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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산 성지 - 최경환 성인이 마지막 정착한 피난 교우촌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 9동 1151-2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병목안로 408
수리산 교우촌의 형성 - 최경환 일가의 피신처
수리산(修理山, 해발 489미터)은 경기도 도립공원으로 북동쪽으로는 안양시, 동남쪽으로는 군포시, 서쪽으로는 안산시와 접해 있는데 산세가 깊고 수려한 곳이다. 이 수리산 깊은 산자락에 수리산 교우촌이 있었다.
이곳은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어머니 복자 이성례 마리아가 순교하기 직전 신앙생활을 하며 숨어 살았던 곳으로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다고 해서 '병목골'이라고도 불렀고, 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모여 담배를 재배하며 생계를 이어갔기에 담배촌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렀다.
가톨릭 성인전에 의하면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고향 청양 다락골에서 한양으로 이사한 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며 박해를 피하여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1837년 7월 이곳 수리산 과천골 뒤뜸이로 들어와 정착하였다고 한다. 첩첩 산으로 둘러싸이고 또한 인적이 드물어 박해를 피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이 마을에 정착한 후 최경환은 자기 본분을 지키며 종교 서적을 자주 읽어 교리에 해박하고 신심이 깊었으며,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이웃들에게 자선을 베푸니 사람들이그를 존경하며 그의 권고를 듣기를 즐기고 멀리서도 찾아와 그의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후에 아들 최양업 토마 신부는 “저의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 서적을 대하셨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 이외에는 말하지 않으셨다. 아버지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라고 회고하였다.
당시의 세습 차별이 심했던 유교 전통사회에서 이러한 그의 모범적인 삶은 천주의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교우촌을 일구는 데 크게 기여했다. 1839년 모방 신부에 의해 공소 회장에 임명되고, 기해박해가 시작되어 한양과 인근에서 순교자들이 많아질 때에도 그는 의연금을 모아 그곳 신자들과 함께 한양으로 올라가 옥에 갇힌 이들을 돌보아 주었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안장해 주었다.
체포와 순교
하지만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7월 마지막 날 밤 끝내 포졸들이 수리산 교우촌에 들이닥쳐 가족과 40여 명의 교우촌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기록에 보면 그는 체포라기보다는 스스로 순교의 각오로 포졸들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는 새벽 포졸들이 집 앞에 들이닥치자 기다리고 있었다면서 그러나 아직 동이 트질 않았으니 좀 쉬었다가 떠나자며 동네 사람들에게 순교의 용기를 북돋우었다. 그리고는 아내 이성례(李聖禮)에게 음식을 준비하여 포졸들을 대접하도록 한 뒤 교우촌 신자들과 함께 오랏줄에 묶인 채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포졸들은 40여 가구에서 골고루 한 명씩을 잡아갔지만 최경환 가족에게만은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부인 이성례, 유학 간 최경환의 동생 의정(義鼎, 야고보), 선정(善鼎, 안드레아), 우정(禹鼎, 바실리오), 신정(信鼎, 델레신포로), 2살 젖먹이 스테파노까지 일곱 식구를 모두 잡아 갔다. 이때 최경환의 바로 밑의 동생 의정은 15살이었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최경환 일가의 비극은 후손들의 눈시울을 붉게 물들인다. 다섯 자식을 모두 끌고 옥에 갇히게 된 어머니는 세 살짜리 막내가 굶주림으로 숨이 끊어지자 그만 실성할 지경이 되고, 네 아이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배교하겠노라 말하고 네 아이를 이끌고 풀려 나온다.
하지만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아이들이 동냥을 나간 사이에 다시 갇힌 몸이 된다. 4형제는 옥으로 뒤따라 와 어머니를 목메어 부르지만 어머니는 다시 또 마음이 약해질까 두려워 등을 돌린 채 자식들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한다. 이후 자녀들은 물러나와 동냥한 음식을 옥에 갇힌 부모에게 사식으로 넣어 주었다고 한다.
투옥된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공소회장이라는 사실, 아들을 유학 보낸 신학생의 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에 다른 교인들보다 더 혹독한 대우를 받아야 했고 무지막지한 치도곤을 맞은 상처로 체포된 지 40여일 만인 1839년 9월 12일 포도청에서 옥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1일에는 그 부인 이성례가 당고개에서 참수된다. 어머니의 참수를 앞두고 소식을 들은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쌀자루를 메고 희광이를 찾아가 단칼에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 달라며 쌀자루를 건넸다. 그리고 당일 한칼에 목이 떨어지는 어머니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린 자식들은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한다. 눈물겨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훗날 이성례 마리아는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시복 시성 과정에서 첫 번째의 배교사실로 인해 제외되었다. 그러나 어린 자식 때문에 일시 배교했으나 이를 뉘우치고 순교한 사실은 오히려 조선의 전통에서 본다면 모성애와 신앙을 모두 지킨 모범적인 순교임이 분명하다. 이런 사실이 인정되어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사후 유해 보존 과정
최경환 회장이 순교한 뒤, 옥졸들은 그 시신을 가마니에 넣어 노고산(老姑山, 마포 서강대학교 뒷산) 밑에 갖다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둘째 형 최영겸(崔英謙) 부자가 그 시신을 찾아 이름을 적은 사발과 함께 그 산 중턱에 가매장하였다가, 몇 해가 지난 뒤 시신을 발굴하여 뒤뜸이 앞 수리산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최경환 회장이 1925년에 복자품에 오르게 되자 교회 당국에서는 1930년 5월에 그의 무덤을 찾아 시신을 발굴하여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하였고, 1967년에는 다시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 모셨다.
김대건 가족과 최양업 가족은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둘 다 3대 순교자 가문으로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된 아들을 두었고, 이 사실로 두 가문 모두 모진 고통을 겪다가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과 최경환은 순교했다. 고향을 떠나 마지막 척박한 교우촌을 형성한 것도 비슷하다. 김대건 가족은 안성 솔뫼에서 한양을 거쳐 골배마실 교우촌을, 최경환 가족은 청양 다락골에서 역시 한양을 거쳐 수리산 교우촌을 이루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김대건 신부는 짧은 사제 생활을 하다가 한국 천주교 제단에 피를 뿌렸고, 최양업 신부는 10여년을 피땀을 흘려가며 전국을 순회하며 한국 천주교를 일으킨 점이다. 그리고 김제준과 최경환은 순교 이후 모두 살던 교우촌 수리산과 골배마실로 시신을 모셨지만 김제준의 묘는 지금 전하지 않는다는 점도 다르다. 단 어머니는 최양업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가 아버지에 이어 바로 순교했는데 대해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 우르술라는 모진 목숨을 부지하면서 남편과 아들의 죽음을 겪었다. 혹독한 피에타의 슬픔은 죽기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성지의 현재
현재 담배골 부근은 도시화의 영향으로 옛 마을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성지 입구에는 순례자 성당과 피정을 위한 성례 마리아의 집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50여 미터만 올라가면 최경환 성인의 고택이 2008년 복원되어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고, 고택 왼편 계곡을 건너 산을 오르면 최경환 성인의 묘역이 나온다. 성인 묘역까지 오르는 길에는 1987년 안양 시내 교우들이 세운 십자가의 길 14처가 있고 묘역에는 동굴 성모상과 야외 미사터가 마련되어 있다.
낮 1시 반경 수리산 입구 식당가에 도착. 일단 점심부터 해결해야겠기에 길 가까운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 이름은 두루터. 만두전골, 들깨칼국수, 여름 특별메뉴 밀면, 알고 보니 전국 맛집으로 알려졌으며 가톨릭 신자인 주인은 해마다 이웃돕기로 쌀 1000kg을 이웃돕기로 기증하고, 수리산 성지에 기부금을 내는 등의 활동으로 지역신문에 난 인물이다.
식사 후 성지 안으로 걸어 들어오자 성지 안내도가 있다. 안내도를 보니 이미 순례자의 성당과 성례 마리아의 집은 지났다. 그리하여 바로 오던 길을 올라 고택성당 참배를 하고, 계곡을 건너 십자가의 길 따라 성인묘역으로 이동하여 최경환 성인의 묘와 성모동굴을 참배하고 나오는 길에 순례자 성당과 성례마리아의 집을 들리기로 했다.
고택성당
최경환 성인 하면 목수였던 노동자 성 요셉을 떠올리게 된다. 성 요셉은 일생 노동하면서 성가정을 돌보셨다. 하느님을 찾고 천상의 삶으로 인도되는 데는 기도하는 것만큼 노동이 중요함을 요셉 성인의 삶에서 느끼게 된다. 박해로 이리저리 떠돌며 유랑민 신세가 된 최경환 성인을 비롯한 초기 신앙선조들 역시 모두가 힘겨운 일상을 거룩한 생활로 끌어올린 주인공들이다. 깊은 산중에서 화전을 일궈 담배를 심고, 옹기와 숯을 만들며 생계를 이어갔으며 고단한 삶에도 그들은 기도하고 애덕을 베푸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기도하며 일하라(Ora et Labora)”는 수도자 성 베네딕토의 좌우명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기도하고 노동하는 수도자의 경지를 오히려 능가했다. 경건히 기도하고 고되게 일하는 가장(家長)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에게서 성실한 노동자 요셉이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이곳은 최경환 성인이 기도하고 노동했던 집터이다. 2008년 고택을 복원하여 지금은 고택성당이 되었다.
성당 내부는 일반 성당과는 확연히 다르다. 고택의 좁은 여러 공간을 활용하였기에 한눈에 파악하기가 어렵다. 성수대가 있는 입구 통로에는 최경환 성인과 이성례 복자 영정이 걸렸다.
벽면 고상과 감실 앞에 제대가 있고 제대 앞에는 최경환 성인의 유해가 봉안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성 요셉 부자상과 성모상이 유난히 크게 제대 옆에 서 있다는 점이다. 이곳이 최경환 이성례의 고택이기 때문에 성가정 상을 강조한 것 같다.
교우석은 이곳저곳에 나뉘어져 있다. 공간이 협소한 관계로 등받이가 없는 간편 장의자들이다. 그런 와중에도 몇 개의 의자는 어르신 자리라는 이름을 붙여 두었다. 어른을 공경하는 우리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 같아 흐뭇한 감이 들었다.
성당에서 나오니 성당 옆에 성모동산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한복 입은 다소곳한 성모상이 품위 있게 맞이한다. 그리고 계단 위에는 예수님 십자고상이 높이 서 있다.
이제 최경환 성인 묘역으로 간다. 묘역은 성당 계곡 건너편에 있다. 산기슭에 있다. 계곡에는 나무다리가 있는데 수리산 계곡이 물이 좋아 여름 더위를 식히기 위해 많은 시민들이 유원지처럼 찾는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십자가의 길이 이어진다.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시작기도는 최양업 신부를 낳아 기르신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복자 이성례 마리아의 순교정신을 이어받을 것을 다짐하는 기도이다. 그리고 14처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동상으로 만든 것들이다.
돌담 계단식 터는 옛날 교우들이 살았던 교우촌의 집터들이다. 여기에는 순교자의 묘와 일반 신자들의 묘도 볼 수 있다.
예산 고을의 양가 출신 이 에메렌시아는 이순빈 베드로의 누이로, 외교인에게 시집을 갔다. 그녀는 20세가량 되었을 때 오빠에게서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믿기 시작하여 비교적 늦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녀는 입교를 결심한 이후부터 미신 행위를 끊어버리고 성교회의 모든 대소재(大小齎)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녀의 남편은 그것을 알고 몹시 분노하여 그녀를 학대하기 시작하였다. 가끔 몹시 매를 때려 손발을 쓰지 못하게 하는 일도 있었고, 겨울 추위에 옷을 벗겨 여러 시간을 눈 속에 매달아 두기도 하였다. 이런 시련이 5, 6년이나 계속되었지만 그녀는 불굴의 신앙을 가지고 모든 것을 조용히 참아 견디며 겸손하게 순종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시부모에게 효성을 충실히 다하여 그녀를 아는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또한 남편에게 천주교의 진리를 알리려고 노력하였고 마침내 설득에 성공하였다.
그후 부부는 천주교를 더 자유로이 봉행하기 위하여 함께 산으로 피해 들어갔는데, 그녀의 남편은 죽을 임시에 세례를 받고 신덕(信德)을 지니고 숨을 거두었다. 과부가 된 그녀는 그의 어린 아들을 데리고 그녀의 오라버니들이 살고 있는 수리산 교우촌으로 와서 살았다. 그녀는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충실히 살다가 1839년에 순교했다.
최경환 성인의 묘
십자가의 길이 끝나는 지점에 최경환 성인의 묘가 있다. 봉분은 그리 크지 않은 데, 묘 뒤에는 가느다란 십자고상이 위치하고 왼쪽에는 최경환 성인의 유해의 일부 봉안대가 있고 오른쪽에는 큼직한 묘비가 서있다.
순교자 묘역 성모동산
성 최경환 묘역의 성모동산은 루르드 마사비엘 동굴에 나타난 성모상을 본 딴 것이다. 성모님의 발 아래 벨라뎃다(베르나데트) 성녀가 성모님께 경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성모님께 바치는 동굴 봉헌 기도문이 우리말과 라틴어로 적혀 있다.
전해내려 오는 말에는 지금 성모님 상 밑에 우물이 있는데 신자들이 그 물을 길어다가 식수로도 사용하고 그 물로 씻기도 하였는데 많은 분들이 기적과 같은 체험을 하였다고 한다. 바로 그 물을 마시거나 그 물을 몸에 바르면 아픈 곳, 병든 곳이 나았다는 것이다. 이곳 신부님이 프랑스 루르드의 기적수를 연상하시어 샘물이 흘러나오는 곳을 정비하고 그 곳에 루르드 성모 동산을 꾸미신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는 한때 이곳 성지 전담 서제였던 이헌수 요셉 신부의 술회담이다.
지금은 더 이상 샘물은 솟아나지 않는다. 외곽 순환도로가 뚫리면서 지하수 길이 바뀌었다고 한다. 비록 샘물은 솟아오르지 않지만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은 샘물처럼 솟아나 우리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순례자 성당
묘역 참배를 마치고 다시 계곡을 건너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순례자 성당이 있다. 성당 앞에는 최경환 성인과 이성례 마리아의 흉상이 나란히 서 있고, 성당 앞에는 수리산 성지 순교자 기념비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성당 입구에는 성당 건립연도인 2,000년이 명시되어 있고 “눈물로 씨 뿌린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리이다”라는 시편의 구절이 새겨져 있다.
성당 내부는 제대 왼쪽에 큼직한 최경환 성가정의 그림이 걸려 있고 오른편엔 예수성심상과 성모상이 나란히 서 있다. 성심상과 성모상 사이에 최경환 성인의 유해가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제대 앞이랑 벽면에 온통 최경환 성인과 이성례 마리아의 상이 유리화로 또는 그림으로 제작되어 걸려 있다.
이성례 마리아의 집
이성례 마리아의 집은 순례자의 집이요, 피정의 집이다. 순례자 성당 맞은편에 있으며 3층 건물인데 1층 식당, 2층 강의실, 3층 회의실. 호젓한 정원과 쉼터도 있다.
수리산 성지 순례가 끝나니 오후 3시. 서둘러 손골 성지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