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겨레의 풍속과 일본의 칠지도/ 글_신경선
<우리겨레의 풍속법>
『고려비기』에 의하면 태초시대에 신낭(腎囊)그루터기에서 신낭(腎囊)토막이 부러졌는데, 신낭(腎囊)그루터기는 곁가지가 돋아나서 서낭당(-堂)이 되었고 신낭(腎囊)토막은 영물이어서 죽지 않고 윗동과 밑동에서 8문(八門)버섯이 돋아나서 태초의 인류가 되었다고 한다. 신낭(腎囊)토막은 목주(木柱)와 목피(木皮)로 나누는데, 목주는 남근이 되었고 목피는 여근이 되었다. 그리하여 남녀배필이 만나서 목주(남근)와 목피(여근)를 맞추어 신낭(腎囊)토막을 만들『환단고기』와 『고려비기』에 기록된 신씨의 조상/ 경선면 남녀의 영혼이 합쳐져서 사후에 신낭(腎囊)그루터기로 돌아가는 영생의 생령이 된다. 따라서 우리겨레는 태초부터 서낭당(=生木堂)을 정하여 그 풍속으로 일부일처(一夫一妻)를 하면서 영생하기를 기원했다.
이로 인해 태초의 생목당(生木堂)문자는 환인시대에 칠지목(七支木)문자가 되었고, 환웅시대에 창힐이 문자를 만들어 천부경(天符經)을 전하면서 인류가 만물의 영장(靈長)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골라 인간이 먹어도 되는 주인이므로 인류는 태초부터 수렵물을 먹으면서 살아왔다고 했다. 따라서 인류는 만물의 주인이므로 신낭(腎囊)그루터기의 증표인 서낭당(=生木堂)풍속으로 행복하다고 한다.
인간이 만물의 주인이 된 것은 태초에 인류의 시조인 8문인(八門人)이 신낭(腎囊)그루터기의 곁가지에서 돋아난 이파리를 뜯어서 세상에 뿌리니, 나는 새와 기는 짐승과 물고기들이 모두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만물의 주인은 사람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수렵을 처음 나가는 수렵꾼은 짐승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삼지창이나 거릿대를 가지고 나갔다. 왜냐하면 삼지창이나 거릿대는 칠지목(七支木)문자와 유사하여 짐승에게 “이 사람은 너의 주인이다”라는 증표가 됨으로 수렵물이 힘을 잃고 죽어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왕조에서 신돈의 풍속을 말살한 후부터 일반에서 “삼지창이나 거릿대는 액땜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 수렵을 나가는 사람이 들고 나가면 다치질 않는다” 라고 말하여 왔다. 따라서 사람을 해한 짐승은 주인을 배반한 것이므로 수렵과 관계없이 반드시 제거하여 응징하였고, 그 나머지의 짐승은 식용으로 필요할 때에만 수렵을 하였다.
옛 우리 조상들은 신낭(腎囊)그루터기인 생목당(生木堂)이 마을마다 있었기 때문에 ‘인간은 만물의 주인’이란 믿음이 강하여 맹수까지 두려워 않고 수렵을 하였다. 조상들은 수렵한 짐승이 크고 사나운 짐승일수록 자랑스러워하여 그 짐승을 부족의 이름으로 하였다. 이와 같은 수렵시대에 선창(先槍)한 수렵꾼에게는 수렵물의 머리와 사족을 포상하고, 재창(再槍)한 수렵꾼에게는 수렵물의 등심고기를 포상하고, 삼창(三槍)한 수렵꾼에게는 수렵물의 뒷다리 사이의 고기를 포상하였으며, 나머지 고기는 수렵꾼 모두가 똑 같이 나누었다. 그리고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창자나 뼈는 마을로 가지고 와서 고깃국 잔치를 벌이는 풍속이 최근까지 전하여진 풍속법이 있었다.
1. <‘환인의 칠지목(七支木) 문자’와 일본의 ‘칠지도(七支刀)의 명문(銘文)’>
칠지도는 광개토대왕 비문과 함께 일본 고대사나 4~5세기 일본열도와 한반도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있어 근본 사료로서 널리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이에 의해서 4세기 후반에 일본의 대화조정이 한반도로 진출하여 이른바 ‘임나일본부’를 두어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했다는 史實을 끌어내고 그것이 일본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까지 등장한다.
주지하다시피 칠지도는 일본 奈良縣 天理市 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보검이다. 길이 74.9㎝, 刀身 좌우에 서로 엇갈리게 세 개 씩의 작은 가지가 붙어 있고 鍛鐵로 만든 양날 칼인데, 형태로 말하자면 劍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자루 부분에는 다른 몸체에 박아 쓰거나 별도로 자루를 뗄 수 있도록 약 10㎝ 길이의 자루쇠가 돌기처럼 붙어 있다. 이 모양은 마치 중앙에 나무 줄기를 두고 가지가 있어 칠지도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같은 칼의 모양은 原始社會~古代社會에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서 유행하였고, 지금까지도 민간신앙으로 전승되는 굿에 사용되는 世界樹라는 神木의 모양에 근원을 두고 있다. 朝鮮檀君祖 이야기에 나오는 신단수도 이와 유사한 세계수라 할 수 있다.
위의 내용은 대학시절에 배운 내용의 일부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1902년생으로 1969년까지 강릉 옥계를 떠나 보지 못하고 학벌도 없는 순수한 한학자인 백부께서 수없이 이야기 하였고, 『무명일기1』에 그림까지 그려진 칠지목(七支木)문자 이야기와 일본의 칠지도 사진이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생각이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따라서 칠지도에 새겨진 명문을 아래에 기록해 본다.
위의 내용은 대학시절에 배운 내용의 일부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1902년생으로 1969년까지 강릉 옥계를 떠나 보지 못하고 학벌도 없는 순수한 한학자인 백부께서 수없이 이야기 하였고, 『무명일기1』에 그림까지 그려진 칠지목(七支木)문자 이야기와 일본의 칠지도 사진이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생각이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따라서 칠지도에 새겨진 명문을 아래에 기록해 본다.
칠지도(모조품), 철제 칼의 일종,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앞면의 명문>
秦□四年 □月十一(十六)日丙午正陽 造百練鋼七支刀 生辟百兵 宣供供侯王 □□□作.
태(화) 4년 (5)월 11(16)일 한낮에 백번 두드린 강철의 칠지도를 만들었다. (전쟁에) 나아
가 많은 군사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이므로 후왕에게 줄만하다.
<뒷면의 명문>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寄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선세 이래로 아직 이런 칼이 없던 바, 백제 왕세자 기생이 성왕의 윤음을 받들어 짐짓(일부러) 왜왕
지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일지어다.
2. <내가 풀어 본 칠지도의 명문>
<앞면의 명문>
秦(和)四年 (五)月十一(十六)日丙午正陽 造百練鋼七支刀 生辟百兵 宣供供侯王 (生木堂=서낭당)作.
태(화) 4년(526) (5)월11(16)일 한낮에 백번 두드린 강철의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었다. 제후의 모
든 군사가 생존하는 생목당(서낭당=유자조선 이전)로 제작하였으니 당연히 후왕이 교만하지 않도록 주어야 한다.
<뒷면의 명문>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寄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선세 이래로 아직 이런 칼이 없던 바, 백제 왕세(자) 기생이 성왕의 윤음을 받들어 짐짓(일부러)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일지어다.
칠지도는 환인의 칠지목 문자를 본떠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옛 백제 영토였던 지금의 전라도에는 저 대륙 멀리 북방의 마을과 마찬가지로 서낭당이 있었다. 예부터 우리겨레가 사는 방방곡곡은 허허벌판이나 심신산골에 민가가 생겨나면 최우선적으로 생목당(生木堂=서낭당)을 정하여 온가족이 수액이치(樹液理致)로 화목하게 살았다.(유자조선 이전까지 생목당은 우리 고유의 서낭당이었다. 그러나 유자조선을 거치면서 신돈의 풍습말살의 정책으로 유자들의 의해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우리겨레의 멸할 수 없는 태초기원의 생목당(生木堂=서낭당)문자의 풍습 때문에 일본은 자신들의 문화재인 칠지도(七支刀)의 명문마저 손상시키면서 백제의 제후국이었던 역사를 날조하려고 하였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일본은 실제로 1910년 일제강점기를 시작하면서 군경을 동원하여 방방곡곡 한학자들의 민가를 수색하여 역사서적을 낱낱이 수거하여 불태웠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이 스스로 그들 조상과 상국의 왕의 윤음을 거역하면서 교만하여 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쩌면 일본 왕실 도서관에 비치되어 우리에게 공개되지도 않은 역사서적 중에는 조선왕조에서 멸하려고 하였던 신돈의 풍습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앞잡이의 안내로 강릉주재소 일본 순사가 백부의 집에 들이닥쳐서 『고려비기』와 『유본천부경』을 강탈해 갔다고 한다. 1902년생인 백부께서 사서삼경에 능통하였고, 『고려비기』와 『유본천부경』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외웠다고 하는 시기였으므로 아마도 1920년 이후로 생각된다. 그때 강릉주재소에서 나온 순사가 조선인인지 아니면 일본인인지 알 수가 없으므로 백부께서 빼앗긴 문헌이 반드시 일본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라 단정하는 것은 무리로 생각된다. 하지만 일본왕실 도서관에는 미공개 한국서적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하니, 그곳에 『고려비기』와 『유본천부경』 같이 우리도 믿을 수 없는 내용의 문헌들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