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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1: 5 넘치는 위로 - 고후 1: 7 소망이 견고함
고후 1: 5 넘치는 위로 -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 (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 )
‘그리스도의 고난들’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즉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전하기 때문에, 그의 복음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받는 여러 종류의 고난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들을 넘치게 경험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즉 그리스도께서 공급하시는 위로도 넘치게 경험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 가운데 고난들도 허락하시지만, 결단코 자기 백성을 미워하거나 방관하는 것이 아니시다.
그는 자기의 작정하신 때에 풍성한 위로로 그들을 위로하신다. 고난도 받고 위로도 받는 것은 신앙생활에 유익할 뿐 아니라, 특히 남을 돕는 데 유익하다.
1] 그리스도의 고난이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파데마타 투 크리스투'(*)는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가 한결같이 받는 고난'을 의미한다(Martin, Ewald).
모든 고난이 다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일 때 의미가 있고 위로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의 잘못에서 결과되는 것이 아니라 무고한 고난이며
* 눅 22: 52-53 –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 눅 23: 22-24 –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24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그 고난의 결과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메시야적 고난'(*, 헤블레 함마쉬아흐)이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이런 고난은 필연적(必然的)인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것이라고 했다.
* 골 1: 8 -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 롬 8: 17 -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사실상 바울은 이러한 고난을 겪었다. 복음을 증언하다가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아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갔었다.
* 행 14: 19 –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빌립보에서는 귀신들린 여종을 낫게 해주었다가 도리어 고소를 당해 매를 맞고 투옥되기도 했고, 유대인 자객단에 의해 살해당할 위험도 겪었었다.
* 행 23: 12-15 – 12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13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14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15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3]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고난에 비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으므로 고난에 비례하는 위로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우리 주님은 우리 마음의 상처를 싸매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마음의 상처는 위로를 받아야 한다. 우리 주님은 우리 마음의 상처를 싸매시며 위로해 주실 수 있는 분이다. 마음의 상처를 위로해 주시기 위해서 모든 준비를 다해 두셨다.
첫째, 자연계를 통해서 위로하신다.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계는 우리 육이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다. 육이 살기 위한 햇빛이 있고, 공기가 있고, 물이 있고, 집을 지을 수 있는 재료들이 있고, 먹을 수 있는 채소와 오곡백과가 준비되어 있다. 그러므로 육을 쓰는 사람이 의식주를 얻을 수 있도록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다.
좀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육뿐만 아니라 우리 심령을 위해서도 여러 준비를 해놓으셨다. 우리 육이 하늘의 태양 하나만 있어도 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태양뿐 아니라, 달도 지으시고, 별도 지으셨다. 이것은 우리의 심령 생활을 위해서 지으신 것 같다. 사람이란 때때로 별을 보거나 어떤 때에는 달을 보고 산다. 그러기에 우리가 ‘소망의 별’이라는 말을 한다.
우리의 육은 먹으면 산다. 육을 위해서 채소나 오곡백과만 있으면 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연계에 먹을 것만 만들지 아니하시고 아름다운 꽃들도 만드셨다. 그래서 봄으로부터 여름, 가을에 걸쳐 아름다운 꽃이 피는 자연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 육이 먹고 사는 데는 꽃이 필요 없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위해서는 꽃이 필요하다. 사람은 꽃도 보아야 한다.
공기도 그러하다. 우리 육을 위해서는 공기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기를 만드실 때 많은 공기가 쌓이면 아주 아름답게 빛나게 해서 이 지구는 언제든지 푸른 하늘로 둘러싸이게 지으셨다.
아침 해가 돋을 때나 저녁 노을은 마음을 순화시켜준다. 피어나는 꽃을 볼 때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여름의 무성한 나무는 너무나 시원스럽다. 문자 그대로 천자만홍(千紫萬紅)의 가을 단풍, 가을 저녁에 울어대는 벌레들의 노래, 온 땅을 은빛 세계로 변하게 하는 겨울의 흰 눈, 높이 솟은 산악과 기암 괴봉들,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으신 것들이다.
둘째, 성경 말씀으로 위로하신다.
우리가 자연계를 통해서 받는 위로도 크지만 우리에게 특별 계시를 주셨다. 그것이 성경이다. 세계 어느 책보다도 이 성경은 인간의 마음에 위로가 될 만한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 마음의 모든 상처를 고칠 수 있는, 말하자면 길르앗의 유향이 이 책 가운데 다 실려 있다.
우리 가운데 환난 중에 헤매는 분이 있는가? 시편 50편 15절을 읽어라.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편 91편을 보자. 마지막 부분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라고 했다.
시편 30편 4-11절에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그 노여움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라고 했다.
그래도 낙심됩니까? 시편 42편을 보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했다.
시편 62편을 보자.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라고 말씀했다.
왜 낙심합니까? 낙심될 때 성경을 읽어라. 새 힘을 얻게 될 줄 믿는다. 두려움에 싸여 사는 분이 계신가? 이사야 41장을 읽어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3장을 펴 보세요.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했다.
세상에서 악한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보고 마음이 편치 않으시고 의심이 생기는가? 시편 37편을 보자.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리라.”
우리 가운데 죄로 말미암아 마음속에 상처가 나서 아픔을 그대로 가지고 나오신 분 있는가? 이사야 1장 18절을 읽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했다.
우리 가운데 고독을 느끼시는 분이 있는가? 히브리서 13장 5절 말씀을 기억하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택한 사람을 하나님이 떠나지 아니한다. 이사야 46장 3-4절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했다. 왜 외로워하는가? 왜 쓸쓸해하는가?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위로하신다.
그리스도는 위로의 메시야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기 위해서이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이사야 9장에 이렇게 말씀했다.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여 주시기 위함이라”고 했다.
주님은 사망으로 오는 인간의 애통을 위로하시기 위해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적을 세 번씩이나 행하셨다.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 주심으로 그 부모의 상처를 위로해 주셨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리셔서 그 불쌍한 과부의 눈물을 씻어 주셨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를 다시 살려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셨다.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만 한 것이 아니고 몸소 보여주셨다. 그래서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사별(死別)의 뜨거운 눈물을 씻어 주실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
넷째, 성령을 통해서 위로하신다.
성령을 보혜사라고 했다. ‘보혜사’라는 말에는 ‘위로해 주시는 이’라는 뜻이다.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 위한 것이다. 성령의 상징 가운데 하나는 기름이다. 기름을 우리의 상처에 바르면 고통이 멎고 회복이 빠르다. 성령의 역사가 그렇다. 우리 마음의 상처를 없애 주시고 빨리 회복시켜 주신다.
성령의 다른 상징은 바람이다. 서늘한 바람은 우리를 시원하게 해 준다. 성령의 역사가 그렇다. 성령은 불로도 상징한다. 불은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 백성을 위로하신다. 자연계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위로해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 마음의 상처를 회복해 주고, 우리의 죄를 사해 주고, 우리에게 힘을 주어서 모든 것을 이기고 견딜 수 있게 하신다.
영어로 ‘위로’라는 말을 ‘comfort’라고 하는데 그 뜻은 ‘힘을 같이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로다.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에게 능력을 준다. 이 위로가 있는데 우리는 왜 항상 근심과 걱정에 싸여 살면서 낙심하고 자포자기하는가?
놀라우신 주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란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근심, 염려, 어떤 무거운 짐이 우리에게 있는가? 주님 앞에 나오면 그 심령에 새로움을 얻고,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안정과 평화와 기쁨을 얻을 수가 있다.
고후 1: 6 위로와 구원 -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
본 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당한 숱한 고난과 고린도 교회가 받은 위로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한다.
1]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고난이 구속적이었듯이 사도 바울의 고난도, 비록 동질(同質)의 것은 아니더라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사도로서 이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당하는 고난을 극복하게 하는 하나님의 위로 또한 그의 서신을 읽게 될 고린도 교인들과 아가야의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바울은 그가 환난을 당하든지 위로를 받든지 여전히 고린도 교인들에게 유익이 됨을 확신한다(4: 8-12, 15).
2]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사도들이 환난 중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던 것같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도 환난 중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로 말미암아 그들은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게 될 것이다. 환난 중에 사도들을 위로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하나님이다.
그는 오늘날도 우리에게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3]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왜냐하면, 그들이 고난과 핍박을 받을 때 먼저 고난을 경험한 바울의 예로부터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목격하고 위로를 받으며 지혜롭게 처신해 나감으로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후 1: 7 소망이 견고함 -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하다”는 말은 환난 받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을 것이라는 소망이 확실하다는 뜻이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과 구원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성도들에게는 세상에서 때때로 고난이 있으나 하나님의 위로도 확실히 있을 것이다!
1]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바울이 고난 가운데서 고린도 교인들을 격려할 수 있었던 것은 `소망' 때문이었다.
`소망'(*, 엘피스)은 문자적으로 '강한 확신'을 의미한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소망이 무엇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바울은 그것이 견고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즉 이단의 문제, 바울의 사도권에 관한 문제(3: 1. 4: 2. 5: 11-12. 7: 2. 10: 7, 11. 11: 6), 교회의 분열에 관한 문제에 대해(1: 10 이하) 다소의 혼란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바울과 그의 가르침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소망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확신은 고린도를 다녀온 디도를 통하여 기쁜 소식을 들음으로써 더욱 얻게 되었을 것이다(7: 6-7).
2]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바울이 이러한 소망을 굳게 갖게 된 것은 적어도 본서의 독자들인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였다고 보았고, 그것은 자신의 경험으로 확신하건대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가 주어지는 전제였기 때문이다.
현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參預)하는 자들에게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위로가 넘칠 것이고 결국 거기에는 확고한 소망이 있게 될 것이다.
* 벧전 5: 9-10 –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