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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65권
43. 무작실상품을 풀이함②
【경】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선남자와 선여인이 이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면서 가까이하고 바르게 기억하면,
끝내 눈이 병들지 않고 귀ㆍ코ㆍ혀ㆍ몸도 병들지 않으며,
몸에 재앙이 없고 또한 쇠하거나 늙음도 없으며 끝내 횡사(橫死)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없는 백천만의 하늘들과 사천왕천에서 정거천에 이르기까지 하늘들이 모두 다 따르면서 듣고 받아 지니니,
6재일(齋日)인 매달 8일ㆍ23일ㆍ14일ㆍ29일ㆍ15일ㆍ30일에는 모든 하늘이 이 선남자ㆍ선여인이 법사가 되어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처소로 모두 다 모여들 것입니다.
이 선남자와 선여인이 대중 가운데서 이 반야바라밀을 설하면 한량없고 그지없는 아승기의 불가사의하고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을 얻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이 선남자와 선여인이 6재일인 매달 8일ㆍ23일ㆍ14일ㆍ29일ㆍ15일ㆍ30일에 모두 하늘들의 앞에서 이 반야바라밀을 설하면,
이 선남자와 선여인은 한량없고 그지없는 아승기의 불가사의하고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을 얻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바로 크고 값진 보배[大珍寶]이기 때문이니라.
어떤 것이 크고 값진 보배인가?
이 반야바라밀은 지옥과 축생과 아귀와 인간 세계의 빈궁한 사람을 구제하고 찰리(刹利)의 큰 성바지ㆍ바라문의 큰 성바지와 거사의 큰 집안을 주며,
사천왕천 내지는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를 주고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주느니라.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10선도(善道)와 4선(禪)ㆍ4무량심(無量心)ㆍ4무색정(無色定)ㆍ4념처(念處) 내지는 8성도분(聖道分)과 단바라밀ㆍ시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선바라밀 및 반야바라밀을 널리 설하기 때문이요,
내공(內空) 내지는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을 널리 설하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10력 내지는 일체지를 널리 설하기 때문이니라.
이 가운데서부터 배워서 찰리의 큰 성바지와 바라문의 큰 성바지와 거사의 큰 집안에 태어나며,
사천왕천ㆍ삼십삼천ㆍ야마천ㆍ도솔타천ㆍ화락천ㆍ타화자재천과,
범신천(梵身天)ㆍ범보천(梵輔天)ㆍ범중천(梵衆天)ㆍ대범천(大梵天)ㆍ
광천(光天)ㆍ소광천(少光天)ㆍ무량광천(無量光天)ㆍ광음천(光音天)ㆍ
정천(淨天)ㆍ소정천(少淨天)ㆍ무량정천(無量淨天)ㆍ변정천(遍淨天)ㆍ
아나바가천(阿那婆伽天)ㆍ득복천(得福天)ㆍ광과천(廣果天)ㆍ무상천(無想天)ㆍ아부가나천(阿浮呵那天)ㆍ불열천(不熱天)ㆍ쾌견천(快見天)ㆍ묘견천(妙見天)ㆍ아가니타천(阿迦尼吒天)ㆍ
허공무변처천(虛空無邊處天)ㆍ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ㆍ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ㆍ비유상비무상처천(非有想非無想處天)에 태어나느니라.
이 법 가운데서 배워서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를 얻으며 벽지불의 도를 얻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을 크고 값진 보배라 하느니라.
값진 보배의 바라밀 안에서는 나거나 없어지거나 더럽거나 깨끗하거나 취하거나 버리는 어떠한 법도 얻을 수 없으며,
값진 보배의 바라밀에는 또한 착하거나 착하지 않거나 세간이거나 출세간이거나 유루(有漏)이거나 무루(無漏)이거나 유위(有爲)이거나 무위(無爲)의 어떠한 법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이것을 얻을 것이 없는[無所得] 값진 보배의 바라밀이라 하느니라.
수보리야, 이 값진 보배의 바라밀은 어떤 법으로도 물이 들게 할 수 없나니, 왜냐하면 물이 들게 하는 법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그러므로 물듦이 없는[無染] 값진 보배의 바라밀이라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또한 이와 같이 알지도 못하고 또한 이와 같이 분별하지도 않으며,
또한 이와 같이 얻지도 못하고 또한 이와 같이 쓸모없는 이론도 하지 않나니,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잘 수행하는 것이니라.
또한 모든 부처님을 예경하여 모든 부처님을 찾아 뵈오면서 하나의 불국토에서 또 다른 불국토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며,
모든 부처님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의 국토를 청정하게 하느니라.
수보리야, 이 반야바라밀은 모든 법에 대하여 힘이 없고 힘이 아닌 것도 없으며,
받는 것도 없고 주는 것도 없으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느니라.
이 바라밀은 또한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며,
욕계(欲界)를 버리지도 않고 욕계에 머무르지도 않으며,
색계(色界)를 버리지도 않고 색계에 머무르지도 않으며,
무색계(無色界)를 버리지도 않고 무색계에 머무르지도 않느니라.
이 반야바라밀은 단바라밀과 함께하지도 않고 또한 버리지도 않으며,
시라바라밀과 함께하지도 않고 또한 버리지도 않으며,
찬제바라밀과 함께하지도 않고 또한 버리지도 않으며,
비리야바라밀과 함께하지도 않고 또한 버리지도 않으며,
선바라밀과 함께하지도 않고 또한 버리지도 않으며,
반야바라밀과 함께하지도 않고 또한 버리지도 않느니라.
내공과 함께하지도 않고 또한 버리지도 않으며 나아가 무법유법공과 함께하지도 않고 또한 버리지도 않으며,
4념처와 함께하지도 않고 또한 버리지도 않으며 나아가 8성도분과 함께하지도 않고 또한 버리지도 않으며,
부처님의 10력과 함께하지도 않고 또한 버리지도 않으며 나아가 18불공법과 함께하지도 않고 또한 버리지도 않느니라.
수다원의 과위와 함께하지도 않고 또한 버리지도 않으며 나아가 아라한의 과위와 함께하지도 않고 또한 버리지도 않으며,
벽지불의 도와 함께하지도 않고 또한 버리지도 않으며 나아가 일체지와 함께하지도 않고 또한 버리지도 않느니라.
이 반야바라밀은 아라한의 법과 함께하지도 않고 범부의 법을 버리지도 않으며,
벽지불의 법과 함께하지도 않고 아라한의 법을 버리지도 않으며,
부처님의 법과 함께하지도 않고 벽지불의 법을 버리지도 않느니라.
이 반야바라밀은 무위의 법과 함께하지도 않고 유위의 법을 버리지도 않나니,
왜냐하면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간에 이 모든 법의 모양은 항상 머물러서 달라지지 않으며,
법상(法相)ㆍ법주(法住)ㆍ법위(法位)에 머물되 잘못되지도 않고 상실되지도 않기 때문이니라.”
【논】
【문】 설령 반야를 받아 지니면서 바르게 기억한다 해도 오히려 뭇 재환(災患)이 있거늘 어찌하여 “끝내 눈 등이 병들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답】 이 일에 대해서는 앞의 「공덕품(功德品)」과 「지옥품(地獄品)」에서 이미 자세히 설명했나니,
이른바 반드시 업보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뭇 재환이 없으며,
또 항상 받아 지니고 바르게 기억하면서 반야를 말씀대로 수행하기 때문에 뭇 재환이 없다.
비유하면 좋은 약은 여러 가지의 병을 낫게 하지만 만일 먹는 법을 따르지 않아서 병환이 낫지 않는다면 그것은 약의 허물이 아닌 것과 같다.
또 지친 사람이 비록 날카로운 병기를 얻었다 하더라도 재난을 막지 못하는 것은 그 병기의 허물이 아닌 것과 같다.
수행하는 이도 이와 같아서 전생에 지은 중한 죄로 금생에 말씀하신 대로 행하지 못하여 반야의 힘을 얻지 못하는 것은 반야의 허물이 아니다.
【문】 천상에도 반야바라밀이 있을 터인데 모든 하늘은 무엇 때문에 6재일(齋日)에 청정하지도 못한 사람의 몸을 따르면서 반야를 들으려고 하는가?
【답】 천상에도 경전이 있고 전하여 듣는 것도 그와 같을 것이나 역시 부처님의 말씀은 아니다.
만일 있다면 도리천(忉利天)의 천상이나 도솔천(兜率天)의 천상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수라(阿修羅)가 도리천과 싸울 적에 부처님께서는 제석에게
“너희들은 반야를 외우고 염해야 한다.”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도솔천에는 항상 보처(補處) 보살이 있으며 모든 하늘을 위하여 설하고 있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있을 것이다.
색계의 모든 하늘은 몸과 의복이 가벼워서 무게가 한 냥(兩)도 되지 않으며 그들은 항상 고요함을 즐기면서 선정의 맛을 느끼고 있나니, 이 때문에 경전이 있을 수 없다.
모든 하늘에게는 두 가지 즐거움이 있나니,
곧 욕락과 선정의 즐거움이 그것이다.
이 때문에 부지런히 애써서 반야바라밀을 쓰고 지닐 수 없거니와,
염부제의 사람은 정진하면서 쓰고 지니고 부지런히 배우며 바르게 기억할 수 있다.
경전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염부제 사람은 세 가지의 인연으로 모든 하늘과 울단왈(鬱單曰)의 사람들보다 뛰어나다.
첫째는 음욕을 능히 끊는 것이요,
둘째는 알고 기억하는 힘이 강한 것이며,
셋째는 부지런히 힘쓰고 용맹스러운 것이니,
이 염부제 사람들은 쓰고 베끼고 읽고 외우며 받아 지닐 수 있다.
이 때문에 모든 하늘이 내려와서 반야의 경전에 예배하며 혹은 그 법을 들으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천상에도 경전은 있지만 멀리서 와서 공양하면 복덕이 더욱 증가하며 반야바라밀을 구하는 것에 싫증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어떤 하늘 보살은 반야를 존중하게 하려고 일부러 내려와서 중생들로 하여금 더욱더 믿고 공경을 더하게 하였다.
모든 하늘조차도 오히려 이와 같이 내려오거늘 하물며 수행하는 우리들이겠는가?
만일 좋은 향기를 맡거나 광명을 보면 이와 같은 희유한 일이 있기 때문에 깊은 마음으로 반야를 믿고 좋아하게 된다.
또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한 사람은 나쁜 귀신이나 악마의 백성이 항상 따라다니면서 틈을 엿보며 나쁜 곳에 떨어지게 한다.
그런데 사천왕으로부터 정거천에 이르기까지 이 큰 힘을 지닌 여러 하늘들이 오면 조그마한 귀신들은 피하여 도망간다.
보살이 청정하고 큰마음을 내는 것은 앞의 품(品)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나니, 이 때문에 와서 법사를 따라다닌다.
6재일에는 모든 하늘이 내려와서 사람들의 마음을 자세히 살피며 15일과 30일에는 올라가서 모든 하늘에게 아뢴다.
또 이 6재일은 나쁜 날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쇠하고 흉하게 한다.
만일 이 날에 8계(戒)를 받아 재(齋)를 지니고 보시하고 법을 들으면 이때 모든 하늘은 기뻐하게 되고 조그마한 귀신들은 그리 괴롭힐 틈을 얻지 못하며 수행하는 이들을 이익되게 한다.
그리고 이날에는 법사가 높은 자리에서 법을 설하므로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 때문에 모든 하늘이 오는 것이다.
설법하는 이는 한량없고 그지없고 위없는 법, 이른바 반야바라밀을 찬탄하며 또한 한량없고 그지없는 복덕을 얻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을 위하여 설할 적에는 사람은 근기가 둔하고 복덕이 얇기 때문에 복을 얻는 것이 적거니와,
모든 하늘은 근기가 예리하고 복덕이 많고 복덕이 수승하기 때문에 복을 얻는 것이 많다.
그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수행하는 이가 재일(齋日)에 모든 하늘과 대중 가운데서 반야를 설하면 복을 얻는 것이 한량없다.”라고 하신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가 하는 말이 옳다고 하시면서 다시 스스로 한량없는 복덕의 인연을 말씀하셨나니, 이른바 반야바라밀은 바로 크고 값진 보배의 바라밀이라 하신다.
마치 여의보주(如意寶珠)가 온갖 사람들의 소원을 만족시키듯이,
이 반야바라밀은 온갖 중생들의 원을 만족시켜 주니, 이른바 고통을 여의게 하고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고통을 여의게 한다.’ 함은 반야바라밀이 중생들 가운데 지옥ㆍ축생ㆍ아귀와 빈궁한 인간을 구제하는 것이요,
‘즐거움을 준다.’ 함은 찰리의 큰 성바지 내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는 것이다.
이 즐거움의 인연은 착한 법이어서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널리 설명하였나니, 이른바 10선도(善道) 내지는 일체지이다.
마치 여의보(如意寶)가 의복과 음식과 금ㆍ은 등을 뜻에서 구하는 대로 나오게 하듯이,
반야바라밀도 그와 같아서 10선도 내지는 일체지와 찰리의 큰 성바지 내지는 부처님이 되게 하나니, 이런 일 때문에 값진 보배의 바라밀이라 한다.
또 값진 보배의 바라밀이라 함은, 사람이 여의보를 얻으면 마음대로 구하는 것을 모두 다 얻다가 잃게 되면 근심하고 괴로워하려니와,
이 반야바라밀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아서 항상 잃지 않으므로 세상에서마다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맨 마지막에도 부처님의 도를 얻게 한다.
마치 사람이 여의보를 얻으면 자신이 높은 체하는 마음을 내어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데, 이것이 바로 쇠퇴하는 인연이 되듯이,
만일 사람이 세간의 반야바라밀을 얻는 것도 그와 같아서 분별하되 모든 착한 법을 집착해서 모든 나쁜 법을 버리면서도 높은 체하는 마음을 내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면 모든 죄의 문이 열리게 된다.
값진 보배 반야바라밀이란 출세간의 반야바라밀 가운데는 착하거나 착하지 않거나 간에 분별하지 않나니,
이것을 크고 값진 보배의 바라밀이라 하며 중생을 이롭게 하고 마침내 근심이 없다.
이 값진 보배 바라밀은 착한 법으로도 더럽힐 수 없거늘 하물며 착하지 않는 법이겠는가?
이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또한 알지 못한다.’ 함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반야의 모양은 또한 앎[知]을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앎을 짓지 않는다는 것은 모양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집착을 내지도 않고 분별하지도 않으며 일정한 모양을 얻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을 과환(過患)도 없고 법애(法愛)도 없으며 모든 쓸모없는 이론[戱論]을 끊는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람은 진실로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면서 법답게 부처님께 예배하고 스스로 진실한 법의 이익을 얻기 때문에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또한 자기 자신이 악(惡)을 여의면서 중생으로 하여금 악을 여의게 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세계를 청정하게 한다.
얻을 것이 없는 방편[無所得方便]의 힘을 쓰기 때문에 모든 법이 마침내는 고요히 사라진 모양[寂滅相]임을 알며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모든 착한 법을 일으킨다.
반야바라밀은 마침내 청정하기 때문에 힘이 없고 힘이 아닌 것도 없다는 것은,
비유하건대 마치 허공에는 비록 어떤 법도 없으나 허공으로 인하여 짓는 바가 있게 되는 것과 같다.
어느 한 법도 일정한 모양으로 집착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힘이 없다고 하나 모든 법의 실상을 얻어서 모든 착한 법에 장애가 없으며, 나아가 악마를 항복받고 부처님이 되므로 힘이 없는 것도 아니다.
받지도 않고 주지도 않으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나아가 유위의 법을 버리지 않고 무위의 법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도 또한 그와 같다.
이 가운데서 인연을 말씀하시되,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간에 모든 법의 성품은 항상 머무른다.”라고 하나니,
모든 세간법의 성품이란 곧 모든 법의 실상이요,
모든 법의 실상이라 함은 곧 반야바라밀이다.
만일 항상하다, 무상하다는 등으로 모든 법의 실상을 구하면 이 모두는 어그러지는 것이요,
만일 어떤 사람이 법의 성품에 들어가서 구하면 어그러짐이 없나니, 법의 성품은 항상 있기 때문에 유실되지 않는다.
【경】 그때 모든 천자(天子)들은 허공 가운데 서서 큰 음성을 내며 뛸듯이 기뻐하면서 구발라(漚鉢羅)꽃과 파두마(波頭摩)꽃과 구물두(拘物頭)꽃과 분다리(分陀利)꽃을 부처님 위에 뿌리고는 말했다.
“저희들은 염부제에서 두 번째 법륜(法輪)을 굴리는 것을 보았으니, 이 안에 있는 한량없는 백천의 천자들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법륜은 첫 번째 굴리는[輪] 것도 아니요 두 번째 굴리는 것도 아니니라.
이 반야바라밀은 유전(流轉)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환멸(還滅)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무법유법공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유전에서 나오지도 않았고 환멸에서 나오지도 않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의 모양[相]이 공하고 나아가 단(檀)바라밀은 단바라밀의 모양이 공하며,
내공은 내공의 모양이 공하고 나아가 무법유법공은 무법유법공의 모양이 공하며,
4념처는 4념처의 모양이 공하고 나아가 8성도분은 8성도분의 모양이 공하며,
부처님의 10력은 부처님의 10력의 모양이 공하고 나아가 18불공법은 18불공법의 모양이 공하느니라.
수다원(須陀洹) 과위[果]는 수다원 과위의 모양이 공하고 사다함(斯陀含) 과위는 사다함 과위의 모양이 공하며,
아나함(阿陀含) 과위는 아나함 과위의 모양이 공하고 아라한(阿羅漢)의 과위는 아라한 과위의 모양이 공하며,
벽지불(辟支佛)의 도(道)는 벽지불의 도의 모양이 공하고 일체종지(一切種智)는 일체종지의 모양이 공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반야바라밀은 곧 마하(摩訶)바라밀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온갖 법의 제 모양이 공하다 하더라도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되,
그렇다고 법륜을 굴린다고 할 만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며,
유전한다 할 만한 법도 없고 환멸한다 할 만한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마하반야바라밀 가운데는 또한 볼 수 있는 어떤 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은 얻을 수 없어서 유전하거나 환멸하는 온갖 법은 마침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공한 모양은 유전할 수도 없고 환멸할 수도 없으며,
모양이 없는[無相] 모양도 유전할 수가 없고 환멸할 수도 없으며,
지음이 없는[無作] 모양도 유전할 수가 없고 환멸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와 같은 반야바라밀을 설하고[說] 가르쳐 주고[敎] 비추어 주며[照], 열어 주고[開] 보여 주며[示], 분별(分別)하고 드러내고[顯現] 해석(解釋)하며 얕고도 쉽게[淺易]하면서 이와 같이 가르쳐 줄 수 있는 이면,
이것을 바로 청정하게 반야바라밀을 설한다 합니다.
또한 다시 설하는 이도 없고 받는 이도 없고 증득하는 이도 없으니,
만일 설하는 이도 없고 받는 이도 없고 증득하는 이도 없다면 역시 소멸하는 것도 없나니,
이 설법 가운데에는 또한 필정(畢定)의 복전(福田)도 없는 것입니다.”
【논】 해석한다.
모든 하늘은 반야를 듣고 뛸 듯이 기뻐하니[歡喜踊躍], 모든 하늘의 몸은 가볍고 근기가 예리하여 집착하는 모양을 분별하고 가볍거나 무거운 것이 있음을 안다.
반야바라밀은 마침내 청정하여 평등한 실상(實相)이요, 이보다 더 크게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 없다 함을 듣고서, 이 때문에 뛸 듯이 기뻐하면서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을 일으켜 공양 거리와 연꽃 등을 가지고 부처님께 공양하고는,
말하기를,
“우리들은 염부제에서 두 번째 법륜을 굴리는 것을 본다.”라고 한다.
【문】 처음에 법을 설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도를 얻게 한 것을 바로 법륜을 굴렸다 하거늘 지금은 무엇 때문에 두 번째 법륜을 굴린다고 하는가?
만일 부처님께서 설한 것을 법륜을 굴린다[轉法輪]고 한다면 모든 것이 법륜이거늘 왜 두 번째라고 한정하는가?
【답】 처음에 법을 설한 것은 틀림없이 첫 번째의 법륜이라 할 것이나 처음 굴린 때로부터 법이 다하기까지를 통틀어 굴린다[轉]고 한다.
이 모든 하늘은 이 모임 가운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상의 도를 일으켜 무생법인을 얻는 것을 보았고 이런 이익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찬탄하면서
‘두 번째 굴리는 법륜’이라고 한 것이다.
처음 법륜을 굴릴 때는 8만의 여러 하늘들이 무생법인을 얻었고 아야교진여(阿若憍陳如) 한 사람이 초도(初道)를 얻었으며 지금은 한량없는 모든 하늘이 무생법인을 얻은 것이니, 이 때문에
“두 번째 법륜을 굴렸다.”라고 말한 것이며,
지금에 굴린 법륜도 처음에 굴린 것과 비슷하다.
【문】 지금 굴리신 법륜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도를 얻었고 처음에 굴리신 법륜으로는 도를 얻은 이들이 적었거늘 어떻게 큰 것을 작은 것에 비유하는가?
【답】 모든 부처님 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은밀한[密] 것이요,
둘째는 드러난[現] 것이다.
처음에 법륜을 굴렸을 적에 성문(聲聞)의 사람으로는 8만 1인이 처음의 도를 얻은 것을 보았다.
모든 보살은 무수한 아승기의 사람들이 성문의 도를 얻은 것을 보았으며,
무수한 사람이 벽지불 도의 인연을 심었고 무수한 아승기의 사람이 최상의 도의 마음을 내었으며,
무수한 아승기의 사람이 6바라밀의 도를 행하여 모든 깊은 삼매(三昧)와 다라니문(陀羅尼門)을 얻었고,
시방의 한량없는 중생들이 무생법인을 얻었으며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들이 초지(初地)에서 10지(地)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 머물렀고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들이 일생보처(一生補處)를 얻었으며,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들이 도량(道場)에 앉게 되었으니,
이 법을 듣고서 신속히 부처님 도를 이룬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불가사의한 모양을 바로 은밀하게 굴리는 법륜의 모양이라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크게 비가 올 적에 큰 나무는 비를 많이 맞고 작은 나무는 비를 적게 맞는 것과 같나니,
이 때문에 처음에 굴린 법륜도 역시 큰 줄을 알아야 하며 나중의 것으로 앞의 것에 비유한다 해도 허물은 없다.
“법륜을 굴린 것이 첫 번째도 아니고 두 번째도 아니다.”라고 함은 필경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륜을 굴린 것이 과보인 열반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곧 원인 가운데서 결과를 말한 것이다.
법륜은 곧 반야바라밀이다.
이 반야바라밀은 일어나는 것도 없고 짓는 것도 없는 모양이기 때문에 유전(流轉)도 없고 환멸(還滅)도 없나니,
12인연(因緣)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무명(無明)은 마침내 공하기 때문에 실로 모든 지어감[行] 등을 낼 수가 없다.
무명은 허망하고 뒤바뀐 것이어서 실로 일정한 것이 없기 때문에 멸할 법이 없거니와,
세간에서 생기는 법을 말하기 때문에 유전한다[轉]하고 세간에서 소멸하는 법을 말하기 때문에 환멸한다[還]고 한다.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이런 두 가지 일이 없기 때문에
“유전도 없고 환멸도 없다.”라고 말하니,
없는 법[無法]과 있는 법[有法]이 공하기 때문이다.
유전이 없다는 것은 바로 유법공(有法空)이요,
환멸이 없다는 것은 바로 무법공(無法空)이다.
【문】 수보리는 무엇 때문에
“유법과 무법이 공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유전에서 나오지도 않고 환멸에서 나오지도 않았다.”라고 물었으며,
부처님께서는 도리어 공으로써 대답하셨는가?
【답】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법에는 네 가지 모양이 있나니,
첫째는 ‘있다[有]’고 하고,
둘째는 ‘없다[無]’고 하며,
셋째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하고,
넷째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고 한다.”
이 가운데서 삿된 기억 때문에 네 가지 삿된 행이 있고,
이 네 가지 법을 집착하기 때문에 삿된 도[邪道]라 한다.
이 가운데서 바르게 기억하기 때문에 네 가지 바른 행이 있고,
그 가운데에서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바른 도[正道]라 한다.
이 가운데서도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을 논파하기 때문에 무법유법공이라 한다.
부처님께서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는 것까지 논파하기 때문에
“유전도 없고 환멸도 없다.”라고 말씀하신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는 것을 논파하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위의 3구(句)로써 파하는 것이요,
둘째는 열반의 실상으로써 파하는 것이다.
수보리는 비록 부처님께서 열반으로 있다 없다는 것을 논파하는 줄 안다 하더라도, 이 가운데에서 새로 발심한 보살이 있어서 혹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므로 3구(句)로써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는 것을 파하는 것이니,
무법유법공 가운데서 도리어 삿된 소견을 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유법도 무법도 제 모양이 공하다.”라고 하시니, 이 때문에
“반야바라밀에는 유전도 없고 환멸도 없다.”라고 하신다.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반야바라밀의 모양이 없으니, 온갖 법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단바라밀도 그와 같으며, 내공 내지는 일체종지의 모양이 공한 것도 역시 그와 같다.
그때 수보리와 대중들은 기뻐하면서 반야바라밀을 찬탄하며 말하기를,
“큰 바라밀[大波羅蜜]입니다.”라고 하나니,
이른바 반야바라밀이다.
큰 바라밀이라 함은 이른바 온갖 법은 비록 자성이 공하다 하더라도 반야바라밀은 보살을 이익되게 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함을 말한다.
비록 얻는다 하더라도 또한 얻을 것이 없으며,
비록 법륜을 굴린다 하더라도 또한 굴리는 것이 없다.
【문】 만일 모든 법이 공하면 반야바라밀도 공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역시 공할 것이므로
‘반야가 바로 마하바라밀’이라고 칭찬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답】 이 가운데서는 ‘온갖 법은 자성이 공하다.’고 한다.
자성이 공한 가운데서는 자성이 공한 것도 역시 없을 것이니, 이 때문에 ‘마하바라밀’이라 한다.
만일 공한 모양도 없다면 따지지 말아야 한다.
마침내 공하기 때문에 아무 걸릴 것도 없지만 모든 착한 법을 능히 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이는 세속의 법이기 때문에 첫째가는 이치[第一義]가 아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비록 법을 설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도(道)를 얻고 번뇌를 깨뜨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굴린다.’고 할지라도,
지금 우리들의 모든 번뇌는 거짓이요 뒤바뀐 것이며 거짓말이므로 일정한 모양이 없다.
만일 일정한 모양이 없다면 무엇을 끊을 것인가?
만일 끊을 것도 없다면 또한 유전도 없고 환멸도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비록 법륜을 굴린다 하더라도 역시 유전도 환멸도 없다.”라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5안(眼)으로는 유전이든 환멸이든 볼 수 있는 법이 없다.
온갖 법은 본래부터 나지 않기 때문이니, 이 자성의 공은 마침내 공한 것이어서 유전하는 모양도 아니고 환멸하는 모양도 아니다.
상견(常見)에 떨어질까 두렵기 때문에 유전하지 않는다 하고,
단멸(斷滅)에 떨어질까 두렵기 때문에 환멸하지도 않는다 하며,
있다[有]는 것에 떨어질까 두렵기 때문에 유전하지 않는다 하고,
없다[無]는 것에 떨어질까 두렵기 때문에 환멸하지도 않는다 하며,
세간에 집착할까 두렵기 때문에 유전하지 않는다 하고,
열반에 집착할까 두렵기 때문에 환멸하지도 않는다 한다.
이와 같이 자성공(自性空)과 필경공(畢竟空)과 18공(空) 등 한량없는 모든 공인 이 공해탈문(空解脫門)은 유전하지도 않고 환멸하지도 않으며, 모양이 없고[無相] 지음이 없는[無作] 것도 역시 그와 같다.
이 세 가지 해탈문에 들어가면 나와 내 것[我所]이라는 마음을 버리나니, 이것을 바로 해탈을 얻는다 한다.
이와 같이 모양을 취하지도 않고 마음에 집착하지도 않으면 반야바라밀을 설하고 가르쳐 주고 비춰 준다는 등이다.
‘설해 준다[說]’는 것은 글을 상고하기도 하고 입으로 전하기도 하는 것이다.
‘가르쳐 준다[敎]’는 것은 사람들을 위하여 반야를 찬탄하면서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바르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비추어 준다[照]’는 것은 마치 사람이 등불을 가지고 물건을 비추어 주는 것처럼,
만일 사람이 반야를 알지 못하면 지혜의 광명으로써 그것을 비추어 주어서 알게 하는 것이다.
‘열어 준다[開]’는 것은,
마치 보배창고의 문이 닫혀 있으면 비록 좋은 물건이 있다 하더라도 얻을 수 없다가 만일 그 문이 열리면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의심해서 반야를 믿지 않으면 삿된 의심의 문을 열고 무명의 문빗장을 꺾어 버려야 이 사람이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보여준다[示]는 것은,
마치 사람이 눈으로 보아서 분명하지 않으면 손가락으로 아름답다 추하다 하면서 가리켜 보이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적고 지혜가 작은 이면,
‘이것이 도이다, 도가 아니다, 이것은 이익이다, 이것은 손실이다.’라고 보여 주는 것과 같다.
‘분별한다[分別]’는 것은,
‘모든 법에 대해 이것은 착한 것이다, 이것은 착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죄이다, 이것은 복이다, 이것은 세간이다, 이것은 열반이다.’라고 가려 주는 것이니,
경서(經書)에서는 간략하게 말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믿기 어려우므로 자세히 분별하고 해설해 주어서 믿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드러낸다[顯現]’는 것은,
부처님이 갖가지 중생들을 위하여 갖가지 법을 말씀하여 주시되 때로는 착한 법을 헐뜯어 착하지 않는 법을 도우면서 중생들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하려는 취지이다.
법을 설하는 이는 부처님의 뜻을 설명하되 중생들에게 알맞게 하여 가볍거나 무거운 모양을 알게 하는 것이다.
‘풀이한다[解釋]’는 것은,
마치 주머니 속에 보물이 있을 적에 주둥이를 묶어 놓았으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위하여 경전의 주머니를 벌려 놓아서 그 이치를 설명해 주는 것이요,
또 마치 무거운 물건을 헤치고 쪼개어 가볍게 하는 것처럼,
갖가지 인연과 비유로써 본말(本末)을 풀이하여 알기 쉽게 하는 것이다.
‘얕고 쉽게 한다[淺易]’는 것은,
마치 깊은 물이면 건너가기 어렵지만 어떤 사람이 이 물을 분산시켜서 얕게 만들면 모두 쉽게 건너는 것처럼,
반야바라밀은 마치 물이 매우 깊은 것과 같으므로 논의(論義)하는 방편의 힘으로써 갖가지로 설명하여 얕고 쉽게 하면 지혜가 작은 사람까지도 모두가 믿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열 가지로 첫머리를 삼아 매우 깊은 이치를 설명하는 것을 바로 청정하게 반야바라밀의 이치를 설명한다고 한다.
첫째가는 이치[第一義] 가운데서는 실로 설명할 것이 없다.
마침내 공하기 때문에 설명할 것이 없으며,
설명할 것이 없기 때문에 받는 것도 없고,
받는 것이 없기 때문에 증득할 것도 없으며,
증득할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소멸한다는 것도 없나니,
만일 소멸될 번뇌가 없으면 복전(福田)도 없다.
‘받는다[受]’는 것은 믿고 받아서 읽고 외운다는 것이다.
이 법을 행하여 사문의 과위[沙門果]와 무생법인을 얻는 것이니, 이것을 ‘증득한다.’고 하며,
증득하는 때에 모든 번뇌가 소멸하고 유여열반(有餘涅槃)을 얻게 되며,
유여열반을 얻기 때문에 이것이 필정의 복전이다.
‘필정(畢定)’이라는 것은 모든 법이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성품과 동일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필정의 복전이 없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