 나옴직한 한가한 도인이 고요한 밤길을 걸어가니 문득 계수나무 꽃이 떨어집니다 밤은 고요하고 춘산은 봄꽃으로 분분하나 밤하늘은 텅 비어있을 뿐입니다 달이 떠오르자 놀란 멧새가 한가로운 봄 중에 울음을 웁니다 텅 빈 밤하늘에 슬며시 드러난 진여의 세계 무정도 유정도 다 그대로 본 모습을 나툴 뿐입니다 한 폭의 그림같은 선시를 통해 몰록 불성에 다가간듯한 맑은 기운을 느낍니다 앵두 불무사 옥룡암(玉龍庵)은 2000년 중반 쯤 불무사(佛無寺)로 사명(寺名)을 변경하였는데 여전히 옥룡암이라 부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1924년 박일정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고 1942년 폐질환을 앓던 민족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1944)가 이곳에서 잠시 요양한 적이 있는데 시인은‘옥룡암에서 신석초에게’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미발표 시조 2편을 남긴 바 있습니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처럼 사전에도 없는 말을 막힌 귀로 듣는다 죽음에 죽음이 없고 늙음에 또한 늙음이 없어 나는 면천 받은 노비처럼 즐겁고 너울에 떠 있는 달 그림자처럼 자유롭다 붇박힌 네가 떠나가는 나를 걱정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 천지 만물에는 천지 만물이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사람이 없고 죽음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제법은 無自性입니다 천지 만물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다만 지혜롭게 쓸 뿐입니다 修道用心 차담을 나눈 뒤 질문을 해 보라고 할 때 참 어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修道用心 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수도용심이란 대상을 바라보는 마음을 돌이켜 보는것입니다 가령 어떤 질문을 했을 때 나에게 질문을 하게하는 그 놈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되묻는것이 수도용심입니다 直指人心입니다 아름다운 발 9년 전 어느날 나는 경주 학회를 땡땡이 치고 탑골에 사진 찍으러 온 적이 있다 비가 주적 주적 내리던 날이었다 마애불을 감상하고 바위 상부로 올라가던 중 그만 미끄러운 소나무 뿌리를 잘못 밟아 넘어지고 말았다 이때 나는 내 카메라를 보호하기 위해 팔을 땅에 짚지 않는 바람에 그만 무릎을 찧어 청바지가 찢어졌고, 찢어진 구멍 사이로 피가 스며 나왔다 나는 아픈 다리로 사진을 찍다 문득 이 아름다운 발을 발견했다
"부처님 내 두다리 성하게 해 주십시요" 세월이 흘러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사진기로 사진을 찍고 있고 내 부실한 두 다리는 여전히 나를 잘 떠받히고 있다 구멍난 청바지는 구멍을 꿰매어 지금도 입고 다닌다 요즘 방식으로 치자면 굳이 구멍을 꿰매지 않았어도 좋을 뻔 했다 사방불 이야기 -펌- 사방사면불이란 모든 공간에 부처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금강정명》에서는 동남서북으로 돌아가면서 아촉불·보생불·무량수불·불공성취불이 차례로 배열된다. 8세기 이후에는 약사신앙의 발달로 약사불·미륵불·아미타불·석가모니불로 재편되었고 탑골 어귀에 놓인 돌 하나 석굴암 본존불의 부처님 시댁 식구가 다 먹어버린 친정에서 보내 온 김치 바위와 문신 부처가 야자수 아래에 앉아 계시던 보리수 나무 아래 앉아 계시던 아무런 차이가 없다 붉은 홍등 아래 나눈 풋사랑이나 관음보살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이 속절없는 몸부림에도 하등 차이가 없다 차이와 차이 없음의 차이도 없다 오직 고요가 있을 뿐 "나를 화내기 위해 세상이 돌아가는것은 아니다 절대와 상대가 순환되며 만들어내는것이 삶이다 구름이 끼던 안끼던 하늘은 하늘이다 순간을 해찰하라 깨닫음이란 허상에 주눅들지 마라 생사가 넘나드는 이 자리가 바로 깨닫음의 자리다" "모양지어지고 이름 붙여진 모든것이 상대성입니다 절대란 허공 가운데 상대성이 나투어 있습니다 마음이라고 하지만 마음에도 절대적인 마음과 상대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을 내게하는 마음의 저변이 바로 절대적 마음입니다" "부처는 일반 대명사입니다 삼라만상 근본에 깔린 절대성입니다 원래 자리입니다" - 후 기- 석굴암 본존불을 뵈옵고 돌아 오는 길 시원한 동해 바람이 불어왔다 새벽빛은 아직도 가뭇한데 숲 속 새는 울어 천경 만론을 다 들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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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과 글 사전 찾아가며 감상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두서없이 쓴 글이나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법문이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더구나 이번에 불국에 다녀왔으니 부처가 핵심주제이니...폴 법사님이 수많은 경전말씀의 예를 제시하며 성불의 길을 설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만화근원이 내재심이라...무진장의 보화가 자기 마음 속에 있으니 밖으로 구걸하지말고 내심을 반조하도록 노력을 해라...되려고하지말고 하려고해라...수행 열씸해서 법성자성을 바로 깨치기만 하면 모든거 저절로 알게되느니라....우찌할꼬 이 중생을, 수행을 안하니...^^^
늘 남의 말을 전하는 앵무새가 아니라 나는 언제 내 몸을 찔러 울음을 우는 가시나무새가 될까요.
많은 지도 바랍니다. 글을 올리는데 급급해 시간을 두고 찬찬히 뜯어 고쳐야겠습니다
같은 곳을 갔건만 보고 느끼는 것이 이리 다른 것은 ...
역시 내공이 남 다르십니다.
격조 높은 글 감사합니다~~^^
성불하소서~~
주먹을 펴면 손바닥인데 격조는 뭐고 내공은 또 뭐 겠습니까
누님이 만들어준 인연 충실히 따라 갈 뿐입니다 _()_
언제나좋은 글 좋은 사진 정말 감사 합니다.
아직 뭐가 뭔지 모르는 햇병아리지만 열심히 따라 다니며 부지런히 줏어 듣고 있습니다.
이런 인연 마련해 주신 집행부 여러분께 늘 감사한 마음 지니고 있습니다^^*
늦게 이 곳을둘러봅니다.
한때 불교의사회를 마음으로나마 떠났던것을 참회하며 거사님의 글도 바쁘다는 핑계로 다 읽지못하고 겉핧기식으로 봅니다.
참으로 해박하시고 마음에 깊이 감동을 주시는 깊은 법문에 감동도 받습니다. 인제 수행만하시면 성불하실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단지 佛書를 읽고 紙背의 심원한 향이나 즐기는 독서가의 삶이나 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