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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새의 아들 (삼상 16:1-23)
영적적용:중생론
요약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이지만 사람의 기도와 전도를 필요로 하며, 중생은 영혼
의 영성에 속하나 육체의 영성을 그 도구로 하고, 중생은 비밀한 것이나 확실
한 신앙고백을 통해 이루어지고, 중생의 열매인 평강은 성결의 도수와 비례하
며, 중생은 믿음의 중심에서이지 종교적인 외형에서가 아니고, 중생은 예정된
자만을 대상으로 하며, 중생은 연령과도 무관하고, 중생의 거점은 영혼이며, 중
생은 놀라운 영적권세를 지니고 있다.
설명
본문은 객관적으로는 유다지파를 통한 구속사 줄기의 형성을 보여주지만 주관
적으로는 영혼의 중생사건을 보여준다. 본문이 보여주는 중생의 비밀은 무엇인
가?
1.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역할을 보여준다.
1절 상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
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2. 육체의 영성과 영혼의 영성과의 관계를 보여준다.
1절 중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
3. 예정과 중생과의 관계를 보여준다.
1절 하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4. 비밀성과 확실성의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2-3절 "사무엘이 가로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 기름을 부을지니라"
5. 평강과 성결의 관계를 보여준다.
5절 "가로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 스스로 성결케 하고 와서"
6. 종교적인 외형과 관계가 없다.
7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7. 신앙의 연령과 관계가 없다.
11절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8. 중생의 위치는 어디인가 보여준다.
12절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9. 중생과 영적권세와의 관계를 보여준다.
13절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
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강해
지난 시간에 우리는 버림받은 사울에 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은 "이새의 아들"
에 관해서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한 사울을 버리시고
이새의 아들 다윗을 택하여 몰래 기름을 붓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객관적으로
는 유다지파를 통한 구속사 줄기의 형성을 보여주지만 주관적으로는 영혼의 중생
사건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그의 생애에서 약 세 번의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먼저는 본문처럼 은밀
이 받았습니다. 이것은 중생의 예표입니다. 중생은 육신이 감지하지 못하게 은밀
하게 이루어집니다. 다음은 유다지파 왕으로 헤브론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일입니
다. 이것은 영혼의 영성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스라엘 열 두지파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영육간의 전인격적인 영성이 이루어짐을 예표합니다.
여기 본문은 최초의 기름부음인 중생사건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생의 문제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
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3)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이유는 이 중생 속에 모든 비밀이 들어있
습니다. 한 가지 예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하셨는데 그 주요 핵심이
바로 이 중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럼 본문이 보여주는 중생의 비밀은 무엇일
까요?
1. 중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역할을 보여줍니다.
1절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제 더 이상 슬퍼하지만 말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새 일에 관심을
전환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택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는 사무엘의 추천이나 그 무엇도 작용한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중생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중생이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란 점입니다.
그렇다면 중생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은 전혀 필요없을까요? 예를 들면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죄인을 중생시켜서 성도를 만들어주시고 기도도 전도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불러모아 중생시켜서 교회에 보내 주시니까 우리
들은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본문에 사무엘이 탄식하며 애통한
후에 이런 말씀이 있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즉 중생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
권임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성도들의 기도와 전도를 사용하신다
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기도하고 전도해야
하며 우리들 중에도 아직 육신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다면 사무엘처럼 슬퍼하며
애통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영적인 신앙으로 바꾸어주십니다.
2. 중생에 있어서 육체와 영혼의 영성과의 관계를 잘 가르쳐줍니다.
다시 1절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 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기름을 연구해 보겠습니다. 여기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기름에는 뿔기름과 병기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기름은 그냥 기름이 아니고
뿔에 채운 기름입니다. 이 뿔은 '케렌'으로 양의 뿔인데 이 양뿔의 기름은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의 희생의 결과로 부어지는 생명의 성령의 역사 즉 중생의 역사 혹
은 영혼의 영성을 뜻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두 가지의 기름 그러나 같은 물질의 기름입니다. 그러나 같은 기
름이지만 뿔기름과 병기름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뿔이 나오는 경우는 대부분 왕
의 정통성 및 긍정적 성격이 암시됩니다(왕상1:39). 그래서 정통성이 있는 다윗이
나 남쪽 유다 왕국의 왕들은 이 뿔기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병기름은 삼상10:1
을 보면 사울이라든가 정통성이 없는 북이스라엘의 왕들이 병기름으로 받았습니
다. 이 중 어느 것이 좋다 못하다가 아니라 이 두 가지를 우리는 영혼과 육체를
가졌으므로 다 받아야 합니다.
즉 기름이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은 두 종류의 성령충만, 즉 이중적인 성령의 사역
을 상징합니다. 이 두 종류의 성령충만은 은사로 부어지는 육체의 영성과 중생에
서 성화로 이어지는 영혼의 영성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중생은 영혼에 일어
나는 영혼의 영성이지만 육체의 영성을 그 도구로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의 관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육체의 영성은 우리의 사고를 깨드려 예수 믿어
중생하도록 돕는 하나님의 역사이지 중생 자체는 아닙니다. 또 영혼의 영성은 육
체의 영성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영성의 신비와 은혜에 만 머물지 말고
반드시 중생의 영매를 맺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빈껍데기입니다. 이 뿔기름
이 바로 중생의 역사입니다.
3. 중생에서 예정과 중생과의 관계를 가르쳐줍니다.
다시 1절에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했습니다.
여기 예선은 예정과 선택의 줄인 말로써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뜻합니
다. 예정과 선택은 우리 장로교 신학의 근간입니다. 예선이란 하나님께서 만세 전
에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또 여기 베들레헴이 나오는데
베들레헴은 객관적으로는 예수님의 탄생지요 주관적으로는 각인의 심령에 예수의
생명이 심어지는 중생을 뜻합니다.
그럼 예선과 중생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것은 둘은 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행13:48에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
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했습니다. 즉 오직 선택된 자만이 중생합니다. 이것이
예정과 중생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중생된 자는 영원히 타락할 수 없고 버림받
을 수 없습니다.
4. 중생에 있어서 비밀성과 확실성의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2-3절에 "사무엘이 가로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
리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알지 못하도록 비밀리에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방법을 가
르쳐 주십니다. 당시 실로의 성막은 훼파된 상태였기 때문에 제사는 특정한 장소
가 없어 어디서든지 제사할 수 있었습니다. 또 여기 암송아지는 화목제를 암시하
는데 이 화목제에는 제사장이 임의로 누구나 초청하여 식사를 할 수 있었기 때문
에 사울에게 오해받을 염려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생의 비밀성을 보여
즙니다. 이 중생의 비밀성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요3:8에 바람의 비유를 통해서 그
비밀성을 교훈한바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중생의 외면적인 과정은 비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5)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믿어야
중생입니다. 믿어도 내 심령에 사건이 생길만큼 확실하게 믿어야 중생입니다. 그
래서 '아 정말 예수는 믿어야 되는구나 예수님은 정말 나의 구주이시구나 나는 예
수 안 믿고는 살 수 없어' 하는 확실한 신앙의식이 생겨야 합니다. 마치 모태에서
의 새생명의 시작은 우리가 전혀 느끼지도 못하는 순간에 시작되었지만 남녀라는
외적인 사건 없이 어떻게 생명체가 생길 수 있었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
요? 이처럼 중생은 비밀성과 확실성이라는 두 종류의 의식이 존재하는 특수한 것
입니다.
이것을 출애굽 사건으로 설명하자면 중생하기 전에 애굽의 열재앙 즉 중생을 위
한 십단계가 있습니다. 이 십단계를 풀어보면 그 성격이 신앙에 대한 감동에서부
터 시작하여 마지막 단계에는 예수님이 없이는 아무 소망도 없이 캄캄할 뿐 아니
라 예수님이 없이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다는 자기 존재를 깨달아 예수를 붙잡
는 확실한 마음의 사건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단계인 어둠과 장자의 죽음의 단계
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어도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는 그 믿음이 되어야 합니
다.
그래서 세례문답시에 "그 대들은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 알며 당연히 그의 진노
를 받을 만하고 그의 크신 자비하심에서 구원얻을 것밖에는 소망이 없는 자인 줄
아느뇨?" 그리고 "그 대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죄인의 구
주되시는 줄을 믿으며 복음에 말한 바와 같이 구원하실 이는 다만 예수뿐이신 줄
알고 그를 믿으며 그에게만 의지 하느뇨?" 라고 문답하는 것입니다.
5. 중생에 있어서 평강과 성결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4-5절입니다. 5절에 "가로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가로되 평강을 위함이니
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케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
자" 했습니다.
여기 자기를 두려워 떠는 베들레헴 성읍 지도자들에게 사무엘은 평강을 위함이
라고 안심을 시키고 제사를 위하여 성결을 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생에 있어
서 평강과 성결과의 관계를 연구할 수 있습니다. 즉 중생에 있어서 또 하나의 원
리는 중생으로 인한 평강은 성결의 도수에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
들이 예수를 믿어 중생하여 평강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도 아직 맺지 못하는 분
들이 많습니다. 분명히 중생했는데도 강과 같은 평강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 이유
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성화를 위한 성결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
았기 때문입니다.
6. 중생은 믿음의 중심에서이지 종교적인 외형에서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6-10절입니다. 7절에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
셨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선택할 때의 가진 기준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외모만 보고 속단
했지만 하나님의 기준은 마음 중심이었습니다. 이 외모에 대한 문자적인 의미는
비단 육신을 의미하지만 비유적으로 종교적 모형이나 의식이나 율법 혹은 인간의
의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지극한 신자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외형
은 훌륭해도 주님은 그것으로 중생의 방편을 삼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
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
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
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1-4) 했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중
심의 믿음을 보시지 종교와 도덕적인 의를 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7. 중생과 연령 혹은 신앙의 연조와의 관계성을 보여줍니다.
11절에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했습니
다.
다윗이 제사 자리에 오지 않았던 것은 그 연령이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20세의
나이에 미달되었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15세에서 20세 미만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이렇게 연소자여도 중생은 임하며 우리는 어린 영혼들의 중생을 위해서 힘써
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린이에게도 구원상담을 해야 합니다.
또 중생과 신앙의 연조와의 관련성은 어떠한가? 중생은 신앙의 연조와도 관계가
없고 직분과도 관계가 없고 심지어는 물세례와도 직접적으로는 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구주를 믿어 중생한 성도를 외부적으로 인치는 것이 바로 불세례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교회에 출석했어도 중생하지 않는 교인도 있을
수 있고 처음 믿지만 확실히 중생한 성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
이지 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8. 중생의 위치는 영혼인가 육체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12절만 보면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했습니다.
다윗의 형들은 얼마나 육신적인 외모가 뛰어났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형들과는
달리 단지 눈과 얼굴만 아름답다웠습니다. 이것은 외모를 표현한 말이 아니고 인
간의 내면적인 것이 얼굴로 표출된다는 점에서 다윗의 심령 상태를 뜻하는 것입
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에 광채가 발하는 다윗을 선택하심은 중심을 보셨음에 대한
좋은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중생의 거점은 영혼인가 육체인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중
생은 인간의 육신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는 육신보다 영혼을 위해서 많이 투자해야 합니다.
9. 중생과 영적권세와의 관계를 가르쳐줍니다.
13-23절의 내용입니다. 13절에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
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했습니다. 그
리고 23절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했습니다.
마치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와 같은 장면입니다. 그런데 중생하면 이렇게
능력이 있는 것인가? 우리는 중생과 능력과의 관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중생 자
체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엄청난 권능을 가진 것에는 틀림없습
니다. 그러나 그 생명을 장성시키거나 그 권세를 사용할 때 비로소 왕적인 권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관계성 역시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용하지 않으니까 아무
런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생한 성도들에게는 능력과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만 믿을 뿐 아무 능력적인 사건이 나에게 없었지만 기도하고 찬송하면 악신
이 물러가고 자아의 옥터가 움직이고 죄와 환경과 저주의 사슬들이 다 풀어집니
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엄청난 권세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늘
사용하시기 바립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중생하지 못했다면 중생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
다. 그리고 이미 중생했다면 이제는 그 중생의 생명을 키우고 사용하시기 바랍니
다. 그래서 자기에게도 복이 되고 하나님께 기쁨을 돌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래
서 우리 모두 다윗과 같이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연단을 통하여 더욱 자라고 강
해져서 사울의 악신을 쫓고 유다의 왕이 되고 12지파의 왕이 되고 나아가 열방을
지배한 것처럼 더욱 성장한 왕 같은 제사장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