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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인교회 정성규 목사의 아내 김주희 씨는 6월 2일부터 지인들과 함께 돌아가면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
세월호 참사 이후,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정부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끊이질 않고 있다. 유가족들은 천만인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고, 일부 교회와 기독교인들도 이에 동참했다. 감신대·한신대 신학생들은 유족들의 요구를 수용하라며 청계광장 앞에서 단식 농성을 벌였고, 신학대 교수들도 이를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하지만 정부는, 사고 진상 규명과 구조 과정상 문제점과 의혹을 해명하라는 유가족의 요구에 묵묵부답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월호가 가라앉은 지도 벌써 55일이 지났다.
"이대로 가다가, 6·4지방선거와 월드컵이 지나면 사람들은 세월호 사고를 금방 잊을지도 몰라요."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김주희 씨의 말이다. 부천에서 온 그녀는 예인교회 정성규 목사의 아내이자, 세 자녀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아이들이 끝까지 애타게 불렀을 이름, '엄마'. 이제 우리가 답할 때입니다.", "세월호 다 밝히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
아들 후배가 단원고 학생…세월호 사고, 남 일 같지 않아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던 4월 16일. 김주희 씨는 아들의 후배가 세월호에 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단원고등학교 2학년 유 아무개 양이었다. 유 양은 아들의 중학교 1년 후배였다. 같은 중학교를 나온 큰딸도 동문회를 통해 아는 사이였다. 김 씨와 가족들은 유독 세월호 소식에 관심이 갔다. 매일 뉴스를 보며 유 양과 다른 학생들의 구조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다고 한다.
5월 5일 김 씨는 가족들과 진도에 갔다. 현장의 분위기를 알고 싶었고, 유 양의 부모님께 격려의 말이라도 전해 드리기 위해서였다. 진도실내체육관에서 만난 유 양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충격이 커 보였다. 유 양의 부모님은 딸의 시신이라도 찾길 바라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사고 당시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 언론의 오보, 더딘 구조 작업, 정부의 무능력, 자녀를 잃어버린 참담한 상황을 하소연했다. 김 씨는 그런 유 양의 부모님의 얘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나마 유 양의 부모님들은 성경을 읽으며 위로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유 양은 5월 14일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왔다. 사흘 후, 김 씨는 가족들과 함께 장례식장을 찾았다. 유 양의 유가족들이 영정을 들고 단원고등학교를 마지막으로 갔을 때도 동행했다. 2학년 교실이 몰려 있는 본관 3층에 들어서자, 김 씨는 말문이 막혔다. 교실 빈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국화가 생각보다 너무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교실은 일상의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교실 안에는 아이들의 체육복과 교복들이 널려 있었고, 책상 안에는 교과서와 노트가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종이 울리면, 어디선가 아이들이 왁자지껄하며 뛰어와 교실을 채울 것만 같았다. 김 씨는 그때 받은 인상이 컸었는지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몹시 분했다고 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릴레이 1인 시위…지인들과 별도로 1인 시위
진도와 장례식장을 갔다 온 뒤로, 세월호 사고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을 돕기로 다짐했다. 그것은 평소 성경에서 배운, 정의를 실현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김 씨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윤지희·송인수 공동대표)에서 연락이 왔다. 회원들이 릴레이 1인 시위를 하자는 내용이었다.
5월 19일 김 씨는 릴레이 1인 시위의 시작 테이프를 끊었다. 이후 다른 회원들이 순서대로 광화문광장으로 나갔다. 이와는 별도로 김 씨는 4명의 지인과 함께 일주일에 하루씩 번갈아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오지숙 씨의 이야기를 듣고, 그 뒤를 잇겠다는 마음에서였다(관련 기사 : 거리에 선 '평범한' 엄마, '평범한' 그리스도인 / 다섯 아이의 평범한 엄마가 호소합니다).
김 씨는 피켓을 들고 있으면 마음이 무거워진다고 했다. 피켓에 적힌 '마지막까지 불렀을 그 이름, 엄마'라는 문구처럼 아이들이 사고 당시 '엄마'를 불렀을 것을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시위는 정오부터 오후 한 시까지 진행됐다. 점심을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김 씨를 잠깐 보고 지나갔다. 그들의 빠른 발걸음이 야속했다. "그래도 5월에 했을 때는 시민들이 음료수도 주고 사진도 찍어 가며 관심을 많이 보였어요. 하지만 6월이 되면서부터 무관심해진 것 같아요." 김 씨는 실종자들이 모두 발견되고, 진상 규명이 제대로 될 때까지 할 수 있는 여력이 된다면 1인 시위를 계속할 거라고 말했다.
같은 교회 몇몇 교인은 김 씨를 지지했다고 한다. 1인 시위를 한다고 따로 알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한 권사님께서 좋은 일을 한다며 김 씨를 격려했다고 한다. "그분은 세월호 사고에 관심은 있는데 거동이 불편해서 외부 활동을 못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1인 시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니 반가웠던 거죠."
▲ 피켓에는 '아이들이 끝까지 애타게 불렀을 이름, '엄마'. 이제 우리가 답할 때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김주희 씨 역시 세 자녀의 엄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란 무엇인지 늘 고민
사실, 김 씨가 1인 시위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전에도 선행 학습 금지법안 제정을 위해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했었다. 이외에도 김 씨의 삶에는 특별한 이력들이 있다. 큰딸과 둘째 아들을 대안학교에 보내기도 하고, 둘째 아들이 집에서 스스로 공부하겠다며 언스쿨링을 한다고 했을 때 흔쾌히 허락해 줬다.
대학에서 기독교 교육을 배운 김 씨는 자녀 교육을 놓고 평소 생각이 많았다. 남들이 모두 하는 것을 쫓아서 하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인다운 삶인지 고민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두레자연중학교라는 기숙 대안 학교에 들어갔을 때, 김 씨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자녀들이 학교에 만족하고, 사춘기를 즐겁게 보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김 씨는 교회 여신도들과 하는 샬롯 메이슨의 저서 <살아 있는 교육> 강독 모임을 3년간 이끌었다. 지인들과 1년 동안 영성 모임을 갖기도 했다. 자신은 원래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이라고 밝힌 김 씨는, 지금까지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런 생각과 역량을 주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를 놓고 1인 시위에 참가하게 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세월호 기억하며 성경의 가르침 쫓기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지 묻자, 김 씨는 로마서의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 내에 뿌리 박혀 있는 잘못된 관행으로 인해 비롯된 사건이니, 먼저 개개인들이 일상에서 규정을 무시하고 규칙을 어기는 세대의 풍조를 거스르고, 성경의 가르침을 쫓아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이번 사고를 기억하는 방법이었다.
김 씨는 1인 시위가 어렵거나 대단한 일이 아니라며,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일 중 하나라고 했다. 그녀는 그리스도인들이 부조리에 대해서 말로만 지적하지 말고, 작은 행동이라도 실천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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