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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람을 만나는 발락(36-41)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만 바라보고 가는 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악한 길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막으셨습니다. 믿음의 눈은 언제나 주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믿음의 눈이 어두워 악한 길로 가지 않도록 날마다 살피는 성도가 되시기랍니다.
36발락은 발람이 온다 함을 듣고 모압 변경의 끝 아르논 가에 있는 성읍까지 가서 그를 영접하고 37발락은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그대를 부르지 아니하였느냐 그대가 어찌 내게 오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어찌 그대를 높여 존귀하게 하지 못하겠느냐 38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내가 오기는 하였으나 무엇을 말할 능력이 있으리이까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니이다 39발람이 발락과 동행하여 기럇후솟에 이르러서는 40발락이 소와 양을 잡아 발람과 그와 함께 한 고관들을 대접하였더라 41아침에 발락이 발람과 함께 하고 그를 인도하여 바알의 산당에 오르매 발람이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니라(36-41)
발람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모압 왕 발락은 선지자 발람을 극진히 영접합니다. 발람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던 사람이니 상당히 먼 거리를 여행했고, 발람을 영접하는 발락 역시 모압 영토 끝에 있는 아르논 가에 있는 성읍까지 가서 그를 영접합니다. 멀리 온 만큼 발람이 자신의 뜻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일을 해주기만 한다면,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여기서 “그대를 높여 존귀하게 하지 못하겠느냐”(37)라는 언급은 분명 발람이 원하는 재물을 원하는 만큼 주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발람은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하도록 허락하시는 것만을 할 수 있다고 다시 한번 확인해줍니다. 발락과 발람은 함께 기럇후에 도착합니다. 이곳이 어딘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곳에서 잔치한 이후 곧장 바알의 산당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산당으로 가는 길목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럇후’이라는 지명 역시 ‘길가에 있는 성읍’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에서 발락은 소와 양을 잡아 발람과 고관들을 대접합니다. ‘대접하다’로 번역한 단어의 원래 의미는 ‘희생 제사를 드리다’라는 의미입니다. 희생 제사를 드린다는 단어가 일반 접대의 의미로 잘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발락이 먼저 희생 제사를 드린 다음에 그것으로 발람과 고관을 접대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본문에서는 희생 제사적 의미가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행했고, 목적지를 향하는 길에 있는 숙소에서 소와 양을 잡아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발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23:1-5)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뜻과 만족을 위해 드리는 예배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예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온전한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1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제단 일곱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하소서 하매 2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준비한 후에 발락과 발람이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라 3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나는 저리로 가리이다 여호와께서 혹시 오셔서 나를 만나시리니 그가 내게 지시하시는 것은 다 당신에게 알리리이다 하고 언덕길로 가니 4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시는지라 발람이 아뢰되 내가 일곱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렸나이다 5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1-5)
여기서부터 24장까지 세 번에 걸쳐 발람이 이스라엘을 보고 축복하는 장면이 반복됩니다. 세 번 반복되는 발람의 신탁은 모두 매우 유사한 패턴으로 반복됩니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발람의 첫 번째 신탁은 23:12까지 전개됩니다. 이튿날 아침 발락은 발람과 함께 바알의 산당으로 올라갑니다. 바알의 산당은 특정한 지명이라기보다는 일반적으로 바알을 섬기는 산당들이 있는 곳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산당들은 여러 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다양한 지명과 산당(바모트)이 합쳐져서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곳의 실제 장소가 어디든지 간에 본문에서 선택된 장소는 이스라엘 백성의 진영이 보이는 곳이어야 합니다. 바알의 산당에 올라가서 발람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의 진영 끝을 봅니다. 본문에서는 “진끝까지”라고 표현했지만, 원문에서는 ‘진’도 ‘끝까지’도 없습니다. 발락과 발람이 산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 백성의 끝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보여주기보다는 일부분만 보이는 곳으로 그를 데려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조금이라도 더 낮게 평가하도록 의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발람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제단 일곱을 쌓고 수송아지 일곱과 숫양 일곱을 준비해서 드립니다. 일곱 제단에 일곱 소와 일곱 숫양에서 일곱은 의도된 것입니다. 일곱 수소와 숫양을 각기 다른 일곱 제단에 드리는 것은 성경적인 전통이 아닙니다. 그가 이방의 신탁 방식을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게다가 그는 스스로 언덕길로 올라가는데 이것 역시 이방의 신탁 방식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벌거벗은 산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이 자신을 찾기 좋은 곳으로 이동했고, 발락은 신탁을 받기 위해 제단 곁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탁을 받으려 하지만 여전히 이방의 방식에 익숙한 발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이방 방식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임하셨습니다. 발람은 즉각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강조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발람에게 신탁의 말씀을 주실 뿐입니다.
발람의 예언(23:6-12)
악한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도 그 원인과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지하고 둔감한 악인은 미련한 일을 반복합니다. 사람의 믿음은 하나님의 언약보다 상황, 감정, 의지에 따라 좌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언약입니다. 우리는 미련한 일을 반복하며 고집을 내려놓지 않는 발락의 길을 경계해야 합니다.
6그가 발락에게로 돌아간즉 발락과 모압의 모든 고관이 번제물 곁에 함께 섰더라 7발람이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쪽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8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 9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10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하매 11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그대를 데려왔거늘 그대가 오히려 축복하였도다 12발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6-12)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언약을 따라 언약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의지 앞에서 발람을 통한 발락의 온갖 세상적인 영토 확장 야욕은 분쇄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들을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고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는 공동체로 설 것입니다.
(1) 바람의 축복(6-10)
드디어 발람이 신탁을 받아서 발락에게 돌아왔습니다. 발락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여전히 번제물 곁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발락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하지만 발람이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했을 때, 발락이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의 예언이 선포되고 말았습니다. 우선 여기서 언급된 예언은 번역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발람의 말을 ‘예언’이라고 했는데, 이 단어는 원문에서 마샬, 즉 격언, 속담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예언을 전했다고 말하기보다는 발람이 지혜의 말을 전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예언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요약하면서 시작합니다. 먼저, 발락이 자신을 멀리서부터 초청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요청했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다음으로 자신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말씀만 전할 수 있음을 다시 확언합니다. 마지막으로 발람이 바위 위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려다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예언의 말씀을 전합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에 대해 선포한 말씀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은 결코 여럿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고 홀로 살게 될 것입니다. 홀로 산다는 말은 비교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은 사람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숫자가 될 것입니다. 발락은 이스라엘의 전체 숫자를 보지 못하게 한쪽 진영만을 보여주었으나, 발람은 전체 이스라엘이 티끌과도 같이무수하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이를 위해 본문은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누가 능히 셀고"라고 표현되었습니다. 시적인 표현이기에 야곱의 티끌과 이스라엘의 사분의 일이 대칭을 이룹니다. 이 때문에 “사분의 일”을 이스라엘의 한쪽 진영을 뜻한다고 이해하기보다는 무수한 숫자를 뜻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BHS도 이를 제안합니다. 심지어 발람은 자신이 이스라엘처럼 되었으면 좋겠노라고 부러운 마음을 표현하기까지 합니다(10).
(2) 발락의 불평(11-12)
저주의 말을 기대했던 모압 왕 발락은 당황스러울 뿐입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막대한 시간과 재물을 들여서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유명한 선지자를데려왔는데, 정작 그가 와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축복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발락은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라고 반문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발람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본문이 지속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과 같이 발람은 오직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입에 담아주시는 말씀만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들여 자신의 뜻대로 신탁을 받아 내려고 했던 발락의 영적 오만함이 엿보입니다. 현대인들 역시 돈이 우상이되어 돈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아내고, 하나님을 조작 가능한 신으로 격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사람의 노력과 상관없이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이 함부로 저주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복과 은총을 크게 입은 이스라엘은 이방 세계로부터 구원을 받은 특별한 민족이었습니다. 발락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이 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목격하고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발락은 이스라엘이 저주받기를 고대하여 발람을 영접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온전히 축복하도록 발람의 말과 혀를 주장하십니다. 오늘도 세상이 우리를 함부로 저주할 수 없도록 우리 인생을 축복하시고 보호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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