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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모임] 죄 없는 자(요8장) 2020. 3. 6. 이현래 목사
오늘은 요한복음 8장이다.
유명한 구절이니까 읽을 필요가 없다.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린 어떤 여인을 데리고 왔다는 이야기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5) 이런 질문이다. 이것은 함정 질문이다.
만약 잘못했다면 어디든지 함정을 걸어서 소송할 거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냥 풀어준다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 자라고 할 것이고, 율법대로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별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아주 난처한 질문이었다. 일부러 시험하려고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질문을 교회에서도 가끔 받을 때가 있다.
솔로몬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 산모가 둘이 와서 아기 하나를 놓고 서로 자기 아기라는 소송이 들어 왔다. 한 사람은 아기를 낳았는데, 아기가 죽어 버렸기 때문에 바꿔치기를 했던 모양이다. 솔로몬은 칼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둘이 똑같이 갈라 줄 것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진짜 엄마는 펄쩍 뛰면서 도저히 그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그러려면 저 사람에게 주라고 했다. 생모가 아닌 사람은 갈라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솔로몬은 분별해서 생모에게 주었다고 한다. 솔로몬의 지혜를 이야기 할 때는 늘 그 이야기가 나온다. 목회하는 사람들도 가끔 그런 곤란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잘못하면 잘못될 수도 있고, 또 모르고 잘못 대답할 수도 있다. 그 전에 이야기를 한 번 했는지 모르겠는데, 어떤 사람이 테니스 선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모 은행 테니스 부에 들어갔다.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 허리를 다쳐서 선수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자기 형이 그 은행의 테니스 선수인데 복지부인가 그런 부서의 책임자였다. 그래서 어떻게 잘 이야기를 해서 동생을 일반직으로 전환을 시켰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아주 잘 된 것이다. 선수로 들어왔다가 정식 은행 직원이 된 것이니까 우리는 모두 축하한다고 했다. 처음에 들어가면 돈을 세는 것을 연습하는 모양이다.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창구에 앉으니까 문제가 생겼다. 공부는 안 하고 테니스만 했기 때문에 첫째는 한자를 모른다. 그때는 수기로 하던 때니까 통장을 가지고 오면 이름을 알아야 되는데 이름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와서 하는 말이 이러저러 하다고 하여 나는 내 생각만 하고서 이름을 아는 것은 1000자만 알아도 충분한 것이니까 공부하면 된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렇게 해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잘 될 줄 알았다. 그랬는데 조금 있다가 왔다. 상업학교를 나오긴 했는데 부기를 하지 않아서 장부정리가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부기학원에 가서 한 두 달 하면 은행부기는 단식부기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잘된다고 하더라고 했더니 해보겠다고 했다. 나는 잘 될 줄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만 통장을 들고 있다가 머리가 돌아버렸다. 나는 그렇게
될 줄을 몰랐다. 그래서 평생을 돌아버린 상태로 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눈높이를 모르고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지식이라는 것이 이렇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어지간한 하면 그 정도는 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안 됐던 것이다. 이런 일이 내가 목회하는 40년 동안에 두 건이 발생하였다. 지금도 안타깝다. 다른 병은 한 번 들어도 고쳐지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안 고쳐지는 것 같다. 못 고치는 것 같다. 한 번 돌아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뒤로 들으니까 뇌에서 전달하는 통로가 전선처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토막토막 잘라져 있어서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어떤 물질이 분비된다고 한다. 그것을 통해서 전달되고 또 전달되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한번 타 버리면 복구가 안 된다고 한다. 전달 물질이 바꿔지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한다. 아직까지 고칠 약이 없다. 안정만 시켜놓을 뿐이지 전혀 치료는 되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가 사람을 상대하는 사람들로서 주의해야 하는 문제다. 정말 모르고 한 일인데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고, 이미 지나가 버렸다.
목회하는 사람들은 심리학도 공부해야 할 것 같고, 상담학도 공부해야 할 것 같고, 할 일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이 여자는 지금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5) 모세의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놓아두고 용납한다면 이스라엘 사회가 엉망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제거해야 할 문제다. 형무소가 없으면 좋겠지만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법이 스스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의 운용에 달려있다. 지금 법정도 그렇다. 옛날 일제시대 때 법전은 식민지 백성을 지배하기 위한 법이었기 때문에 법률의 조항대로 하였다. 다른 것이 없다. 그 당시 사법 공부를 하려면 육법전서를 들고 다니면서 달달 외워야 한다. 요즘은 그렇게 외울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판사들은 말을 들어보면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인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다 구별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벌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 벌을 주는 쪽으로 법을 운용하는 것이고, 이 사람은 풀어 주어야겠다고 알아지면 풀어주는 쪽으로 법을 운용하는 것이다. 법은 운용하는데 달려 있다. 운용자에게 달렸다. 민주주의는 민도에 달렸다는 말이 있다. 해방 후에 우리는 미국식 헌법을 거의 그대로 베끼다시피 사용하였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를 해 본 경험이 없으니까 민도가 안 되니까 그대로 안 되었다. 양당제로 했지만 李박사 10년 동안 내내 싸우는 것 밖에 없었다. 건설적인 것보다도 싸우는 것뿐이었다. 지금도 물론 마찬가지다. 민도만큼 밖에는 안 된다는 문제가 된다. 운영자에게 달렸는데, 운영자도 민도에 따라서 운영하는 것이지 민도 이상으로 운용할 수는 없다. 물론 법이 잘못되는 것도 있기는 있겠지만 운영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다.
모세의 율법도 ‘누가 그것을 사용하느냐?’ 이것이 중요한 문제다. 누가 사용하느냐? 이런 여자는 돌로 쳐서 없애야 되겠다고 하는 사람이 사용하면 그 법은 그렇게 운영되는 것이고, 이 사람을 살려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다른 방법을 찾게 된다. 약장에는 약이 수 백 종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사람에게 먹일 때는 의사나 약사가 선택해야 된다. 먹으면 죽을 약도 있다. 청산가리도 있고 한방으로 말하면 초오라는 것은 많이 먹으면 죽는다. 부자도 그렇다. 그런데 그것을 운용한 사람이 기술적으로 사용하면 아주 좋은 약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 공부만 해서 안 되는 것도 있다. 그 사람은 많은 경험이 또 필요하다. 목회하는 사람들은 공부도 해야 되지만 경험도 있어야 한다. 그것뿐만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공부하고 아무리 경험해도 사람 자체가 안 되면 한계가 또 있다. 법률이나 이런 것은 공부를 많이 하고 경험이 있으면 어지간해도 되지만 사람 관계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목회자는 먼저 자기가 정상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 정상적인 인간이 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십자가로 가는 수밖에 없다.
다른 방법으로 수양도 하면 어느 정도는 된다고 하지만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만난다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를 내가 모르면, 거기서 내 인생을 발견하지 못하면, 거기서 참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기도를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기도도 그 사람 나름대로 기도를 하는 것이지 기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만큼 기도를 강조하는 데가 어디에 있는가? 기도한다고 싸움을 안 하는가? 제일 싸움을 많이 하는 종교가 기독교다. 제일 기도 많이 하고, 제일 싸움 많이 한다. 제일 분열 많이 한다.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기도만 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성령이 도와주시면 된다고 하는데, 성령이 도와주시면 된다면 사람이 필요가 없다. 아무나 하면 된다. 성전에서 본 것처럼 성전 내부는 전부 금이다. 금은 신성을 말한 것이다. 그 안에는 신성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신성이 그냥 있는가?
그렇지 않고 조각목에 입혀져 있다. 판자에는 판자 모양으로, 각목에는 각목 모양으로, 나무 모양을 따라 입혀져 있다. 각목에 둥근 것을 씌울 수 없는 것이다. 둥근 데를 각목처럼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금은 스스로 서 있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무엇을 의지해야 한다. 나무를 의지해야 된다. 이것은 잘 이해해야 될 말이지만 하나님도 사람이 없으면 자기 자신을 드러낼 방법이 없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무엇이든지 하신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금은 스스로 무엇을 할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성전 안에서 딱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등대이고, 다른 하나는 법궤 뚜껑이다. 법궤 뚜껑은 시은소라고 하고, 피를 뿌리면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다. 속죄소라고도 한다. 그것만 순금이고 등대도 순금인데, 등대가 불을 밝히려면 감람유 기름이 있어야 되고, 면으로 만든 심지가 있어야 된다. 그냥 금등대가 빛을 발할 수가 없다.
하나님도 왜 사람을 창조해야 했으며, 왜 사람을 구원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시겠는가? 사람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입혀지는데, 성령이라고 각목으로 판자를 만들겠는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 하나님이 마음대로 하실 수 있고, 성령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사람이 왜 필요한가? 어디에 필요하겠는가? 사람은 참 귀중한 존재다. 하나님에게는 너무나 귀중한 존재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잘못되어 버리면 하나님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모세 시대에는 모세 시대의 하나님 밖에 안 된다. 더 이상의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 요한복음 1장에 있는 말씀은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실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 하나님은 모세에게 은혜와 진리는 왜 안 주셨는가? 모세와 모세 시대에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안 준 것이다. 율법으로 밖에는 안 되기 때문에 그랬다. 예수는 왜 은혜와 실재를 가져 왔는가? 사람이 그러니까 된 것이다. 이 여자는 모세 시대를 만났으면 방법이 없다. 모세와 만났어도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예수를 만났다. 이 사람은 은혜와 진리로 오신 분이다. 은혜와 실재로 오신 분이니까 이 여자는 은혜와 실재이신 그분을 만나서 살아나게 되었다. 법이 나쁜 것이 아니고, 법이 없어야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법이 필요하고, 어떤 경우에는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것을 가지고 신학적으로 여러 가지 말이 많고, 끝없는 논쟁이 있다. 믿음이냐, 은혜냐, 이런 이야기다. 거의 원시적인 이야기지만 확실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믿음만 있으면 다 된다고 해도 문제가 생기고, 은혜만 있으면 다 된다고 해도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실제로 나와서 현장에 가보면 논쟁이나 토론이 아무 소용이 없다. 내게 달렸다.
물론 기도를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조금 나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가 없다. 경험을 해보면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되는 것도 알 수 있다. 기도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고,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 욕심으로 구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지만 자기 욕심으로 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구하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개에게 기도하라고 하면 개 이상을 기도하겠는가? 소에게 기도하라고 하면 소 이상을 기도하겠는가?
아이들 기도는 아이들의 기도이고, 어른 기도는 어른의 기도고 다 다르다. 기도만 하면 무조건 된다고 잘못 생각하면 아주 곤란하다. 이번에 코로나19 문제도 어떤 목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걸리지 않는다고 하고, 걸려도 오히려 바이러스가 죽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런데 사기를 치려고 해서 사기를 친 것이 아니고, 자기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 어떤 분이 있다.
십일조를 잘하면 너희 밭에 메뚜기가 먹지 않고 병충해가 없을 것이라는 성경구절을 받아서 다른 사람은 다 농약을 치는데 이분의 밭에 농약을 치지 않았다. 주변에 농약을 치는데 한 곳에 치지 않으면 주변에 있던 모든 메뚜기나 벌레가 다 거기에 몰려들어 버린다. 그래서 농사를 완전히 망쳤다고 고백했다. 그 말을 굳게 믿고 했는데 안 되었다. 얼마나 종교세계에 어이없는 일이 많은지 모른다. 이번 사건도 그런 것이다. 우한이 그렇지 않아도 종교박해 시범지역으로 정해진 장소라고 한다. 거기에 들어가서 엄청나게 전파를 했다는 것이다. 재주가 대단하고, 능력도 대단하다. 그 속에 들어가서 어떻게 수백 명을 삽시간에 아주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포교를 하는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잘 모르겠지만 왜 그 집단에서만 바이러스가 발생했는지 의심하려면 한이 없다. 이*희 총장이 바이러스를 만들었겠는가? 별말이 다 있다. 믿을만한 일도 아니고, 알 수도 없는 일이지만 어떻게 그 속에서만 그렇게 발생했는지 모른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진자 중에 50%라고 그 집단이라고 한다. 물론 집단이니까 한 사람만 가지고 있어도 그렇게 될 수 있지만 의심할 만하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을 찾고 있다. 왜 아브라함을 100세까지 두었는가? 왜 이삭이 눈이 먼 다음에 축복하게 했는가? 왜 야곱을 20년 동안 밧단 아람에서 연단을 했는가? 다 이유가 있다.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되기 어렵다.
태어난 대로 그렇게 되기는 어렵다. 생명은 그 생명이라 하더라도 또 연단이 필요하다. 금을 입히려고 해도 금을 연단해야 입혀지지 금이 스스로 가서 붙겠는가? 그래서 연금술이라는 것이 생겼다. 금을 어떻게 하면 더 얇게 두드려서 그것을 입히겠는가? 요즘은 액체화시켜서 바르면 된다는데, 옛날에는 그것이 안 되니까 두드려서 얇게 종이처럼 만들어서 붙이는 기술이니까 굉장한 기술이다. 요즘은 금박을 만들어서 붙인다. 그것은 기계로 만드는 것이다. 불상을 만들 때는 금박 종이가 있어서 그것을 붙인다고 한다. 순금으로 된 금박이다. 금도 연단을 받는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려면 하나님도 연단을 받는다.
외람된 말이지만 예수님도 우리와 연합하기 위해서 자기가 연단을 받았다. 그냥 오신대로는 우리와 연합이 안 된다.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 어떻게 나와 연합이 되겠는가? 나는 부정모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고,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사람인데, 두 사람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어서 연합이 되겠는가? 아담과 하와가 연합할 때는 한 생명이기 때문에 연합된 것이다. 한 생명이 아니면 연합이 안 된다. 모든 생물을 다 이끌어 와서 이름을 지어보라 하니까 그중에는 하나도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가 없었다.
그러므로 연합이 안됐다. 그래서 갈비뼈를 빼서 하와를 만들어놓으니까 아담이 하는 말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합하여(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3,24)고 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나는 부모님으로 인해 태어난 사람인데, 어떻게 연합이 되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와 연합하기 위해서 먼저 연단을 받으셨다. 해도 해도 안 되니까 십자가까지 간 것이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 때 연합이 되면 거기서 끝나지 왜 더 가겠는가?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일 때 우리는 감동했다. 나면서 소경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할 때 우리가 다 감동했다. 그러나 감동했다고 해서 연합이 된 것은 아니다.
감동하게 되면 우리는 숭배하게 되고, 경배하게 된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감동을 끼친 사람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연합은 아니다. 눈물 흘리고 울었다고 해서 연합이 아니다. 내 의지로 연합한다고 연합이 되는 것도 아니다.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에 연합이 되는 것도 아니다. 생명이 같아야 연합이 된다. 절대로 다른 방법으로는 연합이 불가능하다. 개와 소는 절대로 연합이 불가능하다. 무슨 수를 써도 안 된다. 하나님도 시킬 수가 없다.
그런데 사람이 기도한다고 연합이 되겠는가? 육신으로 태어난 나와 성령으로 태어난 그분이 기도한다고 연합이 되겠는가? 기도한다고 소나무가 잣나무 되겠는가? 절대로 생명이 같지 않으면 연합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생명이 같은 예수를 만나지 않으면, 한 생명 안에서 만나지 않으면, 무슨 수를 써도 연합이 불가능하다.
연합이 불가능하면 성경에 있는 모든 약속은 약속일뿐이다. 시행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약속은 연합된 사람을 위해 준 것이니까 연합되지 않은 사람은 안 되는 것이다. 헛된 노력이다. 헛것을 붙잡고 씨름하는 격이다. 답이 없다. 결론이 없다. 갈 데가 없다. 연합이 구원의 최종목표라고 했지만 어떻게 연합을 하겠는가? 내가 믿는다고 연합이 되는가? 개가 믿는다고 소가 되겠는가? 소와 연합이 되겠는가?
마지막 자리에서 우리는 그분과 연합이 된다. 그러니까 거기까지 가신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거기까지 갈 필요가 없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된다면 십자가까지 갈 필요가 없다. 갈보리 산까지 갈 필요가 없다. 겟세마네에서 연합하면 된다.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그 정도 해서 됐으면 거기서 끝나지 왜 십자가까지 가겠는가? 그분은 거기서 피땀 흘려 기도했다고 했다. 피땀 흘려 기도하면 연합이 좀 되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와보니 제자들이 자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럴수록 연합이 더 안 된다.
우리가 볼 때 감동 줄 사건들이 많을수록 더 연합이 안 된다. 왜 그런가? 다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도 너무 다르면 결혼이 불가능하다. 학벌이 너무 차이가 있어도 결혼이 잘 안 된다. 우리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얼굴이 예쁘니까 아주 학벌이 차이가 나는 사람과 결혼을 했는데, 결국은 스트레스 받아서 자살했다. 학벌이 달라도 안 되는데, 생명이 달라서 되겠는가?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로 갔는가? 물론 표면적으로 생각하면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아서, 시기를 받아서, 종교적으로 순교를 당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분은 거기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와 연합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면 내가 할 수가 없으니까 그분이 연합을 해야 한다. 내가 죽으면 되지만 내가 죽어도 안 된다. 내가 죽어봐야 연합이 안 된다. 이 문제를 놓고 볼 때, 예수님께서는 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고 했겠는가? 그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사실 그 상황에서 말로도 하기 어렵지만 말로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다. 그래서 죄를 용서할 수가 있는 것이다. 죄 없는 자는 죄 있는 자를 용서할 수가 있다. 그런데 죄 있는 자는 죄 있는 자를 용서할 수가 없다. 우리 생각 같으면 죄 있는 자가 죄 있는 자를 동정해서 용서할 것 같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불난데서 불이야 한다고 하는 속담이 있다. 그럴수록 더 한다고 한다. 만일 내가 죄가 있는데 다른 사람이 죄가 있는 것을 용서해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가? 내가 더 죄인이 된다. 더 불의한 자가 돼버리니까 절대로 못한다. 완전히 죄 없는 자만 죄인을 용서할 수 있다. 죄가 없다는 것이 무엇인가? 자기가 없어야 되지 않겠는가. 알고 보면 자기가 없으면 죄가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 들어보니까 자아초월을 목표로 하는데 그것은 자기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자기를 비운다는 말이다. 자기를 비우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자기만 비워지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내가 나를 비울 수 있는가? 어떻게 노력해서 내가 나를 비워진 사람이 되게끔 만들 수 있는가? 내가 비워진 사람이 되게끔 만들면 나는 비워진 사람이 됐다는 자부심이 또 있다. 그러므로 될 것 같지만 안 된다. 예수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는 자기가 비우려고 비운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니까 저절로 비워져 버렸다. 옷이 다 벗겨졌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입는 통짜로 입는 목과 양쪽 팔만 뚫어진 옷인데, 그것도 벗겨서 제비뽑아서 나눠서 가져갔고, 알몸으로 십자가에 달린 것이다. 그보다 더 벗겨지겠는가? 수양을 하면 그보다 더 벗겨지겠는가?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면 되겠는가? 기도를 하면 되겠는가? 무엇을 해도 그분만큼 발가벗겨질 수 없다. 아담과 하와는 발가벗었다고 했다.
그런데 부끄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자리가 죄가 없는 자리다. 쉽게 말하면 완전히 다 벗겨져서 불교로 말하면 초월된 자아, 자가기 없어진 자아다. 실제로 말한다면 아무것도 없는 자리다. 실제로 없는 것이다. 주장할 것도 없고, 가지고 있는 것도 없고, 누구 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그 자리이다. 죽은 사람이 누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아무것도 못준다. 주기 싫어서 못 주는 것이 아니고, 안 주려고 해서 못 주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으니까 자기는 못 주는 것이다. 줄 수 있는데 안 주는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도로 주게 된다. 사람이라는 것이 항상 똑같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고정 불변한 것이 없다. 사람의 마음도 고정불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굳게 결심하고, 결심에 결심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마음은 변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는 그것이 고정될 수 없다. 그 사람일 때만 율법을 초월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아니고 율법을 초월하는 것은 초월이 아니다. 예수님은 지금 율법을 초월해서 이야기를 한 것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고 하니까 아무도 말 못하고 다 가버리더라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다 가버리더라는 것이다.
여자 혼자 남았다. 그래서 물었다. 아무도 없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요8:10)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8:11)고 해서 보냈다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굉장히 쉽다. 너무 쉬운 일인데,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 시대에 율법 앞에서 그것은 정말로 하기 어려운 일이다.
자기가 죽을 일이다. 그렇게 했다가는 돌에 맞아 죽을 일이다. 그런데 아주 쉽다.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8:10,11) 너무 이렇게 쉬운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너무 쉽다. 왜냐하면 죄라는 것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이다. 죄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만드시지 않은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현실에 있는가? 발생하는 것이다. 발생한 것은 조건이 생기면 발생하고, 조건이 없으면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죄는 원래 없는 것인데 발생한 것이다. 아담이 죄인이 된 것은 하나님이 죄인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다. 발생해서 죄인이 된 것이다. 하나님이 벗겨주시면 언제라도 또 죄인이 아닐 수가 있다. 그런데 조건이 되지 않으니까 용서를 못해주는 것이지 조건만 되면 하나님이 정죄할 필요가 없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요8:11) 왜? 원래 죄가 없다. 죄가 있는 것 같지만 죄가 없다. 선도 없고 악도 없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잘 봐야 한다. 이것이 창조된 것인지 아니면 발생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 발생한 것은 언제 없어지든지 없어진다.
조건만 달라지면 그냥 없어진다. 하늘에 구름이 빽빽이 있어서 비가 내린다. 그런데 어느 때 보면 맑은 하늘이 된다. 원래 하늘에 구름이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원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 외에는 없다. 한 공장에서 한날에 찍어 나온 병이라 병은 똑같은 병인데, 하나는 술이 담기면 술병이고, 하나는 물이 담기면 하나는 물병이다. 그런데 술병을 만든 일도 없고, 물병을 만든 일도 없다. 술을 담았으니 술병이 되는 것이고, 생수를 담으면 생수병이 되는 것이다.
언제든지 술을 비우고 물을 비우면 도로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빈 것이다. 그것이 초월이고, 공이고, 무고, 죄 없는 것이다. 죄 있는데 덮어지면 죄가 없어지겠는가? 덮어주어도 죄는 죄다. 발생한 것이니까 발생 원인이 없어지면 죄가 없어진다. 용서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관계에서 발생한 것이니까 관계가 회복되면 원인무효 된다. 나와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사람이 나를 모함을 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이 계속 있겠는가? 그 사람과 나의 관계가 좋아지면 그것은 없어지는 것이다. 누가 나를 모함하면 내가 그 사람을 좋게 해주면 된다. 모함할 필요가 없게 해주면 모함이 없어진다. 내가 언제 모함했던가 생각하게 된다. 거짓말을 왜 하겠는가? 만들어진 것이니까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이라는 것이 원래 있었겠는가? 죄는 원래 없는 것이다. 발생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는 발생한 것과 창조한 것이 같이 있다.
그러나 창조된 것은 그대로 있지만 발생한 것은 늘 변하니까 그 발생한 것을 따라다니다 보면 사람이 미친놈이 된다. 오늘은 이랬다 내일은 저랬다한다. 여당이 따로 있는가? 야당이 따로 있는가? 발생한 것이다. 이리 따라가도 이상한 사람이 되고, 저리 따라가도 이상한 사람이 된다. 원래 없었던 것인데 만들어낸 것이니까 그렇다. 누군가가 어떤 이유로 만들어 낸 것이다. 손으로 만든 것은 다 없어진다는 것이다.
죄는 없는 것이다. 오늘 내가 그 말을 하려고 했다. 죄는 없는 것이다.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죄에 매일 필요가 없다. 죄 없는 분과 우리가 연합하면 된다. 죄 없는 분 안에서 내가 발견되면 그분 안에 있게 된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 여자는 뭐라 했겠는가? 이는 수풀속의 사과나무로구나. 이러지 않았겠는가?
거기서는 미워할 일도 없고, 죽자 살자 할 일도 없다. 왜 예수는 만유를 포함했는가? 죽기 전에는 만유를 다 포함할 수 없다. 그 생명은 만유를 포함한 생명이지만 만유는 포함이 안 된다. 내가 그 안에 포함이 안 된다. 아무리 내가 예수와 하나가 되고 친해보려고 해도 안 된다. 해보면 안다. 나는 단 하루만 그렇게 기도하던 때가 있다. 오로지 하루만 주님만 생각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왜냐하면 계속 생각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때는 괴로웠다.
내가 오로지 주님만 생각해야 되는데 내가 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길에 나가면 산만해진다. 왜냐하면 볼 것이 너무 많아서다. 어떤 사람은 안보고 다니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다 보고 다닌다. 간판에 글자하나가 있는지 없는지도 보고 다닌다. 여러분이 다니면서 보라. 왜 간판을 가는지 아는가? 그중에 글자 하나가 못 쓰게 된다. 빨간색이 빨리 퇴색이 된다. 다른 글자가 멀쩡히 있어도 다시 갈아야 된다.
그래서 간판하는 사람이 먹고 사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보고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나는 그런 것이 다 보인다. 그러니까 정신이 통일될 수 없는데, 정신 통일하라고 하면 나 같은 사람은 안 된다. 정진이라고 하는데 정진하려면 처음에는 어렵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 가면 그것이 잡혀서 정진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왜 그 짓을 하고 있는가? 예수 안에 가보면 내가 정진을 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내 모습이 다 보이는데 정진하고 말고 할 것이 뭐가 있는가? 내가 누구인지 다 알아지는데, 무슨 정진을 하고 수도를 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빤히 다 알고 있다. 예수 안에 있는 나, 그 나는 만유를 포함한 내가 된다. 어디가도 있다. 소나무 속에도 그것이 있고, 잣나무 속에도 그것이 있다. 너희가 찬양하지 않으면 이 돌들이 일어나서 찬양할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하는 것이다. 변치 않는 생명,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만 살아있는 생명이다. 그것은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살고 영원히 있는 생명이다.
있다가 없어질 생명도 있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생명도 있다. 영생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생명이다. 누림으로 생각하면 최고의 복이고 그것을 영생이라고 한다. 성질로 말한다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다 주님 안에 있는 것, 예수 안에 있는 것,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 안에 있는 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이 육신은 없어졌지만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예수가 있다. 우리는 지금 그 사람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자기 안에서 이 여자를 보면 너무 쉽고 아주 간단하다.
아무것도 아닌 문제이다. 그런데 만일 내가 선악과를 먹은 사람 안에서, 율법을 아는 사람 안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종교인 안에서, 불교인이라는 불교인 안에서, 그 여자를 보면 너무 일이 많다. 무거운 짐이라서 그것을 해결하려면 너무 무겁다.
짐이 무거워서 우리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30)고 한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기도하면 좀 쉬운 것 같은데 24시간 기도만 하고 살 수 있는가?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 가면 그냥 짐이 없어진다. 그분이 짐이 없는 분이니까 나도 짐이 없어져버린다. 내가 눈에 보이고 생각이 나는 그런 짐을 내가 어떻게 억지로 벗겠는가? 억지로 벗을 짐 같으면 지지 않는다. 이번에 사랑방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왔다. 어떤 분이 먼 길을 가자면 짐을 버려야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군대에서 30년간 군대생활만 하던 원사 출신 우리 형제가 중요한 임무를 맡은 사람은 짐이 없어야 된다고 했다.
그래서 생각이 번뜩 나더라. 중요한 임무를 맡은 사람은 짐이 없어야 된다. 적진에 들어가서 적의 공작을 파괴하기 위해서 들어간 사람은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군번도 없어야 하고, 신분증도 없어야 하고, 계급장도 없어야 하고,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잡혀도 근거가 없어진다. 이런 사람이 우리나라에 여러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보훈청에 가서 연금을 받으려고 해도 받을 수가 없다.
근거가 없다. 근거를 다 없애버렸다. 우리 교회에 그런 사람이 하나 있다.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왔는데 도망쳐서 나왔다. 그래서 살았는데 왔다갔다 하다보면 죽는다. 어디서 죽을지 모르니까 그것을 알고 도망쳐왔다. 본대로 복귀하지 않고 살았는데, 나중에 연금을 받으려니 근거가 없다. 아무것도 없다. 군번도 없다. 국방부에 가도 없고 아무데도 없다. 그런데 동료가 있어서 보증을 서 주어서 연금을 받고 산다.
군번 없는 용사처럼 그런 사람들이 있다. 진짜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사람은 자기가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자기가 잡혀도 문제가 안 될 사람이다. 잡힐 것을 전제로 하는 사람이니까 잡혀서 고문하면 다 불어버릴 것인데, 모르니까 고문을 아무리 해도 불어낼 것이 없다. 조사해 봐도 누구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영원한 길로 가려면 짐이 없어야 한다. 짐이 어떻게 없어지겠는가? 그것을 불교에서는 업이라고 한다. 그 업을 없애려고 사람들이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른다. 기독교인들이 기도 좀 해서 그 업이 다 없어지겠는가? 불가능하다. 기도하면 다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없애려고 너무 노력을 많이 한다.
일어났다 엎드렸다 108배를 왜 하는가? 이 업을 없애려고 한다. 3천 배를 왜 하는가? 업을 없애려고 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기도한 사람들이 잘못하면 오히려 욕심이 더 많아져버린다. 기도하면 다 된다고 하니까 욕심이 더 많아지고 없던 욕심이 생긴다. 그렇다고 기도를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를 누가 하는가? 이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하는데 누가 기도해야 하나님 나라가 임하겠는가? 내가 잘 먹고 잘사는 것은 하나님은 별로 관심이 없다. 자기 나라밖에 관심이 없다. 누가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하느냐 인데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할 사람이 기도를 해야 그 나라가 오지 아무나 기도한다고 오겠는가? 지금 코로나19 때문에 아주 쉬운 것이 안 된다. 마스크를 써야 하는데 마스크를 사려고 길바닥에 100미터 200미터씩 줄을 서 있다.
노약자들은 가서 서 있을 수도 없다. 그래도 어떤 사람은 한 시간 기다려서 한 장을 샀다고 한다. 그래서 공무원 한두 명에게 말해 보았다. 페이스 북에도 써도 아무 반응이 없어서 직접 공무와 관계된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아무리 말을 해도 안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마지막 나온 대책도 마찬가지이다. 약국에 가서 사라, 농협에 가서 사라는 것이다. 또 역시 줄을 서라는 것이. 내용을 알고 보니 물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서 내놓았다는 것이 결국 50% 구매하던 것을 80%로 늘리는 것 같다. 왜냐하면 중국으로 나가던 물량이 못 나가게 되었으니까 남아 있는 것이다. 어떤 수출업자가 마스크를 매점매석했다가 곤혹을 치르고 있다. 천 만장을 만들어내는데 정부에서 사는 것은 50% 밖에 못산다. 50% 수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에서 수입 금지를 시켜서 갈 데가 없다. 그러면 이제는 80% 살 수 있으면 물량이 모자라지 않는다. 이것을 통반장을 통해 보급하면 조용히 간단하게 보급할 수 있다.
왜 그것을 하지 않고 약국에 가서 사라, 농협에 가서 사라고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장사를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라 모르는 것 같다. 통반장에게 공으로 시켜도 하지만 수고비 주고 하라고 하면 더 좋아하고 더 잘한다. 원가가 350원인데 지금 1000원을 받는다. 통반장에게 한 장 파는데 500원을 준다고 하면 밤낮없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판다. 그래도 된다.
그리고 마스크 값을 1500원으로 올려도 된다. 올린다고 사지 않겠는가? 2000원으로 올려도 다 산다. 왜 못 올리는지 모르겠다. 원가를 올려주면 많이 생산할 것이다. 아주 쉬운 일을 너무 어렵게 한다. 내가 해도 안 될 일이고, 페이스 북에 계속 올리는 데도 안 되니까 포기했다.
보나마나 또 안 된다. 물량이 확보되지 않으니까 지연작전을 쓰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일이 어디서 보면 아주 쉽고, 어디서 보면 아주 어렵다. 이 여자를 놓고 보면 이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5)
이것이 정말 난제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주 간단하다.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8:10,11) 간단하게 해결된다. 솔로몬이 볼 때는 간단하다. 산모 둘이 와서 아기를 놓고 서로 자기 아기라고 하는데, 누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솔로몬이 보니 간단하다. 칼을 가져오너라. 둘로 쪼개서 주겠다고 하니까 간단하다.
아무것도 아닌 문제를 너무 어렵게 생각한다. 사람이 어려우면 문제 자체가 어렵게 보인다. 어찌할 수 없다. 예수 안에서 그분과 우리가 하나가 되면 연합이 되면 모든 문제가 예수님이 본 것처럼 그렇게 봐진다. 그러면 문제가 없어진다. 인생 문제가 얼마나 복잡한가? 숨도 못 쉬도록 복잡하다. 복잡한 사람을 만나보면 너무 복잡하다. 그 이야기를 다 듣고 있으려면 머리가 아파 못 듣는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일을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죄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는 없는 것이다. 있는데 왜 없어? 만들지 않았으니까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발생한 것이다. 어떤 관계에서 발생했다. 관계를 개선시켜 버리면 없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다. 여러 목사님들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내 입장은 그렇다.
누구 이야기를 들으면 아주 이야기는 복잡한데 들어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옛날에는 내가 복잡하니까 들으면 내가 더 복잡해져가지고 어떻게 할 수 없다. 지금 보면 복잡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모르는데 복잡할 일이 뭐가 있는가? 복잡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 생명이 다 주님께 달려 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고 하면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람에게 그것을 생각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내가 예수 안에 있구나. 내려오지 못한 저 사람 속에 내가 있구나. 그것이 더 쉽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라는 그 말을 내가 옛날에 알았지만 잘 안되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라는 그 말도 알았지만 그렇게 잘 안 된다. 그러니까 복잡해진다. 예수 안에서 저기 내가 있구나. 저것이 나구나. 저 사람이 나구나. 내가 한 치도 저기서 벗어날 수 없구나. 이것을 알고 나면 아주 간단하게 대번에 부처님 경지에 올라가버린다. 평생 수양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만 남는 그 자리에 가보면 문제가 아주 간단하다. 우리 모두에게 또 여러분을 통해서 이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한다. 모든 사람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고, 쉬게 하신 분 앞으로 와서 안식을 얻게 하도록 이 복음을 여러분을 통해 전파되기를 원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