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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양식 스크랩 체험성경(상)-(이천수 목사)
초대짱 추천 0 조회 14 13.08.27 12: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내 신앙을 주님 앞에서 살펴보고,

또 올바른 성장을 바라는 의미에서 필독바랍니다.

책 한권에 해당하는 장문이지만

오타가 너무 많아 시간이 온종일 걸렸습니다.

귀한 자료입니다. 누구에게나...

 

체험성경(상)

 

(이천수 목사)

 

제1장 영의 구원

 

 

하나님을 아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의 구원과 영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깨닫는 것이다.

 

1. 인간의 구조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위의 성경 본문에 영, 혼, 몸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사람이 영과 혼과 몸의 세 가지 면을 가지고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은 하나님과 통하는 일종의 통로이다. 이에 비해 혼은 사람과 통하는 작용을 하며, 몸은 환경에 반응하며 물질을 흡수하고 배설하는 기능을 한다. 사람은 모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 마음은 누군가 나와 통하고자 할 때 나 자신을 표현하는 기능을 한다. 기쁘다든지, 슬프다든지 또 ‘나는 누구이다’라고 느끼거나 다른 사람의 표현을 받아들이는 작용을 하는 것이 바로 마음이다.

 

오늘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들었더니 기분이 좋았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나뺐다는 것과 같은 의식생활이 마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기쁨은 표현할수록 더욱 커진다. 아무리 경치 좋은 무인도라도 혼자 있어서 좋은 감정을 표현할 상대가 없다면 매우 답답할 것이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서 자신의 의식을 표현할 때 비로소 기쁨을 느낀다.

 

우리는 상대방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또 나를 표현함으로써 더욱 풍성해진다. 이것을 인간의 언어로 ‘행복’이라 부른다. 이처럼 사람을 상대하는 인간의 일면을 ‘혼’이라 부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통 할 수 있는 것을 바로 ‘영’이라고 한다.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는 본능으로만 움직이는 짐승과 같은 상태이다. 그러나 부모와 이웃으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으면서 점차 자기를 표현할 줄 알게 되고 인격이 풍성해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으로 인정을 받으면 자신의 믿음과 사랑을 표현할 수 있게 되고, 그 가운데서 신적인 의식이 우리 안에 생겨나게 된다. 이것이 곧 하늘나라를 깨닫는 신의식이다.

 

사람이 사람과 잘 통하면 행복을 느끼고 몸이 의식주 환경과 잘 통하면 만족과 건강을 느낀다. 영도 혼과 몸과 같이 사람 안에 있는 일종의 ‘통로’이다. 우리는 이러한 통로의 실제를 현실 속에서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다. 이웃과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아닌지 소변을 시원하게 볼 수 있는지 없는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체험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원리로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통로인 영도, 사람 속에 실재함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오직 사람만이 영원한 신의 세계를 찾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욕구가 있다. 그러나 특히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고 전도서 3장11절은 말씀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이 세상에는 아무리 눈 씻고 찾아보아도 영원한 것은 없는데 성경은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한다. 이것은 사람만이 가진 독특한 영혼의 작용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죽음을 의식하는 특징이 있다. 이것 역시 사람만이 가진 영혼의 특징이다.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사모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이외에도 사람에게도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이 있는데, 인식한다는 것은 지금 눈에 보이는 상황과 정 반대되는 것까지도 모두 포함시켜서 의식함을 의미한다. 예컨대 어두움을 의식한다는 것은 대조적으로 밝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고독을 의식한다는 것도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배고픔을 느끼는 사람은 언제든지 음식을 먹기만 하면 배부를 수 있음을 동시에 알고 있다.

 

같은 이치로 사람이 죽음을 의식한다는 것은 죽음과 함께 영원한 것이 있음을 의식한다는 뜻이다. 사람의 특징을 이해함에 있어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짐승은 죽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오직 사람에게만 영원한 신의 세계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사람에게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길이 우리 안에 있음을 강하게 암시하는 하나의 힌트이다. 신과 만날 수 있는 길이 바로 사람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사용하는 전도지 가운데 “당신의 생애를 좌우하는 그림”이라는 전도지가 있다.

 

“마음은 늙지 않고 죽지 않으며 보이지 않고 잠자지 않는다. 하나님도 늙지 않으시고 죽지 않으시며 보이지 않고 또한 주무시지 않는다. 이처럼 마음은 하나님을 닮았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우리 속에 있고, 다른 사람의 마음과 통한다. 하나님과 나의 마음이 통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사람과 잘 통하는 마음은 ‘행복’하고 환경과 잘 통하면 ‘건강’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과 통하면 구원을 받게 된다. 우리말에 형통, 신통이 바로 이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사람 안에는 이웃이나 신의 세계와 통 할 수 있는 길이 있다“

 

통하는 것의 반대 상황, 즉 불통이 바로 ‘죄’이다. 사람은 사람과 통하지 않으면 불행하고, 먹은 것이 소화가 되지 않고 배설도 잘 안되며 그 결과 병에 걸려서 육신이 고통을 받는 등 모두 불통의 현상들이다. 그런데 특히 하나님과 통하지 않을 때, 이것이 바로 ‘사망’이요, 지옥이며 멸망‘이라고 성경은 말한다.(롬6:23)

 

육체가 환경과 통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생기는 병과 여러 가지 고통, 사람과 마음이 통하지 않아서 느끼는 불행, 고독, 배신감, 배은망덕과 같은 것은 바로 우리가 현실에서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는 물질과 사람으로부터 오는 ‘지옥’이다. 그뿐 아니라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통하지 않아서 생기게 되는 ‘영원한 지옥’이 있다. 이렇게 통하지 않던 것을 다시금 통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하나님과 통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각자 자신이 당장 알 수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해봐라. ‘당신은 하나님과 통하십니까?“라고 물으시면 하나님과 통하지 않던 것을 시인하든지, 아니요 라고 대답 할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라고 말하고 그대로 죽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말해라! 사람에게 ‘죽음 이후에 어디에 가고 싶습니까?“ 라고 물으면 백이면 백 사람 모두 ’천국에 가고 싶다‘라고 말하지 진정으로 지옥에 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2. 영적 구원(영생)을 얻는 방법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2)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 보내신 이(하나님)를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말은 감이요, 의식이다. 말을 들을 때 의식을 전달받고 말을 할 때 의식을 전해 준다. 사람들 간에 의식의 대결이나 상대를 의식화시키는 것 모두가 말로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의식’이며 생명의 전달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면 그 순간 하나님과 통하는 길이 우리 안에 열리게 된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사람하고만 통할 수 있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사람으로 오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 우리에게 열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렇게 하나님께로 가는 길로써 주님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우리 속에 열리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주님을 마음에 받아들이기 로 결심했으면 이제 해야 할 일은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제가 주님을 마음에 받아들입니다.’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시인하면 내가 하는 말을 내 자신이 듣고 내 속에서 하나님과 통하는 감이 생기기 시작한다.

 

결혼하기 위해 선을 보러 나갔을 때 ‘아 저 사람이다!’라고 마음먹고 그 사람을 받아들이면 그 순간부터 그 사람에 대한 감이 속에게 생기기 시작한다. 그 후에 “나는 누구를 사랑한다.” “나는 누구와 결혼을 할 것이다.”라고 계속 말하고 시인하면 그 ‘감’이 점점 풍성해진다. 마찬가지로 마음속에 받아들인 주님을 계속 입으로 시인하면 ‘감’이 점점 풍성해진다. 이러한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식(영)이 역사함으로써 나의 현실에 실제적인 구원과 축복이 일어나게 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머리로는 많이 알면서도 실감은커녕 도리어 의심이 생기는 것은 왜 일까요? 그것은 평소에 세상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자꾸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TV 드라마 이야기, 스포츠 이야기 등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다른 것들만 자꾸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감이 생길 수 있겠는가? 의심이 생기는 이유는 다른 감들을 받아들여서 주님의 감이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은 영을 받아들이고 입으로 시인함으로써 감을 만들어 내는 기계이다.

 

사람은 어느 분야에서 얼마나 많이 실감을 느끼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방향이 달라진다. 미술학도가 색에 대하여 계속 느끼고 이야기하고, 음악도가 화성과 리듬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고 이야기하면 그 분야에 대한 감이 점점 더 발달해서 그 방향으로 인생이 열리고 성공하게 되는 법이다. 감을 만들어 내는 기계인 사람이 내 안에 있는 이러한 기계를 어떻게 잘 작동시키느냐에 따라서 나의 인생과 생활이 달라지는 것이다.

 

3. 믿는 자에게 주시는 것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들을 주시고 영생을 주셨지만 내가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기도함으로써 풍성해지는 것이지 만일 그분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의심한다면 하나님께서도 더 이상 나를 어떻게 하실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내가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성경은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요5:24)고, 구원이 이미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사실로써 선포하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우리는 아직 영생을 얻은 것이 아니다. 장차 부활하게 되면 얻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오해하고 주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활을 얻은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영생을 얻은 사람이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요11:25)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입으로 ‘나는 영생을 얻었다’라고 시인하라. 그러면 감이 축적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요일5:10)

 

증거란 무엇인가? ‘영생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영생을 얻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생명이신 예수님을 모셔 들인 사람은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구약에서 성경을 가르치거나 교인들에게 설교할 때에 계속 새로운 것을 가르치고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듣고 확증하는 것이 활씬 유익하고 영적 성장에 효과적이다.

 

우리는 바울이 만난 아테네 사람들처럼 새로운 것을 들음을 통해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이 아니다.(행17:21)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임재하심과 주님의 말씀을 입으로 시인함으로써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풍성케 해야 한다. 교인들 중에서 이미 배울 만큼 많이 배웠고 할 만한 것은 거의 다 해본 사람들 중에 미적지근한 사람들이 더 많다.

 

결혼을 했는데 석 달 정도만 살고 나서 ‘이만하면 결혼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그만 살자‘고 할 수 있는가? 그 정도만 살고 결혼이나 상대 배우자를 모두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결코 안 것이 아니다. 좀 더 깊은 감을 잡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한 우물을 깊이 파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인생 속에서 계속 깊은 감을 파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 표면만 보고 장소를 옮기는 사람도 있다. 이것저것 많이 해보고 옮겨 다니며 방황할지라도 한번도 인생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 채, 허송세월만 보내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는 무엇이든지 실감을 갖고 확신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27)

 

하늘나라의 감은 평안이고 자유 함이다. 예수를 믿으면 이 삶들이 내 속에 들어오게 된다. 누구든지 주님을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면 이미 하늘나라의 평안을 소유한 자이다. 사람이 주는 감은 일회성이다. 또한 그 감을 주는 사람을 위해 움직여 주어야 할 부담도 생긴다. 게다가 사람의 감은 저축하면 할수록 부담과 불안만 더욱 더 많이 안겨 준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면 사랑하는 것만큼 자식에 대해 불안을 갖고 더 많은 걱정을 하게 된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면 남편에 대해서 걱정을 하게 되고, 돈을 사랑하면 돈에 대해서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의 감은 내가 감을 받은 것만큼 그것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반응하여 움직이고 표현해야 하는 강제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은 받은 만큼 다른 것으로부터 받은 감들을 우리에게서 물어낸다. 그럼으로써 하늘나라의 진정한 평안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사람이나 돈을 좋아하면 그만큼 그것에 구속되고 제한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속에 오신 이유는 그 무엇에도 끌려가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도 쫓기지 않고 부담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케 하는 영이다.

 

만일 주님이 내 속에 오시지 않고 아직도 하늘나라에만 계신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기독교인들은 주님을 느끼고 만나기 위해 높은 하늘만 쳐다보며, 애타게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심지어 하늘에 오르려고 로켓이라도 타려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미리 다 아셨기 때문에 성령님을 보내셔서 주님의 감을 우리 속에 다 채워 주셨다.

 

하나님은 사랑이 본래 환경이나 다른 사람에게 쫓기거나 끌려 다니지 않고, 자신을, 중심을, 인생을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 참 사람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이러한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안다고 하는 것은 히브리 원어로 “체험하다‘는 뜻이다. 우리말에도 ’너 그 사람 아니?”라는 질문에 “그럼 나 그 사람 잘 알아”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실제로 겪어보고 사귀어 보아서 그를 ‘체험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체험하여 알 수 있다. 예수님을 깊이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고 하나님을 깊이 알면 알수록 예수님을 깊이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데 이 두 분 (하나님, 예수님) 대하여 알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다. 결국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모두 같은 하나님이시므로 삼위일체가 되시며 우리의 의식 속에서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시다. 세상으로부터 들어오는 다른 감, 곧 세상의 영들은 나에게 반드시 부담을 준다. 그러나 성령님은 나에게 외적인 부담은 주시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에게 ‘진정한 나’가 되는 자유를 주신다. 이것이 바로 ‘영생’이다. 성경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즉 하늘나라의 호적에 입적되는 권세를 얻게 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하나님의 생명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의 보호와 공급을 받는다. 또한 땅에서 주님을 부를 때에 응답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는 임종 시에 하늘나라를 상속받게 된다. 사람들이 자식을 낳고 그를 호적에 입적하고 나면 자식은 부모에게서 보호와 공급을 받고 나중에는 상속까지 받지 않는가? 그것이 자녀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특권이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8: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상속자인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상속받게 된다. 장차 천사가 섬기고 있는 하늘나라를 상속받게 된다. 이처럼 주님의 영광을 같이 나누는 것이 믿는 사람들의 권세이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밖으로부터 오는 감은 우리에게 부담을 주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을 지치게 하거나 거짓 감으로써 미혹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감은 이러한 세상의 감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고 또한 우리가 주체적으로 왕의 권세를 가지고 결단할 수 있도록 믿음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이요, 선물이다.

 

예수님의 감을 가진 자의 또 다른 축복은 ‘천사’이다. 히브리서 1장14절에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이며 우리와 같은 구원 얻을 후수들을 위해 섬기도록 보내심을 받은 영’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하늘나라를 상속받을 사람들이기 때문에 천사들이 미리 와서 보호해 준다.(히1:14) 천사는 주님의 보내심을 받고 성도를 지켜 주는 영체이다. 천사들이 와서 우리 주위에 진을 치고 있으면 밖에서 그 어떤 세상의 악한 영들이 우리를 해치려 하여도 성공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천사 울타리로, 천사 방파제이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욥1:9-10)

 

위의 성경 본문에서 말하는 산울이란, 천사를 통해 욥과 그의 소유가 보호하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천사울타리는 우리 속에 계신 주님의 생명으로만 가동된다(마26:53) 기도를 하지 않는 교인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에는 주님의 임재하심을 느끼지만 일단 세상에 나가면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에 쉽게 세상 분위기에 휩쓸려 버린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항상 예수 생명으로 자신을 채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엡6:12)

 

마귀는 우리에게 거짓 감을 주고 환경을 파괴하며 사는 동안 엉겅퀴만 거두며 헛수고하게 하다가 끝내는 허무와 고독 속에서 죽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마귀의 거짓 감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필요한 것을 계속해서 공급해 주는 것이 예수 생명이며, 예수의 생명을 따라 그런 일을 밖에서 이루는 영들이 천사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과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요17:21) 즉 주님과 하나 된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님 안에서 구하면 이룬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려고 오신 분이므로 주님께 기도하여 필요한 것들을 다 받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주님 나에서 구한대로 응답받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두 번째 특권이다. 또한 믿는 사람들의 임종 시에 천사에게 받들려 주님께 가게 된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눅:16:22)

 

영으로 낙원이나 지옥에 갔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혼자서 가지 않고 영의 인도함을 받아서 천국이나 지옥에 다녀왔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의식을 주셔서 물질세계를 느끼고 다스릴 수 있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내 몸을 얼마든지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만 움직이는 나라이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만 내가 움직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천사에게 받들려 하늘나라에 가면 그곳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배하신 모든 것들을 다 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오늘 이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세상의 모든 궁핍에서 벗어 날 수 있다. 하나님의 생명에는 부족함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은 후에만 천국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받으면서 온갖 축복을 누리고 또한 풍성하게 살 수 있다. 천국은 고전된 장소가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움직이는 동적인 실체이기 때문이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밖으로 나가서 전도하고, 구제하며, 열심히 기도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생활 가운데 임하는 천국이 있음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절로 더 많은 시간과 물질을 바치고 이웃을 구제하며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모하고 전하게 되는 것이다.(고전15:10)

 

 

제2장 혼의 구원

 

 

혼이란 인간의 정신을 말한다. 사람이 정신의 구원을 통해서 세상에서의 행복과 부귀를 얻게 되며, 이는 영적이 성장을 가져 온다. 사람이 가진 특성 가운데 하나는 ‘자기 선택의 능력’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복을 주시려고 하셔도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내게 유익이 없다. 교회 생활은 바로 이러한 혼의 구원을 위한 절대적이 환경이다. 말씀을 듣고 자신을 바로 잡고 더욱 헌신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 생각의 구원

 

혼에는 지정의가 있다. 즉 혼에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세 가지의 면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럼 우선 생각의 구원을 알아보자. 생각을 바로 할 때 인간은 발전한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생각에 속아 넘어간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딤후3:13)

 

악한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 자기가 속아 넘어간다. 내 생각에 내가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자꾸 듣던가, 내 자신을 자꾸 생각하면 그 생각이 점점 많아져서 자기 생각에 자기가 속게 된다. 사람은 생각(의식)을 하는 것만큼 그 생각이 자신 속에 쌓여 움직이게 된다. 세상 생각을 하면 생각하는 것만큼 세상을 향하여 움직이게 된다.

 

생각은 선택을 유도한다. 매스컴의 광고가 좋은 예이다. 광고는 사람들의 의식을 한곳으로 집중시킨다. 그래서 광고를 많이 하면 할수록 사람들이 그 물건에 대하여 생각을 많이 하게 되어, 그 물건을 보자마자 선뜻 그것을 사도록 하게 만든 것이다. 전도하는 것 또한 이와 같은 이치로 생각할 수 있다. 상대방이 듣던 말건 그에게 말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게 된다. 그가 그 말을 듣지 않고 욕을 하거나 반색을 한다 해도 그것 역시 그로 하여금 선택을 하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 되기 때문에 전도라고 할 수 있다.(딤후4:2) 그런데 이러한 면 즉 생각할수록 선택하게 되는 사람의 내면적인 특성을 바로 마귀가 이용하려고 든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요13:2)

 

위의 성경 말씀처럼 세상 생각은 마귀가 주는 것이고, 사람의 생각은 사람이 주는 것이며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어떤 영을 받느냐에 따라 그 생각이 좌우 된다.(고전2:11-12) 대체로 세상 사람들은 마귀와 사람으로부터 생각을 받아서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에 속아 넘어가고 있다. 세상 생각은 자기의 욕망을 이루려고 하는 생각뿐이다.(요일2:16)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5:28)

 

일단 우리 안에 생각이 들어오면 그것은 욕망을 만들어 낸다.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면서 동시에 불안을 가져다준다.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은 계속해서 움직이게 된다. 즉 불안이 그들의 활동의 동기가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롬1:27)

 

우리 속에 형성된 나쁜 욕망이 바로 죄를 범하게 만든다. 이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앞으로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모든 생각을 차단하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는 것이 말씀의 구원, 즉 생각의 구원이다. (골3:1-2). 그러나 만일 단순히 생각을 억제하려고만 하면 이것은 곧 ‘위선’이 된다.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골 2:21-22)

 

생각, 욕망을 억제하는 것은 헬라 철학의 특징인 금욕주의이다. 사람이 모든 욕망을 무조건 참기만 하면 어떻데 되겠는가? 병이 나거나 아니면 겉으로만 초연한 척하는 위선자가 된다. 어쨌든 둘 다 손해를 보게 된다. 자신의 불안을 밖으로 발산하면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게 되고, 내가 참고 견디노라면 결국 병이 나서 병원과 약국에 좋은 일만 하게 된다. 외향적인 사람이 나쁜 생각을 가지고 그대로 행동할 경우 다른 사람을 해쳐서 결국 자신이 감옥에 들어가거나 상대방의 치료비를 물어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의 구원을 받아야한다. 생각의 구원을 달리 말하면 말씀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은 마귀의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쫓아내셨다.

 

마 4장 우리 주님께서 시험받으실 때에 마귀가 와서 “돌로 떡을 만들어라”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나한테 경배하라“와 같은 생각을 주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러한 생각을 단호히 물리쳤다. 이것이 곧 말씀과 믿음의 방패이다.

 

말씀을 배우지 않으면 세상으로부터 들어오는 생각을 막을 길이 없기 때문에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게 된다. 생각의 구원을 얻으려면 바로 이 말씀의 방패(믿음의 방패)가 있어야 한다. 말씀을 통해서 자기 선택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교회 안에서 쓰는 ‘세상’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의 의견, 이론, 상식, 유행 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들 안에서 자기 선택을 하는 것이 세상 생각이고, 세상 영이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말씀 안에서 자기 선택을 하게 되는 데, 이것이 곧 ‘믿음’이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8:5)

 

잘못된 생각은 일생을 망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 이는 죽음 그 자체만을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에서 내 의식 속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결국은 내게 손해를 주고 또한 나를 죽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이 내 안에 들어올 때 ‘생각의 근원이 어딘가? 를 잘 살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렘29:11) 믿음이 없는 자들이 볼 때에는 당장에는 손해인 것 같고 죽을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을 선택하고 끝까지 붙잡으면 결과적으로 반드시 나에게 생명과 축복이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의한 생각이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엡4:26)

 

단지 분을 내는 것만이 아니라 낙심하고 음란한 생각을 하고 미워하는 것 등 여러 가지를 다 이 말씀에 적용할 수 있다. 누구나 이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우리 육신은 약하고 이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하면 화가 나고, 이성을 보면 음욕이 일며, 어떤 일에 실패하면 좌절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좌절하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그 좌절을 내가 어떻게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분이 나게 되면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그 분함이 없어질 때까지 주님을 찬양하거나 상대를 축복하는 것이 필요하다.(마5:43, 히13:15)

 

음란한 생각도 자기 선택을 통해 그 생각을 내어 보내고 청소해야한다. 오랫동안 미워하다 보면 미움에 미움이 쌓이고 맺히게 되어 나의 행동과 인생이 그쪽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우리가 이럴 때 취해야 할 행동은 바로 벗어버리는 것이다.(골3:8)

 

말씀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라고 하신 것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뜻이다. 또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분을 품지 않을 방법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오르지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지혜를 배워야 한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3:15)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사람에게만 성경이 구원에 이르도록 ‘지혜’를 주는 것이다. 믿지 않는다면 성경은 지혜를 주지 않는다. 다만 상식과 지식에 불과하다. 성경이 주는 구원의 지혜는 영생을 얻게 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8: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4:4)

 

세상 생각을 버리고 영의 생각을 갖도록 생각의 개조가 이루어져야 생각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님은 믿어도 생각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믿음이 자라나지 않고 계속해서 세상의 유혹에 빠져 흔들리게 된다. 결국 축복도 받지 못하고 영적인 성장도 이룰 수 없다. 이처럼 생각의 구원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방패이다. 세상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을 막아 나의 심령을 보호하며, 내 속에서 나오는 모든 유혹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된다. 화가 났다든지 실망했다든지, 눌림을 당했을 때에 생각을 조정하여 바로 세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서 영의 생각이 들어올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어 주는 것이 말씀의 지혜이다.(롬12:3) 이 말씀의 지혜를 가질수록 인생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들이 계속해서 해결된다. 이것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2. 감정의 구원

 

감정은 인생에서 아름다움과 힘을 준다. 생각이 하나의 방향을 결정하는 길이라면, 감정은 자동차의 엔진과 같고 자동차는 엔진이 가동되어야만 밀고 나갈 힘이 생긴다. 즉 계속해서 새로운 영감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대개 사람들은 슬픈 감정, 눌린 감정을 가지고 있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롬3:16-17)

 

죄인들은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늘 마음이 슬퍼서 눌린 가운데 살아간다. 이러한 억제된 감정 때문에 각종 신경성 질환과 정신병이 생겨나는 것이다. 눌린 감정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감화를 받을 때 그 상처가 고침을 받는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롬5:5)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계속 따라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영감을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감화를 통해서 우리의 약해진 모든 심령들을 새롭게 하시고 눌린 것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또한 내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때 감격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되고 이 때 모든 슬픔과 눌림에서 벗어나게 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4)

 

여기서 애통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영적인 실체를 보았을 때 눈물이 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감격의 눈물이 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회개의 눈물이자 감사의 눈물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만큼 우리의 심령은 더욱 새로워진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눈물이 있어야 된다. 눈물이 없는 사람은 마음이 눌려서 영감이 오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의 심령을 기도로 진단해 보면 머리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는데 마음은 눌려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감정의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감정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속에 영감과 평안이 없어서 새로운 용기와 소망을 갖지 못하게 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4:18-19)

 

이 말씀은 마음이 눌린 것에서 변화를 받아 희락을 맛보게 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룸14:17)

 

‘의’라고 하는 것은 악에게 끌려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믿음을 지킬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서 악을 행한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면서 부모에게 대항하고 남편에게 대항한다. 도둑질을 하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의는 결코 이런 의가 아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러한 거짓 의에 넘어가지 않도록 영원한 의로 지켜 주신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거기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에도 기쁨이 있어서 사람들은 그 기쁨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기쁨은 우리가 추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기쁨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세상적인 기쁨을 맛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넘치는 기쁨이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감정의 구원을 통해 하늘의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히1: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눅21:34)

 

방탕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온통 흩어져 세상 쾌락을 추구하다 보면 감정이 흩어지고 눌리게 된다. 이럴 때 기도를 해야만 영감을 회복하고 눌린 심령을 새롭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밤에 베드로가 칼을 뽐아 말고의 귀를 자르고 세 번이나 주님을 강력하게 부인하게 된 것은 감정의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베드로는 즉흥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수를 하지 않고 환경에 대해 맹목적으로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늘 감정의 구원을 얻어 이에 대처해야 한다. 감정이 구원받으면 실수도 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이끌리지도 않는다. 짐승들이 다른 짐승이나 인간들에게 잡혀 죽는 것은 자기 충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짐승을 잡는 다른 동물이나 포수들은 짐승의 본능을 이용해서 잡는다.

 

마귀도 마찬가지다. 마귀도 여러분과 나를 멸망시킬 때 우리 속에 있는 본능이나 충동을 이용해서 우리를 잡는다. 그러므로 마귀에게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감정의 구원을 받아야 한다. 감정이 구원된 상태에서는 본능이나 충동대로 반응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마귀를 이기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기도함으로써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습관을 가져야한다.(고전13:6)

 

3. 의지의 구원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말씀의 구원, 감정의 구원 이외에 인생은 자신의 의지적인 결단에 의해 좌우된다. 아무리 어느 순간에 좋은 감을 느꼈다 할지라도 결국 내가 의지로 선택을 함으로써만 성취 여부가 달라진다. 그런데 타락한 의지는 쾌락과 본능의 노예가 된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1:28)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면 상실한 마음대로 주님이 내어버려 두시기 때문에 의지가 작동할 수 없다. 그래서 그대로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고전12:2)

 

끄는 대로 끌려가는 것이 세상의 본능적 현상이다. 우상은 눈에 보인다. 보이는 것을 좇아가는 것이 우상을 좇는 것이다. 이것이 보이면 이쪽으로 저것이 보이면 저쪽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심심해서 죽겠다는 사람들이 바로 이렇게 끌리는 대로 마구 끌려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믿는 사람으로서 자기 인생을 주님 안에서 결단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은 심심할 겨를이 없다. 그는 밤낮 자기의 할 것을 준비하기 때문에 바쁘다. ‘친구가 놀러오지 않나’ ‘TV에 뭐 좋은 프로하지 않나’하는 수순의 생각만 하면서 심심해하는 사람은 절대로 인생에서 성공할 수가 없다.

 

우리는 심심한 것과 상관이 없어야 한다. 늘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한다. 한 가지를 향해 나아가는 의지적 결단이 필요하다.(롬12:11) 절대로 환경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된다. 환경에 대해 끌리는 그 순간에는 부담이 없다. 술에 끌려 술자리에 가고, 영화가 좋아서 극장에 가는 사람들은 의지가 약한 사람들이다.(고전9:27)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11:29)

 

우리는 자신의 축복과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결단을 내려야한다. 이런 결단을 실습하는 곳이 교회이다. 늘TV를 보고 자기 마음대로 하던 것을 그만두고 이제는 교회에 나와서 시간마다 예배드리고 기도해라! 세상 기준에 따라 끌려 다니던 돈을 주님께 바치고 대접받기 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 손해보고 전도해라! 이 모든 교회 생활을 통해서 끌려가던 인생에서 벗어나 내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고, 자기를 선택하라. 이런 생활을 연습하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혼자서 성경보고 깨달으려고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혼자서는 영적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우리가 세상에 끌리지 않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새로운 선택을 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교회 생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생각과 감정의 구원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반드시 의지의 구원을 이루어야한다. 즉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훈련을 받지 않으면 절대로 내 자신을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인도자에게 순종하라고 성경이 말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5:5-6)

 

우리가 장로와 인도자, 곧 목사님께 순종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선한 의지를 키우기 위함이다. 그럼으로써 세상에 저절로 끌려가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의지적인 결단을 요구하다. 여러분들이 말씀에 따라 결단을 내릴 때 세상 사람과 환경에 맹목적으로 이끌리지 않게 된다. 누구에게든지 끌려간다는 것은 나의 선택을 포기한다는 뜻이며, 남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게 됨을 의미한다. 끌려갈수록 나는 손해를 보게 된다. 물질에 끌려가면 물질에 의해 내가 손해를 보게 된다. 내가 선택을 하느냐, 선택을 당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주객이 바뀌게 된다. 우리를 세상에 끌려가지 않도록 막아주시고, 인도자들을 통해 자기 선택을 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4:7-8)

 

또 교회 생활을 통해서 바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딤전6:17-19)

 

참된 생명은 죽으려고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생명이다. 이기는 생명, 모든 것을 얻는 생명이란 뜻이다. 태어날 때 사자로 태어나면 짐승들을 잡아먹는 생명으로 쥐로 태어나면 잡아먹히는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생명의 문제에 관한 한 우리의 노력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생명을 얻어야 된다. 모든 것을 얻는 생명, 이기는 생명이신 주님의 생명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의 생명을 얻는 것이 의지의 구원이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5:4)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환경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 사람들은 겨울이 오면 월동 준비를 하듯 환경에 대해 수동적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그러면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바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자꾸 돈을 더 모으고 벌어들이려고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더 많이 바치고, 내 자신을 복종시켜 환경과 상관없이 주님을 선택하는 능력을 키우면 최종적으로 참된 생명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고 나를 이기고 우리를 구언하는 생명이다. 의지의 구원은 이렇게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교회 생활을 통해서 얻어지는 가장 귀한 구원이 바로 이 의지의 구원이다. 혼자서도 기도할 수 있고, 혼자서도 성경을 공부할 수 있지만 의지의 구원은 혼자 나의 힘으로는 이루기가 어렵다. 사람끼리 부딪히고, 바치고, 봉사하고, 양보하고 서로 섬김으로써 구원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교회를 통한 온전한 구원인 것이다. 이로써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 정신의 구원이다.

 

우리는 팔자와 운명도 고칠 수 있다. 첫째로 생각과 느낌의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둘째로, 감정의 구원을 받으며 셋째로, 의지의 훈련을 통해서 자기 선택의 훈련을 하게 한다고 앞에서 말했다. 남이 끄는 대로 이끌리지 않는 훈련, 즉 바치고 섬기는 훈련을 통해 절대로 다른 이들에게 끌려 다니지 않는 훈련을 할 수가 있다.

 

전도는 이러한 훈련을 위해 가장 적합한 교회 생활의 하나이다. 불신자들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는 것이 전도가 아닌가? 이것 자체가 벌써 다른 사람에게 끌려가지 않는 것이 된다. 내 자신의 기분과 감정이 슬프건 분하건 간에 이러한 기분과 감정에 끌려가지 않도록 선한 싸움을 해야 한다. 나의 지, 정, 의를 통해서 예수의 인격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 정신의 구원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영이 새로워지면 생각이 새로워지고, 감정이 새로워지며, 의지가 새로워지고 궁극적으로는 인생이 새로워진다. 인생이 새로워짐으로 인해 나의 인격이 나타나는 환경도 자꾸 달라지며 계속적인 인생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제3장 예수님

 

 

1.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1-3)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히11:3) 창세기1장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그대로 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 속에 운동력(생명)이 있어서 움직이는 역사가 일어났다.

 

창세기 1장 6절~7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고 하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에는 운동력 즉 움직이게 하는 힘 (생명)이 있고, 움직이게 하실 뿐 아니라 없던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히4:12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한다. 운동력은 움직이는 힘을 말하는데 성경 말씀과 같이 모든 피조물은 다 운동력, 즉 움직임으로 존재하고 있다. 바람은 공기가 움직임으로 존재하고, 강은 물이 흐르므로 존재한다. 사람은 몸속에 피가 흐르므로 살고 있는 것이다.(레17:11) 우주는 전부가 움직임으로써 존재하고 있다. 과학자들도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에너지 즉 움직이는 힘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사실 과학이란 것은 형체(존재)를 운동력(에너지)으로 이해하고 그 운동력의 통로를 조절함으로써 형체를 바꾸는 사람의 방법을 말한다. 전기공학은 전자의 흐르는 에너지(운동력)의 통로를 조절함으로써 여러 가지 형체, 즉 열이나 바람이나 운동력으로 바꾸는 방법을 말한다. 과학자들은 모든 존재가 운동력, 즉 에너지로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에너지가 어디서 나왔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냥 있었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상경은 분명하게 그 운동력(에너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왔다고 한다.(히4:12)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운동력으로, 움직이는 힘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우주를 만드신 말씀이 사람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요, 그분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1)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도 바다나 나무나 마귀나 떡이나 고기나 누구에게 말씀하시든지 그것들이 다 복종했던 것이다.(마8:26; 막11:16, 6:41) 그가 천지를 만드신 말씀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은 사람이시다.(마1:21; 요1:14)-> 구체적으로 구원을 주심

 

만물이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유독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생명과를 먹지 않고 쫓겨났기 때문이다.(창3장)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했다.

 

하나님의 생명은 영의 생명이며 이 생명은 우리 안에 들어와야 했다. 이 영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려면 사람이 되어야만 들어올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사람 속에는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시고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했다.(창2:18)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천지창조 때에는 주님의 창조가 물질계를 통하여 나타났지만 이제는 인간의 생명 가운데 들어오셔야 하기 때문에 주님 자신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과가 되신 것이다.

 

에덴동산 이야기에 나오는 생명과는 무엇인가? 아담은 하와와 더불어 생명과를 먹지 못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사람이 생명과를 먹지 못했기 때문에 속생명은 갖지 못한 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육신과 더불어 늙어가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다스리고 주관할 수 있는 능력 즉 세상 만물에게 길을 만들어 줌으로써 그 길을 통해 움직이도록 하는 주체적인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말을 통해 만물에게 운동력을 부여할 수 있는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그 생명을 가지고 다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능력과 권세를 회복시키셨다.

 

주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것은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이 땅에 오신 생명과 이다. 이렇게 주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써 첫 열매인 참다운 인간, 참다운 사람이 만들어졌다.

 

창세기 1장에 ‘우리가 우리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신 그 형상의 완성품은 마1장에 나오는 참사람으로 오신 주님에 이르러 비로소 이루어졌다. 주님은 사람으로 오셨지만 하나님의 생명으로써 사람을 입고 오셨다. 믿는 성도들과 주님과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자이다. 양자와 적자는 어떻게 다른가? 적자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생명을 받은 사람이고, 양자는 태어날 때는 아버지 생명을 받지 않았지만 후천적으로 아버지에게 입적이 돼서 아버지의 권한과 지위를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지이다. 주님은 독생자이자 참 아들이며 하나님이시고 사람이다. 주님은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다. 우리 주님만이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서 예배를 받으시고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인 것이다. 오로지 예수님 한 분 뿐이시다. 우리 주님은 사람으로 오셨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예배를 받으셨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마9:5-6)

 

우리 주님은 죄 사함을 선포하셨다. 죄를 사해 주신다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생명의 길과 통로를 열어 주신 다는 뜻이다.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계19:10)

 

이 성경 말씀에서와 같이 경배는 하나님만 받는 것이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20:28)

 

도마의 고백과 같이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주 하나님’이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하므로 만약 도마가 잘못 말했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말라.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라’고 하셨을 텐데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는 가만히 계셨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두 하나님이시며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5)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어떤 사본에, 독생자가(요1:18)>

 

예수님은 참 사람이시다. 주님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잉태되셨다. 생명을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유대인들은 부부생활을 할 때도 기도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곳에도 창조의 하나님이 와 계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부부생활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자녀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이 역사를 해야 창조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유대인 부부는 하나님과 함께 셋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아주 경건하게 부부생활을 한다고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영으로 만들어졌다. 우리 주님은 육신을 가지실 때 하나님의 영으로 지으심을 받으셨기 때문에 죄가 없으신 분이며, 그분은 믿음으로 성장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2:52)

 

여러분들도 주님 보시기에 점점 더 예뻐지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그렇게 되려면 겉 사람을 자꾸 벗어버려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 3:15)

 

주님은 또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다 지키셨다.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께서 왜 사람에게 침례(세례)를 받으셨을까? 침례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제일 마지막 선지자이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이루시기 위해 세례요한의 세례까지도 다 받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종들 중에 아무리 작은 종이라 할지라도 순종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떤 은혜를 주든지 그 은혜에 내가 순종하면 하나님의 의를 다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겸손이다.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든지 그때마다 주시는 은혜가 그를 통해서 임할 수가 있다. 주일학교 교사를 통해서 주시는 은혜도 있고, 주일학교 학생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은혜도 있다. 그 작은 은혜 하나하나를 모두 귀중히 생각해야 된다. 귀중하게 생각하며 은혜를 받으려는 태도는 마치 꿀벌이 꿀을 따러 다닐 때 큰 꽃에 있는 꿀만 따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어떤 때에는 꿀벌이 더러운 곳에 앉는 것을 볼 수 있다. 거기에서도 가지고 갈 것이 있기 때문에 앉는 것이다. 어쨌든 꿀만 걷을 수 있다면 어디든지 다 모아 오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은혜만 있다면 어디를 가서든지 받으려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한다. 이럴 때 모든 것이 합동해서 선을 이루는 역사가 일어나나다. 이처럼 주님은 겸손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어졌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1:1-2)

 

우리 주님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모습과 말씀을 보여 주셨다. 성경의 여러 속에서 많은 조상들과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부분적으로 이야기를 했다. 주님은 성경에 예언된 분이 바로 ‘나다 나는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에 있는 모든 선지자들은 진리와 말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주님은 자신이 진리임을 말씀했다. 우리 주님의 생활 전체가 다 말씀이다.

 

성경은 다른 종교서적과는 다르다. 다른 종교의 경전은 그야말로 논설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론도 주장도 아니다. 그저 우리 주님이 어떻게 행하셨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쓴 것이다. ‘주님은 거룩하셨다. 앉으셨다. 일어나셨다’라고 쓰여 있다. 주님이 말씀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말씀이 걸어가시고 말씀이 앉으시고 말씀이 일어나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이루어 나가야 된다. 여러분이 일어나는 것, 걸어 다니는 것, 말하는 것, 또한 앉는 것이 구원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나 교인들이 성경공부 시간에만 모여서 떠들고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종교 프로그램이 될 뿐이다. 세상의 다른 종교는 모두 프로그램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모든 생애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며 주님을 나타내는 생애가 되어야한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9:4)

 

우리 주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하나님의 일을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일을 시키셨다. 무슨 일이었을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에덴동산과 그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을 다스리며 지키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담이 그 일을 제대로 했나? 하지 못했다. 에덴동산은커녕 자기 마누라도 다스리지 못했다. 자기 마누라한테 질질 끌려 다니지만 했다. 자기 마누라가 ‘입 벌려요’하면 입 벌리고 ‘눈 감아요’하면 감고 ‘아~ 해여’하면 ‘아~’하고 그렇게 했다. 그것은 다스린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을 지키지도 못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과 하늘나라가 임재 한 동산이었다. 즉 천사동산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결국 잃어버렸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잘 해내셨다. 하나님의 일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구속의 사업이었다. 주님은 이렇게 거룩한 종으로서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셨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사53:10-11)

 

위 본문에 나오는 의로운 종은 주님을 말한다. 주님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을 이루셨다. 주님은 온전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제물이 되셨다 주님은 100% 온전한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100%온전하게 자기 자신을 드릴 수가 있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9:14)

 

3. 예수님은 죽으셨다.

 

주님은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셨고 제물로서 세상의 죄를 대속하셨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1)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2:1-2)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은 같이 나누고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죽으심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친구라 하리라’고 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15:13-15)

 

성경이 말하는 친구는 언약을 맺은 관계를 의미한다. 서로가 짐승을 잡아서 반을 쪼갠 후 그 사이를 통과하며 언약을 맺는다. 이렇게 언약을 맺으면 친구가 되고 언약의 표를 서로 나눔으로써 친구가 된다. 만일 둘 중 한 사람이 위험을 당하거나 누구한테 죽음을 당하면 남은 사람이 그 사람의 원수를 갚아 주어야 한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바쳐서 그 가족이나 그 사람의 명예를 지켜 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성경의 신약과 구약은 하나님과 우리가 맺은 언약이란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하였기 때문에 내가 죽으니까 우리 주님도 같이 죽는 것이다. 죽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주님은 언약의 사람이셨다. 성경은 이러한 주님을 인자라고 표현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눅22:20)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피로써 언약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냥 무조건 사랑하는 로맨틱한 사랑이 결코 아니다. 불교에서는 벼룩이나 빈대까지다 다 사랑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벼룩이나 빈대까지도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죽이는 사랑이다.

 

언약의 사랑은 선택적인 사랑이다. ‘나는 그대를 택했다. 나는 그대를 나의 친구를 택했다. 나의 아내를 택했다. 그래서 나는 그대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하는 사랑이지 벼룩이나 빈대 기생충 회충 곤충을 다 사랑하고 또한 너도 사랑한다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사랑이 아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약의 사랑이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아야 한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1:4)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고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를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인간 구원의 모든 것은 주님의 택함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신 이유이다. 우리 주님은 성경에 나타난 주님의 고난과 영광을 이루셨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의로운 종은 자기 영혼을 속건 제물로 바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또 자신의 영광을 이루시리라는 것이 바로 성경의 약속된 예언이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24:26-27)

 

성경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예언대로 주님은 고난을 받으시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셨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돌아가셨고, 또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2:2)

 

주님은 앞에 올 즐거움을 위하여 모든 고난과 십자가를 참으사 부그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하셨다. 이것이 아들의 영광이다.

 

4.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음부의 권세를 이기시고 천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5-26)

 

주님 자신이 부활이셨으므로 주님은 부활하실 수밖에 없었다. 이 부활로 말미암아 주님은 음부의 권세를 이기셨다. 음부에는 들어가서 나온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모두 들어가기만 했다. 그러나 들어갔다가 나온 분은 주님 한분이다. 이로써 주님은 천국에 올라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계신 하늘과 천사들이 있는 하늘로 되어 있고, 이 아래에 세상이 있다.

 

세상은 사실 사람이 다스려야 하는 왕국이었다. 음부는 땅 밑에 있는 타락한 천사들이 가서 갇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타락한 천사가 사람의 나라를 모두 차지해 버렸다. 이로써 사람의 나라가 음부에 통합되어 버렸다. 그런데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음부의 권세를 이기사 하늘나라에 올라가는 길이 생긴 것이다. 우리를 향한 구원을 완성시키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1:3)

 

우리가 거듭나게 된 것은 예수의 부활의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주님이 돌아가시기 전의 생명을 가지고는 우리를 살릴 수 없다. 인간은 음부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음부 속에 들어가셔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에게 주님의 생명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것이 부활의 생명이다.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가졌다. 이제 더 이상 세상의 음부권세가 나를 침범치 못한다. 그리고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을 완성 시키셨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고전15:1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15:3-4)

 

주님은 성경대로 죽으셨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가 믿는 것은 성경이다. 이 성경은 누구에게 대하여 쓰여 있나? 주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에 대하여 쓰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때 부활하신 주님이 내 속에 들어오신다. 믿음이란 단순히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공부만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주님을 내 생애에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막16:14)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모두 믿었다. 그분이 하나님이었고 메시아였고 그가 행하신 기적을 다 믿었다. 그런데 부활만 믿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믿음 없다고 꾸짖으셨다. 오늘날 참된 믿음은 무엇일까?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모두 믿는 자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15:20)

 

주님도 죄인인 우리와 같아지기 위해서 죄인의 모습으로 음부에 찾아 오셨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먼저 부활하셨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서 계속해서 성도들이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5. 예수님은 승천하셨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8:34)

 

하나님도 성전이시고, 예수님도 성전이시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계21:22)

 

주님이 자기의 피를 가지시고 어디로 올라가셨나? 본래의 성전에 올라가신 것이다. 본래의 성전에 올라가셔서 피로써 하나님 앞에 드리시고 그 다음에는 대속의 역사를 완성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1-12)

 

이렇게 주님 자신이 영원한 속죄의 사역을 완성하신 후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지상의 교회를 세우셨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는 곧 반석이라” (마16:18)

 

교회는 천상에 있는 교회와 지상에 있는 교회가 있다. 이 교회를 통해 하늘나라와 땅이 하나가 된 것이다. 주님 이전에는 세상이 음부에 속했었는데, 이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하늘나라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교회이다.

 

이세상은 둘이다. 아직도 음부에 속한 세상과 하늘에 속한 교회로 나뉘어 있다. 이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교회의 영역을 계속 넓혀야 한다. 믿지 않는 사람은 이 땅에 살아있어도 이미 지옥에 간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마귀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지상에 살면서 벌써 천국에 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이것이 교회이다. 하늘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이 교회이다.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생명과를 먹기만 하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통치할 수 있었다. 그것이 본래 사람에게 주신 왕권이다. 이 왕권을 되찾아 주셨다. 이로써 우리가 이 땅을 다스리고 회복시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사명은 교회를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지상의 교회는 하나님의 왕권을 되찾기 위해 싸우는 전투적인 교회이어야 한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으로부터 나와서 전투를 통해 차지한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이다. 구약은 거의 전부 전투와 싸움이야기로 일관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교회를 통해 사탄과 전쟁을 하는 전투 현장에 속해 있다. 사사기 시대는 전투를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이방 것을 받아들이다가 타락하고만 시대로써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세상 것을 받아들이면 타락하게 된다. 우리도 싸움을 하기보다는 손쉽게 세상 것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모르는 사시에 교회는 타락하고 성도의 영혼은 죽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회복해야한다. 전투 교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16:7-7)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정복사업이 완성되게 되었다. 쳐들어가는 역사는 은사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것이 곧 성령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영은 쳐들어가는 영이다. 기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쳐들어가는 것이다. 저는 성도들에게 전투적인 용어를 사용하며 쳐들어갈 것을 이야기한다. 정복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그 동안 깨지지 않았던 것, 굴복하지 않았던 것, 아직 마음을 열지 않았던 것을 향해 쳐들어가는 것이다. 쳐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영이다.

 

목회자는 이 싸움에서 정찰대와 같다. 쳐들어가기 전에 제일 먼저 정찰대가 나가서 ‘어디 어디로 쳐들어가시오’하고 앞에서 무선으로 지시를 내린다. ‘어디에 대포를 쏘시오. 대포를 폭격하시오, 어디로 들어가시오’ 이것이 정찰대의 역할이고 사면이다. 목회자는 바로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성령님을 의지하여 목회자의 지시에 따라 쳐들어가면 된다.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가 쳐들어가야 할 대상인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끼리 서로 쳐다보고 ‘누가 어쨌고, 뭐라고 말했지? 누가 기분이 좋고 누가 불평 한다더라’하는 그런 것에만 자꾸 관심을 갖고 우리들끼리만 쳐다보아서는 안 된다. 쳐들어가야 성령님이 역사한다. 이 개념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2:1)

 

사도생전2장 에서부터 계속해서 말씀이 전 세계에 전파되기 시작한다. 말씀으로, 성령으로 세계 각국을 향해 쳐들어가는 역사가 바로 교회이다. 오늘날 교회들은 모여서 안방 극장식으로 목회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회가 아니다. 우리는 쳐들어가야 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14:1-3)

 

주님은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신다. 궁극적으로는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늘나라에 가서 내 집과 내 땅을 차지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왕이 된 것처럼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것이 궁극적인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이다.

 

6. 예수님의 명칭

 

예수님의 명칭은 주 예수그리스도이다. “주”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를 말하며 원어로는 ‘아도나이’이다. 즉 구약시대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도마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십니다’라고 예수님을 주 하나님으로 고백을 했다. ‘주’라는 말을 예수님을 부른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부른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1:21)

 

‘예수’는 사람이다. ‘예수“는 여호와이다. 우리 주님은 여호수아이다. 쳐들어가시는 군대장관이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4:18-19)

 

주님의 사역은 말씀을 전파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자유케 하시고 주의 은혜를 전파하게 하심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주님의 사역은 기름부음이다. 하나님은 세 가지의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셨다. 선지자와 제사장, 그리고 왕에게 기름을 부으셨다. 우리 주님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써 오셨다. 모세도 민족의 지도자로써 왕 노릇도 하고, 선지자 노릇도 하고, 제사장 노릇도 했다. 주님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로써 하늘의 소식을 우리에게 들려 주셨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신 18:15)

 

주님은 하늘의 모든 소식을 다 전했다. 그리고 제사장으로 자기 피로써 대속하셨다.

 

“증언하기를 ㄱ)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히7:17)

 

주님은 창조에 속하지 않은 하늘의 성전에 가셔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8:34)

 

또한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계속해서 대속의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대속의 기도를 통해서 죄인이 하나님 앞에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납할 수 있는 축복의 길을 열어 주는 제사장이 되셨다. 주님은 또한 왕으로 오셨다.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낮 열두 시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요19-14016)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요18-37)

 

주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자신에 대한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으셨다. 다만 자신이 왕이라는 말만 하셨다. 이것을 보면, 주님은 언제든지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드러내신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은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위임을 받은 왕권을 인간에게 되찾아 주시기 위해 오신 왕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심판하는 권세를 받아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셨다. 이로써 주님은 만왕의 왕이 되신 것이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주님,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주님은 우리가 믿는 것의 전부이시며 구원이시오, 진리이시요, 말씀이시요, 또한 속죄의 길이시며 영원한 주님이시며 우리의 영광이시다.

 

 

제4장 기도 - 영의 운동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이미 창세전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과 나에게 예정하시고 택하신 구원이다. 이 구원에는 이 세상까지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구원이 있고 주님이 오셔서 나를 대속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구원이 있다. 또한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현실에서 거듭나게 하시고 날마다 삶을 인도하실 뿐 아니라, 천사들을 통해서 순간순간 하나님의 구원과 기적이 나타나게 하시는 구원이 있다. 기도는 바로 이러한 ‘생활의 구원’을 이루는 실제적인 방법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을 온전히 이룰 수가 없다. 기도는 이처럼 우리의 생활을 구원하는 절대적인 방편이다.

 

1. 기도가 응답되는 이유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12:3)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을 얻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가 주님의 약속대로 어떤 복을 믿을 수 있는 지는 신명기28장에 자세히 나와 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28:1-6)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구체적인 생활 구원이다. 떡 반죽 그릇과 나귀 새끼와 들고 나는 모든 출입에까지 복을 주시는 실제적인 생활의 구원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축복해 주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이루어 주는 존재가 바로 천사들이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103:20-21)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축복은 바로 천사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축복으로써 성취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저주밖에 받을 수가 없다. 그러나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우리에게 축복으로써 성취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ㅂ)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 3:13-14)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복을 주셨다. 욥의 축복을 보자. 그는 매일 매일 제사를 드리고 죄를 범하지 않았으며 늘 하나님께 대하여 경건하게 생활한 결과 하나님이 천사 울타리를 둘러 주셔서 그의 모든 재물과 소산을 지켜주셨다.

 

신명기 28장에 말씀을 듣지 않고 배반할 경우에 대한 저주가 나온다. 우리는 모든 이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들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우리를 속량하고 모든 저주를 제거하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우리에게 미치게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후1:20)

 

하나님의 약속은 언약이다. 이 언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이루어지는 축복이다. 우리가 비록 주님의 말씀을 다 지키지는 못했지만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우리에게 성취되었다. 이것이 곧 구원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롬10:8)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심겨진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심겨진 것이다 말씀이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고후3:3)

 

우리 안에 오신 주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실상)을 가지고 오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들과 함께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셨다(롬8:32) 이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우리 몸을 통하여 나타날 때 밖에서는 마귀의 세력들이 물러가고 천사들이 수종들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된다. 이 축복이 하늘나라이다. 하늘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이다.(마4:11, 12:28-29; 눅17:20) 그러므로 성도들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며, 우리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항상 깨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그 음성을 구해야 한다(눅21:36; 룸8:14) 기도는 하나님께서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주신 실상이 우리 몸을 통하여 나타나도록 통로를 열어 드리는 것이다.(막11:2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15:7)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도록 되어 있다.

 

2. 기도의 조건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주님 안에 항상 거해야 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15:7)

 

안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안에 거하라는 것은 항상 깨어서 기도하라는 의미이다. 기도를 통해 영감을 저축하는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내 안에 거하시며 나를 떠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성령을 주셔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 문제는 내가 주님 안에 거하면서 영감을 축적하여 주님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결혼을 하면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어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 시간을 투자하여 함께 하면 상대방을 더 깊이 알 수 있겠지만 만일 다른 것에 신경 쓰면 행복감이건 무엇이건 아무감도 오지 않는 이치와 마찬가지이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눅21:36-36)

 

항상 주님 안에 거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세상의 영광, 사람의 영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재난을 넉넉히 피할 수가 있게 된다. 오늘날 교인들이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문제를 가지고 기도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문제가 아닌 믿음의 고백을 드려야 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ㄱ)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마4:4)

 

주님께서는 기도하실 때 언제든지 문제에 대하여 기도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4:7)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4:10)

 

이와 같이 말씀만 선포하셨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나?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4:11)

 

이것이 바로 기도이다. 기도는 간단한 것이다. 기도는 하늘나라의 영적인 통로를 여느냐 닫느냐를 놓고 하는 영적인 싸움이다. 그래서 이미 받은 것으로 믿고 선포해야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11:23-24)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

 

기도는 천사들이 일할 통로를 여는 것이다. 그런데 통로를 두 가지로 열어주면 실상이 나타날 수 없다. 그래서 두 마음을 품으면 안 된다. 또한 인내를 가지고 구해야 한다. 나타날 때까지 계속해야 믿음을 가지고 구해야 된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7-8)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눅18:1)

 

우리는 기도할 때 계속 믿음으로, 시인함으로 말미암아 천사의 통로를 늘 붙들고 있어야 한다. 마치 잠수부들이 물속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 밖에 있는 사람들이 쉬지 않고 공기를 불어 넣어 주어 그 사람이 숨을 쉴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는 것과 같다.

 

3. 기도실패의 이유

 

그러면 기도에 실패하는 이유? 첫째는 죄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시66:18) “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죄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영이므로 죄를 고백하고 버려야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1:9)

 

죄는 자의식이요, 세상의 영이다. 죄를 고백함으로써 이러한 영들을 버려야 한다. 그럴 때 마귀의 통로는 막히고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마귀의 통로는 주님의 피를 통해서만 막힌다. 오직 믿는 자에게만 주어진 권세이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약4:3)

 

정욕이란 땅엣 것을 구하는 것이다. 주님은 하늘의 것을 주시려고 하는데 땅엣 것을 구하면 어떻게 될까? 손해를 보게 된다. 하나님은 땅의 것도 주시지만 순서를 따라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에 나타난 주님의 뜻을 구해야 된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26:39)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목사님의 뜻을 알려면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야 알 수 있다.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대변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말씀대로 구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다.

 

기도에 실패하는 두 번째는 용서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6:12)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의식, 즉 사람의 영에 눌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영으로 움직이면 하나님의 영이 역사할 수 없다. 그래서 인생에서 얼마나 많이 손해를 보는지 모른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5:44)

 

만약 여러분이 싫어하는 사람으로 인해 마음이 상했다면 그것은 내 속에 사람의 영이 들어와서 역사한다는 뜻이다. 내가 누구보다 잘났다고 교만한 마음이 든다면 이것 역시 사람의 영 때문이다. 사람의 영이 들어오면 누구를 위해서 움직이게 되나? 사람을 위해서 움직이게 되므로 나에게 유익이 없다. 잠시 후면 없어질 기분과 무드만 조성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나에게 주신 축복은 무드적인 축복이 아니다. 실제적인 축복이다. 어린아이를 보자! 아무리 열심히 놀아도 실제적인 것을 만들지 못한다. 100% 무드와 기분으로 놀기 때문이다. 칭찬해주면 좋아하고 기분이 나쁘면 우리는, 어린아이는 사람의 영으로 움직이는 상태이므로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깨달아야 되는 것은 어린 아이 상태를 빨리 벗어나야 비로소 철든 사람이 되는 것이다. 철들었다는 것은 기분에 좌우되지 않고 현실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영으로 빨리 철들어야 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기분으로 교회 일을 하는 사람은 아직도 철이 덜 든 사람이다. 칭찬을 해주면 좋아하고 싫은 소리는 듣기 싫어하는 어린아이 상태에 놓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철이 덜 든 사람들의 돈을 울궈먹는 것이 세상의 사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누구를 미워하는 것은 상대방을 의식하는 사람의 영이고, 누구를 좋아하는 것은 내속에 있는 사람의 영이다. 절대로 사람의 영에 의해 놀아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천사가 역사하는 통로가 막히게 되기 때문이다.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는 세 번째 이유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

 

두마음을 품으면 믿음으로 활동할 수 없다. 한 가지 통로만 열어주어야 실상이 나타나나다. 그러므로 기도는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 주님은 ‘너 좋은 대로 해주리라’고 하시지 않았다. 언제든지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구체적으로 물으셨고 ‘네 말한 대로 될찌어다’라고 하셨다. ‘좋은 것 아무거나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기보다는 구체적으로 회개하고, 기도하고, 죄를 용서해야 구체적으로 축복을 받을 수 있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막9:24)

 

그런데 기도는 믿음으로 구해야 한다. 믿음은 성령이 역사하는 통로이다.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은 믿음의 표현이 아니다.

 

4. 기도의 내용

 

기도는 어떤 내용으로 해야 하나? 우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해야 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4:6)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히13:15)

 

항상 감사하고 찬송함으로써 주님 안에 구체적으로 거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감사와 찬송을 드리면 주님 안에 거하는 축복이 있다.

 

두 번째 죄를 고백하고 믿음을 선포해라!

 

죄를 고백하면 사람과 마귀의 통로가 끓어지고 천사의 통로가 열려지게 된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믿음을 고백하면 그를 위해 천사가 역사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주는 것이 중보기도요, 대속의 기도가 된다. 이처럼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이다.

 

세 번째 간구와 소원을 드려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7:7)

 

네 번째 다른 사람을 위해서 대속의 기도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딤전 2:1-2)

 

대통령을 비롯해서 우리나라 모든 사람들은 나와 관계가 있다. 생활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기 않으면 안 된다. 나라가 잘 되고 이웃이 잘 되어야 나도 잘되는 법이다. 남을 위한 중보기도는 나의 구원을 위한 한부분이다. 마귀는 물리치고, 천사는 움직이게 하고, 성령님은 나타나시게 하고, 사람들을 위해서는 중보 하는 것, 그것이 기도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축복기도해라!! 그 사람 대신 죄를 고백하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통로를 만들어 줍시다. 그래서 그들의 생활이 구체적으로 변화하도록 돕는 것, 그것이 중보기도이다. 기도하는 것은 하늘나라 공장에 취직한 것이다. 직장과 가정에서 일하고 돈 벌고 살림하고 정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기도로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하늘나라 기도공장에서 기도일꾼으로 성공해야한다. 기도를 하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5. 기타 조건

 

기도는 언제 해야 하나? 항상 해야 한다.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즉 항상 주님 안에 거하라는 뜻이다. 사람이나 돈 안에 거하는 것은 세상과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다. 새벽기도는 왜 유익하나? 주님께서 새벽에 기도하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전 세계에서 새벽에 기도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막1:35)

 

그리고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오전9시, 12시, 오후 3시에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한다. 우리도 정해놓고 기도시간을 가져야 한다. 또한 필요한 때면 언제든지 기도로 구해라!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행20:36)

 

이 구절은 바울이 에베소를 떠날 때 장로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기도하는 장면이다.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다. 기도의 장소는 어디가 좋나? 골방에 들어가서 혼자 기도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기도이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 그 삶의 영적인 상태가 드러난다.

 

혼자 있을 때 심심해서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는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은 혼자 있으라고 하면 막 울면서 야단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 앞에서는 누구나 유사하게 행동한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에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므로 각자 다르게 행동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혼자 있는 그 시간이 나의 인생을 좌우한다. 그 시간에 음란한 비디오를 보면서 죄악 된 상상을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찾느냐 등의 여러 가지 나의 선택이 나의 인생을 크게 좌우한다.

 

그러므로 주님과 동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복을 받는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빨리 그만두고 골방으로 달려가라! 조용히 쉬면서 주님과 같이 있기를 애쓰고 좋아하시기 바란다.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교회는 아버지의 집이요, 기도하는 집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우리가 훈련을 받고 성령 충만해지며 예배를 그리고 서로를 섬기는 가운데 자아가 깨어지고 권세 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함으로써 자기를 죽이는 훈련을 한다. 그래서 진정한 ‘나’를 만드는 공장이 바로 교회이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마14:23)

 

주님은 산에서도 기도했다. 주님은 어디에서든 늘 기도하셨다. 고넬료는 집에서 늘 기도했고 베드로도 피장 시몬의 집에서 기도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우리도 어디서든지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기도할 때의 자세는 무릎을 꿇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다. 주님께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26:39)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18:13)

 

이처럼 서서 기도하는 자세도 있다. 손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는 것이 정자세의 기도이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요11:14)

 

주님은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셨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5:7)

 

소리질러하는 기도도 있다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행4:24)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행4:29)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를 통해 유혹과 무서움을 이겼다. 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눌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1:2)

 

묵상하며 기도할 수도 있다. 묵상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장하고 복창하는 것이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13:2-3)

 

우리는 몸에 감각 의식과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사람 의식, 신을 의식하는 신 의식도 있다. 다른 사람의 의식을 차단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금식기도이다. 금식을 하면 영력이 강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 의지를 하나님 한 분에게로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람은 혼자 있는 훈련을 많이 할수록 그만큼 사람과의 관계에서 벗어난다. 의식을 완전히 한쪽으로만 집중시키면 반드시 하늘나라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 금식기도는 우리 피 속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해 주므로 건강에도 좋다. 또한 식욕이 차고 넘치면 성욕이 강해진다. 배가 고프면 절대로 성욕이 나타나지 않는다.

 

오늘날 성이 문란하여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는 다 배가 불러서 생기는 문제들이다. 금식을 하면 성욕만아 아니라 명예욕과 같은 자의식도 소멸된다. 내가 지금 당장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옆 사람이 뭐라고 하든지 의식되지 않는다. 금식을 하면 모든 욕망을 억제하고 절제할 수 있다. 이처럼 금식은 의지의 훈련이다.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삼상1:11)

 

서원기도도 있다. 서원기도는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이다. 또한 방언기도가 있는데 은사로써 기도하는 것이다. 방언은 세상 의식을 차단하는 기도이다. 말은 영을 전달하는 통로로써 우리 속에 들어가면 생각이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말을 쓰면 말 자체에 세상의 생각이 묻어 들어오게 된다.

 

‘아버지’라는 단어를 쓸 때 평소에 아버지로부터 늘 고통을 당하거나 버림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 단어에 대한 무의식적으로 거부감을 가질 수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가질 수가 있다. 우리가 세상에서 쓰는 말을 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온전하심을 다 표현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세상 말을 가지고 표현하면 세상의 감이 가미되지 않을 수가 없는 법이다. 온전히 하나님의 영적인 것을 전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방언은 이런 것이 차단된 무공해 기도이다. 세상 말에 섞여있는 잘못된 영들을 모두 제거하여 순수하게 기도함으로써 응답을 받는 것이 방언기도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많이 하는 것이 유익하다. 방언을 통해서 천사가 역사하며 세상의 것을 차단시켜, 성령님이 원하시는 대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5장 성경 - 구원의 안내자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과 성취, 완성에 관하여 쓴 책이다. 성도의 신앙은 성경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믿음이 달라진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기 원한다면 주님께 믿음을 구해야한다.

 

그러면 성경이 세상 책과 어떻게 다른가, 부터 함께 나눠보도록 하겠다. 성경은 이 세상의 책들 가운데 가장 범위가 큰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시간적으로도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포함하는 매우 방대한 책이다. 성경은 이처럼 방대한 책이면서도 인도에 대한 분명한 진리를 단순하게 담고 있는 책이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간단한 책이 라고도 할 수 있다. 성경은 인간의 일생이 다 들어가 있으므로 얼마나 신비한 책인가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게 된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다. 성경은 책 속의 책이다. 하나님은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시고 모든 구원을 이루시려고 하는 전체적인 섭리 가운데서 역사를 진행시켜 오셨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 인간에게 약속을 주셨다. 약속을 한다는 데서 하나님은 다른 신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일 먼저 자기 자신과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이어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아담이 타락하고 난 후, 뱀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

 

이것은 에덴동산의 복음이며 약속이다. 인류가 죄로 인해 타락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만 결국 여자의 후손이 원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러한 언약들이 성경 역사 전체에 흐르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약속은 창세기 12장 1절에서 3절에 나온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12:1-3)

 

하나님은 처음에는 자기 자신과 그 후에는 사람과 그 다음에는 아브라함과 약속하셨고, 계속 역사가 흐르면서 다윗과도 약속하셨다. 그리고 신약에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계신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눅22:20)

 

성경은 하늘나라의 약속으로부터 시작해서 선지자와 예언자들을 통한 약속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예언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을 보여준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계21:5-7)

 

이처럼 약속을 마지막까지 이루시는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성실히 이루시는 분이다. 그래서 성경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은 내가 믿는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신실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세상에서의 약속도 다 이룰 수는 없다. 환경과 같은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인간은 모든 약속을 다 이루어 낼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 이루신다. 그 분은 창조를 통해서 약속을 이루어가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무책임하지 않으신다. 성경은 이름 자체가 약속이다.

 

구약은 주님이 오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예언자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고 신약은 주님이 오셔서 말씀대로 탄생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이루신 것이다. 마1장애 족보가 나온다. 아브라함과 다윗 그리고 열 왕들과 약속하셨는데 주님은 그때마다 천사나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약속하시고 이루셨다. 마 1장의 ‘낳고 낳고...’를 반복하는 이유는 구약에 나온 모든 약속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성경은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상기시키고 주님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8:17)

 

주님은 4복음서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사도행전에서 다시 오실 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8-11)

 

이렇게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사도행전에 성령께서 오신 것은 이미 4복음서에 주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복음서는 땅에 계신 주님을 사도행전은 영으로 오신 주님을 기록한 성경이다. 로마서 이후의 모든 서신서는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 말씀하며, 특별히 에베소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성경의 제일 마지막인 요한계시록은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21:1)

 

이 말씀은 완전히 새로운 창조가 완성될 것을 미리 약속하고 계신다. 창세기1장에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에는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셨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빛이 있으라고 명하셨고, 낮과 밤이 생겼다. 낮은 빛으로 만들어졌고 절반은 밤이 된 것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1장에 가면 밤이 없어진다. 바다 역시 창세기 1장 2절에는 궁창 아래의 물과 위의 물로 나뉘었다고 되어 있지만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바다가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다 밑에는 음부의 권세가 있기 때문에 밤이 없어지면서 동시에 바다도 없어지는 것이다. 어둠이 사라지므로 어두움을 비추던 해와 달도 필요 없게 되며, 사시사철의 계절도 없어지게 된다. 오직 주님이 영원한 빛으로써 비추시기 때문이다. 해와 달을 사시와 연한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시간의 흐름과 연관되는 것이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이 생기는 시대에는 시간도 없어지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은 점점 창조를 완성해 가시는 분이다. 사도바울은 인간이 늙어 가는 것으로 보지 않고 점점 속이 채워지고 새로워지는 것으로 보았다. 우리도 하나님을 쳐다봄으로써 소망이 생긴다. 우리 하나님은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욱 좋아지게 하시는 소명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좋아지고 잘되는 것이지 안 되는 것은 없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롬15:13)

 

1. 성경의 저자와 쓰여진 기간

 

성경은 모세로부터 시작해서 사도 요한까지 약1500여 년간 쓰여진 책이다. 이중에서 창, 출, 레, 민, 신의 다섯 권을 모세오경이라 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이미 믿고 알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이야기를 모세가 쓴 것이다. 마태복음도 마태가 늘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하신 일들을 보고 쓴 것이다.

 

기간은 1500여 년에 걸쳐 쓰여졌지만, 그 내용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를 다 포함하는 일관된 맥락을 갖고 있다. 성경은 또한 역사 지리학적으로도 여러 나라의 문화와 시대를 배경으로 쓰여진 책이다. 특별히 출애굽기를 쓴 모세는 애굽(이집트)의 문화 속에서 자라난 사람이다. 그리고 이 외에 성경은 앗수르(앗시리아), 바벨론, 바사(페르시아), 희랍(헬라), 로마시대 등의 문화적 배경 하의 여러 저자에 의해 쓰여졌다.

 

2. 성경의 특징

 

성경이 다른 책들과 다른 점은 성경의 각 권마다 동일하신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쓰여졌다는 점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의 감동하심과 안목으로 쓰여졌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은 사건을 보고도 각자가 받는 감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르게 표현하게 된다. 그러므로 완전히 객관적일수가 없다. 이는 세상의 경제학, 정치학, 교육학, 문학들이 어떤 한 가지 면을 놓고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달리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같은 사과나무 하나를 놓고도 문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고 과학적으로도 측정할 수 있으며, 식물학적으로 분류할 수도 있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 가운데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 할 수 있겠나?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세상 학문에 비추어서 뜯어 맞추려고 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과학적, 역사적으로 말씀을 증명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 그대로 믿으면 되는 것이다. 증명이 되면 믿고 되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과학이나 역사를 더 믿으려는 태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학적으로 풀리지 않는 것이 없다. 돈 문제, 건강문제, 까지도 해결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감을 따라서 믿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성경의 주제는 처음 저자인 모세로부터 마지막 저자인 요한에 이르기까지 통일성이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로 시작해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씌여 있는 성경은 하나님이 주제가 되시기 때문에 전체적인 통일성을 갖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대와 인물이 달라도 그 중심은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는 그 어느때나 똑같은 감을 가지고 똑같은 은혜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현실에서 신자의 체험으로 확증된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히2:3-4)

 

주님은 말씀하신 바를 이루시는 분이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체험할 수 있다. “야! 내가 믿어보니 이렇더라” 성령께서 우리가 확증을 갖도록 도우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같이 현실에서 체험할 수 있다. 체험이라는 것은 ‘안다’는 뜻이다. 여호와를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현장이고 그런 체험적 현장을 표현한 것이 바로 성경의 이야기들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야말로 인간의 체험 중에 가장 궁극적인 체험이다. 궁극적이지 않다는 것은 지나면 잊혀진다는 뜻이다. 어려서 소풍가던 때의 기억들, 학생시절의 체험들....체험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다른 더 깊은 체험들이 다가오면서 그런 것들은 차츰 잊혀지게 된다. 점점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나에게 가장 깊은 체험만 남게 된다.

 

인생을 살다보면 그 순간 가장 좋았다고 생각되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희미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오신 체험은 절대로 희미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비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구원받은 사실은 꿈에서 받은 것도 책에서 본 것도 누구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도 아니다. 분명하고 바꿀 수도 없으며 확실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체험은 그만큼 확실한 것이다.

 

하늘나라는 실상이다. 다른 것은 모두 희미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력이나 환경에 대한 감이 아닌 참된 생명으로 살게 된다.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인 성경은 일단 완성된 후에 다시 수정하거나 보완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성경이 완성된 후 2000년여 년 간 수정되지 않았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24:35)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22:19)

 

세상의 모든 책들은 수정되지만 성경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다고 말씀한다.

 

3. 성경 읽을 때의 주의 할 점

 

성경을 읽을 때에는 다음가 같은 것들을 주의해야 한다. 먼저 성경에서 예수님의 구원과 인격을 보어야 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5:39)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통해서 영생을 얻는 줄로 알았지만 사실은 성경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다. 성경의 모든 부분 부분이 전부 주님의 옷자락이며 발자취인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요16:12-14)

 

예수님의 것을 알리는 것이 성경이다. 신약성경은 예수님당시에 씌여진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오신 후에야 비로소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임이 확증되었다. 또한 먼저 믿는 자들로부터 확증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히2:3)

 

성경공부는 영의 통로를 열러 주기 위한 것이다. 먼저 믿은 사람들이 후에 믿는 사람들을 가르침으로써 믿음의 통로가 열려진다. 영적인 체험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영적인 체험을 줄 수가 없다. 성경공부는 단순히 말 자체를 전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전달해 주는 것이다. 또한 믿고 배운 것을 순종함으로써 실제적인 체험을 얻는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9:20)

 

배운 것을 지켜야 체험화가 된다. 말씀을 내 생활 속에 집어넣어야 체험의 연속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체험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체험이다. 영적인 체험은 내 안에 있는 거짓 체험, 거짓 추억, 가치 없는 것들을 몰아내준다. 이것이 성경을 통해 일어나는 역사이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전4:19-20)

 

능력과 같은 실제적인 체험이 매우 중요하다. 나의 구원과 관계없는 사색은 하지 말아야 한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 12:3)

 

마귀는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감을 전달한다. 마귀의 감을 받는 것이 세상 생각이고, 성령의 영감을 받으면 하나님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믿음이다. 세상의 영감을 받으면 세상에 대한 방법이 생겨난다. ‘무엇을 해서 둔을 벌어야겠다’ ‘어떻게 해서 재미를 보아야겠다’는 것들이 다 마귀의 영감이다. TV는 무슨 영감인가? 인조 영감이다. 사람이 만든 영감이다. 뉴스도 세상 이야기이므로 마귀의 영감이다. 매스컴에서 ‘핵문제를 어떻게 할까?’ ‘어떤 정치인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마구 떠들어대지만 어디 그대로 되나? 사람들은 심각하게 열심히 듣지만 실제적으로 제대로 되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물론 드라마나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인조 영감을 자꾸 받으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감이 차츰 무디어진다. 조미료를 넣은 음식을 계속 먹으면 조미료가 없는 음식은 맛이 없어 못 먹는 것과 같다. 고기 맛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가미하지 않고 고기 맛만 즐기는 사람들이다. 이처럼 현실은 인조 영감의 재료이다. 답답하고 외롭다고 TV를 계속 보다 보면 조금은 개운할지 모르지만 TV를 뜨고 나면 다시 답답하고 적적해지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영혼을 망치게 된다. 자기 영감을 망치고 나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인조영감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속임수에 잘 넘어간다. 다른 사람의 속임수 자체가 인조 영감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얼마 벌게 해줄 테니까 얼마 투자하시오’하는 것도 마치 TV에서 주는 감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여자의 화장으로부터 사람의 옷차림새, 사회의 모든 생활이 다 인조 영감이다. 자기 본색을 그대로 다 보여주는 사람이 있나? 모든 인조적인 것으로 가리고 위장해서 좋게 보이려고 하지 않는가?

 

이런 것에 지나치게 맛이 들린 사람은 실제적인 것을 볼 수가 없는 법이다. 그래서 나의 인생이 손해를 보게 된다. 평소 어떤 영감을 받느냐? 여러분의 영혼의 기계를 어떻게 돌리느냐에 따라서 생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좌우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이 아니고 나의 구원과도 관계없는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고 말할 필요도 없다.

 

성경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관여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저는 목사로서 교인들의 죄에 대해서 말을 하지만 목사가 아니라면 굳이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구원도 다 이루지 못하면서 무슨 여유가 있어 시시 쿨쿨 세상 이야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말 하면서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들은 쓸데없는 사색이나 명상, 취미생활도 가능한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책도 저자의 영감을 전달하는 것이므로 분별하여 읽지 않으면 나의 인생과 생각이 혼미해지게 된다. 우리가 가진 한없는 의문과 호기심은 부활 후에는 모두 해결된다. 세상에 사는 동안 궁금한 것은 이루 말 할 수없이 많다. 예를 들어 ‘삼천궁녀는 정조를 지키려고 당당하게 자살을 했는데 그들은 천국에 갔을까, 지옥에 갔을까?’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지 않는가? 이런 의문들은 끝도 없다. 그런데 이런 의문들의 대부분이 자기 믿음과는 전혀 관계없는 생각들이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다니다가 누구누구의 행동과 말 때문에 시험에 들어서 ‘이제 더 이상 이 교회에 못 다니겠다.’고 했다면 결국 누가 손해인가? 그렇게 행동한 사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나와 사돈의 팔촌도 아닌데 그가 뭐라고 했다고 해서 실망한다면 결국은 자신의 영혼만 손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구원과 관계없는 것에 관심을 두지 마라라!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할머니가 이빨이 다 빠진 것을 보고‘어차피 나도 저렇게 이가 빠지겠구나.’ 하면서 ‘이제부터 젖도 아무것도 안 먹겠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이겠는가? 세상에서 하도 많은 인조 영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교회 들어오면 사람들이 좀 달라 보이고 무뚝뚝해 보이고 무언가 세련되지 못한 어수룩한 사람들처럼 보이다. 이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는 훈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인조 영감과 하나님의 영감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나를 위해서 다른 것은 포기해야 한다.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두 가지를 동시에 다 할 수는 없다. 성경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하고 나면 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13:9-10)

 

예언 기도를 받아 보면 예언은 부분적인 것이므로 여러 사람의 예언이 다를 수가 있다. 특히 인간이 하는 것은 모두 부분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중심에 모셔야지 사람들을 가운데에 놓으면 반드시 비뚤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부분적인 것을 주실까? 부분적인 것을 통해서 우리는 더 나은 것을 바라보고 성장할 수 있는 축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부분적인 것들을 받은 여러 사람이 주 안에서 하나로 섬김을 통해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크신 뜻이기도 한다.

 

부분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성숙해져야하고, 공간적으로는 서로를 섬겨야 된다. 나 혼자로는 절대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상대가 주일학교 어린 학생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 목사인 저도 은혜 받은 성도를 보면서 ‘아, 이렇게 설교하니 저렇게 은혜를 받는구나!“ 하면서 깨닫게 된다. 목사와 성도도 이처럼 서로의 부분적인 것을 통해 보충 받는 가운데 온전한 구원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4. 성경의 내용

 

여러분 “3곱하기9=27‘이라고 응용해서 외우고 있는 바와 같이 성경은 구약이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이다. 창세기 출, 레, 민, 신의 5권으로 시작되는 모세 오경이 성경의 첫 부분이며 이 모세 오경은 성경 전체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역사서는 여호수아서에서 에스더서까지로 이스라엘에 대한 율법서의 예언이 역사의 진행에 따라 이루어진 것을 쓴 것이다. 율법서의 축복대로 순종하면 이스라엘이 복을 받았고 불순종하면 기록된 대로 저주를 받은 역사의 사실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시가서라 할 수 있는 욥,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의 5권은 우리 인간의 영혼 안에서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하나님의 은혜들을 아름다운 언어들로 표현하고 찬양한 성경이다.

 

이사야서에서 말라기서까지는 예언서로서 모세 오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기본으로 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계속적으로 상기시킴으로써 회개시키고, 절망가운데도 하나님의 약속과 위로를 선포한 성경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원리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율법서이고, 그 이후 시간 안에서 역사적으로 그 뜻이 성취된 것을 기록한 것은 역사서이며 인간 영혼 속의 주관적인 기쁨과 슬픔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시가서이고, 우리 현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예언서이다.

 

이처럼 구약을 개관하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성취되고 현실 가운데 살아 움직이는 말씀으로 임한다는 사실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성경 그 자체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 속에서 성경을 읽고 배울 때 오늘날도 분명히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신다. 이것이 소위 예언의 은사이다.

 

신약성경은 복음서를 출발로 하는 주님의 생애와 그분의 약속과 그 성취를 바탕으로 한다. 사도행전은 소위 구약의 역사서와 같은 것으로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실제 사실을 기록한 것이고, 서신서는 부활하사 하늘에 오르셔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주의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 그리고 우리를 위해 능력을 베푸시는 주님을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구원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러 완성될 것을 예언 한 것이다.

 

5. 성경을 읽는 순서

 

그러면 성경은 어떠한 순서로 읽는 것이 좋을까? 개인적이 형편에 따라 여러 가지로 읽을 수 있다. 일반적인 방법을 굳이 제시하자면, 요한복음부터 읽고 사도행전을 읽고 계속적으로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을 읽어가는 것과 구약의 경우 창세기부터 읽어가는 방법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제6장 성령님 - 구원의 어머니

 

 

1. 구속을 위한 삼위(성부, 성자, 성령)의 하신 일

 

하나님의 구원은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하여 나타나고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지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에 실제적으로 구원이 나타나게 된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신 위로자이시며 선생이시며 인도자이다. 성령은 영으로 믿는 자 속에 오신 위로자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예수님은 온전한 사람으로 오셔서 태초에 아담이 실패한 구원을 완성하신 분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하늘의 생명을 받으며 살게 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이 땅에 온전한 통치를 이루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사명을 사람에게 주셨다.

 

그러나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이 아닌 자신의 의지대로 판단하게 되어(사람의 영은 본래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없으며, 다만 선택만 할 수 있음에도 불고하고) 마귀를 불러들이고 말았다. 마치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어 죄인의 상태로 전락한 것이다. 그 결과 하늘의 생명에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온전히 자기를 비우시고 이 땅에 오셔서 종의 형체를 가지셔야만 했다. 그분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온전히 하나님 앞에 순종하셨으며, 온전히 하나님의 생명을 받으시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심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사람을 이루셨다. 이로써 주님은 모든 땅 위의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완성하신 것이다.

 

2. 성령께서 하신 일

 

성령은 주님이 하늘에 오르신 후 우리 속에 오신 예수의 영으로 본래 아담에게 하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모든 뜻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는 분이다. 성령은 우리 속에 들어오신 주님의 영적인 생명이다. 또한 성령은 우리의 선생이 되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영은 의식이다. 깨닫게 하는 생명이다. 사람은 의식을 통해서 내 자신을 선택할 수 있고,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가 있다. 성령은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영의 생명이며 인도자시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16:13)

 

사람의 생명은 종합적인 생명이다. 우리 주변의 환경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나를 중심으로 전부 합쳐져야 나의 것이 된다. 이것이 초월적인 생명이다.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생명이 초월적인 생명이며, 이것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성령은 장래 일을 우리에게 알리시기도 한다. 우리가 계속 미래를 통해 성장하면 옛날에는 모아지지 않았던 것이 점차 한쪽으로 모으는 결과를 얻게 된다. 성령은 이러한 결과를 낳도록 순간순간마다 우리로 하여금 선택하도록 도우시는 분이다.

 

우리의 인생은 마치 여러 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아서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것은 멀어지고, 저것을 가지면 이것은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속에 오시면 모든 것을 다 선택할 수 있도록 한 점으로 우리의 인생을 모아 주시므로 시간이 갈수록 점점 하나가 되게 해주신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장래 일이다. 주님 안에 있으면 시간이 가면서 점차 구원이 완성된다. 참된 미래는 과거와 현재를 다 해결할 수 있는 선택이 가능한 미래를 의미한다.

 

믿지 않는 사람의 미래는 어떠한가? 보이지 않던 문제들이 계속 나타나는 미래이다. 살면 살수록 더 많은 속에 이르게 되고 나중에는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가 된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인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받으며 살아야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반드시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고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주님의 영을 허락하신 이유이다.

 

나의 노력으로는 나를 향해서 모든 것을 모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직장과 아파트와 돈을 모두 다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애만 쓰고 있을 뿐이다. 어떤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나면 또 다른 것을 잃어버릴 뿐이다. 결국 자꾸 흩어지는 것이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1:4-5)

 

하나님은 만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 하나님의 구원은 주권적인 구원이다. 반면 사람은 종속적이다.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나야 비로소 수습할 수 있는 존재이지,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준비할 수 없는 수동적인 존재란 뜻이다. 그러나 감을 잡은 사람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도 미리 선택할 수 있는데 이것을 가능케 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시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만세 전에 미리 감을 잡으셨다. 그래서 모든 것을 미리 아신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8:29-30)

 

하나님은 이 말씀처럼 미리 아시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셨다. 만세전에 우리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고, 그 택하심 안에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것은 모든 나의 구원과 축복을 위한 것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현재일, 장래일 그리고 죽음마저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방편이다. 우리를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에서 멀어지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2:5-6)

 

하나님의 말씀에는 축복과 저주가 모두 담겨있다. 그러나 우리를 속량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의한 저주는 없애시고 축복의 말씀만 이루어지게 하셨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주님이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이미 하늘나라와 땅을 소유하셨으며 현실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주님의 실제적인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이처럼 단번에 나의 현실 안에서 구원을 이루신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현재를 거듭나게 하시고 신자 속에서 늘 일하시는 주님, 나에게 직분을 주시고 성화시키시며 마지막 날에 부활시키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3:5)

 

성도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다. 위 말씀에서 물은 침례(세례)와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의미하는데,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이 거듭나고 영이 거듭난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분이 성령이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성령은 우리를 장차 부활시키신다. 성령은 마지막 날에 우리를 부활시킬 뿐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 다 완성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이루신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성령은 천지와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께서 모든 창조에 함께 사역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104:30)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받아 영으로 사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주님의 생애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탄생하시고 성령으로 능력을 행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1:1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12:28)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1:4)

 

이처럼 예수님은 성령으로 부활하셨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2:37)

 

성령은 불신자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는 분이시다. 성령은 죄를 생각나게 하셔서 회개하게 하신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16:8-9)

 

살인, 강도와 같은 일반적인 죄들은 성령에 의하지 않아도 죄라는 것을 알고 있다만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깨닫게 되는 죄이다. 성령을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신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3. 신자 속에서 일하시는 성령(현재 하시는 일)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저주로 예수님은 저주로 말미암아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것이라는 사실은 오로지 성령을 통해서만 깨달아지는 사실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14:16)

 

성령은 또한 우리 속에서 일하신다. 사람의 영은 임재 하는 특징이 있지만 일회용이며, 오랜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없어진다. 그러나 성령은 영원히 우리 속에 와 계신 의식이므로 이 의식을 우리에게 넣어 주셔서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내 영혼이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내 속에 와서 나를 영원히 살게 만드는 JR시 구언이다. 그러므로 일시적인 것은 하나님의 의식이 아니다. 일시적인 것은 지나고 나면 빈 것으로 남습니다. 여여원한 궁핍 속에 살게 되는 것이 버림받은 영혼이요, 멸망 받은 영혼이다.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9)

 

사람은 감각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 몸의 오감을 통해서 들어오는 환경의식을 말한다. 그리고 자기의 식이 있다. 이것은 사람을 통해서 나를 느끼게 되는 의식인데, 이 자기의식에 하나님의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초월의식, 즉 신 의식을 갖게 된다. 이 초월의식을 통해 내 자아를 죽을 수 있고, 감각적인 것을 승화시킬 수 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롬8:16)

 

영이란 의식이므로 사정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을 받으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고 하나님의 영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내 안에서 증거 하신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고후5:5)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러므로 물질도 필요 없고 사람에게서 의식을 공급받을 필요도 없으므로 다른 사람도 필요 없게 된다. 그곳에서 우리가 물질적인 몸과 환경적인 몸을 벗어버리고 신령한 몸을 갖게 되는 것이 곧 부활이다. 부활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올챙이는 물속에서 살기 때문에 몸이 물고기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지만 개고리가 되기 위해서는 꼬리가 없어지고 다리가 생긴다. 개구리로 몸이 물 밖에서 살 수 있도록 바뀌는 것이다. 부활도 이와 같다. 이처럼 부활은 확실한 것이다. 그런데 성령이 이 부활을 보증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2:12)

 

늘 말씀드리지만 성경에서 ‘안다’고 하는 것은 ‘체험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이다. 초자연적인 생명을 경험함으로써 감각 의식과 자기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감각 의식과 자기의식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들이다. 할렐루야!! 이것을 벗어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문제를 해결 받게 된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엡3:16)

 

성경이 말하는 겉 사람은 감각 의식과 자기의식을 한다. 속사람은 하나님을 상대하지만 겉 사람은 환경과 다른 사람을 상대하다. 성령은 우리의 속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날마다 속사람이 강건해짐으로 인해 겉 사람을 벗어나도록 하시는 것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말씀은 기억해 두는 것이 아니라 의식화되어야 한다. 수영의 원리를 깨닫는 것과 실제로 수영하는 법을 체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많이 배워도 나의 영 안에 들어와서 영화되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않는다. 말씀은 성령을 통해서 내 의식 속에 들어오게 된다. 들어오신 성령을 통해서 비로소 내가 선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지혜이다 요한복음 16장 13절 말씀과 같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내 속의 것과 밖의 것이 다 하나가 되게 하시는 분이 진리이신 성령이다.

 

우리의 생명은 의식적인 생명이다. 의식이란 밖의 것과 안의 것을 하나로 연결 통합하는 것을 말한다. 생명은 밖의 것을 흡수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자기 속에서 필요 없는 것은 밖으로 내보낸다. 그러므로 안과 밖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생명이라고 할 수 없다. 이처럼 모든 것을 다 내 것으로 넓혀 가는 것이 곧 진리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8:26)

 

성령은 우리가 기도하도록 도우신다. 성령께서 우리 대신 간구해 주시는 것이 바로 방언기도이다. 우리가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 성령께서 간구하도록 도와주신다. 기도는 우리의 구언을 이루기 위해서 이루지 못한 것, 미처 깨닫지 못한 것, 알지 못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믿음의 시고와 방언기도를 통해서 기도하게 하시는 것이다 기도는 영이 역사하는 통로를 만드는 것이다. 그 통로를 통해 서영과 천사가 역사하심으로 현실의 구원을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 기도이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행13:2)

 

성령은 우리 성도에게 직분을 주신다. 직분은 영어로 “OFFICE”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하늘나라의 일을 부분적으로 맡기신다. 이 직분 외에 또한 은사를 주사 서로 섬김으로써 유익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마귀를 이기게 하고 결과적으로 주님의 형상을 본받도록 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전12:4-11)

 

성령의 나타남을 통해서 마귀를 이길 수 있다. 마귀도 지, 정, 의가 있기 때문에 지적으로 미련하게 만들고 의지적으로 병들게 만들고 정적으로 상처받게 만든다. 그러나 성령께서 지적으로 병든 것을 고쳐 지혜롭게 하는 것이 말씀의 은사이고, 의지적으로 믿음을 갖게 해서 병을 고치는 것이 믿음의 은사이며, 성처 받은 심령을 위로 하는 것이 사랑의 은사이다.

 

성령은 이처럼 우리의 지정의를 고쳐서 인격을 재창조하신다. 이것이 은사이다. 성령이 나타날수록 우리의 인격은 계속 변화된다. 그러면 성령이 없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소위 교양이라는 것이다. 교양이란 다른 사람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못하고 억제하는 것이다. 사실상 세상 적으로 교양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 억제로 인해 눌려있는 셈이다. 세상에서 많이 배웠다, 얌전하다, 점잖다, 는 말을 듣는 사람은 눌려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사람의 영은 사람을 누를 수밖에 없다. 성령은 우리를 누르지 않도록 우리의 인격이 풍성하도록 만드시는 분이다. 위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성령이 나타나지 않고 내 의식이 나타나면 상대방을 누르게 된다. 상대방을 누르는 사람은 부담을 주는 사귀기 힘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누르는 동안 속이 시원할지는 모르지만 결국 반격을 받아서 감옥에 가거나 경찰서에 드나들어나 손해를 배상해야만 하는 경우도 감수해야 한다.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다 표현을 버리면 반드시 다른 이에 게 부담을 주고 손해를 끼치게 되는 법이다.

 

교양 있는 사람이란 자기 것을 다 표현하지 않고 자신을 감싸고 있는 사람이다.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을 ‘점잖고 얌전한 사람’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렇게 교양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내 것으로 슬픔과 우울함 그리고 허무감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성령의 나타남을 통해서 이와 같은 것을 막을 수 있다. 이러한 인간 생활의 한 부분만 보더라도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축복이 되는지 알 수 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엡5:18)

 

성령의 충만함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의식 속에 주님이 오시면 성령이 되시고 사람이 들어오면 사람 의식이 되며 돈이 들어오면 세상 의식이 된다. 성령 충만함은 주님이 우리의 의식 속에 충만한 것을 말한다. 주님이 들어오시는 것만큼 천사들이 수종들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만큼 마귀들이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의 감화를 말씀을 통해 계속적으로 받을 때 몰아낼 수가 있다.

 

교회 안에서 주님이 세우신 권세 자를 통해 자기를 부인하는 것만큼 자아가 죽고 세상의 영이 빠져나가며 성령의 감화를 받고 마귀들이 빠져나간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 인간 공해와 물질 공해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 받게 되며 내 속에 자유함을 얻게 된다. 돈이나 사람에게 구속받지 않고 참으로 자유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이다. 돈에 취하면 돈의 영에, 사람에게 취하면 사람의 영에 사로잡히므로 반드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열매는 무엇인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2)

 

사랑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다. 고전13장에 나오는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성령의 열매설여의 열매란 한마디로 우리의 인격ㄱ에서 주님의 인격이 풍겨 나오는 것을 말한다. 자의식이 나오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 부담을 준다. 갓난아이는 늘 부모에게 부담을 준다. 나가나 들어가나 늘 주위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친다. 어린아이는 자의식밖에 없으니까 늘 부담을 주는 것이다. 어른이라 할지라도 자의식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상대에게 늘 부담을 준다. 그러나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늘 환한 빛을 발하고 은혤ㄹ 끼치며 그를 생각만 해도 푸근한 기분이 느껴진다. 이러한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다. 세상에서 점잖은 사람들은 사실 부담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의식으로 뭉쳐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다. 성령은 우리 인격을 성화시키신다.

 

4. 성령에 대한 경고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4:30)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 것이 성령을 근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부모를 자꾸 근심시키는 자식은 미련한 행동을 하게 되고, 목사님을 근심시키는 성도는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성령이 내 속에서 근심하시면 마음이 답답하고 기쁨이 사라진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 기쁨이 없는 사람은 여러분이 답답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 속의 성령이 답답하게 생각하시는 것이다. 성도는 항상 기뻐해야 하는 것이 정사이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살전5:19)

 

성령을 소멸해서는 안 된다.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은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을 하셨는데도 자기 고집을 부려서 영의 감화가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계속 불순종하면 영의 감화가 점차 없어지게 되고, 결국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는 빨리 빨리 순종해야 한다. 순종을 하면 성령께서 기뻐하신다. 평소에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자꾸 바치고 헌신하는 것만큼 내가 죽게 되므로 성령께서 점점 내 안에 충만히 거하시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훈련을 계속하다 보면 성령께서 유사시에 말씀하신다. 그러나 평소에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면 꼭 필요한 유사시에는 성령께서 아무 말씀도 안하신다. 결국 미련해진 대가로 자신만 손해 보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과 나는 유사시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잘되어야 한다. 평소에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바치고 늘 자기를 부인하면 유사시에는 내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척척 해결해 주시므로 잘 되는 법이다.

 

그러나 평소에 아무 일 없다고 해서 직장 일에만 열심을 내고 ‘십일조나 하면 되지’하는 적당주의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유사시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기도해 주세요.’ 라고 하게 된다. 평소에 미리 잘 해두시고 자기를 부인해서 손해를 보세요. 평소에 낮아지고 순종하는 것이 헌신이고 축복이다. 유사시에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

 

개개인의 인생이나 사회, 그리고 한 가정의 내력을 보면 언제든지 결정적인 전환점이 있다. 반드시 변화를 일으키는 큰 일이 한 번씩 일어난다. 그러므로 평소에 주님을 잘 섬겨야 한다. 유사시에는 주님께서 맡아 주시니까 우리는 평안할 수 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행5:3-4)

 

성령을 속이지 말아라! 거짓말은 자신의 영을 혼란케 하고 치명적인 영적손해를 끼친다. 왜? 거짓을 말하는 마귀의 영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제거하는 방법 역시 죄와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죄를 자꾸 고백할 때 내 속에서 역사하는 마귀의 통로가 끊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12:31-32)

 

성령을 훼방하지 말아라!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악한 영인 마귀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마귀의 편을 드는 것이다. 마귀는 어떻게 역사하나? 나를 내세우고 유익을 구하려 할 때 마귀가 역사한다. 마귀의 역사를 막으려면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나의 유익보다도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구해야 한다. 내가 잘 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유익을 먼저 구해야 한다. 내가 잘 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세로 살면 절대로 마귀가 역사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겸손이다.

 

아무리 똑똑하고 성경지식이 많아도 나의 유익을 먼저 구하면 미련하게 된다. 솔로몬이 좋은 예이다. 그가 얼마나 지혜로운 왕인가? 그러나 그는 자신의 쾌락과 유익만 구하다가 제일 미련하게 되지 않았나? 그가 말씀을 몰라서도 아니고 머리가 나빠서 그런 것도 아니며 학문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안다. 자신의 쾌락과 유익만 구하는 것이 종합적으로 그를 미련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저절로 지혜로워진다. 배움이 적어도 괜찮다. 하나님을 잘 섬길 때 하늘의 지혜가 임한다. 주님을 따라 나의 이웃을 잘 섬기려고 애쓰다 보면 저절로 영혼이 깨끗해지고 지혜로워지는 것이다.

 

 

제7장 신앙생활의 성장단계

 

 

믿음의 성장 단계를 바로 아는 것은 교인들의 바른 믿음의 성장에 매우 중요하다. 왜? 이 단계들을 모르면 신앙생활에서 우왕좌왕하거나 똑같은 일을 자꾸 반복하다가 믿음이 잘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다.

 

1. 말씀을 듣는 단계

 

제일 먼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 그 후에 말씀을 듣는 단계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

 

사람의 말은 영을 전달하는 통로이며 말은 영이기 때문에 말을 들으면 영을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들으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전달되어진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벧전1:23)

 

하나님의 말씀은 씨와 같아서 우리 영혼 속에 들어가 심겨진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말씀을 계속 듣다 보면 점점 믿음이 생기게 디는 것이다. 전도할 때 전도지라도 계속 전해주다 보면 그들이 어떤 이유로 전도지를 보든 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이 심령 안에 들어가서 남아 있다가 그것이 성령께서 감화를 주시는 때에 깨닫게 해주는 씨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귀는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계속 쪼아 먹는다.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막4:15)

 

2. 믿음의 단계

 

말씀을 들었는데도 우리 속에 감동이 없게 되면 영이 전달되지 못하고 그저 소리로 끝나게 된다. 우리 속까지 말씀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마귀가 이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잘 자라려면 성경 공구를 통해서 말씀을 계속 받아야 한다. 말씀이 들어가는 것만큼 믿음이 자라나게 되고 생각과 마음이 변하게 된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3:15)

 

성경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주님을 만남으로써 구언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성경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 다음과 같은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6)

 

주님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면 성령의 검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계속 회개시키고 책망하시며 바르게 이끌어주시고 의로 교육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만드시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도록 도우신다는 말씀이다. 지속적인 성경 공부는 우리를 온전케 하는데 반드시 필수적이다. 한번 배웠다고 해서 ‘나는 공부했으니까 다시 배우지 않아도 된다.’라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똑같은 것이라도 계속 반복해서 배움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변화를 체험하게 되고 생활이 달라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인간관계에서 ‘나, 그 사람 잘 알아. 내 애인이니까’ ‘그 사람 내 남편인데 내가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라는 식으로 현재 아는 것만 기억한다고 해봐라. 그러면 그 관계 가운데 무슨 맛을 느낄 수가 있는가?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만남으로써 관계가 계속 깊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같다. 체험 성경을 배웠다고 해서 ‘나 그 과정 이미 졸업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되기 쉽다. 만일 더 배우지 않아도 된다면 이제부터는 여러분이 배운 것을 가르치시오. 새 신자 한 사람씩 맡아서 계속서 기도하면서 가르쳐라. 그러면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다 성장하게 된다.

 

미국 교회에서는 대체로 새 신자가 오면 훈련받는 집사님이 그 사람을 맡아서 믿음이 자라 날 때까지 심방하고 키우는 체제로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교회도 구역 예배 식으로 하든 예배 후에 모여서 하든 새 신자의 영혼을 맡아서 성경 공부 과정을 교육하고 교회적인 차원에서 회중이 보는 앞에서 수료증을 보면 좋다. 그러한 가운데 어느덧 믿음이 자라나게 된다. 또한 평신도들이 말씀 사역을 나누어함으로 성도들이 말씀을 더 많이 호흡하고 나눌 수 있는 이점도 있다.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막4:16-19)

 

믿음의 바른 성장을 이루려면 믿음에 방해가 되는 습관과 환경, 인간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믿음에 방해가 되는 것을 지속적으로 제거하라. 교인들을 보면 분명 믿은 지는 오래된 사람인데도 여전히 그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다. 성장이 멈춘 난장이처럼 믿는지 20년이 지나도 주일만 나온다. 왜 그럴까? 성장을 방해하는 것들 때문이다. 돌밭은 말씀의 뿌리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나쁜 습관을 의미한다.

 

나쁜 습관을 버려라. 비디오를 보는 습관이나 여러 가지 방해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면 절대로 믿음이 자라나지 않는다. 젊었을 때부터 교회에서 잘 자라면 나쁜 습관이 생기지 않는다. 그것 자체가 굉장한 축복이다. 일단 나쁜 습관이 생기면 버리기가 보통 힘이 드는 것이 아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비유는 세상의 욕심을 의미한다. 세상에서 받으려고 하면 마귀가 역사한다. 하나님에게서 받아야지 세상으로부터 얻으려고 하면 마귀가 역사한다.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할 때에도 ‘내가 세상의 영광을 네게 주리라 너는 나한테 절하라’고 유혹했고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의 생명과를 먹지 않고 선악과를 먹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을 먹은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계속 세상에서 다른 것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욕심이다. 돈을 많이 벌려는 생각, 기타 여러 가지 욕심과 유혹, 세상의 쾌락, 염려 등은 모두 세상에서 얻으려는 생각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런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예배를 통해서 벗어날 수 있다. 예배의 단계를 통해서 바치고 포기하고, 순종하는 훈련을 함으로 세상 유혹에서 점점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바치고 봉사하는 것이 믿음의 성장에 큰 유익을 가져온다.

 

3. 예배의 단계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4:24)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예배의 영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으로 예배해야 한다. 영으로 예배하기 위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이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아들이다. 예수를 믿는 모든 이 안에 하나님을 높이는 영이 들어와 있으므로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히13:15)

 

찬미의 제사를 늘 드릴 때 우리 속에 선한 감화가 계속 쌓이게 된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히13:16)

 

하나님께 바치고 드릴 때 우리 속에 있는 물질의 영이 계속 빠져간다. 많이 있다고 해서 바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 못 바친다. 우리 마음속에 선한 감화가 계속해서 쌓이면 그것이 세상의 영을 몰아내므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애착이 없어진다. 세상의 욕심을 가지면 무얼 보게 되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없는 것을 보게 된다. 내가 없는 것만 눈에 보인다. 하지만 욕심과 애착이 없어지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보게 된다. 현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현실을 보게 되니까 감사하게 되고 없는 사람을 보면 주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영이 빠져나가면 내게 있는 것만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서는 없는 것만 보인다. ‘나는 있는데 저 사람은 없네.’ 하면서 나누어주게 되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 베풀어주세요. 그러면 세상으로부터 독립을 하고 세상을 따라가지 않게 된다. 천사가 들어와서 우리를 풍성케 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드림의 은혜이다. 믿음은 반드시 예배를 통해 자라나는데 예배에는 반드시 찬미와 바치는 제사가 있어야 된다고 했다. 순종의 제사는 예배의 기본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히13:17)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인도할 때 그 영혼은 하나님 앞에 가서 계산하게 된다. 물주는 일과 심는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다. 인도하는 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순종의제사이다.

 

예배에는 3가지 제사가 있다. 찬미의 제사 그림의 제사 순종의 제사, 이 3가지는 예배의 전부이다. 예배는 '할렐루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바치고 순종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순종하는 것이다 예배이다. 주보에 표기된 순서가 예배가 아니라 성령으로 죄와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예배이다. 항상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제사이다.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는 성경 말씀은 이와 같은 제사, 즉 찬미의 제사, 드림의 제사, 순종의 제사를 의미한다.

 

4. 성령 충만의 단계

 

다음단계는 성령 충만의 단계이다. 예배드리는 모습이 맥 빠지면 절대로 성령 충만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은사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이 법칙이다. 경상도 사람들이 삼국 시대부터 삼국을 통일하고 대통령도 많이 배출하는 등 역사적으로 얼마나 그 기세가 높았나? 경상도 인들의 말소리가 커서 분위기를 제압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경상도가 전국에서 제일 교세가 약하고 믿는 성도의 비율이 제일 작다. 왜? 경상도 교회는 조용하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은 모두 크는데 충청도와 경상도의 교회는 대체로 조용하다. 일전에 이들 지역 중의 한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성도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들이 경상도를 복음화 시키고 경상도 교회를 부흥시키려면 삼국을 통일한 그 화랑정신으로 소리 좀 지르세요. 믿지 않는 사람들도 소리를 질러서 전국을 제압하는데 왜 믿는 사람이 소리를 못 지릅니까? 소리를 질러서 뜨겁게 예배드림으로 말미암아 예배에 성공해야 된다. 저희 교회 목회 클리닉에 오시는 목사님과 사모님들도 모두 우리 교회에 와서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하는 가운데 사모들도 모두 우리 교회에 와서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하는 가운데 그 분위기에 의해 기도문이 열린다.”

 

이처럼 원리는 아주 간단하다. 이 원리를 몰라서 교회를 개척하거나 이끌어 가는데 그토록 고생하는 것이다. 예배에 성공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입게 된다. 성공적인 예배를 통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게 된다. 기쁨, 찬송, 감사, 순종은 성령 충만한 생활의 증거이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5:18-21)

 

뜨겁게 예배드림으로 마음에 감화를 받아야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눌린 영들, 세상에게 얻으려는 영들을 밀어낼 수가 있다. 또한 사람에게 눌린 영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사람에게 눌린 영은 사람의 눈치를 보게 만든다. 사람과 세상으로부터 놓임을 받아서 우리 속안에서 온전히 외적인 부담이 없어지는 것이 성령 충만이다. 성령 충만하면 내적으로는 기쁨과 능력이 차고 넘치고 밖으로는 천사의 수종을 통하여 형통하는 길이 열린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왜? 죄책감을 가지고 있거나 내가 잘못한 것 있으면 의가 아니다. 나를 생각하는 것이 마귀라고 했다. ‘나는 죄인이다.’라고 하면서 자기를 너무 자책하고 생각하고 강조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이다. ‘나는 뭐든지 자신이 있다.‘라고 하는 것도 역시 마귀의 영에 의한 것이다.

 

성령이 들어오면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내가 죄인인 것과 죄가 모두 치료된다. 하나님 의로 덮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의인인 것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덧입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의 의는 믿음으로 난 의이다.나는 의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를 덮어 주었기 때문에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지도 않고 불쌍하게 느껴지지도 않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난 의이다.

 

평강은 하나님께 주시는 평강을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나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히브리 사람들은 '샬롬‘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밥을 잘 먹었다거나 잠을 잘 잤다던가 하는 것과는 다르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얼마나 굶었으면 ‘진지 드셨나?"라고 인사했나! 법 먹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다. 평강은 곧 하나님의 임재하심이다. 성령 충만의 또 다른 열매는 희락이다. 희락은 기쁨이다. 기쁨은 무엇인가? 생명의 에너지이다. 생명 에너지가 계속 나오는 것이 성령 충만의 증거이다. 생명 에너지가 넘치면 우리 밖에서는 천사들이 수종들게 된다.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4:11)

 

안에서는 다른 사람의 영이나 세상의 영에 부담이 되지 않고 밖에서는 천사들이 수종되니까 언제든지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다.

 

5. 은사의 단계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7)

 

성령 충만하면 은사가 나타나게 된다. 은사는 전도하는 일과 심령을 키우는데 매우 유용한다. 은사의 목적은 심는 것과 물주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이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3:5-6)

 

아볼로와 바울은 각각 주께서 주신 은사대로 사역하고 목회를 했다. 집사는 사역자 목회자라는 뜻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은사 받은 대로 일하는 사람이 집사이고 은사 받은 대로 일하는 것이 목회이다. 목회의 두 가지 방면은 심는 것과 물주는 것이다. 물을 준다는 것은 심령을 자라나게 하는 것을 말하고 심는 다는 것은 전도를 의미한다. 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전도해서 믿게 하는 것과 믿는 심령들이 자라나게 하는 이 두 가지 일 밖에 없다. 주님은 물을 주고 자라나게 하는데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이다. 그래서 은사는 전도와 심령을 키우는 데 필요하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잔 12:4-11)

 

은사는 마귀를 쫓아내는 힘이 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마귀로 가득 찬 집과 다름없다. 마귀가 가득 찬 심령을 성령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바로 심는 일이다. 사람에게는 지정의의 세 가지 측면이 있다. 마귀는 지적으로 문득 생각나게 함으로 우리를 유혹하거나 세상 이론을 통해서 유혹한다. 문득 생각나는 것은 대부분 마귀가 주는 나쁜 생각이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요13:2)

 

이처럼 마귀는 문득 생각나게 함으로써 우리를 유혹에 빠지게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론으로 조직되어 있고, 학문이나 종교, 철학 등도 이론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고후10:4-5)

 

인간의 모든 학문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높여진 이론들이다. 세상 이론에 둘러싸여 살기 때문에 우리에게 문득 생각나는 것은 세상 지혜요, 세상 이론이요, 세상 지식이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도 기도할 때 생각이 척 떠오르게 하신다. 그것이 지혜의 은사이다. 마귀가 우리에게 문득 생각을 준다면 하나님의 영감도 척 떠오른다고 할 수 있다.

 

지식의 은사는 하나님 말씀을 체계를 가지고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을 배우면 하나님 말씀의 깊은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지식이 들오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신 것들을 깨닫고 실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지식의 은사이다. 이것을 달리 말씀의 은사라고 한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4:4)

 

이 세상 신은 사고 의식을 혼란시킨다. 사고 의식을 혼란시킴으로써 주님의 빛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한다. 사람은 영을 담는 그릇이므로 세상 마귀가 와서 그릇에 가득 담겨 있으면 다른 영이 들어올 수 없다. 이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지혜의 원하는 말이나 세상 지식으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만 와장창 무너진다. 하나님을 대적해서 높아진 마귀의 이론을 무너뜨리는 것이 말씀의 은사이다. 말씀은 성령의 검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찌르고 쳐들어가는 것이 말씀의 은사이다.

 

다음은 믿음의 은사이다. 마귀는 우리의 의지를 눌러서 자신이 없게 만든다. 그래서 아무런 대책 없이 현재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다 받아들이게 된다. ‘아이구 내 팔자야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하면서 자기를 비하하거나 팔자타령을 하는 것은 사람의 의식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사람은 의지를 통해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데 마귀는 바로 이 의지를 계속 누른다. 그래서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 팔자타령이나 하는 운명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이 세상은 ‘될 대로 돼라’고 해서 잘되는 법이 없다. 언제든지 세상은 나의 의지를 통해서 선택하고 성장하고 발전해야 잘 되지 ‘될 대로 돼라’해서 잘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이러한 인간의 현실을 철학적인 표현을 빌면 ‘실전적인 존재’라고 부른다. 곧 믿음의 존재라는 뜻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과 관련하여 무엇이든 선택함으로서 자신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마귀는 이러한 우리를 계속 눌러서 꼼짝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순종은 결코 포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되는대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의식적인 결단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순종이다.

 

순종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복종은 내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의식적인 결단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포기하는 것은 상황을 되는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되는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착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착한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착한 사람이 병에 걸리고 미치게 되지 않는가? 되는대로 받아들이니까 나중엔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도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의 의지를 누르는 마귀를 확 밀어내야 한다. 여러분도 저도 예전에는 다 눌려 있었지만 이제는 성령께서 주신 믿음을 가지고 있다. 마귀가 어느 정도 우리를 누를 수 있지만 더 이상은 누를 수가 없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이런 것이 곧 결단이다. 이렇게 믿음으로 응답할 때 인생이 달라지는 역사가 일어난다. 이것이 믿음의 은사이다. 마귀가 우리를 눌러서 완전히 죽이려고 하지만 우리는 얼마든지 믿음으로 이길 수 있다. 마귀가 계속 우리를 누르고 또 누르다 보면 우리 몸에 여러 가지 현상들이 일어난다.

 

성경에 보면 천사가 사람을 소경도 만들고 사자의 입도 막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천사는 사람의 모든 기능을 맘대로 조정할 수 있는데 마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눈도 감기게 할 수 있고 입도 막을 수 있고 벙어리도 만들 수 있고 병들게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님은 이러한 현상들을 쫓아내실 수 있다. 성령의 능력으로 병을 낫게 하는 것이 병 고치는 은사이고 능력의 은사는 우리의 인격 속에 들어와 우리를 누르는 마귀를 물리치는 은사이다.

 

계속 눌리면 완전히 미친 사람이 된다. 자기는 원하지 않지만 발가벗고 춤을 춘다던가, 불 속으로 들어간다던가, 강으로 뛰어 들던가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미친 사람이다. 우리 몸을 이렇게 조종하는 마귀를 밀어내는 것이 곧 능력의 은사이다. 또한 마귀는 내적인 상처를 주어서 계속 슬프게 해서 우리를 상하게 한다. 이때 마귀는 계속해서 나 자신을 생각하게 만들어서 슬픔을 준다. ‘나는 불상해, 누구에게 무시를 당했어.’ ‘나는 배신을 당했다.’ 내가, 내가..‘이처럼 나를 계속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더 나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생긴다. 소위 말하는 나르시시즘이다.

 

이렇게 계속 나를 생각할수록 마귀가 들어와서 깊은 상처를 준다. 친구 사이에서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상처를 받는다. 자기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우습게 한 말을 가지고도 생각들이 마음에 상처를 많은 사람은 상처를 받는 것이다. 주로 내성적인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는다. 내성적인 사람은 자기를 깊이 생가가하는 사람이다. 자기 안으로 모든 것을 느끼고 끌어들이기 때문에 자기 속에 상처가 된다. 이렇게 된 사람에게는 이론적인 설명이나 무조건적인 기도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사랑이 필요하다.

 

무시를 당한 만큼 인정을 받고 배척을 당하고 배신을 당한 만큼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는 게 필요하다. 교회는 말씀만 가지고 도 안되고 기도만 해도 안 되며 반드시 사랑을 가진 사람이 꼭 필요하다. 사랑으로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가진 사람을 위로해주고 고쳐주어야 한다.

 

만일 가정에서도 어머니는 머리가 좋아 이것저것 말이 많고 아버지는 힘이 세어서 완력으로 다스리려 한다면 승산이 있겠는가? 누구만 상한가? 아이들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는다. 아이들이 약하기 때문이다. 교회 일도 그렇다. 말씀만 강조하면서 입만 놀리고 은사자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능력을 행하며 병을 고친다고 으스대면 누구만 상처를 받겠는가? 사람만 눌리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없구나!’하고 눌리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교회가 잘못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겸해야 한다. 나 때문에 내가 능력 받은 것 때문에 눌린 사람이 있다면 주님께 죄를 범한 것이다.

 

에베소 교회처럼 사랑이 부족한 교회가 되면 안 된다. 주님은 ‘너는 회개하라. 처음 잊어버린 것을 다시 회복하라’고 하신다. 우리는 다시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능력을 받고 말씀으로 섰다 할지라도 버림받은 심령을 찾아가서 어루만져 주고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사랑이 필요하다.

 

세상의 영은 눈과 귀, 그리고 생각을 통해서 들어온다. 그리고 사람의 영은 기도하지 않아도 임재 하는 영이다. 이런 영들을 물리치려면 골방에 들어가 묵상함으로써 세상 것을 차단하고, 방언으로 기도함으로써 생각을 차단하고 사람의 영을 차단해야한다. 혼자 기도를 오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만큼 사람의 영과 세상의 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도를 조금 밖에 못하는 사람은 세상의 영이나 사람의 영으로 끌려 다니는 사람이다. 반대로 기도를 많이 할수록 세상의 영과 사람의 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의 영과 사람의 영에서 벗어나는 것만큼 손해 보지 않는 창조적인 인생길을 갈 수 있다.

 

바울이 ‘내가 방언을 많이 하므로 감사하노라’ 라고 말한 것은 방언을 많이 하는 것만큼 나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마귀는 하와에게 생각을 통해서 들어왔고 아담은 아내인 사람을 통해서 틈탔다. 세상과 사람을 모두 막아야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게 된다. 그렇게 하다보면 영력이 생겨서 방언, 통변도 하게 되고 예언도 하게 되는 것이다. 은사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엡4:11)

 

본문에 나오는 봉사는 목회를 의미한다. 성령의 은사는 목회 일을 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목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를 비롯한 모든 것은 교회를 세우는데 초점을 맞추어야한다. 은사를 가지고 자기를 나타내거나 자기를 확장하는데 쓰면 안 된다.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무엇 무엇을 했습니다.’ 라고 해도 ‘내가 너를 모른다.’고 주님은 말씀하실 지도 모른다. 우리는 은사가 나타났을 때 교회에 초점을 맞추고 계속해서 자기를 부인해가며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

 

그런데 주님은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더 큰 은사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곧 예수의 인격이다.

 

6. 목회의 단계

 

은사를 통하여 각기 직분을 받으면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롬12:5)

 

그러나 은사는 부분적이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9-10)

 

지식의 은사나 예언의 은사도 부분적이다. 그러므로 서로 보충을 받아야 한다. 같은 예언의 은사가 할지라도 사랑이 많은 사람에게서 예언이 나올 때에는 위로하는 쪽으로 많이 나오고 의지적인 사람에게서는 야단치고 회개하라는 식으로 나온다. 예언도 100% 하나님의 말씀이긴 하지만 예언을 하는 사람의 성품에 따라서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을 받을 때에는 그 은사자의 부분적인 면을 이해해야 된다.

 

만일 예언 받는 사람이 사랑이 많고 순응적인 사람이라면 의지적인 은사 자가 예언을 통해 회개할 것을 말하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하면서 잘 받아 들일 테이지만 만일 예언을 받는 사람의 성품이 의지적이고 강하게 은사자도 강한 어조로 회개하라고 책망을 한다면 ‘네가 뭔데 나한테 그러냐?’고 할 것이다.

 

이처럼 은사는 믿음 외에 당사자의 성품과도 관계가 있음을 잘 고려해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아, 저 사람은 잘못되었구나. 마귀가 들어가서 그렇구나!’라고 무조건 매도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부분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아야 한다. 특정인 한 사람이 독불장군이 되어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 목회는 궁극적으로 전도하고 양육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여러분도 배운 것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쳐봐라. 그러면 자신의 부족을 느끼게 되어 더욱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고 다른 이들을 가르칠 때마다 나에게 더 은혜가 된다. 그것이 목회이다. 사람마다 받은 은사가 다르게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은사를 내가 기도를 받기도 하고 예언도 받고 배우기도 하고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을 전도하고 기도해 주기도 함으로써 온전해지는 것이다. ‘나는 내 믿음만으로 충만하니까 절대로 누구에게든 기도 안 받는다‘ ’나는 다 아니까 너는 내 말만 들어라‘라는 식으로 하면 안 된다. 주님은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되어서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데 은사는 일하지 않으면 소멸된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5:19-22)

 

초대교회에서도 은사, 특히 예언으로 인해 굉장히 말썽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예언은 웃기는 것이다“라고 멸시했다. 그러나 은사는 결코 웃기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범사에 잘 생각해서 좋은 것만 취하라 악은 모든 모양이라고 버리라. 나쁜 것을 트집 잡지 말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했다. 그러나 오늘날 목회자나 평신도 가운데서도 ‘같은 방언이라고 마귀 방언이 있다. 예언도 하는 사람에 따라 모두 다르므로 믿을 것이 못된다.’는 식을 계속 나쁜 쪽으로만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주님은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셨다. 방언이 갖고 있는 비밀스러운 은혜와 축복이 그토록 많은데 왜 마귀 방언만 애기하며 방언을 부정적으로 격하시키나? 이러한 악한 자세는 버려야 한다. 주님은 좋은 것만 취하라고 하신다. 은사에 대해 무지하거나 자신들이 받지 못했기 때문에 소홀히 여기고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다. 사실 은사 중에 제일 혼란한 것이 예언이고 방언이다. 그러나 예언도 깨닫게 되면 점점 정리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셨지만 절대로 나쁜 것을 주시지 않으셨다.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하면 다 좋은 것이다.

 

7. 사랑의 단계(예수의 인격)

 

마지막으로 사랑의 단계이다 이것은 예수의 인격을 갖는 것이다. 바로 아들의 형상이다. 예수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믿음의 최종적인 열매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29)

 

하나님과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세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다. 당신의 생활은 예수님을 닮아가나? 고전13장 1~4절은 은사에 관한 말씀이다. 은사는 전도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 사랑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내가 너를 안다. 너는 나를 닮았다’고 하신다. 예수를 닮지 않고 은사만 가지면 ‘너는 너를 모르고 나를 닮지 않았다’고 주님은 말씀하실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13:4-7)

 

예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13:7)

 

영적인 성숙의 지표는 은사가 아니라 인격이다. 사랑으로써 참아내고 온유하며 투기하지 않는 모습이 바로 영적인 성숙을 보여주는 것이다. 온유하다는 것은 사실 그대로를 믿음으로 잘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1)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고전13:4-5)

 

이 말씀은 모두 주님의 인격을 나타낸다. 모든 생활에서 이렇게 될 때 주님의 인격을 닮아 가는 것이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 이것이 성화이다. 성장은 중간 단계를 건너뛰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도를 많이 했다거나 기도를 많이 했다는 그것 자체로,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고 해서 성화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를 닮아 가는 삶의 모습을 이룰 때 비로소 성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늘나라에 갈 때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은사일까? 하늘나라에 더 이상 무슨 은사가 필요하나? 병 고치는 은사, 말씀의 은사, 예언의 은사 같은 것들이 필요하나? 하늘나라에서 전도를 하나? 오로지 예수의 인격, 예수의 생명만 가지고 하늘나라에 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닮는 것이다.

 

 

제8장 죄 - 보이지 않는 비극의 원인

 

 

1. 죄: 관계가 끊어진 상태-> 분열

 

죄란 ‘관계의 끊어짐’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에너지, 즉 운동력으로 되어 있다. 에너지 시스템을 통해 서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존재한다. 예를 들면 우리 몸은 밖에 물질 에너지를 흡수하고 다시 배출한다.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는 능력과 배출시켜 내보낼 수 있는 능력이 균형 잡혀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너지 시스템에서 벗어나면 비존재, 즉 없어지게 된다.

 

교회도 가정도 사회도 에너지로 되어 있다. 우리의 몸은 물질 에너지로 존재하다가 가정을 통해서 의식 에너지를 공급받기 시작한다. 가정의 구성원 간에 서로를 인정해 줌으로써 의식에너지를 피차간에 공급받는 것이다. 만일 가정이 의식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생산성이 없으면 그 가정은 흩어지게 된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않고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가정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 가정은 전부 다 흩어지게 될 것이다.

 

사회는 자기의 시간과 공간을 확장하는 에너지로 움직인다. 시간과 공간 에너지로 자기 자신을 확장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돈이다. 이 세상은 전부 돈, 즉 물질 체계로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은 자기를 표현하면서 자기에게 필요한 물질을 얻는다. 그러나 자기의식 에너지를 발산하고 표현하는 동시에 본능으로써 물질을 얻을 수는 없다. 사람과는 달리 짐승은 본능의 속에 입력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사회 활동을 통해서 물질을 얻게 된다.

 

돈이란? 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되며 동시에 내가 필요한 것을 얻게 되는 도구이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음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자동차로 표현하고, 아파트로 표현하고, 옷 입는 것을 표현하고, 먹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먹는 것 하나에도 큰 상에 잘 차려먹는 것과 상도 숟가락도 없이 그냥 훌쩍 훌쩍 먹는 것과는 벌써 표현되어지는 것이 다르다. 이처럼 사람은 먹는 것 하나에서도 자기를 표현한다. 이것이 사화생활이다. 사람들이 왜 그토록 애써서 돈을 벌려고 하나? 바로 자기표현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의 마지막은 하늘나라이다. 이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물질로 되어 있으며 시간이 가면서 없어지게 된다. 몸은 자기의식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사람은 꿈을 통해서 내 몸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을 경험한다. 꿈속에서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실제로는 한국에 사는데 꿈속에서 는 아프리카에도 가보고 미국에도 가는 등 몸의 상태로 떠나게 된다.

 

의식이 몸의 상태를 떠나면 자기표현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든지 빨리 뛰고 싶어도 꿈속의 내 몸은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꿈은 하나의 영적인 세계이다. 몸의 상태를 떠난 것이다. 인간은 에너지 시스템이며 인간 생활은 에너지 경쟁이다. 성도들의 믿음 생활도 에너지 경쟁이다. 성경은 ‘심은 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한다.(갈 6:7)

 

죄는 바로 이 에너지 시스템에서 주고받는 통로가 모두 다 끊어진 상태를 말한다. 에너지 근원에서부터 끓어진 상태 그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이 우주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 있다. 말씀은 하나님의 운동력이 흐르는 통로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모든 것이 다 말씀을 따라 흐르도록 되어 있는데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이 분열되었다.

 

이 세상의 모든 에너지는 전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묶여있고,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셔서 묶어놓으셨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묶어서 모든 것이 잘 통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이다. 하나님 구원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과의 생명 관계가 끊어짐으로 인해 사람은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만드실 때 광물 에너지, 생물 에너지, 본능 에너지, 의식 에너지, 시공 에너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에너지들을 사용하셨다. 그리고 사람은 이 모든 것들이 다 필요하도록 만들어졌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들으면 우리는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을 갖게 된다.

 

하나님을 받아 드려라. 그러면 모든 것이 다 들어오도록 되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모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다 소통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세계와 우주는 하나의 커다란 에너지 시스템이고 우리의 몸과 하나의 시스템이므로 에너지를 주고받는 하나의 통로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속아서는 안 된다. 여자들이 화상을 하고 나서 자기 얼굴이 예쁘다고 느낀다든지 옷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모두 착각 에너지이다. 그것은 에너지 시스템이 되지 않는다. 착각 에너지이다. 이것은 마귀로 말미암아 에너지이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반드시 실상에 눈을 떠야지 착각에 빠지면 안 된다. 일단 착각에 빠지면 여러분의 인생은 넘어지기 시작하고, 결국 인생에서 지고 마는 것이다. 에너지 전쟁에서 에너지 대결에서 지는 것이다. 믿음은 실상을 바라고 쳐다보는 것이다. 돈은 없는데도 큰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면 그 삶은 착각 에너지로 사는 사람이다. 큰 차를 타고 다니는 것만큼 실제적으로 얻어지는 게 있어야 제대로 된 에너지 시스템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큰 차만 타고 다니고 다른 사람에게 부자로 보이기만 하는 것은 시스템이 아니다.

 

동물들 가운데 작으면서도 크게 보이려고 온갖 위장술을 쓰는 것들이 있지만 사실은 그만큼의 큰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착각 에너지에 넘어가면 안 된다. 안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체험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체험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에너지 시스템에 관련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만 체험해야 된다. 영적인 체험만 가져야 된다. 영적인 체험을 갖지 않고 다른 체험을 가지면 하나님의 에너지 시스템에서 벗어난 것이다. 특히 TV는 우리를 미혹하는 대표적인 것이다 .미혹케 하는 에너지이고 재생산성이 없는 에너지이며 파괴적인 에너지이다. TV를 보고 움직인다고 해서 TV에서 얻을 것이 있나? 내 시간 에너지, 내 물질 에너지만 빠져나갈 뿐이다. 에너지 시스템의 균형만 깨질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체험해야 재생 능력이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이다. 주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참 떡이니‘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떡이 바로 이 생명 에너지를 공급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생명과는 바로 그런 관계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온전한 에너지를 재생시킬 수 있는 환경이지만 죄로 말미암아 생명 관계에서 단절되었기 때문에 사람은 에너지를 재생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결국 에덴동산 자체가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해체된 것이다.

 

예를 들면 가정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사랑하고 의식을 줌으로써 의식 에너지를 주고받아야 되는데 남편이 남편으로써 자기 구실을 안 하고 아내도 자기 구실을 안 하면 자녀들도 의식 에너지를 서로 주고받을 수가 없게 된다. 결과적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가정은 해체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임재한 곳이다. 하나님과 이야기하던 곳이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하시며 하나님은 늘 찾아 오셨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장소, 이 땅에 살아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곳이 바로 에덴동산이었다. 그런데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다음부터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예수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시 임하셨다. 성령을 통해 영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의 임재를 확장시키는 과정이 바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3-24)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에게서 떠난 상태가 죄이다. 또한 죄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분열을 가져왔다. 인간과 인간은 서로 의식 에너지를 주고받게 되어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써 아담과 하와처럼 서로 사랑함으로써 에너지를 주고받는 하나의 단위로 창조되었다. 의식 에너지를 주고받는 단위를 성령은 ‘한 몸’이라고 한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누구와 에너지를 주고받는 단위인가? 하나님과 에너지를 주고받는 하나의 단위이다. 하나님과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직장도 하나의 몸이다. 세상의 돈 에너지, 시공 에너지를 주고받는 하나의 몸이다. 나라도 하나의 몸이다. 사회보다 큰 하나의 물질 에너지와 의식 에너지를 공급하는 더 큰 단위의 몸이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몸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우리 사람의 육신 안에서 오장 육보와 같은 조직이 있다. 이러한 조직은 물질 에너지를 주고받는 단위로써 하나의 기본적인 단위가 된다.

 

이러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의식 에너지를 주고받는 그 단위가 무너져 떼어져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죄이다.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되었나? 타락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노래하며 서로 사랑하였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서로 타락하기 전에는 서로 하나의 단위였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상대가 되었다. 나의 의식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 하나의 상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범죄 한 이후 창세기 3장에 보면 여자에게는 잉태하는 고통을 더하게 하고 자식을 낳고 남편을 사모하게 하였다. 그래서 여자는 상대방의 필요에 대해 응답하는 게 아닌 자기 부담에 의해 눌리게 되고 말았다.

 

상대방에 대해 의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내 자신의 부담 안에 내가 눌리게 되는 것, 그것이 죄의 결과이다. 반면 남자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땅을 판다. 땅을 팠으나 가시와 엉겅퀴를 얻게 된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과 욕망으로 인해 부담을 느끼게 된다. 생각할 만한 여유가 없다. 남자도 역시 자기 부담 안에 서로 묶여서 돌아가는 죄의 결과 속에서 산다. 몸이 깨져 나간다. 이러한 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분열이다.

 

죄는 인격까지는 분열시킨다. 인격은 자기 성장과 자기 선택, 그리고 환경의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선택해서 자기 발전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인격이 분열되었다는 것은 자기가 아무리 선택하더라도 잘 되지 않고, 성장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환경 자체가 나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민이 생기고 불안하게 되고,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인격의 분열, 곧 죄라고 한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내가 내 선택을 할 수 없고 내 자신을 표현할 수도 없을 때 이것이 불안한 상태이다. 이것이 자기 부담이다. 자기 부담이 있으면 무엇을 선택하거나 누구를 도와주거나 할 만한 여유가 없다. 이렇게 자기 부담에 꽉 눌리는 것이 양심의 가책이다. 그러나 주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의 죄가 용서받게 되어 자기 부담에서 벗어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믿음으로 살수 있다는 것은 자기 선택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 세상 환경에서는 내가 내 자신을 선택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내 자신의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믿음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부담 때문에 발작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은 갈 길이 있어서 손을 젓는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불속에 들어간 사람은 자신의 몸이 타니까 뛰는 것이지 살 수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자기 선택을 할 수가 없어서 결국 육체가 분열이 된 것이 죽음이다.

 

창세기 5장은 ‘누가 누구를 낳고 누구는 언제 죽었더라.’라는 식의 내용으로 일관하는 무덤장이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모든 관계가 해체되고 자기 자신의 인격이 해체되며 마지막으로 육체가 해체되는 것이 죄의 결과이다.

 

2. 죄는 유전한다.

 

죄는 유전된다. 첫째로 인간의 타락한 소질을 통해서 유전한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 15:47)

 

첫 사람은 흙에서 나서 하늘까지 올라가야 했는데 그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을 실패했기 때문에 땅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런 시스템밖에 갖지 못한 사람이 자꾸 자녀들을 낳으면 온전하게 줄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다, 이 상태가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인류의 죄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2)

 

아담 이후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죽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51:5)

 

모친이 죄 중에 잉태했다는 것은 어머니가 죄를 범했다는 뜻이 아니라 태에서부터 아담의 혈통과 같은 불완전한 시스템 속에서 인간이 태어난다는 뜻이다. 죄는 오염된 환경을 통해서도 유전한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람은 온전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생명적인 환경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가인의 후손이 계속 방황하게 된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마지막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고 말한다.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이것은 죄로 인해 환경으로부터 소외된 인류를 환경적인 손실로부터 다시금 회복시켜 준다는 뜻이다.

 

지금은 성령을 통해 속사람을 회복시키고 부활 후에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써 환경적인 것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우리 육신(몸)을 포함한 하나님의 환경적인 구원이다. 이것이 재창조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 속만 다시금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를 재창조하신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환경은 사람을 축복하시려고 만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완성시켜서 거듭난 사람들이 영원한 에덴동산을 누리도록 하신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에덴동산과 같은 환경이다. 오히려 에덴동산보다도 더 욱 완성된 것이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계22:1)

 

에덴동산에도 강이 나온다.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22:2)

 

에덴동산에도 생명나무가 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계22:3-4)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계22:5)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다스리는 권세를 받게 된다. 에덴동산에서 주신 축복으로 완성된 것이 이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죄는 또한 교육을 통해서 유전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8:44)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4:7)

 

사람은 그릇이다. 사람은 영을 담는 그릇이다. 이 그릇에 외부에서 의식이 들어오는 대로 인간은 의식이나 영적 의식이 담겨진다. 부모로부터, 환경으로부터 받은 것을 반드시 담게 된다. 이처럼 주는 대로 받기 때문에 운명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구원도 주님을 통해서 받는 것이다. 인간의 영은 주는 대로 받게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받는 것이 구원이다.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 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딤후2:18)

 

교회 안에 후메네오와 빌레도와 같은 사람이 있으면 딴소리를 한다(딤후2:17) 쓴 뿌리를 냄으로 인해 전에는 순종하던 다른 사람이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같이 죽어가게 된다. 우리는 서로 좋은 것을 격려해야지 나쁜 것을 애기하면 그게 전부 쓴 뿌리가 되어 다른 사람을 죽게 만든다.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을 주고받는 에너지 시스템이다. 이 교회는 하나의 시스템이므로 하나님의 생명만 역사할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어 주어야 된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을 다 받아들이면 생산성 있는 체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이 망하게 되는 이유와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만 역사하는 에너지 시스템이 되어야 한다.

 

3. 죄의 결과

 

죄의 결과로 받는 것은 무엇인가? 양심의 가책, 즉 자기 부담이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2:15)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요일3:21-22)

 

양심은 무엇인가? 자기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는 근원이 양심인데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 자기 선택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 대신 주위에 대해서 방어하려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후, 무화과나무 잎을 따서 옷을 만들어 입은 사람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 숨었다. 자기가 떳떳하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응답할 수 있는 하나님의 것을 받을 수 있는 힘, 즉 환경에 대해서 자신이 적극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진 것이다. 환경과 자기 부담에 쫓겨서 더 이상의 자기 선택의 능력을 잃게 된 것이다. 이것이 양심의 가책이고 피해망상이다.

 

부부사이에도 의처증, 의부증이 있다. 상대방을 감시하는 것이다. 감시를 한다거나 눈치를 보는 것은 자기 선택의 능력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죄 고백을 통해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 은혜지, 돈과 같은 물질을 받는 것이 은혜는 아니다.

 

자기 선택의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 선택의 능력을 되돌려 주는 것이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다. 죄를 용서받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선택의 능력을 다시 갖게 된다. 성경은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담대함을 얻고 하나님 앞에 무엇이든지 받나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심에 ‘너는 뭘 해라 이렇게 해라’라는 감화를 주실 때 그것에 순종함으로써 점점 더 자기 선택의 능력이 강해진다. 이것이 영적인 능력이다. 환경이 나에게 부담을 줄때 그것을 계속 따르면 자기 선택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음성을 듣고 그것에 순종하면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커지게 된다. 이것이 자기 선택의 능력이다. 정신 분열, 피해망상 이런 것들은 자기 선택의 능력이 없어진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떡으로나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선택의 능력과 하나님의 축복을 통해서 살게 된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4:17-18)

 

자존심은 자기를 의식하는 능력이다. 자존심은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방언하려는 마음 자세이다. 양심과 자존심은 비슷한 말인데, 양심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부담이 없이 자기 선택의 능역을 갖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범하면 이 양심이 없어지게 된다. 겸손하다는 것은 비굴한 것과는 다르다. 비굴하다는 것은 자기 부담 때문에 자기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환경에 끌려가는 것을 말한다. 겸손은 자기 선택의 능력을 가지고 환경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다. 또한 상대방이 아무리 화를 내고 자기를 높인다 할지라도 거기에 관계없이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교만은 무엇인가? 교만이야말로 비굴한 모습이다. 자기 선택의 능력은 없으면서 단지 환경이 가벼워 보일 때 잠시 자기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말한다. 자기 부담에서 벗어나면 뭐든지 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하지만 자기 선택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환경에 따라 사는 것이다. 비굴함은 환경이 부담이 될 때 자기 선택의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나타난다. 비굴함과 교만은 똑같은 영적 상태이다.

 

권세와 겸손은 같은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하셨다. 주님은 겸손했기 때문에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겸손하다’하면서 굽실 굽실한다면 그것은 결코 겸손하다는 것이 아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7:1-2)

 

그러면 죄 값은 어떤 것인가? 우리 안에 선택의 능력이 없어지면 우리는 밖으로부터 무엇이든 받을 수 있는 능력까지도 동시에 상실하게 된다고 위에서 말한바있다. 다시 말해 에너지 통로가 없어지는 것이다. 에너지 통로가 없어지면 나에게 필요한 것조차도 받을 수 없고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도 표현할 수가 없다. 이렇게 되는 것이 죄 값이다. 자신 안의 통로가 막히면 밖에 것과의 관계가 소멸된다. 손해를 보는 것이다. 죄는 반드시 손해를 준다. 그리고 죄로 인해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20;12)

 

이 세상은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로가 열려져 있다. 이 말씀의 통로를 따르지 않으면 모든 통로는 반드시 막히게 된다. 이것이 심판이며,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다. 결국은 죽게 되는 것이다. 불이라는 것은 에너지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불속에 들어가면 재생되지 않고 모든 다 없어진다. 에너지는 소통이 되어야 편안한데 소통이 되지 않으니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불 못이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롬14:10)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심판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용서받기보다는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 근본적으로 죄를 안 질수는 없지만 죄를 짓고도 ‘용서받으면 되지’하는 것은 짐짓 짓는 죄이다. 내 자신의 선택으로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의 관점에서 보면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짐짓 범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죄인지 알면서도 연약하기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것과는 다르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서도 계속해서 거스르면 어떻게 되나? 마지막에는 성령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게 된다. 감화가 사라지면 회개를 하려 해도 할 수가 없게 된다. 우리의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것은 성령님을 통해서 이다. 그러나 성령님이 말씀하시는데도 듣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감화를 주지 않아서 회개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도덕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좋은 일을 하지만 하나님의 감화가 없이 자신의 자의식으로 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선이 아니다. 도덕은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시스템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시스템 안에서 여유가 있는 것뿐이지 시스템이 개선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의 파괴된 모든 것을 회복해 주신다.

 

4. 죄의 종류

 

유전 죄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원죄이다.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원죄를 유전 받은 것이다. 바울이 말한 것이 이런 뜻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4)

 

죄의 본질을 깨달으면 절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연단의 본질에 대해서 절망하고 죄를 깨달아야만 그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를 가질 수가 있다. 죄에 대해서 절망하지 않으면 거짓의식의 착각 에너지가 들어와서 우리 인생을 소모하도록 만든다. 원죄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죄를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죄인 반면 자 범죄는 원죄의 죄 성으로 인해 나의 상황에 따라서 계속 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 1:24-25)

 

위 본문은 사람이 범하고 있는 온갖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으로써 이미 망가진 시스템을 가지고 태어났다. 내가 더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불교도처럼 굴속에 들어가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먹는 것을 조심하면서 애를 쓴다 할지라도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ㄹ)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 3:10-18)

 

이 말씀은 바로 사람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5. 죄의 해결

 

그러면 죄는 어떻게 해결되나? 예수를 믿음으로 정죄함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1-2)

 

두 가지 법이 있다. 하나는 에덴동산 때 주어진 하나님의 생명의 법이고 다른 하나는 사망의 법, 곧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나야 했던 사망의 법이다. ‘생명의 법이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 하였음이라’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되었다. ‘정죄함이 없나니’는 주님의 속죄하므로 우리가 정죄를 면하였다는 말씀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말씀이 있는데 주님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모든 저주와 사망의 저주에서 우리는 해방되었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령의 씻음으로 자 범죄도 회개할 능력이 생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17:17)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나라의 생명 에너지 시스템을 다시 우리에게 연결시켜 주셨다. 믿음의 결단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자꾸 들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 안에서 비로소 생명을 향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통로를 따라서 선택 할 수 있는 능력이 곧 믿음이다.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회개하게 되고 점점 죄에서 벗어나서 나의 영이 성숙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런 식으로 자 범죄를 점점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활의 구원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딤3:5)

 

6. 회개의 단계

 

회개의 단계는 지정의에 의한 3단계가 있다. 우선 우리는 지적으로 죄를 깨닫는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2:37)

 

깨닫기 위해서는 말씀을 들어야 된다. 들음으로 죄를 깨닫고 자의식 안에서의 선택의 감각이 생겨야 되는 것이다. 내 머리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자의식 안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죄를 깨닫게 된다. 성령의 감화와 주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결코 죄에 대하여 깨달을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회개가 먼저인가? 믿음이 먼저인가? 믿음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온다. 하나님의 택하심이 먼저 있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믿기 전에 회개하기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이 있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먼저 있고 난 후에 믿음이 오고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의한 것이다. 에베소서에 보면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정하사 모든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씀한다.

 

죄를 깨닫고 나면 전적으로 죄를 뉘우치고 ‘어찌할꼬’하며 마음이 찔리게 된다. 사람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반드시 생명을 선택하기 위한 자기 부담을 갖게 된다. 죄로 인한 자기 부담도 있지만 죄를 회개할 때도 ‘이제는 어찌할꼬’하는 하나님 생명을 통한 자기 부담이 생긴다. ‘전도를 더 해야 되겠다.‘ ’새벽 기도를 열심히 나가야 되겠다.‘등 이것이 ’어찌할꼬‘하는 자기 부담이다.

 

자기 부담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 바로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회개와 믿음과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믿음이 성장이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의 권한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과 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야 한다.

 

그저 지혜의 권함으로 ‘이렇게 하자. 이렇게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회장이니 총무니 하는 감투를 씌워주고 움직이게 하는 것은 자의식과 욕구, 감투와 돈을 움직이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집에는 마냥 어린애 노릇하던 청년이 결혼식을 하고 ‘이제부터 신랑이다.’하면 ‘여보’하면서 신랑 노릇을 하는 것도 신랑 감투를 썼기 때문이다. 결혼식은 감투를 하나씩 뒤집어쓰는 것이다.

 

결혼을 했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없다. 본질은 똑같다. 어린애를 낳으면 아버지 감투를 뒤집어쓰는 것이다. 이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감투를 씌워서 자의식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감투를 씌워줌으로 해서 움직이게 해서는 안 된다. 교인들 역시 전달로 감투를 썼기 때문에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도 세상 것의 연장일 뿐이다. 감투는 필요 없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시면 내가 그 일을 하도록 해야 한다. 일자리를 맡는 것이 직분이다. 그래서 교회는 감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직책이 있다. 죄는 행동으로 보상해야 된다. 죄를 보상한다는 것은 죄에서 벗어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초대교인들이 죄에서 벗어난 후 어떻게 변했는가?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2:42)

 

자신의 재산을 이웃에게 필요에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등 성도들의 행동이 변화된 것이다. 변경된 에너지 시스템을 갖게 되면 우리의 에너지의 통로가 달라지므로 운동력이 달라진다. 이것이 회개인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려고 의식적으로 행동한다면 회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위선이고 이중인격이다. 내 속의 에너지 통로가 달라졌기 때문에 운동력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회개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 회개할 수 있는 축복을 받게 하신 분이다.

 

 

제9장 주일 - 우리의 축복을 위하여 정하신 날

 

 

1. 주일을 지키는 이유(막2:27)

 

주일은 구약시대의 안식일과 같다. 신약시대의 주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의미한다. 구약시대의 안식일은 천지창조 후 하나님께서 휴식하신 날이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창 2:2-3)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에는 사람과 나라가 있지만 특별히 ‘날’을 복되다 하신 것이 바로 이 일곱째 날이다. 시간에 복을 주신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 시간을 지키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쉬신 이 일곱째 날을 복 주셨다는 뜻은 지금은 일하고 계신 하나님이 마지막 날 주님의 구원을 완성시키신 후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는 그때에 우리에게 영원히 안식의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계1:10)

 

위 성경에 나오는 주의 날은 주님이 부활하심을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날을 의미한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요20;1)

 

주님은 안식 후 첫날 부활하셨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안식이 이제는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완성되어 우리에게 다시금 주어졌음을 찬양하기 위함이다. 주일을 통해 모든 성도는 진정한 영적 안식을 누릴 수 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2:27-28)

 

구약에 나오는 모든 의미 있는 날들은 다 주님을 상징한다. 이제 우리는 주일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구체적으로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유대인의 하루는 저녁부터 시작된다. 해가 지면 한 날이 시작이 된다. 크리스마스는 그 전날인 24일 저녁으로부터 시작되는 것과 같다. 저녁은 무엇인가? 저녁은 육신이 음식을 섭취하고 쉬는 시간이다. 영적인 하루도 마찬가지이다. 먹고 쉬고 일하는 등 이것을 반복함으로써 육신이 유지되듯이 영적인 생활은 주의 날에 쉬면서 예배드림으로 참다운 안식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배드림을 통해서만 참다운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주일은 한 주간의 첫날이므로 머리가 되는 날이다. 영적으로 축복을 받고 한 주간 동안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으로 축복하셨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엡1:3)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로 복을 주신 것이 아니라 신령한 복을 주셨다. 영의 본질은 무엇인가? 영은 보이지 않으나 실상을 의미한다. 또한 말씀을 통해 역사하는 것이 영이다. 영이 역사하면 보이는 현상으로 나타나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상으로 복을 주셨다. 그러므로 실상이 아닌 현상만 따라가면 헛것이고 빈 것을 추고하는 것이 된다. 빈 것이 바로 우상이다.

 

주일에 예배를 통해 영적인 축복을 받지 않고 집에서 그냥 쉰다든지, ‘모처럼 쉬는 날이니까 실컷 놀아보자’하면서 한 주간을 시작하면 그는 연속적으로 텅 빈 삶을 사는 것에 불과하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축복이 없다. 주일에 교회에게 나와 예배드리는 것은 실상의 복을 받는 것이다. 육체는 쉼을 통해 재충전되고 건강을 유지한다. 정신적으로는 가족들과 정답게 교제 하면서 위로와 기쁨을 얻고 만남의 축복을 누린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빌1:5)

 

가족들이 평일에는 직정과 학교로 뿔뿔이 흩어져 있다가 주일에 모처럼 함께 모여서 만남의 축복을 누리고 교회에 같이 나옴을 말미암아 몸과 마음이 같이 쉴 수 있는 축복이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4:24)

 

우리는 영적인 예배를 통해서 실상의 복을 받을 수 있다. 주기적으로 예배를 드린 것은 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인생이 영적으로 점점 더 깊어지는 축복이 있게 된다. 영적으로 자꾸 깊어질수록 현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점점 흡수되고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다. 안식일, 즉 주일을 성수하지 않는 것은 실상이 아닌 현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문제가 점점 더 많아지고 시간이 갈수록 인생이 분산되고 만다. 점점 피곤해지고 고단해지며 원하는 방향으로 모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실상을 중심으로 살 때에는 시간이 가면서 인생의 문제가 한쪽으로 모아지게 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한 분이라는 것의 특별한 의미는 하나님 한분에서 모든 것이 출발해서 하나님께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다. 실상으로부터 온 것이 현상이 되었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귀결되는 것이 인생과 만물의 원리다.

 

믿음 생활이 깊어질수록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아무리 후회되고 잘못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한 점으로 모이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곧 구원이며 축복이 되고 결과적으로 나에게 신비한 역사로 나타난다. 이처럼 모든 것은 다 돌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구원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의 주간에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노력 했느냐?로 우리의 인생이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주님을 어떻게 만나느냐가 우리 인생을 좌우하는 것이다. 예배는 우리 인생의 축소판이다. 예배를 드리는데 얼마나 성공했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성공이 결정지어진다. 예배에 실패하면 아무리 다른 것에 성공했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다 실패로 귀결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에 실패했다 할지라도 예배에만 성공하면 모든 것이 성공으로 모이게 되어 있다. 우리는 주의 날에 모여서 예배드림으로 말미암아 매순간 인생의 성공과 구원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주일만이 아니라 항상 예배를 드림으로써 구원을 확인하고 이루어 나갈 수가 있다.

 

2. 예배의 뜻

 

예배란? ‘머리 숙여 경배한다.’는 뜻으로 성도들에게만 주어진 지상에서 가장 고상하고 경건한 행위이다. 예배는 쉽게 말해 윗 분에게 세배한다는 의미이다. 가장 가치가 있는 행동이란 차원을 뛰어넘는 행동을 일컫는다. 생명에는 식물적 생명, 동물적 생명, 의식적 생명, 그리고 신적인 생명이 있다. 이 생명의 종료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이 각각 다라다.

 

식물적인 생명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동물적인 생명이 해결할 수가 있고 동물적인 생명이 해결 할 수 없는 것을 사람과 같은 의식적인 생명이 해결할 수가 있다. 사람은 의식을 갖고 있지만 시간과 공간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신적인 생명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이처럼 생명은 그 차원이 올라감에 따라 가치가 높아진다.

 

예배는 영어로 “워십‘이다. ”워+쉽“, 즉 가치를 창조해지는 행위라는 뜻이다. 예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창조적인 생활이며 행위이다. 돈을 번다는 것을 “Make Money"라고 한다. 돈을 만든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의 인생이 소모된다는 것을 뜻한다. 인생을 돈과 바꾼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돈과 인생을 바꾸는 것이 된다. 그러나 돈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 해도 죽음의 순간에 생명과 다시 바꾸거나 창춘과 바꿀 수는 없다. 돈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참다운 가치는 오직 예배를 통해서만 만들어진다. 구체적으로 예배시간에 물질을 바친다면 물질의 가치를 넘어서는 가치를 창조하게 되는 것이 예배이다. 또한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가치를 창조해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다시 재창조할 수 있는 권세와 지혜와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 내게 지금까지 없었던 능력을 다시 누리고 받게 되는 것이 예배의 축복이다. 이 세상의 피조물 가운데 오로지 인간만이 예배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초월적인 생명을 가질 수 있는 존재이다. 다른 짐승들은 각기 그 종류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 종류의 범위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생명이다. 이 생명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모든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생명이다.

 

이 세상의 문제 등은 무엇인가? 식물은 식물대로 장소를 이동하지 못하는 제약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동물들은 날 때부터 입력된 본능에 의해 환경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제한성을 인하여 문제에 직면한다. 동물의 생명은 환경에 대해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기계적인 생명이다. 동물들은 자기 선택을 할 수 없다. 이처럼 동식물의 생명은 운명적인 생명이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사람은 자기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사람은 역시 시공에 제한을 받는다. 100년 이상 살 수 없고 천년이상 살 수 없다. 아무리 자기 선택을 할지라도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그래서 인간의 과거의 어떤 문제 때문에 ‘아 시간을 되돌려 그것을 바꿀 수만 있다면...’하고 고민을 한다. 또한 미래에 대해서도 불안을 느낀다.

 

공간에 대해서도 돌이키기 어렵다. 아까 먹은 것 때문에 배가 아프다고 해서 이미 뱃속에 들어간 것을 원상태로 꺼내 놓는다거나 취소할 수가 없지 않는가? 이것은 공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이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생명들이 만들어내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신적인 초 생명에 의한 해결이 필요하다.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즉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때, 이런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 것이다. 생명이 만들어 낸 문제가 해결 받는 것이 곧 구원이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27:4)

 

다윗은 예배의 기쁨과 예배를 통한 구원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는 여러 가지 기쁨의 순간이 있었다. 전쟁에서 이긴 기쁨도 있었고 무엇인가를 성취한 후의 기쁨도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오직 한 가지 기쁨을 구하고 있다.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는 기쁨’을 구한 것이다.

 

솔로몬이 지혜의 사람이라면 다윗은 영감의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의 아름다움을 감동받기 원했다. 솔로몬은 생전에 지혜를 통해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한다던가, 화원을 만들던가, 잠언을 쓴다던가 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거룩한 영감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을 준 사람이었다. 우리도 예배를 통해서 영감을 나눌 때 참다운 아름다움, 즉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가 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예배를 드릴 때 하늘나라 예루살렘과 시온성에 오를 수 있는 체험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12:22-23)

 

예배는 이처럼 하늘나라의 영적인 현장에 참여하게 되는 거룩한 통로이다. 예배를 드림으로써 나의 영적인 환경이 거룩해지는 것이다. 결국 세상적인 모든 것과 인간적인 것 그리고 물질적인 모든 것이 물러가게 된다. 예배를 통해 거룩한 환경이 점점 넓어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럴 때 우린 하나님의 형상, 주님의 형상으로 옷 입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우선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게 되므로 주님도 예배의 대상이다. 또한 성령님의 감화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있다. 사도행전은 참다운 교회, 참다운 예배의 출발을 보여준다. 성도는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 또한 성령님의 임재하심과 감동하심을 통해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영의 예배이다.

 

3. 예배의 내용

 

첫째, 찬송이 있다. 찬송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영광이다. 찬송은 하늘나라에 가서도 영원히 계속된다. 천국에서 기도를 하겠는가? 설교를 하겠는가? 지금 이세상은 모든 것이 (청동)거울로 보듯이 희미하기 때문에 부분적인 것으로 예언하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듯 모든 것이 분명하므로 예언도 필요 없고 은사도, 설교도, 안수 기도 필요 없게 된다. 요한계시록 5장은 하늘에서 드리게 될 예배의 모형이 나와 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계5:11-12)

 

하늘의 모든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송한다. 찬송에는 기도와 전도, 말씀이 다 포함 되어 있다. 눈감고 찬송하면 기도가 되고 믿지 않는 이들에게 찬송을 들려주면 전도요, 간증이 되는 것이다. 또한 찬송은 마귀를 이길 수 있으므로 늘 찬송을 하면 우리를 누르는 모든 권세를 이길 수가 있다.

 

예배의 두 번째 요소는 기도이다. 기도는 우리가 얻은 구원을 감사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필요한 것을 간구하고 이웃과 나라를 위해 중보 하는 것이 기도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믿음의 고백을 통해서 천사가 움직일 수 있는 통로가 열릴 때 우리에게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영은 실상이시다. 이 세상은 말씀을 통해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창조의 역사를 일으킨다. 이 창조의 역사를 통해서 지금도 계속 기도가 응답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창조하시는 통로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날마다 지속적이 구원을 이루려면 날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해야만 한다. 기도는 말씀을 통한 창조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분이다.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함으로 그분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우린 알게 된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주인 하나님이 될 뿐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가 없다. 예배에는 또한 말씀이 있다. 은혜의 말씀을 통해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되며 또한 위로와 힘을 얻고 재 헌신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사6:5-8)

 

이사야 6장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말씀은 영감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어 현실을 새롭게 보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설교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모든 성도의 어두워진 영이 밝아지도록 영감이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구약에 나오는 제사는 하나의 의식으로써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이스라엘과 ‘내가 너희를 구원해 주겠다’라는 언약을 맺으셨다. 그러나 이 의식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늘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감동 받아서 전하는 선지자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말씀으로 운동력이 있다. 운동력이 없다면 말씀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다‘라고 말한다.

 

성경 말씀을 지식적으로 많이 안다고 해서 생활에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주신 운동력을 받아야 한다. 그때그때마다 주시는 은혜를 늘 자꾸 받아서 생활을 채워야 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 비록 설교 말씀이 똑같을지라도 영감을 가지고 들으면 들을 때마다 새로운 법이다. 저는 자주 같은 설교를 하지만 성도들은 얼마든지 새롭게 다르게 은혜를 받았다면, 다음번에는 더 많은 영감을 받게 된다. 영감은 갈수록 깊어지기 때문이다.

 

설교를 지식적으로 흡수하려는 사람은 ‘목사님은 언제나 똑같은 말만 하는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하면서 예배에 나오지 않게 되므로 아무런 은혜나 영감도 받지 못한 채 그 상태에 머물게 된다. 그는 말로는 별소리를 다 할 수 있지만 생활이 변화 받을 수 있는 내적인 능력은 상실하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

 

예배드리러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님 이 시간에도 제게 말씀을 주세요.“라고 기도하게 될 것이다. 말씀을 달라고 하는 것은 목사님이 설교를 잘하게 해달라는 뜻이 아니다. 성령을 통해 더 깊고 필요한 영감을 주셔서 더 많은 것을 깨달아 나의 인생이 더 깊어질 수 있도록 해주십사 하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배에는 반드시 말씀이 있어야 한다. 교제나 간증만으로는 안 된다. 간증은 말씀이 아니다. 간증은 믿지 않은 사람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도전을 주는 믿음의 고백이기는 하지만, 간증은 듣는 이로 하여금 ‘나도 저런 은혜를 받으면 좋겠다.‘라는 소원은 줄지언정 영감을 주지는 못한다. 간증자의 자의식이 나의 자의식에 소원을 주고 자극하는 것이 간증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에 인을 치듯이 감명을 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헌금과 헌물은 하나님께 대한 나의 헌신의 표시이자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소득 중에서 일부를 바치는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헌금은 내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 중의 일부를 마치 소작이나 사글세와 같이 본 소유권자에게 돌려줌으로써 소유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의식의 표현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내 인생의 사글세’라고 할 수 있다. 내 인생과 내 재산, 내가 살며 누리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23:23)

 

이 말씀은 십일조에 관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란 구약시대의 유물이므로 강조할 필요가 없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히 이 말씀에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바칠 것을 명하고 계신다. 십일조는 율법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아브라함도 십일조를 드렸다. 아브라함이 율법시대의 사람인가? 그는 믿음의 시대 사람이다. 아브라함 때에는 율법이 없었다. 그는 믿음을 가지고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던 것이다.

 

십일조는 율법에 근거해서 강제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셨기 때문에 비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면 나에게 어떤 은혜가 있는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나의 모든 생활 가운데 있게 된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포하니까 마귀가 절대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침의 은혜이다.

 

바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가진다. 요즘 사람들은 대체로 바치는 것에 인색해서 그러한 부담을 가급적 적게 주는 천주교나 기타 종교로 개종하는 수도 있는데, 이 모두가 영적으로 진단해 볼 때 돈(물질) 마귀에게 사로 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치는 ‘돈’을 중심으로 세워져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려면 이 돈 마귀에서 완전히 떠나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드림(바침)’이다.

 

세상의 의식과 행동의 모든 구조는 전부 돈과 관련되어 있다. 사람들은 돈 때문에 움직이고 애쓰고 있다. 돈에 대한 의식이 쌓이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세상의 영에 사로잡혀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 영에 사로잡혀 미혹을 받으면 진리를 볼 수가 없다. 교인들 가운데도 헌금에 인색한 사람처럼 은혜 받는 사람을 결코 볼 수가 없다. 그들을 붙잡고 있는 미혹의 영 때문에 하나님의 깊고 큰 역사와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비하심으로 우리에게 권면하고 계신다. 결코 억지로 바치거나 드리기를 강요하시지 않는다. 아무런 부담 없이 우리 스스로가 깨달은 마음으로 인해 바쳐서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받으시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보호함을 받을 수 있는 축복을 받게 되기를 주님은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

 

성례에는 성찬식과 세례의 두 가지가 있다. 세례는 무엇인가? 세례 시 물속으로 내려가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나의 옛사람은 주님과 더불어 같이 죽어지고 다시 물위로 올라옴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의 은혜를 나의 몸으로 시인하는 것을 뜻한다. 성경은 우리가 사람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해야 함을 말씀한다. 세례는 우리의 몸으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시인하는 성례이다. 성찬식은?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눅22:19-20)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맺으신 언약은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하여 깨어졌다. 그래서 이사야나 에스겔,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맺으실 것을 예언하게 했다.(렘21:31-34)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8:8-13)

 

새 언약이란 우리의 의식(영)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우리의 죄를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용서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죄와 모든 저주를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축복만이 우리에게 임하도록 된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이다. 성찬식은 이러한 새 언약의 의미를 되새기는 매우 의미 있는 성례이다. 예배의 마지막에는 축도가 있다. 축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감화가 같이 하기를 축복하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축도의 일반적인 형태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의 정수와 같은 표현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성령의 감화가 항상 있기를 축복 받음으로 예배를 끝내는 것이다.

 

4. 예배 참석시 주의 점

 

예배는 설교나 음악을 듣고 사람을 만나거나 구경하러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한 전인격적인 응답이다. 예배를 드리고 푸근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내 영혼이 하나님께 응답을 했기 때문이다. 예배의 어떤 특정한 순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배는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인격적인 응답이며 우리 삶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전인적 응답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에는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마음의 모든 것이 다 들어가서 하나님께 바쳐지고 다시 그분에 의한 소생함을 얻어 새로워지는 은혜가 있다.

 

하나님은 참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신다. 신령과 진정과 말씀과 영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주님은 반드시 축복과 약속의 말씀을 통해 감화를 주시며 그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고 예배에 임하여야 한다.

 

 

2010.05.21 낮 시간 종일 편집. <오타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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