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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 역사 - 2/2
개화, 일제시대
도호부 체제로 유지되어 오던 춘천은 고종 25년(1888년)에 유수부(留守府)로 개편되었고, 2년 뒤에는 춘천 유수였던 민두호(閔斗鎬)에 의하여 2년여에 거쳐 이궁(離宮)이 지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종 33년(1896년)에 13도 1목 7부 331군 체제가 성립되면서 춘천에 강원도의 감영이 설치되었다.
춘천지역에서는 당시 전국적으로 일어나던 서구 열강과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항쟁이 일어났는데, 춘천에는 당시 유학의 거두이며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제자인 유인석(柳麟錫), 유중교(柳重敎), 김평묵(金平默), 홍재학(洪在鶴) 등이 춘천을 중심으로 우거하고 있어 이들을 중심으로 위정척사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서면 신매리에 살던 홍재학은 고종 18년(1881년) 척사위정의 상소를 올렸다가 처형당하고, 家産은 모두 몰수되었다. 상소문의 내용은 당시의 개화정책을 통박하고, 김홍집(金弘集)·이최응(李最應) 등의 중심들은 물론 국왕까지 정면으로 공격하는 내용이어서 당시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이와 같이 화서 이항로의 영향 하에 있던 춘천지역에서 의병운동이 전국에서 먼저 일어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춘천의 의병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은 모두 화서학파에 속하는 유생들이었는데, 화서학파는 화서 이항로가 창립한 학파로서 화서로부터 시작하여 중암(重菴) 김평묵, 성재(省齋) 유중교를 거쳐 의암(毅菴) 유인석으로 이어지는 학파였다. 이항로는 양평을 중심으로 후진을 양성하였으므로 춘천의 유력한 유생들이 많이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또한 이항로의 수제자인 김평묵은 원래 포천 출신이나 화서에게 수학한 후 춘천과 가평에서 후진을 양성하여 춘천에 그의 제자가 많이 있었다. 특히 유중교는 춘천 출신으로 가정서사(柯亭書社)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으므로 그의 제자와 친족이 춘천에 많았다. 특히 의암 유인석은 유중교의 수제자였다.
유인석은 춘천 남면에 집단 거주하고 있는 고흥 유씨(高興 柳氏) 집안 출신으로 화서학파의 3대 학통인 성재 유중교와 종숙질(從叔姪)관계이며, 그의 대표적인 제자이다. 또한 유중교의 손자 유제함(柳濟咸)을 의암이 양자(養子)로 삼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유중교가 유생을 교육하기 위하여 제천으로 옮겨갔을 때 의암 유인석도 따라가 도왔다.
1895년에 의병이 일어났을 때 의암 유인석은 제천, 충주, 단양을 중심으로 해서, 충북 강원 경기 3도 접경지역을 활동범위로 하였다. 그리고 초기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었던 이소응이나 후기 의병대장인 유홍석(柳弘錫)이 모두 성재 유중교, 의암 유인석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춘천의병의 핵심인물들이 모두 제천으로 가서 유인석에게 합류했던 것으로 보아 비록 그가 춘천 의병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지도하에서 활동했다고 할 수 있다. 이소응이 대장이 되어 1896년 1월에 일으킨 의병운동에는 홍시영·이면수·유중락·이만응 등이 중심이 되었는데, 이들과 춘천 주민 1천여 명은 춘천의 관아를 습격하고 춘천 관찰사 겸 선유사로 부임하던 조인승을 처단하는 등 기세를 올려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에서 파견된 경군(京軍)에 의해 패전하여 해산되었으나 이후 계속하여 유격전을 벌였고, 제천으로 옮긴 유인석과 합류하여 한일합방 이후에도 전국을 무대로 끈질긴 항전을 계속하였다. 당시 전국의병 가운데 의병해산을 거부한 경우는 강릉의 민용호(閔龍鎬) 의병과 제천의 유인석 의병 뿐 이었다.
의병활동에서 기억해야 할 춘천 출신의 인물들이 많이 있지만 특히 주목해야 할 인물이 유홍석의 며느리인 윤희순이다. 윤희순(1860∼1935)은 해주 윤씨로서 1860년에 한양에서 태어났으며. 16세에 유홍석의 외아들인 유제원(柳濟遠)에게 시집왔다. 1895년에 춘천에서 처음 의병이 일어나자 윤희순도 적극 호응하여 부녀자들과 함께 군자금을 모아 의병을 돕고, 또 ''방어장'' ''병정노래''등 의병가를 지어 남녀노소가 부르게 하였다. 또 의암 유인석의 부인과 함께 남장을 하고 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춘천은 1895년 을미의병이래 의병의 항일투쟁이 치열했던 지역이었다.
이러한 의병활동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1905년에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1910년에는 한일합방으로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식민통치 1년 만에 봉기한 3·1운동 당시 춘천에서는 3월 4일에 춘천농업학교 학생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춘천농업학교는 근대 교육이 실시된 후 강원도에 설치된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이었다. 일제의 ''실업학교령''에 따라 농업학교에 관한 칙령으로 설립된 춘천농업학교는 1910년 4월 29일에 개교하였으며, 1년제였다. 다시 1911년에 2년제로 개편되었는데, 당시 춘천농업학교는 근대 강원도 교육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 확산되자,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춘천농업학교의 졸업생 김병환(金秉煥)이 춘천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춘천으로 잠입한 후 재학생들에게 궐기하기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누설되어 일본인 교장이 간곡히 만류하였으나, 3월 7일 아침 조회시간에 만세를 부르며 교문 밖으로 나가려고 하다가 일본군 수비대의 병력과 헌병 경찰 소방대까지 동원된 무장병력 때문에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계속 만세를 부르며 수업을 거부하였다. 수업이 중단된 상황에서 학생들은 기숙사 주변에 전단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교당국은 1주일간의 휴교조치를 단행하였고, 기숙사 문을 닫아 학생들이 귀향하도록 하였다. 이때 주동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교장의 중재로 하루 만에 풀려났다. 그리고 휴교조치는 1주일 후에 정상화되었다. 춘천농업학교의 만세운동은 춘천에서의 선구적인 항일운동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후 3월 28일에는 천도교인이 주동하여 춘천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이에 앞 서 3월 15일에 수천 명이 소양강변에 모여 읍내로 들어오면서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3·1운동 이후에 일제의 제한적인 허용 하에서 전국적으로 청년회가 조직되었으며, 춘천에서도 1920년 초부터 수양과 계몽활동을 목적으로 한 춘천청년회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청년들의 활동 가운데 주목해 볼 것이 춘천고등보통학교의 항일동맹휴학운동이다. 1922년 일제의 제2차 조선교육령에 의하여 1924년 3월에 설립된 5년제 관립춘천고등보통학교는 강원도에서는 유일하게 인문계 중등학교였다.
춘천고보 학생들은 일부 일본인 교사가 민족적인 차별을 하여 불만에 차있던 차에 1926년 4월 순종의 장례에 즈음하여 상장(喪章)을 달아 저항을 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교사의 폭언과 강제해산 시도로 사태가 심각하게 되자, 일본인 교장은 상장 패용을 묵인하는 선에서 사태가 확대되지 않도록 하였다. 그러나 먼저 폭언을 했던 일본인 교사 모리의 위압적인 태도가 계속되자 학생들은 10월 4일에 다시 동맹 휴학에 들어갔다. 이 운동은 일본인 교사의 배척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그 해의 6·10 만세 운동과 연계시켜 볼 수 있는 학생들의 항일민족운동이었다고 평가된다. 춘천고보 학생들의 1차 항일동맹휴학과 그해 12월의 2차 항일동맹휴학은 그 후 이지역의 항일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3·1운동 이후 춘천지역의 항일운동은 주로 청년회의 항일운동이나 춘천농업학교, 춘천고보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동맹휴학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그리고 1930년대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가속화되면서 학생들은 단체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그 결과 독서회(讀書會)를 통하여 비밀결사를 하고, 이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항일운동을 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춘천고보의 상록회 사건이다. 1937년 3월 당시 춘천고보 5학년생이던 남궁태, 이찬우, 문세현, 용환각, 백흥기, 조규석 등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일환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할 것에 뜻을 모았다. 이들은 모임에서 결사목적과 행동강령으로 회원으로서의 자기완성, 지도자로서의 책임완수, 단결력 배양과 파벌투쟁의 배척, 조선민족을 위하여 일신을 바칠 것을 결정하고, 남궁태와 문세현이 협의하여 회가(會歌)도 마련하였다. 상록회는 회원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하여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이 ''독서회''는 비밀조직인 상록회가 표면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이 ''독서회''는 상록회와 동질적인 이명(異名)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는데, 독서회는 발족이후 매월 정기적으로 1회의 월례회를 개최하고 스스로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는 연설회를 갖거나 민족주의적 문헌의 독후감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독서회''를 통하여 조직이 활성화되고 회원 확보가 어느 정도 달성되자 ''독서회''를 상록회로 명칭 환원한 것이다. 이들의 활동은 교내에 국한되지 않고, 교외의 청년(특히 졸업생)과도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더구나 상록회를 창설한 졸업생들이 국외(만주)로 나아가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지도자들과 연계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한때 춘천농업학교·함흥고보·서울의 제1고보와 제휴하여 항일공동전선을 펴기도 하였으며,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여 천전수양단(泉田修養團)과 오정경로회(梧井敬老會)에 참여하고 단체를 적극 후원하기도 하였다.
상록회를 조직하여 활동한 지 거의 2년이 되었을 때인 1938년 12월에 이 운동은 일제 경찰에 의해 발각되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재학생과 졸업생을 포함하여 137명이 검거되어 춘천경찰서로 끌려갔다. 이 가운데 36명이 송치되었으며, 12명이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사범으로 선고를 받았다.
춘천고보의 상록회 운동은 춘천지방의 학생항일 비밀결사운동에 있어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 지역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후 춘천중학교에서 전개된 독서회, 춘천농업학교의 독서회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편 1923년에 춘천도립사범학교가 개교하였다. 그러나 입학자격이 보통학교 고등과 졸업생에게 자격을 주었기 때문에 고등과가 없는 실정에서 입학생을 선발할 수가 없어 폐교되었다. 그 후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1939년 4월에 관립춘천사범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들은 일반학교와 달리 학생에 대한 정부의 보조가 있었으며, 학생들의 학교생활에 있어서도 전시복장을 적용시켰고, 군사적인 엄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도록 강요되었다. 특히 전시 복장을 강요한데서 학생들의 강한 반발을 샀고, 학생들은 이를 거부하면서 항일운동을 시작 하였다. 춘천사범학교 학생들의 항일운동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이 백의동맹운동 (白衣同盟 運動)이었다. 그동안 비교적 온건한 항일운동을 해오던 춘천사범학생들이 1944년에 이르러 무장유격 항쟁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에 참여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려 한 것이다. 이것이 백의동맹운동이었다. 원래 백의동맹은 김화군 창도면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며. 단일조직이 아니라 지역별 또는 학교별로 조직하여 독립된 단위조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이 내건 투쟁목표는 일제는 반드시 패망할 것이므로, 일제의 패망을 촉진하기 위하여 국내에서 파업과 소요를 주도한다, 국내외 독립투사에게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도 투쟁세력이 엄존함을 알리고 민족의 사기와 나아가 민족봉기를 유도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조직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정한 거처를 정하지 않고 몇 군데 은신처를 돌아가면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철원, 회양, 김화 등 산악지대에서 유격전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5년 3월 철원에서 활동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악질 일본인 거상(巨商)을 습격하다가 체포되어 그 조직의 전모가 들어나 춘천사범학교의 조직원들도 대부분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고문을 당하여, 탈출을 시도하기도 하다가 좌절되기도 하였으나, 1945년 8월 해방과 더불어 석방되었다.
한편 신동면 증리(甑里) 출신의 젊은 소설가였던 김유정(金裕貞, 1908년∼1937년)은 1932년에 고향인 실레마을에 금병의숙(金屛義塾)이라는 학교를 세워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고, 협동조합, 농우회, 노인회, 부인회를 조직하여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농촌계몽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또한 1927년에 창립된 신간회(新幹會)의 창립에 뒤이어 조직된 여성 단체인 근우회 (槿友會)의 춘천지회도 1931년에 해소(解消)되기까지 여성의 교양제고, 문맹퇴치, 교육제도 개선, 여권옹호, 인신매매 철폐 등을 계몽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근우회 운동은 신간회의 해소와 맥을 같이 하였다. (이구용, 1996, 「항일독립운동」『춘천백년사』)
이상과 같이 일제 식민지하에서의 항일운동을 훑어보았는데,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위정척사운동이 유생들에 의해 주도되어 항일운동의 불을 지피었으나 지속적으로 연결되지는 못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춘천지역에서 일어난 위정척사운동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으며, 나름대로 조직을 가지고 중앙과 연계가 되어 있었다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있다. 이후 식민지지배하에서는 근대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그들의 교육과 현실 안에서 식민통치의 실상을 경험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저항운동을 벌여나갔다. 이것은 춘천지역이나 강원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적이고 전국적인 흐름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 김흥수, 1992, 「3·1운동 이후의 강원도의 독립운동」『강원도 항일독립운동사』3, 광복회 강원지부
* 이구용, 1992, 「강원 의병의 특징과 활동 개황」 『강원도 항일독립운동사』3, 광복회 강원지부
* 최창희, 1992, 「강원도 3 1운동의 성격」『강원도 항일독립운동사』3, 광복회 강원지부
* 오영섭, 1997, 「화서학파의 보수적 민족주의 연구」 한림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 조동걸, 1997, 「강원도민이 전개한 민족운동의 특징」『강원사회의 이해』(강원사회연구회), 한울 아카데미.
해방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으로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잠시이고, 남한과 북한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하고, 국토가 분단되기에 이르렀다. 강원도에 미군정이 실시된 것은 9월 20일이다. 초대 군정관은 즈비만 중령, 내무·재무·학무·보건 등 각부에 소령급 고문관이 배치되어 행정을 관리 감독했다. 또 자문기관으로 자치위(自治委)와 건준(建準)등에서 활약한 인사 가운데 지역실정을 고려하여 한 군에 한 명씩의 비율로 위촉된 고문들로 구성된 고문회를 두었다. 군정(軍政) 후 최초의 한국인 지사는 박건원이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외상회의는 한국문제에 대해 미·소 공동위의 설치와 5년간의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이에 남한에서는 즉각 반탁운동이 일어났으며, 강원도에서도 반탁운동이 일어나 좌·우익 간의 충돌로 유혈사태가 많이 빚어졌다. 분단 후 남과 북을 이어준 것은 대남송전과 남북교역이었다. 북한 측은 남한에 전기를 보내 주는 대가로 기계, 전기용품, 생활물자를 받아갔다. 또 남북 간의 물물교환 형식인 물자교환은 해방직후부터 1949년 초까지 약 3년 남짓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몰래 작은 규모로 이루어지다가 미군정 당국의 묵인 아래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단절되었는데, 강원도의 경우 춘천지방 사북의 38경계선상과 인제 관대리 부근, 주문진 등이 대표적이었다. 춘천·인제 두 곳에서는 육상 루트를 통해서, 주문진에서는 해상루트를 통해 선박으로 물자교환이 이루어졌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1948년 8월 15일에 남한만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초대 대통령에는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이 선출되었다. 정부수립 후 첫 강원도지사에는 이종현(李宗鉉)이 부임했다. 이 기간 동안 38선 부근에서는 크고 작은 총격사건이 끊이지 않았는데, 결국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한국전쟁에서 춘천에서의 전투는 戰史에서 기록될 만한 일이다.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한국군은 허를 찔려 거의 모든 전선에서 무너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춘천을 지키던 국군 제6사단은 북한 인민군의 제2군단을 맞아 적은 병력으로 잘 싸웠다. 북한 인민군의 제2군단은 춘천을 점령한 후 가평을 경유하여 수원까지 약 150km에 달하는 장거리를 대우회기동해야 하는 부대였다. 6사단은 2개 연대를 전방에, 1개 연대를 예비로 하는 지역방어를 실시하여 춘천 정면에 7연대를 배치하였다. 제7연대는 1949년 5월에 춘천 지역에 배치된 이후 13개월 동안 이 지역을 방어하며 지형의 숙지를 잘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인원이나 장비 면에서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적에게 막심한 타격을 주었고, 전사에 남을 춘천 전투를 기록했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1951년 4월 15일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강원 도청은 전세 호전으로 원주읍 일산동에 강원 도청 임시사무소를 개설했다. 이 임시사무소는 1953년 7월 30일 강원 도청이 춘천으로 정식 수복할 때까지 도청의 모든 기능을 수행했다. 피난 도정(道政)의 역점은 난민구호와 교육, 전재복구 등 세 부분에 집중되었다. 춘천은 한국전쟁 중의 격렬한 전투로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따라서 수복 후에는 전재복구와 난민구호에 역점을 두었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5년 만에 발발하여 3년 동안 진행된 한국전쟁으로 전국이 피해가 극심하였지만 강원도는 특히 북부 강원도가 북한에 속하게 되어 분단을 겪는 피해를 입었다. 또한 춘천은 최전방으로 앞에서 살펴보았던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 겪었던 전투와 같이 이 지역에서 주목할 만한 큰 전투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전쟁복구와 난민구호에 앞장서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1960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항거하는 4·19혁명이 일어났고, 이에 춘천지역에서도 4월 25일에 불붙기 시작하였고, 원주 등 다른 지역에 파급되기도 하였으나 4월 26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하여 시위는 중단되었다. 또한 시위도 대부분 평화적이어서 이 과정에서 희생자는 없었다. 그러나 4·19 혁명은 5·16 군사쿠데타로 다시 한 번 혁명 정신이 좌절을 겪는다
. 군사정부는 공약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해 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추진한 것이 춘천수력발전소 건설공사였다. 이 공사는 순수한 우리 기술에 의해 처음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전국적으로 관심을 끌었다. 현재 춘천시 신북읍 용산리와 서면 오월리를 가로지르는 이 공사는 1961년 9월 21일 착공, 3년 5개월만인 1965년 2월 10일에 준공 되었다. 이후 춘천-서울간 경춘국도의 국도포장공사와 춘천-원주의 춘원국도 포장 공사, 의암댐 완공 등으로 춘천이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특히 의암댐의 완공으로 호반의 도시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춘천으로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것은 1973년에 동양 최대의 사력댐인 소양강 다목적댐이 준공된 것이다. 이렇게 북한강의 수계를 이용한 수력발전소 건설로 춘천 주변에는 화천댐, 춘천댐, 의암댐, 소양댐 등이 들어서 춘천은 이 댐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양댐의 경우 댐의 규모가 동양최대였던 만큼 이 댐 공사를 위하여 춘천 사북면 일대의 많은 선사유적이 수몰되었을 뿐 아니라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던 삶의 터가 수몰되어 ''수몰민''이라는 용어가 생겨나게 되기도 하였다.
춘천이 도청소재지로서 강원도의 다른 시·군에 비해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국적인 상황에서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우선 춘천의 인구 증가율이 낮고 분단이전만 하더라도 북한강 수계에 의존한 교통루트가 있었으나, 분단이후 교통이 불편하여 발전에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1995년 이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춘천은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고 있다.
* 강원도, 1995, 『강원도사』 현대편
* 유병용, 1996, 「8·15광복과 춘천」『춘천백년사』
* 유병용, 1996, 「6·25전쟁과 춘천」『춘천백년사』
* 전종순, 2000, 「한국전쟁사를 바꾼 춘천벌의 승전고」『춘천대첩, 무엇을 남겼나?』, 강원대학교·육군쌍용부대.
나오는 말
이상에서 춘천의 역사에 관하여 삼국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별하여 보았다. 어느 지역이나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역사를 만들며 살아왔다. 춘천은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 평야지대가 발달하지 못하여 인구밀도가 낮았으며, 산물이 풍부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북한강의 수계에 의해 나름대로 남북 교통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45년 분단이후 이 교통로가 막혀 더 이상의 왕래를 할 수 없었고, 지난 50년 동안 춘천은 교통의 오지라고 인식되어 온 실정이다. 분단의 최대 피해지역 중의 하나가 춘천인 것이다. 또한 전방 가까이에 있어 군부대가 시내 가까이 있으며, 춘천 인근의 도시들이 군사 도시적인 측면이 있어 이러한 영향을 받고 있기도 하다.
또한 춘천 주변에 건설한 댐으로 인하여 춘천의 생활양식이나 산업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동안 수도권의 상수원이라는 이유로 개발이 제한되어 왔다. 무조건적인 개발이 지역의 발전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동안 춘천의 발전이 낙후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제 춘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보아야 할 때인 것 같다. 과거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여 그것에 안주하려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인 모습을 고찰하면서 어쩌면 고백적인 자세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분단 이후 춘천이 낙후되어 알게 모르게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고대로부터 근대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춘천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정신을 찾아야 할 것이고, 분단의 피해지역으로서 발전이 지지부진했다면 앞으로 통일시대를 대비하여 현재의 약점을 미래의 장점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과 자료의 배치를 새롭게 하는 작업을 통하여 역사 안에서 미래의 춘천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춘천의 역사를 살펴보는 뚜렷한 목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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