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43> 서장 (書狀)
루추밀에 대한 답서(2)
힘들여 머물지 말아야 한다
“생각을 잊는 것이나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나 모두 잘못이니, 비유하면 칼을 휘둘러 공중에 던져서 손이 닿고 닿지 않고를 상관하지 않는 것과 같이 위험한 일입니다.
옛날 엄양 존자가 조주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을 때에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습니다. ‘내려놓아라.’ 엄양이 말했습니다.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내려놓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습니다. ‘내려놓지 못하겠거든 들고 있거라.’ 엄양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또 운개 지원 스님이 운거 석두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학인이 어찌할 수 없을 때에는 어떻습니까?’ 석두 스님이 말했습니다. ‘노승도 역시 어찌할 수가 없다.’ 지원 스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학인은 배우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어찌할 수가 없지만, 스님은 대선지식이면서 무엇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까?’ 석두 스님이 말했습니다. ‘내가 만약 어찌할 수 있다면, 곧 그대의 이 어찌하지 못함을 집어 내버릴 것이다.’ 지원 스님이 말 끝에 크게 깨달았습니다.
이 두 스님이 깨달은 곳이 바로 당신이 헤매는 곳이며, 당신이 의심하는 곳이 바로 두 스님이 의심한 곳입니다. 법은 분별심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또 분별심으로 말미암아 사라지니, 모든 분별법(分別法)이 소멸하면 바로 법에 생멸이 없게 됩니다.”
선공부에서 가장 결정적 고비는 공(空)의 체험이다. 색(色)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며, 온갖 모양이 곧 모양 아님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며, 동시에 선 체험의 본질이기도 하다. 공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하여 확인되는 실재이다. 공의 체험은 곧 아상(我相)과 법상(法相)을 비롯한 온갖 경계로부터의 자유이며 자재한 해탈이다.
공은 어떻게 체험되는가? 본래 마음은 공이다. 다만 의식(意識)의 모양에 가로막혀서 본래가 공인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모양에 유혹되고 속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공인 그대로의 마음이다. 의식의 모양에 유혹되고 속으면 무언가를 의도(意圖)하여 하려고 한다. 즉 헤아리고 분별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은 모두 의식에 유혹되어 속은 것이다.
그러므로 공인 그대로의 마음을 알려면 의식을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의식을 따라가지 않으려면 의도적으로 생각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즉 헤아리고 분별함에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생각을 잊는 것이나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나 모두 잘못’이라는 말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며, 조주가 말한 ‘내려 놓아라’는 것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며, 석두가 말한 ‘노승도 역시 어찌할 수가 없다’는 말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며, ‘모든 분별법이 소멸하면 바로 법에 생멸이 없게 된다’는 말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며, ‘망상을 쉬어라’는 말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며, 중도(中道)라는 말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며, 혜능이 ‘선도 생각지 않고 악도 생각지 않을 때에 당신의 본래면목은 어디에 있는가’하고 물은 것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본래면목이라고 하여 무엇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면목이 바로 공이다. 공은 그 무엇이 아니므로 어찌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어찌하려고 할 때 바로 공을 놓쳐 버린다. 그러면 그대로 놓아 두어야 하는가? 그대로 놓아 둔다고 한다면 이것도 어찌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로써 표현하기가 미묘하지만, 무엇보다도 ‘힘을 들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할 수가 있겠다. 어찌하든 그대로 두든 모두 힘을 들여서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맡긴다’는 말도 하고 ‘구경꾼이 된다’라고도 하지만 이런 말들도 잘 알아들어야 한다. 힘을 들이지 않으려면 분별하지 말아야 하고 분별하지 않으려면 어디에도 머물지 말아야 한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것은 의식을 어찌하지 않는 것이니 힘이 들지 않지만, 머물러 있는 버릇이 굳어져 있는 우리들은 여기에서 못견뎌하며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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