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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평설]
고요 속에 약동하는 자연의 숨소리
-시조집 『별 바라기』에 붙여
유 준 호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Ⅰ. 들어가는 말
김성숙 시인은 이번에 네 번째로 시조집『별 바라기』를 상재(上梓)한다. 먼저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 김 시인은 문학적인 가정을 기반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수필가로 시조시인으로 문명을 날리던 아버지 김영배 시인의 큰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문학의 그늘에서 자라나 자연스레 문학에 발을 내딛어 이제는 탄탄한 문학의 길을 닦아 중견문인으로 성장하여 그 역량을 빛내고 있다. 김 시인의 문학의 출발점은 한밭전국시조백일장 장원을 기점으로 가람문학 신인상, 오늘의 문학 신인작품상 등으로 문단에 이름을 올린 후 시조문학에 정진하여 대전문인협회 시조 분과 이사, 금강시조문학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 중앙위원, 대전시조시인협회 회장 등을 맡아 지역의 문학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대전광역시 문예 진흥 유공자상, 대전문학상, 무궁화벽송시조문학상, 한밭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젊은 날엔 아버지 김영배 시인의 문명(文名)이 높아 늘 그 그늘에 갇혀 시인 김영배의 딸로 있었는데 지금은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문학적 기량을 뽐내어 김영배 선생님이 오히려 시인 김성숙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이다. 이는 문단에 든든한 기반을 다져놓고 있는 김 시인의 성장세와 함께 이곳 대전 시조단의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는 실례라 하겠다. 김 시인의 시조작품을 읽으면 시조 속의 잔잔한 진동(振動)과 함께 자연물을 인간화하는 비범한 재주를 가지고 있음을 느낀다. 표현에 있어 부분적인 비유도 뛰어나지만 작품 전체를 은유적으로 엮어내 읽는 이의 마음을 동(動)하게 한다. 또한 모든 작품은 인사(人事)와 접맥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조 속에는 거친 숨소리가 있는가 하면 유려(流麗)한 전환에 의한 잔잔한 고요가 뿌리 깊이 박혀 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시조가 가진 특징이다. 김 시인의 시조의 집엔 늘 새바람이 불고 있다. 잠들지 않는 깨움이 있고, 정밀하게 연주되는 동적(動的) 시상이 있다. 시적 전개가 싱싱하다.
Ⅱ. 살펴보기
모난 것 둥글리고
착하게 살라시던
뜸 들여 핀 이팝꽃에
그 말씀 고슬고슬
보리밥 먹던 시절에
고봉 사랑 주셨던
<이팝꽃 어머니>
이밥은 ‘이(李)씨의 밥’이란 의미로 조선왕조 시대에는 벼슬을 해야 비로소 이(李)씨인 임금이 내리는 흰쌀밥을 먹을 수 있다 하여 쌀밥을 ‘이밥’이라 했다. 이팝나무는 이밥나무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추측된다. 꽃의 특징이 이밥, 즉 쌀밥을 연상하게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이팝꽃에 어머니의 넉넉한 마음, 자애로움, 그리고 자상함을 접목시켜 표현하고 있다. 초장엔 어머니가 들려주신 인생의 가르침이 나타나 있다. 모난 돌이 정(釘)맞는다는 말이 있는데 성격이 너그럽지 못하면 대인 관계가 원만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로 모질게 살지 말라는 뜻인데 이런 뜻이 작품 초장에 보인다. 편안하고 사랑스럽게 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마음은 공통적이다. 그래서 모난 마음, 모난 성격은 스스로 잘 구슬리어 둥글둥글 어울려 착하게 살기를 바라고 있다. 이 작품에 나타난 어머니가 바로 그런 존재이다. 시인은 이팝꽃을 보면서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다. 중장에서 이팝꽃은 밥솥에서 익어가는 쌀밥을 연상한 듯 이팝꽃이 다보록이 매달린 모습에서 고슬고슬한 밥풀을 연상하여 맛나고 입에 맞는 어머니의 교훈적인 말씀을 이 이팝꽃에 투여하여 회상하고 있다. 그리고 종장에 가서는 보리밥 먹던 시절에도 자식을 위하여 자식들께 고봉으로 사랑의 이팝꽃 같은 쌀밥을 퍼주셨던 어머니의 사랑을 떠올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보리밥 먹던 시절’은 보릿고개를 연상하게 한다. 어머니의 무한 사랑과 정이 느껴지는 열린 구조의 사모곡이다.
하늘이 놀러 와서
돌아갈 생각 없고
호수에 발 담그고
나무들도 한가롭다
세상일 근심을 지우고
산수화를 그린 봄
구름이 모여들어
묵도를 시작하고
물살은 성경 읽고
새들은 찬송 한다
대청호 에움길 사월
부활 기쁨 넘친다.
<사월 대청호>
이 작품엔‘하늘’ ‘나무’ ‘봄’ ‘구름’ 물살’ ‘새’등의 자연물이 의인화되어 있다. 사월이면 봄도 한창 무르녹아든 때이다. 어쩜 졸음이 올 듯한 나른한 계절이다. 이런 계절엔 평화로움과 한가로움이 깃들여 있다. 그리고 고요한 분위기도 넘친다. 꽃도 아름답게 피고, 새도 아름다운 목청으로 지저귄다. 이런 계절적 분위기를 누가 감히 시기하고 질투하여 훼방을 놓을 수 있으랴. “사월 대청호”의 봄 정경은 한 폭의 산수화, 동양화를 연상하게 한다. 어느 시인은 사월을 두고 잔인한 계절이라 하였고, 어느 시인은 피 붉은 슬픔의 계절이라 하였지만 보통의 경우는 희망이 움트는 계절이다. 대청호는 충북 청주와 청원, 대전 대덕구와 동구를 끼고 조성된 인공호수로 대전과 충청남북도 근린 지역에 젖줄이 되어 뭇 생물들 생명의 보금자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작품은 호수에 잦아들고 스며드는 물상과 자연을 의인화하여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시나 시조는 모두 시마(詩魔)의 호흡 속에 태어나는 정신적 이단아(異端兒)라고 하는데 이는 자연이나 사물을 그 본연 그대로 보지 않고 독특한 상상의 산물로 표현하여 읽는 이에게 새로운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 작품에도 이에 걸맞은 표현들이 있다. ‘하늘’이 물에 비친 것을 ‘놀러 와서 돌아갈 생각 없고’라 표현하고, ‘나무들은’호수에 ‘발 담그고’ ‘한가롭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첫수는 대청호 속에 봄이 산수화를 그려놓았다고 하여 정적(靜的)이나 동적(動的)인 모습을 지닌 대청호의 풍정(風情)을 묘사하고 있으며, 둘째 수는 ‘구름’ 물살’ 새’ 에움길’이 표출하는 모습을 기독교적 기원과 기도의 자세로 표현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구름은 묵도하고, 물살은 성경을 읽고, 새들은 찬송가를 부른다. 그러다 보니 대청호 굽이굽이 돌아간 길머리마다엔‘부활 기쁨 넘친다.’어쩌면 이 시조 속의 대청호는 크나큰 교회당이 된 듯하다. 시인의 폭 넓은 상상력을 엿보게 하는 작품이다.
화살표 끌어 올려 클릭을 하고 나면
문턱을 넘은 가을
여치 소리 차오르고
정답을 찾은 커서가 중심부에 서있다.
밑그림 그려놓고 조율을 해가면서
저장된 이름들이
제 모양을 갖출 즈음
완성을 꿈꾸던 밤이 아침 햇살 부른다.
급물살 타고 와서 또박또박 읽혀지고
허름한 잠옷에도
배어든 시의 향기
창가에 도란거리며 꽃으로 핀 새아침
<미리보기>
전자시대 컴퓨터 시대임을 실감하게 하는 시조이다. 컴퓨터 용어를 시적 제재로 삼아 인생살이의 일상을 표현하고 있다. 삶의 방향 설정을 ‘화살표 끌어올려 클릭’이라 표현하면서 이 작품의 문을 열고 있다. 문턱을 넘는 가을은 인생의 후반기를 재촉하는 세월의 마디를 표현한 말로 인식된다. 인생의 가을이 돼서야 삶의 지표를 찾았음을 첫수에서 표현하고 있다. 둘째 수는‘밑그림 그려놓고 조율해 가면서’저장된 삶의 형태를 꺼내어 모양을 갖추면 삶의 꿈을 완성시켜줄 밝은 날이 열린 것이라 하여 천상지향적인 삶을 살고자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일종의 기원의 자세가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마지막 셋째 수에서는 맑은 삶, 완성된 꿈을 안고 일상을 힘차게 한 걸음 한 걸음 또박 또박 걸어가면 허름한 일상도 아름다워져 ‘시의 향기’배어 풍기며 인생의 꽃을 피우는 새날 아침이 밝아올 거라 표현하고 있다. 희망찬 내일을 설계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이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시인은 계획적인 삶, 긍정적인 삶을 열어 가면 마음속에 시의 향기도 넘침을 보여주고 있다. 밝고 건강한 시조 작품이다.
묶어 논
삶의 마디
공허함을 달래가며
발꿈치 치켜들고
하늘 향한 기도 소리
청정심
채운 깃발이
사각사각 저문다.
가지 끝
든든하게
댓바람을 얹어 놓고
푸르게 차오르다
제 나이를 헤아리며
초로의
당찬 꿈들을
몸피 위에 새긴다.
<대나무 앞에서>
대나무는 벼과에 속한 식물로 죽순이 자라서 된 나무라지만 나무에 있어야 할 나이테가 없어 풀로도 분류된다. 그러나 줄기가 목질처럼 단단하여 나무로 인식되니 나무인지 풀인지 그 구분이 아직은 불분명한 어중간한 식물이다. 대나무는 나이테 대신 마디를 가지고 있으며, 늘 푸른 잎을 달고 사철을 사는데 해마다 목질만 단단해지고 다른 데는 변함이 없어 지절, 지조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외적인 대나무 모습에 인간적인 삶의 모습을 얹어 이를 교직(交織)한 것이 이 작품이다. 대의 마디를 삶의 마디로 설정하고 마디마디 비어 있는 공허함을 달래며 하늘 닿게 서 있는 모습을 ‘발꿈치 치켜들고’라 표현하였다. 보다 복된 삶을 기원하는 소리를 시인은 가마득히 치솟은 대나무 높이에서 듣고 있다. 대나무는 댓바람을 가지 끝에 얹어놓고 푸르게 푸름을 채우며 나이를 헤아리며 막 익어가는 ‘당찬 꿈들을’몸피인 대나무 껍질에 새기고 있다. 대나무는 잎과 몸통이 처음엔 온통 푸르다가 한 해 한 해 지나며 대나무 몸통은 갈색으로 변하면서 부드러움이 딱딱함으로 바뀐다. 대나무의 이런 일생 모습을 인간의 일생 모습으로 대비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초로의 당찬 꿈’은 무엇일까. 아마도 꿋꿋하게 제 마음을 지키며 늘 푸른 날을 살고자하는 희원(希願)이 아닐까. 이 작품 속의 시적 자아는 대나무이며 시인이 되고 있으니 ‘초로의 당찬 꿈’은 시인의 꿈이기도 한 것 같다. 사람들은 살면서 하나같이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꾼다. 그런 생각을 이 대나무에 의탁하여 시인은 표현하고 있다.
무기도 아닌 것이
비말에 숨은 적이
새봄을 가로막고
엄포를 놓는 현실
사회적 거리두기에 된 서리꽃 피었다
보이지 않는 적이
삽시간에 기습하여
경제도 확진 받고
신음하는 지구촌
수위가 높아진 눈빛 한파 속에 떨고 있다
<기습 한파>―코로나 19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여전히 세계 곳곳에 침투하여 온 지구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끊일 줄 모르고 변신까지 하며 오늘도 횡행하여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리고 있다. 입마개를 하지 않고는 집밖에 나설 수 없는 이 현실을 어찌해야 할까. 시인은 이를 “기습 한파”라고 하여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예상치 못한 ‘기습 한파’는 사람들을 떨게 하고 움츠리게 한다. 시인은 그 존재를 ‘무기도 아닌 것’ ‘비말에 숨은 적’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비말(飛沫) 속에 은신하여 우리 생명을 노리는 적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봄이 되면 만물이 죽음의 늪을 빠져나와 희망의 고동소리를 울리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런데 ‘기습 한파’로 은유된 이 병균은 그런 봄을 가로막고 사람들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살도록 하여 ‘서리꽃’같은 차가운 현실을 연출해내고 있다. 이 병균은 우리 몸에 기습 침투하여 삶의 원동력도, 경제도 병들게 하여 온 지구촌을 신음소리로 채우고 있다. 갈수록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기승을 부려 우리의 건강도 우리의 삶의 핏줄인 경제도 두려움에 빠뜨리고 있다. 기원하노니 빨리 그 자취가 사라져 평상을 회복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이 시조에는 담겨 있다. 만나던 얼굴이 자꾸만 가물거리는 시간은 언제까지 지속될는지 답답함이 가슴을 누르는 것 같다. ‘기습 한파’로 은유된 시제가 매우 공감이 간다.
하늘 뜻 새겨지는
큰 가슴 한복판에
멍자국 심하더니
물고 트여 선명하다
당당함 안고 흐르는
자유 의지 푸른 눈.
숨결에 색을 입힌
윤슬로 반짝이며
커다란 자맥질로
불평하는 파도에게
고요한 시어 몇 줄을
품고 살라 이른다.
<바다>
이 작품은 추상물의 구상화, 사물의 인간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바다”를 크나큰 가슴을 가진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세상에 하늘 뜻을 거스르며 존재하는 만상(萬象)은 없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 심지어 무생물체까지도 하늘이 만들어 운영하는 자연의 순리와 자연의 법칙에 반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늘의 뜻은 자연의 뜻이요, 자연의 뜻은 하늘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작품 “바다”는 하늘의 뜻, 자연의 뜻에 따라 존재하고 운영되고 있음을 느끼게 하고 있다. 첫수는 ‘바다’가 사노라니 때로는 고달파 가슴에 멍도 들지만 ‘하늘 뜻 새겨지니’모두가 물고 트이듯 확 트여 가슴 속이 맑아지고 있음을 표현하면서 바다의 푸른 물결 모습을 당당한 자유 의지를 가진 ‘푸른 눈’이라고 의인화하여 은유하고 있다. 둘째 수는 바다의 넘실거림을 ‘숨결’이라고 하여 생명체로 승화시켰는데 그 ‘숨결’이 ‘색’을 입고 햇빛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며 ‘커다란 자맥질’을 한다고 하였다. ‘불평하는 파도’란 말은 파도가 밀려와 거품을 쏟아놓음을 표현한 듯하다. 시는 읽는 이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고 정서를 순화시켜 주는 순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쩌면 바다가 파도를 일으켜 들떠 좌정하지 못하고 설레는데 이를 고요히 가라앉혀 주고픈 마음에서 ‘고요한 시어 몇 줄을 품고 살라 이른다.’로 작품을 마무리한 것이 아닐까. 이 시조는“바다”를 통하여 인간 심성의 순화를 도모했다고 볼 수 있다.
부동산 사고팔아 수십억 부풀린 돈
장롱 뒤에 숨겨두고 불안한 졸부 아제
밤마다 노심초사에 도끼 놓고 잠잔다.
빈자의 가슴에다 못 박는 참견에도
흔들림 하나 없는 마음이 편한 부자
가난을 주렴 엮어서 걸어놔도 행복이다.
<행복 대조>
인간사의 이치를 표출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니 불현 듯 거지가 그 아들에게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불난 집 근처를 지나며 아들에게 「넌 행복한 줄 알아라. 저기 불이 나 발 동동 구르는 이들을 보라. 우리는 불탈 집이 없으니 발 동동 구를 일이 없으며, 다리 밑에 자리를 펴면 잠자리가 되니 잠자리 걱정도 없고, 돌아다니면 먹을 것도 생기니 끼니 걱정도 없으니 이 어찌 행복이 아니겠느냐.」했다는 이야기이다. 행복은 생각의 방향에 따라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마음속의 존재이다. 그래서 거지가 느끼는 행복을 우리는 이해할 만도 하다. 돈 때문에 돈을 지키려고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는 이가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재벌(財閥)이 다 행복하지 않듯이 가난하다고 다 불행한 것은 아니다. 먹고 자고 살면서 근심 걱정이 없으면 그게 바로 행복이 아니겠는가. 인생은 미립자(微粒子)에서 출발하여 성체가 되어 살다가 다시 미립자로 돌아간다고 한다. 갈 때는 돈이나 금덩이를 짊어지고 가는 것도 아니고 홀홀히 몸만 떠나니 돈도 재물도 다 무용지물이다. 이것이 하늘의 이치이며 우리 삶의 이치이다. 그러니 행불행(幸不幸)은 다 각자의 생각과 마음이 지어낸다. 불교에서는 이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여 세상 만상은 오로지 마음과 생각에 달려있다고 하고 있다. 이런 모습과 생각을 가감 없이 표현한 작품이 바로 이 “행복 대조”이다. 첫수는 재물에 눈이 멀어 이를 이루고 지키려 노심초사(勞心焦思)로 잠 못 이루는 졸부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으며, 둘째 수는 가난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주변에서 누가 뭐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굳게 지키며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이 행복임을 표현하고 있다. ‘도끼 놓고 잠잔다.’ ‘가난을 주렴에 엮어서’와 같은 구절은 생략의 여운이 깃든 매우 시적인 표현으로 새로움을 느끼게 한다.
긴긴 날 꿈틀대던 질문과 화답일까
서투른 셈법으로 시간을 계산하며
어둠을 씻어낸 별들
산란하고 있구나.
곧게도 다진 마음 외길만 고집하며
험하고 고된 길도 구비쳐 지나온 길
혼탁한 세상을 등지고
은사시로 흐른다.
<꿈꾸는 강>
“강”을 원형심상으로 보면 역사의 길, 세월의 길, 시간의 흐름, 생명의 고향, 모성애 등을 상징하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강물에는 삶의 질의응답이 있고, 흐르는 세월이 들어 있다. 이런 강(江)의 이미지를 통하여 시인은 이 시조를 전개하였다. 이 시조 속에서 강에는 생동하는 꿈이 살고 있다. 마치 고기들이 그들의 미래인 알을 산란하듯이 그렇게 그 생동하여 빛나는 꿈은 희망을 상징하는 ‘별’을 산란한다. 첫수 종장 ‘어둠을 씻어낸 별들/ 산란하고 있구나.’는 시적 변용이 이루어진 낯설기 표현의 한 모습이다. 강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 흘러 굽이굽이 험한 길 부딪침의 고난을 견뎌내며 세월과 삶을 이고지고 흘러간다. 욕망에 눈이 먼 현실의 혼탁한 시류(時流)를 저만치 뒤로 하고 티 한 점 묻지 않은 은빛 숟가락처럼 순수의 모습으로 세상을 열어가고 있다. 강이 표상하고 있는 내외면의 모습을 통하여 심층에 자리한 시인의 심성을 교직하여 작품을 형상화하였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꿈꾸는 강’을 하나씩은 품고 있지 않을까. 아무리 악(惡)한 이도 자신의 미래를 향해서는 선(善)하다고 한다. 그런 인간 본성이 여기 나타나 있다.
누군가의 별이 되어
반짝일 수 있다면
하늘을 유영하다
파랗게 물이 든 채
속가슴 오랜 방황을
멈출 수도 있겠다.
바라만 보더라도
미소가 피어나고
시선을 고정하고
하나될 수 있다면
눈부신 별이 되어서
떠 있어도 좋겠다.
<별 바라기>
이 작품은 시조집의 표제작이다. 별은 태양계에 빛나는 물체들로서 운명의 정점, 숙명의 결정체, 희망, 소망, 바람, 천사 등의 심상을 가진 상징어이다. 여기 이 시조 속에서는 빛나는 희망과 꿈의 존재로 쓰였다고 본다. 첫수는 불특정 다수의 희망과 꿈의 뜻을 지닌 별로 시인이 별이 되어서 나 아닌 타자의 희망이 되고픈 마음이 시조 속에 숨어 있다. 무한한 파란 희망이 사는 하늘을 헤엄쳐 다니며 들떠있는 모든 것을 차분히 가라앉히면 ‘속가슴 오랜 방황을 멈출 수도 있겠다.’고 하여 시적자아의 희망 섞인 바람을 표출하고 있으며, 둘째 수는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흥겨워져 미소가 피어나는 별과‘시선을 고정하고 하나가 될 수 있다면’즉, 물아일체의 경지가 되면 뭇 사람에게 눈부시게 빛나는 별로 하늘에 떠있고 싶다는 시적 자아의 마음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묵시적 이미지가 빛나는 작품으로<별 바라기>는 이상세계의 삶을 누리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시제라고 생각된다.
심호흡 목덜미에 초록물이 드는 날에
봄 햇살 겹 두르고 하늘을 이고 앉아
산 정상 외줄타기의 출발을 조율한다.
미지의 문을 밀고 날개를 펼치면서
정지도 유턴도 없는 화살로 직진할 때
하늘이 응원해주고 호위하던 구름아.
쪽빛의 바다 향기 골짜기에 풀어놓고
능선이 전하는 말 귀 밝혀 새겨듣다
신나게 살아가는 법 공중에서 배웠다.
<도전 일기>
도전(挑戰)이란 말은 어떤 일이나 상대에게 정면으로 맞서 겨루거나 어려운 일을 성취하려고 나서는 것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인데 이 작품에서는 삶의 방식, 새로운 삶의 이상에 도전하는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 자연은 삶의 스승이라고 한다. 우리의 삶 속에는 자연을 본받아 이를 흉내 내는 모습들이 숨어 있다. 우리는 자연물을 본떠서 도구를 만들고 이를 이용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킨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쟁기는 두더지에서, 비행기는 잠자리에서 그 습성을 표본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라 한다. 첫수는‘심호흡 목덜미에 초록물이 드는 날에’란 말로 시상을 열어 깊이 삶을 천착하여 푸른 희망이 싹 트는 날 햇살, 하늘의 혜택을 받아 보다 나은 삶의 높이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출발의 때를 가늠해본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 수는 알 수 없는 미래를 개척하며(=미지의 문을 밀고 날개를 펼치면서)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정지도 유턴도 없는 화살로 직진’하여 하늘의 응원, 구름의 호위를 받으며 삶의 한길을 달려 열어 감을 표현하고 있다. 첫수와 둘째 수가 천상의 힘으로 펼쳐지는 일을 작품 속에 담고 있다면 셋째 수는 지상의 힘으로 펼쳐진 일들을 통하여 천상이 알려준 삶의 법으로 살아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시듦 없는‘바다 향기’를 지상에 끌어들여 삶의 줄기인 능선의 뜻에 따라 ‘신나게 살아가는 법을 공중에서 배웠다’고 하고 있다. 없음이 들려주는 있음의 이치가 이 시조 맨 끝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세상은 비움과 채움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존재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건강은 어떠신지 여쭈어 보았을 때
팔 근육 보이시며 힘자랑 하시더니
홀연히 떠나셨다는 소식 접한 허무함.
전철역 뵈었을 때 앞뒤가 없던 말씀
이어진 혼잣말이 치매라는 지병인 줄
선생님 가신 뒤에야 이해할 수 있었지요.
선생님 빈자리에 놓여 있는 악보 한 장
풍금을 치던 양손 제자들 노래하던
그 추억 어찌 두고서 하늘나라 가셨나요.
열정의 시조 사랑 앞장 선 바지런함
일평생 걱정 없이 사시리라 했는데
재물도 명예마저도 헛된 줄을 압니다.
<남겨진 악보 한 장>―김재수 선생님 영전에
“남겨진 악보 한 장”조시(弔詩)인데도 제목이 멋지다. 이 작품은 부제에 쓰인 대로 초등학교 교장을 자낸 김재수 시인을 추모하여 쓴 작품이다. 조시는 문학성보다는 거기 담긴 내용에 추모할 이의 모습이 비쳐지면 그만이다. 김재수 시인은 말년에 치매기가 있어 때로 엉뚱한 소리를 하여 주변을 당황하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치매는 장기적인 기억과 공간개념, 감정적인 행동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기억장치인 해마(Hippo campus)가 고장이 나 생기는 병증이다. 김재수 시인의 이 병증이 가벼울 때 시인은 그의 건강 안부를 물었는가 보다. 그 때 그는 팔 근육을 자랑하며 건강을 강변하더니 속절없이 황망하게 떠났음을 회상하여 쓴 것이 첫수로 인생의 허무감과 무상감이 나타나 있다. 둘째 수는 횡설수설(橫說竪說)하며 지하철을 타고 있던 그의 모습에서 그 때는 몰랐는데 뒤늦게 가신 다음 생각하니 치매였음을 알 수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셋째 수는 선생의 한창 때 풍금을 치며 아이들을 가르치던 그 악보가 선생의 자취로 남아 있는데 그 추억을 어찌 두고 무심히 떠났는가 하는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넷째 수는 김재수 시인이 시조 사랑의 길을 걸으며 대전시조시인협회장, 공무원문학회장 등을 하시던 그 명예와 알뜰히 모았던 재물을 다 놓아두고 홀홀히 저승으로 떠나갔으니 명예도 재물도 다 헛된 것임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조는 김재수 선생의 삶의 한 단면을 파라노마로 펼쳐 보인 작품이다.
오랜 세월 가슴에다
심어놓은 믿음의 씨
시절이 변하여도
변치 않는 고운 빛
입춘에 분갈이 하여
복음 꽃을 피우리.
<복음 꽃을 피우리.>
복음(福音)은 기독교적인 용어로 하늘의 소리, 하나님이 인간에게 전하는 믿음의 소리이다. 이것이 꽃이 피었으니 얼마나 아름답고 향기가 진동하랴. 시인은 아주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작품은 지은이의 분신이라고 한다. 그래 그런지 김 시인의 작품 속엔 이런 하늘의 소리가 곳곳에 묻혀 있다. 오랫동안 기독교 신자로 산 시인은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며 사랑을 주며 살라는 기독교 교리의 실현자이다. 그래서 그의 시조 속에는 이런 교리가 꽃을 피우고 있다. ‘오랜 세월 가슴에다 심어놓은 믿음의 씨’란 말이 바로 그 인자(因子)이다. 씨는 싹을 틔우기 위해 존재하는 알갱이요 핵(核)이다. 시인은 마음속에 이런 ‘믿음의 씨’를 맺어놓고 이를 싹 틔워내고 있다. ‘시절은 변하여도’ 그 믿음의 ‘고운 빛’은 변치 않고 있다. 이 시조에 쓰인 ‘입춘’은 24절기의 하나가 아니라 인생의 입춘이라고 이해된다. 인생의 싹을 돋워내는 입춘에 삶의 터전을 가꾸어 하늘 말씀의 꽃을 피우겠다는 믿음을 다짐하는 단시조로 간단한 시행 속에 진실한 믿음의 신념이 뿌리 내리고 있는 작품이다.
술버릇 고약한 은영 아비 얼큰해져
원수마냥 지내던 이 서방 손잡더니
제 풀에 기가 죽어서 막걸리만 권한다.
화합 위한 마을 잔치 편 가르기 시작되고
쌍심지 밝히면서 가위 바위 보를 한다
흥타령 불러 일으켜 묵은해를 던진다.
세 윷이 잦혀지니 앞선 말을 잡았다
두 윷이 엎어지니 업은 말도 잡았다
연달아 윷을 던지는 신바람난 박 서방
뚝심을 자랑하며 맨 먼저 나서면서
허우대 멀쩡하니 폼을 잡던 중리 이장
앞가슴 쾅쾅 치면서 네 탓이다 내 탓여.
양지 뜸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고
원정 온 중리 이장 땅을 치며 곡할 때
모닥불 피어오르고 보름 밥이 맛나다.
<대보름 날 윷놀이>
윷놀이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우리의 전통 전승놀이다. 세시풍속지(歲時風俗誌)에 보면 정월에 가장 보편적으로 남녀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고 즐기던 놀이라고 되어 있다. 이 시조는 그 놀이 광경을 현장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첫수에선 술 먹으면 주정꾼이던 이가 새해 들어 첫 보름날 얼큰히 취한 모습으로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 화합을 다지는 장면을 표현하였고, 둘째 수는 동네 화합을 다지며 가위 바위 보로 편을 갈라 짜서 윷놀이를 흥겹게 하면서 묵은해의 묵은 일들을 다 씻어버리고 새해의 새 꿈을 기원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으며, 셋째 수는 윷놀이 할 때 말이 잡히고 잡는 재미난 놀이 맛을 표현하고, 넷째 수에선 온갖 폼을 다 잡고 기세등등하던 중리 이장이 윷놀이에서 패하고 가슴을 치며 아쉬워하고 억울해 하며 네 탓 내 탓을 늘어놓는 모습을 표현하였으며 마지막 다섯째 수에서는 이긴 팀과 진 팀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피워놓은 모닥불 곁에 둘러앉아 대보름의 대표 음식인 오곡 약밥을 맛있게 먹음을 표현하여 휘영청 밝은 보름달빛 아래 펼쳐지는 세시풍속의 멋과 맛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특별한 기교나 비유는 없지만 대보름의 풍정이 눈앞에 펼쳐진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런데 왜 윷놀이에 진편은 그리 요란스럽게 억울해했을까. 내려오는 말에 윷놀이에 이긴 편은 그 해 농사가 풍년이 들고, 진편은 그 해 농사가 흉년이 든다고 하니, 윷놀이에 진편이 그리하였으리라.
아가의 입가에는
눈썹달이 웃고 있다.
젖니에 해가 뜨고
귓불에 꽃이 피어
무슨 말 하고 싶은지
낮은 코가 실룩인다.
<행복>
아가는 천사라고 한다. 그만큼 티 없이 순수하고, 거짓 없이 참되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가 입가에는 살짝 벙글은 초승달 같은 천사의 웃음이 피어나고 해맑게 웃을 때 내보이는 하얀 젖니는 햇살처럼 환하다. 야리야리한 귓불은 한 송이 꽃을 피워놓듯 아름답다. 오물거리는 입과 실룩이는 낮은 코는 무슨 행복의 메시지를 전해주려는 듯하다. 그 모습은 보는 이에게 더없이 흐뭇한 감흥을 준다. 여기 쓰인 시제 “행복”은 타자와 자아의 행복을 함께 표현한 말이다. 누가 이런 천사 앞에서 딴 생각을 가지랴. 그냥 그 모습에 반할 뿐이다. 이 작품은 말 그대로 무아의 행복을 표현한 단시조이다.
깨어진 사금파리에
별들이 고여 있다
삶 속에 깨져 있던
이야기가 수런대고
멀찍이 던져 놓은 날
읽고 가는 갈바람
<사금파리>
이 작품은 시적 변이가 잘 이루어졌다. 사금파리는 사기그릇이 깨진 조각으로 그 면이 예리하게 빛나는 파편이다. 사금파리 위에 햇살이라도 비치면 반짝이며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그 모습이 깜깜한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과 같다. 그래서 시인은 초장에서 ‘깨어진 사금파리에/ 별들이 고여 있다’고 표현하였다. 사금파리는 깨지기 전엔 사기그릇으로 밥그릇, 국그릇 등으로 사용되었으니 그 속엔 인간 삶의 이야기가 들어 있으리라. 그래서 ‘삶 속에 깨져 있던 이야기가 수런대고’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사금파리는 너무 날카로운 칼날 같아 자칫 살을 베기 일쑤이니 그것들을 될 수 있으면 손길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으로 멀찍이 던져 버린다. 그걸 가을바람이 읽고 간다고 시인은 아주 서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람은 세상을 바꾸는 존재로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자연현상이다. 그 자연 현상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미처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어 알고 있을 것이니 바람이 이 사금파리에 깃든 모든 사연을 읽고 간다고 시인은 보고 있다. 아마도 이 작품 속 가을바람은 사금파리에서 반짝이는 별들의 꿈도 보고, 사람들의 세상살이 이야기도 듣고 있으리라.
층층이 쌓아놓은
누군가의 장서인가
학문의 무한함이
진리인 듯 놓였어도
완전히 해독하지 못한
대자연의 신비여
<채석강에서>
채석강은 전북 부안 변산에 있는 닭이봉(鷄峰)일대의 층암절벽이 바다를 두르고 있는 곳을 두고 하는 말로 아름다운 경치가 이태백이 놀았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흡사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절벽 바위가 바닷물의 침식을 받아 마치 책을 쌓아놓은 듯 겹겹 층을 이루고 있다. 그 모습을 표현한 것이 이 작품이다. 자연의 이치와 역사가 기록된 그 바위 층이 하나의 장서가 되어 우리 앞에 놓였지만 그 안에 든 무한한 진리의 자연문자를 우리는 제대로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대자연의 신비를 모르는 우리의 아둔함이 아닐는지. 채석강에는 이렇게 오묘한 자연의 비밀과 진리가 숨어 있다. 다만 우리는 그걸 눈치 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고 있을 뿐이다. 자연의 신비를 찬양의 시조 작품이다.
Ⅲ. 나가는 말
현대시조는 새로운 언어감각으로 시대상을 반영하여 독자의 깨우침을 이끌어내는 문학 양식으로 심화된 주제, 참신한 삶의 내용을 담아낸다. 그런데 시조는 정형성 때문에 제약(制約)의 문학(文學)이라고 하여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杞憂)이다. 시적인 발상을 틀에 맞춰 언어를 적절히 운용하면 자연스럽게 탄생되는 문학이다. 시조의 특장(特長)은 짧은 형식 속에 세상을 담고 삼라만상을 숨 쉬게 하면서 그 속에 인간들의 생로병사를 접목시키는 점이다. 어떤 문학작품에 대하여 논설 비평하는 일은 제2의 창작이라고 하는데 이 글이 그에 조금이라도 걸맞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이에 충족되기는 부족함이 많은 것 같다. 김성숙 시인의 작품집 『별 바라기』의 작품 편편 가운데 일부 작품을 선별하여 살펴보았다. 김성숙 시인은 시조를 쓸 때 조그마한 일상적 경험과 사물의 내포적 의미까지도 시적으로 환치하여 이 모두를 알맞은 이미지로 전환하고 있다. 이번 시조집에 실린 작품들은 심오한 깊이와 높이보다는 보편적인 넓이와 폭을 중시하여 작품을 펼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독자들은 특별한 천착(穿鑿)의 과정이 없어도 쉽게 김성숙 시인의 작품에 접근하여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원래 시조는 정적인 자연물의 흐름소리를 리듬 있는 말로 표현하는 것으로 과거의 시조는 그것에 옷을 입혀 인간 도리, 연군지정 등 교훈적인 내용과 느낌을 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현대의 시조는 그런 고풍에서 벗어나 다양한 주제, 다양한 제재로 다양한 감정과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시인마다 작품 밑엔 그만의 세계관, 그만의 인생관을 깔아놓고 작품을 형상화한다. 시인 김성숙은 이런 면에서 우주를 아우르는 세계관과 믿음을 추구하는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오며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시조 작품으로 빚어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엔 고요 속에 약동하는 자연의 숨소리와 현존하는 아기자기한 인간사가 교직되어 있다. 앞으로 이런 면이 더욱 심화되고 다듬어져 빛나는 시인의 시편들이 우리 앞에 햇살처럼 반짝이고 달빛처럼 은은히 빛나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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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시조 좋은 평론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