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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권
1)
여기서 ‘낙차’(lakṣa)란 원래 10의 5승, 즉 10만을 의미하나 이하 ‘억’이라는 수와 교차되어 쓰이고 있다. 본론 제32권 주31) 참조.
2)
『구사론』 제11권(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503)에서는 ‘100구지(俱胝,koṭi)의 4대주(大洲)의 세계’를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즉 일체의 기세간으로 언급하고 있다. ‘구지’는 10의 7승, 낙차의 100배로서 100억.(본론 제32권 주31 참조)
3)
유정들이 사는 기세간(器世間)은 각각 20중겁의 괴겁(壞劫)과 공겁(空劫)을 거친 다음 온갖 유정들의 공업(共業)에 의해 다시 이루어진다. 이러한 기세간의 괴멸과 생성, 그리고 화(火)ㆍ수(水)ㆍ풍재(風災)의 세 가지 재앙에 대해서는 본론 제32권 ‘성ㆍ주ㆍ괴ㆍ공의 4겁’과 ‘대삼재(大三災)’에서 상론한다.
4)
대낙건나(mahā-nagna,구역에서는 大諾那力人)는 큰 힘을 가진 인취(人趣) 중의 한 신.
5)
유선나(yojana,구역에서는 由旬)는 거리의 단위. 이에 관해서는 다양한 이설이 있으나 보통은 유행자(혹은 제왕)가 하루에 가는 거리 정도로서, 마을에서 유행자들이 머무는 숲까지의 거리인 1구로사(俱盧舍)의 8배. ‘길이(色)의 단위’에 대해서는 본론 제32권을 참조할 것.
6)
물은 응당 사방으로 퍼져 흩어지는데, 수륜은 어찌하여 옆으로 흘러 흩어지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답.
7)
숙장(pakvaśaya)이란 소화기의 상부인 生藏(amāśaya)의 반대로서, 하복부 즉 장(腸)을 말한다.
8)
이상의 풍륜ㆍ금륜ㆍ수륜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9)
9산(山)의 원어와 본론 장행에서 서로 교차되면서 쓰이고 있는 음역 혹은 의역어는 다음과 같다. ① 소미로(蘇迷盧, Sumeru, 妙高山). ② 유건달라(踰健達羅, Yugaṁdhara, 持雙山). ③ 이사타라(伊沙馱羅, ĪṢādhara, 持軸山). ④ 걸지낙가(朅地洛迦, Khadiraka, 檐木山). ⑤ 소달려사나(蘇達黎舍那, Sudarśana, 善見山). ⑥ 알습박갈나(頞濕縛羯拏, Aśvakarna, 馬耳山). ⑦ 비나달가(毘那怛迦, Vinataka, 象耳 또는 有障礙山). ⑧ 니민달라(尼民達羅, Nimindhara, 持山 또는 魚名山). ⑨ 철륜위(鐵輪圍, Cakravāḍa).
10)
묘고산 즉 소미로(蘇迷盧,혹은 須彌山Sumeru)은 산 중에 가장 큰 것이기 때문에 산 중의 왕 즉 산왕이다.
11)
따라서 묘고산왕은 밑의 금륜으로부터 위의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총 16만 유선나가 된다.
12)
두 번째 내산인 지축산이 물위로 나와 있는 부분은 2만유선나이고, 첨목산은 1만, 선견산은 5천, 마이산은 2천 5백, 상이산은 천 2백 5십, 그리고 지산은 6백 25유선나이다.
13)
즉 묘고산의 너비 8만에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첫 번째 바다의 양쪽 너비 각 8만이 더해진 것으로, 이는 바로 첫 번째 바다와 접하고 있는 지쌍산의 안쪽 길이에 해당한다.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4)
둘레는 너비의 네 배로서, 이를테면 제1해의 경우 묘고산과 접한 안쪽은 8만×4 유선나이며, 지쌍산과 접한 바깥쪽은 (8만+8만+8만)×4유선나이다. 제2해의 경우 지쌍산과 접한 안쪽은 (24만+4만+4만)×4 유선나(여기서 4는 지쌍산의 너비)이며, 지축산과 접한 바깥쪽은 (32만+4만+4만)×4 유선나(여기서 4는 제2해의 너비)이다. 제3해의 경우 지축산과 접한 안쪽은 (40만+2만+2만)×4 유선나이며, 첨목산과 접한 바깥쪽은 (42만+2만+2만)×4 유선나로서, 계속하여 산과 바다의 너비가 반감된다.
15)
제8해를 둘러싸고 있는 안쪽의 니민다라산은 정방형이고, 바깥쪽의 철륜위산은 원형이기 때문에 가장 길고 가장 짧은 곳의 폭의 양이 일정하지 않다. 『현종론』(제16권)의 경우 본송에서는 3억 2만 2백여(餘) 유선나로 기술하고 있으나 장행의 해석에서는 아예 3억 2만 3천 2백 87유선나 반으로 논의하였다.
16)
금강유정(vajropama-samadhi)은 금강에 비유되는 선정으로, 보살은 여기서 34찰나[念]에 걸쳐 견도의 번뇌와 무색계 유정지(有頂地) 제9품(하하품)의 번뇌를 끊고 불과(佛果)를 획득한다.
17)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어 보면 다음과 같다.
18)
본송에서, 서구타니주는 ‘둥글어 이지러짐이 없다[圓無缺]’, 북구로주는 ‘주사위 형태로 4면이 동등하다’고 하였는데, 동일한 의미의 반복이므로 앞의 두 주의 경우처럼 다만 비유로서 ‘만월과 같다’ ‘네모난 자리와 같다’고 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뜻. 실제 『현종론』(제16권)에서는 ‘其相圓無缺’을 ‘其相如滿月’로, ‘北俱盧畟方’을 ‘北洲如方座’로 개작하였다. 그러나 『구사론』(앞의 책,p.512)에 의하면 “여기서 ‘동등하다’고 말한 것은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일이 없음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였다.”
19)
이 네 강은 각기 동ㆍ남ㆍ북ㆍ서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구역에서는 긍하(恆河)ㆍ신두(辛頭)ㆍ사다(私多)ㆍ박수(薄搜)로 번역하고 있다.
20)
원문은 ‘有情其中……’이나 다른 판본과 『현종론』(제16권)에 따라 ‘有說於中……’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21)
이는 『구사론』(앞의 책,p.514)의 정설이다. “여기에서는 괴로움을 받는 것이 쉴 사이[間]가 없으니, 항상 괴로움을 받는 것은 아닌 다른 일곱 곳의 대나락가와 같지 않기 때문에 ‘무간’이라 이름한 것이다.”
22)
여기서 증(增,utsada,구역에서는 ‘園’)이라 함은, 본래의 날락가에서 받는 괴로움 이외 별도의 괴로움을 더 받는 곳을 말한다. 혹은 괴로움을 주는 도구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혹은 본래의 지옥에서 이미 그에 상응하는 괴로움을 받았으면서 다시 거듭하여 이 같은 괴로움을 당하기 때문에 ‘증’이라고 이름하였다.(후술) 말하자면 그곳은 해당 지옥에 딸린 정원과도 같은 곳으로, 각 날락가의 4면에는 각기 네 종류의 ‘증’이 딸려 있다. 그럴 경우 모두 128증이 있다고 해야 하겠지만 이것들은 모두 각기 다른 이름을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 지옥의 그것만을 일컬어 16증이라 하였다.
23)
『잡아함경』 제47권 제1244경(대정장2,p.341상); 『증일아함경』 제36권(동p.747하) 참조.
24)
낭구타(혹은 攘鳩多,nyatkuṭa). 날카로운 입을 가진 벌레로서, 침구충(針口蟲)이라고도 함.
25)
알부타(頞部陀, Arbuda, 皰로 번역됨)는 몸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혹독하게 추운 지옥. 니랄부타(尼刺部陀, Nirarbuda, 皰裂로 번역됨)는 물집이 터질 정도로 추운 지옥. 알찰타(頞哳陀, Aṭaṭa, 구역은 阿吒吒)ㆍ확확바(臛臛婆, Hahava, 구역은 阿波波)ㆍ호호바(呼呼婆, Huhuva, 구역은 漚睺睺)의 세 지옥은 추위의 고통을 참기 어려울 때 내는 소리에서 유래한 명칭임. 올발라(嗢鉢羅,Utpala, 靑蓮華로 번역됨)는 혹독한 추위로 인해 몸이 퍼렇게 어혈지고 살이 얼어 터져 마치 푸른 연꽃과 같이 되는 지옥. 발특마(鉢特摩, Padma, 紅蓮華로 번역됨)는 살이 벌겋게 된 채 부르터 마치 붉은 연꽃과 같이 되는 지옥. 마하발특마(摩訶鉢特摩, Mahāpadma, 大紅蓮華로 번역됨)는 추위로 살이 터지는 것이 대홍련화처럼 되는 지옥.
26)
즉 알부타와 니랄부타는 추위에 의한 몸의 상태에 따른 명칭이고, 알찰타ㆍ확확바ㆍ호호바는 추위에 떠는 소리에 근거한 명칭이며, 올발라ㆍ발특마ㆍ마하발특마는 부스럼에 근거한 명칭이다.(후술) 참고로 『구사론』(앞의 책, p.520)에서는 몸과 소리의 상태에 따른 명칭으로만 분별하고 있다.
27)
이는 8열지옥과 8한지옥이 남섬부주 아래 존재한다면 이 주(洲)의 너비는 얼마 되지 않는데, 어떻게 그 아래 모든 지옥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명이다.
28)
고(孤,prādeśika)지옥(『바사』에서는 獨지옥). 16대지옥은 남섬부주 아래에만 있고 다른 3주에는 없는데, 그것은 오로지 이 주의 사람들만이 선업과 악업을 맹리(猛利)하게 짓기 때문에다. 그러나 고지옥은 4대주에 어디에도 존재한다.(『대비바사론』 제172권, 한글대장경124,p.504)
29)
무간 등의 지옥은 그 고통이 너무나 극심하기 때문에 굳이 옥졸이 지킬 필요가 없다.
30)
염마왕(Yamarāja,즉 염라대왕)은 원래 『리그 베다』에서 사자(死者)가 가는 저승의 주(主)였지만 점차 그 지위가 변하여 본론에 이르러서는 아귀세계의 주가 되었다. 아귀에 대해서는 후술함.
31)
지옥의 옥졸은 유정인가, 무정물(괴로움을 낳게 하는 도구)인가? 유정이라면 그는 어떻게 지옥의 옥졸로 태어나게 되었으며, 불은 어떤 까닭에서 그를 태우지는 않는 것이며, 그들이 지옥에서 지은 악업의 이숙과는 어디서 받을 것인가? 또한 무정물이라면 어떻게 저절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설이 있다. 소승 제파 중 대중부와 정량부는 지옥의 옥졸을 유정이라 설하지만, 유부에서는 다만 악업에 의해 초래된 증상의 대종일 뿐이라고 하였다.(『유식이십론술기』상, 대정장43,p.986상) 그리고 그것은 마치 성겁(成劫) 시의 바람처럼 유정의 업력에 의해 움직인다. 즉 염마왕에 의해 유정을 지옥에 던지는 나찰사(邏刹娑, rākṣasa, 염마의 옥졸)는 유정이지만, 지옥 중에서 실제 유정을 해코지하는 것은 무정물이다. 자세한 내용은 『구사론』 제11권(앞의 책,p.518~519)을 참조할 것.
32)
예컨대 흑승지옥에서 팔다리가 잘리면 바로 다시 생겨나지만, 그 이유는 헤아릴 수 없다.
33)
『구사론』(앞의 책,p.523)에서는 1구로사. 구로사(krośa)는 길이의 단위로서 5백길. 또는 8분의 1유선나. 본론 제32권에서 상론한다.
34)
이를테면 눈이 빛을 통해 색을 보는 것은 이익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색을 보지 못하는 것은 손해이며, 몸은 따뜻함으로 인해 이익되지만 뜨거움으로 인해 손해된다.
35)
이때 남섬부주는 일출(日出)이자 월몰(月沒)이고, 북구로주는 일몰이자 월출임.
36)
인도에서는 1년을 더운 계절[熱際, grīṣma]ㆍ비 오는 계절[雨際, varṣa]ㆍ추운 계절[寒際, hemanta 혹은 śiśira]로 나누고, 각 계절을 다시 네 달로 나누어 12달로 산정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는 국토가 넓고 기후상의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세 계절에 12달을 배치하는 방법에는 이설이 많은데, 『구사론기』에서 진제(眞諦)가 전하였다고 일컬어지는 설과 『서역기』(제2권)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안의 오른쪽의 명칭은 『대비바사론』(제136권, 한글대장경123,p.235~236)의 역어임.
37)
납박(臘縛,lava)은 시간의 단위로서, 1모호율다(牟呼栗多)의 30분의 1. 30모호율다가 하루 낮밤임. 즉 오늘의 시간으로 1.6분 정도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2권 ‘시간의 단위’를 참조 바람.
38)
구역에서는 『분별세경(分別世經)』으로 전한다. 『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 제10권(대정장1,p.416중) 참조.
39)
『구사론』(제11권)에 의하면 이는 선구사(先舊師)의 설이다. 이에 대해 보광은 경부 중의 선구사, 칭우는 유가사(瑜伽師)라고 하였다. 즉 그들은 달이 일그러져 보이는 것은 태양에 접근함으로써 빛을 받게 되고 그 반대편에 그림자가 져 그것이 둥근 형태를 가려 일그러져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해와 달이 운행하는 길의 높낮음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으로, 해가 달보다 높게 있을 때 둥글게 보이고, 낮게 있을 때 일그러져 보인다고 하였다.
40)
사대천왕에게 소속된[所部] 천중이란 다문천(多聞天)ㆍ지국천(持國天)ㆍ증장천(增長天)ㆍ광목천(廣目天) 등의 천중을 말함.
41)
여기서 공중에 사는 천[空居天]이란 욕계의 야마ㆍ도솔ㆍ낙변화ㆍ타화자재 등의 4천과 색계 16천을 말하며, 땅에 사는 천[地居天]이란 욕계 6천 가운데의 사대천왕과 삼십삼천을 말한다.(후설)
42)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43)
견수 등의 3천은 모두 약차신(藥叉神,yakāa)으로서 사대천왕의 권속들이다. 그리고 사대천왕과 그 권속인 이상의 온갖 천들을 합하여 ‘사대왕중천(四大王衆天)’이라고 한다.
44)
후술하듯이 삼십삼천(trāyastriṃśā devāḥ, 혹은 忉利天)은 수미산 정상에 위치하는 천으로, 중앙에 제석천이 있고, 정상 사방에 각기 8천이 있어 도합 33천이 된 것이다.
45)
『구사론』 제116권(앞의 책,p.528)에서는 반대로 이 유여사(有餘師)의 설을 정설로, 앞의 논설을 유여사의 설로 전하고 있다.
46)
이는, 역풍에서도 향기가 50유선나에 미친다고 한다면, “꽃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흩날릴 수 없고, 뿌리와 줄기 등의 향도 역시 그러하지만, 선사(善士)의 공덕의 향은 참으로 향기로워 역풍에서도 그 아름다움을 온갖 곳으로 두루 풍기네.”(『잡아함경』 제38권 제1073경, 대정장2,p.278하, ‘非根莖華香 能逆風而熏 唯有善士女 持戒淸淨香)라는 가타(伽他)에 어긋나게 된다는 힐난에 대한 변명이다. 자세한 내용은 『구사론』 제11권(앞의 책,p.530~531)을 참조할 것.
47)
즉 물리적인 향기는 역풍을 거슬러 퍼져나갈 수 없지만, 원생수의 향기는 제천(諸天)의 복업에 의한 과보이기 때문에 역풍에도 50유선나를 거슬러 퍼져나갈 수 있다는 뜻.
48)
『대비바사론』 제133권(한글대장경123,p.186)에 의하면, 반월(半月)의 8일과 14일과 15일.
49)
묘고산의 네 층급과 꼭대기에 사는 사대왕중천과 삼십삼천(이는 地居天임)을 제외한 욕계의 야마ㆍ도사다ㆍ낙변화ㆍ타화자재천과 색계 16천은 허공에 의지하는 궁전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공거천(空居天)이다. 색계 16천에 대해서는 본론 제21권 ‘색계’에서 상론하였다.
50)
즉 앞서 언급한 여러 다른 형태의 섹스는 『시설론』에서 설한 내용으로, 이는 다만 그것이 성취되는 시간을 나타내는 것일 뿐 욕계 6천은 인간과 다름없이 신체상으로 교합하여 음애를 성취한다는 뜻. 『구사론』(제11권,p.533)에 의하면, 이는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정설로서, 여기서 『시설론』은 『세시설론(世施設論)』. 보다 자세한 내용은 『대비바사론』 제113권(한글대장경122,p.292~293)을 참조할 것.
51)
원문은 ‘貪心轉重(탐심이 일어나는 것이 무거우며)’이나 『구사론』(제11권, 앞의 책,p.533)에 따라 ‘중(重)’을 ‘첩(捷)’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52)
앞서 지옥ㆍ아귀ㆍ방생도 겁초에는 성언과 동일한 말을 사용하였지만, 그 후 처소에 따라 여러 가지 말로 어긋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53)
욕생이란 묘욕(妙欲)의 경계를 수용하는데 자재한 욕계 인(人) 천(天)을 말하며, 낙생이란 즐거움의 이숙(異熟)만 존재할 뿐 괴로움의 이숙이 없는 색계의 아래 세 정려천을 말한다.
54)
여기서 ‘생겨난 것’이란 숙업력에 의해 태어나면서부터 생겨난 욕계의 경계, 즉 과거업의 이숙과인 현재의 욕계의 경계를 말한다.
55)
즉 첫 번째는 초정려천인 범중ㆍ범보ㆍ대범천의 이생(離生) 희락이고, 두 번째는 제2정려천인 소광ㆍ무량광ㆍ극광정천의 정생(定生) 희락이며, 세 번째는 제3정려천인 소정ㆍ무량정ㆍ변정천의 이희(離喜) 묘락이다.
56)
제2정려 이하는 화재(火災), 제3정려 이하는 수재(水災), 제4정려 이하는 풍재(風災)가 미치는데, 그것은 각 정려의 내적 재앙인 심(尋)ㆍ사(伺), 희수(喜受), 동식(動息)과 동등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2권 ‘대삼재’를 참조할 것.
57)
초정려의 3천은 신체는 서로 다르지만(대범천의 신체와 범중천의 신체는 大小勝劣의 차이가 있음) 생각이 동일하며(양자 모두 범중은 대범천의 화생으로 생각함), 제2정려의 3천은 신체는 동일하지만 생각이 서로 다르며, 제3정려의 3천은 신체와 생각이 동일하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22권 ‘7식주’를 참조할 것.
58)
욕계 제1천인 사대왕중천에서 대해까지의 거리는 4만 유선나이고, 그것으로부터 삼십삼천까지의 거리 역시 4만 유선나이기 때문에, 삼십삼천에서 대해까지의 거리는 8만 유선나이고, 그것으로부터 야마천까지의 거리 역시 8만 유선나이다. 또한 야마천에서 대해까지는 16만 유선나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도사다천까지의 거리 역시 16만 유선나이다. 그렇다고 할 때 색계 제16천인 선견천에서 대해와 색구경천까지의 거리는 각기 8백 3십 8억 8천 6백 8만 유선나이며, 색구경천에서 대해까지의 거리는 1677억 7천 2백 16만 유선나이다. 그리고 이 위로는 더 이상 [유색의 천중이] 머무는 곳이 없으며, 이곳이 가장 높은 곳이기 때문에 ‘색구경(色究竟Akaniṣṭha)’이라 이름한 것이다.
59)
장애[礙]란 색의 공간적 점유성을 말하는 것으로, 색계 최고천인 색구경천은 그러한 장애성을 다하였기[究竟] 때문에, 또한 어떠한 장애도 갖지 않아야만 그곳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애구경천(礙究竟天,Aghaniṣṭha)’이라고도 한다.(『구사론』,앞의 책,p.536 참조)
60)
하천(下天)의 상승에는 세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스스로 신통력을 얻어 가는 것이며, 둘째는 신통력을 얻은 이에 인도되어 가는 것이며, 셋째는 상천(上天)에 인도되어 가는 것이다.
65)
주(肘)란 팔목의 길이 정도인 1척(尺) 6촌(寸, 오늘날의 길이로서 48.48cm정도). 따라서 3주 반은 5.6척이며, 170cm정도임. 길이의 단위에 대해서는 본론 제32권에서 상론함.
66)
구로사(俱盧舍, krośa)는 8분의 1유선나로서, 8자 혹은 10자인 1궁(弓)의 5백 배. 또는 마을에서 유행자들이 머무는 숲까지의 거리. 혹은 일설에 의하면 소가 우는 소리나 북소리가 들리는 최대한의 거리로, 5리 정도.
67)
색계 제2정려의 소광천부터 두 배씩 증가하여, 무량광천은 4, 극광정천은 8, 소정천은 16, 무량정천은 32, 변정천은 64, 이렇게 증가하여 무운천의 신장은 128유선나가 되지만, 실제로는 여기서 3을 뺀 125유선나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은데, 혹자는 무운천은 변이지(變異地)인 제3정려를 떠나 부동지(不動地)에 생겨난 첫 상태로서, 그 수업(修業)의 노고 때문에 3유선나가 감소되었다고 하며, 혹은 색구경천의 신장을 1만 6천 유선나로 맞추기 위해 무운천에 3유선나를 감소시켰다고 하며(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계산이 복잡해져 색구경천의 신장은 16,384유선나가 됨), 혹은 법이(法爾) 즉 본래 그러한 것이라고 하였다.
68)
겁초(劫初, 한 세계가 시작하는 성겁 시) 이후에는 증감이 있어 어떤 경우 많아지기도 하고, 어떤 경우 적어지기도 하는데, 최소 10세로부터 8만 세에 이르기까지 18번의 증감이 있다.(본론 제32권 ‘住劫’참조)
69)
30일이 한 달이고, 12달이 일 년이므로 그들의 일 년은 인간세계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1만 8천 년이 되고, 그들의 수명은 9백만 년이 된다.
70)
이를 인간세계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삼십삼천은 3천6백만 년, 야마천은 1억4천4백만 년, 도사다천은 5억7천6백만 년, 낙변화천은 11억 5천 2백만 년, 타화자재천은 92억 1천 6백만 년이 된다.
71)
예컨대 청련화(拘物陀,kumuda)와 홍련화(鉢特摩,padma)는 각기 밤에 피고 낮에 핀다.(『구사론』,앞의 책,P.543)
72)
겁(劫,kalpa)에는 성(成)ㆍ주(住)ㆍ괴(壞)ㆍ공(空)의 4겁이 있다. 세계가 일단 성립하게 되면 그 최초(즉 住의 劫初)의 유정의 수명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나 점차 감소하여 8만 세에 이르게 되는데, 이 사이를 1중겁이라고 한다. 그리고 8만 세에서 10세에 이르는 증감을 19번 거친 다음 괴겁으로 들어간다. 즉 주겁은 20중겁이며, 성(成)ㆍ괴ㆍ공의 세 겁도 역시 그러한데, 이러한 4겁(총 80중겁)을 합하여 1대겁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2권에서 상론한다.
73)
범보천과 대범천의 신장이 1유선나와 1유선나의 반이기 때문에 그들의 수명은 1겁과 1겁 반이다. 그런데 욕계천이나 범세 즉 색계 제1정려천은 괴겁시 극광정천에 태어나기 때문에 공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이 수명이 1겁과 1.5겁이라고 할 때, 그것은 대겁의 반인 40겁을 겁의 단위로 삼았다는 뜻이다.
74)
참고로 사대왕중천의 하루 밤낮은 인간세계의 50년에 해당한다. 그리고 흑승ㆍ중합ㆍ호규ㆍ대규지옥은 각기 삼십삼천ㆍ야마천ㆍ도사다천ㆍ낙변화천의 수명인 1천ㆍ2천ㆍ4천ㆍ8천 년을 하루 밤낮으로 삼으며, 그러한 하루로 계산된 1천ㆍ2천ㆍ4천ㆍ8천 년의 수명을 갖는다.
75)
8대용왕(nāga-rāja)이란 불법을 옹호하는 선신(善神)으로서, 난타(難陀,Nanda)ㆍ발난타(跋難陀,Upananda)ㆍ사가라(娑伽羅,Sāgara)ㆍ화수길(和修吉,Vāsuki)ㆍ덕차가(德叉迦,Takṣaka)ㆍ아나바달다(阿那婆達多,Anvataptā)ㆍ마나사(摩那斯,Manasvīn)ㆍ우발라(優盋羅,Utpalaka)이다. 이는 보광(普光)이 『법화경』에 나온 것을 인용한 것이고, 칭우(稱友)는 이와는 약간 다르게 전한다. NandaㆍUpanandaㆍAśvataraㆍMucilindaㆍManasvinㆍDhṛta-rāṣṭraㆍMahākālaㆍElapattra.
76)
『잡아함경』 제48권, 제1278경(대정장2,p.351하). 가려(佉黎,khāri)와 마바하(麻婆訶,tila vaha)는 모두 용량의 단위로서, 위의 경에 따르면, 코살라국의 4두(斗)가 1아라(阿羅)이며, 4아라가 1독롱나(獨籠那)이며, 16독롱나가 1사마나(闍摩那)이며, 16사마나가 1마니(摩尼)이며, 20마니가 1가리(佉梨)이며, 20가리가 1창(蒼)이다. 따라서 용어상으로만 볼 때 마바하는 ‘창’으로, 1가려가 5만1천9백 20두이기 때문에, 그것은 백 3만 8천4백 두가 된다.
77)
아울러 무상ㆍ멸진정이나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선정에 든 자도 중간에 요절하지 않는데, 이는 본론 제13권(‘목숨은 상속신에 따라 머무는 것인가, 일단 생기하면 머무는 것인가?’)에서 자기 자신과 다른 이 모두가 해코지할 수 없는 경우의 구체적인 예로서 언급되고 있다.
제32권
1)
『구사론』 제12권(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549). 즉 미래법이 생겨나 아직 과거로 낙사하지 않는 현재 순간을 일 찰나라고 하였다. 혹은 같은 논에서는, 운동하고 있는 어떤 법이 한 극미에서 다른 한 극미로 변천하는 순간[行度頃], 다시 말해 생성과 소멸 사이의 순간을 일 찰나라고 하였다.
2)
즉 유부의 이론상 법 자체는 3세에 걸쳐 실유이므로 ‘중연에 의해 어떤 법이 생겨난다’고는 말할 수 있어도 ‘그 자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3)
제법은 3세에 걸쳐 실재하지만, 아직 작용하지 않은 것과 이미 작용한 것을 미래와 과거의 법이라 하며, 지금 작용하고 있는 상태를 현재의 법이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본론 제52권에서 상론한다.
4)
본론 제50~52권에 걸쳐 제법의 3세실유와 이와 관련된 온갖 문제에 대해 해명한다.
5)
법이 생멸하는 찰나는 세간에서 바로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기에 ‘찰나의 양은 얼마인가?’라고 물었던 것임에도, 경주 세친은 ‘어떤 법이 중연에 의해 그 자체의 존재를 획득하는 순간’이라고 말하였으므로 이는 실질적으로 답이 될 수 없다는 뜻.
6)
『대비바사론』 제136권(대정장27,p.701중하; 한글대장경123,p.134~135참조). 이에 따르면, 활을 잘 쏘는 네 사람이 서로 등지고서 활을 쏠 때 그 모두를 낚아채는 이는 대단히 빠르지만, 땅에 사는 야차는 이보다 빠르고, 공중에 사는 야차는 땅의 야차보다 빠르며, 4대왕중천은 이보다 빠르며, 해와 달, 나아가 그것을 인도하는 견행천자(堅行天子)는 해와 달보다 빠르다. 그러나 수행(壽行,목숨)의 상속은 이보다 더 빨라 어떠한 유정도 이를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찰나의 양에 대해 설하지 않은 것이다.
7)
『대비바사론』 제136권(앞의 책)에 의하면 64찰나. 유부에 의하는 일 찰나란 ‘어떤 하나의 존재[一法]가 지닌 온갖 상(相)의 작용(생ㆍ주ㆍ이ㆍ멸)이 모두 이루어 질 때’를 말하며(본론 제13권 ‘경설을 통한 경주의 유위상 무별체설에 대한 비판’ 참조), 따라서 ‘어떤 장부가 손가락을 빠르게 한번 튕길 때 65극미로 이루어진 손가락 한 면의 작용이 모두 생성 내지 소멸한 것이므로 65찰나가 소요되는 것이다.(여기서 65라는 수는 定數가 아니다. 『대지도론』에서는 60찰나, 『인왕경』에서는 일념 90찰나라고 하였다) 이에 반해 앞에서 경주 세친은, 경량부설에 근거하여 유위4상이 모두 성취되는 시간을 일 찰나라고 한다면 4상은 상잡(相雜)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찰나란 유전 상속하는 어떤 법이 중연에 의해 존재하여 아직 과거로 소멸하지 않는 상태의 시간임을 주장하였다. 『대비바사론』에서는 이 밖에도 두 명의 장부가 카시 산(産) 비단의 올을 잡아당겨 끊어지는 순간, 혹은 백 번이나 단련된 중국(支那)산 칼로 비단의 올을 끊는 순간 64찰나가 소요된다는 설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후술하는 ‘시간의 단위’에 의할 것 같으면, 일 찰나는 0.01333초 정도이다.
8)
아란야(araṅya)처란 수행자들이 머무는 적정처(寂靜處)인 숲(vana,원림)을 말하는 것으로, 마을(grama)로부터 그곳까지의 거리를 산정하기 위해 비나야(vinaya,율장)에서 다만 비유로서 길이의 단위에 대해 설하고 있다는 뜻.(후술)
9)
7극미(paramāṅu)가 1미(aṅu). 7미가 1금진(loha-rajas). 7금진이 1수(ab-rajas). 7수진이 1토모진(śaśa-rajas). 7토모진이 1양모진(avi-rajas). 7양모진이 1우모진(go-rajas). 7우모진이 1극유진(chidra-rajas). 7극유진이 1기(likṣā). 7기가 1슬(yūka). 7슬이 1광맥(yava). 7광맥이 1지절(aṅguli-parvan). 3지절이 1지(aṅgula). 참고로 극유진을 구역에서는 극광중진(隙光中塵)이라 하는데, 문틈으로 비친 광선에 흩날리는 먼지만한 크기를 말한다.
10)
심(尋,vyāma)이란 여덟 자 혹은 열 자의 한 길을 의미하는 단위로서, 부처님의 32상 의 15번째인 ‘몸에서는 항상 광명이 한 길이나 솟고 있다’(常光一尋vyāma-prabha)에서의 ‘한 길(尋)’이다.
11)
24지는 1주(肘,hasta). 4주는 1궁(弓,dhanus). 5백 궁은 1구로사(俱盧舍,krośa). 8구로사는 1유선나(yojana).
12)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8권 ‘근과 경의 접촉ㆍ불접촉의 문제’에서 무방분(無方分)의 극미와 유방분(有方分)의 극미라는 명칭으로 논설하였다.
13)
본론 제10권 주4) 참조.
14)
이를테면 『잡아함경』 제2권 제55경(대정장1,p.96중하), “若所有諸色, 若過去, 若未來, 若現在, 若內, 若外, 若麤, 若細, 若好, 若醜, 若遠, 若近, 彼一切總說色陰”
15)
즉 유여사는 경에서 ‘혹은 거칠거나 혹은 미세하거나……’에서 거친 것은 불선과 무기의 색(즉 무표색)을, 미세한 것은 선의 색을, 혹은 거친 것은 욕계나 유루의 색을, 미세한 것은 색계나 무루의 색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였지만, 경에서는 ‘저열한 것(前註의 好)’과 ‘수승한 것(前註의 醜)’이라는 말로 그 같은 불선 등의 3성을 포섭하였기 때문에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는 뜻.
16)
이미 관념[覺慧]에 의해 가설적인 것으로 판단된 극소의 극미는, 이미 최극소의 시간으로 설정된 찰나처럼 더 이상 분할 불가능한 관념적 소산[覺慧所知]이기 때문에 또 다른 관념으로 분석될 수 없다. “유대색(有對色)을 최후까지 세분하여 더 이상 쪼갤 수가 없는 것을 일컬어 극미(極微)라고 한다. 말하자면 이러한 극미는 더 이상 또 다른 색이라는 관념[覺慧,buddhi]으로써 분석되어 다수가 될 수 없는 것으로, 이를 설하여 색의 극소(極小)라고 한다. 즉 더 이상 부분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극소’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는 마치 시간의 극소로 일컬어지는 일 찰나를 더 이상 반(1/2) 찰나로 나눌 수 없는 것과 같다.”(본론 제10권 ‘색법의 구생관계’)
17)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본론 제31권(‘밤과 낮의 길이의 변화’)을 참조 바람.
18)
보통의 한 달은 30일이지만(이를 大月이라 함), 일 년 중의 6개월은 하루 밤[낮]을 뺀 29일(이를 小月이라고 함)로 한 달을 삼고, 5년에 한 번 윤달을 설정하여 계절과 년시를 조절한다는 뜻. 이유는 뒤에 설하지만 자세하지 않다. 『구사론기』에 의하면, 이에 대해 상세히 설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이러한 역수(曆數)에 탐닉하여 사명(邪命)에 떨어지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19)
일 년에는 세 계절이 있고 그것은 각기 4개월간이므로, 한 달 반이 지난 다음의 반달에 하루 밤을 감한다는 것은 곧 2개월에 하루를 감한다는 것으로, 따라서 한철에 2일을 감하여 일 년이면 여섯 달을 적은 달로 한다는 뜻.
20)
괴겁(壞劫,saṃvarta-kalpa)이란 세계가 허물어지는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먼저 유정세간이 허물어지고 난 다음 기세간이 허물어진다. 그리고 유정세간의 괴멸은 먼저 하계(下界) 하처(下處)로부터 시작하여 상계 상처에 이르기 때문에, 최하처인 지옥의 유정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 때를 괴겁의 시작이라고 한 것이다.(후술)
21)
이 때는 바로 주겁(住劫)의 제20중겁으로, 후술함.
22)
즉 세간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삼천대천세계가 있기 때문에 이 세계의 지옥이 파괴될 경우, 더 이상 허물어지는 지옥에는 태어나지 않고 아직 파괴되지 않은 다른 세계의 지옥에 태어난다는 뜻.
23)
유정세간 중에서 지옥이 먼저 괴멸하고 아귀ㆍ방생 또한 인간에 앞서 괴멸한다고 할 경우, 인간과 함께 사는 벌레나 소도 역시 그렇다고 해야 한다. 이는 곧,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소(牛)없이 어떻게 경작하고 우유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하는 난문에 대한 해명이다. 즉 인간과는 떨어져 자신만의 본처를 갖는 방생이 먼저 괴멸하고, 인간과 함께 사는 것(혹은 인간에게 이익되는 것)은 인간과 함께 괴멸한다는 뜻으로, 『구사론』(제12권, 앞의 책,p.555)에서의 정설이다.
24)
여기서 ‘이 때’는 괴겁의 20중겁 가운데 앞의 19겁 동안 일체의 유정이 허물어지고 난 때를 말한다.
25)
유정세간과 기세간의 성립은 괴멸할 때의 역순으로 이루어진다. 즉 유정이 먼저 괴멸하고 나서 기세간이 괴멸하였으므로 성립은 기세간이 먼저 성립한 후 유정세간이 성립하며, 기세간 중에서도 가장 나중에 멸한 제1정려의 범궁에서 시작하여 공거천의 첫째인 야마천이 생겨난 후에 지거천 내지 3륜이 생겨나는 것이다. 즉 죄업과 복업에 따라 괴겁 때에 유정은 아래서 위로 모이게 되지만, 성겁 때에 유정은 위에서 아래로 흩어진다.(후술)
26)
『광기』에 의하면, 수명이 점차 감해지는 때를 주겁(住劫)이라 하고, 아직 감해지지 않는 때를 성겁(成劫)이라고 한다. 즉 주겁의 기간 동안 기세간에는 변동이 없지만 인간의 수명에는 증감이 있어 최초 무량이었던 것이 도병(刀兵,7일간)ㆍ질병(7개월 7일간)ㆍ기근(7년 7개월 7일간) 등으로 점차 줄어들어 10세에 이르고, 그 후 다시 증가하여 8만 세에 이르고 10세로 감소하는데, 이렇듯 한 번 감소하고 한 번 증가하는 것을 1중겁이라 한다. 다만 주겁의 제1 중겁은 무량에서 10세로의 감소만이 있고, 제20 중겁은 10세에서 8만 세로의 증가만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19중겁이다.(후술)
27)
앞에서 범중천의 신장은 0.5유선나, 수명은 이와 동일한 0.5겁, 그리고 이때 겁은 대겁의 반(40중겁)을 단위로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소광천 이상은 대겁을 단위로 하기 때문에 극광정천의 수명은 8대겁이다. (본론 제31권 주73 참조)
28)
유부에 의하는 한 시간은 그 자체 독립적인 실유의 법이 아니며, 다만 생멸 변천하는 유위제법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시간이란 유위의 다른 이름(世路,adhvan,세간의 시간≺世≻은 유위를 근거≺路≻로 하기 때문에 ‘세로’임)이기 때문에, 그것의 본질은 바로 5온성이다. 즉 5온을 떠나 시간 자체는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론 제1권 ‘유위법과 그 이명(異名)’ 참조.
29)
『증일아함경』 제16권(대정장2,p.630상), ‘如我於三阿僧祗劫所行勤苦, 成無上道.’ 즉 보살은 발심으로부터 3아승기야 대겁(혹은 阿僧祗劫,asaṁkhyeya-kalpa) 동안 무수한 부처에게 공양하며 지혜의 자량인 6바라밀(선정과 지혜는 최후신에서 이루어지므로 여기서는 대개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 바라밀)을 닦은 후 다시 100겁 동안 32상 80종호를 초래할 만한 복덕행을 닦은 후 비로소 최후신의 보살로서 왕궁에 하생하셨다.
30)
여기서 ‘어떤 경’[有經]이란 『구사론』(제12권, 앞의 책,p.559)에서는 『해탈경(解脫經)』. 참고로 『해탈경』의 원어는 Muktaka로, 이는 해탈이라는 의미 이외 ‘독립된’, ‘별도의’라는 뜻을 갖는다. 『구사석론』에서는 ‘여경(餘經)’이라 번역하고 있으며, 『바사』(제177권, 한글대장경125,p.47)에서는 다만 ‘계경’이라고만 하였다. 칭우에 따르면 이 말은 『해탈경』이란 말이 아니라 ‘4아함에 포함되지 않은 경’이라는 뜻이다. 즉 거기서 1아승기야는 10의 60승이다. 『구사론』에서는 망실된 여덟 가지의 명칭을 제외한 52가지의 십진급수를 전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일ㆍ십ㆍ백ㆍ천ㆍ만ㆍ낙차(洛叉,lakṣa)ㆍ도낙차(度洛叉,atilakṣa)ㆍ구지(俱脂,koṭi)ㆍ말타(末陀,madhya)ㆍ아유다(阿庾多,ayuta)ㆍ대(大,mahā)아유다ㆍ나유다(那庾多,nayuta)ㆍ대나유다ㆍ발라유다(鉢羅庾多,prayuta)ㆍ대발라유다ㆍ긍갈라(矜羯羅,kaṁkara)ㆍ대긍갈라ㆍ빈발라(頻跋羅,bimbara)ㆍ대빈발라ㆍ아추바(阿芻婆,akṣobhya)ㆍ대아추바ㆍ비바하(毘婆訶,vivāha)ㆍ대비바하ㆍ올층가(嗢蹭伽,utsaṅga)ㆍ대올층가ㆍ바할나(婆喝那,vāhana)ㆍ대바할나ㆍ지치바(地致婆,tiṭibha)ㆍ대지치바ㆍ혜도(醯都,hetu)ㆍ대혜도ㆍ갈랍바(羯臘婆,karabha)ㆍ대갈랍바ㆍ인달라(印達羅,indra)ㆍ대인달라ㆍ삼마발탐(三磨鉢耽,samāpta)ㆍ대삼마발탐ㆍ게저(揭底,gati)ㆍ대게저ㆍ염벌라사(拈筏羅闍,nimbarajas)ㆍ대염벌라사ㆍ모달라(姥達羅,mudrā)ㆍ대모달라ㆍ발람(跋藍,bala)ㆍ대발람ㆍ산야(珊若,samjñā)ㆍ대산야ㆍ비보다(毘步多,vibhūta)ㆍ대비보다ㆍ발라참(跋羅攙,balakṣa)ㆍ대발라참ㆍ아승기야.
31)
예컨대 과거7불 중 비바시불(毘婆尸佛)은 인간의 수명이 8만 4천 세 때, 시기불(尸棄佛)과 비사부불(毘舍浮佛)은 7만 세 때, 구루손불(拘屢孫佛)은 6만 세 때,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은 4만 세 때, 가섭불(迦葉佛)은 2만 세 때 출현하였고, 당래 석가불은 1백 세 때 출현하셨다.
32)
『구사론』 제12권(앞의 책,p.564). 즉 유정의 수명의 양이 감소하여 점차 종말(즉 괴겁)을 맞이하려고 할 때에는 대개 모든 방면에서 세간이 더럽고 부패하여 교화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컨대 수명이 지극히 짧아지고(壽濁), 도병(刀兵)ㆍ질역(疾疫)ㆍ기근(饑饉)의 3재가 일어나 시대가 흐려지고(劫濁), 번뇌와 사견이 치성하며(煩惱濁ㆍ見濁), 유정 또한 신체가 왜소하고 무기력해진다(有情濁).
33)
독각(獨覺,pratyeka buddha, 緣覺 또는 辟支佛)이란 다른 이의 가르침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깨달은 이를 말하는데, 다른 이의 가르침을 떠나 홀로 뛰어난 과보를 증득하였기 때문에 ‘독승’이라고도 함. 부행(部行,Vargacārī)이라 함은 성문으로서 제3과(불환과)까지를 얻고 그 후 스스로 뛰어난 제4과의 과보를 증득한 이를 말한다. 즉 여러 사람이 한곳에서 공동적으로 수행[衆類相共]하였기에 ‘부행’이라고 이름하였다. 이에 대해 인각유(麟角喩)란 기린의 뿔이 오직 하나인 것처럼 홀로 머물며 깨달음을 증득하였기 때문에 ‘인각유’라고 이름하였다.
34)
본사(Itivṛttaka, 혹은 如是語)란 12분교(分敎)의 하나로, 이를테면 이와 같이 전해오는 옛 이야기를 말한다. 다음의 이야기는 『현우경(賢愚經)』 제13권「우파국제품」(대정장4, p.443하); 『대비바사론』 제46권(한글대장경119, p.503)에 나온다.
35)
부행독각이란 이생으로서 일찍이 성문도를 닦다가 스스로 보리(菩提)를 증득한 부처를 말하는 것으로, 보살로서 스스로 보살도(6바라밀)을 닦아 보리를 증득한 부처와는 구별된다는 뜻.
36)
그러나 부행독각은 시간의 정해진 한도가 없기 때문에 백 대겁보다 적은 시간 동안 보리의 자량도를 닦을지라도 독각을 성취할 수 있다.
37)
이는 『구사론』(앞의 책,p.566)에서의 정설이다. 즉 “그는 숙습(宿習)으로 말미암아 즐거이 하고자 하는 일[欣樂勝解]이 적을뿐더러 설하려고 하는 희망도 없기 때문에, 또한 [그 때의] 유정들은 심오한 법을 향수하기가 어려울 뿐더러 [생사의] 흐름을 따른 지 이미 오래되어 그 흐름을 거스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대중들을 섭수(攝受)하는 것(즉 지도하는 것)을 회피하였기 때문에 다른 이를 위해 정법을 널리 설하지 않는 것이니, 시끄럽게 떠들어 [그들과] 잡란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38)
철륜왕은 남섬부주만을 다스리는 왕이고, 동륜왕은 남섬부주와 동승신주를, 은륜왕은 여기에 서우화주를, 금륜왕은 4대주 전부를 다스리는 왕이다.
39)
『장아함경』 제18권 「전륜왕품」(대정장1,p.119하); 『중아함경』 제15권 「전륜왕경」(동,p.521중); 『잡아함경』 제27권 제722경(동2,p.194상) 등에 전륜왕에 관한 기사가 전하고 있다.
40)
『중아함경』 제47권 『다계경(多界經)』(대정장1,p.723하~274상). 그러나 『다대경』에서는 반대로 설해지고 있다. “아난이여, 만약 세간에 두 명의 전륜왕이 존재하여 함께 다스린다면, 그러한 곳은 끝내 없을 것이지만, 만약 세간에 한 명의 전륜왕이 존재하여 다스린다면, 그러한 곳은 필시 있을 것이니, 아난이여, 만약 세간에 두 분의 여래가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곳은 끝내 없을 것이지만, 만약 세간에 한 분의 여래가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곳은 필시 있을 것이다.”
41)
이 논설은 다음에 논설되는 유여사 즉 대중부(혹은 경량부)의 다계다불설(多界多佛說)을 비판한 것으로, 유부에서는 두 부처가 출현할 경우 부처의 덕이 양분되어 원만하지 않게 되며, 시방의 세계를 모두 교화할 수 없기 때문에 시방(十方)의 삼천 대천에는 오로지 일시에 한 분의 부처님만이 출현한다[十方界一佛說]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량부에 따르면, 부처님의 수명에는 한계가 있으며, 또한 무수한 세계의 중생은 때와 장소, 근기에 한량없는 차별이 있어 이들을 동시에 구제할 수는 없기 때문에 다수의 세계에 다수의 부처가 출현한다. 참고로 본론 제31권(‘3계의 근본인 3륜’)에서 “시방세계에는 백 구지(俱胝,억)의 4대주의 세계가 있다”고 논설하였다.
42)
여기서 『범왕경』은 『중아함경』 제19권 『범천제불경(梵天諸佛經)』. 이는 바로 부처님께서는 오로지 이러한 삼천대천세계만을 교화할 수 있으며, 다른 삼천대천세계는 교화할 수 없음을 설한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께는 한계[礙]가 있지 않느냐? 하는 힐난의 경증이다.
43)
『장아함경』 제12권 『자환희경(自歡喜經)』(대정장1,p.79상); 『중아함경』 제47권 『다계경(多界經)』(동,p.723하~274상)참조. 인용한 경문은, 세존께서 사리자(舍利子)에게 “어떤 이가 그대를 찾아와 ‘범지(梵志) 사문(沙門)으로서 현재의 교답마(喬答摩,Gautama)와 동등한 무상(無上)의 깨달음을 획득한 자가 있는가?’라고 물으면 그대는 그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라고 말한 데 대한 사리자의 답변이다.
44)
앞서 인용한 경문(주44)은 오로지 현재의 범지 사문의 경우이며, 과거와 미래의 범지 사문으로서 세존과 동등한 무상의 보리를 획득한 이는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다.
45)
즉 인용한 경문은 전륜왕의 경우에 대해서도 은밀하게 설한 것으로, 전륜왕의 경우 그와 동등한 이는 없을지라도 다른 전륜왕이 다른 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에 부처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는 뜻.
46)
이는 『구사론』(앞의 책,p.569~570)에서 다계다불설(多界多佛說)의 첫 번째 논거이다. 두 번째 논거는 “만약 오로지 시방세계에 한 분의 부처님만이 출현한다고 한다면, 설혹 일 겁의 시절 동안 머물러 계신다 할지라도 한 세계의 불사(佛事)를 두루 다할 수 없거늘 하물며 인간과 같은 수명으로 어떻게 가없는 무변(無邊)의 세계(여기에 머무는 유정 또한 무변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시절과 처소와 근기의 차별 또한 이루 헤아릴 수 없다)를 능히 이익되게 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다.
47)
현겁(bhadra-kalpa,혹은 現劫)은 현재의 대겁(大劫)을 말한다. 즉 현재의 대겁 중 주겁(住劫)에 구류손불ㆍ구나함모니불ㆍ가섭불ㆍ석가모니불 등 일천 부처님이 출현하여 중생을 구제하므로 ‘현겁’이다. 참고로 과거의 대겁을 장엄겁(莊嚴劫)이라 하고, 미래의 대겁을 성수겁(星宿劫)이라 한다.
48)
이상 ‘시방세계에는 일시에 오로지 한 분의 부처님만이 출현한다[十方世界一佛說]’는 방론(傍論)을 마치고, 본 단의 주제인 전륜왕에 대해 계속하여 분별한다.
49)
『중아함경』 제11권 『칠보경』(대정장1,p.493상); 『증일아함경』 제33권(동2,p.731중); 『잡아함경』 제27권 제721경(동p.194상) 등을 참조. 여기서 7보는 바퀴 보배[輪寶]ㆍ코끼리 보배[象寶]ㆍ말 보배[馬寶]ㆍ구슬 보배[珠寶]ㆍ여인 보배[女寶]ㆍ주장신(主藏臣)의 보배ㆍ주병신(主兵臣)의 보배이다.(『구사론』 제12권, 앞의 책,p.572) 칭우에 의하면 주장신(主藏臣, grihapati,일반적으로 居士로 번역)은 창고(kośa)를 감독하는 자이며, 주병신(主兵臣,pariṇāyaka)은 군대(bala)를 감독하는 자이다.
50)
즉 바퀴와 구슬(마니주)을 제외한 다섯 가지는 유정수인데, 그것이 만약 전륜왕의 이숙과라고 한다면 자작자수(自作自受)가 아니라 타작타수(他作他受)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난문. 즉 그 때 코끼리 등은 누구의 이숙과인가?
51)
대사의 32상에 대해서는 『대비바사론』 제177권(한글대장경125,p.33~37)을 참조 바람.
52)
『장아함경』 제22권 『세본연경(世本緣經)』(대정장1,p.145상) 참조.
53)
지미(pṛthivīrasa)는, 보광(『구사론기』 제12권)에 의하면 땅속에서 생겨난 융석(融錫)과 같은 것.
54)
전주(田主, 守田者 즉 밭을 지키는 이. 구역에서는 差多羅莎未,kṣetra svāmin)의 원어 kṣetrapa가 찰제리의 원어 kṣatriyas와 동일한 어원 √kṣi(머물다, 지배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간주하여 이 같이 말한 것이다.
55)
대삼말다왕(大三末多王, Mahā saṃmata-rāja, 구역에서는 摩訶先摩多)의 삼말다(saṃmata)는 ‘존경하다’, ‘협동하여 세우다’는 뜻으로, ‘다 같이 존경하는 대왕’이라는 뜻.
56)
이상의 이유에서 여러 사람들이 협정하여 국왕을 세웠다는 국가기원의 설명방식은 홉즈(T.Hobbes)의 리바이어탄(Leviathan), 즉 개인의 자연권에 기초한 절대군주제 국가이론을 연상시킨다.
57)
여기서 ‘비법의 탐욕’이란 욕(欲) 사행(邪行)의 탐욕[邪婬欲]을 말하고, ‘불평등한 애착’이란 사기나 폭력에 의해 남의 물건을 취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는 것[偸盜欲]을 말하며, ‘삿된 법[邪法]이 얽히고설켰다’고 함은 어미도 없고 아비도 없다고 생각하는 등의 전도된 생각을 품는 것[顚倒想]을 말한다.
58)
『장아함경』 제22권 『세기경(世記經)』 「삼(三)중겁품」(대정장1,p.144하), “기아겁(飢餓劫) 때에 사람들은 길거리나 똥 속에 있는 곡식을 주워 살아가며[運籌飢餓], 뒷골목 장터 푸줏간 혹은 묘지의 온갖 해골을 주워 그것을 삶은 물로 살아가며[白骨飢餓], 다만 풀이나 나무를 삶아먹고 살아간다[草木飢餓].” 『구사석론』에서는 “그 때는 세 가지 양식이 있으니, 첫째는 전차량(旃遮糧)이며, 둘째는 백골량(白骨糧)이며 셋째는 주량(籌糧)이다”고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전차(cañca)’는 ‘모이다[聚集]’와 ‘작은 상자[小篋,즉 곽]’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후술)
59)
즉 제비를 뽑아 오늘은 가장이 먹고 내일은 어린애가 먹는 것을 말한다.
60)
이는 바로 근주율의(近住律儀). 즉 재가의 남녀가 하루 밤낮 동안 불살생 등의 8재계를 지키는 것. 본론 제37권에서 상론함.
61)
『대비바사론』 제135권(한글대장경123,p.193)에서도 인용됨.
62)
여기서 ‘미세한 부분[細分]’이란, 『구사론』(제12권, 앞의 책,p.580)에서는 극미(極微)로 언급되고 있는데, 거기서 이 물음은 극미상주론(極微常住論)을 주장하는 어떤 외도(즉 勝論,Vaiśeṣika)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즉 그들에 의하면 세계가 괴멸하더라도 극미는 남아있어야만 그것이 종자가 되어 다음 세계에 구체적인 물질[麤色]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63)
즉 성겁 때 온갖 물질적 현상들은 세간의 생성과 소멸에 관계없이 상주하는 극미를 종자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이전 세계의 괴겁 때의 바람을 연으로 하여 생겨난 하지의 바람을 종자로 삼는다는 뜻. 여기서 ‘꼭대기의 바람’이란 초ㆍ제2ㆍ제3정려에 각기 화재ㆍ수재ㆍ풍재가 일어날 때의 바람으로, 이때 꼭대기는 순서대로 제2정려ㆍ제3 정려ㆍ제4정려이다.(후술)
64)
『구사론』(앞의 책,p.580)에서는 이것이 정설(正說)이고, 앞의 설이 별설(別說)이다.
65)
『장아함경』 제22권「세본연품(世本緣品)」(대정장1,p.147하), “무슨 인연이 있어 세간에 다섯 종자가 있는 것인가? 대란풍(大亂風)이 불패(不敗)의 세계로부터 종자를 불어와 이 나라에서 나게 하였으니, 첫 번째는 뿌리종자[根子]이며, 두 번째는 줄기종자[莖子]이며, 세 번째는 마디종자[節子]이며, 네 번째는 허공종자[虛中子]이며, 다섯 번째는 종자의 종자[子子]이다.……”
66)
“화재는 제2정려를 꼭대기로 삼으니, 이 밑으로는 불에 태워지기 때문이다. 수재는 제3정려를 꼭대기로 삼으니, 이 밑으로는 물에 잠겨버리기 때문이다. 풍재는 제4정려를 꼭대기로 삼으니, 이 밑으로는 바람에 날려 흩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재앙의 상지(上地)를 여기서 ‘꼭대기’라고 일컬은 것이다.”(『구사론』 제12권, 앞의 책,p.586)
67)
즉 화재(火災)는 극광정천 이하만을 모두 태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후술함.
68)
본론 제30권 주59)와 그것의 본문 참조.
69)
다시 말해 제4정려는 내적인 온갖 재앙, 이를테면 심(尋)ㆍ사(伺)ㆍ우(憂)ㆍ고(苦)ㆍ희(喜)ㆍ낙(樂)ㆍ출식(出息)ㆍ입식(入息)이라는 이른바 8동법(動法,혹은 災患)을 모두 떠났기 때문이다.
70)
정거천이란 무번(無煩)ㆍ무열(無熱)ㆍ선현(善現)ㆍ선견(善見)ㆍ색구경(色究竟)의 5천을 말하는데, 불환(不還)의 성자가 태어나는 곳이기 때문에 5아나함천(阿那含天)이라고도 한다. 즉 여기서 몰하여 바로 열반에 들기 때문에 별도의 재앙을 만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5정거천에 대해서는 본론 제65권에서 논설한다.
71)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1권 ‘제유정의 신장과 수명’을 참조할 것.
72)
『현종론』(제17권)에 따라 보완하였다.
제33권
1)
이는 곧 사람들의 업은 자연세계에 미칠 수 없으며, 돌 따위나 산하대지 등의 차별에는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인론자(無因論者)의 주장이다. 즉 외도들은 만유가 생주(生主, Prajāpati)나 자재천(自在天, Maheśvara)과 같은 초월적 신이나, 자성(自性, prakṛti)이나 자아(puruṣa)과 같은 근원적 원리에 의해 전개되었다고 하든지, 혹은 원인 없이 본래 그렇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만유(즉 유정세간과 기세간) 차별의 참된 원인을 업으로 파악하는데, 이하 이에 대해 분별한다.
2)
다시 말해 전쟁에서 상(賞)이나 재물 등을 획득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적군을 죽인 업이 아니라 일찍이 지었던 선업이며, 적군을 죽인 업은 이전의 선업으로 하여금 결과를 낳게 하는 간접적인 조건[緣]이라는 뜻이다.
3)
발특마(padma)는 홍련(紅蓮), 올발라(utpala)는 청련(靑蓮)이다.
4)
연화 등은 공업(共業)의 소산이고, 유정신은 각자 개별적인 업[別業, 즉 不共業]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5)
전생의 보시의 선업으로 부자의 즐거움을 초래하게 된 것이 이숙과라면, 능히 물자를 희사하려는 생각을 자주 익히지 않은 것은 증상과이며, 이에 따라 인색한 마음을 품게 된 것은 등류과이다.
6)
다른 이를 해코지하였든 해코지하지 않았든 좋고 좋지 못한 결과를 획득한다. 다시 말해 좋거나 좋지 못한 결과는 해코지와는 관계없다는 뜻이다.
7)
즉 짐승이나 사람들을 죽이고 해코지할 경우 그것은 일시 좋은 결과를 낳을지라도 궁극적으로 괴로움을 낳는다. 세간에 괴로움이 많은 것이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면 그것은 끝내 설명될 수 없다는 뜻이다.
8)
목숨이 긴 것은 참으로 애호할만한 과보이지만, 지옥에서의 그것은 애호할만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악업이 지옥의 과보를 초래하는 것은 좋지 못한 과보이지만, 모든 유정이 자신의 목숨에 대해 애착하므로 거기서의 기나긴 목숨은 좋은 과보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인과는 반드시 동일한 성질로서 상속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반될 수도 있다는 변명. 다시 말해 정업과 부정업은 각기 애호할 만한 과보와 그렇지 못한 과보를 동시에 낳을 수 있다는 뜻이다.
9)
선취에서 지극히 짧은 목숨을 받게 되는 것은 살생의 이숙과가 아니라 등류과이다. 즉 선취에 태어나는 것은 살생의 업 때문이 아니라 정업(淨業)에 의한 것이지만, 살생의 업으로 말미암아 단명이라는 등류과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10)
예컨대 희생제(犧牲祭)를 치르기 위해 주문을 외운 다음 양을 죽였을 경우에는 좋은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정업과 부정업이 각기 좋고 좋지 못한 두 가지 결과를 모두 초래한다’고 할 때 야기되는 과실은 없다는 뜻이다.
11)
양의는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 중에 그를 괴롭게 하였지만, 끝내 병을 완치하여 그를 즐겁게 하였으므로 좋은 결과를 초래하게 되듯이, 희생제를 치르기 위해 양을 희생시켰을 경우에도 양으로 하여금 끝내 축생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므로 좋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뜻이다.
12)
여기서 『명론(明論)』은 『베다』를 말하는 것으로, 『베다』를 지식의 근거(즉 聖言量, 혹은 至敎量)로 삼는 한 양 등의 희생물을 죽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13)
미맘사학파에 있어 지복(해탈)은 제사의 실행을 통해 가능하다.(『미맘사수트라』I.1.1-2) 제사의 실행은 『베다』의 교령(敎令)으로, 이는 다만 말 자체의 힘에 의해 그 진실성이 보증된다. 이 학파에 의하면, 『베다』의 지식은 그 자체 타당성을 갖고 있어 다른 어떠한 증거도 필요하지 않다. 예컨대 어스름한 저녁 무렵 새끼줄을 뱀으로 보았다면, 그 때 새끼줄과 뱀의 상위는 파악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순간 존재하는 것은 뱀의 형상뿐이다.(이를 지식의 본유적 타당성의 이론svataḥ pramāṇavāda이라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사의 효능(즉 해탈) 또한 현재 시점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각(現量)으로써는 인식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다만 지식의 원천인 『베다』의 말씀으로, 말 자체가 갖는 절대적 의미(ākṛti, 보편적 형상)에 의해 그 확실성이 보증된다. 그리고 그러한 절대적 의미와 본유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말은 무시이래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이를 성상주론(聲常住論)이라 한다. 즉 미맘사학파에 있어 말이란 그것이 발성될 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본체(sphoṭa, 보편적이며 궁극적 의미)가 언표라고 하는 일시적 조건에 의해 현현하여 우리의 지각 상에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이에 반해 불교의 경우 말이란 다만 대상에 관한 화자(話者)의 관념(覺慧, 이는 대상과는 별개의 것임)의 언표로서, 일시적인 약속체계에 불과하다.
14)
『베다』의 소리가 일체의 관념에 선행하는 본질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결국 이근(耳根)을 통해 알려질 수밖에 없으며, 그럴 경우 그것은 여타의 다른 소리와 마찬가지로 무상한 것이며, 역시 또한 화자의 관념에 의해 낳아진 것이므로 그것만을 결정적인 지식의 근거[定量]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15)
항아리처럼 시각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것을 가리고 있는 것 때문에 보여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영원한 소리가 지금 들리지 않는다고 할 경우 무엇이 그것을 가리고 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즉 『베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은폐물이 그것을 장애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발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베다』의 소리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16)
유위제법은 찰나멸이기 때문에 지금 밝음에 의해 드러난 항아리는 일찍이 어두움에 장애된 항아리가 아니다. 따라서 이 같은 무상의 항아리는 『베다』의 성상주론(聲常住論)의 동유(同喩)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17)
불교에서는 지식의 근거[量]로서 오로지 지각(現量)과 추리(比量) 만을 인정할 뿐이다. 성자의 말씀(至敎量, 혹은 聖言量)조차도 이에 부합할 때만 지식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즉 『베다』를 절대적인 지식의 근거로 인정하는 외도들은 그것이 과연 지식으로서 타당한 것인가에 대해 검토해보지도 않고 맹목적으로 공경하여 절대시한 것이기 때문에 지교량에 포섭되지 않는다는 것이다.(후술)
18)
역시 현량으로 획득되지 않는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지교(至敎)로 인정하면서 어찌 대선인의 경우는 지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외도의 힐난이다.
19)
여기서 ‘허광어’ 즉 거짓말은 대선인들이 깨달았다는 『베다』의 말을 말한다. 즉 자아에 집착하는 선인들은 결코 탐ㆍ진ㆍ치 등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그가 설한 말은 허광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세존 대사는 무아를 설하여 탐 등에서 벗어났기에 그의 말씀 또한 진실로서 지교(至敎)에 포섭된다는 뜻이다.
20)
『중아함경』 제27권, 「달범행경(達梵行經)」(대정장1,p.600상).
21)
업의 본질[體]은 심소인 사(思, cetanā, 즉 의지적 작용)와 그것에 의해 외적으로 표출[動發]된 이른바 ‘사’의 소작(所作)인데, 전자를 사업(思業, cetanā-karma)이라 하고, 후자를 사이업(思已業, cetayitvā-karma)이라고 한다.
22)
‘소의’란 업 즉 활동의 근거가 되는 신체를 말하고, ‘자성’이란 활동 그 자체를 말하며, ‘등기’란 활동의 원인을 말한다. 즉 신업이나 의업의 경우, 몸이나 뜻이 바로 업은 아니다. 그러나 말은 그 자체가 바로 업이기 때문에 자성업이다.
23)
어업과 신업은 다같이 외부로 나타나기 때문에 표업(vijñapti-karma)이라고 이름한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외부로 표시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알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업의 본질인 ‘사’에는 그러한 작용이 없기 때문에 표업이라 할 수 없으며, 표업의 성질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무표업(avijñapti-karma)이라고 할 수도 없다. 즉 무표업이라고 하는 것은 신ㆍ어업과 같은 대종소조로서, 행위할 때와는 다른 마음에 있거나 무심의 상태에 있거나 간에 항상 상속하여 선악의 이숙을 낳는 힘을 말한다.(본론 제2권 ‘무표색’ 참조)
24)
『품류족론』 제7권(대정장26,p.717하; 한글대장경117,p.145), ‘身業云何? 謂身表及無表. 語業云何? 謂語表及無表. 意業云何? 謂思’.
25)
마음은 동류로서 상속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의업의 무표를 주장한다면, 예컨대 전 찰나의 선한 의업이 일어나고 다음 찰나 악한 의업이 일어났을 경우, 선한 의업의 무표는 악한 마음에 따라 일어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26)
즉 신업을 소의신에 근거한 업이라고 한다면, 소의신은 생겨나는 순간 소멸하는데, 어떻게 거기에 연속적인 운동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힐난이다. 이는 신표업의 본질[體]이 행동(行動)이라는 정량부(正量部) 설에 대한 비판이지만, 이하 이에 대한 해명과 더불어 정량부를 비롯한 상좌와 경량부 등의 이설에 대해 비판한다.
27)
이상 10구 중 앞의 9구는 신표업의 본질[自性]에 대해, 제10구는 어표업의 본질에 대해 밝히고 있다. 먼저 제1구에서 신표업의 본질이 신체적 형태, 즉 형색(形色)임을 밝힌 다음 이하 5구에서 ‘신표업은 일정한 시간에 걸친 행동을 본질로 한다’는 정량부(正量部)의 잠주설(暫住說)을 비판하고 있다. 다음의 3구는 경량부의 입장에서 다시 제1구의 유부의 주장을 비판한 것으로, 『구사』논주 세친은 경량부의 형색 가유론에 근거하여 유부의 신표업설을 예의 ‘인정한다[許,iṣyate]’는 말로써 불신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본론에서는 본문 중에서 형색가유론에 대해 하나하나 비판하고 있지만, 『현종론』(제18권)에서는 본송을 다음과 같이 완전히 개작하였다.
28)
앞서 상좌는, 소의신은 생겨나자마자 소멸(찰나멸)하기 때문에 신체상에 일련의 행동이 일어날 수 없다고 하였지만, 신체상의 형태[身形]의 경우 비록 찰나멸하는 것일지라도 찰나멸하는 사(思)를 의업의 본질로 설정하듯이 신업의 본질로 설정할 수 있다는 해명이다.
29)
신체상의 형태는 작자의 의도에 따라 생겨날 수 있지만, 색채[顯色]나 대종 자체는 의도에 따라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표업의 본질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30)
소의신의 대종이나 현색은 형색(형태)와는 달리 10년을 한결같이 지속하여 찰나멸하는 마음이 미칠 수 없는 경계이며, 그래서 무기성이라는 뜻인가? 이 경문은 본론 제34권에서 각기 정량부의 잠주멸설(暫住滅說)과 이를 비판하는 경증(經證)으로도 인용되고 있다.
31)
어미의 젖가슴을 만지는 신업 자체는 다만 무기성일 뿐으로, 자식이 만질 경우 선이지만 다른 이가 만지면 불선이 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신표업(신체상의 형태) 역시 그 자체는 무기성으로, 그것을 일으킨 마음에 따라 선이 되기도 하고 불선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선 등의 차별을 성취하는 것은 신업 자체가 아니라 소의신으로 하여금 온갖 종류의 형태[形色]로 나타나게 하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예컨대 팔을 휘두른 것 자체는 다만 무기일 뿐이지만, 그것을 휘두르게 된 의도에 따라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는 것으로, 이러한 이설(異說)은 일체의 업의 본질을 ‘사(思)’로 간주하는 경부 계통의 주장이다. 본론 제34권 ‘경량부의 신표업 설 비판’ 참조.
32)
여기서 ‘이계자’라 함은 니간타(Nigantha, 혹은 Nirgrantha) 즉 자이나교를 말한다. 그들은 업을 영혼(jīva)을 장애하는 물질(pudgala)로 간주하여 결과론의 입장에 서기 때문에 신ㆍ어의 표업은 마음과는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선악의 성질을 갖는다.
33)
머리털을 뽑았다는 사실만으로는 동일하지만, 박갈국의 사람은 해코지하고자 하여 뽑았고, 이계자(離繫者)는 고행하려는 순결한 마음에서 뽑았기 때문에 양자의 의미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뜻이다. 참고로 자이나교에서는 불교의 사업(思業)을 중시하는 동기론적인 업설에서 대해 “살아있는 것을 죽이고자 마음먹었으면서 신체적 행위에 의해 죽이지 않은 것과 무의식적으로 죽이는 것은 둘 다 죄악인데, 후자는 죄가 아니라고 한다면, 극심한 기근동안 재가자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아들을 죽여 식사를 하고 출가자가 그 식사에 동참하여도 죄가 되지 않을 것인가?”라고 비난하고 있다.(Sūtrakritāṅga I.1)
34)
즉 상좌는 경량부와 마찬가지로 형색(形色)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후술) 다만 무간 찰나로 상속하는 4대소조의 색취(色聚)가 그 밖의 다른 연(緣, 즉 思)에 의해 처소를 달리하여 생겨나 이익(선)이 되기도 하고 손해(악)가 되기도 하는 행위를 신표업이라 하였다. 다시 말해 4대소조의 색취나 말소리(語言) 자체는 선도 아니고 불선도 아니지만, 의지[思]가 개입되어 선악(攝益과 損害)의 의미를 갖는 그것을 신표업과 어표업이라 하여 각각의 표업을 개별적인 실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참고로 경량부에 따르면, 신ㆍ어업의 본질은 신체상의 형태나 말소리가 아니라 ‘사’ 즉 의지이며, 신ㆍ어표업이란 다만 의지가 신체나 말소리를 매개로 하여 밖으로 표출된 형태 즉 동발승사(動發勝思)에 지나지 않는다.(후술)
35)
본론 제26권 ‘안(眼) 등 5근에 대한 상좌의 논란 비판’ 참조.
36)
주29) 본문 참조.
37)
즉 상좌는 앞서 ‘그 밖의 다른 연(思)의 힘으로 색취가 방소를 달리하여 생겨날 때 섭익(攝益)되고 손해(損害)되는 후 찰나의 색취를 신표업이라 한다’고 하였지만, 이익과 손해는 색(色)과 성(聲) 뿐만 아니라 향ㆍ미 등에도 존재하기 때문에 섭익과 손해를 결정코 선 등의 차별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38)
이렇듯 향(香) 등도 섭익과 손해의 성질이 있을뿐더러 ‘나타내는 성질[表性]’이 있기 때문에 상좌의 주장대로라면 이 역시 선 등의 차별을 갖는 표업이라고 해야 한다는 힐난이다. 그러나 경에서는 다만 색(色)과 성(聲)에만 선 등이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상좌는 성교(聖敎)를 무시하고서 자기 마음대로 설하였다는 것이다.
39)
즉 신표와 동일한 이치에서, 어표업의 결과에 비록 섭익과 손해의 차별이 존재할지라도 이를 선ㆍ불선(염오)이라 해서는 안 되며 다만 무기성이라고 해야 하니, 소리[聲] 뿐만 아니라 향(香) 등에도 이와 같은 섭익과 손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40)
다시 말해 ‘세속’이라는 말이 ‘어언(語言)’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보특가라’를 수식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41)
촉계에는 지(堅)ㆍ수(濕)ㆍ화(煖)ㆍ풍(動)의 4대종과 일곱 소조촉이 있지만 4대종 또한 지계(地界) 등으로 일컬어지며, 18계의 법도 법계이지만 그것들은 각기 안계 등으로 칭명된다. 색법의 경우, 안(眼) 등의 10처(處)는 총명(總名)으로서의 색법에 포섭되지만, 안처(眼處)에 포섭되는 색처(色處)는 별명(別名)으로서의 색법이다.
42)
여기서 어떤 부파는 칭우에 의하면 독자부(犢子部), 보광에 의하면 정량부(正量部)이다. 보광(『구사론기』 제13권)에 따르면 유위법 중 심ㆍ심소나 소리 빛 등은 찰나멸하기 때문에 일련의 행동이라 할 수 없지만, 불상응행이나 신표업, 색신(色身), 산천초목 등의 색법은 유부에서처럼 생성 내지 소멸을 일찰나에 구유(俱有)한 것이 아니라 생성의 초시(初時)와 소멸의 후시(後時) 그리고 그 사이의 주(住)ㆍ이시(異時) 등에 걸쳐 상당시간 지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색신은 일련의 전체적인 하나의 행동을 조작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것 역시 잠주멸(暫住滅)하기 때문에 상속이 가능하다. 즉 유부의 경우 표업의 본질은 근본업도가 성취되는 찰나의 소의신의 형색이며, 그것은 행위된 순간 바로 소멸(찰나멸)하지만 무표색을 인기함으로써 행위의 상속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일련의 행위는 찰나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따라서 그 소멸 또한 찰나멸하지 않고 잠주멸한다고 주장하는 정량부에 있어 표업의 본질은 일련의 행위전체[行動]이며, 그것은 결과를 산출할 때까지 소멸하지 않기 때문에 상속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광의 해석은 본론 본항과 제43권의 논의에 따른 것이다.
43)
제행은 찰나멸이기 때문에 다른 방소로 전지(轉至)할 수 없으며, 생겨나는 순간 바로 소멸한다. 따라서 신표업의 본질을 소의신의 일련의 ‘움직임(행동)’이라 하는 것은 세속(가설)일 뿐 승의가 아니다는 뜻이다.
44)
설일체유부에 있어 유위 제법은 찰나적 존재[有刹那, kṣaṇika]로서, 찰나든 겁(劫)이든 시간은 5온 상에 가립된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찰나’는 ‘법(제행)’과 동의어이다.
45)
여기서 원인의 처소[因處]란 가행에 의해 근본업도의 제행이 생겨나는 순간의 소의신을 말하는 것인가?
46)
보리 가루, 밥, 비단 등은 현재시점에 존재하지 않지만 미래에 획득될 것에 근거하여 이같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토끼뿔과 같은 비존재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즉 라마는 미래법의 비존재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미래에 근거하여 ‘그 자체 획득되어 진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47)
과거는 이미 작용을 끝낸 상태이고, 현재는 지금 작용하는 상태, 미래는 아직 작용하지 않은 상태이다.(본론 제52권에서 상론함)
48)
유위제법은 작용하는 찰나(즉 현재)와 무간에 소멸하기 때문에, 혹은 멸상(滅相)과 구행(俱行)하기 때문에 ‘유찰나’라고 하였다는 뜻이다. 즉 유위 제법은 찰나에 생멸하기 때문에 일련의 시간적 지속이 요구되는 행동을 표업의 본질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49)
납박(lava)은 시간의 단위. 120찰나는 1달찰나(怛刹那), 60달찰나는 1납박, 30납박은 1모호율다(牟呼栗多), 30모호율다는 하루 낮밤.(본론 제32권 ‘시간의 단위’ 참조)
50)
『구사론』 제13권(고려장27,p.548하; 대정장29,p.67하;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593).
51)
유장(有杖) 즉 ‘지팡이를 갖은 이’라고 할 때 지팡이와 사람은 각기 다른 존재로서, 이러한 예증은 찰나와 유위법이 개별적 존재일 때 비로소 동유(同喩)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유부에 의하면, 찰나와 법은 별도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지팡이의 비유는 유찰나의 동유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52)
법과 찰나는 유사한 것이지만 언어형식상 다르게 설한 것이라고 한다면, ‘유찰나’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시 가설한 개념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53)
어떤 존재를 가설할 경우, 가설의 근거가 되는 실유물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유사한 것[能似]’은 진실의 존재[所似]를 전제로 한 것이며, 따라서 ‘찰나와 법은 유사하다’고 말한 경우 실유의 유찰나(찰나적 존재로서의 법)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54)
즉 경험세계에서 모든 존재는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겨난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한다. 이 같은 사실로 본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변화란 전 찰나와 후 찰나의 다름으로,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찰나에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으로, 그래서 일체 유위법을 ‘유찰나’라고 하였다. 이하 경험세계에서의 지속성과는 달리 일체 유위법이 찰나멸한다고 주장하는 유부의 논거에 대해 밝힌다.
55)
『구사론』 제13권(고려장27,p.549상; 대정장29,p.67하; 권오민 역,p.594).
56)
『증일아함경』 제12권(대정장2,p.607하) 참조. 여기서 ‘생기’와 ‘다함’은 생상(生相)과 멸상(滅相)을, ‘주이’는 주상(住相)과 이상(異相)을 말한다. 본 경설에 대해서는 본론 제13권 ‘경설을 통한 경주의 유위상 무별체설 비판’에서 널리 분별하였다.
57)
유부에 의하는 한, 식유필경(識有必境) 인식에는 반드시 실유의 대상이 존재하는 것이지만, 경주 세친에 의하면 미래법과 과거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당유(當有, 일찍이 존재하였던 것)와 증유(曾有, 앞으로 존재할 것)로서만 인식될 뿐이다.
58)
원문은 ‘現有法滅, 不待客因.’ 즉 앞서 경주 세친은 ‘소멸은 무(無, 비존재)로서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원인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滅無非果, 故不待因)’고 하였지만, 중현의 경우 소멸은 원인을 갖는 결과로서 비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멸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객관의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본법(本法)에 수반된 유위상 즉 멸상에 의한 것이다.(후술)
59)
‘땔감 등은 불과 화합하여 소멸하고, 등불이나 요령소리가 바람이나 손과 화합하여 소멸하는 것은 직접 지각[現量]되는 사실이기 때문에, 법의 소멸은 반드시 객관의 원인에 근거해야 한다’고 할 경우, 이를테면 요령소리(혹은 등불)가 소멸하는 것은 거기에 손을 대었기(바람이 불었기) 때문인가, 스스로 소멸하였기 때문인가? 만약 전자라고 한다면, 일체법의 소멸에는 반드시 객관적 원인이 있어야 하겠지만, 지각이나 소리 따위처럼 객관적인 원인 없이 저절로 소멸하는 것도 있기 때문에 일체법 중에 객관적 원인에 의해 소멸되는 법과 객관적 원인에 의하지 않고 저절로 소멸하는 법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요령소리는 손을 대거나 대지 않거나에 관계없이 찰나 찰나에 소멸한다. 다만 손을 대지 않았을 경우 소멸하는 순간 후법(後法)이 속생(續生)하지만, 손을 대었을 경우 후법이 속생하지 않을 뿐으로, 소멸 자체는 객관의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60)
다시 말해 객관의 원인에 의해 생겨나거나 없어지는 것이라면 직접지각[현량]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본법(本法)에 수반되는 생상이나 멸상에 의해 찰라 찰나 생겨나고 소멸한다는 것은 논리적 귀결이기 때문에 제법의 생멸은 추리[비량]된다는 것이다. 즉 ‘제행무상’은 불교의 기본전제로서, 무상이란 시간적 지속성을 갖지 않는다는 말이고, 지속성을 갖지 않는다는 말은 시간의 최소단위인 찰나에 걸쳐 변화한다는 말이며, 찰나에 걸쳐 변화한다는 말은 전 찰나와 후 찰나가 다르다는 말이다. 따라서 일체 유위제법은 찰나에 생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
61)
여기서 어떤 이는 보광의 『구사론기』(제13권)에 의하면 승론(勝論) 이사(異師). 『광기』에서는 ‘[강물에서] 뒤에 흘러 내려오는 물이 핍박하기 때문에 앞의 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들고 있다.
62)
여기서 어떤 이는 보광에 의하면 상좌부와 정량부, 칭우에 의하면 세친상좌 즉 고(古)세친.
63)
법(法, dharma)과 비법(非法, adharma)은 승론철학의 24속성[德] 가운데 하나로 공덕과 악덕의 뜻이다. 『광기』에 의하면 이런 두 가지 힘에 의해 능히 제법을 낳기도 하고, 또한 멸하기도 한다. 예컨대 캄캄한 방에 등불이 생겨날 경우,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는 공덕이므로 법이 생겨난 것이지만 필요로 하지 않는 이(이를테면 절도자)에게는 악덕이기 때문에 비법이 생겨난 것이다. 또한 반대로 등불이 소멸하는 경우,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는 악덕이므로 비법이 소멸한 것이며, 필요로 하지 않는 이에게는 공덕이므로 법이 소멸한 것이다. 곧 “법과 비법에 결부되어 윤회하고, 법과 비법을 떠남으로써 해탈한다.” (『바이세시카 수트라』6.2.15)
64)
이는 첫 번째 이설(승론)에 대한 비판이다. 즉 전법이 생겨날 때 후법은 아직 생겨나지 않았으며, 후법이 생겨났을 때에는 전법은 이미 소멸하였기 때문에 후법을 전법의 소멸의 원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65)
이는 『구사론』 제13권(고려장27,p.549상; 대정장29,p.68상; 권오민 역,p.595) 상에서의 세친의 비판이다. 즉 어떤 법이 다른 어떤 법을 소멸하는 원인이 되기 위해서는 양자는 동시에 병존해야 한다. 그러나 전 찰나의 법이 현행할 때는 후 찰나의 법은 미래에 있어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 따라서 생겨나지 않은 법이 현재의 법을 소멸할 수 없다. 혹은 후 찰나의 법이 현행할 때 전 찰나의 법은 이미 과거로 소멸하였으므로 이미 소멸한 법을 다시 소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66)
‘현재법만이 존재한다는 논의하는 자[唯現有論]’란 바로 경부사(經部師)이다.
67)
“찰나 찰나에 수순함과 어긋남이 상반되기 때문이다.”(『구사론』 제13권, 고려장27,p.549중; 대정장29,p.68상; 권오민 역,p.596) 법과 비법은 서로 상반되는 원리로서 예컨대 동일한 등불이라도 독서가에게는 공덕이지만 도적에게는 악덕이다. 이러한 상반된 사실이 동시 구유(俱有)하여 생멸의 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올바른 견해가 아니다.
68)
숙변이란 나무가 불에 타면서 그 색깔이 변하는 것을 말한다. 즉 만약 땔감 따위가 소멸함에 있어 불과의 화합이 바로 그 원인이라고 한다면, 땔감은 타면서 색깔의 변화가 생겨나는 과정에서 하숙(下熟, 적은 변화로서, 이를테면 황색), 중숙(中熟,이를테면 갈색), 상숙(上熟, 이를테면 검은 색)이 생겨난다고 할 경우, 하숙이 멸하면 중숙이 생겨나고, 상숙이 생겨나면 중숙이 멸하기 때문에 중숙의 생인(生因)이 하숙의 멸인(滅因)이 되고, 또한 상숙의 생인이 중숙의 멸인이 된다. 다시 말해 생의 원인[生因]이 멸의 원인[滅因]이 되어 동일한 원인이 생ㆍ멸의 작용을 갖는다고 하는 모순을 낳게 된다.
69)
『구사론』(고려장27,p.549중; 대정장29,p.68상; 권오민 역,p.598)에서는 사화(事火)로 되어 있다. 화대(火大) 즉 대종으로서의 불이 아닌 현실의 보통의 불을 말함.
70)
여기서 화계는 물을 구성하는 지ㆍ수ㆍ화ㆍ풍 4계 중의 화계를 말한다. 즉 솥의 물은 불과 화합함으로써 물속의 화대(火大)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수취(즉 현상의 물)는 점차 줄어 더 이상 속생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물이 없어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솥 밑의 불이 아니라 물 자체 내의 화계의 힘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물 자체의 힘의 변동에 의해 없어지게 된 것이다.
71)
“어떤 원인이 있어 제법을 소멸하게 하는 일은 없다. 법은 스스로 그렇게[自然] 소멸하는 것이니, 그것은 바로 허물어지는 성질[壞性] 때문이다. 스스로 그렇게 소멸하기 때문에 생겨나자마자 바로 소멸하며, 생겨나자마자 바로 소멸함으로 말미암아 찰나멸의 뜻이 [지극히 잘] 성립하는 것이다.”(『구사론』 제13권, 고려장27,p.549중하; 대정장29,p.68상; 권오민 역,p.598)
제34권
1)
여기서 ‘정법(正法)’은 정량부(正量部, Sammatīya)의 법을 말한다. 정량부는 상좌부-설일체유부-독자부 계통으로부터 분파한 부파(『이부종륜론』에 의함)로서, 규기(窺基)의 『술기』에 의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법이야말로 사류(邪謬)가 없는 심오한 정법(正法)으로, 올바른 지식의 근거[正量]가 되기 때문에 ‘정량부’라고 이름하였다. 이들의 잠주멸설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본론 제33권 주42)를 참조할 것.
2)
이 경문은 본론 제33권 주30)에서 4대종의 무기성을 논증하는 경증(經證)으로도 인용되고 있다.
3)
마납박가(māṇavaka). ‘젊은이’의 호칭으로, 유동(儒童)으로 번역됨.
4)
달은 일 겁 동안 머무는 것으로, 매일 매일 새로운 달이 뜨고 진다고 설하였다고 하여 ‘매일 매일 새로운 달이 존재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계경 중에서 ‘머문다’고 설하였다고 그것을 일시 가설(假設)한 것인 줄 모르고 진실로 머무는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5)
유부에 의하는 한 법(法)과 상(相)은 동의어이다. 하나의 법은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단일한 자상(自相)을 갖는 것으로, 만약 다수의 상의 기체(基體)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법이 아니다. 따라서 색신의 차별상은 바로 그것이 찰나멸하는 것임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6)
우유[乳]가 변하여 다음찰나 요구르트[酪]가 되었다고 하였을 경우, 그 색깔[顯色]은 동일하지만 맛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양자는 서로 다른 것이라고 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색신의 경우도 전후 찰나에 상(相)을 달리하므로(예컨대 마음이 찰나멸한다는 것은 정량부에서도 인정하는 바로서, 전 찰나에 기뻐하고 다음 찰나 슬퍼하였을 경우, 색신 또한 그에 따라 그 상을 달리한다) 찰나에 생멸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며, 따라서 다수의 시간동안의 지속이 전제가 되는 ‘행동(行動)’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7)
이는, 일체의 유위법이 찰나멸한다면, 업 역시 생겨나자마자 소멸하는 것인데 어떻게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외도(外道)의 힐난이다.
8)
이숙인 이숙과는 시간을 달리하는 인과관계로서, 업은 반드시 시간이 지난 후(順生受業의 경우 다음 생)에 결과가 초래된다.
9)
여기서 외도의 힐난이란, 앞서 제기된 “이미 일체의 행(行)은 다 찰나에 소멸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업은 결과를 초래하고, 결과는 업에 의해 초래된다[業果感赴]’는 이치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말한다.
10)
“[종자가 능히 제법을 낳는 원인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보편적 원인[總]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개별적인 특수한 원인[別]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 자체로서의 존재[自種類]일 뿐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본론 제12권 ‘경주의 종자설 비판’ 참조)
11)
여기서 두 가지 무심정이란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으로,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12권에서 논설하였다.
12)
비유자를 비롯한 경부의 종자(혹은 隨界) 상속설에 대해서는 본론 제12권 ‘경주의 종자설 비판’; 제18권 ‘상좌의 수계설 비판’ 등에서 산설(散說)하였다.
13)
볍씨와 벼 싹은 동일한 상속(相續)으로 서로에 계속(繫屬)되지만, 볍씨와 보리 싹은 각기 개별적인 상속으로 서로에 계속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업과 그 결과가 동일한 상속 자체의 차별이라면 서로에 계속되기 때문에 결코 업의 작자와 결과의 향수자가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14)
이상 비유자(譬喩者)의 종자 상속설을 비판하고, 찰나멸론에 따른 유부의 인과 상속설을 밝혔다. 이제 본 항의 결론으로 정량부(正量部)의 행동설(行動說)을 총괄적으로 비판한다. 즉 제행은 찰나에 소멸하기 때문에 다(多) 찰나에 걸친 행동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15)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고 하듯이, 달 자체는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지만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으로 인해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16)
신표업의 본질이 선악으로 분별되는 신체적 형태라고 할지라도, 전생의 업에 의해 선천적으로 타고나거나(이숙생) 후천적으로 길러진(소장양) 원래의 형색(무기성)이 단멸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인가?
17)
이는 경부사의 설이다. 앞에서 설한 것처럼 유부에 의하는 한, 사업(思業)에 의해 등기된 신표업의 본질은 신체적 형태[身形]이다. 이를테면 표업은 예비적 행위[加行, 즉 思業], 본격적 행위[根本業道], 그리고 그에 따른 부수적 행위[後起] 등으로 구성되어 일정한 시간에 걸쳐 일어나기 때문에 그 전체를 하나의 행위로 볼 수 없고, 오로지 근본업도가 성취되는 순간(살인의 경우 상대방의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하나의 행위가 완성되며, 이때 행위자의 신체적 형태가 바로 신표업의 본질인 것이다.(본론 제41권에서 상론) 그러나 후술하듯이 형태[形色]란 다만 색채[顯色]의 차별로써 드러나는 가설적 존재라고 주장하는 경량부에 따르는 한 신표업은 다만 의지 즉 사(思)가 신체를 매개로 하여 밖으로 표출된 것(그래서 경량부에서는 어표업과 함께 이를 動發勝思라고 한다)일 뿐이기 때문에 그 본질은 신체적 형태와 같은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마음의 작용인 의지이며, 미래의 결과 역시 다음에 설할 무표업(無表業)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 같은 의지종자[思種]의 상속 전변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본론 제35권에서 상론함)
18)
『구사론』 제13권(고려장27,p.549하; 대정장29,p.68중;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598-599). 이에 따르면 이하 경량부의 설이다. 즉 유부에서는 안처소섭색(眼處所攝色) 즉 색처의 본질로서 장ㆍ단ㆍ방ㆍ원 등의 형색(形色)과 청ㆍ황ㆍ적ㆍ백 등의 현색(顯色)을 상정하고 그 실재성을 주장하였지만(본론 제1권 ‘5境’), 경량부에 있어 형색이란 실재하지 않으며 다만 제 현색의 집합 차별에 의해 가설된 개념(prajñapti)일 뿐이다. 따라서 신표업의 본질은 신체적 형태가 아니라 ‘사(思)’ 즉 의지이며, 표업이란 다만 의지가 신체를 매개로 하여 밖으로 표출된 형태 즉 동발승사(動發勝思)에 지나지 않는다.
19)
즉 신근(身根)이 촉경(觸境)을 취할 때도, 안근(眼根)이 현색(顯色)을 취할 때에도 장ㆍ단 등의 상을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장단 등의 형색은 촉과 현색에 의해 일시 설정된 개념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20)
이를테면 동일한 물건이라 하더라도 거기서 견고함(이는 地大의 자성임)과 차가움이 느껴지면, 어느 한 성질은 다른 성질에 의해 일시 설정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개별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21)
만약 색채(현색)를 통해 형태(형색)가 알려지는 것으로, 형태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허공중에 나타난 광명이나 푸른 하늘의 형태는 어떠한가? 유부에 의하면, 현색에는 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ㆍ연기[煙]ㆍ구름[雲]ㆍ먼지[塵]ㆍ안개[霧]ㆍ그림자[影]ㆍ빛[光]ㆍ밝음[明]ㆍ어두움[闇]의 12가지가 있고, 형색에는 장(長)ㆍ단(短)ㆍ방(方)ㆍ원(圓)ㆍ고(高)ㆍ하(下)ㆍ정(正, 평평함)ㆍ부정(不正)의 여덟 가지가 있다.(본론 제1권 참조)
22)
화계(火界)와 따뜻함이 불가분리이듯이 현색과 형색도 그러하다면, 양적인 제한이 없는 허공의 광명을 보고서도 형색에 대한 지각을 일으켜야 한다는 힐난이다.
23)
예컨대 점들이 동시에 간격 없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을 때 면이나 길이의 관념이 생겨난다고 할 때, 그러한 관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점들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되듯이, ‘길다’는 등의 관념에는 반드시 형색극미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횃불의 비유로써 형색의 가유를 입증할 수 없다는 뜻이다.
24)
일체의 유위세계(세속)는 제법(승의)의 인연화합에 의해 이루어진 것(假立된 것)이라고 할 때, 승의의 제법이 실유라는 것은 상식적인 사실[極成]이다. 마찬가지로 ‘길다’는 등의 관념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마땅히 그것의 근거가 되는 형색극미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형색극미(승의)도, ‘길다’는 등의 관념(세속)도 모두 일시 설정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지식의 성립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만다는 뜻의 힐난이다.
25)
본론 제26권 ‘안(眼) 등 5근에 대한 상좌의 논란 비판’ 참조.
26)
경주가 제기한 ‘일색이근소취(一色二根所取)’의 허물에 대한 『구사론』(고려장27,p.549하; 대정장29,p.68중; 권오민 역,p.599)에서의 해명은 이러하다. “촉과 형색은 하나의 색취 중에 함께 존재한다. 따라서 [신근이] 촉을 취함으로써 [의식이] 능히 형색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촉[경] 중에서 신근이 직접 형색을 취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 않겠는가?” 즉 촉과 형색은 실유로서 하나의 색취 중에 구기하기 때문에 신근이 촉경을 취할 때 일어난 의식이 그곳으로 나아가 장단 등의 형색을 기억하는 것이지 촉경 중에서 신근이 직접 형색을 취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같은 과실은 없다는 것이다.
27)
『구사론』 제13권(고려장27,p.549하; 대정장29,p.68중; 권오민 역,p.600).
28)
『구사론』 제13권(고려장27,p.550상; 대정장29,p.68중; 권오민 역,p.601) 참조. 이는 경부사의 힐난으로, 극미설에 근거한 형색 실유설의 비판이다. 즉 구체적 물질[聚色]이 극미의 취합이라면, 그 때 극미에도 이미 길이 등의 형색이 존재한다고 해야 하지만(존재하지 않을 경우, 다시 말해 無方分일 경우 연장을 지닌 구체적 물질이 될 수 없다), 형색의 극미는 더 이상 극미가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지팡이는 긴[長] 형색을 지녔을지라도 절단하면 짧은[短] 형색이 되기 때문에, 각각의 형색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푸른색의 지팡이는 절단하더라도 누런색이 되지 않는다. 곧 장 단 등의 형색은 그 자체 극미의 자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현색극미가 배열되어 다른 것과 차별될 때, 그것을 일시 장단 등으로 언표한데 지나지 않는다. 즉 현색이 적집체는 어떠한 부분도 그 같은 현색의 상을 갖기 때문에 청색 등의 자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세간의 상식[極成]이지만, 형색의 적집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29)
질애(혹은 有對, sapratighāta)란 연장성, 혹은 공간적 점유성을 말하는 것으로, 물질(색법)은 동일 공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30)
예컨대 빛이나 밝음 등이 그러하다. 주21) 참조.
31)
형색극미를 인정할 경우, 그것은 마땅히 방분(方分, 부피)를 지녀야 하지만, 방분을 지니는 이상 그것은 사실상 극미가 아니다. 반대로 만약 방분을 지니지 않는다면 거기서는 어떠한 형색도 나타날 수 없어야 하는 것이다. 참고로 유부에서는 무방분의 극미설을 주장한다.(본론 제10권 ‘색법의 구생관계’ 참조)
32)
반론자의 경우 유방분의 극미를 주장하며, 따라서 현색의 극미는 청ㆍ황ㆍ적ㆍ백 등의 자성을 갖는다. 그러나 만약 현색극미와는 별도로 형색의 극미를 인정할 경우, 마찬가지로 장ㆍ단ㆍ방ㆍ원 등의 자성을 갖는다고 해야 하며, 그럴 경우 긴 극미, 짧은 극미 등이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는 힐난이다.
33)
그것은 밝음과 흰색과 빛 등이 화합하여 뒤섞인 채 식(識)을 낳았기 때문이다.
34)
상위인(相違因)이란, 어떤 법을 장애하여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원인으로, 눈이나 서리 등이 벼나 보리 등의 싹을 낳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푸른 항아리가 망치에 의해 깨어지면 형태는 파괴되지만 색깔은 파괴되지 않듯이, 형색과 현색은 그것을 장애하는 원인이 다르기 때문에 각기 개별적인 실체라는 뜻이다.
35)
얼굴의 색(顔色)은 마음과는 관계없이 일어나지만, 혹 어떤 경우 탐욕이나 분노에 따라 다르게 생겨나기도 한다는 뜻인가?
36)
가행의 마음에 따라 생겨난 얼굴색(현색)은 사실상 형색으로, 신업이라는 뜻이다.
37)
사업(의지)은 그 자체로서 드러날 수 없으며, 반드시 표업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참고로 경량부에서는 표업의 본질은 사업이다.(후술)
38)
‘차가운 물’이라고 할 때 ‘차가움’과 ‘물’은 다른 실체이듯이 현색과 형색의 경우도 역시 그렇다는 뜻이다.
39)
청ㆍ황ㆍ적ㆍ백 등의 색깔은 탐을 낳기도 하지만, 피고름이 엉켜 푸르죽죽하게 변한 시체와 같은 외계의 색을 관찰함으로써 그러한 탐심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이는 8해탈 중 첫 번째인 내유색상관외색해탈(內有色想觀外色解脫). 본론 제80권 참조.
40)
이상에서 중현은, 여러 찰나에 걸친 일련의 행동(行動)이 신표업의 본질이라는 정량부(正量部)의 주장을 비판하고 근본업도가 성취되는 순간의 신체적 형태[身形]라고 하였지만, 경주(經主) 세친을 비롯한 경량부에서는 다시 형색극미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그것은 다만 현색의 배열[안포]을 가설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경량부의 신표업 설에 대해 비판한다.
41)
『구사론』 제13권(고려장27,p.550중; 대정장29,p.68하; 권오민 역,p.602). 경량부에서는 업의 본질을 사(思) 즉 의지로 보기 때문에 신표업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내적인 의지가 신체상에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42)
즉 세간에서 말하는 ‘길다’는 등의 형태도 가설적인 것이고, 종자처럼 그것의 근거가 되는 극미(경부에 의하면 현색극미)도 가설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사실상 논의 자체가 불가능하다. 여기서 괴법론은 공견외도(空見外道) 즉 중관. 그들에 따르는 한, 유위세간도 공이지만 그것의 근거(인연)가 된 제법(諸法)도 공이기 때문이다.
43)
경부는 “현색이 바로 ‘길다’는 등의 형색이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현색이 실유라면 형색 역시 실유가 되어야 하며, 반대로 형색이 가유라면 현색 또한 가유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현색이 실유라면 형색은 가설적인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며, 현색이 가유라면 형색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는 뜻인가?
44)
『구사론』 제13권(고려장27,p.550중; 대정장29,p.68하; 권오민 역,p.602~603).
45)
『중아함경』 제27권, 「달범행경(達梵行經)」(대정장1,p.600상). 업의 본질[體]은 심소인 사(思,cetanā, 즉 의지적 작용)와 그것에 의해 외적으로 표출[動發]된 이른바 ‘사’의 소작(所作)인데, 전자를 사업(思業, cetanā-karma)이라 하고, 후자를 사이업(思已業, cetayitvā-karma)이라고 한다.
46)
『구사론』 제13권(고려장27,p.550중; 대정장29,p.68하; 권오민 역,p.603). 경주 세친의 또 다른 저술 『대승성업론(大乘成業論)』(대정장31p.785하)에서는 뭔가 행위 하려는 의식작용을 심려사(審慮思, gati-cetanā)라고 하였으며, ‘이와 같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심찰(審察)하는 의식작용을 결정사(決定思, niścayā- cetanā)라고 하였는데, 이 두 가지는 바로 본론에서의 ‘사유사’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것들에 의해 비로소 구체적 외적 행위 즉 표업인 동발승사(動發勝思, vidhavana-cetanā)가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작사사’에 해당한다.
47)
그럴 경우 신ㆍ어의 표업은 어디에 포섭시킬 것인가?
48)
즉 신업의 본질이 바로 ‘사’라고 할 경우, 의분(意憤, 사유사)과 살생하려는 의사(작사사)는 다같이 ‘사’의 차별로서 어떠한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일체의 업은 의업(사업)에 포섭된다고 해야 하며, 그럴 경우 신ㆍ어ㆍ의 3업의 차별은 이루어질 수 없다.
49)
여기서 ‘안근이 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종(宗)이란, 유부 비바사사를 말한다. 아비달마에서는 ‘본다[見]’는 사실을 관조로 규정할 것인가, 요별로 규정할 것인가? 에 따라 ‘견’의 주체를 달리 이해하였는데, 여기에는 근견설(根見說)을 비롯하여 식견설(識見說), 화합견설(和合見說) 등이 있었다. 본론 제6~7권 ‘견(見)ㆍ비견(非見) 분별’ 참조.
50)
경량부에는 과거로 낙사한 법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과거의 법인 ‘사’가 신업으로 하여금 작용을 일으키게 할 수 없다는 뜻이다.
51)
『잡아함경』 제38권 제1079경(대정장2,p.282) ‘謂有人 於夜時起隨覺(尋)隨觀(伺), 晝行其敎(表)身業口業.’ 참조.(괄호안은 新譯語)
52)
『중아함경』 제3권 「라운경(羅云經)」(대정장1p.436하) 참조.
53)
주41) 참조.
54)
경부사에 따르면 신ㆍ어업의 본질은 바로 ‘사(思)’이므로 “‘사’가 바로 형색이다”고 해야 하며, 형색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므로 “‘사’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고 설해야 한다는 힐난이다.
55)
여기서 ‘[앞서] 설한 4구의 이치’란 본론 제1권(‘5경’)에서 설한 현색과 형색에 관한 4구분별(어떤 색취는 현색만을, 어떤 색취는 형색만을, 어떤 색취는 두 가지 모두를 요별할 수 있으며, 어떤 색취는 두 가지 모두를 요별할 수 없다) 말한다.
56)
“청ㆍ황ㆍ적ㆍ백ㆍ그림자ㆍ빛ㆍ밝음ㆍ어두움은 오로지 현색(즉 색채)으로서만 알려진다.”(본론 제1권 ‘5경’ 참조.)
57)
본론 제1권(‘5경’)에 의하면, 어떤 이는 색경(色境)에 공계색(空界色)을 포함시켜 스물한 가지로 분별하였다. 즉 수미로산(수미산)은 북ㆍ동ㆍ남ㆍ서의 사면이 순서대로 금ㆍ은ㆍ폐유리ㆍ파지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사방의 공계는 각기 한 가지 현색(남섬부주의 경우 푸른 색:본론 제31권 ‘9산’ 참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空一顯), 어떤 이는 이 역시 하나의 독립된 현색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유부에 의하는 한 공계는 다만 명암을 본질로 하는 것일 뿐이다.
58)
여기서 ‘앞서 설한 경주의 힐난’이란 본론 제1권(주103) 참조.
59)
참고로 경주 세친을 비롯한 경부에서는 거울 등에 비친 영상[像色]의 무체설을 주장한 반면 유부에서는 그것의 실유를 주장하였다.(본론 제23권 ‘상색 실유논증’ 참조)
60)
거울에 비친 영상[像]에 높고 낮음의 형태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본체(즉 피사체)와 소의(거울)에 근거한 것이지 영상 자체의 형색이 아니라는 뜻이다.
61)
즉 앞에서 “그림자에 형색이 존재하지 않지만 본체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그 형태가 획득될 수 있다”고 설하여 본체에 근거하여 그림자의 형태를 추리한다고 하였다.
62)
‘소의’란 업 즉 활동의 근거가 되는 신체를 말하고, ‘자성’이란 활동 그 자체를 말하며, ‘등기’란 활동의 원인을 말한다. 즉 신업이나 의업의 경우, 몸이나 뜻이 바로 업이 아니지만, 말은 그 자체가 바로 업이기 때문에 자성업이다.(본론 제33권 ‘업의 본질과 종류’ 참조)
제35권
1)
무표업(혹은 무표색)에 대해서는 초품(初品)인 「변본사품」(본론 제2권)에서 논설하였다.
2)
『구사론』 제13권(고려장27,p.550중; 대정장29,p.68하;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604). 즉 별해탈율의를 수지하고 목숨을 다할 때까지 살생 등을 짓지 않는 것은, 서원이라는 어표업에 근거한 무표업 때문이 아니라 그 순간의 의식작용인 사(思)와 그것의 잠재력 즉 사종자(思種子)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유부의 무표색은 과거 대종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지만 과거의 제법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모든 무표색은 색법의 특상, 이를테면 공간적 점유성[礙性]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3)
무표업을 부정하는 경량부에서는 율의(善戒, 혹은 불율의)가 무표의 형태로 상속하는 것이 아니라 서원을 세울 때 일으킨 의지작용(思심소) 즉 ‘살생을 하지 않겠다’는 목적의식이 종자의 형태로 훈습되어 부단히 상속한다고 주장한다.
4)
즉 경량부가 주장하듯이 율의를 성취하게 되는 것은 수계(受戒)할 때 발한 아세야(意樂)가 상속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사(思) 심소가 소멸하는 순간 율의도 상실하게 되므로 그 때마다 다시 수계해야 한다는 힐난이다.
5)
수계의 서원은 반드시 스승과 대중들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스승(羯磨師)은 참석한 대중들에게 아무개가 수계한다는 사실을 고한 다음 수계자에게 수계의 가부를 세 번 묻는데, 이를 일백삼갈마(一白三羯磨)라고 한다.(본론 제41권 ‘선업도의 세 과정’ 참조)
6)
네 번째 업도의 중죄란, 10악업 중의 네 번째인 허광어(虛誑語) 즉 망어(妄語)를 말한다.
7)
무표업(혹은 색)의 첫 찰나는 그것의 소의가 된 지(地) 등의 4대종과 구생하며(다시 말해 현재의 대종에 근거하였으며), 제2찰나 이후의 무표는 그러한 과거 대종에 근거하여 찰나찰나 상속하며 현전한 것이기 때문에 경량부처럼 과거 대종의 무체설(無體說)을 주장할지라도 무리 없이 무표업을 수용할 수 있다는 해명. ‘무표업과 대종의 전후 관계’에 대해서는 후술함. 참고로 본론 제2권 ‘경주 세친의 무표색 이해 비판’에서도 이에 대해 해명하고 있다.
8)
본론 제2권 ‘색의 의미’ ‘경주 세친의 무표색 이해 비판’ 참조.
9)
즉 ‘변애’라고 하는 것은 현실상에서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색법의 규정으로, 극미나 무표색과 같은 것은 이 같은 뜻을 갖지 않지만, 아직 타지 않았거나 이미 탄 것도 땔감이라 하듯이 그러한 특성을 지닌 색법의 근거가 되거나(극미) 근거로 하기 때문에(무표색) 색법이라 할 수 있다.
10)
만약 무표색은 변애(變礙)와 표시(表示)의 특상을 갖지 않기 때문에 색이 아니라고 한다면, 과거의 식(識)은 이미 요별한 것이며, 미래의 식은 아직 요별하지 않은 것으로, 각기 요별의 특상을 갖지 않기 때문에 ‘식’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본론 제2권 주51 참조)
11)
『잡아함경』 제13권 제322경(대정장2,p.91하). 여기서 무견무대색은 바로 무표색을 말한다. 즉 경 후반에서 제6의식의 대상이 되는 무견무대의 법을 의식처럼 비물질[非色]이라 하지 않았으니(意內入處者 若心意識非色 不可見無對), 이는 바로 법처에 포섭되는 색 즉 무표색을 뜻한다는 것이다.(후술)
12)
현존 『상적유경』(『중아함경』 제7권)에는 직접적으로 이러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지 않다. 다만 ‘諸賢! 內意處及法意識知外色法, 是屬色陰.’(대정장1,p.467)이라는 말이 설해지고 있다.
13)
『잡아함경』 제13권 제322경(대정장2,p.91하). ‘法外入處者, 十一入所不攝, 不可見無對. 是名法外入處.’
14)
즉 앞에서 무표색은 색의 특성(變壞와 表示)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색이 아니라고 힐난하였으면서, 『상적유계경』에서 설한 ‘법처에 포섭되는 무견무대의 색온’을 역시 색의 특성을 갖지 않은 과거ㆍ미래의 안 등의 10처로 해석하는 등 앞뒤가 서로 모순되게 말하고 있다는 힐난이다.
15)
주11) 참조.
16)
원문은 ‘專率己見, 妄爲頌釋’이나 앞의 예에 따라 ‘송(頌)’을 ‘송(誦)’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17)
상좌는 유대색(有對色)을 다만 촉처에 포섭되는 색으로 이해하였지만, 경전 상에서 “손 등에 의해 촉대(觸對)될 때 바로 변괴하는 것을 색취온이라 이름한다”고 해석하고 있으며, 이러한 색취온에는 촉처로서 견고성 등의 4대종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시각의 대상이 되는 구체적인 물질(聚物)도 포함되기 때문에, 촉처만을 유대색이라고 외워 전한 경설도, 이에 대한 해석도 옳지 않다는 뜻이다.
18)
『구사론』(고려장27,p.551상; 대정장29,p.69중; 권오민 역,p.608). 유가사(Yogācāra) 즉 관행자(觀行者)가 색계 제4정려를 닦을 때, 정력(定力)에 의해 나타나는 경계가 무견무대색으로, 그것은 이를테면 청ㆍ황ㆍ적ㆍ백의 4현색과 지ㆍ수ㆍ화ㆍ풍의 4대종이 세계 중에 충만하다고 하는 8변처(遍處)의 색과 같은 것이다. 변처에 대해서는 본론 제80권에서 논설한다.
19)
『잡아함경』 제2권 제56경(대정장2,p.13중하).
20)
『구사론』 제13권(고려장27,p.551상; 대정장29,p.69중; 권오민 역,p.608).
21)
『잡아함경』 제8권 제229경(대정장2,p.56상), ‘云何有漏法? 謂眼色 眼識 眼觸 眼觸因緣生受 內覺 若苦 若樂 若不苦不樂…….’
22)
본론 제1권 ‘유루에 관한 비유사의 이설 비판’ 참조.
23)
유루 세간도에 대해서는 본론 제66권에서 논설함.
24)
『중아함경』 제2권 「세간복경」(대정장1,p.427). 여기서 유의(有依, aupadhika) 즉 물자를 시여하는 세간의 일곱 가지 복업이란, 비구에게 방사(房舍)나 전각을 시여하는 일, 방사 중에 좌상(座床) 내지 와구를 시여하는 일, 방사 중에 새로 지은 청정한 묘의(妙衣)를 시여하는 일, 방사의 대중에게 아침의 죽과 중식을 시여하는 일, 인민들로 하여금 공급하게 하는 일, 일기가 불순할 때에는 스스로 승원으로 나아가 공양하는 일, 비구들로 하여금 풍우한설(風雨寒雪)에 옷이 젖을까 근심하지 않게 하여 밤낮으로 편안히 선정사유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무의(無依, niraupadhika) 즉 시물 없이 짓는 출세간의 일곱 가지 복업이란, 여래, 또는 여래의 제자가 모처로 유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환희 용약심을 품는 일, 이곳에 오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환희 용약심을 품는 일, 이곳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환희 용약심을 품는 일, 청정심을 갖고 스스로 가 친견하는 일, 예경하고 공양하는 일, 삼귀의 하는 일, 금계(禁戒)를 받는 일 등이다.
25)
『잡아함경』 제36권 제997경(대정장2,p.261중)에 이와 유사한 게송이 실려 있다.: “어떻게 하면 밤낮으로 공덕이 항상 증장할 것인가? 원림에 과실나무를 심으면 나무그늘은 맑고 시원할 것이며, 다리나 배로써 강을 건너 주고 복덕의 집을 짓고, 우물을 파서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고, 객사를 지어 나그네에게 제공하면, 이와 같은 공덕은 밤낮으로 증장한다.”
26)
예컨대 음식과 관계된 뒤의 세 종류의 복업(주24참조)은 방사나 의복 등과는 달리 오래 지속하지 않는 것으로, 음식물을 시여한 후 염오심을 일으킬 경우 이미 시물(施物)도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복업이 증장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뜻이다.
27)
염오심이 일어난 상태에서 어떻게 일찍이 행한 선심의 복업이 증장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허물.
28)
즉 염오심이 일어난 상태에서도 일찍이 보시를 행하려고 할 때의 의지(阿世耶, āśaya, 意樂)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복업이 상속 증장한다는 뜻이다.
29)
여기서 공덕(guṇa)과 섭익(anugraha)은 예컨대 시여 받은 음식 등에 의해 4무량 등의 공덕을 닦고 자신의 몸을 이익 되게 하거나, 혹은 4무애해를 닦아 다른 이를 이익 되게 하는 것. 즉 그 같은 공덕 등에 의해 시여자의 상속에 복업이 증장한다.
30)
『구사론』 제13권(고려장27,p.551중; 대정장29,p.69중; 권오민 역,p.609).
31)
“무엇을 ‘전변’이라 이름한 것인가? 이를테면 상속 중에 전후의 성질을 달리함이다. 무엇을 ‘상속’이라 이름한 것인가? 이를테면 인과성인 삼세의 제행(諸行)이다. 무엇을 ‘차별’이라 이름한 것인가? 이를테면 무간(無間)에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공능을 갖는 것이다.”(본론 제12권 ‘경주의 종자설 비판’ 참조)
32)
승론(Vaiśeṣika)학파에서는 유부와 마찬가지로 분석적인 입장에서 세계의 근거로서 실체[實]ㆍ속성[德]ㆍ운동[業]ㆍ보편[同]ㆍ특수[異]ㆍ내속[和合] 등의 여섯 범주[句義]로 해석하며, 속성에는 다시 결합[合]ㆍ분리[離] 등 24가지가 있다.
33)
의지(思種子)의 상속의 전변과 차별은 단일한 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연꽃의 씨앗이 상속하다 싹 줄기 등으로 변화하며 전후 차별되듯이 찰나마다 변화(轉變)하다 특수한 변화(差別)를 일으켜 결과로서 나타나는 종자적 성격을 지닌 세력[勢用]을 의미한다는 뜻의 해명이다.
34)
즉 연꽃의 씨앗에서는 싹 줄기 잎 등이 순차적으로 생겨나지만, 사업에 의해 낳아진 온갖 신ㆍ어의 표업은 현생에 그 과보가 나타나기도 하고[順現法受業] 다음 생에[順生受業], 혹은 다음 생 이후에 나타나기도[順後受業]하기 때문에 종자의 비유는 동유(同喩)가 아니라는 뜻이다.
35)
종자가 땅이나 물 온도 등과 화합하여 싹 등을 낳고, 불과 화합하여 재 등을 낳듯이 일 찰나의 마음도 연(緣)에 따라 차별되는 결과를 낳는 것이라고 한다면, 선이나 불선 등도 연에 따라 애호할만한 것이 아닌 과보[非愛果]나 애호할만한 과보를 낳는다고 해야 한다는 뜻의 힐난이다.
36)
『구사론』 제13권(고려장27,p.551중; 대정장29,p.69중; 권오민 역,p.609). 경량부에 의하는 한 세간의 복이나 출세간의 복이 단절되지 않고 상속 증장되는 것은 선행된 의지[思]와 그것이 훈습된 종자가 미세하게 상속하여 전변ㆍ차별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선행을 하고자 생각[思]하여 그렇게 하였을 때 그러한 생각의 힘[思種子]이 잠재되어 그 후 그가 다른 연의 마음(즉 악심이나 무기심)을 일으킨다 할지라도 이전에 훈습된 사종자가 찰나 찰나에 걸쳐 미세하게 상속 전변하여 차별됨으로써 세간의 복은 증장되는 것이다. 궤범사(경부)는 이러한 종자의 힘을 자연적이고도 본래적인 힘 즉 ‘법이력’이라 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무표업과 동일한 개념이라는 뜻이다. 다만 유부처럼 무표를 주장할 경우, 출세간의 복업[無依]에는 마땅히 표업이 부재하기 때문에 무표색 또한 있을 수 없게 되는 논리적 난점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이다.(후술)
37)
복업의 증장은 보시 등을 행하려고 한 의지(思종자)의 상속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보시 등을 행하려는 의지와 무간에 염심이 생겨났을 경우, 복업을 증장시키는 힘으로서 염심과는 다른 별도의 법을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의 힐난이다.
38)
『구사론』 제13권(고려장27,p.551중; 대정장29,p.69중; 권오민 역,p.610).
39)
즉 다른 사람을 시켜 살생을 행하게 하였을 경우, 다른 사람에게 시킨 업(어표업)은 살생업에 포함되지 않을 뿐더러 그것이 살생을 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다만 예비적 행위(加行)이지 본격적인 행위(근본업도)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교사자가 살생의 업을 성취하게 되는 것은 바로 무표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40)
다른 사람을 시켜 살생을 행하게 하였을 경우, 그 때 이미 교사자의 몸속에는 그러한 예비적 행위(가행)의 의지력(思種子)이 훈습되어 상속하며, 나아가 청부자가 살생(근본업도)을 성취하는 순간 그것의 원인이 된 가행의 종자가 상속의 특수한 변화(전변과 차별)를 일으키기 때문에 살생업의 과보를 초래하게 된다는 뜻이다.
41)
『구사론』 제13권(고려장27,p.551하; 대정장29,p.69하; 권오민 역,p.611).
42)
즉 살생의 업을 그 때 바로 끝마쳤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초래한다고 할 수 없으며, 후회나 부끄러움 등의 선심은 괴로움의 결과를 초래할 리가 없기 때문에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고도 할 수 없다. 또한 좋고 좋지 못한 결과를 모두 받는다고 할 경우, 그것을 동시에 받을 수는 없으며, 좋은 결과는 현생에, 좋지 못한 결과는 내생에 받는다고 해야 하므로 하나의 업도가 순현수업ㆍ순생수업 등으로 잡란되는 과실을 성취하게 된다는 뜻이다.
43)
사람을 시켜 어미를 죽이게 하고 나서 ‘후회’라는 선심을 일으켰다고 해서 그에게 죄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누가 뭐래도 중죄에 저촉된다는 뜻이다.
44)
선정의 상태에서는 말하지 않고 몸을 움직이지도 않으며, 세속의 현실생활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에 8성도 중의 정어ㆍ정업ㆍ정명이 존재하지 않아야 하겠지만 그러한 상태에서도 그것의 무표가 여전히 존속하기 때문에 성도에 여덟 가지가 이루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정어 등의 무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정의 상태에서는 5성도만이 성취된다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45)
『구사론』 제13권(고려장27,p.552상; 대정장29,p.69하; 권오민 역,p.613). 여기서 ‘올바른 말을 발한다’는 것은 정어(正語)를, ‘올바른 작업을 일으킨다’는 것은 정업(正業)을, ‘의복 등을 구한다’고 하는 것은 정명(正命)을 말한다.
46)
『구사론』(고려장27,p.552상; 대정장29,p.70상; 권오민 역,p.613). 경량부에 의하면, 무루정에 들 때 의요(āśaya, 어떠한 목적을 성취하려는 의식으로, 10가지 심대지법 중 思cetanā와 欲chanda를 본질로 함)와 수승한 소의신(āśraya)을 획득하기 때문에 이러한 세력에 의해 출정 후에 능히 정어ㆍ정업ㆍ정명의 3정(正)을 일으킬 수 있다. 다시 말해 무루정에서 8정도를 모두 안립한 것은 다만 원인(무루정의 상태)상에 결과(출정한 후의 3정)의 명칭을 설정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유부에서는, 무루정 중에서는 3정이 존재하지 않지만 일찍이 획득하였던 그것의 무표가 존재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8정도를 모두 안립한 것으로, 이러한 무표를 원인으로 삼아 출정 후 3정(正)이 일어나기 때문에 무루정에서의 그것은 다만 원인 상에 결과의 명칭을 설정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무루정에 든 견도의 행자)는 이와 같은 종류의 무루의 무표를 획득하였기 때문에 출관(出觀)한 후에 이전의 세력에 의해 능히 세 가지 정도(正道)를 일으키고 세 가지 사도(邪道)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즉 원인 중에 결과의 명칭을 설정하였기 때문에 [무루정의] 무표에 어(語)ㆍ업(業)ㆍ명(命)의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구사론』, 앞의 책)
47)
즉 정견 등과 정어 등이 각기 개별적인 법으로서 무루도에 존재하는 것이듯이 계ㆍ정ㆍ혜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는 뜻이다.
48)
성도의 힘이 상속함으로 말미암아 신(身)ㆍ어(語)의 악행(즉 殺生ㆍ不與取ㆍ欲邪行과 虛誑語ㆍ離間語ㆍ麤惡語ㆍ雜穢語)을 능히 짓지 않는 것을 정어(正語)ㆍ정업(正業)이라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성도의 힘으로 말미암아 의(意) 악업(貪ㆍ瞋ㆍ邪見)을 짓지 않는 것을 정견(正見)이라 해야 하며, 나아가 정어 등이 무루성도와는 별도의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견 역시 그러해야 한다는 힐난이다.
49)
즉 계경에서 신(身)ㆍ어(語)의 악행을 막는 계(즉 정업ㆍ정어)를 혜(정견)와는 별도로 설하고 있기 때문에 각기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뜻이다.
50)
유부에서는 앞서 논설한 다섯 가지 논증 이외 세 가지 논증을 더 설하고 있다. 즉 계경(『잡아함경』 제13권 제322경)에서 “법처란 외처(外處)이고, 11법에 포섭되지 않는 법이며, 무견무대이다”고 만 하였을 뿐 ‘무색의 법’이라고 말하지 않은 까닭은 거기에 무표색이 포섭되기 때문이다.(說法處色證) 만약 무표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계(戒)를 받더라도 그 힘이 상속될 수 없으며, 그럴 경우 악심이나 무기심을 일으킬 것이므로 비구라고 이름할 수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수계 이후 그를 비구라고 하는 것은 계의 무표 즉 별해탈율의가 상속하기 때문이다.(說別解脫戒證) 경에서 “계는 강물을 막는 제방처럼 항상 상속하여 범계(犯戒)를 막기 때문에 제당계(堤塘戒)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제방에 상응하는 실체 즉 수계의 무표색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說戒爲堤塘證)
51)
유부의 무표업은 사실상 율의(戒)의 지속을 해명하기 위한 이론으로, 이는 수행도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즉 욕계에서의 계 즉 방비지악(防非止惡)의 힘을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라 하고, 색계 정려와 무루도를 닦을 때 생겨나는 그 같은 힘을 정려율의(靜慮律儀, 또는 定共戒)와 무루율의(혹은 道共戒)라고 한다.(본론 제36권 ‘세 종류의 율의’ 참조)
52)
무표색은 살생 등의 악업을 짓지 않겠다는 맹서, 즉 어표업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역시 ‘업’이라 이름한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악업 등을 짓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므로 ‘비업(非業)’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힐난이다.
53)
여기서 다섯 가지 시라(śila, 戒)는 불살생 등의 5계를, 일곱 종류의 시라는 불살생(不殺生)ㆍ불투도(不偸盜)ㆍ불사음(不邪婬)의 세 가지 신(身)율의와 불악구(不惡口)ㆍ불망어(不妄語)ㆍ불양설(不兩舌)ㆍ불기어(不綺語)의 네 가지 어(語)율의를 말한다. 즉 이 계경에서 이러한 5계 등을 이숙업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에 악업 등을 ‘짓지 않는 것(즉 非業)’도 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54)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2권 ‘무표색’을 참고할 것.
55)
이 게송은 범본이나 『구사석론』에는 부재하는 것으로, 현장 역본인 『구사론』 『순정리론』 『현종론』에서만 설해지고 있다.
56)
무표색은 무견무대이기 때문에 미세한 대종의 소조이며, 표색은 유견유대이기 때문에 거친 대종의 소조로서, 그 화합이 동일하지 않다.
57)
소의(āśraya)와 의지(saṃniśraya)의 관계는 친소(親疎) 정도의 차이로서, 전자가 생모라면 후자는 유모 정도의 의미이다. 즉 현재의 무표는 과거 표업이 일어날 때 구기한 대종을 소의(所依)로 하고, 현재 소의신 중의 대종을 의지(依止)로 삼는다.
58)
여기서 ‘전인’이란 무표의 전기인(轉起因)이 되는 과거의 대종으로서, 수레를 끄는 손(前註에 의하면 생모)에 비유된다. 즉 여기서 ‘전(轉)’이란 일으킨다는 뜻으로 무표를 직접 낳는 원인[能生因]을 말한다. 그리고 ‘수전인’은 무표의 의지(依止)가 되는 현재의 대종으로, 수레가 의지하는 땅(前註에 의하면 유모)에 비유된다. 즉 무표는 바로 이 같은 현재 소의신의 대종에 수반되어 일어나기 때문이다.
59)
예컨대 몸은 욕계에 있으면서 초정려에 들어 일으킨 무루업의 경우, 그것은 초정려의 대종소조이다. 즉 그것이 무루임에도 초정려인 까닭은 무루법은 어느 특정의 계지(界地)에 계속되지 않기 때문이며, 무루의 대종소조가 아닌 까닭은 무루의 대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그것이 대종소조인 까닭은 무루업은 소의신에 근거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60)
무표는 비록 색법이지만 비집적(非集積)의 존재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변애성(變礙性)을 갖지 않기 때문에 심ㆍ심소의 소의(즉 根)가 되지 않는다. 즉 무표색은 안(眼)ㆍ이(耳) 등의 5근과는 달리 감각을 갖지 않은 대종소조이다.
61)
본송에서 ‘역시 또한’이라고 말한 것은 무표업이 등류성인 동시에 찰나성의 존재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는 뜻이다. 여기서 ‘첫 번째[初] 무루법’이란 고법지인(苦法智忍)을 말함인가?
62)
신ㆍ어표업의 일곱 가지란, 불살생(不殺生, 혹은 離殺生)ㆍ불투도(不偸盜)ㆍ불사음(不邪婬)의 세 가지 신업(身業)과 불악구(不惡口)ㆍ불망어(不妄語)ㆍ불양설(不兩舌)ㆍ불기어(不綺語)의 네 가지 어업(語業)을 말한다.
63)
“[선정 중에서는] 마음이 오로지 단일한 것처럼 무표업의 소의가 되는 대종상에도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구사론』 제13권, 고려장27,p.553상; 대정장29,p.70중; 권오민 역,p.619) 즉 선정 중에서는 마음이 단일하여 차별이 없을 뿐더러 소의가 되는 대종에도 차별이 없기 때문에 세 가지 신업과 네 가지 어업의 무표는 동일한 대종소조이다.
64)
인등기(因等起, 혹은 轉因)의 마음이란 표업에 선행하여 그것의 원인이 되는 사(思) 등의 심ㆍ심소를 말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6권 ‘표ㆍ무표업을 낳는 두 가지 등기심’을 참조할 것.
65)
무표업의 본질인 무대(無對)의 미세한 대종은 전 찰나의 유대(有對)인 거친 대종에 의해 낳아지지 않는다는 뜻인가?
66)
즉 욕계 산지(散地)에서는 유정의 상속이 각기 달라 설혹 동일한 1구(具)의 대종에 의해 무표가 생겨났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를 파계할 때 일체의 계를 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산지에서의 7지(支)의 무표업이 각기 다른 대종에 의해 생겨나게 된 이유를 밝히면서 정지(定地)의 경우를 예(例)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참고로 유부 비바사사에 의하면, 살생 등 네 가지 극중죄(波羅夷法) 중 어느 하나를 버리더라도 일체의 율의를 버리지 않지만, 경량부에서는 일체의 율의를 버리게 된다고 주장한다.(본론 제39권 ‘별해탈율의 버림’을 참조할 것)
67)
명근 즉 목숨은 신체가 불구일 때에도 역시 그것의 의지처가 되듯이, 7지(支)의 무표 중 어느 한 가지가 결여되더라도(다시 말해 어느 한 가지를 어겼을지라도) 1구(具)의 대종은 그것의 소의가 될 수 있다는 뜻의 대론자의 해명.
68)
정지(定地)에서처럼 동일한 상속에서는 1구의 대종이 7지(支)의 생인이 되지만, 그 중 어느 하나를 결여할 경우 상속을 달리하는 것이므로 그 밖의 다른 지도 모두 버리게 된다. 따라서 신체의 부위 중 어느 한 부분을 결여하여 상속을 달리하더라도 그것을 임지하는 명근은 동일한 예(例)가 되지 않는다는 해명.
69)
예컨대 어떤 사람이 무탐에 근거하여 불살생계를 수지하였으면, 심신의 상속이 설혹 동일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다만 1구의 대종을 소의로 한다는 뜻이다.
70)
여기서 ‘본래의 형색[本形]’이란 천안이 일어나기 전의 본래의 육안을 말한다. 즉 이하 논설은 표색이 일어나면 본래 이숙신(異熟身)의 형색은 허물어진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것으로, 만약 허물어진다면, 이숙색은 일단 한번 끊어지고 나면 다시는 속기(續起)하지 않는다고 한 유부 비바사사의 종의에 위배되며, 허물어지지 않는다면 같은 몸의 같은 곳에 표업과 본래의 형색인 이숙신이라는 두 가지 형색이 공존하는 모순을 초래하게 된다.
71)
이를테면 손으로써 표업을 일으킬 경우, 손에는 새로이 생겨난 표업의 대종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본래의 손보다 커야 할 것이고, 온몸으로 표업을 일으켰을 경우 새로 생겨난 대종이 온몸에 두루 더해졌기 때문에 본래의 몸보다 커야 한다는 힐난이다.
72)
이는 『구사론』(고려장27,p.553상; 대정장29,p.70하; 권오민 역,p.620)상의 정설이다. 즉 이숙신은 꽉 막힌 것이 아니라 틈이 있어 마치 모래에 물을 부어도 그 부피가 증가하지 않듯이, 유표업을 일으키더라도 신체의 크기가 증가하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제36권
1)
여기서 불선근은 탐ㆍ진ㆍ치. 즉 무색계에는 세 가지 불선근과 무참ㆍ무괴를 끊어야 비로소 태어나기 때문에 상(上) 2계에는 불선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2)
제2정려 이상에서도 하지의 설식(舌識)을 빌려 말하는 경우가 있지만, 무색계 중에서는 신ㆍ어의 표업이 낳아지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곳에는 신ㆍ어의 율의(무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3)
이는 『구사론』(제13권, 고려장27,p.553중; 대정장29,p.70하;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621) 상에서 무색계에 무표색이 존재하지 않는 첫 번째 이유로 논설되고 있다.
4)
‘대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라고 하는 논거는 다만 유루의 무표업에만 적용될 뿐 무루의 무표업(즉 무루율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뜻의 힐난이다.
5)
이러한 네 종류의 원(遠)에 대해서는 본론 제20권 주 56)을 참조할 것.
6)
여기서 추(麤)ㆍ고(苦) 등의 행상이란, 하지(下地)의 수혹(修惑)을 끊기 위한 유루 세간도를 말함. 이를테면 자지와 바로 아래의 하지는 상지에 비해 고요하지 않기 때문에 거친 것[麤]이며, 미묘하지 않기 때문에 괴로운 것[苦]이며, 감옥의 두터운 벽처럼 자지에서 벗어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장애가 되는 것[障]이다. 이와 반대로 상지는 하지에 비해 고요[靜]하고 미묘[妙]하며 하지의 더러움을 떠난 것[出]이다. 이와 같은 관찰하는 것이 유루 6행관으로, 전자가 무간도라면 후자는 해탈도에 해당한다.(본론 제66권 참조) 즉 무색정에서는 제4정려를 하지로 관찰하지 직접적으로 욕계의 5온을 관찰하여 이러한 행상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행상원(行相遠)이다. 아울러 욕계법을 소연으로 삼는 일도 없다(所緣遠).
7)
즉 유여사는, 위의 세 정려에서는 선심은 저열하고 염심은 끊었기 때문에 선ㆍ염오의 표업이 일어나지 않지만 초정려의 마음을 빌려 무부무기의 표업을 일으키기 때문에 무부무기의 표업은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소의신의 계계(界繫)에 의해 표업의 유무를 논의한 것이다. 그러나 유부에서는 능히 표업을 일으키는 마음의 계계에 의해 표업의 유무를 논의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발표심(發表心, 표업을 발동시키는 마음)은 표업의 직접적 원인으로서 소의이지만, 신체는 오로지 간접원인으로서 의지(依止)일 뿐이며, 또한 표업의 성질은 표업 자체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자체는 무기임) 발표심에 의해 판단되기 때문에, 욕계와 초정려에만 표업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선설(善說)로 평취한 것이다.
8)
그 이유에 대해서는 후술함.
9)
즉 마승(Aśvajit, 또는 Assaji, 최초의 불제자로서 5비구 중의 1인)이 대범왕에게 ‘4대종은 어떠한 상태에서 완전히 멸진하여 없어지는 것인가?’라고 묻자 대범왕은 이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교란(矯亂)되어 말하기를, “나는 범천의 무리 가운데 대범으로, 자재신으로서 기세간의 작자이며, 유정의 화작자이며, 낳은 자이며 기르는 자로서, 바로 모든 존재의 아버지이다”고 자찬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그런 후 마승을 대중들 밖으로 불러내어 아첨하는 말[諂言]로써 부끄럽다고 사과한 후 부처님께로 가 물어보도록 하였다고 한다.(『장아함경』 제16권 『견고경(堅固經)』) 이 이야기는 『구사론』 제4권(권오민 역,p.179~180)에서도 인용되고 있다.(본론 제11권, 주67 참조)
10)
유부무기 가운데 표업을 일으키는 것은 외면적으로 일어나는[外門轉] 정의적 번뇌인 수소단의 번뇌로서, 욕계 유부무기에는 유신견ㆍ변집견과 이와 상응하는 무명이 있지만(본론 제49권 ‘98수면의 무기ㆍ불선 분별’ 참조), 이것들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견소단의 번뇌이기 때문에 표업을 일으킬 수 없다.(주19 참조)
11)
여기서 ‘좋은 약’은 자성선, ‘그것과 섞인 물’은 상응선, ‘우유’는 그것에 의해 낳아진 등기선을 말한다.
12)
“만약 이류(異類)의 마음(예컨대 불선심)에 의해 생겨난 득(得) 따위라면 그것이 어떻게 선을 성취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도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구사론』 제13권, 고려장27,p.554상; 대정장29,p.71중; 권오민 역,p.625) 곧 앞에서는 동류(同類)에 의한 등기선을 논설하였지만, 이하 염오(불선)나 무기 등의 이류(異類)에 의해 낳아지는 예외적인 경우에 대해 검토한다.
13)
궁극적으로 말한다면 유루법으로서 선 혹은 무기는 아무 것도 없으며 모두 불선이라 할 수 있다.
14)
예컨대 탐 등과 상응하는 마음에 의해 등기된 신ㆍ어업을 불선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마음에 의해 인기된 대종도 신ㆍ어업과 동일 찰나에 등기되기 때문에 불선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하는 힐난이다.
15)
이는 『구사론』(제13권, 고려장27,p.554상중; 대정장29,p.71중; 권오민 역,p.626)에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선정심에 수전하는 무표는 바로 선정에 있을 때의 작의(作意)에 의해 인생(引生)된 것도 아니며, 역시 또한 동류가 아니기 때문에 산심(散心)의 가행에 의해 인발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선(善)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힐난한데 대한 해명이다. 즉 경주 세친은, 행위작자의 마음은 애당초 업을 일으키고자 한 것이기 때문에 4대종이 선ㆍ불선을 성취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입정할 때 자연적으로 획득되는 무표 또한 애당초 가행위에서 그것(선)을 목적으로 입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6)
이는 『구사론』(고려장27,p.554상; 대정장29,p.71중; 권오민 역,p.627)상에서 ‘마땅히 힘써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고 한데 대한 힐난이다.
17)
인등기(hetu-samutthāna)란 표ㆍ무표업을 인기하는 심ㆍ심소를 말하는데, 업을 짓고자 할 때 현재의 마음(인등기심)은 미래의 업을 인기하기 때문에 ‘전인’이라 한 것이다. 곧 여기서 ‘전’이란 일으킨다[起]는 말이다. 그리고 찰나등기(tatkṣaṇa- samutthāna)란 업과 동시 병존하면서 업의 생기에 충족조건이 되는 심ㆍ심소를 말하는데, 업이 현전하는 찰나에 그것과 불상리의 관계로서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수전인’이라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업을 일으키고자 하는 마음이 인등기라면, 업이 일어날 때의 마음이 찰나등기이다.
18)
예컨대 ‘내일 소풍을 가겠다’고 인등기의 마음을 일으켰을지라도 막상 다음 날 의식을 상실하였거나 죽었을 경우, 현실적으로 업은 일어나지 않는데, 그것은 업과 동일찰나에 공존(수전)하는 마음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19)
주10)의 본문 참조. 견소단의 번뇌는 나쁜 스승이나 사설(邪說)ㆍ사교(邪敎)에 유도되어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지적 번뇌[迷理惑]이다. 따라서 견소단의 식은 표ㆍ무표업에 대해 오로지 전인이 될 뿐이다.(후술)
20)
『잡아함경』 제28권(대정장2,p.198하), 起於邪見已, 能起邪志ㆍ邪語ㆍ思業ㆍ邪命ㆍ邪方便ㆍ邪念ㆍ邪定.
21)
본론 제6권 ‘[18계의] 견소단ㆍ수소단ㆍ비소단 분별’ 참조. 참고로, 이하 『구사론』제13권(고려장27,p.554하; 대정장29,p.71하; 권오민 역629)에서는 “만약 [표색을] 견소단으로 인정하는 경우, 여기에는 어떠한 과실이 있을 것인가?” 하는 경부사의 힐난이 논설되고 있다. 즉 표업의 본질을 형색이 아니라 인등기의 심소(즉 思)로 이해한 경량부로서는 신ㆍ어표업도 당연히 견소단인 것이다. 이에 대해 유부에서는 아비달마 본론(本論)에서 ‘색은 견소단이 아니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표색은 명(明)ㆍ무명과 서로 모순되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해 색은 견도 즉 ‘명’에 의해 끊어지지 않고 함께 하며, 무명과도 불상리의 관계로서 함께 하기 때문에 견소단이 아니라고 하였다.
22)
즉 5식은 무분별이기 때문에 업을 발동시키는 전인이 되지 않으며, 외문전(外門轉) 즉 외면적으로 일어나는 식이기 때문에 수전인이 된다.
23)
『구사론』 제13권(고려장27,p.554하; 대정장29,p.71하; 권오민 역,p.630)에서의 제3구는 수소단인 3성(性, 선ㆍ불선ㆍ무기)의 의식이며, 제4구는 온갖 무루와 이숙생의 마음이다.(후술)
24)
원문은 ‘謂餘一切修所成識, 以修所成無分別故.’이지만, 내용상 ‘修所成’을 ‘修所斷’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25)
이 같은 이유에서 『현종론』 제19권에서는 ‘무루와 이숙의 마음은 두 가지가 모두 아니다(無漏異熟非)’는 송문을 ‘두 가지 모두가 아닌 것은 수소성의 식이다(俱非修所成)’으로 개작하였다.
26)
『구사론』 제13권(고려장27,p.554하; 대정장29,p.71하; 권오민 역,p.630). “일체의 무루와 이숙생의 마음은 전인도 수전인도 되지 않으니, 오로지 선정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며, 가행에 의하지 않고 임의대로(저절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무루의 마음은 오로지 선정 중에 존재하는 내문전이기 때문에 외문전인 신ㆍ어업을 일으키는 전ㆍ수전인이 되지 않는 것이며, 이숙의 마음은 전생의 업에 의해 인기되는 것으로 저절로 일어나기 때문에 고의적인 의지[故思]에 의해 일어나는 신ㆍ어업의 전ㆍ수전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7)
‘이숙생의 마음은 전인도 수전인도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바사(婆沙)의 정설이지만(『대비바사론』 제117권, 대정장27p.610중; 한글대장경122,p.401), 만약 “이숙생의 마음은 가행에 의하지 않고 임의대로 일어나기 때문에 전인도 수전인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생득선의 마음 역시 가행에 의하지 않고 임의대로 일어나기 때문에 표업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28)
『중아함경』 『용상경(龍象經)』(대정장1,p.608중). 여기서 ‘나가(nāga)’는 용(龍) 즉 세존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대중부(大衆部)에서는 유부와는 달리 부처님의 행(行)ㆍ주(住)ㆍ좌(坐)ㆍ와(臥)는 항상 선정 중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은 항상 선일뿐으로 무기심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부종륜론』 대중부 조(條)에 의하면, 불세존께서는 항상 무루정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지만, 중생의 요익(饒益)을 위해 일시 나투어 설한 것이 바로 설법[轉法輪]이다. 그러므로 여래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가 법의 시현이며, 말씀 역시 비록 세간의 일상적 언어[語]를 본질로 하지만, 어떠한 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여래의 말씀인 한 모두가 설법으로, 일미(一味) 평등의 요의(了義)이다. 이에 반해 유부에서는 불타의 모든 언설을 설법이라 말할 수 없고, 법의(法義)와 관계된 말씀만이 설법이지만, 설법 자체는 진실이 아니며, 그것이 드러내고자 한 경계 즉 자내증만이 진실이라고 하였다.
29)
그러나 『구사론』(고려장27,p.555상; 대정장29,p.72상; 권오민 역,p.631)상에서의 비바사사의 해석은 이러하다. “이 경설은 부처님의 뜻이 만약 산심을 즐거워하지 않으실 경우 네 가지 위의(威儀)에서도 능히 항상 선정에 들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그렇지만 [선정 이외] 다른 상태(즉 산심)에서는 위의로(威儀路)와 이숙에 의해 생겨난 마음과 통과심(通果心)을 일으키는 일이 없지는 않다.” 부처님은 뭔가 만드는 기술 즉 공교처의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 없기 때문에 4종의 무부무기 가운데 세 가지만을 논설한 것이다.
30)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邊執見)은 견소단의 혹으로서 유부무기이기 때문이다. 즉 앞서 견소단의 마음은 오로지 전인이 될 뿐 수전인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31)
예컨대 별해탈계를 받는 최초의 순간은 비록 선심일지라도 제3갈마 시에 악이나 무기심이 일어날 경우, 이 같은 마음과 동시에 별해탈의 계체(戒體)를 획득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32)
『구사론』 제13권(고려장27,p.555상; 대정장29,p.72상; 권오민 역,p.632).
33)
『구사론』(같은 책).
34)
별해탈율의(prātimokṣa saṁvara, 혹은 波羅提木叉로도 음사함)란 구족계를 받을 때 각각의 계법(戒法)에 대해 획득하는 무표로서, 각각의 계법에 따라 각기 별도의 해탈을 얻기 때문에 ‘별해탈’이라고 이름하였다. 예컨대 불살생계는 살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불투도계는 도둑질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이러한 계는 오로지 욕계에서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에 ‘욕전의 계’라고 하였다.
35)
정려생율의(dhyāna saṁvara, 定共戒라고도 함)는 색계의 정려를 닦을 때, 혹은 정려에 의해 생겨나는 방비지악(防非止惡)의 힘을 말함.
36)
도생율의(anāsrava saṁvara, 道共戒 혹은 無漏律儀라고도 함)는 무루성도를 획득할 때 생겨나는 방비지악의 힘을 말함.
37)
필추율의(bhikṣu-saṃvara, 혹은 比丘戒)란 출가남성이 수계할 때 획득하는 무표를 말함. 필추니율의(bhikṣuṇī-saṃvara, 혹은 比丘尼戒)는 출가여성의 계. 정학율의(śikṣamana-saṃvara, 혹은 式叉摩那戒)는 비구니가 되기 위한 1년 간의 시험기간 동안 배우는 불음(不婬)ㆍ부도(不盜)ㆍ불살생ㆍ불허광어ㆍ불음주ㆍ불비시식(不非時食)의 6계. 근책율의(śrāmaṇera-saṃvara, 혹은 沙彌戒)는 20세의 비구가 되기 전까지의 10계. 근책녀율의(śrāmaṇerika-saṃvara, 혹은 沙彌尼戒)는 비구니가 되기 전까지의 10계. 오파색가율의(upasāka-saṃvara, 혹은 近事律義, 優婆塞戒)는 재가남성의 5계. 오파사가율의(upāsikā-saṃvara, 혹은 近事女律儀, 優婆夷戒)는 재가여성의 5계. 오파바사율의(upavāsa-saṃvara, 혹은 近住律儀)는 재가의 남성과 여성으로서 하루 낮밤을 기한으로 수지하는 8계이다. 이 중의 앞의 다섯 가지 율의는 이악행(離惡行)과 이욕행(離欲行, 즉 성적인 청정인 梵行)을 닦는 보특가라의 율의이며, 오파색가(근사)와 오파사가(근사녀)율의는 이악행은 닦을 수 있지만 이욕행은 닦을 수 없는 보특가라의 율의이다. 즉 그들은 욕사행(欲邪行)은 떠났으나 비범행은 떠나지 않은 자들이다. 그리고 오파바사(근주)율의는 악행과 욕행을 전혀 떠날 수 없는 자들의 율의이다.(후술)
38)
필추니, 근책녀와 정학, 근사녀의 율의는 필추, 근책, 근사의 율의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 이는 다만 그것을 수지하는 이의 형색(즉 여근)에 따라 그 명칭만이 바뀐 것이다.
39)
이는 금전 한 푼에 한 푼을 더하면 두 푼이 되고, 다섯 푼에 다섯 푼을 더하면 열 푼이 되듯이 근사의 5계에 5계를 더하여 근책의 10계가 되고, 근책의 10계에 240계을 더하여 필추의 250계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같은 불살생계라도 근사율의의 그것은 다른 율의의 그것과는 그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10계나 250계를 구족할 때 근책이나 필추율의를 성취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다시 말해 우바새의 불살생계와 사미ㆍ비구의 불살생계는 계 자체로서는 동일한가, 동일하지 않은가? 하는 물음이다.
40)
필추의 불살생율의와 근책ㆍ근주의 불살생율의는 수계의 인(因)과 연(緣)이 다르다. 즉 5계(근사계)ㆍ10계(근책계)ㆍ구족계(필추계) 등의 계를 받으려는 의요(意樂) 즉 목적의식이 율의의 인(因)이라면, 온갖 종류의 교만과 방일을 떠나는 것이 연(緣)이다. 혹은 수계의식에 따른 제반 절차가 율의의 외적인 연이다. 이를테면 5계의 근사는 한 명의 화상(和尙, upādhyāna, 즉 授戒師)이 필요한 반면, 근책은 화상과 아사리(阿闍梨, ācārya, 軌範師 또는 敎授師)가, 필추는 3사(師) 7증(證)의 10명을 필요로 한다. 즉 근사ㆍ근책ㆍ필추율의에 모두 이살생(離殺生)ㆍ이음주(離飮酒) 등의 율의가 갖추어져 있을지라도 그것은 이러 저러한 율의를 받고자 하는 마음(즉 內因)과 율의를 주는 계사(戒師)의 수(즉 外緣) 등이 다르기 때문에 설사 동일한 계목(戒目)이라 하더라도 그 체(體)는 다르다는 것이다.
41)
높고 넓은 평상에 앉는 것[高廣牀座, 臥坐高廣嚴麗牀座의 준말] 등에서 떠난 근책의 불살생계와 그것이 허용된 근사의 불살생계는 다를 수밖에 없다.
42)
즉 이전에 근사율의를 받고 그 뒤에 근책율의 내지 필추율의를 받더라도 앞의 근사 내지 근책을 버리는 것이 아니며, 또한 반대로 필추율의를 버렸다고 해서 반드시 근책ㆍ근사율의마저 버리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율의는 각기 개별적인 것이지만 동일한 소의신에 동시에 구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43)
이는 상위의 계를 획득한 자도 하위의 계를 받아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난문으로, 이에 대해서는 어떤 이는 획득할 수 없다고 설하고, 유여사는 역시 획득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44)
근사는 간절하고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 진실된 말로 “나는 바로 근사입니다. 원하건대 존자께서 기억하시어 자비로써 호념하소서’라고 스스로 일컬으면, 이때 바로 근사율의를 낳게 된다.(본론 제37권 ‘근사율의가 일어나는 시기’참조) 곧 근책이나 필추가 근사율의를 획득할 수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이 같은 말을 해야 하지만, 근책(사미)이나 필추(비구)가 스스로 근사(우바새)라고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힐난이다.
45)
필추 역시 계사(戒師)에 대해 ‘오로지 원컨대 내가 바로 필추이고 근책이며 역시 또한 근사임을 깨달아 알게 하소서’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46)
즉 앞의 두 율의는 필추율의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필추가 동시에 근책이고 근사라고 해도 과실이 없다는 뜻이다.
47)
원문은 ‘如佛爲栗氏子略說學處有三’이지만, 다른 판본이나 『현종론』, 그리고 바사(婆沙)에서는 ‘如爲佛栗氏子……로 되어 있다. 율씨자(혹은 불율씨자)는 발기자(跋耆子, Vrijiputra, Vajjiputta). 그는 250가지라는 많은 학처(學處, 계 혹은 별해탈율의)를 두려워하여 속퇴(俗退)하고자 하였는데, 부처님께서는 그를 달래기 위해 증상의 계ㆍ정ㆍ혜의 세 가지 학처만을 설하였다.(『대비바사론』 제46권, 대정장27,p238상; 한글대장경119,p.489 참조)
48)
부파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필추(비구)의 별해탈율의는 바라이법(波羅夷法, 네 가지)ㆍ승잔법(僧殘法, 열세 가지)ㆍ부정법(不定法, 두 가지)ㆍ사타법(捨墮法, 서른 가지)ㆍ파일제법(波逸提法, 아흔 가지 정도)ㆍ회과법(悔過法, 네 가지)ㆍ중학법(衆學法, 백 가지 정도)ㆍ멸쟁법(滅諍法, 일곱 가지)의 여덟 가지 조항, 대략 250계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승잔’이란 성적인 악습이나 승가를 분열시키려는 행위 따위를 말하며, ‘부정’이란 여성과의 관계가 의심스러운 행위를, ‘사타’란 의복이나 그 밖의 물품의 소유에 대한 위법을, ‘파일제’는 여러 가지 소재(小罪)를, ‘회과법’은 식사에 관한 비위를, 중학법은 식사나 탁발, 설법 등 그 밖의 제반 예의에 관한 세칙을, 그리고 ‘멸쟁법’이란 승단 내의 싸움을 진정시키는 방법에 관한 규정이다.
49)
이는 시라(śīla,戒)를 어원 √śī(시원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간주하여 śīta 즉 ‘청량’의 뜻으로 이해한 어원적 해석[訓釋]이다.
50)
무표업은 신ㆍ어표업에 의해, 표업은 사(思)심소에 의해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소작(所作)이라고도 이름한다. 따라서 별해탈율의는 이러한 소작을 본질로 삼기 때문에 ‘업’이라고도 이름한다는 것이다.
51)
본론 제35권 ‘무표의 이명(異名)’ 참조. 이 논설은 “앞서 무표를 역시 ‘부작(不作)’이라고도 이름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어떠한 까닭에서 무표를 소작 그 자체라고 설하는 것인가?”에 대한 해명으로, 무표는 사업과 표업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의미에서 ‘소작’이라는 이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구사론』 제14권, 고려장27,p.556중; 대정장29,p.73상; 권오민 역,p.640 참조)
52)
“악계(惡戒)의 상속을 능히 막고 능히 소멸하기 때문에 율의(saṁvara, 護 혹은 調伏로 번역되기도 함)라고 이름하였다.”(본권 ‘세 가지 무표업-총설’ 참조) 즉 신ㆍ어업을 능히 방호(防護)하기 때문에 ‘율의’라고도 이름하는 것이다.
53)
수계의 첫 찰나 닦아야 할 바가 완전히 닦아졌을 경우, 이전에 수계하기를 희구하였던 사(思)심소는 그러한 첫 찰나의 표ㆍ무표업을 연(緣)으로 하여 상속하기 때문에 최초 찰나의 별해탈율의를 ‘업도’라고 이름한 것이다. 즉 여기서 업도란 사심소[思業]가 노니는 길[所遊路, 즉 道]이라는 뜻이다.
54)
여기서 8중은 필추(비구, 20세 이상의 출가남성)ㆍ필추니(비구니, 20세 이상의 출가여성)ㆍ정학(正學, 식차마나, 비구니가 되기 직전의 2년 간)ㆍ근책(사미, 20세 미만의 출가남성)ㆍ근책녀(사미니, 20세 미만의 출가여성)ㆍ근사(오파색가 혹은 우바새, 재가 남자신자)ㆍ근사녀(오파사가 혹은 우바이, 재가 여자신자)ㆍ근주(鄔波婆娑, 하루 낮밤 동안의 단기 출가자) 주37) 참조.
55)
정려율의와 도생율의가 수심전법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본론 제15권 ‘방론-심수전법에 대하여’에서, 별해탈율의가 수심전법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본론 제2권 ‘무표색’에서 논설하였다.
56)
제1구(무루율의이면서 단율의가 아닌 것)는 미지정의 9무간도를 제외한 그 밖의 무루율의이다. 제2구(단율의이면서 무루율의가 아닌 것)는 미지정의 9무간도에 근거한 유루율의이다. 제3구(무루율의이면서 단율의인 것)는 미지정의 9무간도에 근거한 무루율의이다. 제4구(무루율의도 아니고 단율의도 아닌 것)는 미지정의 9무간도를 제외한 그 밖의 유루율의이다.
57)
『증일아함경』 제12권(대정장2,p.604중), 身行爲善哉, 口行亦復然, 意行爲善哉, 一切亦如是.
58)
『잡아함경』 제11권 제277경(대정장2,p.75하); 동 제43권 제1170경(동p.313상)참조.
59)
의ㆍ근율의는 무표색을 자성으로 하는 예(例)의 율의가 아니라 정지ㆍ정념을 본질로 하는 의식작용이다. 이는 즉 혜(慧)심소에 의해 의ㆍ근을 잘 억념하므로써 악을 방지하기 때문에 ‘율의’라고 하는 명칭을 일시 설정한 것일 뿐이다.
60)
이에 반해 『구사론』(제14권, 고려장27,p.557상; 대정장29,p.73하; 권오민 역,p.644)에서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율의는 다같이 정지(正知)와 정념(正念)을 본질로 한다”고 말하고 있다.
61)
별해탈율의에 머물면서 그것을 버리지 않는 한 그러한 율의의 무표는 항상 법구득(法俱得)에 의해 현재의 것이 성취되며, 첫 찰나 이후에는 법후득(法後得)에 의해 과거의 무표도 역시 성취되지만, 법전득(法前得)에 의해 미래의 무표가 성취되는 일은 없다. “수심전이 아닌 색은 그 세력이 미약하고 저열하기 때문에 산심(散心)에서의 무표(즉 별해탈율의)는 미래의 무표를 성취하는 일이 없다.”(『구사론』, 고려장27,p.557중; 대정장29,p.73하; 권오민 역,p.645) 즉 아직 마음의 소연이 되지 않는 불수심전의 색은 미약하여 법전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62)
즉 후찰나에도 아직 별해탈율의를 버리지 않았다면 바로 그 때 후찰나의 무표를 성취한다.
63)
정려율의는 수심전으로서 그 세력이 강하기 때문에 법전득(法前得)에 의해 미래의 무표를 성취하는 것이다.
64)
율의와 불율의는, 일정기간 이러 저러한 일을 하겠다고 맹서함으로써 생겨난 힘으로서 악계(惡戒)의 상속을 막는 것을 율의라 하고 선계(善戒)의 상속을 막는 것을 불율의라고 하는데 반해, 맹서하지 않고서 어떤 때에는 악을, 어떤 때에는 선을 행하는 것을 처중(處中) 즉 ‘중에 머무는 것’이라고 한다. 예컨대 비하라나 솔도파 승가라마를 조성하거나 제다(提多, 사당)에 예배하고 향을 사루고 꽃을 뿌리는 등은 처중의 무표를 낳는다.(『입아비달마론』 상권, 한글대장경176,p.520)
65)
법보(法寶)의 『구사론소』(제14권)에 의하면, ‘쫓아 획득하는 것’은 과거의 무표를 획득하는 것이고, ‘거슬러 획득하는 것’은 미래의 무표를 획득하는 것이다.
66)
유부ㆍ무부의 표업은 그 힘이 저열하여 과거와 미래의 표업을 성취할 수 없다면, 이를 낳은 마음 등도 그 힘이 저열하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의 마음을 능히 성취할 수 없다고 해야 한다는 힐난이다.
67)
이 점에 있어 율의와 그 명칭이 동일하다. 원문에는 ‘능히 업사를 창달하고(能暢業思)’로 되어 있으나 앞서 ‘율의의 이명’에서의 논설(初防身語, 暢思業故)애 따라 ‘사업’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주53) 본문 참조.
68)
유의의 7복(본론 제35권 주24 참조)은 아무리 저열한 의지[思]에 의해 일어났을지라도 무표가 존재하며, 또한 아무리 저열한 의지라고 할지라도 유정의 목숨을 끊는 등의 10악업을 성취하는 경우에는 무표을 낳는다.
69)
역생성자란 번뇌는 끊기 어렵고 성도는 익히기 어렵기 때문에 몇 번이고 생을 바꾸어 수행하는 예류과 등의 경생(經生)의 성자를 말한다. 즉 그는 욕ㆍ색계에 태어날 때에는 도구계(道俱戒, 도생율의)ㆍ정구계(定俱戒, 정려율의)의 무표를 성취하며, 무색계에 태어날 때는 오로지 도구계의 무표만을 성취한다. 욕계에 태어나면서 모태에 처해 있을 때(표업을 아직 낳지 않았을 때)와, 의요의 종식으로 말미암아, 가행을 버렸기 때문에 기한(限勢)을 넘겨버렸다는 세 가지 인연에 의해 이전에 생겨난 표업이 사기(捨棄)된 때에는 오로지 과거ㆍ미래의 정구계와 도구계만을 성취할 뿐이다.
70)
이를테면 율의ㆍ불율의에 머물면서 선ㆍ불선업을 지을 때에는 표ㆍ무표업을 모두 성취하며(제3구), 태장(胎藏) 중에 머물 때는 두 가지 모두를 성취하지 않는다.(제4구)
제37권
1)
미지ㆍ중간ㆍ4근본의 여섯 가지 정려지를 6무루지라고 하며, 성자는 반드시 이 중 어딘가에 들어 도공계(道共戒), 즉 도생율의를 획득한다. 네 가지 근본정려에 대해서는 본론 제77권에서, 미지정과 중간정에 대해서는 본론 제78권에서 상론한다.
2)
정생율의가 만약 선정의 경지[定地, dhyāna bhūmi]에서 획득된다고 할 경우, 선정의 경지는 유ㆍ무루를 모두 포섭하는 애매한 표현으로 무루정을 획득한 이는 도생율의를 획득하기 때문에, 정생율의를 획득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유루의 4정려’라는 보다 구체적 술어로써 앞의 사실과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현종론』(제19권)에서는 “정생율의는 선정의 단계에서 획득된다(定生得定地)”는 『구사론』 본송을 “정생율의는 정려에서 획득된다(定生得靜慮)”로 개작하였다.
3)
즉 비구ㆍ비구니ㆍ정학의 율의는 반드시 승가(saṃgha) 즉 교단의 승인에 의해 획득되며(본론 제38권의 주38의 본문 참조), 그 밖의 사미ㆍ사미니ㆍ우바새ㆍ우바이ㆍ근주의 율의는 각기 개별적인 스승[阿闍梨]의 가르침에 의해 획득된다.
4)
『십송률(十誦律)』 제56권(대정장23,p.410상) 참조.
5)
이 같은 방식은 초기교단에서의 전형적인 츌가양식이다. 야사(Yaśas, 名聞 善稱으로 번역됨)는 불타성도 직후 친구 50명과 함께 출가하였으며, 그의 부모는 최초의 우바새, 우바리가 되었다. 이 기사는 『사분율』 제32권(대정장22,p.789중)와 『오분율』 제15권(동p.105 상)에 나온다.
6)
여기서 다섯 필추는 불타와 함께 고행하였던 교진여(憍陳如, Kauṇḍinya)ㆍ마하남(摩訶南, Mahānāman)ㆍ발제(跋提, Bhadrika)ㆍ바사파(婆沙波, Vāṣpa)ㆍ아설시(阿說示, Aśvajit, 馬勝으로 번역됨). 이 기사 역시 『사분율』 제32권와 『오분율』 제15권에 나온다.
7)
소타이(Sodāyīn, 善施로 번역됨)는 총명하여 7살에 부처님의 질문에 답하여 20세가 되지 않고 구족계를 받았다. 즉 부처님께서 일찍이 그에게 ‘너의 집은 어디 있느냐’라고 묻자 ‘3계에 집이 없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구사론기』 제14권, 대정장41, p.221하)
8)
대생주, 즉 마하파사파제(摩訶波闍波提, Mahāprajāpatī)는 불타의 이모로서 최초의 비구니. 부처님은 아난다를 그녀에게 보내 8존중법(또는 敬戒)을 설하게 하였다. 첫째, 백세의 비구니라도 새로이 수계한 비구에게 예경할 것. 둘째, 비구를 흉보거나 꾸짖지 말 것. 셋째, 비구의 과실을 열거하여 설하지 말 것. 넷째, 비구중으로부터 계를 받을 것. 다섯째, 승잔죄(僧殘罪, 성적 악습 등)를 지었었을 때는 반달 동안 대중에게 참회할 것. 여섯째, 반달마다 비구중에게 가르침을 청할 것. 일곱째, 비구중에 따라 안거할 것. 여덟째, 안거 후 비구중에게로 가서 자자(自恣)할 것.
9)
법수니(Dharmadinnā)는 매우 아름다운 부인으로, 승가에 가 수계하려고 하였으나 도중에 난리가 일어나 이르지 못하자 승가에서 한 명의 비구니를 보내 수계하게 하였다.
10)
수계시 승가의 대중은 원칙적으로 10인(3師 7證) 이상이 되어야 하나 변방의 나라에는 비구의 수가 적기 때문에 5인으로도 가능하다. 여기서 지율자(vinaya- dhara)란 율의 봉지자로서, 수계시 계율의 작법을 담당하는 이를 말하는데, 5명 중에는 반드시 한명의 지율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지율자를 다섯 번째 사람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이다.
11)
‘60(『구사석론』에서는 16)의 현부’는 미상. 혹설에 의하면 야사의 친구 60인, 혹은 화지부(化地部)의 대중. 『구사논기』에서는 ‘현화중부(賢和衆部)가 모여 있는 곳에 부처님이 아라한을 보내 삼귀의를 설하게 하였다’고 해설하고 있다.
12)
이는 앞서 근주율의의 기한이 하루 낮밤인 이유를 물은 데 대한 반문으로, 수계의식과 관련된 절차의 의미를 물은 것이다. 여기서 ‘차난’은 비구(혹은 비구니)가 되기에 어려운 점이 있는지를 묻는 것이고, ‘백사갈마(혹은 一白三羯磨)’는 수계할 때 갈마사(羯磨師)가 참석한 대중들에게 아무개에게 수계한다는 사실을 고한 다음, 수계의 가부를 세 번 묻는 형식의 작법을 말한다. 수계의식에 절차에 대해서는 본론 제41권 ‘선업도의 세 과정’에서도 약술되고 있다.
13)
그럼에도 어떠한 이유에서 부처님께서는 그가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는 것을 막았던 것인가? 그것은 부처님만이 아는 것이지 다른 이들이 헤아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14)
반달 동안 근주계를 수지한다고 해도 매일 아침 8계를 거듭 받아야 하는 것으로, 매일의 낮밤이 거듭되어 반달이 되고 한달이 된다는 뜻이다. 이는 『구사론』(제14권, 고려장27,p.558하; 대정장29,p.74하;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 2002, p.655) 상에서 근주가 반드시 하루 낮밤을 기한으로 하여 별해탈율의를 수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경부(經部)의 견해를 언급하기 위한 전제로 인용되고 있다.
15)
다시 말해 햇볕이 비치는 상태를 낮이라 하고, 어두움의 상태를 밤이라 하지만, 4대주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하루 낮밤은 결정적으로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16)
『구사론』 제14권(고려장27,p.558하; 대정장29,p.74하; 권오민 역,p.655). 즉 비구 등 7중(衆)의 율의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를 기한으로 하여 수지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겠으나, 근주율의가 하루 낮밤을 기한으로 수지되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유부에 의하면 이 같은 시간은 계경에 설해진 것으로 결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경량부에 따르면, 시간이란 결정된 것이 아니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틀 혹은 열흘 낮밤을 수지한다 할지라도 아무런 허물이 되지 않는다. 즉 경량부에서는 교화하기 어려운 자는 율의를 하루 이상 수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경에서 그렇게 말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후설) 이는 경설을 세간상식에 위배되지 않게 해석하려는 경량부 특유의 논의형식이다.
17)
『구사론』(고려장27,p.558하; 대정장29,p.74하; 권오민 역,p.655-656).
18)
즉 불율의는 지자(智者)가 혐오하는 바이기 때문에 하루 낮밤동안 악행을 저지른다고 하는 맹서를 받을 스승은 없다는 뜻이다.
19)
이는 『구사론』 제14권(고려장27,p.559상; 대정장29,p.75상; 권오민 역,p.656-657)에서 “만약 하루 낮밤 동안의 기한을 정하여 불율의를 받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기한을 정하여 스승에 대해 ‘나는 목숨을 다할 때까지 결정코 악계를 받겠습니다’고 하는 일도 역시 없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형색(形色)을 다할 때까지 불율의를 획득하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는 힐난에 대한 변명이다.
20)
이는 『구사론』 제14권(고려장27,p.559상; 대정장29,p.75상; 권오민 역,p.657)에서 경부사(經部師)가 “선한 율의에 무표라고 이름할 만한 개별적 실체성[實物]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은 불율의도 역시 마땅히 실체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악과 불선을 짓고자 하는 의요(意樂)가 상속하여 사기(捨棄)되지 않음을 불율의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그 후 비록 선심이 일어날지라도 불율의를 성취한 자라고 이름하니, 이러한 아세야(阿世耶, 즉 의요)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주장한데 대한 해명이다. 즉 율의무표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경량부의 경우(본론 제35권 참조), 불율의 역시 개별적인 실체로서 상속되는 것이 아니라 악행을 지어야겠다고 하는 의지작용(思심소)이 색심 상에 종자적 형태로 훈습되어 부단히 상속하는 것을 가설(假說)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21)
여기서 8일 등이란, 백월(白月)과 흑월(黑月)의 8일ㆍ14일ㆍ15일, 즉 6재일로서, 흑월의 그것은 23일ㆍ29일ㆍ30일에 해당한다.(『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 제7권, 대정장1,p.402상)
22)
즉 계사가 먼저 계문(戒文)을 설하면, 수계자는 비록 그것을 알고 있더라도 반드시 그 이후에 외워야 한다.
23)
8지의 근주계는, 살아있는 것을 죽이는 것,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 비범행(非梵行), 거짓말하는 것, 음주, 향을 바르고 온갖 장신구로 몸을 장식하거나 춤추고 노래하며 그것을 보고 듣는 것[塗飾香鬘舞歌觀聽], 높고 넓으며 아름다운 평상이나 의자에 않거나 눕는 것[坐臥高廣嚴麗牀座], 먹을 때가 아닌데 먹는 것[食非時食]에서 떠나는 것이다.(본론 제36권 ‘별해탈율의의 세목’ 참조)
24)
이러한 8지 구족(具足)의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본송에서 설한다.
25)
본론 제36권 주42) 본문 참조.
26)
장양(長養)의 원어는 upavāsatha(혹은 uposatha, 팔리어로는 posatha, 布薩ㆍ布沙陀 등으로 음사). 즉 이것의 변화어인 poṣadha는 poṣa(기르다)와 dhā(사역의 의미)가 합성되어 ‘장양’의 뜻이 되었다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근주(upavāsa)의 뜻이라는 설.
27)
이비시식계(離非時食戒)를 근주 8재계(齋戒)의 본질이라고 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포살과 감식(減食)을 밀접하게 관련시킨 바라문의 풍습이 고려되었든지, 아니면 서방국(카슈미르의 서쪽)의 풍습에서는 단식을 재계라고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구사론기』 제14권)
28)
『중아함경』 『지재경(持齋經)』(대정장1,p.770중); 『불설재경(佛說齋經)』(동,p.910) 참조. 즉 경에서 이비시식을 여덟 번째 갈래[第八支]라고 하였으므로 그것을 독립시켜 다른 8지의 본질이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29)
즉 정견(正見)이 8정도의 도체(道體)이자(즉 도의 본질은 혜이고, 정견은 바로 혜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도지(道支)이듯이, 7각지의 택법각지가 각체(覺體)이자 각지(覺支)이듯이, 4정려지(支)의 하나인 삼마지(혹은 等持)가 정려의 본질이자 정려지 중의 하나이듯이(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7권 ‘정려지’ 참조), 이비시식(離非時食) 역시 재계(齋戒)의 본질이자 한 갈래[支]라는 뜻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앞서 이 율의의 공능에 대해 ‘항시식을 막음으로써 스스로 근주율의를 지닌 자임을 억념하고 세간에 대한 염리심을 낳아 마음을 방종 방일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30)
『구사론』 제14권(고려장27,p.560상; 대정장29,p.75하; 권오민 역,p.663).
31)
경주 세친은 『구사론』(고려장27,p.560상; 대정장29,p.75하; 권오민 역,p.662)에서, 마치 수레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갖가지 부품을 배제하고 별도의 본질(전체자)로서의 수레가 존재하지 않으며, 상(象)ㆍ마(馬)ㆍ차(車)ㆍ보군(步軍)을 떠나 4지군(支軍)이 없으며, 다섯 가지 가루를 배제하고서 5지산(支散)이라고 하는 약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각의 갈래(支)를 배제하고 재계의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8지(支)] 전체를 ‘제계[의 본질]’이라 하고 개별적인 것을 설하여 ‘[재계의] 갈래’라고 한다. 즉 개별적인 것[別]으로 전체[總]를 구성하므로 그것을 ‘[재계의] 갈래’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마치 수레[車]의 여러 부품과 4지(支)의 군대와 5지(支)의 가루약[散]처럼 재계의 8지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32)
삼보에 귀의하고 나서 율의를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혹은 스승이 삼귀의를 설하는 것을 잊고 율의를 줄 경우에도 근주율의를 획득한다. 그러나 이 경우 스승이 죄를 획득하게 된다. 참고로 근사율의 만을 받고 삼귀의(三歸依)는 수지하지 않는 경우에는 근사를 성취하지 못하지만, 이 경우에도 이를 알지 못한 경우는 예외로 한다.(『구사론』, 고려장27,p.561상; 대정장29,p.76중; 권오민 역,p.668 참조)
33)
『잡아함경』 제33권 제927경(대정장2,p.236중).“世尊! 云何名爲憂婆塞? 佛告摩訶男, 在家淸白修習淨住, 男相成就, 作是說言, ‘我今盡壽 歸佛ㆍ歸法ㆍ歸比丘僧. 爲憂婆塞 證知我.’ 是名優婆塞.” 『구사론』 제14권(고려장27,p.560중; 대정장29, p.75하; 권오민 역,p.664)에 의하면, 이는 외국사(『광기』에 의하면 간다라논사)의 주장이다. 즉 그들은 삼귀의를 외우는 찰나에 근사(우바새)가 된다고 주장한 반면, 카슈미르의 논사들은 삼귀의를 근거로 하여 근사계 즉 5계를 수지하여야 비로소 근사를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34)
즉 근사(우바새)의 정체성은 삼귀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수지한 율의에 있는 것으로, 그렇지 않을 경우 경에서 ‘목숨을 마칠 때까지 살아있는 것을 구호하리라’고 설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살아있는 것을 구호[護生]한다’는 말은 살생을 떠나는 것뿐만 아니라 일체의 유정을 손상시키거나 괴롭히지 않는 것을 말한다.(『대비바사론』 제124권, 대정장27,p.646상; 한글대장경122,p.561)
35)
『대비바사론』(제124권, 대정장27,p.646상중; 한글대장경122,p.562). 『구사론』(제14권, 고려장27,p.60중; 대정장29,p.76상; 권오민 역,p.664)에서도 역시 앞의 ‘살아있는 것을 구호[救生]하리라’는 경문을 ‘사생(捨生)’으로 논설하고 있다. 『바사』에 의하면, 여기서 ‘사생’의 뜻은 살아있는 것에 대해 괴롭히거나 해손 시키는 일을 버리겠다는 것으로, 바로 다섯 가지 율의(즉 5계)를 나타낸다.
36)
즉 구족계를 받은 비구는 학처를 배우지 않더라도 비구율의를 성취하지만 그것을 견고하게 수지하도록 하기 위해 학처를 설하는 것처럼, 근사의 경우도 삼귀의를 수지하고 ‘나는 근사이다’고 말할 때 근사율의가 생겨나지만 그것을 보다 견고히 하기 위해 다시 5계를 설한다는 것이다.
37)
현장(玄奘) 역본 『구사론』(제14권, 고려장27,p.560하; 대정장29,p.76상)에서 제3구는 ‘謂約能持說’로 되어 있다.
38)
『구사론』 제14권(고려장27,p.560하; 대정장29,p.76상; 권오민 역,p.665). 인용한 경설은 『증일아함경』 제20권(대정장2,p.649하). 夫淸信士之法, 限戒有五, 其中能持一戒二戒三戒四戒乃至五戒, 皆當持之……. 참고로 『구사석론』에서는 ‘배우는 자[學]’를 ‘지니는 자[持]’로 번역하고 있다.
39)
그러나 ‘지니는 것[持]’이 아니라 ‘받는 것[受]’에 근거한 것이라면, 근사는 모두 5계를 받기 때문에 앞에서와 같은 네 종류의 차별이 없어야 한다.
40)
주33) 참조.
41)
『잡아함경』 제1권 제30경(대정장2,p.6하), ‘我今已度. 我從今日歸依佛歸依法歸依僧爲優婆塞, 我從今日已盡壽命淸淨歸依三寶.’ 참조.
42)
4증정이란 무루지를 일으켜 4제의 이치를 증득한 성자가 불ㆍ법ㆍ승의 삼보를 믿고 성계(聖戒)를 엄수하는 것.(본론 제72권에서 상론함)
43)
이상 『구사론』 제14권(고려장27,p.560하; 대정장29,p.76상; 권오민 역,p.666-667). 즉 경부에 의하면, 경에서 설한 사생(捨生)이라는 말은 ‘살생 등을 버린다’에서 ‘살’ 자(字)를 생략한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도 생을 버릴 때까지 청정(삼보)에 귀의한다는 뜻이다. 따라서서 삼귀의만으로도 근사는 성취될 수 있으며, 5계 역시 반드시 갖추어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44)
본권 ‘세 종류 율의의 획득조건’ 참조. 이에 따르면, 대가섭은 부처님을 신수(信受)하여 대사(大師)가 됨으로써 구족계(비구계)를 획득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근사(우바새) 또한 부처님 등 삼보에 귀의하고서 ‘나는 바로 근사입니다’라고 외치면 그에 따른 율의를 획득하게 된다는 뜻이다.(본권 ‘근사율의가 일어나는 시기’ 참조)
45)
만약 근사율의는 5계를 모두 받아야 성취되지만,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지니고 지니지 않음에 따라 근사에 네 종류가 있다고 말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5계 중 몇 가지를 지녀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이 같은 문답은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유부에서는 앞의 경설을 ‘능히 지니거나 배운다고 함은 이전에 받은 바를 지니고 배우는 것’이므로 최초의 수계시에는 5계를 모두 받지만[五戒定具說] 다만 수지 수학하는 단계에서 범계(犯戒)의 연을 만나 일부의 율의만을 지니고 그 밖의 다른 율의는 지니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데 반해, 경량부에서는 경설에 따라 오계분수설(五戒分受說)을 주장하는 것이다.
46)
『구사론』 제14권(고려장27,p.560하-561상; 대정장29,p.76상중; 권오민 역,p.667).
47)
『잡아함경』 제33권 제927경(대정장2,p.236중), ‘世尊 云何名優婆塞戒具足? 佛告摩訶男; 優婆塞, 離殺生ㆍ不與取ㆍ邪婬ㆍ妄語ㆍ飮酒, 不樂作. 摩訶男! 是名優婆塞戒具足.’ 참조. 이것이 경증이 되는 까닭은, 근사이면서 살생 등을 떠나지 않은 이도 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48)
같은 경, ‘世尊 云何名優婆塞信具足? 佛告摩訶男; 優婆塞者, 於如來所正信爲本, 堅固難動…….’
49)
근사율의는 5계를 모두 갖추어 받음으로써 성취되지만, 그것을 지니는 것[持]에는 차별이 있을 수 있다.(前述) 즉 그것을 모두 지니는 것은 희유하기 때문에 경에서는 ‘계를 갖추었다’고 설하지 않고 ‘신근을 갖추었다’고 설하였다는 것이다.
50)
근사가 수지하는 율의의 수량은 다섯 가지이지만, 필추가 수지하는 율의의 수량 250계로서, 그것은 교법의 힘에 따라 달리 시설하였기 때문이다.(『구사론』 제14권, 고려장27,p.561상; 대정장29,p.76중; 권오민 역,p.668)
51)
『구사론』 제14권(앞의 책).
52)
포랄나(Pūraṇa Kassapa, 혹은 富蘭那 迦葉로 한역)는 육사외도의 일인으로, 선악의 행위와 그 과보를 부정하는 도덕부정론. “스스로, 혹은 남을 시켜 살아있는 것들을 죽여 토막 내고 저며서, 삼거나 굽는 등으로 그들을 해코지하여 고통 속에 울부짖게 하여도, 살육하고 도둑질하고 겁탈하더라도 그것은 죄가 아니다. 갠지스 강 남쪽으로 가 중생을 칼로 도륙하여 이 세상을 가득 채울지라도 악의 과보는 없으며, 갠지스 강 북쪽으로 가 크나큰 보시를 베풀어 중생을 이롭게 할지라도 복의 과보는 없다.”(『장아함경』 제17권 「사문과경」)
53)
유부에서는 율의를 받을 때의 태도나 마음 상태에 따라 상ㆍ중ㆍ하품의 차별이 있다고 하였지만, 상좌는 율의를 받을 때의 마음 상태는 모두 원만하며, 문제는 다만 그것을 어떻게 수지(修持)할 것인가 하는 점이라는 것이다.
54)
만약 율의의 품류가 받을 때의 마음 상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닦고 지니는 것에 의해 변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품류를 달리하는 각각의 율의는 이전과는 다른 인연(예컨대 마음가짐)에 의해 낳아진 것이기 때문에 일찍이 수지하지 않았던 계(근사의 경우 5계 이외의 계)도 역시 이전과 다른 인연에 의해 낳아질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근사가 근사율의를 거듭하여 받는 일은 없으며, 다른 율의를 받을 때에는 반드시 근사와는 다른 수계의 인연(조건)에 따라야 한다.
55)
율의 즉 무표는 강력한 업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본론 제35권 ‘무표업-서설’ 참조.
56)
염천(念天)은 10념의 하나이다. 10념은 염불(念佛)ㆍ염법(念法)ㆍ염중(念衆)ㆍ염계(念戒)ㆍ염시(念施)ㆍ염천(念天)ㆍ염휴식(念休息)ㆍ염안반(念安般)ㆍ염신(念身)ㆍ염사(念死).
57)
즉 경에서는 다만 세 가지 사실로써 천신에 대해 ‘공양을 베풀어야 한다’고 설하였지 ‘예배하라’고는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 같은 경설에 근거하여 ‘부처님께서 허락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천신에게 예배해야 한다’고는 주장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58)
다시 말해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사실’과 대지를 진동시키는 원인 등이 모두 동일한 경우이며, 따라서 ‘세 가지’라는 수(數)가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5온ㆍ12처 등의 경우도 대지를 진동시키는 인연 등의 경우처럼 결정적인 수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는 힐난이다.
59)
온의 다섯 가지는 결정적인 수인데 반해 대지를 진동시키는 인연의 네 가지는 결정적인 수가 아닌가? 하는 난문이다.
60)
그럴 경우 전자는 그 수(數)가 결정적이지 않지만, 후자는 결정적인 것이다.
61)
처중의 마음, 즉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마음에는 증오[憎]하거나 애착함[愛]이 없지만, 삿된 천신을 공경하는 경우 부처님의 공덕에 대해 분에심(憤恚心)을 낳기 때문에 삿된 천신을 공경하는 것은 차라리 처중의 마음을 갖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이다.
62)
다시 말해 그 같은 다른 이를 억누르고 굴복시키고 은혜를 배반하는 등의 힘을 뛰어난 예배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63)
‘천신에게 예배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바로 ‘천신에게 예배하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뜻이다.
64)
천신이 만약 왕(군주)처럼 세간이 의지하고 절대적으로 관계(계속)하는 존재라면, 세간에서는 마땅히 그를 왕처럼 공경해야 한다는 뜻이다.
제38권
1)
『발지론』 제2권(대정장26,p.924하), “귀의불(歸依佛)이란 어떠한 법에 귀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답: 만약 법이 실유(實有)로서 지금 바로 존재한다[現有]는 사실을 상(想)과 등상(等想)에 의해 언설로 시설하는 이를 일컬어 ‘부처’라고 한다면, 그에게 존재하는 무학이 성취하는 보리분법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대비바사론』제34권(대정장27,p.177상) 참조.
2)
여기서 ‘증언(adhivacana, 혹은 增語)’는 색법과는 달리 그 의미를 드러내는데 뛰어난 공능을 지닌 개념이나 ‘말’의 뜻이다.
3)
참고로 『대비바사론』 제34권(대정장27,p.177상중)에서는 이같이 해석하고 있다. “‘제법이 실유(본론에서는 묘유)’라는 말은 실유인 부처는 그 자체 법(즉 보리분법)을 자성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으로, 이러한 말은 ‘부처는 다만 이름[名]일 뿐이며, 다만 관념[想]일 뿐이며, 다만 일시 시설한 것일 뿐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는 등의 어떤 이의 주장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바로 존재한다[現有]’고 함은 부처의 체성은 지금 바로 존재하는 것이지 일찍이 존재한 것[曾有]이 아님을 나타낸다. ‘상’은 부처를 반연하는 관념[想]을, ‘등상(等想)’은 이러한 관념이 [그 밖의 다른] 일체의 관념과 함께 일어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리고 ‘시설’이란 이러한 상(想)에 근거하여 언어적 개념[名]을 시설하는 것이며, ‘언설’이란 언어적 개념에 의해 언설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4)
‘나는 이미 고(苦)를 알았고, 집(集)을 끊었고, 멸(滅)을 작증(作證)하였고, 도(道)를 닦았다’고 아는 것을 진지(盡智)라고 하는데, 이때 성문은 아라한과를 성취하며, 보살은 불타를 성취한다. 참고로 더 이상 물러남이 없는 부동(不動)의 아라한이나 불타의 경우, 진지와 무간에 ‘나는 이미 고를 알아 더 이상 알 것이 없으며, 나는 이미 집을 끊어 더 이상 끊을 것이 없으며, 나는 이미 멸을 작증하여 더 이상 작증할 것이 없으며, 나는 이미 도를 닦아 마땅히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고 아는 무생지(無生智)가 생겨나는데, 이것이 바로 ‘능히 불타를 성취하는 법’이다. 주6) 참조.
5)
다시 말해 능히 불타를 성취하는 무학법은 불타와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러한 무학법에 의하지 않고 불타를 성취한 이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6)
즉 부처를 성취하는 무학법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 그리고 그것과 상응구기하는 무루의 오온이다. 진ㆍ무생지에 대해서는 본론 제73권에서 논설함.
7)
즉 색신의 경우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후가 동등하기 때문에 ‘불타’라는 명칭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 경주(經主) 세친과 대중부 등에서 반론을 제기한다.(후설)
8)
『구사론』 제14권(고려장27,p.561중; 대정장29,p.76하;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 2002, p.671; p.670)
9)
예컨대 세존도 과거 보살 시절 3무량겁 동안 7만 5천, 7만 6천, 7만 7천의 부처님들께 공양하였고 석가모니불을 만나 ‘원컨대 나도 마땅히 부처가 되어 지금의 세존과 똑 같이 되리라’고 발심하였다.(본론 제44권 ‘석가보살이 공양한 부처의 수와 친견한 부처’ 참조)
10)
참고로 『바사』(제116권,한글대장경122,p.363) 상에서 유부는 ‘출불신혈(出佛身血)’과 ‘파화합승(破和合僧)’의 죄의 경중을 비교하여, 전자는 다만 불타의 색신을 파괴하는 것일 뿐이지만 후자는 법신을 파괴하는 것이어서 그 죄가 더 무겁다고 논의하고 있다.
11)
『구사론』 제14권(고려장27,p.561중; 대정장29,p.76하; 권오민 역,p.671).
12)
불타의 체성은 무학법이지만, 승가의 체성은 유학(有學)과 무학의 법으로, 이에 대해서는 ‘귀의승’에서 논설함.
13)
『구사론』 제14권(앞의 책). 만약 불타의 체성이 오로지 무학법이며, 그의 색신은 여기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비구의 체성도 구족계라고 해야 할 것이며, 나아가 그에게 공양하고자 하는 자는 색신의 비구가 아닌 구족계에 공양해야 한다는 힐난이다.
14)
여기서 바자자부(婆雌子部)는 독자부(犢子部, Vatsīputriyā, Vajjipttiya)의 범어 음사. 이 부파에서는 다른 부파와는 달리 보특가라(pudgala)를 윤회의 주체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고래로 불법에 의탁한 외도라는 뜻의 ‘부불법(附佛法, 혹은 付法藏) 외도’로 불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경론에서 언급되는 보특가라는 5온의 취집을 가설한 명칭인 유정의 의미이지만, 법장부의 보특가라는 ‘5온과 동일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닌 존재[非卽蘊非離蘊]’ 다시 말해 가유도 실유도 아닌 것으로, “그것은 다만 현재세에 포섭되는 내적인 유집수(有執受)의 제온(諸蘊)에 근거하여(skandhān upādāya) 설정된 보특가라일 뿐이다.”(『구사론』 제29권, 앞의 책,p.1342) 다시 말해 독자부에서 설정한 보특가라는 온과는 독립된 개별적 실재라거나 혹은 그 취합물을 일시 그 같은 명칭으로 일컬은 것이 아니라, 다만 현재에 신체 내부에 있으면서 지각하고 인식하는 행위의 주체로서 설정된 개념이라는 뜻이다.
15)
예컨대 ‘갑돌이도 착하고 갑순이도 착하다’고 할 때 양자의 사이의 착함의 차별은 성취되지 않듯이 ‘이계의 보특가라’와 ‘세존의 보특가라’ 역시 보특가라 자체로서는 양자의 사이의 차별이 성취되지 않기 때문에 이계에 귀의하는 것과 세존에게 귀의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힐난이다. 이계는 Nirgrāntha Jñāthapūtra, 즉 자이나 교조 마하비라를 불교에서 부르는 명칭.
16)
혹은 초에 근거한 불을 촛불이라고 하듯이, 불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차별도 없지만, 근거하는 바에 따라 차별이 있다는 뜻의 해명.
17)
즉 불법(무루의 무학법)에 근거한 보특가라만을 ‘불타’라고 한다면, 불타도 유루의 세간법(이를테면 변이하는 諸根)을 갖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불타가 아니다’고 말해야 한다는 힐난이다.
18)
즉 보특가라는 자체로서는 동일하지만, 소의에 따르기 때문에 차별될 수 있다고 한다면, 불타는 무루의 무학법과 유루의 세간법에 따라 ‘불타’이고 ‘불타가 아니다’는 두 가지 상반된 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힐난이다.
19)
『장아함경』 제2권 「유행경(遊行經)」(대정장1,p.15중), ‘歸依於法, 勿他歸依.’
20)
구마라다(Kumāralāta, 혹은 鳩摩邏多). 구역에서는 구마라라다(鳩摩羅邏多)로 동수(同數)로 번역된다. 규기(窺基)의 『성유식론술기』에 의하면, 불멸 후 100년 무렵에 출세한 경부본사(經部本師)로서 세간에서 태양에 비유됨으로써, 혹은 신기한 이야기[奇事]를 모아 『유만론(喩鬘論)』을 지었기 때문에 비유사(譬喩師)로 불렸다고 하였지만, 여기에는 이설이 많다. 이를테면 『대당서역기』에서는 마명(馬鳴)ㆍ제바(提婆)ㆍ용맹(龍孟) 즉 용수와 함께 당시 네 개의 태양(日)으로 비유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대개 마명 용수 내지 『대비바사론』보다는 후대, 세친이나 중현보다는 전대, AD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의 인물로 파악되고 있다.
21)
올달라승(嗢怛羅僧)은 uttara saṃghāṭī(僧伽梨, 大衣) 즉 최상의 대의(설법할 때 혹은 마을로 나아가 걸식할 때 걸치는 옷)를 말하는 것인가? 이 경설은 부처님의 최후를 묘사한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장아함경』 제3권 「유행경」의 반열반 부분(대정장1,p.18하)을 참조하라.
22)
대비(大悲)는 부처님만이 갖는 18가지 공덕[不共法] 중의 하나. 여래의 대비는 3아승기겁 동안 닦은 크나큰 복덕과 지혜에 의해 성취된 것이기 때문에, 3계 5취의 일체의 유정이 경험하는 모든 괴로움(苦苦ㆍ壞苦ㆍ行苦)에 대한 연민이기 때문에, 그들 모두에 대해 동등한 이익과 안락을 도모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견줄 만한 다른 어떠한 연민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대비’라 일컬은 것으로, 유루 세간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기 때문에 세속지를 본질로 한다.(본론 제75권에서 상론함)
23)
3명(明)이란 자신과 타인의 과거세를 참답게 아는 숙주지증명(宿住智證明), 미래세 어떠한 존재로 상속하는지를 참답게 아는 사생지증명(死生智證明), 번뇌가 다하였음을 아는 누진지증명(漏盡智證明)으로, 이 중 앞의 두 가지는 그 상(相)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모두 유루의 세속지를 본질로 한다. 이는 6통(通) 중 숙주지증통과 천안지증통(즉 사생지)과 누진지증통으로서, 다른 신통에 비해 특히 뛰어나기 때문에 아라한(무학)의 그것을 3명이라 한 것이다.(3명에 대해서는 본론 제76권에서 상론함)
24)
‘밥 등의 먹거리[食]로 인해 목숨이 지속되며, 요구르트[酪]에 의해 열병이 대치된다’는 뜻인가? 즉 부처님도 식사하고 멸도(滅度) 시에 등창[背痛]이 났으므로 목숨이나 소의신이 바로 진실의 불타는 아니라는 뜻이다.
25)
대비(大悲)는 주22) 참조. 세속지는 일체지(一切智, 10智)의 하나로, 항아리나 옷 등의 세속의 경계를 대상으로 한 유루지(有漏智). 제법의 인연화합에 의해 나타난 세간의 모든 존재는 또 다른 관념[慧]에 의해, 혹은 그것이 파괴되어 소멸될 때 그것에 대한 지식도 역시 파기된다.(본론 제73권 ‘10지’에서 상론함)
26)
『이부종륜론』(대정장49,p.15중)에서 설하고 있는 대중부의 본종동의(本宗同義)에 의하면, “제불 세존은 다 세간에서 벗어났으며, 일체의 모든 여래는 유루법을 갖지 않으며, 모든 여래의 말씀은 다 전법륜(轉法輪)이다…….”고 하여 불타를 초월적 존재로 간주한다. 『대비바사론』 제44권(대정장27,p.229상); 제76권(동p.391하); 제173권(동p.871하)에서도 “부처님의 생신(生身)은 무루이다”고 하는 대중부의 이설이 언급되고 있다.
27)
본론 제1권 ‘유루에 관한 비유사의 이설 비판’ 참조.
28)
여기서 ‘네 종류의 염주’란 몸[身]과 느낌[受]과 마음[心]과 그 밖의 존재[法]를 순서대로 부정(不淨)ㆍ고(苦)ㆍ무상ㆍ무아로 관찰하는 4념주(念住) 혹은 4념처(念處)를 말한다.(본론 제60권 ‘별상념주’에서 상론함)
29)
앞서 인용한 ‘그는 이미 4념주를 닦았다’는 경설은 전체적인 체상(體相)에 근거한 것으로, 사실상 몸과 마음에 대해서는 이미 닦았으므로 신(身)념주와 심(心)염주를 배제한 나머지 두 염주에 대해 설한 것이라는 뜻의 해명인가?
30)
여기서 ‘도(道) 등의 행상’이란, 5취온 등의 소멸을 획득하는 성도는 모든 성자들이 가는 길이므로 ‘도(道)’이며, 올바른 이치에 부합하는 것이므로 ‘여(如, 진리)’이며, 열반으로 가는 첩경이므로 ‘행(行)’이며, 생사의 윤회를 영원히 초월하는 결정적 방법이므로 ‘출(出)’이라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1권 ‘4선근’; 제74권 ‘무루지와 16행상’에서 상론한다.
31)
여기서 가다연니자가 설한 것이란 주1)에서 인용한 『발지론』의 논설을 말한다. 가다연니자(Kātyāyanīputra)는 불멸(佛滅) 300년(기원전 150-50년) 무렵 서북인도에서 출세한 대논사로서, 『발지론』 20권을 지어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교학을 확립함으로써 이 부파의 개조가 되었다. 규기(窺基)의 『이부종륜론술기』에 의하면, 그는 원래 상좌부가 경장(經藏)을 절대 무오류로 간주하고, 율장과 논장을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한데 반해 논장 즉 아비달마를 위주로 하여 제법유론(諸法有論)을 주장함으로써 상좌부 내의 지말분열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한다.
32)
여기서 학ㆍ무학법의 소의가 되는 보특가라란 그러한 학ㆍ무학법을 성취한 성자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예류향ㆍ예류과, 일래향ㆍ일래과, 불환향ㆍ불환과, 아라한향ㆍ아라한과이라는 4쌍(雙)의 향(向)ㆍ과(果)가 있다.(주35 참조)
33)
『발지론』 제2권(대정장26,p.924하), “귀의승(歸依僧)이란 무엇에 귀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답: 만약 법이 실유(實有)로서 지금 바로 존재한다[現有]는 것을 상(想)과 등상(等想)에 의해 언설로 시설하는 이를 일컬어 ‘승가’라고 한다면, 거기에 존재하는 승가를 성취하는 유학과 무학의 법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대비바사론』 제34권(대정장27,p.177상) 참조.
34)
이를테면 『대비바사론』 제34권(대정장27p.177하), ‘歸依者, 謂救護義, 是歸依義.’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는 ‘귀의의 본질과 목적’에서 논설함.
35)
4쌍 8척(혹은 4쌍 8배)란, 4제를 현관함에 있어 고법지인으로부터 제15 찰나인 도류지인까지의 성자인 예류향(預流向)과 제16 찰나인 도류지에 이르러 견소단의 번뇌는 모두 끊었지만 수소단의 번뇌는 아직 아무 것도 끊지 못한 성자인 예류과(預流果), 예류과의 성자가 더욱 증진하여 욕계 수소단의 번뇌 중 상상품의 번뇌를 끊고서 일래과에 이르는 도정에 있는 성자인 일래향(一來向)와 제6 중하품의 번뇌를 끊은 일래과(또는 斯陀含), 일래과의 성자가 더욱 증진하여 욕계 수소단의 번뇌 중 제7 하상품과 제8 하중품의 번뇌를 끊은 불환향(不還向)과 제9 하하품이 끊어져 더 이상 욕계로 되돌아오지 않는 불환과(또는 阿那含), 그리고 불환과의 성자가 더욱 증진하여 색계 초정려의 제1 상상품의 번뇌를 끊고, 나아가 무색계 유정지(有頂地, 즉 비상비비상처)의 제9 하하품 번뇌를 끊는 무간도를 성취한 아라한향(阿羅漢向)과 이로부터 최후의 해탈도인 진지(盡智)가 생겨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말하는데, 이 중 앞의 일곱 계위는 유학이며, 아라한과는 무학이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2~65권에 걸쳐 상론함)
36)
율장에 의하면 일정한 교구[界] 안에서의 승가(現前僧伽)의 최소 구성원(衆僧)은 4인으로, 이러한 인원만으로 이른바 포살(布薩,보름마다의 참회)로 일컬어지는 설계(說戒) 작법(羯磨)이 가능하다.
37)
‘자거’는 자자(自恣)와 거죄(擧罪). 자자는 안거를 마치는 날 대중들이 함께 모여 자신의 죄와 결점을 지적해 줄 것을 구하는 작법(갈마)이며, 거죄는 계를 범한 출가자를 징계하는 작법이다. 이 두 가지 작법은 승가의 최소 구성원인 5명의 전원 출석으로 이루어지는데, 승가는 원래 10명 이상으로 구성되지만, 변방에서는 5명이다.
38)
중국은 변방이 아닌 일반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승가는 10인 이상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구족계의 수계작법(이를 受具라 함)은 반드시 이러한 승가에서만 가능하다.
39)
성적인 악습이나 승가를 분열시키는 승잔죄(僧殘罪) 이상의 범계를 묻는 출죄(出罪)작법은 최소한 20인 이상의 승가에서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자자를 비롯한 모든 작법이 가능하다. 참고로 승잔죄는 교단에서 추방하여 일정기간 근신토록 하기 때문에 출중(出衆)이라 하였다. 비구 250계의 전체적인 분별에 대해서는 본론 제36권 주48)을 참조할 것.
40)
2인 혹은 3인으로 승가는 성취되지 않는다는 뜻인가? 고래로 이를 별중(別衆, gaṇa)라고 하여 승가와는 구별하였다.
41)
만약 ‘귀의승’의 ‘승’이 보특가라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라고 한다면, 각각의 향과(向果)에는 그것을 성취한 무수한 보특가라가 있을 것인데, 그것을 다만 각 계위마다 한 명씩을 언급한 여덟 보특가라로는 규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42)
즉 법에 근거하여서는 그러한 법을 성취한 각각의 보특가라나 일체의 보특가라를 개별적으로 혹은 전제적으로 시설할 수 있지만, 보특가라에 근거하여서는 오로지 각각의 개별적인 보특가라에 대해서만 시설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계경에서는 귀의해야 할 승가로서 4쌍 8척의 보특가라를 설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사실상 법에 근거하여 그것을 성취한 일체의 보특가라에 대해 설한 것이라는 뜻이다.
43)
『이부종륜론』(대정장49,p.17상)에 따르면, 화지부(化地部)는 “부처님도 역시 승가에 포섭되기 때문에 승가에 보시하는 것은 대과(大果)를 획득하지만, 별도로 부처님께 보시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고 한 반면, 법장부(法藏部)에서는 “부처님이 비록 승가에 포섭될지라도 부처님께 별도로 보시하면 대과를 획득하지만, 승가에 별도로 보시하는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중현은 부처님께서는 승가에 포섭되기는 하지만, 성문의 승가에 포섭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후술)
44)
4정정(證淨, avetyaprasāda)이란, 4제의 이치를 증득함으로써 불ㆍ법ㆍ승 삼보와 계(戒)에 대한 청정한 무루의 믿음[信]을 말하는 것으로, 만약 부처님에 승가에 포섭된다면 3정정이라 해야 한다는 뜻이다. 4정정은 본론 제72권에서 상론함.
45)
이상 부처님은 승가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견해.
46)
『중아함경』 제47권 「구담미경(瞿曇彌經)」(대정장1,p.721하). 여기서 교답미는 부처님의 양모인 마하파자파티 고타미. 대생주(大生主)라 한역하였다.
47)
이상 부처님은 승가에 포섭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견해이다.
48)
‘4쌍 8배의 보특가라가 다 승가 중에 포섭된다’고 할 경우, 아라한과를 증득한 부처님도 성문과 더불어 승가에 포섭되어 ‘귀의승’의 대상이 된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49)
이는 제 부파 중 화지부(化地部)의 주장이다. 주43) 참조.
50)
즉 ‘애의 다함’은 예류과를, ‘애에서 떠남’은 일래과를, ‘애의 소멸’은 불환과를, ‘애의 열반’은 아라한과를 나타낸다. 보다 구체적인 사실은 주35)를 참조할 것.
51)
독각이나 유학위의 보살은 생사의 공포는 능히 구제할 수 없기 때문에 귀의해야 할 대상은 아니지만 믿음의 대상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증정(證淨)은 불ㆍ법ㆍ승ㆍ계(戒)에 대한 청정한 믿음(주44 참조).
52)
즉 귀의 자체는 스스로 맹서하여 발한 어표업이지만, 그러한 귀의의 어표업은 반드시 마음 등의 5온에 수반되어 그것과 함께 일어난다는 뜻이다.
53)
이 같이 삼보에 귀의하고도 구제 받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구사론』 제14권(고려장27,p.561하; 대정장29,p.77상; 권오민 역,p.672)에서는 다만 “삼귀의는 일체의 대중(즉 8衆)이 율의를 수지하는데 널리 방편문(方便門)이 되는 것이다”고 논설하고 있다.
54)
여기서 10근(根)이란 22근 중 무학도로서 무루근인 구지근(具知根)과 이것의 본질이 되는 의근(意根)과, 낙(樂)ㆍ희(喜)ㆍ사(捨)의 세 수근(受根)과, 신(信)ㆍ근(勤)ㆍ념(念)ㆍ정(定)ㆍ혜근(慧根)을 말하는 것으로, 뒤의 9근은 유루와 무루 모두와 통하기 때문에 ‘일부’라고 말한 것이다.(본론 제9권 ‘제근(諸根) 각각에 대한 해명’ 참조.
55)
여기서 12근은 앞의 10근에다 유학도로서 무루근인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과 이지근(已知根)을 더한 것이다.
56)
여기서 비범행(구역은 婬欲)이란 일체의 음행으로 출가자의 금계이며, 욕사행(구역은 邪婬)이란 다만 다른 이의 처첩을 범하는 등의 불의의 음행으로 재가자의 금계이다.
57)
경생(經生)의 유학(有學)이란 몇 번의 생을 거쳐 깨달음을 획득하는 성자의 뜻으로, 예류과나 일래과를 말한다. 즉 그들은 욕사행은 떠났지만 취처(娶妻)하여 비범행을 행하기 때문에, 만약 근사율의에 ‘이(離)비범행계’을 설정하게 되면 그러한 성자도 역시 근사율의를 범하는 것이 된다.
58)
이미 욕사행(사음)에서 떠난 근사(재가자)도 어떠한 성적행위에서도 떠나는 계(離非梵行戒)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59)
결혼하기 전에 근사의 5계를 받은 자가 결혼하면 앞서의 맹서를 어긴 것이므로 욕사행을 범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힐난이다.
60)
율의를 받는 자는 반드시 율의를 특정의 유정ㆍ갈래[支]ㆍ처소[處]ㆍ시간[時]ㆍ조건[緣]에 한정시키지 않아야 비로소 획득할 수 있다. 참고로 본문에서는 조건[緣]을 ‘예(禮)’로 표기하고 있으나 본론 제39권(‘율의의 획득범위와 동기’)에 따라 ‘연(緣)’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10업도 그 중에서도 특히 ‘욕사행의 성취조건’에 대해서는 본론 제42권에서 별도로 상론한다.
61)
이전에 처첩을 취하지 않았던 자가 근사계를 받고서 취처(取妻)하는 것과, 처첩을 취한 후 근사계를 받은 자의 범계(犯戒)는 동일하지 않다는 뜻이다.
62)
네가지 어업도 즉 이간어(離間語, 즉 兩舌)ㆍ허광어(虛誑語, 즉 妄語)ㆍ추악어(麤惡語, 즉 惡口)ㆍ잡예어(雜穢語, 즉 綺語) 가운데 허광어를 떠나는 계만을 근사율의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상 4업도의 성취조건에 대해서는 본론 제42권 참조.
63)
5계 중 불음주를 제외한 살생 등의 네가지는 그 자체로서 죄악이기 때문에 성죄(性罪)라 하며, 음주는 그 자체로서는 죄가 아니지만 실념하여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망각하게 하는 죄이기 때문에 차죄(遮罪)라고 한다. 본 단에서는 차죄에는 음주나 도식향만(塗飾香鬘), 좌와고광엄려상좌(坐臥高廣嚴麗床座) 등이 있지만, 음주만을 근사율의로 설정하게 된 이유에 대해 밝히고 있다.
64)
여기서 ‘온갖 술’이란 솔라(窣羅)ㆍ미려야(迷麗耶)ㆍ말타(末陀)로 일컬어지는 술을 말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후술함.
65)
즉 질병에 걸린 비구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술을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는 것은 바로 성죄이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66)
다시 말해 불음주계를 불살생계 등과 더불어 근사율의(5계)로 설한 것은 불살생 등과 마찬가지로 성죄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음주를 성죄로 여기는 이들은 『구사론』제14권(고려장27,p.562중; 대정장29,p.77중; 권오민 역,p.676)에 의하면 지율자(持律者)이다.
67)
오로지 염오심에서 마시는 것만이 악행(성죄)이다.
68)
예류과 등의 경생(經生)의 성자도 불음주계를 범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성죄라고 한다면, 아라한도 비시식 즉 때 아닌 때에 먹는 일이 있듯이 음주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차죄’라고 해야 한다는 힐난이다. 여기서 ‘저들’은 앞서 음주를 성죄라고 설한 어떤 이(『구사론』상에서는 지율자).
69)
경에서 “살아있는 풀 등을 꺾으면 악취에 떨어지게 된다”고 설하였을지라도 그것이 바로 성죄는 아니다. 즉 살아있는 풀을 꺾었기 때문에 악취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업을 일으키는 불선심에 따라 악취를 인기할 만한 업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으로, 음주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는 뜻이다.
70)
근주(近住)의 8계는, 살생, 불여취(不與取), 비범행(非梵行), 허광어(거짓말), 음주, 향을 바르고 온갖 장신구로 몸을 장식하거나 춤추고 노래하며 그것을 보고 듣는 것[塗飾香鬘舞歌觀聽], 높고 넓으며 아름다운 평상이나 의자에 않거나 눕는 것[坐臥高廣嚴麗牀座], 먹을 때가 아닌데 먹는 것[食非時食]에서 떠나는 것이지만(본론 제36권 ‘별해탈율의의 세목’ 참조), 앞의 네 가지는 성죄이나 뒤의 네 가지는 성죄가 아니다. 따라서 불음주 역시 살생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근사의 율의로 설하였기 때문에 성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71)
『법온족론』 제1권(대정장26,p.458상; 한글대장경115,p.437)에서도 동일하게 설명한다. “솔라주는 곡주(穀酒) 혹은 미주(米酒)라고도 하며, 미려야주는 목주(木酒)라고도 한다.”(『십송율』 제17권, 대정장23,p.121중)
72)
이는 앞서 인용한 ‘솔라 등의 술은 방일의 근거이다’는 경설에 대한 『구사론』(고려장27,p.562하; 대정장29,p.77하; 권오민 역,p.677)에서의 해석이다.
제39권
1)
별해탈율의는 악업의 근본업도(본격적인 행위)와 그 앞뒤의 근분(近分) 즉 가행(예비적 행위)과 후기(근본업도에 따르는 부수적 행위)를 떠나는 등의 일체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 다시 말해 별해탈율의란 바로 이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여 이를 떠날 때 비로소 획득되기 때문에, 본송에서 ‘일체에 따라 획득된다’고 한 것이다.
2)
정려생과 무루 즉 도생율의는 선정의 상태에서만 획득되며, 나아가 선정의 상태에서는 근본업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가행과 후기는 산심(散心)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3)
즉 정려생과 무루율의는 오로지 성죄(性罪,즉 차죄에 대한 근본업도)를 대상으로 하여, 다시 말해 성죄를 떠남으로서 획득될 뿐, 가행인 차죄를 대상으로하여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4)
두 가지 율의는 심수전법(心隨轉法)으로 마음과 구유(俱有)하기 때문에, 마음이 과거ㆍ현재ㆍ미래를 연으로 한다면 그러한 마음과 구유하는 계(戒) 역시 3세에 대한 방비지악의 작용을 갖는 것이다.
5)
제1구는 별해탈율의는 획득되지만 그 밖의 두 가지 율의는 획득되지 않는 경우. 제2구는 정려ㆍ무루율의는 획득되지만 별해탈율의는 획득되지 않는 경우. 제3구는 별해탈율의도 획득되고 그 밖의 두 가지 율의도 획득되는 경우. 제4구는 별해탈율의도 획득되지 않고 그 밖의 두 가지 율의도 획득되지 않는 경우.
6)
이는 앞의 4구분별에 대한 구사논주 세친의 비평으로, 완전한 인용은 이러하다. “선(善)의 율의를 바로 획득하는 때에는 현세의 악업도 등이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현재 [업도의] 소의처[處]에 따라 획득된다고 말해야 하는 것으로, 이치상 다만 미래의 [악업만을] 방호한다고 설해야 하지 결정코 마땅히 과거ㆍ현재의 그것을 방호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구사론』 제15권, 고려장27,p.563중; 대정장29,p.78상;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680) 즉 앞서 분별한 제1ㆍ제3구의 경우, 현재 바로 선한 율의를 수지한다면 현세에 악업도 등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행위를 근거로 하여 율의의 획득을 논의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며, 마땅히 현세의 업도의 소의처(處)로 정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선한 율의를 수지할 때 악업도는 없을지라도 악업을 일으키는 소의처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는 이미 멸하였고, 현재는 이미 생겨났기 때문에 율의는 미래의 악업을 대상으로 하여 획득되는 것, 다시 말해 미래의 악업을 방호하는 것이라고 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7)
여기서 ‘율의의 갈래’란 근본업도 즉 살생ㆍ불여취(투도)ㆍ욕사행(사음) 등의 세 가지 신업과 이간어(離間語, 양설)ㆍ허광어(虛誑語, 망어)ㆍ추악어(麤惡語, 악구)ㆍ잡예어(雜穢語, 기어) 등의 네 가지 어업을 말하며(탐ㆍ진ㆍ치의 의업은 가행이기 때문에 제외됨), 율의의 근거는 무탐ㆍ무진ㆍ무치 등의 3선근과 상ㆍ중ㆍ하의 등기심을 말한다.(후술) 본단의 물음은, 예컨대 근사는 일체의 유정을 대상으로 하여 신ㆍ어의 모든 갈래의 업도와 무탐 등의 모든 근거에 따라 근사율의(5계)를 성취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하는 것이다.
8)
예컨대 불살생율의라고 할 때 그것은 인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동물을 비롯한 살아있는 일체의 유정을 대상으로 하여 획득된다. 다시 말해 일부의 유정에 대해서만 불살생율의를 획득하는 경우, 나머지 일부의 유정에 대해서는 악의 의요(意樂) 즉 악심이 그 같은 율의에 수반되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9)
즉 필추율의(비구계)는 신(身)3 어(語)4의 업도 모두에서 떠날 때 획득되고, 근책(사미)이나 근사(우바새)율의는 신업의 세 가지와 허광어(망어, 즉 거짓말)에서 떠날 때 획득된다.
10)
“그것들은 반드시 구기(俱起)하기 때문이다.”(『구사론』 제15권, 고려장27,p.563중; 대정장29,p.78상; 권오민 역,p.681)
11)
본론 제37권 ‘율의의 상ㆍ중ㆍ하품의 근거’ 참조.
12)
즉 율의를 획득하게 되는 근거[因]에는 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무치(無癡)와 상ㆍ중ㆍ하의 마음이 있지만, 전자는 한 찰나의 마음에 구기하기 때문에 일체의 율의는 동일한 근거에 따라 획득된다. 그러나 상ㆍ중ㆍ하품의 마음은 동시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율의에는 하품의 마음에 의해, 중ㆍ상품의 마음에 의해 획득된 것이 있을 수 있으며, 그래서 본송에서 ‘근거는 일정하지 않다고 설한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13)
이를테면 어떤 이가 하품의 마음으로써 근사계를 받고, 중품의 마음으로써 근책계를, 그리고 마침내 상품의 마음으로써 필추계를 받았을 경우, 이때 필추계는 일체의 갈래와 일체의 근거에 의해 획득된 것이다. 그러나 필추계를 제외한 다른 계는 일체의 갈래(身4 語3)에 의해 획득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14)
주8)의 본문 참조. “일체의 모든 유정의 소의신에 대해 선한 의요(意樂)로 머물러야 비로소 율의를 획득할 수 있다.”(『구사론』 제15권, 고려장27,p.563하; 대정장29, p.78중; 권오민 역,p.682)
15)
다시 말해 만약 부처님 내지 개미 등에 대한 율의에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인간(인취)에 대해 획득되는 율의와 개미(방생)에 대해 획득되는 율의의 수는 달라야 한다. 예컨대 개미에 대해서는 욕사행이나 어(語)의 네 가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16)
타승죄(pārājika, 즉 波羅夷法)는 사음 투도 살인 대망(大妄, 깨닫지 않았으면서 깨달았다고 거짓말하는 것)의 네 가지 극중죄. 이를 범한 경우 교단에서 추방됨.
17)
이는 곧 율의는 특정의 유정(보특가라), 특정의 갈래, 특정의 장소 등에 한정하여 획득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18)
율의는 일체 유정을 대상으로 하여 획득되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자신은 제외되며, 따라서 불환과 등의 하위로 물러날까 두려워하여 자해해서라도 무여열반에 들고자 하는 ‘사법(思法)’의 아라한도 무간죄를 범한 것이 아니다. 사법의 아라한에 대해서는 본론 제67권 ‘아라한의 6종성’에서 상론한다.
19)
여기서 능력이 미치는 경계[能境](『구사론』에서는 所能境)란 현재의 온ㆍ처ㆍ계 중에서 우리들의 능력이 미치는, 다시 말해 해코지할 수 있는 범위의 유정을 말하며, 능력이 미칠 수 없는 경계[不能境](『구사론』에서는 非所能境)란 과거ㆍ미래의 온ㆍ처ㆍ계와, 이를테면 상계의 유정처럼 능력이 미치지 못하여 해코지할 수 없는 유정을 말한다. 본 단은, 앞서 논의한 것처럼 특정의 유정에 한정하지 않아야 율의를 획득하는 것이라면, 바로 ‘이 같은 능력이 미칠 수 없는 경계를 대상으로 하여 어떻게 율의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이다. 여기에는 고래로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일체의 유정을 대상으로 하여 동일한 신(身)3 어(語)4의 7지(支)의 율의를 획득한다는 총발설(總發說)과 일체의 유정 각각에 대해 각각의 7지를 일으키므로 유정의 수만큼 계체(戒體)가 존재한다는 별발설(別發說)이 그것이다. 전자가 경주 세친의 설이라면, 후자는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설이다.
20)
『구사론』 제15권(고려장27,p.563하; 대정장29,p.78중; 권오민 역,p.683) 상에서 이는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설이다. 즉 만약 살생 등의 업도가 불가능한 유정에 대해서는 율의를 획득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인간계에서 불살생율의의 대상이 되었던 자가 천상계에 태어날 경우, 그 사람에 대해서는 지율자(持律者)의 의사(의요)와는 관계없이 율의를 버려야 하며, 따라서 율의는 그만큼 감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율의의 획득의 연에 대해서는 앞에서 논설하였고, 사기(捨棄)의 연에 대해서는 후술함.)
21)
모든 율의는 무탐 등의 선근을 근거로 하여 불살생 불투도 등의 개별적인 계로 낳아진 것이므로 계체(戒體)는 단일한 무표이다. 따라서 그것은 각각의 유정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유정을 대상으로 한다.(후술)
22)
유부 비바사사가 일체 유정 각각에 대해 각각의 7지계를 획득한다는 별발설(別發說)을 주장하고 있는데 반해, 세친은 일체의 유정 전체에 대해 하나의 7지계를 획득한다고 하는 총발설(總發說)을 주장함으로서 그 같은 율의의 증감문제를 해소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본론에서는 세친의 해명으로 끝나고 있지만, 『현종론』(제20권)에서는 “전후 부처님의 공덕이 평등하다고 함은 유루에 근거한 것으로, 동일신의 전후의 분위 차별에도 역시 증감이 있을 것인데, 하물며 다른 몸과 비교하여 증감의 과실이 없다고 하겠는가?”로 끝맺고 있다. 곧 별발설을 주장함으로써 계체(戒體) 상에는 증감이 있다는 것이다.
23)
앞서 불율의는 일체의 업도에 따라 일어난다고 하였다. 예컨대 다만 양을 죽인다는 한가지 업도만으로 불율의는 성취되지 않는다.
24)
『구사론』 제15권(고려장27,p.564중; 대정장29,p.78하; 권오민 역,p.685). 이는 경주 세친, 혹은 경부사에 의해 제기된 힐난이다. 즉 유부에서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율의와 불율의는 일체의 유정을 대상으로 하고, 세 가지 신업과 네 가지 어업의 7지(불율의의 경우 일체의 악업)를 갖추어야 비로소 획득되는 것이라고 논의하지만, 경부에 의하는 한 일부의 유정을 대상으로 한 일부의 악업에 의해서도 불율의는 획득된다. 이하 문답은 경부사와 유부 비바사사 사이에 이루어진 것임.
25)
이상은 “절친한 이가 현재 양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에 대해 해코지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성자는 필시 양 따위가 될 리가 없는데 어떻게 그를 대상으로 하여 불율의를 획득할 것인가?”고 한 『구사론』(제15권, 고려장27,p.564중; 대정장29,p.78하; 권오민 역,p.686) 상에서의 경부의 힐난에 대한 해명으로, 윤회를 전제로 한 답이다. 즉 절친한 이는 물론 타인에 대해 해코지할 마음이 없다할지라도 끝없이 윤회하는 동안 일체중생은 언젠가는 양이 될 것이고, 그 때는 도양자(屠羊者)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도양자는 양뿐만 아니라 일체중생에 대해 해코지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뜻이다.
26)
『구사론』 제15권(고려장27,p.564중; 대정장29,p.78하; 권오민 역,p.686).
27)
실제로는 신(身)3 어(語)4의 악업을 모두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양을 죽이는 불율의로 인해 근본적으로 선심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7지 전체의 불율의를 획득한다는 뜻이다.
28)
이는 “어떤 사람이 일찍이 두세 가지의 학처(學處)를 수지하였으나 혹 어느 때 [어떤 인연을 만나] 다만 살생의 업만을 수득하였을 뿐 그 밖의 다른 학처에 대한 선한 아세야는 손상시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7지의 악계를 모두 낳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경부의 힐난(『구사론』 제15권, 고려장27,p.564중; 대정장29,p.78하~79상; 권오민 역,p.687)에 대한 해명이다. 이를테면 이전에 불살생ㆍ불투도ㆍ불사음의 계를 받았던 이가 어떤 사정에서 도살자가 되었지만 불투도 등에 대한 의요가 아직 손상되지 않은 경우처럼 살생으로 인하여 선한 의요가 완전히 허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힐난에 대해 중현은 그 때의 살생업은 맹서에 의한 불율의가 아니라 다만 처중(處中)의 죄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부에 의하는 한, 계(율의)는 모두 갖추어 받아야 한다. 본론 제37권 ‘경부의 5계 분수설 비판’ 참조.
29)
『구사론』 제15권(고려장27,p.564하; 대정장29,p.79상; 권오민 역,p.687). 즉 율의는 불율의에 반대되는 것이고, 불율의는 율의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수량이 어떠하든, 다시 말해 모든 갈래를 대상으로 삼든 일부의 갈래를 대상으로 삼든 율의와 불율의를 성취할 수 있다. 다만 근주의 8재계(齋戒)는 하루 낮밤을 기한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신3 어1(허광어)을 모두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30)
신(身)3 어(語)4의 7지를 모두 갖추었거나 갖추지 않았거나, [유정] 전체를 대상으로 삼거나 일부를 대상으로 삼거나 간에 모두 불율의를 획득할 수 있다면, 예컨대 양을 죽이는 일을 생업으로 삼기로 맹서하고서 나머지 4계만을 받을 경우에도 근사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
31)
여기서 전(kṣetra)이란 복전(福田)을 말하며, 수(ādāna)란 집지(執持)ㆍ섭수(攝受)의 뜻이다. 그리고 중행(ādarehana)이란 중대하게 고려되어 행해진 것이라는 뜻이다.
32)
본론 제35권 주24)의 본문 참조.
33)
본론 제36권 ‘율의ㆍ불율의를 획득한 자의 악ㆍ선 무표의 성취관계’ 참조.
34)
더 이상 계를 지킬 뜻이 없어 지금까지의 작법(作法)을 버리고자 하는 의사(의요)를 일으켜 능히 그러한 뜻을 알아주는 이에게 말(어표업)함으로써 계를 버리게 된다. 즉 별해탈율의가 반드시 맹서의 발설에 따라 일어나듯이 그것의 기사(棄捨) 역시 버리고자 하는 마음에 의해서만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후술)
35)
즉 별해탈율의는 중동분인 소의신에 근거하여 획득 상속되기 때문에, 목숨이 다하여 소의신을 버릴 때 율의도 버리게 된다.
36)
소의신이 변화하여 남ㆍ여근이 동시에 발생하는 경우 마음도 따라 변이하기 때문에, 성(性)에 따른 필추ㆍ필추니 내지 근사ㆍ근사녀의 율의는 버려지는 것이다.
37)
왜냐하면 “받을 때와는 다른 표업이 생겨났기 때문이며, 소의신을 버렸기 때문이며, 소의신이 변하였기 때문이며, [율의의] 근거가 끊어졌기 때문이며, 기한이 지났기 때문이다.”(『구사론』 제15권, 고려장27,p.565상; 대정장29,p.79중; 권오민 역,p.690)
38)
이는 경부(經部)의 주장이다. 그들은 ‘네 가지 극중죄를 범한 자는 비구의 근본을 깨트리고 사문의 덕성을 해친 타승(他勝,즉 波羅夷)으로 비구 사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불설(佛說)을 들어 그같이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불설에 대해 유부 비바사사는 ‘4바라이를 범한 이는 사계(捨戒)하지는 않지만 견도를 획득하는 승의의 비구가 될 수 없다고 하는 뜻을 은밀히 그렇게 말한 것이다’고 해석하고 있다.(후술) 여기서 네 가지 극중죄란 주16) 참조.
39)
이는 달마구다부(達磨毬多部, Dharmaguptaka, 法藏部 혹은 法密部라고도 함)의 주장으로, 여기서 결계(sīmabandha, 구역에서는 戒壇)란 율의자들이 머무는 교구를 말하며, 갈마(karma)란 수계 혹은 참회의 의식작법을 말한다.
40)
『대비바사론』 제119권(한글대장경122,p.458), “가습미라국의 모든 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가 율의를 범할 때 율의를 버리지 않으며 비율의비불율의를 획득하니, 그래서 그 때를 일컬어 비율의비불율의에 머무는 자라고 하고 역시 율의에 머무는 자라고도 한다. 그러나 만약 그 때 숨기는 마음 없이 드러내어 법대로 참회하고 제거하면 비율의비불율의를 버리고 다만 율의에 머무는 자라고 이름할 뿐이다. 이는 마치 어떤 부자가 남에게 빚지고 있을 때에는 부채자라고도 하고 부자라고도 하다가 빚을 갚고 나면 다만 부자라고 하는 것과 같다.”
41)
본론 제37권 ‘경부의 5계 분수설(分受說) 비판’ 참조.
42)
상동.
43)
“양을 죽이는 등의 불율의를 행하는 자들도 자기와 절친한 이에 대해서는 결코 해코지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신명(身命)을 구호해 주는 인연에 대해서도 역시 죽이려 하지 않거늘 어떻게 일체의 유정을 두루 대상으로 하여 불율의를 획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본권 ‘불율의는 일부 유정을 대상으로 하여서도 획득된다는 경부 설 비판’ 참조)
44)
『십송율(十誦律)』 제21권(대정장23,p.157상). 여기서 ‘타승’이란 바라이(波羅夷, pārājikā)의 역어로서, 보광의 『구사론기』(제15권)에 따르면 선법을 ‘자(自)’라 하고 악법을 ‘타(他)’라고 하였을 때, 선법이 악법보다 수승할 경우 ‘자승’이라 하고 악법이 선법보다 수승할 경우 ‘타승’이라 한다. 그래서 네 가지 극중죄를 타승죄(他勝罪)라고 한 것이다.
45)
여기서 승의의 필추(구역에서는 眞實比丘)란 견도 이상의 성자를 말한다(이에 반해 세속의 필추는 바로 이생 범부를 말한다). 즉 네 가지 극중죄(바라이법)을 범한 이는 비록 율의를 버리지는 않지만 견도 이상의 성자는 될 수 없다는 뜻을 은밀히 그렇게 말하였다는 뜻이다.
46)
경부의 주장대로 4바라이죄 이외의 죄는 참회하여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범한다고 하여 일체의 계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범하고서 아직 참회하여 제거하지 않은 자와 참회하여 제거한 자는 달라야 한다.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생천(生天)할 수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니라 출세간의 공덕(즉 성도)을 획득할 수 있고 없고의 차이이며, 따라서 앞서 인용한 계경에서 네 가지 중죄 운운한 것은 그것을 범한 경우 그것은 참회하여 제거될 수 있는 죄가 아니기 때문에(후설) 그들은 결코 출세간의 공덕을 획득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필추 등이 아니다’고 한 것이지 그 밖의 일체의 계를 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47)
다시 말해 4바라이 이외의 죄를 범하였음에도 그것을 참회하여 제거하지 않은 비구와 결코 참회하여 제거할 수 없는 4바라이죄를 범한 비구는 다 같이 출세간의 공덕(무루성도)을 획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뜻이다.
48)
『구사론』 제15권(고려장27,p.565중; 대정장29,p.79중; 권오민 역,p.692).
49)
‘흉발(凶勃]’을 『구사석론』(제11권, 대정장29,p.235하)에서는 불계명대과사(不計命大過事) 즉 ‘목숨을 헤아리지 못하는 커다란 허물’이라 번역하고 있다.
50)
‘네 가지 중죄를 지으면 비구가 아니다’는 말 그대로의 사실을 왜곡하여 다만 견도의 성자가 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경우, 이는 번뇌가 많은 이로 하여금 중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근거(緣)를 마련해 주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51)
『십송율』 제1권(대정장23,p.2상), ‘비구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명자(名字)비구이며, 둘째는 자언(自言)비구이며, 셋째는 위걸(爲乞)비구이며, 넷째는 파번뇌(破煩惱)비구이다……’ 원문에서의 네 번째는 파계필추(破戒苾芻)이지만, 『구사론』에 따라 파혹필추(破惑苾芻)로 고쳐 번역하였다.
52)
앞서 ‘극중죄를 지은 자는 필추라 이름하지 않는다’고 하였을 때의 비구는 지금 여기서 인용한 네 종류 이외의 비구가 아니지만, 백사갈마(白四羯磨, 혹은 一白三羯磨, 수계할 때 羯磨師가 아무개에게 수계한다고 고한 다음 수계의 가부를 세 번 가부를 묻는 형식의 작법)라는 수계의식을 통해 구족계를 받은 비구도 아니다. 즉 견도 이상의 성자로서 4중죄를 범하는 이는 없으며, 따라서 그에 대해 ‘비구가 아니다’고 하였을 리도 없다. 그러므로 율에서 ‘필추라 이름하지 않는 이’는 적어도 성자가 아니며, 따라서 앞서의 경설은 승의비구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53)
여기서 ‘시도’란 중생을 인도하여 발심하게 하는 불타의 공덕(이생이나 성자와도 공통되는 공덕)으로, 여기에는 신변시도(神變示導)ㆍ기심시도(記心示導)ㆍ교계시도(敎誡示導)가 있다. 본론 제76권 참조.
54)
주52) 참조.
55)
‘방일하면 성혜(聖慧)로부터 물러나게 된다’는 말은 미래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에 근거하여 설한 것으로, 미래에 견도를 증득할 승의의 필추도 그럴 만한 공능을 갖지 않았다면 ‘[승의의] 필추가 아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56)
‘여기서’란 앞서 경주가 인용한 주44)의 계경.
57)
『장아함경』 제3권 『유행경』(대정장1,p.18중)에 의하면, 첫째는 도를 행함이 수승한 사문[行道殊勝], 둘째는 도의 뜻을 잘 설명하는 사문[善說道義], 셋째는 도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사문[依道生活], 넷째는 도를 위해 악을 짓는 사문[爲道作穢]이다. 이를 『구사론』(제15권, 고려장p.565하; 대정장p.79하; 권오민 역,p.693)에서는, “세존께서 준타(准陀, Cunda)에게 고하기를 ‘네 종류의 사문이 있을 뿐 다섯 번째의 사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말한 바 네 종류의 사문이란 첫째는 승도사문(勝道沙門)이며, 둘째는 시도사문(示道沙門)이며, 셋째는 명도사문(命道沙門)이며, 넷째는 오도사문(汚道沙門)이다.”고 인용하고 있다. 『대비바사론』 제66권(한글대장경120,p.362)의 논설에 따르면, 첫 번째 ‘행도수승’ 즉 승도(mārgajina)사문은 부처 독각과 같은 무사독오(無師獨悟)의 사문, 두 번째 ‘선설도의’ 즉 시도(mārgadaiśika)사문은 존자 사리자와 같이 견줄 만한 이가 없는 대장군으로 항상 부처를 따라 법륜을 굴리는 일체 무학의 성문, 세 번째 ‘의도생활’ 즉 명도(mārgajīvin)사문은 아난다처럼 유학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무학과 같이 많이 듣고 청정한 계를 수지한 일체의 유학, 네 번째 ‘위도작예’ 즉 오도(mārgadūṣin)사문은 막락가(莫落迦)비구처럼 남의 물건을 좋아하는 악비구이다.
58)
『구사론』 제15권(고려장27,p.565하; 대정장29,p.79하; 권오민 역,p.694).
59)
여기서 ‘불에 탄 목재’는 오도사문(극중죄를 범한 비구)의 비유로, 일부가 탄 것도 완전히 탄 것도 모두 ‘불에 탄 목재’라고 할 경우 오도사문의 외연이 확정되지 않아 논증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일부의 극중죄를 범한 비구와 일체의 극중죄를 범한 비구는 ‘불에 탄 목재’와 ‘재’처럼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60)
완전히 물이 말랐을 때에도 마른 못이라고 하지만, 수심 10m의 못일 경우 1m가 채 되지 않아 못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에도 ‘못이 말랐다’고 말한다. 따라서 ‘말랐다’고 하는 예는 구체적인 내용을 지시하지 않기 때문에 극중죄를 범한 필추의 예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61)
불 바퀴는 다만 형태상으로만 바퀴이지 실제 바퀴로서의 공능이 없다. 이러한 비유가 지시하는 것은 형태상으로만 비구일 뿐 실제 비구로서의 공능(계)을 갖지 않은 사문이지만, 그러한 사문은 네 가지 사문 중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다시 말해 다섯 번째 사문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경설에 대한 올바른 비유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62)
주44) 참조.
63)
일체의 율의를 단박에 버린 이를 다만 ‘시라를 갖지 않은 이[無尸羅]’라고 말할 경우, 시라(즉 계)는 선악 모두를 포함하므로 선한 시라를 갖지 않은 이를 말하는지 악한 시라를 갖지 않은 이를 말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나아가 외도의 선계는 불교에서 본다면 악계이므로 ‘선계를 갖지 않은 이’라고 하는 말 또한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는 뜻의 힐난이다.
64)
이는 경주 세친의 대론자(즉 유부)의 입장에서 제기된 물음이다. 즉 중죄를 범한 이는 일체의 계를 모두 상실하여 비구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에게 다시는 학처를 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난제(難提)비구는 4중죄를 범하였지만 숨김없이 고백하고 참회하였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다시 계를 주어 배우게 하였다고 한다.
65)
『구사론』 제15권(고려장27,p.565하; 대정장29,p.79하; 권오민 역,p.694). 『구사론』에서는 이하 계속하여 중죄를 범하였더라도 타승죄를 성취하지 않는 경우에 대해 논설하고 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의 상속에 수승한 [참ㆍ괴가] 있다면 비록 극중의 계를 범하였을지라도 타승죄가 아니니, 그에게는 한치의 숨긴 마음도 없기 때문으로, 법주(法主) 세존께서 설정하신 바도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66)
주43) 참조.
67)
주40) 참조.
68)
『구사론』 제15권(고려장27,p.565중; 대정장29,p.79중; 권오민 역,p.692~693). 다라수(多羅tāla樹)는 야자과에 딸린 식물로서, 높이는 20m정도. 2~3m 크기의 부채꼴의 잎은 종이로 대용되며 패엽(貝葉) 패다라엽(貝多羅葉)으로 불림. 이 나무는 줄기의 윗 둥치를 자르면 더 이상 성장하지 않기 때문에 경론에서 중죄를 범하면 선근이 상실되어 더 이상 지견(知見)이 회복되지 않는다는 뜻에 비유됨.
69)
주43)의 본문 참조.
70)
『구사론』 제15권(고려장27,p.565하; 대정장29,p.79하; 권오민 역,p.695). 『구사론』상에서의 완전한 인용은 이러하다. “그의 상속신이 이미 극중한 무참과 무괴로 인해 허물어졌기 때문에 능히 출가하여 율의를 낳을 만한 힘이 없으니, 마치 불에 그을린 종자와도 같다. 따라서 그에게 필추율의가 있다고는 관찰되지 않으며, 그래서 거듭 출가하여 수계하게 하지 않으신 것이다. 왜냐하면 설령 [다시 수계한] 후 그를 필추라 일컬을지라도 다시 학처를 버리게 되면 또 다시 그가 거듭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니, 이같이 아무런 이익도 없는 이를…….”
71)
필추의 체성[苾芻性]이 다만 출가하여 획득한 구족계에 있다면, 사문의 체성[沙門性, śrāmaṇya]은 오로지 청정한 무루의 성도이다.(본론 제67권에서 상론함) 즉 극중죄 중의 한 가지를 범한 이는 필추가 아니기 때문에 예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루의 성도를 닦을만한 공능을 갖지 않기 때문에 예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72)
주36) 참조.
73)
“만약 타승죄를 범할 때 일체의 율의를 상실하여 필추가 아니라고 한다면,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그로 하여금 다시 출가하여 수계하도록 하지 않았던 것인가?(유부) 그의 상속신이 이미 극중한 무참과 무괴로 인해 허물어졌기 때문에 능히 출가하여 율의를 낳을 만한 힘이 없으니, 마치 불에 그을린 종자와도 같다.”(『구사론』 제15권, 고려장27,p.565하; 대정장29,p.79하; 권오민 역,p.694)
74)
이를테면 하지에서 몰하여 상지에 태어날 때 하지의 선법을 버리게 되며, 또한 역시 상지에서 몰하여 하지에 태어날 때 상지의 선법을 버리게 된다.
75)
내범위(內凡位)의 성자가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의 4선근 중의 상인(上忍)과 세제일법을 제외한(여기서는 반드시 견도로 나아가기 때문에 명종하지 않음) 난ㆍ정ㆍ하인ㆍ중인의 상태에서 목숨을 마칠 때나 청정한 선정에 미착(味著)하여 본래의 선정에서 물러날 때에도 정려생율의를 버리게 되는데, 이 경우에는 지(地)를 바꾼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송에서 ‘등’이라고 말하였다는 뜻이다. 내범위(즉 순결택분)에 대해서는 본론 제61권 ‘4선근’를, 순퇴분정에 대해서는 본론 제77권 ‘8등지와 미(味)ㆍ정(淨)ㆍ무루등지’를 참조 바람.
76)
경주 세친은 이에 대해 다만 “[본송에서] ‘등’이라고 말한 것은 중동분(衆同分)을 버릴 때에도 역시 일부의 수승한 선근을 버린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구사론』 제15권, 고려장27,p.566상; 대정장29,p.80상; 권오민 역,p.695)고 해석하고 있는데, 일부의 수승한 선근을 버릴 때(예컨대 中忍에서 下忍으로 물러날 때) 뿐만 아니라 이염할 때(예컨대 下忍에서 中忍으로 증진할 때)에도 하인에 계속되는 정려율의를 버린다고 말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77)
그러나 무색계에는 신(身)ㆍ어(語)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7지(支)의 율의를 버리는 일이 없다는 것은 색계의 경우와 다르다.
78)
어떤 이가 네 가지 사문과(沙門果) 중의 하나를 획득할 경우, 획득하는 성과의 향도(向道)와 그 이전의 과도(果道)를 모두 버리게 된다. 예컨대 아라한과를 획득할 경우 아라한향과 불환과에 포섭되는 무루율의를 버리게 된다.
79)
여기서 과도(phala mārga)란 성자의 과위(果位)에 속한 무루도로서, ‘과 중의 도’라는 뜻이며, 승과도(phala viśiṣtamārga)란 성과를 획득하기 이전에 뛰어난 과위로 나아가는 무루도를 말함. 예컨대 불환의 성자가 불환과로부터 일래과로 퇴실(退失)하였을 경우, 그는 불환과의 도[果道]와 그것으로 나아가는 불환향의 도[勝果道]를 함께 버리게 된다.
80)
그래서 『현종론』(제21권)에서는 본송 제3구와 제4구를 “온갖 무루의 선을 버리는 것은 성과(聖果)를 획득하거나, 물러나는 것에 의해서이다(捨諸無漏善 由得果退失).”로 개작하였다.
81)
“도류지는 과도(果道)에 포섭될 뿐더러 역시 또한 [여기서는] 필시 [또 다른 성과로] 물러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현종론』 제20권) 즉 일래과의 경우, 불환과를 획득함에 의해, 예류과로 물러남에 의해 일래과와 함께 하는 무루율의를 버리게 되지만, 예류과의 경우는 더 이상 물러날 과위가 없기 때문에 무루의 선법을 버리는 인연으로 ‘성과(聖果)를 획득함’과 ‘성과에서 물러나 상실함’을 별도로 분별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82)
다시 말해 더 이상 물러나는 일이 없는 부동법의 무학의 경우에는 상위의 성과를 획득함에 의해서도, 하위의 성과로 물러남에 의해서도 무루율의를 버리는 일이 없기 때문에 두 종류(果道와 勝果道)를 모두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83)
즉 율의나 불율의는 바로 소의신의 중동분(衆同分)의 세력에 의해 획득되기 때문이다.
84)
목숨이 다할 때까지 불율의를 버린다고 맹서하지 않고 하루 낮밤 동안만 버리겠다고 맹서하였기 때문에 악한 의요가 영원히 사기(捨棄)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즉 뜨거운 쇳덩이가 푸른색이 되었다고 해서 뜨거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85)
시위를 떠난 화살도 옹기장이가 돌리는 물레의 바퀴도 그 세력이 다할 때 바로 멈추게 된다.
86)
여기서 ‘근본[업도]를 수지하려는 마음’이란, 이를테면 ‘‘항상 일정한 시간에 제다(制多, caitya, 塔廟를 말함)를 공경하여 예배하고 찬송하리라’고 맹서하였던 선한 의요를 말한다. 즉 이러한 선한 의요를 버리지 않았을지라도 그러한 맹서를 실행하지 않았을 경우 앞서 맹서한 선한 무표는 파기된다.
87)
덫을 놓아 짐승을 잡겠다는 의요(意樂)를 일으켜 덫을 설치하였지만, 덫이 망실되었을 경우 앞서의 무표는 파기된다.
88)
『구사론』 제15권(고려장27,p.566하; 대정장29,p.80중; 권오민 역,p.699).
89)
여기서 ‘욕계의 비색(非色)’이란 표ㆍ무표색이 아닌 욕계의 선법(生得善과 聞ㆍ思所成慧의 加行善)을, ‘그 밖의 일체의 비색의 염오법’이란 3계의 일체 번뇌 등의 염오법을 말한다.
90)
선체(ṣaṃdha, 無根으로 번역됨)는 생식기가 없는 자, 반택가(paṇḍaka, 不男, 또는 黃門. 중국에서 황색의 궁궐 문을 지키는 이가 내시이기 때문에 ‘황문’임)는 남근불구자를 말함. 보통 반택가라고 하면 성불구자로서, 여기에는 나면서부터 없는 이[扇搋], 잘라버린 이[留拏], 다른 이의 음행을 보고야 정욕을 일으키는 이[伊利沙], 음행할 때 상실되는 이[般吒], 한 달에 반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博叉] 등 다섯 가지가 있다.
91)
온전하게 인용하면 이와 같다. “부처님께서 대명(大名,Mahānāma,摩訶男)에게 고하기를, 집에 머무는 백의(白衣)의 남자이면서 남근을 성취한 온갖 유정이 불(佛)ㆍ법(法)ㆍ승(僧)에 귀의하고, 간절하고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 진실 된 말로 ‘나는 바로 오파색가(鄔波索迦, 우바새 즉 근사)입니다. 원하건대 존자께서 기억하시어 자비로써 호념(護念)하소서.’라고 스스로 일컬으면, 이들을 모두 오파색가라고 이름한다.”(『잡아함경』 제33권 제927경; 본론 제37권 ‘삼귀의와 근사’ 참조)
92)
『십송율』 제21권,「수구족계법(受具足戒法)」 제1(대정장23,p.153하)에서는 생(生)ㆍ반월(半月)ㆍ투(妬)ㆍ정(精)ㆍ병(病) 등의 5종 불능남(不能男)에게는 구족계를 줄 수 없다고 설하고 있다.
93)
악취인 용이 비록 근주의 8재계를 수지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처중(處中)의 묘행(妙行)일 뿐 율의가 아니라는 뜻이다.
94)
원문은 ‘生無色界彼俱非有’이나 『구사론』(제15권, 고려장27,p.567상; 대정장29,p.80하)에 따라 ‘生無色界彼必非有’로 고쳐 번역하였다.
95)
왜냐하면 중간정과 무상천은 이생ㆍ외도만이 태어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제40권
1)
이 같은 3업설은 현존 4아함 상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경에서 뜻을 취하였거나 근본 아비달마(『발지론』에 따라 이같이 논설하였을 것이다. 예컨대 장아함 제8권 『중집경』에서는 세 가지 악행과 세 가지 선행을 설하고 있으며, 『잡아함경』 제18권 제490경에서는 무명의 대상으로서 선ㆍ불선ㆍ무기를 설하고 있다.
2)
여기서 ‘안온한 업(kṣema karma)’이란 안온한 과보를 초래하여 향수하게 하는 업이라는 뜻으로, 이는 결과를 원인의 명칭으로 삼은 경우이다. 참고로 『바사』(제25권, 한글대장경118,p.557)에서는 손해행(損害行)을 불선업이라 하고, 불손해행을 선업이라 하였다.
3)
『중아함경』 제27권 『달범행경(達梵行經)』(대정장1,p.600상) 참조.
4)
『중아함경』 제50권 「가루오타이경(加樓鄔陀夷經)」(대정장2,p.743상)에서는 ‘초정려에는 심(尋)ㆍ사(伺)가, 제2정려에는 희(喜)가, 제3정려에는 낙(樂)이 있기 때문에 아래 세 정려를 유동(有動), 즉 이동이 있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는데, 상 2계의 선을 ‘부동업’이라고 하면 이 같은 경설과 모순되지 않는가? 하는 난문.
5)
심ㆍ사의 재환에 대해서는 본론 제32권 ‘대삼재’와 제78권 ‘정려의 동(動)과 부동(不動)’을 참조할 것.
6)
『중아함경』 제18권 제75경 『정부동도경(淨不動道經)』(대정장1,p.542중; 한글대장경 『중아함경』1,p.204).
7)
욕계의 업은, 축생ㆍ인간ㆍ천취 등의 보편적 과보[總報]를 초래 인기하는 인업(引業)과 남녀ㆍ빈부ㆍ귀천 등의 차별적 과보[別報]를 초래하여 유정의 일생을 다양하게 원만 장엄시키는 만업(滿業)이 대체로 정해져 있지만(본론 제43권 ‘인업과 만업’ 참조), 산지(散地)이기 때문에 강력한 선ㆍ악심이 일어나면 그 힘에 의해 취처(趣處)가 바뀔 수 있다. 다시 말해 인취의 업이 천취의 이숙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상계의 업, 이를테면 초정려의 업은 초정려의 이숙을 초래하는 등 자지(自地)의 이숙과만을 초래하며 결코 다른 지의 이숙과를 초래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부동업’이라고 한 것이다.
8)
여기서 ‘수(受)의 자량’이란 수가 생겨나게 되는 근거로서, 수 이외의 4온(普光의 해석), 혹은 근ㆍ경과 소의(稱友의 해석), 혹은 구유법과 온갖 근ㆍ경(安慧의 해석) 등을 말한다.
9)
중려중간에는 이미 고수와 낙수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마땅히 그것을 초래하는 업도 없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정려중간에서도 이숙과가 초래되며, 따라서 그것은 사수(捨受)의 이숙과이기 때문에 거기서의 이숙업은 순불고불락업(즉 順非二業)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정려중간(中間定)이란 유심유사(有尋有伺)의 초정려와 무심무사(無尋無伺)의 제2정려 중간으로, 무심유사지(無尋唯伺地)를 말한다.
10)
이는 중간정과 초정려는 동일한 단계이기 때문에 중간정의 무심유사(無尋唯伺)의 업은 근본 초정려 지 중의 안(眼)ㆍ이(耳)ㆍ신식(身識)과 상응하는 낙근의 이숙을 초래한다는 뜻으로, 『구사론』(제15권, 고려장27,p.567하~568상; 대정장29,p.81중;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707) 상에서는 또 다른 유여사의 이설로서 비판되고 있지만, 본론에서는 앞의 유여사설을 비판하는 논거로 제시하였다.
11)
여기서 본론은 『발지론』 제11권(대정장226,p.973상; 한글대장경176,p.239). 선한 무심지(無尋支)란 초정려를 제외한 정려중간(無尋唯伺地) 이상의 선정을 말한다.
12)
본론 제4권 ‘유심유사(有尋有伺) 등의 분별’ 참조.
13)
즉 본론에서 말한 ‘무심지의 업’이란, 제2정려의 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의 업을 말한 것이지 무심유사(無尋唯伺)의 중간정려를 말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14)
『발지론』(앞의 책), “혹 업으로서 신수와 심수의 이숙을 초래하지 않는 업이면서 이숙과를 초래하는 것이 있는가? 있다. 이를테면 색과 불상응행의 이숙을 초래하는 온갖 업이 바로 그것이다.” 참조.
15)
『발지론』 제11권(대정장26,p.974하; 한글대장경176,p.246). 순락수업은 안(眼) 등의 색의 이숙과를 초래하고, 순고수업은 욕계 고수와 상응법(5식과 상응하는 법)을 초래하며, 이와 동시에 순불고불락수업은 명근 등을 초래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로써 순불고불락수업, 즉 순사수업(順捨受業)이 욕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여기서 순고수업은 오로지 욕계의 과보만을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6)
『발지론』 제11권(같은 책), “3계에 계속(繫屬)되는 업으로서 이전도 아니고 이후도 아닌 동일찰나에 이숙과를 받는 경우가 있는가? 있다. 욕계계의 업이 색을, 색계계의 업이 심ㆍ심소법을, 무색계계의 업이 심불상응행을 받을 때이다.……”
17)
『품류족론』 제7권(대정장26,p.718상), ‘順樂受業云何? 謂欲界繫善業, 色界繫 乃至 第三靜慮地善業. 順苦受業云何? 謂不善業. 順不苦不樂受業云何? 謂第四靜慮地繫善業 及無色界繫善業.’
18)
방소에 거주하는 이생의 과보 중에서 광과천이 가장 수승하다.(본론 제21권 ‘색계’ 참조)
19)
이는 『구사론』(제15권, 고려장27,p.568상; 대정장29,p.81중; 권오민 역,p.707)에서의 정설로서, 제4정려 이하의 수승한 선업은 모두 낙수를 초래하기 때문에, 선업으로서 사수를 초래하였다면 그것은 뛰어난 것이 아니다.
20)
이는, “제4정려 이하의 사수(捨受)의 업은 선업이지만 저열한 것이라고 한다면 앞에서 설한 ‘선업 중에서 [욕계로부터 시작하여] 제3정려에 이르기까지의 선업을 일컬어 순락수업(順樂受業)이라 하며, 참으로 애호할 만한 과보를 얻는 것을 일컬어 선업이라 한다’고 한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가?”(『구사론』, 고려장27,p.568상; 대정장29,p.81중; 권오민 역,p.708)에 대한 해명이다. 즉 그것은 대부분이 그렇다는 말이지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21)
이는, “낙(樂)은 감수되는 것이고 업(業)은 감수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업’과 ‘수’는 그 체성(體性)이 다른데, 어떻게 업을 순락수 등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구사론』, 앞의 책) 하는 난문의 답이다. 즉 말을 위한 장소를 순마처(順馬處)라고 하듯이 업은 낙수 등을 위한 것, 다시 말해 능히 자량이 되어 낙수를 증익하기 때문에 ‘순락수’라고 한 것이며, 가루비누[散=洗粉]는 목욕하는데 반드시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순욕산(順浴散, snānīya-kaṣāya)이라고 하듯이 낙수 등은 업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이러한 업에 따라 능히 낙수 등의 이숙과를 받기 때문에 ‘순락수’ 등이라고 하였다는 뜻이다.
22)
『잡아함경』 제12권 제290경(대정장2,p.82상). 자성순수란 영납(領納)을 자성하는 ‘수’ 그 자체를 말한다.
23)
같은 경.
24)
『잡아함경』 제13권 제313경(동p.90하).
25)
『중아함경』 제15권, 「사경(思經)」(대정장1,p.437).
26)
『중아함경』 제24권, 「대인경(大因經)」(대정장1,p.580상).
27)
순현법수업(또는 順現業)은 현생에 지은 업의 과보가 현생에 이숙하여 나타나는 업이며, 순차생수업(또는 順生業)은 다음 생에 이숙하여 나타나는 업이며, 순후차수업(또는 順後業)은 다음 생 이후에 이숙하여 나타나는 업이다.(후술)
28)
과보를 초래하는 시기는 결정적이지 않으나 이숙이 결정적인 업[時不定異熟定業]과 과보를 초래하는 시기와 이숙이 모두 결정적이지 않은 업[時異熟俱不定業].
29)
예비적(혹은 준비) 단계의 업이 가행이라면 본격적인 행위가 근본업도, 그에 따른 부수적인 행위가 후기이다.(본론 제41권 ‘가행ㆍ근본ㆍ후기의 의미’ 참조)
30)
일생 즉 하나의 중동분을 인기(引起)하는 하나의 업을 견인업(혹은 引業, 구역에서는 總報業)이라고 하며, 한 번의 생을 여러 내용의 성질로 원만하게 장엄하는 다수의 업을 원만업(혹은 滿業, 구역에서는 別報業)이라고 한다.(본론 제43권 참조) ‘조작’과 ‘증장’을 솔이작(率爾作)과 (思已作)으로 분별하는 것에 대해서는 본론 제44권 ‘조작업과 증작업’ 참조.
31)
다시 말해 ‘다음 생이나 혹은 그 다음다음 생 이후에 이숙과를 초래하는 모든 업을 나타내지만.’
32)
차주(次註) 참조. 『대비바사론』 제114권(대정장27,p.593중; 한글대장경122,p.327), “온갖 순현법수업 내지 순후차수업은 바꿀 수 없지만, 온갖 순부정수업은 바꿀 수 있다. 즉 이러한 네 번째의 업을 바꾸기 위해서는 금계를 수지하거나 범행을 부지런히 닦으면서 이같이 생각해야 한다. ‘원컨대 나는 이로 말미암아 당래 이 같은 업을 바꾸게 되리라.’”
33)
『중아함경』 제3권 「염유경(鹽喩經)」(대정장1,p.433중). 즉 여기서는, “불선의 업을 지은 어떤 이는 반드시 고과(苦果)로서 현법(現法)의 과보를 받는데, 그것은 몸[身]을 닦고, 계(戒)를 닦고, 마음을 닦고, 혜(慧)를 닦아 수명이 길어졌기 때문이며, 불선의 업을 지은 어떤 이는 반드시 고과로서 지옥의 과보를 받는데, 그것은 몸도 닦지 않고, 계도 닦지 않고, 마음도 닦지 않고, 혜도 닦지 않아 수명이 짧아졌기 때문이다”고 설하고 있다.
34)
같은 경(대정장1,p.433상중).
35)
『구사론』 제15권(고려장27,p.568하; 대정장29,p.81하; 권오민 역,p.710-711). 『구사론』상에서 마지막 구절은 “[그 같은 정업은] 강력한 업이어서 이숙과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이다. 이상의 논설은 『구사론』상에서는 유여사(有餘師)의 설로 인용되고 있지만, 보광에 의하면 경부사(經部師)의 논설이다. 즉 업의 상속에 의한 ‘일업인다생설(一業引多生說)’(본론 제43권 ‘인업과 만업’ 참조)을 주장하는 경량부에 의하면 순현법수업의 경우 수보(受報)의 시작은 현생이지만 그 업력이 강성하여 다음 생까지 계속될 수 있으며, 또한 순차생수업이나 순후차수업의 경우 역시 그 수보의 시작은 다음 생, 혹은 그 다음의 생이지만 그것이 미진할 경우에는 계속하여 이숙의 과보를 초래한다. 따라서 삼시업(三時業)은 유부에서처럼 초래되는 과보의 결정적인 시기에 따라 설정된 것이 아니라 다만 ‘수보의 시작’을 기준으로 하여 설정된 것으로서, 결과산출의 시기가 현생에 가까울수록 업력이 강성하며, 멀수록 경열(輕劣)하다는 것이다.
36)
예컨대 종자가 싹을 낳고서 다시 싹을 낳을 수 없듯이, 업이 이숙과를 현생(혹은 후생)에 낳았다면 내생(혹은 차후의 생)에 다시 낳을 수 없으니, 현생과 내생 사이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37)
이상 앞서 인용한 ‘하나의 업은 다수의 생을 초래한다’는 비유자의 이설을 비판하였고, 이하 이에 대한 또 다른 해명에 대해 비판한다.
38)
이는 “만약 하나의 업에 의해 다수의 생이 낳아진다고 한다면, 업에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에 죽고 태어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앞서의 비판에 대한 해명이다.
39)
이에 대해서는 후설(後說)하는 ‘비유자와 8업설 비판’을 참조할 것.
40)
다시 말해 천(天)의 과보를 받는 업을 지녔을 경우, 천에 태어나고 나서 후생에 언젠가 다시 천에 태어나게 될 때 그것의 과보를 받는 것이라고 한다면.
41)
주36) 참조.
42)
부처님의 경우 더 이상 윤회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어떠한 과보도 초래하지 않는다.
43)
아마는 심은 지 3개월 반이 지나면 그 결실을 거두지만, 보리는 요컨대 6개월을 지나야 비로소 결실을 거두는 것처럼, 업이 결과를 낳는 시기는 결정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만약 업이 다생에 걸쳐 결과를 낳는다면, 어떤 업의 결과는 또 다른 업과 뒤섞이게 된다. 『구사론』(제15권, 고려장27,p.568하; 대정장29,p.81하; 권오민 역,p.711) 상에서의 비바사사(毘婆沙師)의 논설은 이러하다. “이 같은 뜻(순현법수업은 이숙과가 적지 않은 강력한 업으로서 현생에서 처음으로 이숙하기 때문에 ‘순현법’이라 이름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니, 혹 어떤 업은 결과[를 초래하는 시기]가 가깝지만 수승(강력)하지 않은 것도 있으며 혹 어떤 업은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있다. 비유하자면 외적인 종자와도 같으니, 아마는 심은 지 3개월 반이 지나면 그 결실을 거두지만 보리는 요컨대 6개월을 지나야 비로소 결실을 거두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44)
이 같은 비유자(칭우에 의하면 경부비유자, Darṣtāntikāḥ sautrāntikāh)의 8업설은 『대비바사론』(제114권, 한글대장경122,p.328)에서는 유여사의 설이기 때문에 본송에서도 그렇게 설한 것이다. 이는 바로 유부의 4업설을 과보를 받는 시기와 이숙과의 정ㆍ부정에 따라 4구분별하여 8업설로 확장시킨 것으로, 이상의 2업ㆍ4업ㆍ5업ㆍ8업의 관계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45)
이는 앞서 논설한 비유자(譬喩者)의 8업설 중 시정이숙부정업(時定異熟不定業)을 비판한 것으로, 시간 자체는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 유위제법(5온)에 근거하여 일시 가설된 것이기 때문에(본론 제1권 주84 참조) 어떠한 경우에도 이숙과가 결정되지 않은 업은 받을 시기도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46)
무간업은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나 시기가 결정적인 것이라면 유정천에서의 업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가장 미세한 유정천에서의 업도 바꿀 수 있다[可轉]’는 사실로써 ‘무간업도 바꿀 수 있으며, 따라서 이숙과를 초래하는 시기는 결정된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다는 뜻이다.
47)
세 명의 사자를 보내 한 명에게는 살생을, 한 명에게는 도둑질을, 다른 한 명에게는 거짓말을 하게하고, 자신은 욕사행, 즉 사음을 행할 경우, 네 업은 동시에 성취된다.
48)
욕계의 염오를 떠난 불환과의 성자와 유정처의 염오를 떠난 아라한은 설사 그러한 과위로부터 물러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명종하지 않고 도중에 다시 회복하기 때문에(본론 제70권 ‘退果후의 再得과 그 때 짓는 업’ 참조) 순차생수업과 순후차수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49)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중유는 이치상 중유위와 태내(胎內) 5위와 태외(胎外) 5위의 과보를 초래하는 정업과 부정업 등 도합 스물두 가지 업을 지을 수 있다.
50)
갈랄람(kalalam)은 입태 후 첫 7일간, 알부담(arbudam)은 두 번째 7일간, 폐시(peśi)는 세 번째 7일간, 건남(ghanam)은 네 번째 7일간, 발라사가(praśākha)는 다섯 번째 7일로부터 이후 34번에 걸친 7일간이다. 또한 영해는 해산 후 6세까지이며, 동자는 7세부터 15세까지, 소년은 16세부터 30세까지, 중년은 31세부터 40세까지, 노년은 41세 이후의 시기이다.
51)
말하자면 중유와 태내ㆍ태외 각 5위는 한 번의 동일한 생 중에 포섭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52)
여기서 ‘등’이라 함은 순차생수업을 비롯한 순후차수업과 순부정수업 등을 의미한다. 즉 현재의 중유는 전생 이전의 업에 의한 것이고, 중유에 의한 업은 중유에서 사유(死有)에 이르는 동일한 동분을 인기하는 순현법수업이다.
53)
『구사론』 제15권(고려장27,p.569중; 대정장29,p.82중; 권오민 역,p.716)에서는 “수승한 보특가라로서 뛰어난 과위(果位), 뛰어난 선정을 획득한 자를 말한다”로 되어 있다. 여기서 ‘뛰어난 과위[勝果]’란 견소단(見所斷)의 번뇌를 끊은 예류과와 수소단(修所斷)의 번뇌를 끊은 아라한과를 말하며, 뛰어난 선정[勝定]이란 멸진정이나 자ㆍ비ㆍ희ㆍ사 등의 등지(等至)를 말하는데, 전자가 출세간의 뛰어난 공덕이라면, 후자는 세간의 뛰어난 공덕이다.
54)
본 송은 이상의 정업 중 현생에 그 과보를 받는 업에 대해 분별한 것으로, 이를테면 수승한 복전에 대해 행해진 업, 뛰어난 의지력[意樂]에 의해 지어진 업, 이숙이 결정되었더라도 시기가 결정되지 않은 업으로서 그 업이 계속(繫屬)된 지의 번뇌를 영원히 떠나 다시는 그 지에 생겨나는 일이 없을 때의 업 등이 순현보수업(順現報受業)이다.
55)
옛날 간다라국의 카니시카왕에게 내사(內事)를 감독하는 한 내시[黃門]가 있었는데, 하루는 성 밖에서 5백 마리도 넘는 소떼를 보았다. 그는 소몰이꾼에게서 그 소들은 곧 종자가 거세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숙세의 악업으로 인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여 소들을 사 그들의 고난을 구하였는데, 이 같은 선업력으로 말미암아 남근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고 왕으로부터도 후한 재물과 외사(外事)의 고관으로 제수 받게 되었다고 한다.(『대비바사론』 제114권, 한글대장경122,p.325)
56)
무쟁(araṇā)이란 성자와 공유하는 부처의 공덕 중의 하나로, 세속지에 의한 번뇌의 투쟁이 종식된 상태.(본론 제75권 참조)
57)
『구사론』(제15권, 고려장27,p.569하; 대정장29,p.82하; 권오민 역,p.718)에서는 다만 “이러한 선정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유정을 소연의 대상으로 삼아 그들을 이익 되게 하려는 뛰어난 의요(意樂)가 수반되기 때문에, 이러한 선정에서 나올 때에는 무량 최승의 공덕에 의해 훈습된 소의신이 상속하여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공덕의 복전이라 한다].”고 하여 세 번째 자비정에서 나오는 이와 동일하게 언급하고 있다.
58)
『구사론』(앞의 책)에서는 “이러한 도에서는 일체의 견소단의 번뇌를 영원히 끊고서 뛰어난 전의(轉依)를 획득한다”로 되어 있다.
59)
『구사론』(고려장27,p.569하; 대정장29,p.82하; 권오민 역,p.719)에서는 “이러한 도에서는 일체의 수소단의 번뇌를 영원히 끊고서 뛰어난 전의를 획득한다”로 되어 있다.
60)
이숙과는 여러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고ㆍ락의 감정, 즉 수(受)이기 때문에 ‘가장 두드러진 것[最勝]’이라고 말한 것으로, 본 단에서는 심수와 신수를 초래하는 업에 대해 분별하고 있다.
61)
우근은 유기성(有記性, 선이거나 혹은 불선)이기 때문에 이숙과가 아니다.(본론 제9권 ‘22근의 이숙ㆍ비이숙 분별’ 참조)
62)
즉 심광 자체가 바로 업의 이숙과라면 본송에서 “심광이 바로 업의 이숙이다”고 설했어야 하지만, 심광은 업의 이숙과인 불평등한 대종에 의해 낳아진 것이기 때문에 다만 “업의 이숙에 의해 생겨난다”고 말하였다는 뜻이다.
63)
‘심광(cittakṣeya)’이 마음의 발광이라면, ‘심란(cittavikṣipta)’은 마음의 뇌란, 즉 염오(불선과 유부무기)의 번뇌심이다.
64)
이를테면 어떤 큰 나무에 아귀 등이 머물러 있을 때 그 나무를 베어낼 경우 아귀는 괴로워 해코지하게 된다.
65)
바사 즉 바사슬체(婆私瑟搋, 또는 婆斯搋, Vāsiṣṭhī)는 바라문의 여인으로 여섯 아들을 잃고 마음에 광란을 일으켜 벌거벗고 사방을 헤메이다 암라숲에서 부처를 만나 제도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대비바사론』 제83권(한글대장경121p.179); 제126권(동123,p.19)에 전한다.
66)
지옥에서는 너무나 괴로움에 핍박되어 시시비비를 가릴 만한 정신이 없으며, 따라서 거기서는 항상 미쳐있다.
67)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숙의 대종을 초래하는 정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68)
여기서 법성은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비아(非我) 등의 진실의(眞實義)를 말한다.
69)
즉 “애탐에 의해 생겨난 신ㆍ어ㆍ의업은 ‘탁(濁)’ 즉 혼탁함을 원인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결과에 원인의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그래서 세존께서는 그것을 설하여 ‘탁업’이라고 하였다.”
70)
여기서 ‘손감의 견해’란 변집견 중의 단견과, 사견(邪見)으로, 일체의 가치를 부정하는 견해를 말한다. 그러나 이 밖의 다른 염오혜는 ‘아(我)’가 아닌 것을 ‘아’라 하고(살가야견), 무상한 것을 상주하는 것이라 하고(변집견 중의 상견), 저열한 견해를 뛰어난 것이라 하고(견취), 참된 도나 원인이 아닌 것을 해탈도와 원인이라고 하는(계금취) 등 적극적인 긍정[增益]의 견해이다.(본론 제47권 ‘5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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