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수행이야기]〈20〉수행 완성은 무주상<無住相> 회향
자비심 실천없이 대각 성취할 수 없어
수월스님, 길손위해 짚신 보시해
지암선사, 나병환자와 동고동락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실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이 명구를 불교적으로 해석한다면 진정한 보살행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그보다는 중생을 제도하고서도 제도했다는 상(相)을 내지 않는 무주상행(無住相行)이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 같다. 경전의 말씀대로 이를 실천한 선사들이 많이 있다.
구한말 경허선사의 제자 수월(水月, 1855~1928)스님은 만년에 중국 간도 왕청현 나자구 화엄사에 주석하셨다. 이 화엄사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었는데, 스님은 아침 일찍 일어나 수십 켤레 짚신을 삼아 집 앞 처마에 매달아 두었다.
이 고갯마루를 지나는 나그네가 짚신이 다 헐어 못 신게 되면, 새 짚신으로 갈아 신고 떠났다. 나그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었을 것이고, 스님께서는 굳이 누가 신고 가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당신에게 인사하지 않고 떠나더라도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또한 스님께서 주먹밥을 만들어 집 앞 샘터에 놓아두면, 지나가던 길손이 샘물을 떠 마시며 시장기를 달래었다.
또 이런 선사가 있다. 지암(智巖, 577~654) 선사는 중국 초기선종 가운데 하나인 우두종의 2조이다. 스님은 20세에 무인이 되어 전쟁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워 40세에 중랑장(中郞將)이라는 지위까지 올랐다. 지암이 40세가 넘어 전쟁에서 사람을 살상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가를 절실하게 느끼고 출가하였다. 지암은 출가 후에 자신이 지은 업장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철저하게 고행하였다.
동료들이 수소문해 찾아와 “자네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산속에서 고행을 하느냐, 다시 군대로 돌아가자”고 하였지만, 지암은 세간의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지암은 만년에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 청량산(淸凉山)에 위치한 나인방(癩人坊)에 머물렀다. 하늘도 버렸다고 하는 나병 환자들에게 지암은 부처님의 진리를 설해주고, 고름을 빨아내 주며, 죽은 나인들의 시체를 거두어주는 등, 그들과 함께 머물다가 78세에 그곳에서 입적하셨다. 그가 입적한 뒤에 그의 안색은 변하지 않고, 몸이 평상시와 같았으며, 그 육신이 머물던 방에는 기이한 향내가 머물렀다고 전한다.
근래 쌍계사를 개산(開山)한 진감혜소(眞鑑慧昭, 773∼850)스님의 생애를 조명하는 학술세미나가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진감스님’이라 하면, 지암스님과 수월스님의 보살행이 함께 오버랩된다.
진감스님은 31세에 출가해 804년 당나라에 들어가 숭산 소림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선지식을 찾아 여러 지역을 행각하였다. 행각하는 도중 어느 곳에서는 짚신을 삼아 오가는 사람들이 짚신을 바꿔 신도록 보시행을 하였다. 또한 스님은 당나라에서 26년간의 수행을 마치고 830년 귀국해 상주(尙州) 장백사(長栢寺, 현 남장사)에 주석하며 병자들을 치료해주었다. 진감은 범패나 다인(茶人)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지리산 쌍계사에 선문(禪門)을 열은 선사로서, 마조(馬祖)의 제자인 창주신감(滄州神鑑)의 법맥을 받았다.
출가 후 필자는 자신의 수행에만 집중할 때 선사들의 무주상 실천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꼈었다. 얼마 전 간화선 중흥을 위한 큰 스님들의 조계사 법문에서 덕숭총림 방장 설정스님 법문을 재인용 한다.
“공부하려면 나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비심이 바탕이 돼야 합니다. 불교의 대자비심은 불보살과의 유일한 통로입니다. 자비심과 실천이 없이 도를 통할 수 없습니다. 또한 대각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6바라밀 중에 보시를 첫 번째로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운스님… 서울 성심사에서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 운문사승가대학 졸업, 동국대 선학과서 박사학위 취득. 저서 <동아시아 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경전숲길> 등 10여권. 현 조계종 교수아사리ㆍ동국대 선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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