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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物或行或隨(고물혹행혹수) : 고로 만물은 앞서기도 하고 뒤따르기도 하며,
或歔或吹(혹허혹취) : 따스하기도 하고 싸늘하기도 하며,
或强或羸(혹강혹리) :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고,
或挫或隳(혹좌혹휴) :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는 법이다.
是以聖人(시이성인) : 이런 연유로 성인은
去甚去奢去泰(거심거사거태) : 지나침(甚)을 버리고 사치스러움(泰)을 버리고 교만함(泰)을 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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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휘어잡고자 나대는 사람들이 있으나,
내 보건대 뜻대로 되지 않으리라.
세상은 신령스러운 기물(神器)인 것으로
뜻대로 되는 게 아닐지니,
하려고 들면 오히려 망치고,
잡고자 하면 오히려 놓칠 것이다.
고로 만물은
앞서기도 하고 뒤따르기도 하며,
따스하기도 하고 싸늘하기도 하며,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는 법이다.
이런 연유로 성인은
지나침(甚)을 버리고 사치스러움(泰)을 버리고 교만함(泰)을 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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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강남 역>
將欲取天下而爲之(장욕취천하이위지) : 천하를 취하고자 하지만
吾見其不得已(오견기불득이) : 내가 보건대 필경 성공하지 못하고 맙니다.
天下神器(천하신기) : 천하는 신령한 기물
不可爲也(불가위야) : 함부로 취할 수가 없고
爲者敗之(위자패지) : 취하고자 하면 실패하고
執者失之(집자실지) : 휘어 잡고자 하면 잃게 됩니다.
故物或行或隨(고물혹행혹수) : 그러므로 사물은 혹 앞서기도 하고 혹 뒤에서 따르기도 하고
或歔或吹(혹허혹취) : 숨을 천천히 쉬는 것이 있는가 하면 빨리 쉬는 것도 있고
或强或羸(혹강혹리) : 강한 것이 있는가 하면 약한 것도 있고
或挫或隳(혹좌혹휴) : 꺾이는 것이 있는가 하면 떨어지는 것도 있다
是以聖人(시이성인) : 따라서 성인은
去甚去奢去泰(거심거사거태) : 너무함, 지나침, 극단등을 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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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천하를 취하려 하면서 억지로 하려는 것
나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안다.
무릇 천하는 신명스러운 그릇이니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하는 자는 그르칠 것이고
잡으려는 자는 잃을 것이다
사물은 혹은 앞서 나가기도 하고 혹은 따르기도 하며
혹은 뜨겁기도 하고 혹은 차갑기도 하며
혹은 강하기도 하고 혹은 꺾이기도 하며
혹은 북돋우기도 하고 혹은 망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성인은
심하고 지나치고 사치한 것을 멀리한다.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夫天下神器也, 非可爲者也. 爲者敗之, 執者失之. 物或行或隨, 或熱或吹, 或彊或剉, 或培或墮. 是以聖人去甚去太去奢.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2003. 6. 30., 김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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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당 역>
세상을 휘어잡고 그것을 위해 뭔가 해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
내가 보건대 필경 성공하지 못한다.
세상은 신령한 기물
거기다가 함부로 뭘 하겠다고 할 수 없다.
거기다가 함부로 뭘 하겠다고 하는 사람 그것을 망치고
그것을 휘어잡으려는 사람 그것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만사는 다양해서 앞서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뒤따르는 것도 있고
숨을 천천히 쉬는 것이 있는가 하면 빨리 쉬는 것도 있고
강한 것이 있는가 하면 약한 것도 있고
꺾이는 것이 있는가 하면 떨어지는 것도 있다.
따라서 성인은
너무함, 지나침, 극단 등을 피한다.
<임채우 역>
29 천하에 작위하려는 것은
천하를 가지고 작위하려고 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될 수 없다.
천하는 신묘한 물건이라 작위할 수 없나니,
작위하면 실패하고 잡으려면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세상의 사물이란
앞서 가기도 하고 뒤따르기도 하며,
훈훈하게 데울 때도 있고 차게 식힐 때도 있으며,
강한 것도 있고 약한 것도 있으며,
더해지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심하게 하지 않고, 사치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다.
<James Legge 역>
1. If any one should wish to get the kingdom for himself, and to effect this by what he does, I see that he will not succeed. The kingdom is a spirit-like thing, and cannot be got by active doing. He who would so win it destroys it; he who would hold it in his grasp loses it.
2. The course and nature of things is such that What was in front is now behind; What warmed anon we freezing find. Strength is of weakness oft the spoil; The store in ruins mocks our toil. Hence the sage puts away excessive effort, extravagance, and easy indulgence.
<Lin Derek 역>
Those who wish to take the world and control it
I see that they cannot succeed
The world is a sacred instrument
One cannot control it
The one who controls it will fail
The one who grasps it will lose
Because all things:
Either lead or follow
Either blow hot or cold
Either have strength or weakness
Either have ownership or take by force
Therefore the sage:
Eliminates extremes
Eliminates excess
Eliminates arrogance
<장 도연 역>
제29장 성인은 사치와 탐욕, 오만함을 버리고 무욕을 보전한다
천하를 취하고자 억지를 일삼는 자는
결과가 좋을 수 없다.
천하(인류사회)는 대자연의 신성한 산물이기에
자기의 주관만 내세우고
자기의 뜻대로 개조하려 하면 안 된다.
억지로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실패하고
그것을 고집하는 사람은 다 잃고 만다.
때문에 억지로 일을 행하는 자는
반드시 실패하고
억지로 독점하는 자는
반드시 잃게 된다.
만물은 자기 발전의 규율이 있기 때문에
앞에서 가면 반드시 뒤에서 따르고
흡입하면 반드시 뿜어내고
강성하면 반드시 유약이 있고
상승하면 반드시 추락이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사치와 탐욕
교만한 마음을 갖지 않는다.
<왕필 노자주 / 임채우 역>
천하를 취해서 작위하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천하는 신묘한 기물이라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天下神器,
신(神)은 형체도 없고 방소도 없다. 그릇이란 (여러 요소가) 합하여 이루어지는데 무형으로써 합해졌으므로 신기(神器)라고 한다.
神, 無形無方也. 器, 合成也. 無形以合, 故謂之神器也.
<주석>
『주역』 「계사상전」에 “천지의 변화함을 본떠서 지나지 아니하며 만물을 곡진히 이루어서 빠뜨리지 아니하며, 밤낮의 도에 통하여 아는지라. 그러므로 신은 일정한 방소가 없고 역은 정해진 몸체가 없느니라.(範圍天地之化而不過, 曲成萬物而不遺, 通乎晝夜之道而知. 故神無方而易無體)”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작위할 수 없나니, 작위하면 실패하고 잡으려면 잃어버린다.
不可爲也, 爲者敗之, 執者失之.
만물은 스스로 그러함을 본성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따를 수는 있어도 작위할 수는 없고, 통할 수는 있어도 붙잡을 수는 없다. 사물에는 일정한 본성이 있는데 (억지로) 작위하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하고, 사물은 오고 가는데(즉 자기 나름대로 변화하고 있는데) 그것을 (억지로) 붙잡으려 하기 때문에 필히 놓치게 된다.
萬物以自然爲性, 故可因而不可爲也, 可通而不可執也. 物有常性, 而造爲之, 故必敗也. 物有往來, 而執之, 故必失矣.
그러므로 세상의 사물이란 혹 앞서 가기도 하고 혹 뒤따르기도 하며, 훈훈하게 데워줄 때도 있고 차갑게 식힐 때도 있으며,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꺾이기도(혹은 더해지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무너지기도 한다. 그래서 성인은 심한 것, 사치스러운 것, 지나친 것을 버린다.
<주석>
백서본을 따라 북돋울 배(培)로 해석했다.
故物或行或隨, 或歔或吹, 或强或羸, 或挫或隳. 是以聖人去甚, 去奢, 去泰.
<주석>
하상공은 “따뜻하게 부는 것이 후고 차갑게 부는 것이 취다(呴, 溫也. 吹, 寒也)”라고 했다.
이곳의 ‘혹’(或)자들은 사물들이 거스르고 따르고 뒤비치고 엎어지는 등 제멋대로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위적으로 붙잡고 가르지 않음을 말한다. 성인은 자연스레 타고난 본성을 통달하고, 만물의 실정을 꿰뚫고 있으므로 (사물에) 따르되 작위하지는 않으며, 순하게 좇지만 (먼저 나서서) 베풀지 않는다. 미혹되는 소이를 제거하고, 현혹되는 까닭을 없애므로 마음이 어지럽지 않고 사물이 타고난 제 본성을 얻게 된다.
凡此諸或, 言物事逆順反覆, 不施爲執割也. 聖人達自然之[性], 暢萬物之情, 故因而不爲, 順而不施. 除其所以迷, 去其所以惑, 故心不亂而物性自得之也.
<Stefan Stenudd 역>
Conquering the world and changing it,
I do not think it can succeed.
The world is a sacred vessel that cannot be changed.
He who changes it will destroy it.
He who seizes it will lose it.
So, among all things,
Some lead and some follow,
Some sigh and some pant,
Some are strong and some are weak,
Some overcome and some succumb.
Therefore the sage avoids extremity, excess, and extravagance.
Don’t Change the World
Lao Tzu continues his ecological thinking, more than two millennia ahead of time. In his own era, he was not alone in appreciating the world as it was, but he expressed it with rare sharpness and devotion.
He would not have approved of the Great Wall of China, which was begun around the time when this book is supposed to have been written. That colossal wall, which grew and grew by each century, is such a striking symbol of what Lao Tzu deplored, one must wonder if he watched its beginning with his own eyes.
The emperors, who tried to hold onto their vast domain by enclosing it, were indeed headed towards the failure he foresaw.
The bigger things are, the more difficult they are to grab and keep. The world is simply too much. So are countries, even rather small ones. Any one of them has had countless rulers, even dynasties, where the mightiest of kings have been replaced, borders have been moved, treasures have changed owners, and castles have been vacated. Power is not persistent.
Many have tried to change the whole world or some significant parts of it. We seem to be getting good at it, lately. But each such change must be constantly renewed and fortified. Otherwise, the world will soon return to its previous state. Man-made changes wither, often quicker than men do.
Nature gnaws down unattended buildings, grass pierces through asphalt, and forests move in on lawns that aren’t mowed regularly. Animals, too, feast on civilization as they do on nature. The changes we make are splendid only in our own eyes, and we should refrain from blinking if we want the sight to remain.
Change Is the Nature of Nature
What makes the world difficult to change in a lasting way is not its reluctance to change, but because it’s so familiar with it. The world itself is a master of change. That’s how it was made in the first place, and that’s how it continues to remake itself.
From the smallest to the biggest part of the world, everything changes. Water evaporates, rising to the sky, and falls back on the ground as rain. Forests grow, burn down, and grow back up again. Even the vast continents move across the surface of the planet, as if playing their own Rubik’s Cube.
Our whole planet is spinning around its axis, and around the sun, in a remarkable race which is still insignificant compared to the movements of galaxies and the expansion of the whole universe. Everything is changing, and most of those changes are far superior to anything the human being can accomplish.
We don’t fail because we try to change things, but because we want to stop them from changing. What little adjustments we do to the world, we don’t want undone. We build our houses and want them to remain exactly as they were immediately after the roofing.
That’s futile. Decay starts already at the beginning of growth. Change has neither beginning nor end. We can never fully control it, since we are mere parts of it.
So, what Lao Tzu states about the consequences would be true, if change and seizure of the world were at all possible. If the world could be changed into a fixed state, which is what we would try, it could only lead to destruction. We would have to stop time, and where would that leave us?
Costly Dreams
There is an order to life, and we play our parts in it. That’s fine, and grants us enough liberty to explore our capacities and take delight in them. But if we try to overstep our boundaries, extend beyond our capacities, we will fail miserably and painfully.
There is no satisfaction in pretense, if allowed to guide our lives. We need to be what we are, not what we would like to be. Otherwise we can never come to like ourselves, and then we will never be pleased.
Lao Tzu understands the temptation of overdoing things and reaching beyond our wildest dreams. But he also knows about the price that needs to be paid for it. It’s inevitable, since chasing our dreams means running away from our reality.
He wants us to start by reexamining what we have and what we are, because he is confident that doing so, we will find it to be sufficient. Then we can enjoy it. What more to ask for?
<사봉 역> 將欲取天下而爲之(장욕취천하이위지)천하를 얻고자 억지로 애쓰는 사람들이 많은데吾見其不得已(오견기부득이)나는 그들이 세상을 얻는 것을 본 적이 없다天下神器(천하신기)천하는 신령스러운 그릇과 같아서不可爲也(불가위야)억지로 애쓴다고 얻을 수는 없다爲者敗之(위자패지)억지로 애쓰는 사람은 실패하고執者失之(집자실지)억지로 얻더라도 그것을 잃게 된다故物(고물)그러므로 세상의 일은或行或隨(혹행혹수)앞섰다 뒤쳐졌다 하고或歔或吹(혹허혹취)따뜻했다 싸늘했다 하며或强或羸(혹강혹리)강했다가 약했다 하며或培或隳(혹배혹휴)높아졌다 무너졌다 한다.是以聖人(시이성인)그래서 성인은去甚(거심)억지를 부리지 않고去奢(거사)사치하지 않으며去泰(거태)안락함에 매달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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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이명권 http://cafe.daum.net/koreanashram/8IoM/34
도덕경 29장. 천하신기(天下神器)와 성도(聖徒)의 길
1. 욕취천하(欲取天下)와 종으로서 얻는 도리
<장차 천하를 걸머쥐고 뭔가 해 보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치고
그것을 이룬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장차 세상에서 무언가 큰일을 해 보겠다는 의지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의지가 사사로운 욕심 때문이라면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 오히려 눈앞의 이익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혹은 세상을 위해 자기 몸을 헌신했던 사람들의 결과는 당대 혹은 후대에 반드시 꽃이 피게 되어 있다. 노자는 인위적인 노력을 가해 강압이나 억지로 천하를 쥐어흔들며 뭔가 해 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성공을 거둔 사람은 유사 이래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역사를 되 볼아 보아도 그 말은 타당하다. 비록 노자 시대 훨씬 이후이긴 하지만, 중국 춘추전국 시대를 마감하고 최초로 중국 천하를 통일했던 진시황(秦始皇, 기원전259-210)도 그의 강압적이고 무력적 통치의 결과 그 나라는 오래가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불과 몇 십 년 밖에 살아남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쌓은 만리장성이나, 길이 6백 90미터에 달하는 호화 왕궁 아방궁도 오히려 백성들의 원망만 얻는 것뿐이었다. 어디 그 뿐 이었던가? 억압적 통치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냈던 4백 6십 여 명의 선비를 산채로 생매장 하고 진나라 이외의 역사서와 주요 서적들을 불태운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끔직한 폭정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근세사에서도 이와 같은 유사한 실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이나, 이라크의 후세인, 여성을 억압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이 이끈 크메르루즈의 킬링필드, 아프리카 르완다의 대량학살, 북한의 독재정권 등 이루 다 열거 할 수 없다. 이들 모두가 천하를 쥐고 흔들어 보겠다는 일부 정치가들의 잘못된 야욕으로 말미암는 역사적인 비극의 대표적 사건들이다. 물론 미국이 베트남이나 이라크를 침공한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이 모두가 역사의 실패작이다. 천하를 쥐고 흔들어 보겠다는 야심가들을 향해 ‘나는 그 성공 사례를 보지 못했노라(吾見其不得已)’고 노자는 이른다.
천하를 대하는 예수의 심정은 어떠했던가? 예수가 나이 30에 이르러 그의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할 무렵 광야에서 사십일 간의 금식을 마친 후에 마귀의 유혹을 받는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다(마태복음 4:1-11). 첫째는 배가 굶주린 후에 받은 첫 유혹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는 내용이고, 둘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면 천사가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을 것이라’고 유혹한다. 셋째는 마귀가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천하만국(天下萬國)과 그 영화(榮華)를 보여주며, ‘엎드려 경배하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한다. 이에 예수는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치며 ‘다만 하나님만 섬기고 경배할 것’을 말한다.
천하를 얻는 것은 욕심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도리어 천하는 비우는 자만이 얻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자유자로서 오히려 종의 모습을 지닐 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린도전서 9:19).” 이 역설의 진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고, 알아도 실천 하는 사람이 적다. 영성의 사람은 바로 이점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로서 많은 생명을 살리는 일, 이는 바로 죽고자 하는 이는 살리라는 교훈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2. 천하신기(天下神器)와 무욕(無慾)의 봉사
<천하는 신령한 그릇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뭔가를 하겠다고 대 들 수는 없는 것이다. 함부로 대드는 자는 패할 것이요, 휘어잡으려 하는 자는 잃을 것이다.>
天下神器, 不可爲也. 爲者敗之, 執者失之.
천하는 신묘한 그릇이요, 하나님의 발등상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그릇이나 용기가 아니다. 오히려 인위적 힘을 가할수록 부작용만 커진다. 가정이나 조직이나 국가도 그렇지만, 자연 환경으로서의 지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창조한 생태학적 천연의 자연세계를 인간이 함부로 다루면서부터 생태계의 파괴와 오염이 심각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신성한 자연 세계에 함부로 물리적 힘을 가하거나 녹지를 훼손하는 일을 계속할 때, 전 지구적 자연재해와 병폐는 갈수록 심각해 질 수밖에 없다.
‘위자패지(爲者敗之) 집자실지(執者失之)’ 이 말은 노자의 전체 사상 가운데 인간의 처세 방법을 가장 간명하고 실감나게 요약해 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승자와 성공자는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누누이 강조되는 부분이지만 한마디로 ‘무위(無爲)’의 삶을 살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관계에서도 심리적으로 볼 때 너무 잡아 두려고 하다보면 도망가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남녀관계가 특히 그러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起心)' 같은 '머무는(住)' 마음이 없이 살아야 할 것이다. 목적이 분명하고 상호 관심사가 두터우며 이루어가고자 하는 일과 방향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일치 될 때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지만, 이상과 방향이 조금씩 다른데 이를 억지로 합치려 하거나 휘어 잡으려 한다면 어느 틈엔지 빠져나가고 마는 것이다. 두루미가 냇물에 들어가서 먹이를 잡으려고 허둥대는 일은 결코 없다. 가만히 서 있다가 어느 순간 고기를 잡아채거나 아니면 천천히 걸음을 옮기지만 결코 굶주리는 법이 없다.
성서에서 예수의 제자 가운데 가롯 유다는 돈 때문에 예수를 팔아 넘겼다. 그러나 그는 돈도 잃고 예수도 잃었다. 오히려 구약시대의 하박국 선지자는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를 인해 즐거워했다(하박국 3:17-18).’ 다니엘 선지자 또한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기원전 585년경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 왕족 가문의 청년 다니엘은 그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뜨거운 풀무에 던져진다 해도 하나님이 건져내시리라고 믿었고, 하나님께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다니엘3:18)’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겠다는 굳은 신념을 보이고 있다. 자기 신념에 충실한 사람들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보상을 바라지 않기에 집착하는 일도 없다. 그야말로 앞서 보았던 대로 ‘위이불시(爲而不侍)’ 즉 봉사를 하되 거기에 기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위의 삶이요 영성이다.
3. 팔물(八物)과 성인의 중도(中道)
< 그러므로 세상만물은 혹 앞서 가기도하고 뒤따라가기도 하며, 흐느끼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하며, 혹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며, 실려가기도하고 떨어지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정도에 지나치거나 사치하거나 거만하지 않는다.>
故物或行或隨, 或歔或吹, 或强或羸, 或載或隳.
是以聖人去甚去奢去泰.
불교에서 팔불중도(八不中道)라는 것이 있다. 이를테면 나가르주나(龍樹)의 사상을 대표하는 중관파(中觀派)의 사상으로서, 생멸(不生不滅), 단상(不斷不常), 일이(不一不異), 거래(不去不來)라는 여덟 가지의 대립적인 견해를 떠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양 극단의 대립을 떠난 중도의 입장을 견지하라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니며, 일시적인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며, 하나인 것도 다른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라 모두가 연기적 생성과 소멸을 거듭 할 뿐이므로 본질상 공(空)만이 참이 된다는 논리다. 이러한 공을 일러 불교에서는 논리적으로 중도라 부른다. 불교의 교학적인 입장에 따라 법상(法相)-유식(唯識) 계열에서는 비유비공(非有非空)을, 화엄종에서는 법계(法界)를 중도로 삼고 있을 따름인데, 그 근본 취지는 연기(緣起)적 실상(實相)을 바로보고 편견과 아집(我執)을 벗어나자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만물(物)의 행동방식은 본문에서는 여덟 가지(八物)로 설명되고 있지만 그것이 비단 여덟 가지로 끝나는 것이 아님은 말 할 것도 없다. 그야말로 세상만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애통하며 흐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칭찬하며 웃는 사람도 있다. 또한 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약한 사람이 있고, 수레에 실려 가거나 가다가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시험에 합격하거나 떨어지는 경우와도 마찬가지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 모든 것이 서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다. 상대적이라는 말이다. 세상일치고 어느 것 하나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이 있던가? 그러므로 사물 사건을 그저 편견과 극단적인 치우침 없이 중도적 입장에서 여실(如實)히 잘 관찰하고 판단하며 행동 할 일이다. 그래서 성인은 지나치지도 않고 사치하지도 않으며 거만하지도 않다고 했다.
예수의 삶은 바로 중도적 삶이었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아니했던 것이다. 아가페 사랑이라는 대전제하에 율법의 걸림돌을 넘어서서 극단으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라 했고,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율법에 따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하는 군중을 향하여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함으로써 여인도 살리고 율법도 완성할 수 있었다. 예수는 또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함으로써, 종의 도리를 수행하여 겸손의 미덕을 보였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기도 하고,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기도 한다. 이것이 예수의 역설이요 중도의 삶이었다. 그러한 정신 때문에 그는 당시의 천민구역으로 여기던 이방의 도시 사마리아를 찾아 갔고,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과 깊은 영혼의 교제를 나눈 것이었다. 잃어버린 도시의 인간성을 회복하고 소외된 영혼을 살리는 길, 그것이야말로 성인이 가야 할 길이었기 때문이다.
천하는 만만치 않은 신묘한 그릇이다. 그러므로 ‘누가 봉사하려거든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겸손의 길이요, 무위(無爲)의 길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힘으로 하는 자는 패할 것이며(爲者敗之) 또한 백번 잃을 것이다(執者實之). 그러나 세상을 하늘이 내려준 그릇(天下神器)이라 생각 한다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갈라디아서 1:10)’로서 자신의 ‘지체(肢體)를 의(義)의 종으로 삼아’(로마서 6:19), 위엣 것을 생각하고(골로새서 3:1) 성령을 위해 심는 자(갈라디아서 6:8)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존천리(存天理) 거인욕(去人慾)의 삶이요 성인의 길이자 성도(聖徒)의 길이기 때문이다.
<인용>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otorikey&logNo=221416848407
도덕경 29장. 천하신기(天下神器)와 성도(聖徒)의 길
1. 욕취천하(欲取天下)와 종으로서 얻는 도리
<장차 천하를 걸머쥐고 뭔가 해 보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치고
그것을 이룬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장차 세상에서 무언가 큰일을 해 보겠다는 의지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의지가 사사로운 욕심 때문이라면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 오히려 눈앞의 이익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혹은 세상을 위해 자기 몸을 헌신했던 사람들의 결과는 당대 혹은 후대에 반드시 꽃이 피게 되어 있다. 노자는 인위적인 노력을 가해 강압이나 억지로 천하를 쥐어흔들며 뭔가 해 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성공을 거둔 사람은 유사 이래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역사를 되 볼아 보아도 그 말은 타당하다. 비록 노자 시대 훨씬 이후이긴 하지만, 중국 춘추전국 시대를 마감하고 최초로 중국 천하를 통일했던 진시황(秦始皇, 기원전259-210)도 그의 강압적이고 무력적 통치의 결과 그 나라는 오래가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불과 몇 십 년 밖에 살아남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쌓은 만리장성이나, 길이 6백 90미터에 달하는 호화 왕궁 아방궁도 오히려 백성들의 원망만 얻는 것뿐이었다. 어디 그 뿐 이었던가? 억압적 통치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냈던 4백 6십 여 명의 선비를 산채로 생매장 하고 진나라 이외의 역사서와 주요 서적들을 불태운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끔직한 폭정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근세사에서도 이와 같은 유사한 실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이나, 이라크의 후세인, 여성을 억압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이 이끈 크메르루즈의 킬링필드, 아프리카 르완다의 대량학살, 북한의 독재정권 등 이루 다 열거 할 수 없다. 이들 모두가 천하를 쥐고 흔들어 보겠다는 일부 정치가들의 잘못된 야욕으로 말미암는 역사적인 비극의 대표적 사건들이다. 물론 미국이 베트남이나 이라크를 침공한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이 모두가 역사의 실패작이다. 천하를 쥐고 흔들어 보겠다는 야심가들을 향해 ‘나는 그 성공 사례를 보지 못했노라(吾見其不得已)’고 노자는 이른다.
천하를 대하는 예수의 심정은 어떠했던가? 예수가 나이 30에 이르러 그의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할 무렵 광야에서 사십일 간의 금식을 마친 후에 마귀의 유혹을 받는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다(마태복음 4:1-11). 첫째는 배가 굶주린 후에 받은 첫 유혹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는 내용이고, 둘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면 천사가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을 것이라’고 유혹한다. 셋째는 마귀가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천하만국(天下萬國)과 그 영화(榮華)를 보여주며, ‘엎드려 경배하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한다. 이에 예수는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치며 ‘다만 하나님만 섬기고 경배할 것’을 말한다.
천하를 얻는 것은 욕심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도리어 천하는 비우는 자만이 얻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자유자로서 오히려 종의 모습을 지닐 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린도전서 9:19).” 이 역설의 진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고, 알아도 실천 하는 사람이 적다. 영성의 사람은 바로 이점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로서 많은 생명을 살리는 일, 이는 바로 죽고자 하는 이는 살리라는 교훈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2. 천하신기(天下神器)와 무욕(無慾)의 봉사
<천하는 신령한 그릇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뭔가를 하겠다고 대 들 수는 없는 것이다. 함부로 대드는 자는 패할 것이요, 휘어잡으려 하는 자는 잃을 것이다.>
天下神器, 不可爲也. 爲者敗之, 執者失之.
천하는 신묘한 그릇이요, 하나님의 발등상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그릇이나 용기가 아니다. 오히려 인위적 힘을 가할수록 부작용만 커진다. 가정이나 조직이나 국가도 그렇지만, 자연 환경으로서의 지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창조한 생태학적 천연의 자연세계를 인간이 함부로 다루면서부터 생태계의 파괴와 오염이 심각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신성한 자연 세계에 함부로 물리적 힘을 가하거나 녹지를 훼손하는 일을 계속할 때, 전 지구적 자연재해와 병폐는 갈수록 심각해 질 수밖에 없다.
‘위자패지(爲者敗之) 집자실지(執者失之)’ 이 말은 노자의 전체 사상 가운데 인간의 처세 방법을 가장 간명하고 실감나게 요약해 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승자와 성공자는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누누이 강조되는 부분이지만 한마디로 ‘무위(無爲)’의 삶을 살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관계에서도 심리적으로 볼 때 너무 잡아 두려고 하다보면 도망가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남녀관계가 특히 그러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起心)' 같은 '머무는(住)' 마음이 없이 살아야 할 것이다. 목적이 분명하고 상호 관심사가 두터우며 이루어가고자 하는 일과 방향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일치 될 때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지만, 이상과 방향이 조금씩 다른데 이를 억지로 합치려 하거나 휘어 잡으려 한다면 어느 틈엔지 빠져나가고 마는 것이다. 두루미가 냇물에 들어가서 먹이를 잡으려고 허둥대는 일은 결코 없다. 가만히 서 있다가 어느 순간 고기를 잡아채거나 아니면 천천히 걸음을 옮기지만 결코 굶주리는 법이 없다.
성서에서 예수의 제자 가운데 가롯 유다는 돈 때문에 예수를 팔아 넘겼다. 그러나 그는 돈도 잃고 예수도 잃었다. 오히려 구약시대의 하박국 선지자는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를 인해 즐거워했다(하박국 3:17-18).’ 다니엘 선지자 또한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기원전 585년경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 왕족 가문의 청년 다니엘은 그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뜨거운 풀무에 던져진다 해도 하나님이 건져내시리라고 믿었고, 하나님께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다니엘3:18)’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겠다는 굳은 신념을 보이고 있다. 자기 신념에 충실한 사람들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보상을 바라지 않기에 집착하는 일도 없다. 그야말로 앞서 보았던 대로 ‘위이불시(爲而不侍)’ 즉 봉사를 하되 거기에 기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위의 삶이요 영성이다.
3. 팔물(八物)과 성인의 중도(中道)
< 그러므로 세상만물은 혹 앞서 가기도하고 뒤따라가기도 하며, 흐느끼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하며, 혹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며, 실려가기도하고 떨어지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정도에 지나치거나 사치하거나 거만하지 않는다.>
故物或行或隨, 或歔或吹, 或强或羸, 或載或隳.
是以聖人去甚去奢去泰.
불교에서 팔불중도(八不中道)라는 것이 있다. 이를테면 나가르주나(龍樹)의 사상을 대표하는 중관파(中觀派)의 사상으로서, 생멸(不生不滅), 단상(不斷不常), 일이(不一不異), 거래(不去不來)라는 여덟 가지의 대립적인 견해를 떠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양 극단의 대립을 떠난 중도의 입장을 견지하라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니며, 일시적인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며, 하나인 것도 다른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라 모두가 연기적 생성과 소멸을 거듭 할 뿐이므로 본질상 공(空)만이 참이 된다는 논리다. 이러한 공을 일러 불교에서는 논리적으로 중도라 부른다. 불교의 교학적인 입장에 따라 법상(法相)-유식(唯識) 계열에서는 비유비공(非有非空)을, 화엄종에서는 법계(法界)를 중도로 삼고 있을 따름인데, 그 근본 취지는 연기(緣起)적 실상(實相)을 바로보고 편견과 아집(我執)을 벗어나자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만물(物)의 행동방식은 본문에서는 여덟 가지(八物)로 설명되고 있지만 그것이 비단 여덟 가지로 끝나는 것이 아님은 말 할 것도 없다. 그야말로 세상만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애통하며 흐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칭찬하며 웃는 사람도 있다. 또한 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약한 사람이 있고, 수레에 실려 가거나 가다가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시험에 합격하거나 떨어지는 경우와도 마찬가지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 모든 것이 서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다. 상대적이라는 말이다. 세상일치고 어느 것 하나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이 있던가? 그러므로 사물 사건을 그저 편견과 극단적인 치우침 없이 중도적 입장에서 여실(如實)히 잘 관찰하고 판단하며 행동 할 일이다. 그래서 성인은 지나치지도 않고 사치하지도 않으며 거만하지도 않다고 했다.
예수의 삶은 바로 중도적 삶이었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아니했던 것이다. 아가페 사랑이라는 대전제하에 율법의 걸림돌을 넘어서서 극단으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라 했고,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율법에 따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하는 군중을 향하여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함으로써 여인도 살리고 율법도 완성할 수 있었다. 예수는 또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함으로써, 종의 도리를 수행하여 겸손의 미덕을 보였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기도 하고,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기도 한다. 이것이 예수의 역설이요 중도의 삶이었다. 그러한 정신 때문에 그는 당시의 천민구역으로 여기던 이방의 도시 사마리아를 찾아 갔고,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과 깊은 영혼의 교제를 나눈 것이었다. 잃어버린 도시의 인간성을 회복하고 소외된 영혼을 살리는 길, 그것이야말로 성인이 가야 할 길이었기 때문이다.
천하는 만만치 않은 신묘한 그릇이다. 그러므로 ‘누가 봉사하려거든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겸손의 길이요, 무위(無爲)의 길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힘으로 하는 자는 패할 것이며(爲者敗之) 또한 백번 잃을 것이다(執者實之). 그러나 세상을 하늘이 내려준 그릇(天下神器)이라 생각 한다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갈라디아서 1:10)’로서 자신의 ‘지체(肢體)를 의(義)의 종으로 삼아’(로마서 6:19), 위엣 것을 생각하고(골로새서 3:1) 성령을 위해 심는 자(갈라디아서 6:8)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존천리(存天理) 거인욕(去人慾)의 삶이요 성인의 길이자 성도(聖徒)의 길이기 때문이다.
<인용>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otorikey&logNo=221416848407
“덜고 덜고 덜어서” - 去甚去奢去泰 -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29
“장차 천하를 취하고 그것을 행하는데, 그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이미 보았다. 천하는 신령한 그릇이니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다. 무엇이 되려는 자는 실패하고, 무엇을 잡으려는 자는 그것을 잃는다. 그러므로 만물은 나아가거나 혹은 뒤따르고, (숨을) 내쉬거나 혹은 (입김을) 불고, 굳세거나 혹은 파리하고, 꺾이거나 혹은 떨어진다. 이럼으로써 성인은 지나친 것을 덜고, 과분한 것을 덜고, 심한 것을 덜어낸다.” <노자 도덕경 29장>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天下神器, 不可爲也. 爲者敗之, 執者失之. 故物 或行或隨. 或歔或吹. 或强或羸. 或載或隳. 是以聖人去甚, 去奢, 去泰(大).
강함과 명분과 영화를 추구하는 것은 천하를 얻으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정치가 무력과 바른 명분과 사직의 번영을 추구하면 약하거나 뒤쳐진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정치는 오히려 천하의 혼란을 초래할 뿐 천하를 얻을 수 없습니다. 천하를 지배하려는 욕망은 인위적인 질서를 요구하게 됩니다. 예는 덕으로 다스린다고 하지만 예 또한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폭력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전쟁 또한 인위적인 질서를 추구하는 극단적인 수단입니다. 무력을 쓰는 것은 상대방이 복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물은 스스로 고유한 자연적 질서를 갖추고 있어서 인위적인 명령을 거부합니다. 그러므로 전쟁은 곧 자연의 도와 싸우는 길입니다.
무슨 일이든 인위적으로 하지 않고 자연에 내맡기는 것이 가장 잘 하는 것입니다. 사물의 다양한 모습과 기능의 다양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 생긴 대로 잘 피어나게 하는 것이 좋은 정치입니다. 가장 잘 다스리는 것은 다스리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 그러면서 각자의 기능을 잘 발휘하도록 하는 큰 중심을 쥐고 있는 것이 가장 잘 다스리는 노자의 정치사상입니다. 천하는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늘 아래 기생해서 살아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천하를 끝까지 취하려는 자는 세상의 법칙에 따라서 끝내 천하를 취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극심하고, 사치하고, 과분한 것을 취하지 않습니다.
'심층생태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자연의 주인도 아니고, 청지기도 아닌 자연의 친구이다. 우리가 우월감이나 열등감 없이 다른 사람들과 우리 스스로를 동일시할 수 있을 때, 친구 사이가 되는 것이다. 친구사이의 우정은 가장 순수하면서도 고귀한 관계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친구를 해코지하거나 착취하거나 다치게 하거나 모욕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자연에게서 받은 모든 것은 선물이다. 그 선물이 음식이건, 물이건, 햇빛이건 혹은 다른 무엇이건. 모든 것은 선물이다.
모든 생명체는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생명체에 대한 심오한 공경의 느낌을 경험하기 시작하고, 아름다움과 고결함, 풍요로움과 너그러움, 그리고 전체 생명의 그물을 지배하는 경제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통제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대신에, 우리는 정교하게 짜여진 생명의 그물의 과정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더 이상 지구의 주인이나 청지기가 아니라 참가자이자 지구의 공동 창조자이다. <사티쉬 쿠마르(Satish Kumar)의 “자연으로부터 배운다” 중에서>
교회의 예식에서 성만찬은 예수님을 기억함으로써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걸었던 길을 따르는 의지에 동참하게 합니다. 모든 생명을 살리기 위한 하늘의 밥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삶을 더듬어 찾으며 닮으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바쳐 모든 담을 헐어버리고, 갈라져 있던 사이를 화해시킨 그 사건을 기억하는 성만찬이 오히려 분리와 담을 쌓게 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은 분명한 비극일 것입니다.
또한 성만찬은 하느님과 자연과 사람에 대한 감사를 되새기게 하는 예식입니다. 성만찬을 통하여 생존을 위해 가장 필요한 먹는 행위를 예식으로 행함으로써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과, 사람들의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선물로 주는 자연과, 다른 사람을 위해 땀 흘려 수고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특히 자연은 소유나 개발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살리는 바탕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넘치는 것을 덜어내면서 자연을 닮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나친 것을 덜고, 과분한 것을 덜고, 심한 것을 덜어서 나눔의 원리를 따를 때에 우리의 공동체는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듯이 나는 누군가에 의해 먹임을 입고, 함께 먹을 수 있고, 누군가를 먹일 수 있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깨닫는 것이 “살림의 잔치”를 펼치는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주라”고 하십니다. 없는 것을 줄 수는 없습니다. 갖지 못한 것을 베풀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이미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깨닫고 보면,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가 받은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하늘로부터 받은 것임을 깨닫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소유관념과 다릅니다. 하느님이 주셔서 받았고 또 받아서 감사하다면, 주신 마음을 헤아리고 그 뜻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어린 양 같은 무리와 함께 아파하는 마음은 빵을 쪼개고 소유를 부수게 합니다. 빵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면, 가르침을 깨닫고 행함은 우리의 마음씨입니다. 감사의 마음, 축복의 마음은 나눔의 마음씨로 확장됩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가진 것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씨는 생명의 밥상, 살림의 잔치를 마련하는 시작입니다. 빵을 쪼개어 소유를 나누고, 깨달은 말씀을 몸과 마음으로 선포하는 일은 무턱대고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타인이나 다른 생명과 사이좋게 지내는 일입니다.” <미친 예수(이병일, 도서출판 밥북, 2017), “살림의 잔치, 생명의 밥상 1,2” 중에서>
http://cafe.daum.net/frog0052/VJ3y/80?q=%E5%8E%BB%E7%94%9A%E5%8E%BB%E5%A5%A2%E5%8E%BB%E6%B3%B0
강의실 밖 강의실 2018년 강의
노자 도덕경 29장, 去甚 去奢 去泰
2018-10-26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장욕취천하이위지, 오견기부득이
天下神器, 不可爲也.
천하신기, 불가위야.
爲者敗之, 執者失之.
위자패지, 집자실지.
故物, 或行或隨, 或歔或吹, 或强或羸, 或培或隳.
고물, 혹행혹수, 혹허혹취, 혹강혹리, 혹좌혹휴.
是以 聖人, 去甚, 去奢, 去泰.
시이 성인, 거심, 거사, 거태.
<인용>
https://tip.daum.net/openknow/52003400?q=%E5%8E%BB%E7%94%9A%E5%8E%BB%E5%A5%A2%E5%8E%BB%E6%B3%B0
제29장
원문:
將欲取天下而爲之,吾見其不得已.天下神器不可爲也,爲者敗之,執者失之.
夫物或行或隨,或呴或吹,或强或羸,或载或隳.是以聖人去甚去奢去泰.
원문번역:
천하를 얻자고 애를 쓴다고 하더라도 내가 보기에는 얻을 수 없을 것이라. 천하는 신령스런 그릇이라 함부로 얻자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니, 얻자고 하면 실패할 것이요 가지자고 하면 잃게 되니라.
사물이란 앞에서 갈 때도 있고 뒤에서 따를 때도 있으며 녹일 때도 있고 얼굴 때도 있으며 강할 때도 있고 약할 때도 있으며 안정될 대도 있고 위태로울 때도 있는 법이라, 성인(聖人)은 지나침과 사치함과 과분함을 모두 버린다.
키워드:
天下神器不可爲也
천하란 신성(神聖)한 기물이라 마음대로 해서는 아니되느니라. 중국어발음: 톈 시아 선 치 뿌 커 웨이 예(tian1 xia4 shen2 qi4 bu4 ke3 wei2 ye3. 천하신기불가위야).
是以聖人去甚去奢去泰
때문에 성인은 지나침을 버리고 사치함을 버리고 과분함을 버리니라. 중국어발음: 쓰 이 썽 런 취 썬 취 서 취 타이(shi4 yi3 sheng4 ren2 qu4 qi2 shen4 qu4 she2 qu4 tai4. 시이성인거심거사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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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천하를 취하려 하면서 억지로 하려는 것, 나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안다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여기에서 '이(已)'는 동사가 아니라 어조사다(범응원). "나는 그것이 부득이함을 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천하를 어떻게 취할 것인가는 『노자』의 주요한 주제 중의 하나다. 앞에서 『노자』는 여러 번 이에 대해 조언했다.
바야흐로 천하를 취하려 한다면 언제나 일이 없음으로 해야 할 것이니 만약 일이 있게 되면 천하를 취하기에 충분하지 않다(48).
올바름으로는 나라를 다스리고 기이함으로는 군사를 지휘하니 일삼음이 없음이라야 천하를 취할 수 있다(57).
이 때문에 성인이 백성 위에 자리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말을 낮추고, 백성 앞에 자리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몸을 뒤로 한다. 그러므로 앞에 있더라도 백성들은 해롭다고 여기지 않고 위에 있더라도 백성들은 무겁다고 여기지 않는다. 천하가 즐겨 추존하여 싫어할 줄 모르니 다투지 않기 때문이 아니던가(66).
이런 말을 종합해볼 때 천하란 시세의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손에 쥘 수 있는 것이지 억지로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이 없음 또는 일삼음이 없다는 것〔無事〕은 곧 무위이며, 무위는 인순과 순응이다. 무엇에 순응하는가? 세상의 변화에 순응한다. 그러므로 때가 무르익어 세상 사람이 모두 환호할 때까지 자기를 숨기고 의욕을 감추며 기다려라. 성왕 문왕이 이미 천하의 3분의 2를 가지고도 주왕을 섬긴 것이 바로 이런 전략이다.
중국에서는 어느 누구도 명분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명분은 자기가 주장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만들어주고, 때가 만들어주며, 사람들이 만들어준다. 뜻이 있더라도 명분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고, 뜻이 없더라도 명분이 있으면 움직여야 한다. 인순은 명분이 쌓이기를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다.
누가 이런 명분 의식을 만들어놓았는가? 공자가 만들었다. "공자가 춘추를 완성하자 난신 적자가 두려워하였다(『맹자』 「등문공하」)." 중국을 이해할 때 『춘추』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명분의 역사적 증거이기 때문이다. 『노자』를 이해할 때도 공자는 여전히 중요한 인물이다.
천하를 취할 때 언제나 시세에 순응하라는 교훈은 『노자』만의 것이 아니다. 이 점은 주희도 지적했다.
도가의 학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순〔因〕이라는 말이다. 모든 일은 단지 인순하여 행할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인순이란 사물의 이치〔理〕를 따르고 자기가 관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이치는 유자(儒者)의 육경에서 종종 얘기하는 것이니 오직 도가의 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설혜).
이 말은 맞다. 단, 『노자』의 인순과 유가의 인순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유가의 인순은 주희가 말하듯이 이치〔理〕에 따르고, 『노자』의 인순은 도에 따른다. 유가의 이치도 도라고 할 수 있고, 도도 이치라고 할 수 있지만 구체적 함의가 다르다. 유가의 도는 결국 예고, 도가의 이치는 결국 반예(反禮)다. 같은 점도 있다. 유가의 인순이나 『노자』의 인순이나 모두 자기〔私〕를 버린다는 점에서는 같다. 유가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이치를 알 수 있다고 하고, 『노자』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도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한다.
『노자』는 언제나 시세에 순응하라고 충고한다. 유가에는 설령 시세가 불리하더라도 마땅히 해야 한다면 행동에 옮기는 의식이 있다. 『노자』는 장생구시를 목적으로 하지만 유가에는 성인(成仁)을 위해서는 살신(殺身)해도 좋다는 신념이 있다. 그렇지만 세상의 흐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유가에게도 시세를 따르는 것이 곧 도덕이고 의무다. 시세란 하늘과 사람의 마음이고, 그 마음이 도덕 원칙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유가는 난세에는 반드시 난세를 뒤집으라는 시대의 요청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천하의 공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낙관론이다.
『노자』도 마찬가지다. 난세가 깊으면 반드시 구세의 시기가 온다는 게 『노자』의 믿음이다. "뒤집어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낙관론이다. 유가는 도덕적 의무감으로 행동하고, 『노자』는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여 행동하지만 행동의 때는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가와 도가는 서로 다투게 된다. 시세에 대한 독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유가가 한 시대를 태평세로 읽는 동안 『노자』는 똑같은 시대를 난세로 읽는다. 시세에 대한 독해가 다른 것은 그를 둘러싼 이해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이해 관계가 다른 독해를 낳는다.
그래서 결국 이것들은 모두 명분이다. 도든 이치든 명분에 불과하다. 명분의 알맹이는 실리다. 그렇지만 실리를 노골적으로 추구하고 명분을 소홀히 한다면 결국 망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실리의 추구는 다시 명분을 요구한다. 막강한 명분 의식만이 중국의 특성도 아니고, 막강한 실리 의식만 중국의 특성이 아니다. 이것들이 얽혀 있는 게 중국적이다. 얽혀 있으므로 명쾌하게 실마리를 풀 수 없고, 실마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탄식이 나온다.
어쨌든 주희가 지적하는 대로 인순의 교훈이 『노자』만의 것은 아니다. 또 유가와 『노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관자』에도 있다. "그 응하는 것은 억지로 만들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움직이는 것은 억지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심술상」)." 『관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씨춘추』에도 있다. "천하를 취하려고 하면 천하를 취할 수 없으니 취하려면 몸이 먼저 천하에 의해 취함을 받아야 합니다(「계춘기·선기」)." "옛날의 왕들은 스스로 하는 것은 적었고, 따르는 것〔因〕은 많았다. 따르는 것은 제왕의 술법이고, 스스로 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다. 스스로 하면 번거롭고, 따르면 고요하다(「심분람·임수」)." 이런 문장만이 아니다. 더 많이 있다.
무릇 천하는 신명스러운 그릇이니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하는 자는 그르칠 것이고, 잡으려는 자는 잃을 것이다
夫天下神器也, 非可爲者也. 爲者敗之, 執者失之
신기(神器)는 신물로도 옮길 수도 있고(하상공), 지대한 그릇으로 옮길 수도 있으며(오징), 그밖에도 다른 여러 표현이 가능하다. 천하가 한 손에 버럭 움켜쥘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묘사라면 어느 것도 좋다. 물론 지나친 확대 해석은 곤란하다. 신명스러운 그릇은 육희성의 표현이다.
"위한다"든지 "잡는다"는 것의 목적어는 천하다. 이설도 있지만 이렇게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 문장은 왜 천하를 취하려 할 때 억지로 해서는 안 되는가를 부연 설명한 것이다. 왕필에 따르면 "만물은 자연을 본성으로 삼기 때문에 따를〔因〕 수는 있어도 억지로 할 수는 없고, 통할 수는 있어도 잡을 수는 없다." 사마광은 "억지로 하면 자연을 상하게 되고, 잡으려고 하면 변통에 어긋난다"고 하였는데, 이 말도 좋다.
이 문장은 『회남자』 「원도훈」에도 나오고, 『문자』 「도덕」에도 나온다. 「원도훈」은 이 말을 소개하면서 "천하에 따라서〔因〕 천하를 위한다"는 정치적 교훈을 끌어내고, 「도덕」은 "하나(일)를 잡고 무위하여 천지에 따라서〔因〕 그와 함께 변화한다"는 정치적 교훈을 이끌어낸다. 모두 인순과 순응의 도리를 읽고 있다는 점에서 앞의 설명과 맥을 같이한다.
사물은 혹은 앞서 나가기도 하고 혹은 따르기도 하며, 혹은 뜨겁기도 하고 혹은 차갑기도 하며, 혹은 강하기도 하고 혹은 꺾이기도 하며, 혹은 북돋우기도 하고 혹은 망치기도 한다
物或行或隨, 或熱或吹, 或彊或剉, 或培或墮
갑·을본에서 구할 수 없는 세 글자(吹·或·疆)는 통행본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전후의 정황으로 보아 부혁본에 의거하여 보완한다. 범응원에 따르면 엄준·왕필·부혁·완적본이 모두 이렇게 되어 있다고 한다.
'행(行)'은 여기에서 '앞선다〔先〕'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임희일) "앞서 나간다"는 말로 새긴다. '열(熱)'은 원래 '경(炅)'인데, 현재 중국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말이므로 본문처럼 고친다. '취(吹)'는 숨을 후후 불어서 더운 것을 식히는 것을 의미하며(고형), 그 의미가 확대되어 차갑다는 뜻을 지닌다. 『상이』에서도 이 글자를 차갑다는 뜻으로 보았다. '좌(剉)'는 상하게 하고 꺾는다는 뜻이다(부혁). '배(培)'는 더하는 것, 북돋우는 것이고, '타(墮)'는 떨어뜨리는 것, 망치는 것이다(부혁).
소철에 따르면 이러한 반대되는 성질이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것은 "사물의 자연스러움이고, 시세가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극단으로만 억지로 발전하려고 하면 자연에 어긋나고 결딴이 난다. "천하가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줄만 알면 이것은 추악한 것이고, 모두 선만 알면 이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2)"라는 말 등과 비교해볼 수 있겠다.
이 때문에 성인은 심하고 지나치고 사치한 것을 멀리한다
是以聖人去甚去太去奢
하상공은 여기에서 "심한 것"은 주로 성색(聲色)에 관한 것이고, "지나친 것"은 궁실과 누대에 관한 것이며, "사치한 것"은 음식과 복식에 관한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 해설은 정확하지 않다. 『한비자』에 보면 이와 비슷한 말이 나오는데 하상공의 해설과 같지 않다.
하늘에도 대명(大名)이 있고, 사람에게도 대명이 있다. 향기롭고 맛난 음식과 좋은 술, 기름진 고기는 입에는 즐겁지만 몸을 병들게 하고, 고운 피부와 하얀 이의 여인은 정에는 기쁘지만 정기를 해친다. 그러므로 심하고〔甚〕 지나친 것〔泰〕을 멀리해야 몸에 해로움이 없다. 권력을 드러내지 않고 소박하게 무위로 임한다. 일은 사방(신하)에 있고, 요체는 중앙(임금)에 있으니 성인이 요체를 잡으면 사방이 와서 조아린다(「양권」).
계손(季孫)은 선비를 좋아하였고 언제나 몸을 단정하게 하여 거처에서도 의복이 항상 조정에서와 같았다. 그렇지만 계손은 가끔씩은 게을러져 단정치 못함이 있었으니 언제나 그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문객들은 그럴 때마다 자신들을 싫어한다고 생각하여 서로 원망하였고, 마침내 계손을 죽여버렸다. 그러므로 군자는 지나치고〔泰〕 심한 것〔甚〕을 멀리한다(「외저설좌하」).
앞에서는 "심하고 지나친" 것만을 이야기했는데 그 사례로 든 것이 성색·음식이며, 뒤의 고사에서 "지나치고 심한 것"은 지나친 취향을 가리키므로 하상공의 설명대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임희일은 이 세 가지가 사실은 한 가지라고 하면서 그 불가함을 강조하기 위해 『노자』가 자주 그렇게 하듯이 거듭 얘기한 것에 불과한데 사람들이 다른 뜻을 찾으려고 하면서 오독을 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 말이 옳다고 본다. 오징이 말한 대로 "심하고 지나치고 사치스러운 것"은 모두 극성한 때를 가리킨다.
결국 극성하면 반드시 쇠망하며,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추락할 때를 대비하여 "감히 천하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67)"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노자』는 "재앙에는 복이 기대고 있고, 복에는 재앙이 엎드리고 있다(58)"고도 하였다. 아마도 이런 교훈은 "끝까지 올라간 용에는 후회가 있다(「건괘」)"는 『주역』의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다. 천하를 억지로 취하려는 것과 극성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은 모두 자연에 반하는 행동이므로 성인이 취하지 않는다는 게 이 글(29)에서 『노자』가 말하는 핵심 교훈이다.
오징은 이 문장과 관련하여 소옹(邵雍)의 한마디를 소개한다. "술을 마실 때는 살짝 취하게 할 뿐이지 명정(酩酊)에 이르도록 해서는 안 되고, 꽃을 볼 때는 반만 핀 것에 이를 뿐이지 활짝 필 때까지 가서는 안 된다."
향기롭고 맛난 음식과 좋은 술, 기름진 고기는
입에는 즐겁지만 몸을 병들게 하고
고운 피부와 하얀 이의 여인은
정에는 기쁘지만 정기를 해친다
그러므로 심하고 지나친 것을 멀리해야
몸에 해로움이 없다
―『한비자』 「양권」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2003. 6. 30., 김홍경)