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15. 고도(古都) 집안(集安)과 고구려 불교 ①
고구려 첫 사찰 '이불란사' 돌기둥만 밭에 나뒹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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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 |
사진설명: 1880년 전후시기에 재발견된 이 비는 우리 민족의 웅혼한 기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고구려 유물이다. |
2002년 10월20일 일요일.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도 막바지에 다다랐다. 고구려 고도 환인(桓仁)과 집안(集安)을 보고나면 중국에서의 모든 일정은 마무리된다.
백두산에 오르기 위해 아침 일찍 연길 대우호텔을 출발, 이도백하(二道白河)로 떠났다. 이도백하에 도착해 장백산(백두산의 중국 측 이름)에 들어가니 눈이 엄청나게 많았다.
가는 길이 막혀 천지까진 가지도 못했고, 장백폭포만 보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도백하 시내 신달호텔에 하룻밤 신세지고, 발해시대 조성된 유일한 탑인 영광탑을 보기위해 나섰다.
‘영광탑 친견’은 눈 때문에 중도포기 해야만 했다. 끝없이 내리는 눈에 운전사 아저씨도 겁을 냈다. 삽으로 눈을 치우며 무송(撫松)에 다다라 겨우 점심을 먹고, 압록강과 백두산 주변의 중국 측 길을 통해 통화(通化)에 도착했다. 통화 시내를 보는 둥 마는 둥하고 계속 달렸다. 저녁 7시경 그리고 그리던 고구려 두 번째 수도 국내성(집안)에 도착했다.
집안은 과연 천험의 요새였다. 통화에서 집안으로 들어오는 길만 제대로 막으면 들어오는 길도 나가는 길도 찾기 힘들었다. 취원빈관 412호에 짐을 풀고 고단한 몸은 뉘였다. 지나온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참으로 힘든 여로(旅路)였고, 볼 것도 배울 것도 많았던 길이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고구려 고도에 왔다는 생각때문인지 밤새 잠을 뒤척였다. 고구려는 주지하다시피 주몽이 세운 왕조다. 고구려의 기원과 성립에 대한 기록은 문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주몽의 건국내용에 있어서는 거의 비슷하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주몽이 동부여에서 나와 졸본(지금의 환인)에 이르러 비류수(지금의 혼강) 위에다 나라를 세웠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북부여로부터 남하하여 비류곡의 홀승골성에다 도읍을 정했다”고 적혀있다. 중국 측 문헌인 〈위서〉나 〈북사〉에도 “주몽이 남하해 홀승골성(환인에 있는 오녀산성)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건국 후 주몽은 주변의 여러 세력들을 통합, 점차 정치적 영향력을 높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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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환도산성 밑에 있는 무덤들. 집안엔 모두 1만2000여기의 무덤이 있는데, 이곳에 1580여기의 무덤이 흩어져 있다. |
환인 지역에서 건국의 토대를 닦은 고구려는 2대 유리왕 22년(3) 국내성(집안)으로 천도한다. 그리고 장수왕 15년(427) 평양으로 도읍으로 옮기기 전까지 국내성에서 동아시아 강자로 번영을 누렸다.
번영의 토대를 닦은 왕은 미천왕(재위 300~331)이었다. 이후 소수림왕은 불교를 공인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고대국가로서의 종교적 기반과 내정을 완비했다.
이러한 내.외 정치적 발전을 이어받은 광개토대왕(재위 391~413)은 중국의 분열(5호16국)을 이용, 백제.후연.거란.숙신.동부여 등을 정벌하거나 정복해 대제국을 이룩했다.
뒤 이어 등극한 장수왕(재위 413~491)은 중국 남북조시대(439~589)의 정치적 갈등을 활용, 북위와 외교적 친선을 확보해 북방관계를 일단락 짓고, 남방진출을 고려하게 된다. 고구려의 남방진출은 427년의 평양천도로 나타난다.
집안시대(3~427)는 이처럼 요하 일대까지 고구려 세력이 확장됐고, 낙랑.대방.백제.신라.만주지역에도 세력과 영토를 넓혀, 고구려의 전성기를 열면서 만주지배권을 확보한 시대였다.
유리왕 22년 환인에서 집안으로 천도
다음날 아침 집안박물관에 먼저 갔다. 박물관에 전시된 광개토대왕 탁본을 감상하고, 5회분 5호묘.무용총.각저총 들을 차례로 둘러봤다. 무용총과 각저총은 무덤만 볼 수 있었다.
몇 년전 일어난 장청1호분 도굴 사건으로 관람이 중지됐다고 안내인 김송학씨가 설명했다. 이어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으로 갔다. 장군총 정상에 올라가 집안 시를 일별하니 과연 명당이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앞으로는 압록강이 흐르고, 좌우 산들이 호위하듯 에워싼, 천험의 요새였다. 자연스레 “집안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송학씨의 설명에 의하면 “3000~4000년 전에 이미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원시시대 유적들이 집안시에서 많이 발견됐다”고 한다. 고구려 성립 이전부터 고구려족이 이곳에 살고 있었는데, 집안이 고구려 중심이 된 것은 유리왕 22년(3) 10월. 환인에 있는 홀본성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여 환도산성을 수축한 뒤였다.
고구려 멸망 뒤에는 발해.요(거란족).금(여진족).원(몽골).명(한족).청(만주족)이 각각 이 땅의 주인이 됐다. 특히 청나라 때는 길림장군이 관할하는 지역의 서남쪽 경계였는데, 군사행정 관리상 봉천장군 관할 아래 속했다. 청나라 초기 백두산 일대를 청나라 발상지라 하여 신성시하고, 청나라만의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해 한인(漢人)들의 이주를 금했다. 이를 봉금(封禁)이라 하는데, 집안도 봉금지역에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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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파트 단지 내 벽으로 변한 국내성 성벽. |
1876년 성경장군 숭실(崇實)이 청나라 정부에 청해 황무지를 개간하고 현(縣)을 설치했다.
이 때 노령산맥 남쪽과 북쪽에 통화현과 회인현을 세웠는데, 현재 집안인 영전(嶺前) 지방은 회인(후일 환인으로 고쳐 부름)에 속했다.
몇 년 뒤인 1902년 통화현과 환인현의 일부를 떼어 집안현을 설치했는데, 집안(輯安)은 ‘무수안집(撫綏安輯. 백성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한다)’이란 무구에서 따온 말.
이 무렵 현사무소를 압록강 오른쪽 연안의 통구(通溝) 평원에 있는 옛 국내성 터에 두었다.
다시 말해 집안은 1902년 생긴 것이고, 이전엔 통구로 불렸던 것이다. 통구는 환도산성 앞으로 흘러 국내성 옆에서 압록강으로 들어가는 강을 말한다.
우여곡절 끝인 1965년 3월8일 ‘집안(輯安)’은 발음이 같은 ‘집안(集安)’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군총에서 내려와 광개토대왕비 앞에 섰다. 만감이 교차했다. 1880년(고종 17) 전후시기에 재발견된 광개토대왕비. 우리 민족의 웅혼한 기상을 알리기 위해 세워진 비였는데, 일본 제국주의자의 음모로 비문이 훼손된 안타까운 사연을 간직한 비.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비문을 보고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태왕릉으로 갔다. 바로 옆에 있는 태왕릉조선족소학교는 문을 닫은 상태. 학생 수가 적어 폐교됐다고 김송학씨가 설명했다.
곧바로 환도산성 밑에 있는 ‘산성하 무덤 떼’를 보러갔다. 과연 무덤이 많았다. 집안 시내에 현존하는 1만2000여기에 달하는 무덤 가운데 1580여기의 무덤이 이곳에 집결돼 있다. 무덤은 그런대로 정비돼 있었지만 여유를 갖고 볼 수는 없었다. 장천1호분 도굴사건 이후,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을 많이 설정했는데, 이곳도 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돌로 쌓은 적석총 위에 올라가 무덤 떼를 둘러보았다. 과연 많았다. 끝없이 무덤이 펼쳐진 광경에서, “고구려인들은 땅의 절반을 주거지로, 절반은 무덤으로 사용했다”고 지적한 한 일본인 학자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실감했다.
통구하 옆 국내성으로 돌아와 성벽을 살폈다. 아파트 단지 주변에 조금 남아 있을 뿐, 대개는 사라지고 없었다. 1930년대 까지만 해도 국내성 성문이 남아있었는데, 성문은커녕 성벽도 제대로 보존되고 있지 않았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동국대 문명대 교수가 “고구려 최초 사찰 이불란사터 석주(石柱)로 추정”한 석주를 보기 위해 집안역 앞으로 갔다. 석주는 민가 옆 채마밭 한가운데 서 있었다. 나머지 한 짝은 집 안마당에 덩 그라니 있었다. 고구려 불교사를 떠올렸다.
石柱 한 짝은 민가 마당에 ‘덩 그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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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집안 시내 민가의 채마밭에 있는 이불란사지 석주로 추정되는 돌기둥. |
〈삼국사기〉에 “소수림왕 2년 전진(前秦. 351~394)의 왕 부견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아울러 전도승(傳道僧) 순도(順道)와 불상.경문을 함께 파견해 불교를 전했다”고 기록된 것에서 알 수 있듯, 고구려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은 372년이었다.
2년 뒤 아도스님도 고구려에 왔다. 불교를 받아들인 지 3년 뒤인 소수림왕 5년, 수도 집안에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해 순도스님과 아도스님으로 하여금 각각 머물게 했다.
전진의 공식적인 사절과 함께 온 순도스님이 머물렀다는 점에서 성문사는 관청 건물의 일부였을 추정된다.
당시 중국 전진의 불교는 대승사상을 주(主)로 하는 불교였다. 도안스님이 부견왕의 요청으로 장안에 간 것은 379년이고, 전진의 순도스님이 고구려에 온 것은 372년이지만,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도 대승경전 위주의 불교였을 것이다. 어쨌든 고구려에 전래된 이후 불교는 왕실의 후원으로 발전을 거듭했다.
고국양왕(재위 384~391)은 영(令)을 내려 “불법을 숭상하도록 권장”했고, 광개토대왕도 392년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이로 인해 불교는 더욱 활성화됐다.
고구려 수도가 평양으로 옮겨진 것이 20대 장수왕 시절이므로, 불교가 전해질 당시의 수도는 집안이었다. 성문사와 이불란사도 집안에 있었지만, 평양에 사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광개토대왕 3년, 평양에 9사(寺)가 창건됐는데, 이것은 고구려가 남진정책(南進政策)을 펴는 과정에 나온, 평양으로의 천도작업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평양에도 국가의 발전을 기원하는 ‘흥국사’나 ‘흥복사’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있다. 학자들은 장수왕이 수도를 이전할 당시 흥복사와 흥국사도 평양으로 옮겼을 것으로 추측한다. (다음 호에 계속)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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