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도 가만있을 수 없소이다
-3•13 밀양 만세운동
1.
고종 황제
인산일[장례일]을 앞두고
윤치형, 윤소룡은 서울로 향했다.
3월 1일, 오후 2시
민족 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탑골공원에서 숨죽여 기다리던 학생들
참다 못해 육각정으로 뛰어오른
청년
조선 독립 만세!
피 끓는 목소리가 파도가
되었다.
조선 독립 만세!
조선 독립 만세!
조선 독립
만세!
피고인 윤소룡, 윤치형은 예전부터 조선통치에 관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대정8년[1919년] 3월 조선 각지에서 조선독립 시위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밀양에서도 이 운동을 하기로 계획하여 운소룡은 주로 동지의 규합을,
윤치형은 주로 준비를 하기로 분담하였다. (1919.4.14.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 판결문)
3월 11일, 밀양 정동찬의 집(내이동 991)
윤소룡, 김소지, 정동준, 윤보은,
정동찬 모였다.
“탑골공원에서 만세를 부른 이후, 온
나라에서 조선 독립 운동이 일어나고 있소이다. 밀양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소이다. 내일모레가 성내(城內) 장날[음력 2월 12일]이니 정오부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합시다.”
3월 12일, 정동찬의
집
윤소룡, 정동찬, 권재호, 최종관, 정동준,
윤보은, 박소종, 설만진, 박만수가 모였다.
“이제 내일이오. 내일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나와야 합니다.”
모두들 연판첩에 도장을 찍었다.
3월 12일, 김병환의 미곡상점(내이동 846)
밤, 윤치형이 큰 보자기를 들고
들어갔다.
13일 이른 아침, 윤치형이 신문지에 싼 것을 들고
들어갔다.
얼마 후, 정동찬이 들어갔다.
3월 13일, 오후 1시 김병환의 미곡상점 앞
윤치형은 “조선 독립 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박만수에게 건넸다.
윤소룡은 김소지에게 나팔을 건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
나팔 소리가 깃발을 뒤따랐다.
정동찬, 정동준, 설만진, 양쾌술이
따랐다.
박소종은 동지들에게 태극기를 건넸다.
서문걸에서 권재호가 “만세”를 외치며
달려왔다.
나팔 소리는 성 안의 시장으로 가고 있었다.
박만수가 ‘조선 독립 만세’
깃발을 이장수에게 건넸다.
이장수가 깃발을 최종관에게 건넸다.
윤치형은 두루마기 속에서
‘조선독립신문’을 꺼내어 윤차암에게 건넸다.
윤차함은 권문득에게 건넸다.
권문득은
김상득에게 건넸다.
김상득은 ‘조선독립신문’을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박작지,
엄청득, 노재석, 김상이, 윤방우는 함께 외쳤다.
조선 독립 만세!
조선 독립
만세!
조선 독립 만세!
김병환의 미곡상점에서 출발한
시위 행렬
서문걸을 지났다.
밀양공립보통학교 앞을 지날
때
누군가 태극기를 들고 학교 안으로 달려갔다.
발 디딜 틈도 없는
시장통.
시위 행렬은 고무줄마냥 길어졌다.
눈이 똥그래져 바라보는
아이들
만세를 부르는 장꾼들
바가지에 물을 떠서 건네는
이
떡을 조각조각 나눠주는 이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는
이
만세, 만세, 만세!
돼지가 고함을 쳤다.
닭들이
목청을 뽑았다.
강아지가 끝없이 짖었다.
대문이
열렸다.
고무신이, 지팡이가, 맨발이
몰려
나왔다.
일본인들이 가게 문을 닫아걸었다.
나팔 소리가 남문에 이르렀을
때
행렬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피고인 윤소룡,
윤치형을 각 징역 1년 6월에 처한다.
피고인 정동찬, 김병환, 김소지, 박만수, 이장수, 최종관, 박소종을 징역
6월에 처한다.
피고인 권재호, 설만진, 정동준을 징역 4월에 처한다.
피고인 윤보은은
징역 3월에 처한다.
피고인 김상득, 박작지, 엄청득, 노재석, 김상이, 윤방우, 양쾌술을 태 90에
처한다.
압수한 대형 깃발[조선 독립 만세] 1매, 소형 깃발[태극기] 18매, 조선독립신문 22매는
몰수한다. (1919.4.14.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
판결문)
2.
3월 14일,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160여 명이 훈도와 교장[교도암웅]의 제지를 뚫고 거리로 나섰다.
학생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성내 사람들 수백 명이 따라 나섰다.
3월 15일, 밀양유림회는 강변 솔밭에서 시회(詩會)를 열었다. 두루마기에 갓을 쓴 어른들이
강변을 가득 메웠다. 시회를 하던 어른들이 일제히 일어나 거리로 나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수천 명의 시위 군중으로 성내 거리는
막혔다. 경찰, 헌병, 소방대까지 출동해 군중을 해산했다.
3월 20일, 시헌(時軒) 안희원(安禧遠)의 장례일
조문객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어~화 어~화 어화넘차 어화”
장례 행렬이 성내
시장을 지날 무렵
상여 소리가 뚝 끊어졌다.
조선 독립
만세!
만세, 만세, 만세!
헌병은 총을 쏘고, 소방대는 물을
퍼부었다.
4월 1일 아침,
아동산
윤수선, 강덕수, 김성선, 박소수, 윤차암이 만나다.
4월
2일 저녁, 밀양공립보통학교
어둠을 타고 청년․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윤수선, 강덕수,
김성선, 정선호, 박차용 …
정선호가 연장자인 박차용에게 나팔을 건넸다.
나팔 소리와
함께 30여 명의 청년․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윤차암이 달려왔다.
행렬이 북문 근처에
이르렀을 때
경찰과 헌병이 앞을 막았다.
피고인
윤수선, 김성선, 강덕수를 징역 1년 6월에 처하고, 피고인 정선호를 징역 1년 2월에 처하고, 피고인 윤차암을 징역 1년에 처하고, 피고인
박소수를 징역 8월에 처하고, 피고인 박차용을 징역 6월에 처한다.(1919.5.5.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 판결문)
4월 4일, 단장면 장날, 태룡리
정오를 넘기자 표충사 승려 이장옥, 이찰수, 오학성, 손영식,
김성흡, 구연운, 오응석은 ‘조선독립만세’ 깃발을 장터 한가운데 세웠다.
수천 명의 장꾼들이
모여들었다.
한산 스님(이장옥)이 독립선언서 일부를 낭독했다.
“이천만 각자가 사람마다 마음 속에 칼을 품고…”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3바퀴
돌고
군중들은 헌병주재소로 향했다.
주재소를 겹겹이 둘러싸고 돌을
던졌다.
피고인 이장옥을 징역 5년, 오학성, 손영식을 징역 3년, 이찰수,
김성흡을 징역 2년에 처한다. 압수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는 몰수한다.(1919.12.10. 대구복심법원 판결문)
4월 6일 정오, 부북면 춘화리
계성학교 교장 김래봉, 장로교 신자 김응삼, 김영환,
김응진
수백의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김성수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징과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이웃 마을을 돌았다.
4월 10일, 청도면 인산리
한밤중, 50여 명이 나팔소리를
신호로 시위에 나섰다.
일본놈은 물러가라!
일본인 집으로 몰려가 돌을
던졌다.
조선 독립 만세!
3.
1919년 3월 13일부터 4월 10일까지 밀양에서는 총 여덟 차례,
만세 시위가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군민이 참여했다.
http://blog.naver.com/len412/220653782731
첫댓글 만세
아직도 완전한 해방은 멀~~~~~~었는가?
봄꽃이 활짝피지 못함은
고맙습니더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