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역대 선승(禪僧)들
10. 원효대사(元曉大師)
원효(元曉)대사는 분파되어 있던 불교 사상을 융합하고 귀족 불교를 대중화시키는 데 공헌한 신라의 고승이다. 속성은 설(薛)이며 법명은 원효(원효라는 법명은 스스로 지어 부른 것으로 '이른 아침' 또는 '처음 부처의 해가 빛난다' 는 뜻을 지님)이다. 훗날 이두 문자를 집대성한 학자 설총(薛聰)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원효대사는 압량(押梁, 지금의 경산시)에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신라 사회를 지배하던 골품제의 관점에서 보면, 경주 외곽의 ‘지방’ 출신인데다 진골도 아닌 비특권 가문 소속이었으므로 그에게는 처음부터 세속적으로는 출세하는 데 한계가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원효대사가 태어난 곳은 현재 경산시 자인면의 한 언덕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그곳에는 원효가 신문왕 때 건립했다는 금당(金堂) 자리가 남아 있고 그 밑 골짜기에서 아들 설총이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원효의 출생과 관련된 일화도 있다. 원래 그의 집은 율곡(栗谷)의 서남쪽에 있었는데 원효를 잉태한 어머니가 이 골짜기를 지나다가 갑자기 산통이 와 밤나무 아래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 밤나무를 ‘사라수(裟羅樹)’로, 그 나무에서 열린 큰 밤을 ‘사라밤(裟羅栗)’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원효는 이곳에 절을 지어 '사라사'라 이름 지었으며, 집까지 절로 개조하여 초개사(初開寺)라 했다고 한다.
원효대사가 출가한 것은 648년(진덕여왕 2)이다. 당시 신라 왕실은 불교를 국가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신라 최고의 특권 계층인 진골 출신의 승려들도 적지 않았다. 한마디로 신라 초기의 불교는 왕실과 귀족을 위한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7세기에 들어서면서 진골 출신도 아니면서 당나라 유학도 다녀오지 못한 소외된 ‘일반’ 승려들이 지배층 중심의 불교를 비판하고 백성들에게 불법을 설파하는 불교의 대중화를 부르짖기 시작했다. 원효가 출가한 때가 바로 이런 움직임이 활발해지던 시기이다. 원효의 사상에 대해서는 고구려에서 망명한 보덕(普德)을 스승으로 삼았다는 설, 시대적인 배경으로 보아 원광(圓光)과 자장(慈藏)으로부터 가르침을 얻었을 것이라는 설 등이 있지만 대체로 원효대사 스스로 경전을 연구하고 정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50년, 원효대사는 의상(義湘)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지만 육로로 고구려를 통과하다가 순찰대에 잡혀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11년 후 해로를 통해 다시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당항성(唐項城, 남양)에 도착한 원효와 의상은 오래된 무덤가에서 하룻밤 잠을 청하기로 한다. 원효가 잠결에 목이 말라 바가지에 든 물을 아주 달게 마셨는데, 다음 날 깨어나 밝은 빛 아래 보니 그 물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 원효는 이를 통해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一切唯心造)’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진리는 밖에서 찾을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라며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분황사를 거점으로 삼고 통불교(通佛敎, 원효종)를 제창하며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원효대사에 대해 잘 알려진 일화 중 한 가지는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은 일이다. 요석공주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로, 남편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상태였다. 이후 원효는 파계한 것으로 단정하고 승복을 벗은 뒤 소성거사(小性居士) 혹은 복성거사(卜性居士)라고 자칭하면서 불교의 이치를 〈무애가〉라는 노래로 지어 부르고 다녔다. 원효는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느니라.”라는 〈무애가〉를 읊조리며 시장과 기생집에 드나들며 평민들에게 불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가야금을 들고 사당에 들어가 음악을 즐기기도 하고, 명산을 찾아 좌선하며 정진하는 등 틀에 박힌 수행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원효의 기행을 두고 사람들은 중국의 고승 배도(杯度)나 지공(誌公)을 닮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원효대사의 사상은 매우 다양하지만 ‘하나’라는 구심점을 향하며, 화쟁(和諍, 모순과 대립을 하나의 체계 속에서 다루는 화해와 회통의 논리 체계)과 자유를 제창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현재 전해지지 않는 문서까지 포함하면 그는 240권의 저서를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에서도 《해동소(海東疏)》라고도 불리는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자주 인용했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고승이 아니고는 도달하기 힘든 결론을 담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러 종파로 나뉜 불교 이론을 고차원적으로 통합했는데, 오늘날 학자들은 원효대사의 이런 사상을 화쟁(和諍) 사상으로 부르며, 그의 일심(一心) 사상, 무애(無碍) 사상과 함께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 꼽고 있다.
~자등 合掌~
#원효대사 진영 (일본 고산사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