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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소라 텍스트 (TM) | 칠십인역 / 불가타 성경 |
시편 1-8편 | 시편 1-8편 |
9편 | 9,1-21 |
마소라 텍스트 (TM) | 칠십인역 / 불가타 성경 |
시편 10편 | 시편 9,22-39 |
11-113편 | 10-112편 |
114편 | 113,1-8 |
115편 | 113,9-26 |
116,1-9 | 114편 |
116,10-19 | 115편 |
117-146편 | 116-145편 |
147,1-11 | 146편 |
147,12-20 | 147편 |
148-150편 | 148-150편 |
150편의 시편 구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네 번에 걸쳐 같은 내용으로 등장하는 찬미가 부분이다(시편 41,14; 72,18-19; 89,53; 106,48). 예컨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영원에서 영원까지!”(41,14) 내용이 같은 네 번의 찬미가가 나오는 부분을 기점으로 시편은 총 다섯 부분, 곧 1-41편, 42-72편, 73-89편, 90-106편, 107-150편으로 분류할 수 있다. 시편을 다섯 부분으로 분류하는 흔한 방식은 다섯 권으로 구성된 모세오경을 가장 귀한 성경으로 인식해 온 유다 전통에서 비롯한 것으로 추정된다.
시편의 다섯 부분에서 하느님의 호칭을 달리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을 ‘야훼’라고 부르는 것은 첫째와 넷째, 그리고 다섯째 시편 묶음에서, ‘엘로힘’이라고 부르는 것은 둘째와 셋째 묶음에서 주로 나타난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야훼와 엘로힘을 구분해서 번역하지 않았다.)
또한 다섯 부분의 마지막 시편은 늘 ‘하느님의 왕권’을 찬미하는 군왕시편으로 끝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곧 시편 41편, 72편, 89편, 106편, 145편이 군왕시편으로서,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를 암시하는 것(첫째에서 셋째 부분)에서 출발해서 하느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메시아 시대(넷째에서 다섯째 부분)로 주제가 변화됨을 볼 수 있다. 이는 시편 150편이 최종 편집되고 통합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는 하느님의 통치로 수렴되어야 한다는 것과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향한 희망이 주요한 관심사였음을 추정케 한다.
시편이 모세오경의 구조, 곧 하느님의 율법을 담고 있는 책의 구조에 따라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고 그것이 하느님 통치의 관점에서 편집되었다면, 율법에 순종하는 하느님 백성의 찬미가인 시편은 하느님 통치에 대한 응답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시편 1편 인간의 행복
시편 1편은 루가 6,20-26절에 나오는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처럼, 선과 악, 축복과 저주, 의인과 악인의 비교를 통해, 두 가지 길의 이분법적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시편 1편은 왕정시기의 제관식, 지혜문학적 선과 악,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라는 행복선언을 지닌 율법 시편(시편 19: 119), 초막절의 계약 갱신이라는 전례적 개념이라는 삶의 자리를 갖고 있다.
따라서 시편 1편은 한 의인과 여러 명의 악인의 대결 구조를 통해 ‘참된 의인’이란 어떤 사람이며,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지혜롭게 가르쳐 준다. 인간이 율법에 어떻게 응답해야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고 참된 의인이 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책이 시편집이라면, 시편 1편은 전체 구조 안에서 첫 번째 시편일 뿐 아니라 150편 전체의 핵심 메시지를 요약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1-3)은 어떤 사람이 참된 의인인지 가르쳐주며, 둘째 부분(4-5)은 의인과 악인의 본질을 각각 ‘시들지 않는 나무’와 ‘바람에 흩날리는 겨’의 이미지를 통해서 알려주고, 마지막 부분(6)은 의인과 악인의 최종 운명이 무엇이지 보여준다.
① 의인과 악인(1,1-3)
“1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2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3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1-3)
머리글이 없는 1편과 2편은 시편집 전체ㅐ의 서문과 같은 구실을 한다. 이 둘은 가끔 한 시편으로도 간주되는데 ‘행복 선언’으로 시작되고(1,1) ‘행복 선언’으로 끝맺는다(2,12). 1편은 교횐 시편의 유형에 속한다.
히브리어 어순에 따르면 1,1은 “행복하여라!”라는 말로 시작하며, 어떤 인간(어떻게 사는 인간)이 행복한지 가르쳐준다. 여기서 저자는 의인을 묘사하기 위해 ‘아슈레(행복·복됨)’라는 한 가지 용어를 사용하지만, 악인을 가리키는 데는 ‘레샤임(악인들)’, ‘핫타인(죄인들)’, ‘레침(오만한 자들)’ 이라는 다양한 용어를 사용한다.
‘레샤임’(악인들)은 법정에서 ‘죄를 범한 사람’, ‘유죄가 인정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악인이란 이웃 형제와의 관계에서 죄를 범하였거나 유죄가 인정되는 사람이다.
‘핫타임’(죄인들)은 본래 전쟁터에서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는 사람, 누구를 향해 활을 쏘고 창을 던져야 할지 모르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죄인이란 삶의 올바른 방향을 선택할 줄 모르고, 선과 악의 길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레침’(오만한 자들)은 오만하거나 자만한 마음에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다른 것의 가치를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행복한 의인은 이러한 세 가지 부류의 악인과 구별되는, 곧 그들의 삶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다. 반면에 의인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다.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2)이다. “가르침”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토라’는 일반적으로 모세오경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그보다 넓은 의미로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모든 것을 뜻한다. “밤낮으로”라는 표현은 ‘항상’ 또는 ‘전부’를 뜻하며, 시간적 차원뿐 아니라 공간적 차원에서도, 곧 ‘언제 어디서든지’ 한결같은 태도를 전제하는 말이다. “되새기는”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오 동사 ‘하가’는 ‘작은 소리로 말하다’, ‘중얼거리다’라는 뜻이며, 유대인이 성경을 묵상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유대교 전통에서 묵상이란 단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소리 내어 중얼거리면서 눈과 입과 귀로, 온 마음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깨닫는 행위라고 이해했다.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의인은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에 비유할 수 있다.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3).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는 가뭄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늘 잎이 푸르고 때가 되면 열매를 맺는다. ‘시냇가의 물’(1,3)은 “주님의 가르침”(1,2)을 상징한다. 나무가 시냇가의 물에서 양분을 얻듯 의인은 주님의 가르침에서 행복한 삶의 양식을 얻는다. “제때에 열매를 내며”라는 표현은 주님께서 정하신 때에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다. 삶의 열매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이지 인간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② 악인의 삶(1,4-5)
“4악인들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어지는 겨와 같아라.
5그러므로 악인들이 심판 때에,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감히 서지 못하리라”(4-5).
의인이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이 건실하다면, 악인은 심판대 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 극도의 가벼움을 지닌다. 삶의 결실은 의인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겨”와 같은 악인을 흩날려 버리는 “바람”(4)은 하느님의 심판을 가리키지 않는다. 바람은 극도의 가벼운 삶을 살아온 악인이 아무런 삶의 열매도 맺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는 운명에 처해 있음을 강조하는 상징적 이미지다.
“심판”(5)을 뜻하는 히브리어 ‘미슈파트’는 현세적 심판과 종말론적 심판 모두를 의미한다. 그리고 ‘일어서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쿰’은 문맥상 재판정에서 판결을 선고하기 위해 일어서는 모습을 가리킨다. 그러나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악인들이 현세뿐 아니라 종말에도 자신이 재판장인 양 의인을 판단하려 하지만, 하느님의 법정에서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다.
③ 의인과 악인의 운명(1,6)
“의인들의 길은 주님께서 알고 계시고 악인들의 길은 멸망에 이르기 때문일세”(6).
의인과 악인의 최종 운명을 가르쳐주는 구절인데, 하느님의 최종 심판이 내려지기 전에 이미 의인과 악인의 운명은 각자의 삶이 맺어온 열매를 통해 결정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주님께서는 의인을 지켜주고 보호해 주신다. 따라서 의인의 길은 주님의 뜻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주님의 은총 안에 있다. 하지만 스스로 삶의 길을 선택하고 자신의 뜻을 내세운 악인은 멸망에 이른다. 하느님의 심판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이 악인을 멸망으로 이끈 것이다.
<신학적 이해>
① 참된 행복 - “행복하여라!”(1,1ㄱ)
많은 사람이 행복하길 원한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행복을 얻기 위해 일하고 노력한다. 하지만 저마다 추구하는 행복이 다르다. 때로는 어떤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사건이 다른 사람에게는 불행일 수도 있으며, 어떤 이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다른 이에게는 큰 행복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행복’ 또는 ‘누구나 추구하는 행복’이란 없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속적 행복과 신앙적 행복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세속적 행복의 가치와 의미는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느끼는 정도, 사고관, 처한 성황 등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신앙적 행복의 가치와 의미는 절대적이며, 세상의 눈에 불행처럼 비치는 특성을 지녔다. 신앙적 행복의 원천은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하느님과 관계된 것이면 무엇이든지 신앙인에게는 행복의 요소가 될 수 있다. 최고의 행복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해 실현되는 데 이는 ‘구원’, ‘부활’, ‘영원한 생명’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행복은 바로 이러한 신앙적 차원의 행복이다.
‘의인’은 주님의 뜻(토라)을 몸과 마음을 다해 실천하는 사람이며, 그러한 삶 자체가 바로 행복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셨다(요한 14,21. 23). 따라서 행복한 의인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하는 사람, 곧 하느님과 관련된 것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이로한 의미에서 시편 1편에 나오는 ‘의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한 사람’(마태 5,3-12)과 동일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한 삶은 하느님 안에서 그분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삶이다. 마태오 복음서 5,3-12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복 선언 말씀을 이러한 관점에서 되짚어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가득한)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뜻을 다하지 못하여) 슬퍼하는 사람들!
(그 노력과 마음을 보시는 하느님에게서)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하느님께 진심으로 순종하는)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영원히 하느님 안엣 안식들 누릴)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정의 실현에 전념하는 사람들, 곧)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
람들! 그들은 (정의로운 하늘나라에서) 흡족해 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하느님께 받은 자비를 이웃과 나누는)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나눈 것보다 더 큰)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거룩함을 본받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하느님을 닮았으므로)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세상 곳곳에 하느님의)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평화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이 실천하라고 명하신)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의로운 이들을 위해 마련된)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행복한 삶의 본보기인)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내 본을 따르는 너희가 온전히 나를 닮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
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의 생각을 알고 그가 바라는 것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주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는 삶에서 더 바랄 것 없는 행복을 느낀다. 내가 그런 행복 안에서 살고 있는지, 십자가를 통해 나를 향한 사랑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주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② 성공한 의인의 삶 -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1,3ㄹ)
정월 초하루에 사람들에게 새해 소망을 물어보면, “하는 일 잘되고…”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각자 계획하고 바라는 일이 차질 없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사람마다 하고자 하는 일이 다르며 같은 일을 해도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다를 것이다. 그리고 저마다 그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일을 계획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일한다. 그 일이 잘 이루어지면 그것을 ‘성공’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경 저자가 말하는 ‘하는 일’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신앙인(의인)이라면 누구나 바라고 실천해야 하는 공통적인 일이다. 또한 그것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성정의 의미도 신앙인 모두에게 동일하다.
성경 저자는 신앙인을 주님의 가르침을 낙으로 삼고 밤낮을 묵상하는 의인(1,2)이라고 규정하고, 그가 하는 일은 모두 잘될 것이라고 말한다(1,3). 이러한 삶이 신앙인에게 진정으로 성공한 삶이다.
이것을 인생 목표로 설정하고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의인)은 주님께서 하늘에 마련해 두신 축복에 모든 희망을 두고(콜로 1,5), 말씀을 실천하는 데 방해가 되는 온갖 역경을 인내해야 한다. 그러한 모습이 다른 이들 눈에는 못나고 고통스럽게 보일지라도, 신앙인은 그것이 바로 성공하는 삶이며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는 삶임을 알기에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감사 기도를 바칠 수 있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인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사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 그러므로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바오로 사도가 제시하는 이러한 삶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소망하고 실천해야 하는 삶, ‘하는 일이 잘 되는, 성공한 의인의 삶’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주님의 계명만이 삶의 참된 원리며 주님만이 구원의 원천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 말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귀로 듣고 잊어버리는 신앙인이 많다. 그만큼 세속적 행복과 성공을 더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행복과 성공은 얼마 안 가서 사라지는, 참된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일이 주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면 즉시 그만두고, 참된 행복과 성공을 위해 주님의 말씀을 삶의 원리로 삼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도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매일 읽고 실천해야 한다.
시편 8편 하느님의 권능과 인간의 위대함
시편 8편은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과 업적을 찬미하는 동시에, 인간의 위대함과 존엄성을 창조주 하느님 안에서 찾고 감사하는 찬양 노래이다. 특히 이 시편 한가운데 자리 잡은 ‘인간에 대한 물음’(8,5)은 인간을 창조물의 으뜸으로 삼으시고 존엄성과 위대함을 부여해 주신 창조주 하느님을 향한 찬미가 이 시편의 목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8,2ㄴ-4)는 하늘과 땅에 드러난 창조주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찬미이며, 후반부(8,5-9)는 인간을 창조물의 으뜸으로 삼으신 하느님에 대한 찬미이다. 본문의 시작(8,2ㄱ)과 끝(8,10)에는 하느님 이름의 존엄함을 찬미하는 후렴구가 있으며, 8,1은 머리말이다.
우리는 이 시편을 통해 창조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존엄성과 위대함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정체성과 사명을 알고 그것을 삶에서 구현해야 한다.
① 시편 8,1 머리말
“[지휘자에게. 기팃에 맞추어. 시편. 다윗]”(1).
지휘자에게 이 시편을 어떻게 노래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두 가지 지시어와 저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시편”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미즈모르’는 ‘악기를 연주하며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악기를, 어떻게 연주하며 노래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기팃에 맞추어”라는 표현이 있지만 기팃이 악기 이름인지 어떤 가락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다. 기팃이 ‘가트’라는 도시에서 사용하던 악기라는 의견도 있고, 포도 수확 때나 올리브기름을 짤 때 부르던 노래 또는 노랫가락이라는 주장도 있다.
② 시편 8,2ㄱ 후렴구
“주 저희의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2ㄱ)
“주(야훼) 저희의 주님”이라는 칭호는 임금(주인)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소유)인 이스라엘의 관계를 드러내 준다. 그러나 “온 땅에”라는 표현이 가나안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전체를 뜻한다면, “저희(우리)의”라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보다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보편적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라는 표현은 창조주 야훼의 권능과 업적이 창조되 세상과 모든 인간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뜻이다.
“당신 이름”이라는 표현은 “하느님 당신”이라는 뜻이다. ‘이름’이라는 용어가 하느님을 가리키는 칭호처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느님, 당신의 이름을 찬미합니다.”라는 표현은 “하느님, 당신을 찬미합니다.”라는 뜻이다.
“존엄하십니까!”라는 말을 직역하면 “크십니까!”이다. 이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이 인간의 생각과 헤아림을 능가하는 초월적인 것임을 고백한 말이다.
③ 시편 8,2ㄴ-4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찬미
“2ㄴ하늘 위에 당신의 엄위를 세우셨습니다.
3당신의 적들을 물리치시고 대항하는 자와 항거하는 자를 멸하시려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당신께서는 요새를 지으셨습니다.
4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2ㄴ-4).
찬미의 배경이 땅에서 하늘과 천체로 바뀐다. “하늘 위에”(8,2ㄴ)는 천상에서 창조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당신의 적들을 물리치시고 대항하는 자와 항거하는 자를 멸하시려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당신께서는 요새를 지으셨습니다.”(8,3)를 직역하면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으로부터 힘을 세우셨나이다. 당신의 적대자들 때문에. 적들과 대항하는 자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입니다.”이다. 아기와 젖먹이는 엄마에게 모든 것을 의지한다. 저자는 이러한 아기와 젖먹이처럼 인간도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며 하느님 앞에서 아기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런데 “입으로부터 힘을 세우셨나이다.”라는 표현은 해석하기가 어렵다. 칠십인역은 ‘힘’이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오즈’를 ‘찬양’ 또는 ‘찬미’라는 뜻을 지닌 ‘아이노스’로 옮겼고, 불가타도 같은 뜻을 지닌 ‘라우스’로 옮겼다. 고대 번역본의 해석을 보면 아기와 젖먹이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권능, 주권, 위엄에 대한 찬양이며, 그러한 찬양이 하느님께 대항하는 자들을 멈추게 하는 힘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적대자들’은 누구인가? 이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인간을 상징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우주 권능에 저항하는 신화적 성격의 적들, 곧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우주적 혼돈 상태를 의인화한 것일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라면 8,3은 아기와 젖먹이의 마음을 지닌 의인이 하늘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권능을 찬미할 때 그분을 거스르는 원수는 하느님의 권능 앞에서 자신의 비천함을 깨닫고 입을 다물게 된다는 뜻이다. 곧 의인의 찬미가 악인의 불신앙을 몰아내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의인의 찬미는 하느님의 절대적 창조 권능과 완벽한 창조를 찬양하는 것이며, 이러한 찬양은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신화적 세력이나 혼돈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음을 증언하는 힘이라는 의미이다.
계속해서 저자는 하느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하늘과 천체의 웅장함에 압도되어 하느님의 권능과 신비하심을 찬미한다(8,4). “손가락의 작품들”(8,4ㄴ)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을 장인(匠人)으로 의인황한 것으로, 하느님의 세상 창조가 그분의 세심한 배려와 부드러운 사랑의 손길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편 8,5-9 인간에게 존귀함을 주신 하느님에 대한 찬미
“5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6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7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8저 모든 양 떼와 소 떼 들짐승들하며
9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 물속 길을 다니는 것들입니다”(5-9).
저자는 하느님의 창조 작품 중 하나인 인간에 대해 숙고하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함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고백한다.
하느님의 초월성과 권능을 찬미하기 위해 사용된 의문사 ‘마(8,2.10)’는 인간관 관련해서도 사용되었다(8,5). 이 의문사는 본래 ‘무엇?’이라는 뜻을 지녔지만 이 시편에서는 형언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상태, 곧 놀라움과 장엄함과 압도적인 분위기를 표현하는 감탄사로 사용되었다. 저자는 인간에 대한 묵상을 통해 얻은 인간 존재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하나의 물음 형태로 표현하기 위해 의문사 ‘마’를 사용한 것이다.
인간에 대한 두 가지 물음 형식으로 번역된 8,5을 직역하면 “사람이 무엇입니까? 이처럼 그를 기억해 주시니, 사람의 아들이 무엇입니까? 이처럼 그를 찾아주시니.”이다. 여기서 “사람”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에노쉬’는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 곧 나약하고 한계성을 지닌 인간 존재를 가리킨다. “사람의 아들”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벤 아담’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하나의 피조물인 인간을 가리킨다. 따라서 8,5에는, 인간이 비록 나약하고 한계 있는 존재이지만 절대 권능의 창조주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시는 존재이며, 많은 창조물 가운데 하나이지만 하느님께서 보살피기 위해 찾아주시는 존재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하느님께서 피조물 가운데 이처럼 유독 인간만을 기억하고 보살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는 묵상을 통해 얻은 해답을 8,6-9에서 들려준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다른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는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된 이유가 8,6에 나온다.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8,6)를 직역하면 “그(인간)를 하느님보다 조금 부족하게 하시고”이다. 여기서 해석상 문제가 되는 표현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칭호 ‘엘로힘’이다. 엘로힘은 본래 ‘신들’이라는 뜻을 지닌 복수 명사이지만 유대인들은 야훼를 가리키는 단수 칭호로 사용했다. 그런데 칠십인역은 이 용어를 하느님이 아닌 천상 존재들을 가리키느니 복수 명사로 해석하여, ‘메엘로힘’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을 ‘천사들보다’라고 옮겼다. 인간을 하느님과 비교하는 것이 불경건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말 성경은 천상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신들(천상 존재들)보다”라고 옮겼다. 하지만 이 구절이 창세기 1,26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면 ‘천사들’ 또는 ‘신들’이라고 옮기지 말고 ‘하느님’이라고 옮기는 것이 옳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하느님을 지상에 형상화한 피조물)대로 창조되었지만 하느님과 똑같은 존재가 아닌 ‘닮은꼴’(하느님의 모상이지만 그분보다 못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모든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는, 인간 존재만이 지니는 본질적 특징이며, 인간 고유의 존엄성과 위대함을 보증해 주는 토대이기도 하다. 참고로 히브리서 저자는 8,5-6을 인간이 되어 죽음을 겪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한 말씀으로 이해하였다(히브 2,6-9).
하느님보다 조금 부족하게 만들어진 인간은 그분의 지상 대리자(8,6)로서 창조 세계를 다스릴 지배권(왕권)을 받았다(8,7).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셨다. “양 떼와 소 떼”는 모든 집짐승을, “들짐승들”은 모든 들짐승을 가리킨다(8,8). 땅 위의 모든 짐승뿐 아니라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8,9)도 인간의 다스림을 받는 대상이다. “물속 길을 다니는 것들”(8,9)은 바다 깊은 속에 사는 실비하고 두려운 세력을 가리킨다. 사실 바다는 고대 유대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바다 깊은 곳에는 악한 세력이 자리 잡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러한 세력까지도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인간의 왕권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시편 8,10 후렴구
“주 저희의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10).
후렴구는 8,2ㄱ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묵상을 결론짓는 역할을 한다. 특히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함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불어 시편 처음과 마지막에 나오는 동일한 후렴구는 세상 모든 것의 근원이 하느님 안에 있으며, 그분만이 찬미의 시작이며 마침이시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신학적 주제
① 약함에서 강함이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당신께서는 요새를 지으셨습니다”(8,3)
많은 사람이 현대 사회를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사회’라고 생각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권력을 잡으려고 애쓴다. 그런데 시편 8편은 이런 풍조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신앙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약하고 겸손한 이들에게만 설 자리가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특히 약자 중의 약자인 ‘아기와 젖먹이’를 하느님의 권능과 힘을 드러내는 존재라고 소개한다.
‘아기와 젖먹이’는 하느님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 하느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곧 깨끗하고 맑은 영혼을 지닌 순수한 신앙인을 가리킨다. 저자는 그러한 신앙인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가 하느님의 적대자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요새(힘)라고 노래한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일꾼으로 소개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모두가 하나같이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인간적 나약함을 고백한다(예를 들어 탈출 3,18-4,17의 모세; 판관 6,11-24의 기드온; 1열왕 3,3-13의 솔로몬). 세상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하느님의 아들도 세상의 힘에 짓눌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부끄럽게 하시려고 약하고 여린 손을 통하여 당신의 심오한 뜻을 실현하신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이 점을 잘 이해한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코린 1,26-29.31).
하느님께서는 약함과 무능함에서 강함과 권능 드러내시고, 당신께 의지하는 약하고 낮은 이들을 구원하신다. 하지만 제 능력과 힘을 믿고 약하고 무력한 이를 멸시하며 하느님을 거부하는 이들은 오히려 그 능력과 힘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결국은 자멸할 것이다.
세상에서 강한 사람은 무력을 사용하여 다른 이를 내리누르지만 하느님 안에서 강한 사람은 사랑을 베풀며 다른 이를 높여준다. 세상의 권력은 언젠가 그보다 더 큰 권력 앞에서 무너지지만 하느님에게 의지하는 약한 이는 갈수록 더 큰 사랑으로 풍요로워진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은 하느님께 있으며 그분 안에서 자신을 비우고 낮아지는 것이 참생명을 얻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강해지고 싶은 욕망을 버리고 하느님 앞에 낮은 자로 살아야 한다.
②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함
“인간이 무엇이기에 … 사람이 무엇이기에 …”(8,5).
한 사람의 마음 · 태도 · 말씨 · 성격 등을 따지지 않고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이나 목적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없이 그를 존엄하고 위대한 인간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쉽게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라고 대답하고 싶을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물이므로 조건 없이 존엄하고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존엄성과 위대함을 상실하고 인간 이하의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잘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 존재의 본성과 현재 모습의 차이점이다. 본성은 존엄하고 위대하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본성을 거스르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아무리 악하고 비열하고 잔혹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현재 마음과 태도일 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 사람의 본성은 변함없이 존엄하고 위대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위에 그러한 이웃이 있다면, 그가 하느님께서 주신 본성을 깨닫고 본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이끌어 주어야 한다.
결국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함은 하느님을 떠나서 이야기할 수 없다. 인간은 창조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의 창조 질서와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갈 때 자신에게 주어진 존엄성과 위대함을 구현할 수 있고, 하느님께서 주신 지상 대리자로서의 권한을 올바로 행사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 때문에 존엄하고 위대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거나 그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가지고 평가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을 그렇게 판단하면 나도 똑같은 판단을 받을 것이다. 오히려 인간을 조건 없이 사랑하고 보살펴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 서로 사랑하며, 우리를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신 하느님께 한마음으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시편 23편 주님의 나의 목자
시편 23편은 목자와 양의 관계, 나그네와 그를 환대하는 주인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노래한다. 일부에서는 바빌로니아 유배를 배경으로 귀환과 재건에 대한 희망을 노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일부에서는 참된 목자이시며 왕이신 하느님을 예배하는 전례에서 하느님과의 통교에 감사하고 그 기쁨을 표현하려는 목적으로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삶의 자리에 대한 의견은 서로 다를지라도, 모두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이 시편이 수많은 이에게 위로와 평화를 주었고 어느 시대에나 신앙인이 가장 많이 읽고 묵상하는 시편이라는 사실이다.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23ㅡ1ㄴ-4)은 참된 목자처럼 당신 백성을 이끌고 보호하는 주님의의 구원섭리에 감사하는 노래이며, 둘째 부분(23,5-6)은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주인처럼 언제나 당신 백성을 넘치는 사랑으로 돌보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노래이다.
① 시편 23,1ㄱ 머리말
“시편. 다윗”(1ㄱ).
“시편”은 ‘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미즈모르’를 번역한 것이다. “다윗”은 히브러어 ‘레다빗’을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에게’, ‘…의’, ‘……위하여’ 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레’와 ‘다윗’이라는 이름이 합성된 것이다. 따라서 ‘레다빗’은 다윗이 이 시편 저자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다윗을 위한 노래 또는 그에게 헌정된 노래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이 시편은 임금 즉위식 전례 때 임금을 칭송하기 위해 부르던 노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 시편은 새로운 임금을 위해 또는 성군(聖君)을 칭송하기 위해 지어진 노래이다. 하지만 23,1ㄴ.6에서 주님을 언급하고, 시편의 전체적인 흐름이 하느님을 향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그분의 배려와 사랑에 감사하는 신앙고백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 시편을 임금에게 헌정하기 위해 또는 임금을 위해 지어진 노래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이다. 따라서 ‘레다빗’은 다윗에게 저작의 공을 돌리는 표현, 곧 ‘다윗의’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② 시편 23,1ㄴ-4 목자이신 하느님
“1ㄴ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2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3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4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1ㄴ-4).
저자는 ‘목자와 양’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를 묘사한다.
고대 근동에서는 임금을 목자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특히 유목민 출신인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자신들의 관계를 ‘목자와 양 떼’의 이미지를 통해 더욱 쉽게 이해했다. 또한 이스라엘은 구원 역사 안에서 자신들을 이끄시는 하느님의 개입 행동을 가리키기 위해 목자의 이미지를 사용하였다(시편 78,52; 80,2; 이사 40,11; 49,9-10; 63,14; 에제 34,10-25).
목자는 양 떼에게 주인인 동시에 그들을 보호하는 삶의 동반자이다. 참된 목자는 주인이면서도 양 떼를 위해 희생을 자처하며 그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저자는 자신에게 주님이 바로 그러한 목자와 같은 분이라고 고백한다. 그러기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23,1ㄴ)라고 노래한 것이다. 주님께서 자신의 목자라는 사실이 저자에게는 충만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푸른 풀밭”(23,2)은 히브리어 ‘데쉐’를 번역한 것이다. ‘데쉐’는 ‘연하고 싱싱한 풀’을 뜻하지만 일반적으로 마음을 끌리게 하는 장소나 상황을 가리킨다. 또한 시간적 한계에 관계없이(예를 들어 비록 하루살이의 삶이라 할지라도) 활력 있고 생생한 생명력을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하다(2사무 23,4; 욥 6,5; 38,27; 잠언 27,25). 따라서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라는 표현은 주님께서 저자를 활력이 넘치는 생명력을 지니도록 보살피고 인도하신다는 뜻이다.
“잔잔한 물가”(23,2)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메누훗’은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휴식이나 쉼의 자리를 제공하는 ‘물’ 또는 ‘샘’을 가리키는 ‘메누하’의 복수이다. ‘메누하’는 특히 따뜻하고 안락한 안식처나 휴식처 또는 그러한 가정을 가리키기도 한다(룻 1,9; 이사 32,18). 따라서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라는 표현은, 목자이신 주님께서 이끄시는 삶은 영혼의 생기를 돋우어 주는 (23,3ㄱ) 안락하고 평화로운 삶이며, 그러한 주님과의 관계를 가족 관계처럼 느낀다는 고백이다.
“바른길”(23,3)이란 윤리적 의미의 올바른 길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으로서 걸어야 할 올바른 삶의 길을 가리킨다.
“어둠의 골짜기”(23,4ㄱ)와 “재앙”(23,4ㄴ)은 인생 여정에서 겪을 수 있는 온갖 역경과 고난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 역경과 고난이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확신과 그분께 대한 깊은 신뢰가 있다면 전혀 ‘두려움 없이’(23,4ㄴ) 바른길을 걸을 수 있다(23,3).
“막대와 지팡이”(23,4ㄷ)는 목자의 필수품이다. 막대는 가축이 다른 길로 가지 못하게 회초리질을 하거나 경고하는 소리를 내기 위해 지팡이를 두드리는 데 필요하다. 지팡이는 목자가 적을 퇴치하거나 덤불을 헤쳐 길을 내는 데 긴요하게 쓰인다. 두 가지 모두 양 떼에게 안전과 확신, 목자의 현존을 상징하는 필수품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느님께서도 백성을 이끄시기 위해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상징(구름 · 불 · 대리자)을 활용하셨다. 이스라엘은 비록 하느님을 직접 뵈올 수 없거나 그분의 부재를 느끼게 하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그러한 상징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구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③ 시편 23,5-6 손님을 맞는 주인이신 하느님
“5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
6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5-6).
저자는 주님을 자신의 천막에서 손님을 맞는 주인처럼 묘사하면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와 신뢰의 찬양 노래를 부른다.
유목민에게 나그네를 환대하고 보호하는 것은 명예가 달린 덕행이었다. 나그네를 맞은 주인은 그 손님이 요구한다면 길게는 사흘동안 환대할 의무가 있었으며, 그가 떠날 때에도 어느 정도 그 여정을 보호해 주어야 했다(참조: 창세 18,1-8; 19,1-89; 24,28-32; 판관 19,16-24). 주인의 환대 의무는 나그네가 죄를 지은 도망자일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저자는 이러한 유목민의 관습을 주님과 자신(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활용한다.
“상”(23,5)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슐한’은 음식이나 다른 무언가를 올려놓을 수 있는 식탁이나 밥상 또는 책상을 말한다. 저자는 주님께서 이러한 식탁을 원수가 보는 앞에서 차려주셨다고 말함으로써 주님과 자신의 특별한 관계,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과 배려를 강조한다. 게다가 주인이신 주님께서 “머리에 향유를 발라주셨다”(23,5)고 말한다. ‘향유’는 잔치의 풍성함을 더해주는 요소이며, 손님에게 향유를 발라주는 행위는 손님에 대한 주인의 융숭한 환대와 축제의 기쁨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 행위는 주인에게 손님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곧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얼마나 귀하에 여기시는지, 하느님의 은총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암시한다.
주인의 환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저자의 잔을 가득 채워주셨기 때문이다(23,5). ‘술잔을 가득 채우는 행위’는 귀한 손님을 맞이했다는 표시이며, 손님에게 머무르는 동안 풍요롭게 지내라는 초대이다. 또한 ‘술잔’은 친교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처럼 저자는 자신을 향한 하느님의 관대함과 배려가 헤아릴 수 없다고 고백한다.
주인의 환대는 손님이 천막에서 머무는 동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주인은 손님이 천막을 떠나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어떠한 해도 입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23,6). “호의와 자애”(23,6)는 ‘복과 사랑’ 또는 ‘선하심과 인자하심’ 또는 ‘선과 신의’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 저자(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그러한 두 버팀목을 통해 보호해 주신다는 의미이다.
“주님의 집”(23,6)은 예루살렘 성전이나 주님의 천상 왕궁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고 “사오리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베샤브티’의 기본형은 ‘돌아가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상 ‘슈브’일 수도 있고, ‘자리 잡다’, ‘살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야샤브’일 수도 있다. ‘베랴브티’의 기본형이 ‘슈브’이고, 주님의 집이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면 성전 전례에서 체험하는 하느님과 하나 된 기쁨을 그분의 이끄심과 보호 아래 일상에서 계속 유지하며 살아가겠다는 뜻이다. 또는 유배지에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섭리하신 유배에서의 해방이 계속해서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언제나 주님의 보호와 은총 아래 해방된 삶을 살 것이라는 신뢰를 표현한 것이다. 반면에 ‘베샤브티’의 기본형이 ‘야샤브’이고 주님의 집이 주님의 천상 왕궁을 가리킨다면, 저자의 최종 목적지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 머무는 그분의 천상 왕궁이며, 그분의 보호와 은총 아래 현재 그곳을 향해 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신학적 주제
① 목자이신 하느님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23,1ㄴ)
흑염소를 키우는 축산업자가 있었다. 낮에는 야산에 방목하고 밤에는 우리에서 돌보는 방식으로 흑염소를 키웠다. 흑염소를 방목하는 동안 그는 우리를 청소하고, 방목할 수 없는 어린 염소와 치료가 필요한 염소를 돌보았다. 이 일은 생계와 수입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가축에 대한 정성과 사랑이 없다면 어려운 일이다. 어쨌든 그는 흑염소의 주인이며 목자이고, 흑염소는 그의 보살핌과 사랑 안에서 자라고 있다. 그런데 하루는 우리를 청소하다가 어린 염소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는데, 까맣고 초롱초롱한 어린 염소의 눈을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네 녀석들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주인이지만 가축을 위해 모든 뒷바라지를 해줘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바로 종의 모습이었다고 느낀 것이다. 가축에게 대우를 받거나 섬김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주인은 착한 목자로서 가축을 사랑으로 대하며 잘 자랄 수 있도록 보살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신뢰를 고백하며 찬미하는 주님과 그의 관계가 이 축산업자와 염소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 떼를 수입을 목적으로 기르는 것이 아니라 무상의 절대적 사랑으로 돌보신다는 점에서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축산업자와 흑염소의 관계는 저자가 주님과 자신(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고백하기 위해 활용한 목자와 양 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주님께서는 참된 목자이시다. 양 떼에게 군림하거나 섬김을 받는 대신 오히려 그것들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목자이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당신의 뜻에 순응하면서 사랑으로 일치하는 관계를 변함없이 유지하며 당신과 함께할 수 있도록 이끌고 보살피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목자이신 주님의 이끄심과 사랑이 없으면 금방이라도 길을 잃고 죽음의 수렁에 빠져 버리고 말 양 떼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생명과 바른길로 이끄시는 분(23,2-3)이며, 이스라엘을 위해 앞장서는 목자이고, 그릇된 길로 이탈하지 않도록 사랑의 매를 드시는 분이다(23,4 참조).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환란과 죽음의 역경 속에서도 목자이신 주님을 믿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23,4). 이는 이스라엘이 목자이신 주님을 올바로 알고 그분께 깊은 신뢰를 두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저자와 그가 대표하는 이스라엘이 그러한 앎과 믿음을 기니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23,1ㄴ)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아쉬울 것 없어라.”는 표현은 “부족함이 없어라”로 옮길 수도 있는데 이는 참된 목자와 함께하며 그를 따르는 양 떼에게 모든 것이 풍성하게 마련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23,4에도 이 점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참된 목자를 따르는 삶이 온갖 위험에서 벗어난 삶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23,2)이 있는 곳에 도착하기까지 굶주림과 목마름을 겪을 수도 있으며, ‘어둠의 골짜기와 재앙’(23,4)에 노출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주님께서 자신의 목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를 둘러싼 주변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목자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빼앗을 수 없으며, 주님께서는 반드시 당신께서 바라시는 목적지로 양 떼를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저자가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의 현존과 이끄심뿐만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아 충만한 영혼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하느님의 사랑은 종을 위해 섬기러 오셨으며(마태 20,28; 마르 10,45) 착한 목자(요한 10,11.14)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우리도 시편의 저자처럼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서든지 목자이신 예수님만을 바라고 그분과 함께하는 삶 안에서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착하고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당신 생명을 내어주신 그 사랑 안에서 일생동안 아무런 부족함 없이 구원의 은총으로 충만할 것이다.
② 하느님의 가족으로 사는 행복한 삶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23,6).
행복한 삶이나 기쁨이 가득한 삶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자도 그러한 삶을 추구하는 마음을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주님의 집’이 예루살렘 성전이나 천상 왕국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뜻보다는 주님과 가족 공동체를 이루는 삶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고자 한다.
‘집’이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바잇’은 ‘가정’ · ‘가문’이라는 뜻도 있다. 그렇다면 ‘주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에서 단순한 동거(同居)가 아니라 사랑의 유대 관계로 맺어진 가족을 일원으로 산다는 뜻을 지닌다. 이는 주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분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저자가 희망한 ‘주님의 집에 일생토록 사는 삶’은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된 우리의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라고 선언하셨고, 이 말씀의 대상이 우리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로 살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삶을 살기를 희망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다.
행복한 가족은 서로 마음을 열고 기쁨이든 슬픔이든 모든 것을 함께 나눈다. 주님과 가족 관계에 있는 우리도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주님뿐 아니라 그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이들에게도 마음을 열어야 한다. 또한 다른 형제자매의 기쁨과 슬픔도 함께 나누며 주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서로 도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웃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행복한 가족 공동체를 이루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시편 31편 개인 탄원 시편 – 신뢰, 고통, 기쁨의 노래
시편 31편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하느님 아버지께 부르짖은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라는 내용이 6절에 “제 목숨을 당신 손에 맡기니”라고 언급되어 있는 유명한 개인적 애가 시편이다. 다른 점은 동사 시제로 시편 31,6의 “맡기다”라는 동사는 미래형이지만 루카 23,46에는 현재형이다. 이 같은 표현을 통해 시편 31편의 기도자가 마지막에 응답을 받은 것과 같이 예수님은 죽음의 그 순간에도 철저히 하느님의 섭리를 희망하고 신뢰하셨다는 그리스도론적 관점이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하느님 아버지께 순명하시면서 당신의 영을 하느님께 돌려드리셨기 때문에 오히려 당신의 모든 자녀들을 위해 파라클리토 성령을 받으신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 시편은 크게 3부분, 신뢰의 노래(2-9), 고통의 노래(10-19), 기쁨의 노래(20-25)로 구분할 수 있다. 신뢰의 노래 부분에는 아직 언급되지 않은 고통을 전제하면서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신뢰하게 된 이유가 소개되면서(8b-9) 희망과 신뢰를 노래하고 있다. 이제 고통의 노래 부분에서 그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뿌리가 바로 “저의 하느님”(15)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 기쁨의 노래 부분에서는 “얼마나 크십니까!”(20)라는 표현을 통해 하느님께서 시편 기도자의 청원을 들으셨고 응답해 주시리라는 확신 속에서 기쁨과 찬양을 드리며 시를 마감하고 있다.
① 시편 31,2-9 신뢰의 노래
“2 주님, 제가 당신께 피신하니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의로움으로
저를 구하소서.
3 제게 당신의 귀를 기울이시고 어서 저를 구하소서.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4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생각하시어 저를 이끌고 인도하소서.
5 그들이 숨겨 놓은 그물에서 저를 빼내소서. 당신은 저의 피신처이십니다.
6 제 목숨을 당신 손에 맡기니 주 진실하신 하느님, 당신께서 저를 구원하시리이다.
7 저는 허황된 우상 섬기는 자들을 미워하고 오로지 주님만 신뢰합니다.
8 당신의 자애로 저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니 당신께서 저의 가련함을 굽어보시어 제
영혼의 곤경을 살펴 아시고
9 저를 원수의 손에 넘기지 않으시며 제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기 때문입니다”(2-9).
2-9절에서 시편 기도자의 기도는 내용상 구원의 요청(2-3), 구원에 대한 신뢰(4-7), 신뢰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기쁨과 찬양(8-9)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신뢰에 대한 응답이 이 부분에 전제되기 때문에 시편 31편에는 2-9절과 10-25절의 2개의 시가 합쳐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곧 청원과 응답에 대한 찬양이라는 2가지 주제가 2개의 시 안에 주요 주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2-5절에서는 주님의 의로움으로 구원(해방)해 달라는 청원으로 시작해서 주님께서 피신처라는 표현으로 끝을 맺고 있고, 6-9절에서는 주님의 손에 맡긴다는 표현으로 시작해서 원수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다는 확신으로 끝을 맺고 있다. 결국 구원의 근원에는 주님이 현존하신다는 신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4절에 나타난 주님의 이름 생각하시어 이끌고 인도해 달라는 요청은 이런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구원은 구원을 요청하는 인간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7절에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님만을 신뢰한다는 뜻은 신앙고백과도 같은 표현이다. 우상은 예레 2,5절에 표현처럼, 덧없는 헛것을 보존하는 인간 마음에서 연유된다. 기도자는 이제 8절에 표현대로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며 오직 주님만을 신뢰한다는 신앙고백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의 자애’를 체험하게 된다. ‘가련함’을 보시고 영혼의 곤경을 ‘안다’는 표현은 탈출 3,7-8절에 나타난 출애굽을 연상케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탈출 3,7-8). ‘보고 안다’라는 같은 동사가 사용되고 있다.
이런 문맥 속에서 9절의 원수의 손에 감금시키지 않았다는 문자 그대로의 표현은 출애굽 이전의 상태, 곧 노예와 같은 죽음의 사슬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또한 기도자의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다는 의미는 계약 속에서 이루어진 넓은 땅, 곧 약속의 땅을 상징한다고 해석된다. 주님의 자애라는 의미가 계약과 관련 있으며 왕정시편인 시편 18,20에 언급된 “넓은 곳으로 이끌어 내시어 나를 구하셨으니”라는 의미도 같은 해석 선상에 놓여있다.
② 시편 31,10-19 고통의 노래 부분
“10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제가 짓눌립니다. 제 눈이 시름에 짓무르고 저의 넋과 몸도 그러합니다.
11 정녕 저의 생명은 근심으로, 저의 세월은 한숨으로 다해 가며 저의 죄로 기력은 빠지고 저의 뼈들은 쇠약해졌습니다.
12 제 모든 원수들 때문에 저는 조롱거리가 되고 이웃들에게는 놀라움이, 저를 아는 이들에게는 무서움이 되어 길에서 보는 이마다 저를 피해 갑니다.
13 저는 죽은 사람처럼 마음에서 잊혀지고 깨진 그릇처럼 되었습니다.
14 정녕 저는 많은 이들의 비방을 듣습니다. 사방에서 공포가 밀려듭니다. 저를 거슬러 그들이 함께 모의하여 제 목숨 빼앗을 계교를 꾸밉니다.
15 그러나 주님, 저는 당신을 신뢰하며 “당신은 저의 하느님!” 하고 아룁니다.
16 당신 손에 제 운명이 달렸으니 제 원수들과 박해자들의 손에서 저를 구원하소서.
17 당신 얼굴을 당신 종 위에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18 주님,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악인들이나 수치를 당하여 말없이 저승으로 사라지게 하소서.
19 거만하여 업신여기고 의인을 거슬러 파렴치하게 지껄이는 거짓된 입술들을 잠잠하게 하소서.
10-19절에서는 대부분이 고통에 관한 것을 노래의 핵심으로 이루고 있다. 10-11절에서는 눈, 넋, 몸, 생명, 세월, 기력, 뼈라는 7가지의 육신의 고통을 나열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영적이고 내면적인 고뇌를 함축하고 있다. 특히 저의 죄라고 말하는 이유는 자기를 괴롭히는 원수들 앞에서가 아니라 선(善) 자체이신 하느님 앞에 그렇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12-14절은 인간관계에서 드러나는 고통을 기술하고 있다. 무죄한 자신을 조롱하고 비방하는 원수들 앞에서 시편 기도자는 죽음의 음모를 체험한다. 특히 보는 이마다 저를 피해간다는 표현은 마태 26,56절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달아난 장면을 연상케 한다. 13절의 잊혀진다는 의미는 방해되는 존재는 기억 속에서 잊어야 마음속에서 제거되는 것이다.
15절의 “당신은 저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믿음과 신뢰를 암시하고 있다. 이제 “당신 손에 제 운명이 달렸으니”라고 표현하는 16절에서는 다시 6절에 언급된 “제 목숨을 당신 손에 맡기니”라는 호소를 반복하고 있다. 기도자가 주님을 신뢰하는 이유는 더 이상 희망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 모든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다. 18절에서는 예레 17,18에 표현처럼, 증오와 미움의 복수가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에 실현과 새로운 질서를 이루실 것에 탄원 한다고 해석해야 한다.
③ 시편 31,20-25 기쁨의 노래 부분
“20 얼마나 크십니까!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이.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사람들 보는 앞에서 이를 베푸십니다.
21 당신 앞의 피신처에 그들을 감추시어 사람들의 음모에서 구해 내시고 당신 거처 안에 숨기시어 사나운 입술들의 공격에서 구해 내십니다.
22 포위된 성읍에서 내게 당신 자애의 기적을 베푸셨으니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23 질겁한 나머지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당신 눈앞에서 잘려 나갔습니다.” 그러나 당신께 도움 청할 때 당신께서는 애원하는 저의 소리를 들어 주셨습니다.
24 주님께 충실한 이들아, 모두 주님을 사랑하여라. 주님께서는 진실한 이들은 지켜 주시나 거만하게 구는 자에게는 호되게 갚으신다.
25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힘을 내어 마음을 굳세게 가져라.”
여기서 “하느님의 선(善)하심이 얼마나 크십니까”라고 시작하는 20-21절은 2인칭으로 표현된 주님을 향한 환호를 표현하면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이라는 공동체의 체험을 묘사하고 있다. 21절의 피신처, 거처, 성읍은 주님의 현존의 상징인 성전을 상징한다. 기도자는 구원의 역사를 둘러싼 어둠의 계획, 곧 성전을 둘러싼 음모와 죽음의 언어의 행각을 묘사하고 있다. 22-23절에서는 개인적인 기도자의 체험이 소개되고 있다. 23절에서는 과거 어둠의 심연 속에서 일어났던 내면의 의심을 소개하면서 주님의 침묵의 체험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찰나적인 것이며 이제 다시 주님의 자애를 체험하게 된다. 24-25절에서는 충실한 이들을 향한 변론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24절의 주님을 향한 사랑은 신명 6,5절과 10,12절을, 25절은 신명 31,6절에서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백성들에게 유언한 충고를 연상케 한다. “너희는 힘과 용기를 내어라. 그들을 두려워해서도 겁내서도 안 된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와 함께 가시면서, 너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다”(신명 31,6). 핵심 주제는 바로 찬양과 희망이다.
시편 42편 고난 중에 부르는 노래
1 [지휘자에게. 마스킬. 코라의 자손들]
2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3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
4 사람들이 제게 온종일 “네 하느님은 어디 계시느냐?” 빈정거리니 낮에도 밤에도 제 눈물이 저의 음식이 됩니다.
5 영광스러우신 분의 초막, 하느님의 집까지 환호와 찬미 소리 드높이 축제의 무리와 함께 행진하던 일들을 되새기며 저의 영혼이 북받쳐 오릅니다.
6 내 영혼아, 어찌하여 녹아내리며 내 안에서 신음하느냐?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구원,
7 나의 하느님을. 제 영혼이 안에서 녹아내리며 요르단 땅과 헤르몬과 미츠아르 산에서 당신을 생각합니다.
8 당신의 폭포 소리에 따라 너울이 너울을 부릅니다. 당신의 파도와 물결이 모두 제 위로 지나갔습니다.
9 낮 동안 주님께서 당신 자애를 베푸시면 나는 밤에 그분께 노래를, 내 생명의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네.
10 내 반석이신 하느님께 말씀드렸네. “어찌하여 저를 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제가 원수의 핍박 속에 슬피 걸어가야 합니까?
11 적들이 ‘네 하느님은 어디 계시느냐?’ 온종일 제게 빈정대면서 제 뼈들이 으스러지도록 저를 모욕합니다.”
12 내 영혼아, 어찌하여 녹아내리며 어찌하여 내 안에서 신음하느냐?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을.
시편 42편은 하느님과 성전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다. 이 시편에는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우리 영혼의 거룩한 갈망이 잘 드러나 있다. 이 갈망은 어둡고 힘든 일상의 고단함을 안내하며 하느님을 희망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저자는 자신의 영적인 갈망을 목마른 사람으로 비유한다. 저자에게 하느님은 ‘생명의 하느님’이시다. 생명체가 물없이 살 수 없듯이 우리 영혼은 하느님 없이 살 수 없다.
이 시편은 고난과 낙담 중에 드려지는 찬양이다. 이 시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다니면서 하느님을 찾는 시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세상에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2절의 말씀을 현대어로 옮겨 번역해 놓은 현대어 성경에서는 “암사슴이 시원한 시냇물을 애타게 찾듯, 하느님! 이 몸 주님 그리워하기를 그리워합니다. 그렇게 애타게 주님을 찾습니다.”
저자는 자기 자신을 목이 말라서 애타게 시냇물을 찾고 있는 한 마리의 사슴에 비유하고 있다. 여기서 사막을 배회하는 한 마리의 사슴이 연상된다. 그 사슴은 배가 꼽아 먹을 것을 찾는 사슴이 아니다. 물을 마시지 못해서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을 정도로 갈급해진 사슴이다.
이것은 물을 먹지 못하면 금방 죽음을 당해야 하는 극도의 고통을 표현한 것이다. 그 고통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괴로움과 참담함이 엄습해 오는 죽음의 공포가 아른거리는 고통이다. 죽어 가는 사슴은 생명을 간신히 유지하느라 호흡하지만 그것은 호흡한다기보다는 헐떡이는 모습이다. 앙상히 드러난 갈비 사이로 들썩이는 뱃가죽만이 호흡은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죽지 않기 위한 발악이다. 그러나 사슴은 물을 찾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다윗은 그런 심정으로 하느님을 찾는다. 하느님이 주시는 지푸라기의 은총과 마지막 남은 아주 작은 은총이라도 받아야 한다. 이것은 의식의 수준이 아니라 본능의 수준이며 살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다.
우리가 평생에 하느님을 너무나 사모하여 그분의 은총을 목마른 사슴처럼 울부짖으면서 찾은 적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하는 질문은 스스로에게 한번쯤 던져 볼만한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면 그들은 한결 같이 목마른 사슴처럼 하느님의 은총을 사모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다간 신앙의 선조들로부터 배우는 것은 그들은 몹시도 간절하고도 애끓게 하느님의 은총을 사모하고 사모하면서 세상을 살다가 갔다는 사실이다. 누가 은총을 받고 누가 하느님의 특별한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간절히 열망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하느님을 원하고 하느님을 알기를 소망하시고 하느님과 만나는 그 순간을 간절히 바래야 한다. 다윗의 이런 하느님에 대한 간절한 마음의 발전은 다음과 같다.
4절에서 “네 하느님은 어디 계시느냐”라는 표현으로 저자는 이교도의 땅에 머물고 있으며 원수들의 핍박으로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예배와 관련되고 환난을 묘사하는 말로 사용된다. 여기서 “사람들은” 저자의 원수로 등장한다. 원수는 저자에게 고통의 원인으로 나타난다. 그는 하느님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에 원수들로부터 고통을 받는다. 원수들이 이 질문 속에는 ‘너를 도와줄 하느님은 없다’라고 조롱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경건한 신자들을 향해 주님의 존재와 능력에 대해 조롱하는 질문을 던진다. 현재의 상황은 하느님의 버리심으로 해석된다. 이런 상황을 허락하신 하느님은 무력하거나 자기 종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는 분이다. 십자가상의 예수님도 같은 조롱을 받으셨다. 원수들의 이 질문은 저자의 신앙을 흔들고, 저자로 하여금 하느님을 그리워하도록 열망을 갖게 하는 외적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런 식의 질문은 저자에게 하느님의 부재를 절실히 느끼게 만든다. “낮에도 밤에도”는 ‘계속적으로’를 의미한다. 음식으로서의 “눈물”은 과장된 방식으로 매우 깊은 슬픔과 고통을 묘사한다. 눈물이 저자의 음식이 된 이유는 하느님이 부재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먹지도 않고 눈물만 흘린다.
5절에서 “하느님의 집” 곧 성전은 저자의 향수의 대상이다. 저자는 대축제를 지키는 무리와 함께 순례를 떠나 하느님과 가까이 지내던 시절을 회상한다. 저자는 많은 신자와 함께 하느님의 집으로 들어갈 때 즐거워하며 노래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하느님의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즐거웠던 과거에 대한 회상은 현재의 고통이 극심함을 나타낸다. “무리”로 옮긴 히브리말은 구약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온다. 무리는 함께 신앙생활을 한 집단으로 보인다. “북받쳐 오릅니다”는 엄청난 감정이 그를 압도한다는 뜻이다. 저자는 억눌렸던 감정을 쏟아낸다.
6절은 후렴이다. 후렴은 불안에 싸인 저자의 슬픔을 나타낸다. “어찌하여 녹아내리며 내 안에서 신은하느냐”라는 수사의문문은 자신을 타이르며 과거를 회상하고 하느님과 대화했던 지난날을 기억하면서 하는 자신과의 대화이다. 그리고 낙심하고 불안해하는 자기 스스로를 격려하고 있다. ‘녹아내리다’는 ‘낙심하다’로 번역할 수 있다. 이 절에는 불안과 믿음이 교차되고, 또한 신뢰와 희망이 포함되어 있다.
7절에서 “제 영혼이 안에서 녹아내리며”는 6절 1행의 내용을 반복한다. 지명들 가운데 ‘요르단’과 ‘헤르몬’은 확실한 곳이지만 ‘미츠아르’는 어딘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세 지명은 헤르몬 산 기슭에 있는 요르단 강의 근원을 가리키는 듯하다. 저자는 세 지명을 자신이 직면한 죽음의 위기와 관련하여 사용한다.
“낮 동안 주님께서 당신 자애를 베푸시면 나는 밤에 그분께 노래를, 내 생명의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네”(42,9).
9절에서 기도의 간절함을 말한다. 우리들에게 가장 심각하고 절망적인 일은 절망적인 좌절이나 상황이 아니라 기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기도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가장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삼손은 두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매여 있었어도 기도를 했다.
다윗의 기도는 다음과 같다.
㉠ 절망에 빠져들어 가는 자기 영혼에 힘을 주는 기도이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녹아내리며 어찌하여 내 안에서 신음하느냐?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을.”(42,12).
㉡. 하느님만 바라는 기도이다. “하느님께 바라라”
㉢. 도우심을 확신하는 기도이다.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을.”
하느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바라보는 것은 위험하다. 내 자신의 연약함, 내 가정 환경의 불우함,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데서 오는 상대적인 빈곤, 자기 무능력에 대한 지나친 집착, 이런 것들은 바로 신앙의 침체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자기의 연약과 약점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고, 연약도 무능력도 다 하느님께 맡기시고 그분께 의탁해야 한다.
하느님의 은총을 지금에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고난과 역경 속에도 자기 연민과 슬픔의 자아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자기 영혼에 스스로 타이르고 하느님을 바라보고 용기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 드러나는 찬송이 좋은 날만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들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