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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스라엘의 보김 통곡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와 같은 말씀의 실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책망 곧 너희들이 악의 세력과 싸우지 않고 즉, 너희들의 사명이 바로 악과 싸우는 것인데 악과 싸우지 않고 그들과 타협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스스로 공존의 길을 택했다고 책망을 하시고 따라서 더 이상 승리를 보장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듣고 보인 이스라엘의 반응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케 한다. 그들의 반응은,온 백성이 통곡했다고 되어 있다. 통곡을 했다는 것은 자기들의 잘못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잘못을 인정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이후의 역사를 보면 아무 변화가 없다. 그대로 그냥 진행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보김에서 보인 반응 곧 통곡의 의미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여기에 대해 생각 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스라엘을 동정하는 시각으로 이해를 한다면, 여호수아 때부터 지금까지 전쟁을 했지 않은가 그것도 1, 2년이 아니고 몇 십년이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계속 될른지도 모른다. 전쟁이라는 것은 당연히 훈련하고는 다르다. 전쟁이라는 것은 생명을 건 일 아닌가,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는 것이 전쟁이다.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는 그런 모의 전쟁이 아니다. 따라서 전쟁하는 동안 사람은 극도로 긴장하게 되어있다. 그것도 한 두달도 아니고 일 이년도 아니고 수 십년을 그냥 싸우라고 하시니 그 전쟁의 긴장을 어떻게 견뎌 내겠느냐 이 말이다. 가나안 족속이 그냥 단숨에 지도상에서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도 단숨에 무너뜨려 버렸으니까 쉬울텐데 그것이 아닌 것이다.
나중에 이들을 남긴 이유가 나오겠지만, 쫓아내면 다시 들어 오고 또 그렇고...... 이것은 우리가 죄와 싸우는 것을 연상하면 잘 이해가 될 것이다. 오늘 죄를 쫓았는데 내일 또 들어오는, 우리의 삶이 죄와 싸움의 연속이 아닌가.
일년, 이년 십년, 이 십년 싸우다 보니 이제 지쳐 버린 것이다. 그래서 에라 그냥 공존해 버리자 너 좋고 나 좋자 이것이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보김에서 이스라엘이 통곡한 심리적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이 사람들은 옳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그래서 책망을 받았을 때 울었다. 옳은 것을 알고도 행할 수 없는 자기들의 무력함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전제가 되었다고 생각이 된다. 아무리 싸워 볼려고 해도 내 힘으로 안된다는 것을 이들이 잘 안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자기의 무력함을 깨닫고 난 다음이 문제다. 어디서 떨어졌는가를 생각하고 회개하고 돌아와서 전쟁의 승리의 능력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알고서 돌아 왔다면 이후의 시대의 역사는 달라졌을텐데, 그 이후에 아무 변화가 없었던 것을 봐서(물론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다 아시고 앞으로는 쫓아내지 않겠다고 하셨겠지만) 이들의 자기 무력함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신앙으로 돌아선 것이 아니고 체념으로 끝나 버렸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통곡은 체념의 눈물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무서운 심판, 험난한 앞길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대한 눈물이었을 것이다. 지나친 추측인지 모르겠으나, 앞뒤의 문맥을 봐서 보김에서 이스라엘이 통곡한 것은 대개 그런 정도의 의미가 아닌가 생각 해 볼 수 있겠다.
신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평생을 생명을 거는 전쟁의 긴장 속에서, 영적인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한다. 결코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타협하면 이스라엘 꼴이 되고 만다.
이 정복전쟁은 단숨에 이루어 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늘 무슨 대단한 결심을 해서, 아주 이상한 은혜, 굉장한 은혜를 받아서 마음이 뒤집어지는 그런 역사가 있었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 번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요 일년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지지부진한 진척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소망을 잃지 말고 타협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감당해야 하지 아니하였을까, 이스라엘의 보김에서의 통곡은 그 면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대적은 강한 자이다. 철병거, 철옹성, 장대한 용사, 모든 면에서 우리가 상대할 수 없는 뛰어난 전쟁의 용사들이다. 우리의 힘으로 당할 수 없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그 세력, 악의 세력과 무엇으로 싸우겠는가. 우리의 승리의 능력과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사사기에서 사무엘까지의 내용은, 신명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 예언으로 하신 말씀 곧 만일 백성이 이르기를 우리에게도 열방처럼 왕이 있어야겠다고 하거든 어떠어떠한 왕을 세우라고 하신 그 말씀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역사적으로 성취되어 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는 다윗왕조 성립의 하나의 서장으로서, 어떻게 백성들이 우리에게도 열방처럼 세상처럼 왕이 있어야 겠다고 요구하게 되었는지 경위를 기록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고,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런 부정적인 역사적 배경에서 성립된 다윗왕조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는 목표를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1장에서 2장 5절까지 내용은 대체적으로 여호수아시대부터 시작해서 사사기 초반의 가나안의 정복사역이 어느 정도 성취가 되었고 결국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즉, 정복사역의 진행과정을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7) 세상과 공존하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조처
2장 1절에서 5절까지 보김에서 있었던 사건은 이처럼 여호수아 시대를 이어서 교회(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할 가나안 땅에서 계속 악의 근원을 제거하고, 축출하고, 그 영역에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이루어지며, 그 통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복되게 사는 그런 복된 삶의 영역을 이루어 가도록 전투하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받은 이스라엘이 그 때까지 행해 온 진행과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받아 들여셨는가, 말하자면 그때까지 진행된 교회의 시대적 사명 감당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라고 할 수 있다. 그 평가가 한 마디로 이스라엘이 공존의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공존이라는 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가, 심각한 책망을 들어야할 만한 잘못된 일인가? 그것은,공존이라는 것은 싸울 의지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전쟁의사를 포기해 버렸다는 것이다. 당시의 이스라엘이 싸울 의사를 포기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더 이상 악과 싸우길 포기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의 교회에 명하신 뜻, 이루시고자 하신 뜻이 전투하는 교회인 것이다.
교회의 영역으로 지정된 곳에서 모든 것을 정결케 하시고 모든 악과 오염의 근원을 제거하시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또한 그 사명을 교회에 주셨는데 교회가 그 사명을 포기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정면적 거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이와 같은 사명을 주셨는데 교회가 그 사명을 감당치 않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로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싸울 의사가 없는 즉,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거부하고 공존하기를 원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너희에게 전쟁의 승리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요, 너희들이 싸워서 멸하고 제거하기를 거부한 대적 세력들이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옆구리의 가시처럼 너희를 괴롭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원칙적으로 교회였다고 하면 이런 원칙은 오늘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이다. 분명히 교회가 성별되기를, 교회가 참된 모습을 굳건히 지켜 나가면서 계속 교회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야 될 터인데 세상 가운데서 교회의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고 거룩한 교회가 세워져 가야 할 것인데 오히려 이방(세상)과 타협하고 공존하기를 택한다고 한다면 사실 공존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때부터는 세상 세력이 교회에 침투해서 교회를 변질시키고 교회의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될 수밖에 없다.
2) 2: 6이하의 흐름
2:6이하는 전에 잠시 언급한대로 마치 또 새로운 서론이 시작되듯이 시기를 다시 거슬러 가서 여호수아 생전 시대로 다시 거슬러간다. 그러나 이것은 흔히 어떤 사람이 주장하듯이 제 2의 서론이 아니고(즉 편집과정에서 생겨난 제 2의 서론이 아니고) 앞에서 행한 이스라엘의 정복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와 정복사역을 포기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시겠다는 처리 방침을 보김에서 밝혔는데 거기에서 언명하신 그 하나님의 처리 방침대로 이루어진 사사시대 역사의 개요 즉 개략적인 틀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 사사의 출현배경
그러면 왜 여기서 다시 여호수아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야기 하는가? 그것은 여호수아시대와 그의 사후 새로 시작된 이 사사시대의 시대적 성격을 구별 대조 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여호수아시대를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사사시대와 비교해서 여호수아시대는 이스라엘이 다 거룩했고 무조건 완벽했다는 뜻이 아니라 대체적으로 사사시대와 비교할 때 여호수아시대는 어떠했는가를 비교 평가한 것이 2:7에 나타난다.
여호수아 이후에 계속 살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구원들을 직접 체험한 나이 많은 사람들 즉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겼다고 되어있다. 사사시대와 비교할 때 여호수아시대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유지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10절에 보면 이들이 다 죽고 난 다음 새로운 세대가 일어났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일어났는데 이 세대의 특징이 11절에 말씀한 바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세대였다. 그 악한 시대의 근본적인 성격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들이 바알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렸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저버리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사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셔서 그들을 압제하는 외민족의 손에 붙이셨다고 되어있다. 하나님의 심판의 형태가 교회의 외부적인 대적 세력의 손에 교회를 붙이시는 그런 형태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심판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이 여기셔서 그들이 빠진 심판의 상태에서 구원할 자를 일으키셨는데 그들이 바로 사사들이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계속 반복이 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고 악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그들을 외민족의 손에 붙이시고 또 그 고통 가운데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하나님을 찾으면 다시 사사를 일으켜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전체적인 과정은 점점 악화일로를 걷게된다.
「2:19」
19절에 보면 사사를 보내셔서 구원하시면 사사가 살아 있는 동안은 어느 정도 괜찮다가 사사가 죽고 난 후에는 그들의 조상보다 더 부패하여 다른 신들을 쫓아 섬겼다고 되어있다. 세대가 거듭할수록 이스라엘은 더욱 악해졌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인들을 더 이상 축출하지 아니하겠다고 하셨는데 가나안인을 축출하지 아니하면 남아 있는 가나안인은 이스라엘에게 가시같은 존재가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와 같은 예언이 사사시대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그 구체적인 내용은 3:7이하에 나온다. 3:6까지는 개략적인 내용 사사시대에 있었던 고정적인 틀, 반복된 악순환의 틀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을 버리고 악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외적의 손에 붙이셔서 심판받게 하시고 그 가운데서 회개하여 부르짖으면 사사를 일으켜서 구원하시는, 그러나 그 전체적인 과정은 반복되는 동시에 계속 악화일로를 걸었다는 것이다.
「21-22」
21절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가 남겨놓은 가나안의 세력을 더 이상 축출하지 않으실것을 언명하신 말씀이 나온다. 22절에는 왜 하나님께서 가나안인을 축출하지 않으셨는가? 여리고 성 전투같은 기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결코 그런 능력이 없어서 그리하신 것은 아니다. 여리고 성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싸운 것은 결코 없다. 그저 법궤 메고 돌고 나팔분 것 밖에 없다. 그러나 순식간에 성이 무너져 버렸다. 이스라엘은 들어가서 죽일 것 밖에 없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이들을 남겨 놓으셨는가? 다른 여러 곳의 말을 종합해 보면 너무 일시에 다 쫓아내어 사람이 살지 않게 되면 땅이 황폐해지고 야수들이 들끓어서 오히려 이스라엘을 해치게 될까 염려하셨다는 말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